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펭귄클래식 7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노승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예전에 그 유명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모음집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처음 만났다. 항상 그렇지만, 고전 읽기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읽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지는 기분이다. 사실 다시 읽기 전까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복수에 나서는 젊은 왕자 햄릿의 이야기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재독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여러 가지 생각과 마주칠 수가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독서 토론 모임은 책읽기의 또 다른 즐거움도 안겨 주었다.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구나, 굳이 움베르토 에코의 해석을 빌리지 않아도 텍스트와 해석 쌍방 권리는 참으로 무궁무진하다.

원제는 ‘덴마크의 왕자, 햄릿의 비극적 역사’라고 명백하게 이 희곡이 비극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정말 수많은 텍스트를 통해 재생산된 햄릿의 복수와 비극은 역시 원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라이언 킹> 역시 모티브가 바로 햄릿에서 온 게 아니던가.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같은 이름을 가진 아버지 햄릿을 잃는다. 그런데 왜 왕위계승자 1위인 왕자 햄릿이 아닌 숙부 클로디어스가 왕위에 올랐을까? 게다가 어머니 거트루드는 아버지 묘의 흙이 마르기도 전에 시동생과 결혼한 걸까? 미스터리로 희곡은 시작된다.

게다가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나중에 드러나게 되는 선왕 햄릿은 유령의 모습으로 현세에 개입해서, 자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를 아들 햄릿에게 당부한다. 그렇지 않아도 석연치 않은 아버지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고 있던 햄릿에게 아버지의 유령이 들려준 이야기는 그야말로 분노의 도화선을 당긴다. 동시에 햄릿의 그 유명한 광증과 정신착란이 발병한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후에 왕자가 벌이는 일련의 사건은 너무 정교하다. 숙부 클리디어스의 음모 확인을 위해 떠돌이 유랑극단에 자신의 아버지 죽음에 관한 무언극을 보여주고, 심복 호레이쇼에게 클로디어스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라는 밀명을 내리고, 자신을 영국에 보내 죽이려는 음모를 사전에 분쇄한다. 이게 과연 미친 사람이 계획한 일이란 말인가?

어머니 거트루드에게 숙부와의 재혼은 ‘근친상간’이라고 말하며 어머니의 가슴을 찢어놓는 햄릿. 모자 사이의 무슨 일이 있는가 파악하기 위해 자진해서 왕비의 방으로 잠입(이 부분도 좀 이해가 가지 않는다)한 햄릿이 사랑하는 오필리어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마는 햄릿. 이렇게 해서 아버지를 잃은 오필리어는 실성해서 익사해 버리고, 그녀의 오빠 레어티스는 국왕 클로디어스와 공모해서 아버지와 사랑하는 여동생의 복수를 맹세한다. 유령이 시작한 복수극은 극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을 파멸로 몰고 간다.

영적 존재가 선한 것만 아니라 악한 것도 있다면, 죽은 선왕 햄릿의 유령은 후자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새로운 시선으로 고전을 보기 위해 혹시 모든 것을 자신의 광증과 정신착란 탓으로 돌리는 햄릿의 말대로 아버지를 잃은 마음에 심신이 허약해진 나머지 자신이 헛것을 본 것이라면, 또 그런대로 말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를 비극으로 몰고 가는 햄릿의 복수가 통쾌한 것도 아니다. 최고의 복수는 용서라는 말이 있듯이, ‘햄릿이 냉정하게 상황 판단을 했다면 이런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가정이 떠오른다.

고대 유대 유목사회도 아니고 기독교가 정착된 중세에 형사취수 시스템이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도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독서 토론 과정에서 이 비극에서 누가 가장 불쌍한가에 대해 이론이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햄릿에게 철저하게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오필리어가 가장 불쌍하다는 생각이다. 좀 더 나아가 과연 햄릿이 그녀를 사랑했는지도 의문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사는 일찍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햄릿을 분석했다. 햄릿의 억압된 욕망은 자신이 응징하려고 하는 클로디어스의 죄악보다 나은 것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성적인 요소로 설명하려고 했던 프로이트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는 느낌이다.

가장 불쌍한 캐릭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아마 <햄릿>의 최고 수혜자가 이웃 나라 포틴브라스라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까 싶다. 원래 덴마크를 침공하려고 키우던 병사를 폴란드로 돌려 폴란드 정복도 완성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처구니없는 비극으로 왕가가 전멸된 덴마크까지 접수했으니 정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지 않을까.

만날 하는 말이지만 고전을 읽어도, 읽어도 새롭다. 이 다음번에 다시 만나게 될 <햄릿>은 또 어떻게 나에게 다가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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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들 : 총을 든 사제
엠마뉘엘 르파주 지음, 이성엽 옮김 / 씨네21북스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주로 애용하는 램프의 요정 신간소개 코너에서 발견하고 바로 주문을 날렸다. 램프의 요정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당일배송을 해주었다. 사무실로 하면, 보나 마나 배달하시는 분이 내일 가져다 드릴게요 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부러 집으로 배송을 부탁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푹푹 더위 속에서 르파주의 책을 펼쳤다. 오, 놀라워라!

개인적으로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혁명에 무척 관심이 많지만, 그 먼 나라 니카라과에 대한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아주 오래전에 오월 출판사에서 나온 멕시코 출신의 작가 리우스가 그린 만화가 한 권 있는데 이건 절판돼서 시중에서는 구할 수가 없다. 어쨌든 헌책방에서 구해서 읽은 <산디니스타, 니카라구아>는 니카라과 혁명에 대한 거시적인 흐름을 읽을 수가 있었다. <게릴라들: 총을 든 사제>는 미시적인 차원에서 역사적 접근을 시도한다.

1976년 11월,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구아의 동쪽에 있는 산 후안이라는 작은 마을로 가는 버스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 가브리엘 데 라 세르나는 라이터를 가지고 있다가 정부군에게 체포된 꼬마 아가씨가 상상을 초월하는 악랄한 독재자 ‘타치토’ 소모사를 비난하는 소리에 적잖이 동요한다. 호아킨 신부는 자신의 오랜 친구 루벤 신부의 부탁으로 마을 성당에 벽화를 그릴 견습신부 가브리엘을 소개한다. 두 신부는 2대에 걸친 독재 왕국으로 니카라과를 좌지우지하는 소모사 정권의 암울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

루벤 신부는 가브리엘에게 자신이 담긴 진짜 그림을 그리라고 주문하면서, 산 후안 마을 사람들를 크로키 하라고 말한다. 부유한 기업가의 자제로 평생 고생을 모르고 자란 가브리엘은 정말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산 후안의 곳곳을 스케치하면서 혁명의 대의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한다. 루벤 신부가 반정부 게릴라들의 투쟁을 돕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브리엘은 미리 무기를 감추면서 성당을 수색하러 나온 정부군을 따돌린다. 하지만, 게릴라 활동에 동조하는 루벤 신부와 디에고가 체포되고, 성녀와 창녀 사이를 오가던 콘셉시온이 정부군 바르가스의 총에 맞아 죽으면서 가브리엘은 충격을 받는다.

니카라과 유력 가문의 자제로 자신의 정체성과 독재권력 밑에서 신음하던 니카라과 민중 사이에서 고민하던 가브리엘은 드디어 게릴라 전사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지금까지가 1부의 내용이었다면, 2부에서는 성경 대신 총을 든 사제 가브리엘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니카라과 민중의 소모사 독재에 대한 격렬한 증오와 혁명군 내부에서의 갈등, 생과 사를 넘나드는 사나이들의 우정 그리고 금단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출신 르파주의 그래픽 노블은 거침없이 내달린다. 소모사 독재에 저항하는 작은 방법으로 니카라과 사람들은 소모사 소유의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성냥 대신 라이터를 사용한다. 라이터는 저항군의 상징이다. 게릴라 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촌락을 파괴하고 주민을 소개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소위 정부군의 활동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산디니스타 혁명군에 가담한다.

게릴라 동료를 구하기 위해 살인하지 말라는 여호와의 십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목에 걸린 십자가를 쥐어뜯는 견습신부 가브리엘의 인간적 고뇌가 이 만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나눠주는 콘셉시온 마르티의 죽음도 가브리엘의 자각에 일조한다. 혁명이 끝난 뒤, 콘셉시온을 형상화한 그림 앞에 꽃을 두고 돌아서는 부에나벤투라의 모습도 잊지 못할 것 같다.

니카라과 혁명의 전반을 다룰 수 없는 제약은 오히려 서사의 밀도와 긴장감을 높여준다. 긴 혁명 과정에서 일어났을 법한 작은 이야기로 혁명이 들불처럼 번져 나가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는 설정이 마음에 들었다. 단순하게 부르주아 청년이 신부에서 게릴라가 되는 과정 뿐만이 아니라, 세속의 욕망으로 괴로워하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구원이 민중에게 주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 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긴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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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7-21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을 걸 같이여..소개 감사 ^^
 
책에 미친 바보 - 이덕무 산문집, 개정판
이덕무 지음, 권정원 옮김, 김영진 그림 / 미다스북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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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의 제목에 나온 “미친”이라는 말이 계속해서 혀끝에서 맴돌았다. “미친”이라… 확실히 무언가에 미쳤다는 말은 긍정보다는 부정에 가깝다. 여자에 미쳤다, 돈에 미쳤다, 오락에 미쳤다, 도박에 미쳤다 등등, 그런데 ‘책에 미쳤다’는 어떤가? 그나마 책에 미쳤다는 표현은 봐줄 수가 있을 것 같다. 문제는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바보란다. 책에 미친 건 좋은데, 바보라 그것도 문제다. 이 책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책에 미친 바로 “간서치” 이덕무야말로 진정으로 책에 미친 사나이였다.

왕족 출신 서얼로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 관직으로 진출할 수 없었던 이덕무는 자신의 그런 한을 책읽기로 풀었던 게 아닐까. 10만 관의 돈이 생긴다면, 절반은 토지를 사서 농사를 짓고 또 나머지 절반으로는 모두 책을 사겠다는 그의 선비다운 호기에 감탄했다. 독자 또한 누구 못지않은 책쟁이지만, 책을 읽으면 추위와 배고픔도 잊고 근심걱정이 사라지며 건강해지기까지 한다는 청장관(이덕무의 호 중의 하나) 이덕무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청장관은 책만 읽는 골방 서생이 아니었다. 훗날 정조에게 검서관으로 발탁되어 그렇게 좋아하는 진귀한 궁중에 보관된 어서도 마음껏 접할 수가 있었다. 능력만 있다면 신분은 따지지 않고 등용했던 개혁군주 정조 또한 청장관의 인격과 재능을 한 눈에 알아봤다. 선수끼리는 서로 통한다고 했던가. 나중에 지방관으로 파견되어서도, 비록 작은 고을의 수령이었지만 목민관으로 최선을 다해 임금의 은혜에 보답했다. 자신이 책을 통해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긴 실천가이기도 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찰방으로 근무지인 경상도 함양과 한양을 오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임금에게 충성한 그의 모습은 책에서 보고 배운 것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는 선비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소설 애호가인 나로서는 경전과 고문을 중시하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소설 배척론자인 이덕무가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엄격한 신분제야말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유교적 가치관을 현대인으로서 이해하지 못해서일까? 나름대로 소설 문학의 효용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으로서, 성현의 가르침만이 옳다는 주장에는 솔직히 말해서 동의할 수가 없다. 특히 독서인은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박학으로는 도저히 청장관에게 상대가 되진 않겠지만 꼭 이 말만큼은 하고 싶었다.

여섯 살 손아래 누이를 영양실조로 잃고 사무치는 마음에 쓴 제문은 정말 가슴이 시릴 정도였다. 몸이 아플 적에도 책을 읽으면서 마음가짐을 바로 하는 선비의 마음 한 구석에는 가족을 사랑하는 이렇게 애달픈 마음이 숨어 있을 줄이야. 여기서도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정말 그렇게 누이를 걱정했다면 자신이 가진 진귀한 서적을 팔아서라도 도와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속인의 생각이다.

확실히 청장관은 보통의 책쟁이와는 수준이 다른 독서가였다. 보통의 책쟁이들이 귀한 책이 있으면 서로 나누지 않고 혼자만 보려고 하지만, 청장관은 좋은 책이 있다면 응당 타인에게 권하고 나누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좋은 책을 빌려 주었는데, 빌려가 이가 책을 읽은 표시가 나지 않는다면 싫은 소리도 아끼지 않은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책을 읽지도 않았으면서 읽은 표시를 내려고 책을 일부러 보푸라기가 생기고 헐게 하려고 깔고 눕고 했겠는가 말이다.

<책에 미친 바보>는 청장관 이덕무에 대한 나의 갈증을 풀어주었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그의 삶의 이모저모를 보면서 참으로 훌륭한 선비고, 선배 책쟁이로 본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도 그처럼 한 권의 책으로 궁극의 행복에 다가설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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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의 달력 - 마야 문명 최대의 수수께끼에 얽힌 진실
베른트 잉그마르 구트베를레트 지음, 박병화 옮김 / 열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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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독일 출신의 작가 베른트 잉그마르 구트베를레트의 <마야의 달력>의 제목을 들었을 때 이 책이 단순하게 마야 문명의 시간에 대한 글인 줄만 알았다. 책을 읽다 보니 내 생각이 아주 틀렸다는 걸 깨닫게 됐다. 물론 시간 일반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지만, 책의 주제는 역자가 후기를 통해 친절하게 알려 주었듯이 “마야 문명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었다.

수레나 동물의 도움 없이 찬란한 마야 문명을 이룩한 것으로 알려진 고대 마야인들이 어떻게 해서 지금 기준으로 봐도 복잡하기 짝이 없는 시간의 개념을 파악하고, 행성의 운행과 복잡한 역법 체계를 만들어냈는지 알 도리가 없다는 사실에 작가는 방점을 찍는다. 그래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이비 과학까지 동원해서 고대 우주인설, 혹은 대서양 어딘가에 사라진 아틀란티스 사람들의 문명 전파설 그리고 최근 2012년 지구종말설에 이르기까지 정말 백가쟁명식의 다양한 이설들이 끊이지 않는단다.

하지만 정작 구트베를레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마야인들의 참모습이다. 1519년 에르난 코르데스의 아즈텍 정복 이후, 몰려든 스페인 세력은 인신공양하는 아즈텍인들을 야만인이자 이교도로 규정하고 기독교식 문명 전파를 서두른다. 작가가 서론에서 규정한 대로, 시간과 달력으로 대변되는 기독교식 질서가 과연 메조아메리카 사람들에게 얼마나 호응을 얻었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하지만, 천연두라는 무서운 전염병을 선두로 한 스페인 정복자들의 야만적 폭력과 공동의 적에 맞서 대항할 연대를 하지 못한 아즈텍인들은 그들에게 거의 전멸되다시피 한다.

작가는 마야 문명에 담겨 있는 인류 창조 신화에 세 번째로 등장하는 ‘옥수수 인간’에 주목한다. 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메조아메리카인들의 주요한 식량 자원인 옥수수는 그들의 식생활과 문화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불가분의 관계라고 한다. 유럽인에게 밀과 보리가 그리고 동양인에게 쌀이 주식이었던 것처럼 메조아메리카 사람들의 주식인 옥수수를 유럽에 전파하려고 하지만, 메조아메리카 특유의 조리 레시피를 몰랐던 유럽 사람들의 실패는 처음부터 예견되었다고 작가는 냉정하게 꼬집는다.

옥수수의 생성과 소멸은 그대로 그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는 마야인들의 삶에 적용됐다. 옥수수의 생산은 그들의 생존에 직결된 문제였고, 옥수수를 언제 심고 또 언제 수확할 것인가는 그네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마야의 주술사 혹은 시간예언자들은 그런 이유로 해서 요즘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 복잡하기 짝이 없는 역법 체계를 고도로 발전시켜야만 했다. 동시에 태양력과 종교에 사용되는 달력이 이중으로 필요했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고의적인 사료 파괴로 고대 역사의 상당 부분이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마야 문화 전반을 구트베를레트는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시간이라는 특정한 주제 뿐만 아니라 정치, 전쟁, 문화, 사회 그리고 종교에 이르는 다양한 부분의 이해를 <마야의 달력>을 통해 넓힐 수가 있었다. 작가는 요즘 한창 기승을 부리는 13.0.0.0.0. 다시 말해서 2012년 12월 21일 지구종말설을 철저하게 현실, 현세 지향적이었던 마야인들의 특성을 이유로 들며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한다. 음모설을 즐기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특수(?)를 맞아 나오는 그런 책들이 한편으론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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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우연의 역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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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지식인 슈테판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의 역사를 읽었다. 세계 3대 전기 작가라 불리는 작가는 머리말을 통해 이 책에서 역사의 “별 같은 순간들”을 담아내려고 했고, 역사 스스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순간에 일개 역사가가 각색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하나의 역사가 있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라는 말일 것이다. 츠바이크는 그렇게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오롯하게 평가는 글을 읽는 독자에게 넘기는 수완을 발휘한다.

모두 12개의 역사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광기와 우연의 역사>의 시작은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한 마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 공략이다. 천 년 동안 서방 기독교 제국의 방파제로 작용해온 비잔틴 제국은 이제 수도만 남은 제국으로 마지막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한편, 욱일승천하는 기세의 오스만 제국의 젊은 지도자 마흐메트에게 비잔틴 제국의 보석 콘스탄티노플은 반드시 점령해야할 필생의 사업이었다.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노력으로, 마흐메트는 엄청난 크기의 청동 대포와 자그마치 15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서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나선다.

입술이 다치면 이가 시린다[脣亡齒寒]는 교훈을 몰랐던 서방의 기독교 국가들은 오스만의 침략에 맞서 지원을 요청하는 비잔틴 황제의 호소에 눈을 감는다. 제국 간의 영토분쟁, 동서교회의 분리 이래 로마 교황과 동방정교회 장로간의 불화는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면 다음은 서방 제국 차례라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몰랐을까? 콘스탄티노플이 마흐메트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난 뒤, 서방의 코앞이라고 할 수 있는 비엔나가 오스만 제국군에게 포위되고서야 가공할 만한 술탄의 힘을 느꼈으리라.

프랑스 혁명 전쟁 기간에 만들어진 루제 드 릴이 하룻밤 만에 만들었다는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롭다. 프랑스 혁명의 전파를 두려워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앞두고, 스트라스부르 시장의 제안으로 급조된 노래가 프랑스 혁명 대의의 상징이 되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 자유와 평등, 박애 그리고 자신의 조국을 스스로 지키겠다고 나선 시민군에게 루제가 만든 곡보다 더 어울리는 노래는 없을 것 같다. 비록 훗날 루제는 혁명에 염증을 내고, 반혁명주의자로 돌아섰지만 그가 만든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 국가로 삼색기가 펄럭이는 곳이라면 어디에서고 여전히 애창되고 있다.

19세기 유럽 아니 세계의 운명을 뒤바꾼 단 1초의 결정이 제시된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였던 워털루 역시 세계사의 무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대 사건이다. 벨기에의 워털루 언덕에 포진한 영국의 웰링턴을 격파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자신의 천재적인 전략과 위대한 프랑스 군대를 아낌없이 투입한다. 문제는 영국을 지원할 블뤼허 장군의 프로이센군을 전장에서 떼어 놓을 목적으로 파견된 그루쉬 원수의 결정이었다. 워털루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 서둘러서 황제를 도우러 주전장으로 이동하자는 소장파 장교의 의견을 무시하고 황제가 내린 명령에만 집착한 그루쉬 원수가 내린 1초의 결정으로 결국 나폴레옹은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지만, 그가 만약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는 대신, 나폴레옹을 도우러 전장으로 뛰어들었다면 세계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하다.

20세기 마지막 남은 인류의 처녀지 남극으로 향했던 영국 출신 로버트 스콧 탐험대의 위대한 실패 역시 인상적이었다. 최근에 읽은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의 <빙하와 어둠의 공포>에서 읽었듯이, 고립무원의 추위 속에 보급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강력한 경쟁자(아문센)에 앞서 남극에 조국의 ‘유니언 잭’을 꽂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고난과 역경을 딛고 마침내 남극점에 도달했지만, 스콧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건 선착한 아문센의 편지와 노르웨이 국기였다. 그들이 무사히 귀환했다면, 그나마 해피엔딩이겠지만 그러지 못하고 모두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동사하고 만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꿈을 가지고 불가능한 꿈에 도전했는지,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까지 사랑하는 가족에게 남긴 편지와 처절하게 남긴 기록을 통해 인류의 위대한 도전정신을 되새긴다.

마지막 주자로는 “세상을 경악케 한 열흘”의 주인공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아노프, 우리에게는 레닌이라는 더 잘 알려진 혁명가에 대한 이야기다. 제정 러시아에서 추방되어 스위스 도서관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을 파던 독서가 레닌은 1차 세계대전 중에 조국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귀국을 서두른다. 하지만, 차르의 전제정치에 반란을 일으킨 군국주의자들은 탁월한 선동가이자, 혁명가인 레닌의 귀국을 원하지 않는다. 아직 휴전이 발효되지 않은 상황에서 적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거치지 않고 러시아로 돌아가는 길은 없었다.

조국의 배신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독일 측과 개인 자격으로 타협한 레닌은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를 타고 마침내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러시아 혁명에 도화선을 당긴다. 이렇게 러시아의 심장부로 날아간 혁명의 탄알은 착취와 억압으로 얼룩진 ‘시간의 질서’에 균열을 가했다. 당시 레닌의 결정은 목적적 인간의 지향성에 대한 뚜렷한 본보기였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의 저자 츠바이크는 세계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별 같은 순간들에 주목한다. 콘스탄티노플의 그 유명한 삼중벽을 무용지물로 만든 “케르카포르타”가 튼튼하게 방비되었더라면, 워털루에서 그루쉬 원수가 1초의 결정을 재고했다면, 레닌이 조국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했다면 과연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 속의 작은 실수나 오판이 역사적 사건의 단초가 되었던 것처럼, 어쩌면 역사의 큰 흐름은 이미 정해져 있던 게 아닐까? 역사의 가정은 그저 분석과 인과관계의 설정을 좋아하는 후세 사람들이 부질없는 상상의 소산일지도 모르겠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말대로 역사의 별 같은 순간들을 즐기시라, 역사에 각색은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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