지금 당신의 인생엔 어떤 예수가 계십니까? - 첫 번째 이야기, 시몬과 예수의 만남
김건주 지음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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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가까이 하며 읽고 묵상하곤 한다. 더 나아가 성경공부에도 많은 열의를 보이며 참여하곤 한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의 삶에 변화가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앎을 위한 수단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성경은 앎을 위한 이야기가 아닌 삶을 위한 이야기임을 강조한다.

 

물론 저자가 이 책, 『지금 당신의 인생엔 어떤 예수가 계십니까?』를 통해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제1장을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이란 제목으로 시작하며, 이처럼 성경은 삶을 위한 이야기임을 전제하며 본격적인 이야기로 돌입한다. 그렇다. 성경은 내 지적 욕구를 채워주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성경은 내 삶의 변화를 목적으로 한다.

 

아울러 저자는 “현재의 우리와 성경 속 이야기가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면 읽는 우리를 바꾸어야지 성경 속 이야기를 우리의 필요에 따라 이런저런 모양으로 편집해서는 안 된다.(50쪽)”고 말한다. 그렇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필요에 따라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를 읽고, 우리 삶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내 필요와 다를지라도 성경이 주시는 그 말씀이 내 삶에 도전을 주고, 내 필요를 바꾸며, 내 삶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저자는 건강한 견해를 가지고 성경을 접근한다. 그리고 이렇게 건강한 시선으로 이 책에서 다루는 본문은 바로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만남의 장면이다. 밤새 수고하며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이상한 날, 베드로가 실패를 철저하게 경험한 그 날, 예수님은 베드로의 빈 배에 오르신다. 그리고 이 만남은 베드로의 인생에 있어 전환점이 되어 베드로는 이제 어부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투신하는 자가 된다. 바로 이 사건을 통해 저자는 우리에게 때론 위로를 주기도 하며, 때론 신앙을 향한 도전과 결단을 촉구한다.

 

저자는 말한다. 예수님은 왜 굳이 베드로가 실패한 그 날, 절망으로 가득한 빈 배의 순간 찾아오셨을까? 굳이 빈 배여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까? 빈 배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 만약 빈 배가 아니었다면, 시몬은 예수님을 그 배에 오르도록 허락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설령 예수님이 오르셔서 무리들을 향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에 시몬은 집중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 왜냐하면, 잡은 고기를 손질하는 일에 집중해야 하니까. 이처럼 시몬의 실패, 시몬의 절망이 도리어 시몬의 인생 가운데 가장 소중한 만남을 갖게 한다. 빈 배여야 예수님이 그 배에 오를 수 있고, 빈 배여야 예수님이 그 배를 채울 수 있다. 이제 이 만남을 통해, 시몬의 절망의 아침은 새로운 희망을 품는 아침이 된다. 물론, 이는 예수님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삶이 빈 배 인생처럼 여겨질 때, 한없는 절망으로 가득한 순간 예수님은 우릴 찾아오시고, 우리 빈 배에 오르신다. 그리고 그 빈 배를 채우시며, 우리에게 새로운 인생,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신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절망의 아침이 희망의 아침으로 변하며, 빈 배 인생이 가득 찬 인생으로 변하는 축복이 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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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똥말 바우솔 작은 어린이 19
서석영 지음, 허구 그림 / 바우솔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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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화, 『위대한 똥말』은 실제 존재하는 경주마 차밍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동화랍니다. 차밍걸은 경주마로서 101번이나 경기에 출전했지만, 한 번도 우승한 적이 없는 말이랍니다. 그래서 101전 101패라는 썩 명예롭지 못한 전적을 갖고 있죠. 하지만, 그럼에도 차밍걸은 의외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말이랍니다. 왜냐하면, 그 근성을 사람들이 높이 평가해주고 있거든요.

 

흔히 경주마들은 한번 출전하면, 2주 휴식에 2주 훈련, 그래서 4주후에나 다시 경기에 출전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차밍걸은 1주 휴식에 1주 훈련으로 경기에 출전하곤 했다고 하네요. 그만큼 근성이 있는 말이라는 얘기죠.

 

이렇게 근성을 가지고, 비록 일등은 하지 못했을지라도 언제나 최선을 다해 달렸던 차밍걸은 101번째 경기를 끝으로 은퇴하였답니다.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하였기에 ‘똥말’이란 썩 좋지 못한 별명을 받게 되었지만, 그 앞에 ‘위대한’이란 수식어가 붙네요. 101전 101패의 전무후무한 나쁜 성적을 가지고 있지만, 언제나 최선을 다한 이 말은 ‘위대한 똥말’이라는 멋진 별명을 갖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위대한 똥말’의 도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승용마로서 장애물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생(馬生?)을 시작했다고 하네요.

 

바로 이런 멋진 도전을 보여주는 ‘위대한 똥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동화는 무엇보다도 일등이 아니라도 아름답고 멋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동화랍니다. 언제나 일등만 대접받는 사회는 아름다운 사회가 아니랍니다. 비록 꼴등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대접받는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죠.

 

우린 흔히 최고가 되면 모든 것을 용서받는 분위기인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인정받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다보면 언젠가는 좋은 결과도 얻게 될 거랍니다. 보세요. 어느 경주마가 동화의 모델이 되었나요? 비록 최고의 자리에 서보진 못했다 할지라도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차밍걸의 모습은 이렇게 멋진 동화로도 나와 많은 아이들에게 읽혀지게 되었답니다.

 

언제나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중요하죠. 그리고 ‘위대한 똥말’처럼 비록 최고는 되지 못했다 할지라도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에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위로받기도 하고, 힘을 얻기도 한답니다.

 

꼴찌의 도전이 참 아름다운 동화랍니다. 이 아름다운 도전이 삶 속에서 실패를 경험하는 이들에게 많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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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콘크리트
마치다 요우 글.그림 / 조은세상(북두)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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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콘크리트』는 동명의 「밤과 콘크리트」, 「여름방학의 마을」, 「푸른 사이다」,「발포주」, 이렇게 4편의 단편만화로 이루어진 만화집이다.

 

먼저, 「밤과 콘크리트」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우연히 건물의 소리를 듣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이 사람은 건물의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집안에 수도가 켜있는지도 듣는다. 그런 그가 주인공에 그 사실을 말해주며, 건물 역시 잠을 잔다고 이야기해준다. 오전 3시부터 동틀 때까지는 건물도 잠을 잔단다. 이 이야기를 들은 주인공은 그 뒤로 잠을 자게 된다.

 

작가는 과연 무엇을 말하려하는 걸까? 건물도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려는 걸까? 명확하진 않다. 하지만 어쩌면 작가는 그처럼 모호한 묘사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의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난 이 주인공의 직업이 건축가임을 해석의 키로 이해해본다. 건축가로서 콘크리트는 단지 자신의 작업의 도구, 그저 사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의 직업 건축가의 작업은 과연 무엇인가? 여전히 콘크리트, 사물, 죽어 있는 대상에 불과한 것인가? 하지만, 건물이 하나의 생명을 가진 존재로 말을 하고, 잠을 자게 됨을 알게 되었을 때, 주인공의 삶, 건축가로서의 삶은 생명을 창조하는 하나의 삶이 된다.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만든 작품들은 그저 죽어 있는 공간이 아닌, 생명력을 담지 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함이 그를 잠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들의 삶은 어떤지 돌아본다. 과연 세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죽어버린 사물들만을 계속하여 늘어놓고 있는지 말이다.

 

두 번째 이야기, 「여름방학의 마을」은 대학생인 주인공이 마을 언덕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할아버지는 66년 전 다른 세상으로 사라져버린 친구를 찾아 헤맨 할아버지다. 이 할아버지는 이제 곧 그 친구를 만날 수 있으리라 말한다. 하지만, 커다란 반전이 있었으니, 그 할아버지가 66년간 친구를 찾아 다른 세계로 찾아 온 그곳이 바로 여름방학의 마을이었던 것. 이곳은 현실의 세상이 아니다. 가상의 세상만도 아니다. 차원이 다른 세상이다. 그리고 이곳은 바로 자신만의 <돔>이다. 즉 자신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공간, 작은 공간이었던 것.

 

다시 말해, 주인공은 이미 그곳, 자신만의 <돔>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바로 젊음과 한가로움이 있던 대학시절 여름방학에 찾아갔던 그 마을이다. 만약 현실의 세상으로 가지 않는다면, 이곳 “여름방학의 마을” 그곳에서만 살아가는 것이다. 66년간 친구를 찾아 헤맨 할아버지는 바로 그 <돔> 속으로 친구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친구는 이미 이 공간에 만족하며, 작은 집, 그만의 <돔> 속에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도 이러한 나만의 <돔>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될까? 그곳, 아무런 걱정도 없이 가장 좋은 시간을 누리는 그곳에서 살아가게 될까? 아님, 아픔도 한숨도 눈물도 힘겨운 삶이지만, 현실의 공간을 선택하게 될까? 아마도 환상적인 그 공간, 나만의 <돔>에서 살아감을 선택하지 않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곳 자신만의 <돔>이 천국과 같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은 진짜 천국이 아닌 가짜다. 그저 그렇게 환상 속에서 살아가다 죽음을 맞는 것이 행복일까?

 

비록 때론 눈물과 한숨이 있지만, 또 한 편으로는 행복과 즐거움도 있는 곳, 때론 아픔과 힘겨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또 한편으로는 힘겨움의 보람을 누릴 수 있는 곳, 이 삶의 공간이야말로 더 생동감 있고, 역동적이지 않을까? 바로 이곳이 우리가 선택해야 할 공간이 아닐까?

 

세 번째 이야기, 「푸른 사이다」 역시 꿈과 환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1학년인 주인공 남자아이는 언제나 “사마 씨”라는 공간을 만나고,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바로 그 “사마 씨”는 돌아가신 아빠가 주셨던 그림책, “푸른 사이다”라는 책 속에 나오는 공간이기도 하다. 어떻게 이 아이는 그림책 속의 공간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일까? 정신 이상일까? 아니다. 그건 바로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한 아저씨로 인해서다. 이 아저씨는 날마다 아파트 옥상에 앉아 있는 아저씨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 아저씨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환상의 세계를 실제로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경험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는 그 능력으로 이 꼬마 아이에게 가장 그리워하는 아빠와 연관 있는 그림책 속의 공간을 보여주곤 했던 것이다.

 

비록 저자가 이처럼 환상의 공간에 관심이 많지만, 그 안에 이러한 따스함이 녹아 있다. 우리에게 “사마 씨”는 어디인가? 그리고 누구인가? 오늘 내가 누군가에게 이러한 공간이 되어준다면 어떨까?

 

마지막, 가장 짧은 이야기, 「발포주」는 예전 19살 나이에 친구와 함께 공원에서 맥주를 마시며, 꿈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 시절, 꿈을 향해 나아가는 친구의 모습에 부러움을 느꼈지만, 어느덧 그 꿈을 잃고 현실에 안주하여 살아가는 친구의 모습을 보여주는 짧은 이야기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은 이렇게 마치고 있다.

“그래도 친구의 그 말은 그 시절의 진심이었을 거고, 그 때 내 마음 역시 나의 진심이었다.”

 

그래, 우리가 혹 꿈꾸던 그 모습, 붙잡고 살아가던 그 꿈을 이루진 못했다할지라도, 그렇다고 하여, 그 젊음의 시절 꿈꾸던 이상이 거짓은 아니다. 비록 이루지 못한 꿈이라도 당시에는 진심이었다. 그런 진심 가득한 꿈을 꾸었음이 어쩌면 행복 아니었을까? 더 나아가 욕심을 부린다면, 그 진심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다시 솟아나고, 다시 그 꿈을 꿔본다면 어떨까? 아직 늦은 것은 아니니 말이다. 오늘이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 가운데 가장 젊은 시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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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이야기
이사생 지음 / 해드림출판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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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 같은 이야기』,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굉장히 궁금했다. 과연 이 책은 어떤 책일까? 무엇을 말하는 책일까? 표지에 “제1치료서”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그렇다면 과연 치료에 관한 책일까? 그렇다. 굳이 분류한다면 정신 치료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말할 수 있다(사실 자신 없다).

 

표지에 이런 소개가 있다. “하늘이 다르다! <하늘>은 눈앞에 아니라, 눈 뒤에 있다. <하늘>은 하나가 아니다, 세 개다.” 과연 이것이 무슨 말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책장을 펼쳐본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이후에도 여전히 궁금하다. 과연 무엇을 말하는 책일까?

 

겉표지를 펼치니, 그곳에는 독자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항상 건강, 항상 감사”라는 문구와 함께 사인 해 주신 글이 있었다. 독자의 건강까지 염려해주는 저자의 따스한 마음이 느껴져 마음이 푸근해 졌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이후에도 저자의 글을 이해하지 못함에 미안한 마음뿐이다.

 

130쪽의 짧은 분량의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왜냐하면 이 책은 친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의 글 전개 방식이 상당히 추상적이고 주관적이며 비약적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금쪽같은 이야기”는 한 마디로 <외방>에 대한 이야기이다. <외방>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순 없다. 단지 세상과는 다른 곳인 듯싶다. 다른 표현으로는 <시공외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저자는 <외방>은 초 인문의학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말 사전만으로는 그 뜻을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어쩌면 그렇기에 독자인 나로서는 저자의 “금쪽같은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독자인 나는 여전히 세상에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외방>은 어떤 파라다이스와 같은 곳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이곳 <외방>에서 중요한 개념은 <하늘>, <사랑>, 그리고 <정신>이다. 물론, 명확하게 이것들이 어떻게 작용하며, 어떤 개념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랑> 역시 어떤 인격체처럼 묘사되고 있는데, 잘 모르겠다. 저자의 정신세계에 이르지 못하는 독자의 어리석음 탓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독자의 어리석음 탓뿐일까? 알 수 없다. 단지 독자는 여전히 시공계에 속한 자이기에 어려울 따름이다.

 

저자는 또한 그의 글에서 이런 말도 한다. “외방인이 아니라면, 저울의 소리에 숨 막히고, 울화통이 치밀지도 모른다.”(38쪽) 그렇다. 난 외방인이 아니다. 그렇기에 “금쪽같은 이야기”가 단지 숨 막히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저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다. 이 모든 잘못은 저자의 “금쪽같은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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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별 두바퀴 고학년 책읽기
원유순 지음, 백대승 그림 / 파란자전거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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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별』은 성장동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주제는 대단히 무겁다. 왜냐하면, 주인공인 림혁의 탈북소년으로서 겪게 되는 안타까운 사연들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국이 자신들의 삶을 품어주지 못하였기에 또 다른 조국을 찾아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 이들이 새로운 조국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하여 또 다른 새 삶의 터전을 찾아 떠돌게 되는 그런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혁과 그의 엄마, 그리고 동생 현지는 함께 신분을 세탁하여 영국으로 입국하게 된다. 그곳에서 난민의 신분을 인정받아 살아가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난민으로서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 삶이다. 처음엔 난민으로 인정받고, 어머니는 과부수당을 받게 됨으로 이제 정착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희망을 품었지만, 조금 더 강화되어진 재심사를 앞두고 림혁의 가정은 또 다시 유랑하는 신세가 된다. 그래서 제목이 『떠돌이별』이다.

 

또 하나의 조국인 남한으로 목숨을 건 탈출을 했던 그들이 다시 난민의 신세를 자처하며 영국으로 가게 된 이유를 혁의 엄마는 이렇게 설명한다. “피를 나눈 내 형제라구 생각했던 동포들한테 당하믄 그만큼 배신감이 크더란 말이다. 차라리 생판 다르게 생긴 민족한테 설움 받는기 더 낫다 싶어서 이기로 온 기지.”(106쪽)

 

피를 나눈 같은 민족에게, 같은 형제들에게 서러움을 받는 것보다는 생판 모르는 다른 민족에게 서러움을 받는 것을 택한 이들의 선택, 그리고 그러한 선택으로 내몬 상황이 참 가슴 아프다. 얼마나 새로운 조국, 또 하나의 조국에서 살아감이 힘겨웠으면 난민의 삶을 자청할까? 난민의 삶이 이곳 남한에서의 삶보다 낫다는 의미 아닌가? 누가 이들을 그렇게 몰아세웠을까? 그건 다름아닌 바로 우리들이라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우리는 동포라는 말을 하곤 한다. 동포는 말 그대로 같은 자궁에서 태어난 형제자매를 가리키는 말이다. 남북한은 한 동포란 말은 이런 의미다. 우린 같은 엄마에게서 태어난 한 형제자매라는 고백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우린 탈북자들을 ‘새터민’이란 단어로 표현하곤 한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온 그들, 하지만, 우린 그들을 또 다시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새터를 찾도록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림혁은 탈북민에서 새터민으로, 다시 난민으로, 그리곤 유랑자로 그 신세가 바뀌게 된다. 과연 떠돌이별들인 그네들의 인생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공간은 없을까?

 

동화 속에서 림혁은 다리를 전다. 이는 중국인 아빠(두 번째 아빠)의 폭력으로 인한 결과다. 삶이 불안할 때,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이들은 어린이들과 같은 약자들이다. 동화 속의 림혁도, 언제나 자신만만하며 까칠한 영심도, 정서가 불안한 준이도, 한국으로 돌아가기만을 원하는 동생 현지(현지는 엄마의 세 번째 남편인 남한 아빠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동생이다)도 모두 이러한 피해자들다. 그렇기에 이런 난민들, 탈북민들, 고통당하는 아이들을 돌보는 그 돌봄은 사랑의 실천만이 아닌, 정의의 구현이기도 하다.

 

동화 속에서는 영국이민교회인 할렐루야교회의 사모와 성도들을 통해, 이런 사랑의 실천이 행해진다. 하지만, 그 역시 대단히 안타까운 모습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한인 이민자들로서 탈북난민들과 자신들은 같지 않다는 생각으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사실 같은 신세가 아닌 것은 상관없다. 어차피 도움이란 보다 더 나은 이들이 약한 이들을 향해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도움의 손길을 펼치되, 이를 사랑의 실천이 아닌, 사랑의 적선으로 이해한다. 여전히 자신들은 그네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갖는다. 이는 온전한 사랑의 실천이 아니다. 사랑을 실천할 때는 상대의 입장, 도움을 받는 이들의 입장을 공감하며, 고려해 가며 펼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도리어 도움을 주면서도, 도움 받는 이들의 영혼에 상처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작가는 이런 모습도 우리가 보길 원했을 것이다. 우리의 사랑의 실천이 사실은 적선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무겁게 하고 아프게 하는 동화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읽고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주제를 다루고 있다. 과연 탈북민들, 그들에게 조국은 어디인가? 우리는 그네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이며, 우리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인가? ‘새터민’이란 단어처럼, 이 땅이 그네들의 새 터, 새 땅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여전히 이곳에서 살아감에도 ‘남의 땅’에서 살아가는 아픔을 이제는 더 이상 우리 반쪽들이 겪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의 더 많은 관심과 실천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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