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터보니 인문학 책도 좀 읽는 것 같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가운데 가끔은 위트 있는 농담도 할 줄 아는 그런대로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 우리는 정확한 지칭을 피하면서 연구소 꼰대들에 관한 시니컬한 농담을 나누었다. - P9
그에게 딱히 바라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연구소같이 삭막한 곳에서는 작은 우정같은 것도 꽤나 소중했으므로 그와의 마주침은 내게 의미 있는일로 여겨졌다. - P10
우리는 별 의미 없지만 묘하게 평등한 분위기로 잡담을 나누었다. 묘하다고 한 이유는 연구소의 계급 체계가 매우 철저했기 때문이다. 나는 계약직 행정사무 보조였고, 으레 내 몫으로 남곤 하는 복사기와 물티슈와 커피 필터를 앞에 두고 종종 불가촉천민이된다는 건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겼다. - P10
그는 적당한 무관심과 호의로 나를 대했다. - P10
나는 왜인지 매번 그에게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운 기분을 느꼈고, 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그건 뭐랄까. 아무 뜻도 없는 말이지만 어쨌거나 너무 사적인 감정이었고, 일단 튀어나오기만 하면 종잡을수 없는 고백 비슷한 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아무튼 오다가다 만나는 사이에서 불쑥 꺼내 보이기엔 선을 넘는 주제였다. - P11
너무 부드러운 나머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의 진심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겸양이 묻은 언짢음. 예의바르지만 단호한 거부. 나는 못 들은 척 넘겼지만 어쩐지 거절당한 기분으로, 어쩐지 도둑맞은 감정의 주인으로서, 그와 나의 신분 차이를 다시금 환기했다. 익숙한 일이었다. - P11
나를 스스럼없이 대하던 것도 나이든 여자, 아예 이성의 범주에 들지 않는 상대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쾌하진 않지만 뭔가 모든 것을 납득시키는 설명이었다. - P14
한때 소유했던 드넓은 영지를 바라보는 몰락한 귀족처럼 언덕길과 그너머를 훑어보았다. 인생에 별로 기대하는 바가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의 것보다는 단명한 듯한 나의 젊음을 잠시 애도했다. 나의 우울과 상관없이 봄날은 아름답기만 했다. 불과 며칠 만에 계절이 변한 것이다. - P15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사랑이란 어떤 시기로의 지속적인 퇴행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 P22
장 피에르는 완벽한 삼십칠세의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장 피에르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 P23
장 피에르 같은 사람은 모든 걸다 소유하고서도 불행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야. 저런 우울감은 특권층만 가질 수 있는 거라고. 그게 자기 매력이라는 것조차 의식할 필요가 없어. - P23
그는 소년 같은 남자였다. 자신을 소년으로 생각하는 부류의 남자였다. 그리고 우리는 더 자랄 것도 없다는 듯이 굴고 싶어하는 여자애들이었다. - P32
그즈음 나는 연수가 장 피에르를 만나고 오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다르를 싫어하면서 왜 장 피에르를 만나고 다니는지, 나는연수를 이해할 수 없었고, 없었으나, 또 동시에 완벽히 이해했다. - P41
삶의결정적 순간들과 돌이킬 수 없는 잘못들도 아직은 일어나기 한참전인 그때. - P45
한때 그가 대항했던 권위는 그 자신이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커스터마이즈되어 찬란히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 P50
명심하라. 반드시, 네가 싫어하던 그 무엇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 P50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각자의굴욕을 꿋꿋이 견디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 P51
우리는 동시에 키득거렸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어떤 시간은 때에 따라서 수백 년 전의 일처럼도, 혹은 불과 몇 달 전의 일처럼도 느껴졌다. - P53
그중 가장 인상적으로 남은 것은 우연히 집어든 책들에서 어떤문장을 발견했을 때다. 아주 평범한 얼굴로 페이지 속에 숨어 있던 그 글자들이 어떤 단서를 암시하며 내게 다가왔을 때 느꼈던그 미세한 전율, 어렴풋한 존재감으로만 감지되던 미지의 의미망에 접속하던 그 찬란한 순간. 어쩌면 무심코 스쳐지나가버렸을지도 모르는 백 퍼센트의 무엇. 그런 우연들에 주저하지 않고 따라나선 것을 지금도 기쁘게 생각한다. - P61
어느 날 두 사람은 학생회관 옥상에 앉아 부당한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하다 그 미움을 사랑으로 바꿔 특별한 목적 없이 세상을 향해 온정을 베푸는 일을 도모했다. - P91
그녀는사람에게 다가가 마음을 주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먼저 주고, 준만큼 되돌려받지 못해도 다시 자기의 것을 주었다. 결국 그건 자기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했다. 멀리, 크게 보면 그렇다고. 그런 말을 할 때 체의 얼굴은 느긋하면서도 단단해 보였다. 앙헬은 체보다 여러 가지 일에 능숙했지만 사람을 대하는 체의 태도에는자신이 다 헤아릴 수 없는 크고 높은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 P94
봉사고 명예고 공짜로 부려먹을 생각 하지말고 제대로 돈을 지불해요. 앙헬은 가끔 체가 아무에게나 마음을 주고 돈을 헤프게 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체의 그말을 떠올렸다. - P95
믿음이란 상대가 자신을 해치거나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안심의 또다른 표현이라고 앙헬은 생각했다. - P99
다만 어떤 베품은 인과적인 타당성을 설명할 수 없듯 어떤 거부도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 P107
이유를 묻고 그 답을 찾으려는 간절함만큼이나 답을 모르고 사는 힘도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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