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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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여사의 에도 시대물에 도전하고 있다. 이러저러한 루트로 해서 미야베 월드 제2막의 몇 권을 접할 수가 있었다. 역시 같은 시대를 사는 작가 덕분에 계속해서 출간되는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즐거움이랄까. 때마침 에코인의 오캇피키 모시치 대장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맏물 이야기> 애장본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전편에 해당하는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이하 기이한 이야기로 부르겠다)를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래도 신간이 가진 유혹 때문에 <기이한 이야기>를 마저 다 읽지 못하고 <맏물 이야기>부터 읽게 됐다. 물론 <맏물 이야기>를 다 읽는 대로 <기이한 이야기>도 다 읽을 수가 있었다.

 

<기이한 이야기>는 실제로 에도 시대에 전승되던 <혼조의 일곱 가지 불가사의>를 모티프로 해서 우리의 미미 여사가 쓴 시대물이다. 시대적 배경이 되는 에도 시대 중에서도 도대체 몇 년 정도일까라는 궁금증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따라 다녔는데, 마지막 에피소드인 <꺼지지 않는 사방등>에서 결정적 단서를 얻을 수가 있었다. 에피소드에서 십년 전인 분카 4(1807)에 있었던 에이타이 다리 붕괴사건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해서 19세기 초반이란 추정에 도달할 수 있었다. 미미 여사는 에도 시대 혼조라는 상인들의 공간을 바탕으로 해서, 전승되던 기이한 이야기에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라는 살을 붙여 독자 홀리기에 나선다.

 

궁금했다. 다른 직업군도 많았을 텐데 왜 하필이면 상인들의 이야기일까 하고 말이다. 항간에 떠도는 풍문 같은 이야기(모노가타리)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상인들의 특별한 성정 때문이 아닐까. 아무래도 상인들이 상품을 유통하다 보면 세간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미미 여사의 작품에는 국숫가게, 담뱃가게, 버선가게 같이 보통 사람들이 애용하는 친숙한 장소들이 다수 등장하게 됐다. 그리고 기이한 이야기의 마지막에 등장해서 사건에 마침표를 찍는 역할을 에코인의 오캇피키 모시치 대장에게 맡겨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다. 근간 <맏물 이야기>에서는 진화된 모시치 대장의 활약이 돋보이지만, 일본에서 사반세기 전쯤에 출간된 <기이한 이야기>에서는 상대적으로 그 비중이 작아 보인다.

 

어느 미미 여사의 인터뷰에서 보니 실제로 매일 같이 두 편의 백물어(百物語:햐쿠모노가타리)를 연기하는 배우에게서 아마 영감을 얻었다지. 원래 <화차> 같은 사회파 미스터리물에서 빼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던 미미 여사가 언제부터인가 시대 수사물에 치중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독자들도 그녀가 구사하는 소설 세계에 흠뻑 빠진 것처럼 이야기 공장장인 작가의 시대물 쓰기 중독은 가히 환영할 만하다.

 

상인들은 사람(고용살이)을 부려 돈을 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유통 단계(직접 대면)를 생략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러니만큼 상업에서 인간관계는 필수다. 상인들이 다루는 각양각색의 물건 만큼이나 다양한 손님을 대하는 직업이니 만큼 스토리가 빠질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미미 여사가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의 보물창고에 현미경을 대고 관찰하는 것 같은 관심을 보인 게 아니었을까. 또한 상인들이 최종 목표로 삼은 돈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동력 중의 하나로 등장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견실한 가게 주인의 후처로 들어가 가게를 장악하려는 음모를 세우기도 하고, 오래 전에 딸을 잃고 실의에 빠진 부유한 상인을 위로하기 위해 가짜 딸을 수배하기도 한다.

 

물론 세상만사가 모두 돈 때문인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의심 때문에 전전긍긍(어쩌면 의부증?)하는 아가씨의 모습을 에도 시대 풍경에 담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인연을 만들기 위해 하녀를 동원해서 기원하는 이기적인 모습도 보인다. 가난한 사람을 진정으로 돕는 것은 적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작가는 은연중에 지적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첫 번째 에피소드인 <외잎 갈대>의 인상이 길게 갈 것 같은 느낌이다. 한편, 사건의 해결사로 나오는 모시치 대장은 <맏물 이야기>에서 그 능력이 출중하게 발휘되긴 하지만, 냉정한 오캇피키로 그려지지 않는다. 자나 깨나 사건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시치 대장이지만, 마음 한 편에는 따스한 마음을 가진 중년의 멋쟁이 아저씨다. 자신의 관할 구역인 혼조 후카가와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다니면서 서민들의 가려움을 긁어 주고, 때로는 선을 넘지 한도 안에서 자신의 재량을 발휘하기도 한다. 아직까지 <기이한 이야기>에서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말이다.

 

최근 두 번째 에피소드가 개봉된 영화 <조선명탐정> 시리즈를 보면서 문득 미미 여사의 시대물이 떠올랐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미미 여사의 시대물 같은 시리즈를 다루는 작가가 없을까하는. 장르물과 시대물이 맥을 추지 못하는 우리의 출판 상황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정해 본다. 하긴 미미 여사의 시대물도 우리나라에 연착륙하는데 마포 김사장님의 꾸준한 노력이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지간한 관심이 없는 독자라면 장르물과 시대물(사실 일반독자가 에도 시대의 풍습이나 관직 그리고 지명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옮긴이 주가 없었더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단어들이 횡행하는 것이 사실이다)을 적절하게 혼합한 연작 소설이 주는 심리적 장벽을 통과해서 미미 여사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도달하기란 역시 쉽지 않은 미션이리라. 지레 짐작이지만 지금까지 출간된 15편의 시리즈 중에서 최근작인 모시치 대장의 <맏물 이야기>가 가장 호성적을 내고 있다고 가정해 볼 때, 나랑 비슷한 생각을 가진 미야베 월드 제 2막 동지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리딩데이트] 2015212~ 20일 오전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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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물 이야기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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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에 책이 들어오는 대로 단박에 미미 여사의 신작 소설 <맏물 이야기>를 읽고 싶었으나 살이가 그렇듯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자투리 시간을 내서 바지런히 읽어서 4일 만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사실 좀 더 시간을 두고 읽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이었지만, 읽다만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구입한 <메롱><흔들리는 바위> 그리고 도서관에서 막 빌려온 <얼간이><말하는 검>까지 밀려 있어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혼조 후카가와를 누비는 에코인의 오캇피키(포리) 대장 모시치의 활약이 너무 재밌어서 책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맏물 이야기>는 편집 후기를 참조하니 자그마치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에 비해 미미 여사가 쓰고 있는 에도 시대물은 한껏 세련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작품의 연혁에 따른 구성과 확실한 캐릭터 그리고 시절에 맞는 에도 상가(商家)의 풍습이 어우러져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리라.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에서도 모시치 대장이 등장하지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해당 에피소드의 개별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맏물 이야기>에서는 사건 해결에 나서는 모시치 대장을 화자로 캐스팅하고, 중년 곤조와 청년 이토키치라는 사이드킥까지 배치한 삼인조로 이야기(모노가타리)를 꾸려 나간다.

 

게다가 이번에는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모시치가 취급하는 알쏭달쏭한 사건 해결에 영감을 해결하는 도미오카바시 다리 근처의 솜씨 좋은 유부초밥 노점 주인의 미스터리까지 곁들여서 소설의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유부초밥 주인장은 미미 여사가 <맏물 이야기>에서 준비한 첫 번째 쿠션이다. 유부초밥 노점의 주인장의 내력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거리의 요리사라고 치부하기엔 무언가 사연 있는 무사의 기운이 넘친다는 것이 미미 여사의 발상이다. 게다가 거리의 살모사라는 가지야의 가쓰조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포스마저 장착하고 있다. 요리 솜씨는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다양한 계절 음식으로 독자의 구미를 돋울 정도로 빼어나다.

 

그렇게 미미 여사의 두 번째 쿠션은 <맏물 이야기>의 맏물/음식 혹은 계절요리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미미 여사는 어떻게 모시치 대장의 사건과 맏물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배합한 걸까라고 독자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까. 두 번째 에피소드 <뱅어의 눈>을 살펴보자. 모시치가 관할하는 후카가와에서 부모에게 버림받고 거리에서 지내는 아이들을 귀찮은 존재로 생각하고 그들이 모여 사는 신사에 독을 넣은 유부초밥으로 꼬여서 아이들을 상해케 만든 파렴치한 사건이 발생한다. 고지식한 정의파 모시치 대장이 그런 아이들의 존재를 파악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중에 벌어진 일이라 그는 더더욱 분노한다. 사회복지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전인 에도시대에 부유한 상인들을 대상으로 기부금을 받아 아이들이 지낼 수 있는 공간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오캇피키 대장은 이 사건 때문에 좋아하던 팔딱팔딱 뛰는 뱅어회를 먹지 못하게 되었단다.

 

다음 에피소드인 <천 냥짜리 가다랑어>에서도 미미 여사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를 선보인다. 오월이 제철이라는 가다랑어 시즌을 맞아 난데없이 가다랑어를 손질하게 된 모시치는 자신이 없어 미요시초에서 생선 행상을 다니는 가쿠지로 씨에게 부탁해서 석쇠에 적당히 구워 먹음직스러운 가다랑어 요리를 맛보게 된다. 가쿠지로 씨에게 뜬금없이 천 냥짜리 가다랑어를 사겠다는 제안이 들어오면서 흥미진진한 전개가 펼쳐진다. 무가나 상가에서 불길하게 생각하는 쌍둥이의 엇갈린 인생에 대한 이야기는 마지막의 <도깨비는 밖으로>에서도 비슷한 소재로 다시 등장한다. 좀 진부한 설정이긴 하지만, 가난하더라도 작금의 행복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아니냐고 작가가 묻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외에도 초봄의 싱그러운 빛깔을 머금은 유채나물, 달달한 사구라모치 과자, 정월에 먹는다는 속풀이 나나쿠사죽 등 다양한 식재료를 사용한 계절요리들의 향연이 <맏물 이야기>를 다채롭고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그렇다면 미미 여사가 독자를 위해 준비한 세 번째 쿠션은 뭘까? 바로 영감 스님이라 불리면서 뛰어난 영시 능력으로 세간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해결사이자 기도사로 활약 중인 꼬마 니치도(조스케). 물론 모시치 대장은 니치도의 능력을 이용해서 원래 사업보다 더 열중인 니치도의 부모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다. 하지만, 모시치 대장은 <맏물 이야기>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통해 때로는 니치도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니치도가 테러 당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서기도 하는 방식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그의 정체를 대충 파악하게 된다.

 

사실 미시마야의 오치카가 등장하는 변조괴담 시리즈로 미미 여사의 에도 시대물을 읽기 시작해서 그런지 결을 달리 하는 모시치 사건 시리즈는 상대적으로 리얼리즘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어쩌면 특정 캐릭터만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직업군의 인물들을 기용하는 미미 여사의 전략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마치 배스킨 라빈스의 31가지 아이스크림 맛처럼 골라먹는 재미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수상쩍은 사연을 가진 유부초밥 노점 주인장의 정체를 파고드는 모시치의 활약을 기둥으로 삼아, 뚜렷한 특징을 지닌 캐릭터(이토키치와 니치도)를 적절하게 조합해서 만드는 모노가타리(이야기)야말로 <맏물 이야기>의 감칠맛[うま]가 아닐까 싶다. 말미에 등장하는 당돌한 몽타주 프로파일러 오하나 역시 앞으로 계속될 시리즈에서 한몫 단단히 할 것 같다.

 

미미 여사는 <맏물 이야기>에서 에도 시대의 정치적인 요소들은 제외하고 오로지 사회 문화적인 요소 그 중에서도 유통산업을 담당하고 있던 상인들의 세계에 천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지배계급이었던 무사들의 존재는 그저 무슨 나리로만 표현되고, 하급관리자인 오캇피키를 대신 기용해서 당시 사회상의 이모저모를 들려준다. 에도 시대를 바탕으로 한 시대물이면서도 동시에 수사물이라는 성격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건사고 해결 과정에 논리적이면서 합리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면서, 탐문수사와 증거 확보 그리고 검안 같은 현대 탐정물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다양한 점들을 고려해 봤을 때, 초기작인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에서 진화해서 정교한 짜임새에 방점이 찍힌 기분이라고나 할까.

 

마포 김사장님이 발행한 장르문학 소식지 르 지라시 8호에 소개된 미야베 월드 시리즈 분류에 따르면, <맏물 이야기>는 북스피어에 나온 미야베 월드 제2막의 15번째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이제 달랑 세 권의 책을 읽었을 뿐이지만 에도 시대라는 한 뿌리에서 가지치기를 해서 사방으로 마구 뻗어 나가는 다양하면서도 기이한 이야기들이 너무 재밌다. 게다가 뒤늦게 컬렉션 재미까지 붙여서 부지런히 사재기에 나서고 있다. 나중에 미미 여사가 정성들여 만든 여러 캐릭터들이 한 편의 스핀오프에 등장해서 활약하는 크로스오버 작품은 또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봤다. 5일하고도 반나절이나 되는 이번 설날에 읽은 첫 번째 책이다.

 

[리딩데이트] 2015215~18일 오후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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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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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비 포토샵에 그라데이션이라는 기능이 있다.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바뀌는 과정을 6자리 디지털 정보로 된 흑백 사이의 일련의 색깔들을 표시한 기능인데, 이번에 미미 여사의 미야베 월드 2막 미시마야 시리즈의 첫 번째 인스톨인 <흑백>을 보면서 서두에서 말한 바로 그 그라데이션이 떠올랐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 앞서 주인공 오치카 아가씨를 거두고 있는 미시마야의 주인장 이헤에 숙부가 세상은 반드시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틈새기의 색깔도 있지 않나 하는 표현이야말로 미시마야 시리즈에서 미미 여사가 다루고 있는 주제를 정확하게 집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미시마야 시리즈 중에서 제일 늦게 출간된 <피리술사>로 미야베 월드 2막을 시작해서 역주행 중에 있다. 개인적으로 사무라이, 에도시대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미미 여사의 시대물 미스터리에 흠뻑 빠져 버렸다. <피리술사>를 읽으면서 그전 이야기들인 <흑백>과 <안주>를 읽어 보지 못해 자못 궁금한 점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시리즈의 시원이 되는 <흑백>을 통해 그런 궁금증들을 한방에 털어 버릴 수가 있었다.

 

본국에서도 미미 여사의 시대물이 인기가 있는지 지난여름, 소설 <흑백>에 실린 다섯 개의 에피소드가 일본 NHK를 통해 5부작 드라마로 영상화되었다고 한다. 이제 소설도 다 읽었으니 예의 드라마도 한 번 보고 싶어졌다. 특히 첫 번째 이야기로 등장하는 <만주사화> 꽃이 어떻게 생겼나 싶었는데, 블로거들이 올려놓은 드라마 스틸샷으로 고혹적이면서도 무언가 스토리를 담고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실물을 직접 볼 수가 있어 좋았다. 우선 미미 여사는 오치카 아가씨가 어떤 사연(곧 알게 되지만 약혼자의 죽음) 때문에 에도에서 좀 떨어진 고향 가와사키 역참 마루센을 떠나 에도 간다 거리의 주머니가게 미시마야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는 설정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추리물답게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적절한 사연의 배치를 통해 독자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오치카의 내면세계로의 여행에 나서게 된다.

 

아무래도 상가(商家)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기술을 배우기 위해 도제 신분으로 고용살이에 나서는 십대 청소년들의 고된 '고용살이' 이야기가 많이 나오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17세기 일본에서는 이미 기술이야말로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사실을 작가는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게 파고든다. 이헤에 숙부의 바둑 상대로 미시마야를 찾은 도키치를 우연히 대접하게 된 오치카는 뜰에 핀 자신의 존재 같은 덧없고 쓸쓸해 보이는 만주사화를 보고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손님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다. 그리고 도키치는 만주사화에 얽힌 평생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회한 덩어리를 풀어낸다. 무려 사십년 전으로 올라가는 이야기는 우연한 기회에 사람을 죽이고 15년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형 기치조를 외면하고 마침내 형을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도키치. 고용살이라는 팍팍한 삶에서 살아남기 위해 살인자의 동생이기 때문에 그 역시 비슷한 성정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라는 타인/고용주의 시선이 두려워 돌아온 형을 외면한 원죄는 만주사화의 원념으로 남게 된 것이다.

 

만주사화 사건을 계기로 이헤에 숙부는 오치카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세계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묘수를 하나 개발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흑백의 방에서 오치카가 변조괴담을 들려주고 싶어 하는 화자들의 고민상담을 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고, 거짓과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도 기르라는 숙제를 내준다. 두 번째 에피소드인 <흉가>는 안도자카 언덕의 저택에 백냥이라는 거금을 벌기 위해 들어가 살게 된 오타카 가족의 이야기다. 직업소개꾼 안도 노인의 소개로 흑백의 방을 찾게 된 오타카는 과거의 이야기를 오치카에게 들려준 다음, 백냥이 아닌 마음의 평안함을 줄테니 귀신의 집 안도자카 저택으로 가자고 유혹한다. 그녀는 오치카에게 안도자카의 저택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섬찟한 에피소드는 맨 끝에 배치된 <이에나리>에서 다시 불쑥 독자를 찾아온다. 모든 것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구나.

 

역시 뭐니 뭐니 해도 <흑백>에서 가장 중요한 에피소드는 오치카 본인이 흑백의 방에서 청자가 아닌 화자로 등장하는 <사련>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사련(邪戀)의 정의를 찾아 보니 다음과 같다. 도덕이나 도리에 벗어나거나 떳떳하지 못한 연애.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시원을 밝히는 이야기로 도대체 가와사키의 마루센에서 그녀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에 관한 것이다. 오치카와 그녀의 도락을 즐기다 정신 차린 약혼자 요시스케 그리고 마루센의 업둥이이자 충실한 일꾼으로 살아온 마쓰타로 이 세 명의 삼각관계가 시발점이다. 부모에게 버림 받았지만, 주변 사람들의 구조로 살아난 마쓰타로는 총명함과 성실함으로 마루센의 양자처럼 성장하지만, 결국 그는 남이었고 남몰래 오치카를 연모하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고 있었다. 오치카의 부모나 오치카의 오라비인 기이치 역시 마쓰타로를 잘 대해 주면서도, 우리가 아닌 타인으로 생각해온 것이 문제였다. 왜 오치카의 부모는 마쓰타로를 놔주지 않았을까, 바로 그런 그들의 이기심이 끔찍한 결말의 원인이었던 건 아닐까. 물론 우리의 주인공 오치카가 느낀 자책감은 말할 것도 없다.

 

<사련>을 중심으로 배치된 <만주사화>, <흉가>, <마경> 그리고 <이에나리>는 서로 연관된 이야기들로 최종편에 해당하는 <이에나리>에서는 기존에 등장한 인물들이 모두 재등장해서 대단원의 막을 장식한다. 오치카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쌓은 공덕은 마침내 안도자카 저택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곳에서 만난 '상인'은 저 세상과 이 세상을 가리지 않고 장사한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녀와 만나게 될 거라는 그의 말대로 그들은 <피리술사> '절기 얼굴' 에피소드에서 재회하게 된다.

 

<피리술사>에서 정립된 화자는 말하고 버리고, 청자는 듣고 버린다는 흑백의 방 원칙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요즘 힐링이 대세라고 하는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치카처럼 진중하게 타인의 목소리를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힐링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치카도 처음에는 <피리술사>에서처럼 그렇게 능숙한 청자가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에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다. 꾸준하게 자가발전해 나가는 캐릭터를 지켜보는 재미야말로 미야베 월드 2막의 숨겨진 별미다.

 

이번에 새로 출간되는 <맏물 이야기>를 예약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다. 설날 연휴를 겨냥한 주문이리라. <맏물 이야기>에 앞서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도 구해서 내친 김에 읽기 시작했다. 오캇피치 모시치가 에피소드 마다 출연하고 있는데, 오치카 아가씨가 나오는 미시마야 변조괴담에 시리즈에 견주어 보니 조금 맛이 덜하고나 할까. 어설픈 사무라이 헤이시로가 나오는 <얼간이>도 읽고는 싶은데 지금 수중에 있는 책들은 <안주>, <메롱> 그리고 <흔들리는 바위>가 전부다. 이번 설날은 미미 여사의 에도시대물과 함께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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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술사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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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즐겨보는 SBS의 웃찾사의 <기묘한 이야기>란 코너가 있다. 세 명의 개그맨들이 나와서 일상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이야기들을 개그 코드로 풀어내면서, 늘상 ‘이렇게 세상엔 풀리지 않는 일들이 많아요’라며 마무리 짓는다. 이웃나라 일본에도 이렇게 기묘한 이야기, 괴담이 오래전부터 유행이었나 보다. 괴담동아리가 있어, 돌아가며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비채에서 출간된 교고쿠 나쓰히코의 <항설백물어> 시리즈도 읽어 보아서 그런지 뒤늦게 알게 된 미야베 미유키(이하 미미 여사)의 에도 시대물 미스터리 <미야베 월드 2막> 시리즈에도 관심이 갔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 드디어 <피리술사>로 에도 시대에 발걸음을 내딛었다. 기존에 출간된 책들이 많아서 그런지 읽기도 전에 수집욕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사실 수많은 미미 여사의 책 중에서 읽은 책이라곤 달랑 <화차> 하나였는데, 미미 여사가 시대물을 또 다룰 줄은 미처 몰랐다. <항설백물어>의 교고쿠 나쓰히코 작가와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단박에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아마 비슷한 소재를 다루니 서로 교감이 있지 않나 하는 상상도 해보게 된다.

 

기묘하게도 가장 늦게 출간된 책으로 에도 시대의 막을 열었다. 소설의 변조 괴담 매니아/청자로 등장하는 에도의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의 오치카 아가씨는 정혼자가 변사를 당하면서 그 충격으로 고향을 떠나 에도 숙부 댁에 기거하게 되었다는 간략한 설명이 이어진다. 물론 전작인 <흑백>과 <안주>를 읽었다면 더 깊이 이해를 할 수 있으련만. 아직까진 부족하다. 그렇게 영혼이 부서진 오치카를 위로해 주는 것이 바로 이야기다. 그냥 그런 항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변조 괴담 컬렉터라고나 할까. 일단 미미 여사는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괴담의 화자(話者)들이 이야기 하는 데 있어 부담을 가지지 않기 위해 여성 청자를 배치했다. 게다가 그 여성 청자는 에도의 꽃이라고 불릴 정도로 절색이다. 뭐 정도라면 그 어떤 이도 숨기고 싶은 비밀도 술술 풀어내지 않을까 싶은데, 오치카 아가씬 마음도 예뻐서 화자를 배려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게다가 이러저러한 괴담에 단련이 되면서 상대방이 부담을 가지지 않게 하면서, 다양한 질문으로 초반 리드를 잡는다.

 

다음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요소 중의 하나는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17세기 에도 시대에 대한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기술이다. 하오리니 기모노 같은 일반적인 복식은 물론이고, 사무라이 계급 그리고 소설의 중심이 되는 상인들의 복식에도 상세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소설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의 지위나 신분을 통한 심리상태와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아주 그만이다. 게다가 에도 시대 풍습을 엿볼 수 있는 절기에 따른 관습이나 일본 전국을 아우르는 이야기답게 각 고장의 다양한 면모를 앉은 자리에서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마 이런 부분들은 미미 여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 아닌가 싶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피리술사>는 모두 여섯 편의 길고 짧은 변조 괴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도의 꽃이라는 오치카 못지않게 아름다운 아가씨가 결혼을 앞두고 정혼자의 마음이 바뀌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흑백의 방에 와서 나누는 얘기는 여느 카페에서 흘려듣는 연애고민상담을 떠올리게 한다. 다마토리 거울연못이라는 곳에 가서 연인들이 가서 자신들의 얼굴을 비춰보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설이 있는데, 화자 오몬 아가씨의 할머니가 도전했다가 그대로 되었다고 했던가. 워밍업이 생각보다 부담 없고 간단해서 좋았다. 흑백의 방에서는 굳이 실명을 말하지 않아도 되고, 괴담에 관련된 지명도 말할 필요가 없다. 화자는 말하고 버리고, 청자는 듣고 버린다는 원칙에 충실하다. 주위에서 진지하게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가지고 있는 고민의 상당 부분이 해결된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청자인 오치카 역시 힐링의 여정 중에 있긴 하지만.

 

연작소설답게 계절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풍경과 그에 따른 미시마야의 쥐 울음소리 흉내내기 같은 행사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상인들의 이야기답게 상가(商街) 고유의 풍습 그리고 끔찍하긴 하지만 떼강도가 들이닥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 이야기도 접할 수가 있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미시마야도 하마터면 떼강도의 공격을 받을 뻔했다고 하지 않았다고 하던가.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우는 아기> 이야기가 가장 이번 시리즈에서 슬프면서도 기묘하지 않았나 싶다. 겉으로 볼 수 있는 미래의 악행을 숨기고 있는 사람을 사전에 알아볼 수 있는 아기의 운명은 고달프지 않을까. 말 못하는 아기의 의사소통방식이 고작 울음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그럴 것 같다.

 

40년 전 천재지변으로 온 식구와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마저 모두 잃은 중년남자의 한 맺힌 고백도 절절하다.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평생의 짐이 된 이야기를 오치카 아가씨 앞에서 담담하게 풀어내는 사내의 풍모가 에도 시대 풍습을 담은 우키요에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그래도 역시 소설의 백미는 표제작은 <피리술사>가 아닐까 싶다. 편백나무로 번의 재정을 담당하는 산골마을에서 벌어진 변조 괴담을 들려주기 위해 어느 풋내기 무사가 미시마야의 오치카 아가씨를 찾아온다.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는 무가에서 장남보다 여자 아이가 더 중시되었다는 무사 이치로타의 기묘한 고백담은 식인괴수 마구루의 등장으로 절정에 달한다. 이야기의 어느 부분에서는 무사의 성장이야기가 배어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 아이에서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무사는 오치카에게 자신이 극복해야 할 괴담과 어머니가 알려준 비밀을 들려줌으로서 비로소 의젓한 한 명의 무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미신으로 치부될 법한 괴담 이야기가 우주여행이 가능하게 된 21세기에도 여전히 통용된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오치카 아가씨와 같이 듣는 청자의 입장이 된 독자는 마지막 <절기 얼굴> 일화에서 그녀의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일상에서 뚜렷한 선과 악의 구별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며 살지만, 정작 선과 악의 경계 구별은 모호하기만 하다는 것을 말이다. 저승과 이승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상인’의 존재야말로 그것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타인의 몸을 빌어 비명횡사해서 저승으로 간 이들의 넋을 진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예의 상인을 마냥 나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 과거의 죄과를 뉘우치고 스스럼없이 절기 얼굴의 운명을 받아들인 하루이치 삼촌 역시 편안한 죽음을 맞지 않았던가. 오치카는 자신의 이야기를 상황마다 대입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상인을 통해 죽은 약혼자 요시스케 씨를 만나고 싶은가, 그렇지 않은가하고.

 

미시마야 시리즈로 미미 여사의 미야베 월드의 두 번째 막을 열어 젖힌 느낌은 최고다. 사실 처음에 책의 두께를 보고 이걸 언제 다 읽나 싶었는데 재밌는 소설은 확실히 분량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야기 중매꾼에 해당하는 두꺼비 도안 노인과 요즘 신문에 해당하는 에도시대 가와라반 덕분에 미시마야에 이야기를 오치카에서 들려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찾아오기를 바란다. 물론 미미 여사는 좀 더 새롭고 기괴한 이야기를 창작하느라 수고가 되겠지만. 네 번째 미시마야 시리즈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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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09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북스피어 페이스북에 올리는 마포 김사장님의 미미 여사 관련 글을 읽고 있어요. 갑자기 미미 여사 작품들 정주행 독서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국내에 소개된 책이 너무 많아서 독서를 시작한다면 몇 년 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레삭매냐 2015-02-10 09:46   좋아요 0 | URL
오오 얼굴책에 마포 김사장님의 글이 종종
올라오는군요.
전 이번에 <피리술사>로 미미여사의 에도시대물
에 푹 빠지게 되었답니다.
말씀 대로 미미여사의 책이 엄청 많아서 다 읽
으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습니다.

댄스는 맨홀 2015-02-11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백과 안주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피리술사가 이어지는 이야기였네요. 읽어봐야 겠어요.

레삭매냐 2015-02-11 22:35   좋아요 0 | URL
미시마야 시리즈 <흑백>으로 역주행하고 있습니다.
일단 <안주>도 사서 쟁여 두었구요. 이번 설날은
미미 여사와 함께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지푸라기 여자
카트린 아를레 지음, 홍은주 옮김 / 북하우스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올해 들어 한 15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해서 도통 손에서 놓을 줄 몰랐던 프랑스 출신 작가 카트린 아를레의 <지푸라기 여자>가 그 중에서 제일 재밌었다고 한다면 표본이 너무 적다고 욕을 먹으려나. 다 읽고 나서 두 가지 점에서 놀랐는데, 하나는 이 책이 자그마치 60년 전에 쓰였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완전범죄를 그린 소설이라는 점에서였다. 정의가 항상 승리하는 게 아니었던가? 미안하다 객쩍은 농담이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오래 전에 본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가 자꾸만 떠올랐다.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고 타인의 삶을 사는 리플리의 모습이 소설의 주인공 힐데가르트 마이스너의 그것과 겹쳐 보였다. 전후 패전 독일 함부르크에 사는 서른네 살 먹은 힐데가르트의 현실은 보잘 것 없지만, 그녀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할 준비된 여자다. 그런데 그것이 심각한 범죄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도 수상한 시절을 살다 보니 주변의 모든 것에 회의적인 시선을 두기 마련인데, 이런 독자와 달리 자신을 가난에서 구해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그녀의 도발적인 자세가 어째 불안하기만 하다.

 

어느 억만장자가 신붓감을 찾는다는 신문 광고를 보자마자 힐데가르트는 자신을 위해 준비된 상황이라고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자신을 어필하는 편지를 보내고 먹이를 기다리는 사냥꾼의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린다. 마침내 기다리는 답장이 도착하고, 코트다쥐르의 칸에서 미래의 공모가 안톤 코르프와 만남을 가진다. 물론 코르프가 그녀가 꿈에 그리던 부를 안겨줄 드라마 속 주인공은 아니다. 그는 그 꿈을 실현시켜줄 남자의 오랜 비서란다. 코르프는 가난탈출에 목숨 건 힐데가르트가 거부할 수 없는 은밀한 유혹을 제안한다. 자신이 모시는 억만장자 칼 리치먼드의 마음을 빼앗아 그와 결혼해서 그의 재산을 가지라는 유혹이다. 물론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의 배려를 잊지 말라는 차원에서 그녀를 입양하겠다고 나서기까지 한다. 미래에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우리의 가련한 힐데가르트는 능란한 공모자 코르프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되어 임무에 착수한다.

 

자 이쯤에서 우리의 억만장자 칼 리치먼드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독일 출신의 괴팍한 노인네는 수상한 방법으로 돈을 끌어 모았는데, 그렇게 자신에게 집중된 재산은 자본주의의 특성상 자가 증식을 거듭해서 상상을 초월하는 재화의 모습으로 그에게 보답했다. 돈의 힘으로 이 세상에서 안 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칼 리치먼드는 주변의 자메이카 출신 하인들을 개처럼 부리는 등 그야말로 졸부 행세에 여념이 없다. 그의 비서 안톤 코르프는 무소불능한 자본 권력을 행사하는 자기 주인의 헛된 자존심이야말로 그의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제는 자신의 의붓딸이 된 힐데가르트를 간호인으로 동원해서 공략에 나선다.

 

이 정도라면 <지푸라기 여자>가 그저 그런 재밌는 소설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이십대 작가 카트린 아를레는 자신이 삶에서 체험한 것들을 뛰어넘는 범상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소설의 서사를 비틀기 시작한다. 힐데가르트와 코르프의 굳건해 보이는 동맹은 졸부 칼 리치먼드의 급사 때문에 종착역을 알 수 없는 과속에 돌입한다. 결국 모든 것의 시발점이었던 막대한 유산 상속을 위해 힐데가르트는 새로운 유언장의 공증을 위해 자기 남편의 죽음을 감추는 자충수를 둔다. 문제는 칼 리치먼드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닌 타인에 의한 살인이었다는 점이다. 아니 도대체 이 소설이 어떻게 마무리를 지으려고 이렇게 노선 이탈을 마구 감행하는지 모를 지경이다. 물론, 독자는 기대를 벗어난 서사구조의 일탈에 스릴을 느끼면서 힐데가르트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의 여신의 마지막 결정에 집중하게 된다.

 

나는 도저히 힐데가르트의 의도에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내가 고지식한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가난이 싫어 사랑 없는 결혼을 선택한 패전국 출신의 아무런 미래도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무력한 여성이 마주하게 되는 운명을 무조건 사회 부조리 혹은 소설의 곳곳에서 등장하는 연합군의 폭격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독일 사람들은 특히 그들이 선거를 통해 선출한 합법적인 지도자가 누구였는지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의 성공과 실패를 무조건 개인의 노력 탓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가난이 싫어 돈 많은 갑부와 결혼하는 게 무슨 잘못이냐고 도리어 묻는 힐데가르트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는지 묻고 싶다. 그런 점에서 안톤 코르프가 지적한 대로, 부자가 되기 위해 지난한 노력과 시간, 행운 그리고 모욕 등을 감수할 수 있는 자만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예언(전적으로 공감하는 바다)이 과연 이십여 년 산 작가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점이 믿을 수가 없다.

 

카트린 아를레 작가는 추리 범죄소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기발한 트릭 대신, 힐데가르트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묘수랍시고 쓰지만 개미지옥처럼 서서히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통제를 벗어난 상황에 대한 묘사에 집중한다. 악당이 결국 모든 것을 거머쥐게 되는 이 소설의 매력 포인트가 아닐까. 하긴 진실과 가치가 전도되고, 불의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미상불 지푸라기에 매달린 여자가 낯설 일도 아니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은밀한 유혹>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그동안 드라마와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변형을 거듭해온 <지푸라기 여자>가 요즘 원소스멀티유즈 미디어셀러의 대세를 타고 새롭게 단장을 할 모양인가 보다. 모쪼록 진부한 해피엔딩 결말 대신 원작에 충실한 비극적 결말의 영화적 구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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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06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번역본이 나와서 오래되고 어색한 번역의 동서문화사판을 읽지 않아서 좋아요. ^^

레삭매냐 2015-02-09 10:43   좋아요 0 | URL
그동안 같은 제목의 책이 여러권 나왔더라구요.
생각보다 재밌에 읽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