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 - 우리 시대의 몇 가지 우스꽝스러움과 독재에 대한 고찰
앙드레 콩트 스퐁빌 지음, 이현웅 옮김 / 생각의나무 / 2010년 8월
품절


윤리와 정치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이고, 그 둘은 모두 필요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그것들이 각각 갖는 본질적인 것들을 위험에 빠뜨리며 그 두 가지를 혼동하고 있다. 우리는 그 두 가지가 필요하지만, 그 둘의 차이도 필요하다! 우리는 정치로 환원되지 않는 윤리가 필요하고,그리고 윤리로 환원되지 않는 정치가 필요하다. 따라서 내가 윤리의 복귀를 고찰하기 위해 내놓는 이 첫 번째 설명은 한 세대에서 다른 한 세대로, 즉 정치가 가장 우선인 세대(68세대)에서 윤리가 가장 우선인 세대('윤리의 세대', 또한, 역설적이긴 하지만, '미테랑세대')로 이행한 과정에 대한 실증적,객관적 관찰로도 바꾸어 묘사할 수 있다.-29쪽

그런데 이 이행은 근본적으로 특히 정치의 영역에서 중대한 위기가 생겨난다는 징후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공동운명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이것이 정치의 진정한 기능이다-하려는 감정을 차츰 잃어갈수록, 그들은 윤리적 가치들의 영향력 아래 폐쇄된 채 머무르게 된다. 따라서 내게 이 첫 번째 설명은 근본적으로 중의성을 띠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우리는 젊은이들이 윤리적 혹은 인도주의적 실천으로 복귀한다는 사실에 물론 기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런 복귀의 과정이 고유하게 정치적인 모든 영역을 희생하며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30쪽

내가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는 가장 위협하는 건 내가 '보편화된 무관심'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 즉, 무엇에 대해서건 연대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우리의 시민들이 자신들의 작은(51) 사적 영역만을 무한정 개발할 수밖에 없을 만큼, 사회적 연결이 순전하고 명백하게 해체된 현상-사회학자들이 개인주의의 승리라고 부르는 현상, 혹은 우리 프랑스의 사회학자들이 익숙해진 영어식 프랑스어로 표현한다면, 커쿠닝cocooning이다-51쪽

(각주 22) 나는 여기서 보다 빠른 시간 안에 중요한 사항을 언급하기 위해, 일종의 "임시적 칸트주의"에 의지했을 따름이다.(중략)칸트는 윤리에 관하여, 적어도 현상학적으로는 옳다. 그는 윤리를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우리가 그것을 실천하거나,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습 그대로, 그러니까 주관적으로 그린다.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각자는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뤄지는 행위(예를 들어 보상을 바라며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위)는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고유하게 윤리적인 가치를 상실한다고 느낀다. 우리가 공리주의를 끝까지 실천할 수 없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누구도 윤리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효용성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반박할 수 없다. 그러나 윤리는 이러한 효용성으로 환원되지 않을 때만 고유하게 윤리적인 것이 된다.-61쪽

신문이나 세미나들에서 일상적으로 기업윤리라고 말하는 것이 이런 상인의 행위를 실천하는 기술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행위가 보통 윤리의 요구사항에 일치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지만,그것은 어떤 윤리적 가치도 갖고 있지 않다.(중략)그런데 윤리가 이윤의 원천이라면, 그 이윤을 창출하는 일에서 윤리가 어떤 역할을 하는 걸까? 이윤을 창출하는 일은 경영의 영역, 마케팅의 영역, 관리의 영역에 속하지, 더 이상 윤리의 영역에는 속하지 않는다.-65쪽

윤리란 우리가 해야 할 일로 간주하는 것 모두를 가리킨다. 달리 말해, 우리가 선험적으로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만이 아니라(이 점에서는 칸트와 대조된다)우리가 모든 보상이나 처벌, 심지어는 모든 바람과 관계없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모두를 가리킨다. 윤리는 한 양심에게 무조건적으로 의미 있거나 강제되는 것(92) 모두를 가리킨다.-92,93쪽

윤리적으로 된다는 것은 자신의 해야 할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윤리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해야 할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94쪽

정치적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된다면,윤리는 정치가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거나, 혹은 정치가 자신의 영혼이나 양심을 달래는 데 사용하는 보조물에 지나지 않는다.-153쪽

기업의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기업 내에 윤리가 존재해야 한다. (중략)나는 조금 전에 "여러분 대신에 시장이 윤리적으로 되기를 기대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또 나는 다음과 같이 덧붙일 것이다. "여러분 대신에 회사가 윤리적으로 되기를 기대하지 말라."-176쪽

이타성과 연대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이타성이 이기주의에 반대되는 것이라면,연대는 사회적 효용성을 위해 지적인 방식으로 이타성을 조정한 것이다. 사람들이 시대에 뒤진 언어로 보이는 '이타성'이라는 표현을 더(183)이상 사용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거의 항상 입에 담고 다니는 말이 '연대'인데(그런데 오늘날에 정치적으로는 이 말이 적합하다),우리는 이 말을 너무 자주 사용한 나머지 두 단어의 개념을 혼동해서('윤리의 세대'와 비슷하게)'연대'라는 말을 '다른 사람들을 향해 갖는 선의의 감정'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연대'라는 말의 내용,기능성,효과를 무시한다. -183,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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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접속했는데, 아는 후배가 기사를 링크해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부산저축은행 사태 여파로, '인디고잉' 출간에 차질이 생긴 모양이다.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나중에 전화 걸어서 한 번 알아봐야겠다. 

이하는 기사 내용이다.  (아래는 기사 주소 링크)

http://www.kookje.co.kr/news2006/asp/center.asp?gbn=v&code=0300&key=20110323.22010205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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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저축銀 사태, 청소년 인문학 잡지 '인디고잉'에도 불똥
영업정지 여파 지원금 끊겨… 은행대출 받아 5호 발간키로
국내유일 유스북페어도 영향, 서원측 "향토기업 후원 절실"



부산상호저축은행의 영업정지 여파로 지역의 한 인문학 서점이 난감한 처지에 놓였다. 상호저축은행으로부터 전폭적인 재정지원을 받았던 국제 인문학 잡지 발행 사업이 타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22일 부산 수영구 남천동의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인 '인디고 서원'. 이달 말 발간되는 청소년 인문학 잡지 '인디고잉국제판 5호'의 준비가 한창이다. 지난해 4월 창간한 인디고잉국제판은 인문학 전반에서 시대정신을 고민하는 지식인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만든 영문 계간지다. 부산에서 편집과 제작을 한 잡지는 현재 45개 국가(120개 대학부설 연구소, 140개 국공립 및 사립 도서관 등)에 배부될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잡지 발행은 부산상호저축은행이 지난해 1억 원의 예산을 지원하면서 가능했는데 최근 영업정지 사태로 인해 지원금을 더이상 받을 수 없게 됐다. 일단 인디고 서원 측은 은행 대출을 받아서라도 잡지 발간을 계속하겠다는 방침이다. 박용준 팀장은 "지난해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고 영미권 도서유통회사와도 배급 계약을 체결하는 등의 성과를 거둔만큼 재정문제를 이유로 그만둘 수 없다"면서 "이번 5호 발간을 위해 은행 대출을 받았지만 올해 총 4회 발간을 하기 위해선 기업의 정기후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부산상호저축은행은 또 인디고 서원에서 격년제로 개최하는 국내 유일의 청소년 국제 인문학 행사인 '인디고 유스 북페어'도 지난 2008년 첫 행사부터 지난해 2회 행사까지 지원을 해왔다. 내년 개최 예정인 제3회 인디고 유스 북페어를 열기 위해서라에도 기업 후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허아람 인디고 서원 대표는 "지금까지 인디고 서원이 거둔 인문학적 성과를 이어가야 할 책임이 있다"며 "인문학적 혜안을 갖고 있는 향토기업이 국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도움을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부산지역에서 시작된 청소년 인문학 운동이 세계로 뻗어나가기 위해 지역 기업의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홍주 기자 hjeyes@kookje.co.kr

                                                                                                                                       입력: 2011.03.22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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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성호 옮김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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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정말로 믿지는' 않는다고 그저 상상한다 - 이 상상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 이데올로기를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다고 상상하는 것보다 적게 믿는 것이 아니라 훨씬 많이 믿고 있다.-10쪽

'공산주의'의 이념이 오늘날 여전히 적실한가. 그것은 여전히 분석과 정치적 실천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는가?라는 자명한 물음을 묻는 대신 정반대의 물음, 즉 '오늘날 우리의 곤경이 공산주의 이념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보이는가'를 물어야 한다. 여기에 옛것과 새것 사이의 변증법이 존재한다.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 새 용어들('포스트모던 사회' '위험사회' '정보사회' '포스트산업사회' 등)을 끊임없이 창조해내기를 주장하는 이들이야말로 실제로 새로운(16) 것의 윤곽을 놓치고 있다. 새것의 진정한 새로움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옛것 안에 있는 '영구한' 것의 렌즈를 통해 세계를 분석하는 것이다. -16,17쪽

우리가 왜 위기에 책임이 있는 '월스트리트'쪽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메인스트리트'의 평범한 주태담보 대출자들에게 그 댓가를 치르도록 요구해야 하는가? 이것은 경제학 이론에서 '도덕적 해이'라고 부르는 것 - '어떤 사람의 행동이 유발할 수 있는 여하한 손실에 대해서도 보험이나 법률, 또는 다른 어떤 기관이 그/녀를 보호해줄 것이기 때문에 그/녀가 비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될 위험'으로 정의되는 것으로, 가령 내가 화재보험을 들었다면 나는 화재예방에 덜 신경을 쓰게 될 것이다.-29쪽

그러면 구제금융안은 정말 '사회주의적' 조치, 미국 내 국가사회주의의 탄생에 해당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매우 특이한 형태의 사회주의인바, 그 '사회주의적' 조치의 주요 목적은 빈자가 아닌 부자를, 돈을 빌리는 자들이 아니라 빌려주는 자들을 돕는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자본주의의 구원에 복무할 때 은행씨스템의 '사회화'는 용인된다. (중략) '도덕적 해이'가 자본주의의 구조 자체에 각인되어 있다면? 두가지를 분리시킬 방도가 없다는 말이다.-31쪽

자본주의의 세계적 차원은 오로지 의미-없는-진리의 차원에서만, 즉 세계시장 메커니즘의 '실재(the real)'로서만 정식화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쏘르망의 주장처럼 항상 현실이 불완전하고 항상 사람들이 불가능한 완전함에 대해 몽상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의미에 관한 것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는 지금 자기 역할을 재발병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 기계의 의미없는 작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삶을 보장해야 할 그 사명을 재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55쪽

'지배계급'은 비록 포퓰리스트의 도덕적 의제에 동의하지는 않을지라도 하층계급을 억제하는 수단으로서 '도덕적 전쟁'을 용인하기는 한다. 다시 말해 지배계급은 하층 계급이 경제의 현 상태를 교란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수 있게 한다. -71쪽

(전략)현재의 위기로부터 정말로 헤게모니적인 것으로서 출현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판본은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생태자본주의라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에 자유시장 체제가 과도한 착취로 파국적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빈번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사회적 생산력의 자본주의적 동원은 생태적 목표, 빈곤에 대한 투쟁,그리고 다른 가치 있는 목적들에 봉사하게끔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어떤 새로운 정향의 징후가 포착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72쪽

자본가들은 이윤을 창출하는 기계에 머물러서는 안되는데, 그들의 삶은 더 깊은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호하는 모토는 사회적 책임과 감사가 되었다. 그들은 사회가 자신들의 재능을 펼치고 큰 부를 축적하게 허용함으로써 자신들을 말할 수 없이 잘 대해주었으며, 따라서 사회에 뭔가를 돌려주려고 보통사람들을 돕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한 사람들이다.오직 사회를 배려하는 이런 종류의 접근법만이 사업의 성공만을 가치있게 만든다. -73쪽

전지구적 책임감의 새로운 기풍은 그리하여 자본주의를 공익의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작동하게 만들 수 있다. 자본주의 근본적인 이데올로기적 장치(dispositif)- '도구적 이성', '기술적 착취', '개인주의적 탐욕', 혹은 그밖의 무엇으로 불리든 - 는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조건(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분리되어, 이 자본주의적 관계 자체는 손상되지 않게 놓아둔 채 어떤 새로운, 더욱 '정신적인'관점에 의해 (73) 극복되어야 할(그리고 극복될 수 있는) 하나의 자율적 삶 혹은 '실존적 태도'로 이해된다.-73,74쪽

체제 자체에 내재한 (팽창의)강박은 사적인 심리 성향,개인적 죄의 문제로 변형된다. 그리하여 자본의 자기추진적 순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삶의 궁극적 실재(Real)로서 존속한다-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자초하는 가장 명백한 위험에 대해서조차 맹목이 되도록 만들면서 우리 활동을 통제하는 주체이기에 규정상 통제될 수 없는 어떤 짐승으로서.이는 하나의 거대한 물신적 부정이다- '나는 내가 자초하는 위험을 아주 잘 알고 있고 심지어 궁극적 붕괴의 불가(77)피성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그 붕괴를 조금 더 연기할 수 있고,조금 더 위험을 무릅쓸 수 있고,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이는 자기 자신의 이익에 반하여 투표하는 하층계급의 '비합리성'과 엄밀한 상관관계에 있는 자기맹목화의 '비합리성'이며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힘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다. -77,78쪽

주체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경험은 '나의 내면생활의 풍요로움'에 대한 경험이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 교수 등등으로서)공적 생활에서 떠안고 있는 상징적 결정들과 책임들에 대비되는 나의 '진정한 존재'다. 이에 관한 정신분석학의 첫번째 교훈은 이 '내면생활의 풍요로움'은 근본적으로 가짜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의 막, 혹은 거짓 간격인데 그 기능은 말하자면 체면을 유지하는 것, 나의 진정한 사회적-상징적 정체성을 감지 가능한(나의 상상적 나르시시즘이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비판을 실천하는 방식 중 하나는 그러므로 '내면생활'과 그 '진실한' 감정의 이 위선을 까발리는 전략을 고안해내는 것이다. -83쪽

소비의 차원에서 이 새로운 정신은 소위 '문화적 자본주의'의 정신이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상품의 유용성 때문에, 또는 지위의 상징으로서 상품을 구매하지 않는다. 우리는 상품이 제공하는 경험을 얻기 위해 그것을 구매하며 우리의 삶을 유쾌하고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 그것을 소비한다. -109쪽

오늘날 주도적 이데올로기가 펼치는 경관은 이처럼 물신주의의 두가지 양식으로 분열되어 있다. 그것은 냉소적인 것과 근본주의적인 것으로 두 경우 모두 '합리적'이며 논쟁적인 비판이 통하지 않는다. 근본주의자는 자신의 물신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면서 논증을 무시하는(혹은 적어도 불신하는)반면 냉소주의자는 논증을 수용하는 척하면서 그 상징적 효율성은 무시한다. -140쪽

자본주의의 경우가 그러한데,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자기혁명화를 통해서만, 그 자신의 한계의 끊임없는 극복을 통해서만 자신을 재(252)생산할 수 있다. -252,253쪽

이제 우리는 더이상 "몫이 없는 부분"의 입장에서 질서를 전복하는 게임을 할 수 없는데 이는 그 질서가 이미 자기 자신의 영구전복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완전한 전개와 더불어,끊임없는 역전,위기,재발명을 동반하며 어떤 면에서 '축제화'된 것은 바로 '정상적'삶 자체이며,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예외로 보이는 것은 '안(254)정된 윤리적 입장에서의 자본주의 비판이다.-254,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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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통의 '맛'이든, 고통의 '멋'이든, 둘 다 변태적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스럽지 않은 시간에 고의적으로 혹은 우연하게라도 '고통의  극한상태'를 나를 대상으로 느껴보게 하려는 이 변태같은 짓을 한 번 이상은 시도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손톱을 건조한 공책 종이에 박박 긁어보는 것? 책을 정리하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가온 종이 모서리라는 칼날? 밍밍한 속을 멈출 수 없어 손가락을 입 깊숙이 넣고 마음껏 토하기? 이런 '고통의 순간'을 경험하면, 다시 이 순간을 만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지만, 그 다짐이 만들어 놓은 '잔상'은 오래 가고 또 오래 간다.

꿈은 이 잔상이 실현되는 '곳'이다. 깨어 있음과 고통이 결부되었을 때 나오는 그 인간적인 두려움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두려움. "두렵지 않아", "아니, 두려워"같은 '두려움'을 둘러싼 인간의 표현으로 인하여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시도는 꿈에서는 일단 부차적인 문제다. 꿈을 꾸고, 꿈 속에서 예기치 않은 고통의 순간들이 다가오면 인간은 무방비 상태로 꿈과 맞닥뜨릴 뿐이다. 그리고 깨어나서 '꿈-고통'을  자기 스스로 혹은 타인에게 '이야기'로 풀어보기도 한다. 여기서 '이야기'는 고통을 담아두거나 혹은 고통의 체감을 약하게 하려는 장치일 수 있다. '이야기를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꿈과 대면했던 순간을 '인간이라는 존재'로 지켜냈다는 약간의 위로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 2

 

흔히 꿈은 우리가 살면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는 것, 혹은 우리가 살면서 일어났던 일들 중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것에 대한 '삶 속의 반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꿈이 '고통'과 결부되어 있다면 우리는 꿈의 '위상'에 조용히 혹은 거창하게 감탄하게 된다. 이러한 감탄은 꿈에 대한 신뢰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꿈에 대한 불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혹은 꿈과 현실의 상이함을 습관적으로 들며, 꿈을 현실에 복속시킨다. 현실을 잘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꿈은 현실의 부속체로 작용하는 것이다. "야. 그거 다 너 잘되라고 나온 꿈이야? 알지?" 여기서 꿈은 꿈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한다. 의미는 현실에 부착되도록 조정되고, 꿈은 조용히 물러나야 한다. 그리고 꿈은 꿈이어야 한다는 자리 찾기가 인간을 통해 실행된다. "정말 꿈만 같아"라는 '습관어'들 속에서 알 수 있듯이.

 

#3
 

그러나 그 '꿈만 같은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났을 때. 우리는 '꿈 / 현실'에 놓인 이 ' / ' 라는 경계가 사실은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안전을 추구하기 위해 쌓아 놓았던 막임을 알게 된다. 이 막이 붕괴되는 '현실'을 경험했을 때, '꿈과 현실'의 경계를 잃어 버리는 순간은 혼란스럽고 소란스럽기까지 하다. 우리는 이 혼란과 소란에 대해 정작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자책한다.  그러나 이 자책이 손 쉬운 '애도'와 '연민'으로 바로 직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의 불완전함/불안전함을 시인하면서 그것이 곧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성찰'의 힘은 진부한 듯 하지만 배제할 수 없는 보약이라고 여전히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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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올곧지만 무기력한 

 
<대학의 몰락>은 “이 시대에 적합하고 수용 가능한 대학의 본질과 사명이 무엇인지”(9)를 묻는 책이다. 그리고 그 물음을 위해 저자가 동원하는 것은 역사적 접근이다. 책 속에서 역사적 접근은 대학의 ‘변질’을 고발하는 주요 방식이다. 원래 대학은 이런 모습이었는데, 오늘날의 대학은 이렇게 변하였다는 사고는 ‘대학의 몰락’이라는 제법 묵시록적인 책의 제목을 지탱하는데 필요한 정석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석’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본 책에서 저자는 깔끔한 도식을 만들어낸다. 저자가 책 속 도식에서 강조하는 잣대는 ‘세상과의 비판적인 거리라는 조건’(27)인 듯하다. 오늘날 세상은 자본주의의 논리에 침윤되어 있고, 여기서 대학도 무관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대학이 추구하는 학문적 이상이 시장의 아이템으로 절하되고, 이러한 대학은 현실과의 불화를 더 이상 꾀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는 것. 저자는 시종일관 이 주장을 밀어붙인다.

그러나 저자의 이러한 주장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오늘날 이러한 주장과 그 주장을 위해 쓰이는 저자의 서술 방식이 ‘대학의 위기론’을 진단하는 전략으로서 무기력함을 숨길 수 없었다. 좀 더 나아가자면 이 책은 요즘 횡행하는 ‘~의 인문학’과 같이 ‘인문학’을 ‘생활용 교양’으로 취급하려는 사회적 분위기에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들었다. (조금 맥락에서 벗어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책 뒤에 적힌 네 분의 추천사도 이 책을 ‘정직하게’ 판단하고 쓴 것인가라는 생각까지 했다)


# 2 ‘인상 깊은’ 현실이 아닌 ‘인상만’ 남은 책 속 대학

 

특히 저자가 언급하는 대학 내 현실에 대한 문제점들이 큼직하다보니 그러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언어들도 지나치게 피상적이고 굳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굳은’ 언어는 그 어떤 문제점들이 닥쳐도 주변 상황에 개의치 않은 채 ‘성스러운 비판적 사유’를 전개하겠다는 ‘ 옳은 태도’를 보여주는 데 장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옳은 태도’는 “자본과 시장과 경쟁이라는 이 시대의 대학의 우상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260)는 주장 그 자체의 올곧음만을 도드라지게 하는 데만 그 가치를 다한다고 느껴졌다.

저자는 ‘대학의 기업화’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사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거리(distance)의 힘을 강조하지만, 정작 그 ‘거리의 힘’은 오늘날 대학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부딪히는 ‘대학- 현장’과의 간극을 드러내는 한계로 작용한 듯 보인다. 물론 이것은 대학의 잘못된 현실을 꾸짖는 데 있어 ‘대학의 이상과 목적을 질문하기 위한 사유’라는 실천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책이 ‘대학의 몰락’을 걱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이 처한 생활상, 구체적으로 ‘대학생’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그들과 관계 맺고 있는 사회상에 관련된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인상이 짙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아쉬웠던 점은 2장 ‘대학의 역사에서’와 3장 ‘대학과 철학’을 위해 할애한 저자의 ‘논리적 에너지’가 결국 대학의 현실을 ‘인상 깊게’ 살피는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인상만’ 살피는 데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 3 대학, 조금 더 들어보자

 

저자가 ‘대학의 몰락’을 극복하기 위한 작은 방편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면 그것에 맞는 ‘몰락의 징후’혹은 ‘몰락의 현실’들을 더 듣고 챙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이것은 비단 저자뿐 아니라 근래 ‘20대 담론’과 엮어 ‘대학의 위기’를 논하는 사람들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학점 쌓기? 토익 공부 치중? 경영학의 인기? 취업난? 경쟁? 효율성? (이미 많은 논자들이 제기하였듯이) ‘대학의 위기론’이 하나의 담론적 유형으로 우리 사회에 인식되면서 그러한 위기론을 강조하기 위해 드는 사례 혹은 개념들도 너무나 안이하게 관습적으로 분류, 배치되고 있다. 이러한 분류, 배치를 통해 문제가 되는 것은 ‘대학의 위기는 이 정도 알았으면 되었다’로 섣불리 귀결되어 이후 기계적으로 제시되는 온갖 해결의 언어들이다. 여기서 대학의 위기에 대한 ‘해결어’(특히 ‘20대 담론’과 묶어서)에 대하여 정작 대학을 다니는 사람들이 흥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는 것은 다시 한 번 꼬집어 볼 대목이다.

관심 있는 사람은 알다시피, ‘대학의 위기론’은 ‘20대 담론’과 마찬가지로 말하기 신난 사람들만 더욱 신난 구조가 지속 되고 있는 것 같다. 이를 통해 대학을 감싸고 있는 문제들을 더욱 끌어내지 못함으로써 문제점들을 단순하게 유형화시키고, 그 문제점 안에서만 대학의 몰락과 동시에 대학생의 몰락이란 비난 섞인 비판이 온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인기 있는 대화거리가 되었다.(여기서 인기 있는 이유가 ‘재단하기 쉽다’와 유사한 의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대학의 몰락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학에서 힘겹게 ‘생존’하고 있는 자들의 언어를 더 듣고 모으려는 진심어린 노력이라고 본다. 이 정도면 다 들었지 않았는가,라는 오만함을 버리고 대학 내 현장의 언어를 당사자들이 더 말하게 함으로써, 그 말함의 표출을 ‘분노의 힘’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 인문학은 너무나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넘친다. 정작 ‘말하도록 돕는’ 인문학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저자가 “인문이라는 학문의 언어는 원래 고백과 증언의 언어였다”(51)라는 언급한 대목을 지나칠 수 없었다. 단, 대학의 문제를 논함 가운데 이런 고백과 증언의 언어가 ‘대학의 위기론’을 설파하는 사람들만이 확보한 제한된 권리로만 행사된다면 유감일 것이다. 이는 정작 ‘인문학’의 길이 아니라 ‘인무(人無)-학’의 길로 빠지는 지름길이 아닐까. ‘대학의 몰락’을 걱정하면서도 ‘대학의 몰락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더불어 걱정해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은 이 책을 통해 느낀 유감이자 이 책에서 얻게 된 어떤 교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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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7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7 23: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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