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오버
토드 필립스 감독, 브래들리 쿠퍼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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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숙취를 뜻하는 “hangover"를 제목으로 삼다니 대충 어떤 영화인지 감이 온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네 명의 싸나이들이 절친 더그의 결혼식을 앞두고 Sin City 라스베이거스에서 한판 즐겁게 놀아보자고 떠난 총각파티를 다룬 영화다. 딸랑 그거면 그렇게 재밌고, 흥행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겠는가 말이다. 아니다, 미국식 코미디의 전형인 <더 행오버>는 빤한 기본 줄거리에 포복절도한 이야깃거리를 담뿍 담고 있다.

먼저 영화는 이제 결혼식을 5시간 앞둔 트레이시네 집에서 시작된다. 학교 선생으로 아이들의 돈을 삥뜯어 친구 더그를 위해 준비한 총각파티에 나섰던 필이 총대를 멘다. 신랑은 어딘가에 잊어버렸고, 사막 복판에서 헤매고 있다는. 이 말을 들은 트레이시는 뚜껑이 날아가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해 영화는 이틀 전으로 시간이동을 감행한다.

장인이 빌려준 으리으리한 벤츠를 타고 라스베이거스로 여행을 떠난 네 명의 싸나이들, 더그, 필, 앨런 그리고 스튜는 정말 평생 잊을 수 없는 밤을 보내자며 호텔 옥상에 올라 독한 술을 마시며 결의한다. 그리고 뿅~!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장판이 된 호텔에 더그를 뺀 나머지 남자들만 남아 있다. 욕실에는 무시무시한 호랑이가 들어 있질 않나, 치과의사 스튜는 이가 빠졌고, 불붙은 소파는 자욱한 연기를 내고 있고 정말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바로 결혼이 내일로 들이닥쳤는데, 신랑이 없어진 거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 어젯밤의 기억을 찾는 과정이 유머러스하게 진행된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기 울음소리에 앨런은 자신이 카를로스라고 이름 붙인 아기를 둘러메고 더그를 찾아 나선다. 호텔 주차장에서 벤츠를 호출시켰는데, 경찰차가 나왔다. 어쨌든 경찰차를 타고 단서를 찾아 나서는 삼총사. 하루 동안에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스튜는 스트립클럽에서 만난 스트리퍼와 즉석 결혼식을 올렸고, <레인맨>의 더스틴 호프만을 연상시키는 좀 모자란 천재 앨런은 호텔 카지노에서 8만 달러나 땄다. 호랑이는 한때 챔피언이었던 마이크 타이슨에 집에서 훔쳤으며, 중국 조폭에게 걸려 흠씬 두들겨 맞고 자기 돈 8만 달러를 가져오지 않으면 납치한 더그를 돌려주지 않겠단다.

사고뭉치로 약물 루피스를 건배하던 독주에 타서 모든 문제의 발단을 일으켰던 앨런이 자신의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해서 카지노 블랙잭 판을 휩쓴다. 어렵사리 몸값을 마련한 삼총사는 중국 조폭 초우와 약속한 사막으로 나간다. 그 사막에서 돌려받은 더그는 화이트 더그가 아니라, 앨런에게 약물을 판 블랙 더그다. 그나마 합리적인 사고를 하던 스튜가 마침내 호텔 옥상에 갇혀 있던 더그의 소재를 파악하고 그를 구출한다. 자, 이제 결혼식장으로 돌진하는 삼총사와 달타냥.

우리와는 유머 코드가 맞지 않는 미국식 코미디라 2009년에 발표된 <더 행오버>는 우리나라에 개봉되지 못했다. 지금 속편이 개봉돼서 또다시 열풍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데, 어쩌면 그 성공에 힘입어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될지 모르겠다. 예전에 마이크 마이어스의 <오스틴 파워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흥행성적인 기대를 밑돌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마음껏 웃고 즐기면 되는 영화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름 몇 가지 눈여겨 볼만한 점도 등장한다. 우선 장인 시드는 라스베이거스에 간다는 사위 일행에게 선뜻 고급 차를 내주면서 적당히 놀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다. 결혼하기 전에 신나게 놀라는 세대를 뛰어넘는 암묵적 합의라고 해야 할까? 물론, 장인은 더 노골적인 말도 하는데 우리의 정서와는 좀 거리감이 느껴진다.

이 치들이 벌인 난장판이 어이없지만, 어쨌든 no one left behind 정신으로 잃어버린 친구 더그를 찾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싸나이들의 우정과 의리라고나 할까? 3년째 동거하는 여자친구에게 그렇게 갈굼을 당하는 스튜도 한 시간 단위로 여자친구에게 보고하면서도, 이 어처구니없는 로드트립에서 빠지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아니, 나중에는 더 적극적으로 막가파식 일탈을 보여주기도 한다.

최후의 결정타는 결혼식장에서 더그가 트레이시에게 속삭인 말이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물론 그 말이 속편에서 어떻게 지켜졌는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만. 과거는 과거다, 옛일은 모두 잊고 앞으로 잘살면 된다는 거다. 이런 교훈처럼 앨런이 찾아낸 디지털카메라에 잃어버린 시간이 저장되어 있다. 그걸 보면 영화의 “미싱 파트”가 고스란히 채워진다. <더 행오버> 시리즈가 계속된다면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관객들을 좌석에서 떨어뜨리지 못할 것 같다. 아, 다음은 방콕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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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스트 - Pries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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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한국 출신의 만화가 형민우 씨의 원작을 바탕으로 할리우드 영화 <프리스트>를 봤다. 잔뜩 기대하고 봤는데, 역시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더라는 말을 확인했다. 아직 만화를 보지 않아서, 만화와의 연관 관계에 대해 파악할 수는 없고 다만 앞으로 이 영화가 계속해서 제작된다면 무궁무진한 이야깃거리를 캐낼 수 있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공존할 수 없는 두 존재인 인간과 뱀파이어 전쟁이 벌어진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놀라운 능력을 뱀파이어 앞에 인간은 속수무책이다. 이때, 인간은 “프리스트”라는 비밀 병기로 단박에 전세를 뒤집는 데 성공한다. 프리스트의 활약으로 인류를 전멸시킬 것처럼 보였던 뱀파이어의 위협은 사라진다. 이 복잡한 이야기를 영화에서는 2D 카툰으로 아주 가볍게 처리한다. 역시 영화의 위력이라는 말밖에.

그런데 뱀파이어는 없어진 걸까? 교회가 지배하는 도시 밖 황무지에 외롭게 사는 루시 가족을 일단의 뱀파이어가 습격한다. 홀연히 등장한 보안관은 우리의 주인공 프리스트(폴 베타니 분)에게 조카딸이 뱀파이어에게 납치되었으니 구하라는 말을 던진다. 뱀파이어와의 전쟁에서 크나큰 공훈을 세운 프리스트는 교회 최고회의에 도시 밖으로 나가 조카딸을 구하는 걸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지만, 교회 우두머리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허락 없이 행동한다면 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경고도 빼놓지 않는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아닌가?

이런 협박에 굴할 우리의 프리스트가 아니다. 시속 250마일에 육박하는 속도를 자랑하는 놀라운 속력의 모터사이클을 타고 황야를 질주하는 프리스트. 도시 제리코에서 보안관과 만나 사라진 루시의 행방을 쫓기 시작한다. 보호구역에서 뱀파이어 병원균에 감염된 ‘하수인’에게 루시의 행방을 묻지만, 그들은 자신의 마스터에 대한 과신으로 프리스트를 얕잡아 본다. 해가 지고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뱀파이어와의 대결이 벌어진다. 신종 뱀파이어의 모습은 중세의 고전적인 드라큘라라기 보다, <나는 전설이다>에 나온 그런 식의 뱀파이어다. 태양과는 척을 지니 당연히 눈은 달려 있지 않다. 그런데도 그들의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하게 빠르다. 이건 뭐 총을 뽑을 새도 없이 당하겠는걸.

한편, 교회의 도시에서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한 프리스트 추적팀을 파견한다. 과거의 동료이자 프리스트를 사랑하는 프리스티스(매기 큐 분)가 합류해서 새로 출현한 뱀파이어의 본거지로 지목되는 솔라 미라로 출동한다. 그곳에서 엄청난 덩치의 하이브 가디언과의 대결은 이 영화 최고의 압권이 아닐까 싶다. 특히, 프리스티스가 던진 돌을 밟고 공중에서 하이브 가디언을 일격에 베는 프리스트의 내공은 일품이었다.

세 명의 나머지 프리스트들과 제리코를 쑥대밭으로 만든 현장에 도착한 프리스트 일행은 예전의 동료였다가 이제는 뱀파이어 퀸의 피를 받아 인간-뱀파이어가 된 “블랙 햇”이 이끄는 뱀파이어 군단과 마지막 대결을 치닫는다.

<트와일라잇> 시리즈 같은 달달한 뱀파이어 시리즈에서부터 하드코어 뱀파이어 영화까지 요즘 뱀파이어 영화가 인기다. 아마 그런 시류에 편승해서 제작된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을 지울 수가 없다. 제작비가 대략 6,000만 달러 정도 들었다고 하는데 흥행 성적은 시원치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형민우 씨의 원작의 할리우드 진출 쾌거라는 식으로 마케팅이 이루어지겠지만, 미국에서의 최종 스코어는 기대 이하인 것 같다.

우리나라 막장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출생의 비밀도 <프리스트>에 빠지지 않는다. 아, 잠깐 잊었다. 이 영화의 원작 만화가 우리나라 작가였지. 사실 뱀파이어 영화 <프리스트>는 오프닝보다 앞으로 이어질 시퀄과 프리퀄이 더 기대된다. 뱀파이어 전쟁은 멋진 프리퀄로 써먹을 수 있을 것이고, 잠깐 모습을 드러낸 뱀파이어 퀸과 대결 역시 흥미진진한 요소다. 다만, 문제는 시리즈의 시작이 시원치 않다는 점일 게다. 또 다른 네거티브 포인트로는 특정 종교의 색채가 너무 강하다. 권력화된 종교가 어떻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경고는 그런대로 봐줄만 하다.

사실 동료 프리스트와의 대결 구도를 예상했는데 민감한 부분은 뱀파이어 군단이 처리해 주었다. 폴 베타니가 맡은 프리스트 역할도 좀 더 종교적 계율과 인간적 성정 사이에서의 고뇌하는 모습에 초점이 맞추어졌어야 했는데, 그런 점이 부족했다. 블랙 햇과의 대결에서도 너무 일방적으로 얻어터져서 뱀파이어 전쟁에서 이런 실력으로 어떻게 뱀파이어를 이겼는지 궁금했다.

기대를 많이 했는데, 다 보고 나서 아쉬움이 많은 영화였다. 기대 중인 <혹성탈출>의 외전도 이럴까 봐 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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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 스무 살 때는 알 수 없었던 여행의 의미
박정석 지음 / 시공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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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여행기인가? 휘바~ 책을 읽기 전부터 한 가지 나의 머릿속을 헤집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화내지 않는다는 거지? 책의 소개를 스캔해 보니 아마 혼자서 떠난 여행으로 알고 있는데. 역시나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분주해진다.

강원도의 모처에서 닭과 개를 치고, 자그마한 농사를 짓던 지은이가 어느 날 돈오를 하고 여행길에 나서게 된다는 이야기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떠올리게 한다. 머리말에 나오는 대강의 코스만 봐도 이거 범상치 않은 여행길이 되겠구나 싶다. 동시에 그렇게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그가 부러웠다. 만날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인생을 사는 이들에게 유럽여행이란 이제는 그야말로 판타지일 테니까.

자칭 중년의 인지 무능력자라고 칭하는 작가의 정체를 오해했다.  첫 번째 기착지인 터키 편을 보고서야 지은이가 여자라는 걸 깨달았다. 책날개에 여자 사학을 나온 걸 봤으면서도 말이다. 아마 표지의 조금은 엽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여행가방(?)을 뒤집어쓴 탓으로 돌리자. 그런데 그거 아나? 여행길에서 남자보다 여자가 절대적으로 더 유리하다는 걸. 몇 번의 여행경험을 한 사람들은 모두 알 테니 구구절절한 설명을 생략하도록 하자.

사실 어떤 여행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여행지에서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석 씨는 책을 더 풍부하게 해줄 아주 멋진 동료 여행자를 만난 셈이다. 그의 이름은 줄리안이라고 했던가. 천국보다 낯설게 느껴지는 여행지에서 만난 동료 여행자와의 우연한 만남만큼 여행을 즐겁게 하는 것도 드물다.

사실 어떤 여행기를 읽어도 비슷하게 느끼는 거지만, 여행기에는 어떤 종류의 패턴이 있는 것 같다. 어떻게 해서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가. 그리고 코스는 어떻고, 어디 어디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인증샷을 찍어 남기자. 그러기 위해서는 디지털카메라가 필수적이다. 지은이는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소중한 카메라를 잃어버리는 통한의 체험을 했다. 아직 여행 다니면서 물건을 잃어버린 적이 없는 독자로서는 공감이 잘 안 되지만, 가장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아이템은 카메라가 아닐까. 베네치아에서 비엔나로 오는 열차에서 홀랑 털린 친구를 도운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이제는 누구나 다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디지털카메라는 여행자의 필수품이 아니라 여행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는 지적도 격렬하게 공감한다. 사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여행지에서 일정 속에서 그때의 느낌이나 생각을 모두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기록자는 카메라가 꼭 필요하다. 나중에 기억을 머릿속의 창고에서 불러 오는데 그만한 장비가 없으니까. 게다가 예전처럼 필름이 필요하지도 않으니 이 얼마나 편리한 도구란 말인가. 본말이 전도된 것 같아 조금 씁쓸하긴 하지만, 여행자가 카메라를 잃어버리는 건 전투에 나선 병사가 소총을 잃어버린 것하고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싶다.

터키와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거쳐 목적지 핀란드를 향해 거침없는 행군을 계속하는 지은이가 목적지로 다가갈수록 더해지는 여행의 피로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는 여행지에서의 사치로 맛있는 저녁 식사와 홀로 쓰는 숙소를 꼽았는데 사실 이 두 가지 모두 비용이 문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그냥 문득 떠난 여행길을 기록으로 남긴 것일까? 아니면 여행 에세이를 찍을 작정을 하고 여행을 나선 걸까. 후자라면 출판사에서 지원을 받았을 테니 비용 문제는 다른 여행자들보다 낫지 않을까? 참 궁금한 것도 많다. 어쨌든 여행 에세이를 읽으면서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을 대비해서 항상 드는 의문이 바로 ‘그래, 여행 버젯이 모두 얼마입니까?’인데 불친절하게도 어느 에세이에서도 그런 걸 알려 주지는 않더라.

개인적으로 다른 여행지에 대서는 이미 다른 여행 에세이를 통해 접한 적이 있어서 그다지 큰 흥미를 느끼진 못했는데 아무래도 여전히 낯선 발트 3국 편이 궁금했다. 다만, 최종 목적지 핀란드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과감하게 생략하고 건너뛰어 좀 아쉬웠다. 물론 장기간 여행의 말미에는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현상이라 충분히 이해가 됐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하더라도 당장에 내 몸이 피곤하면 귀찮은 법이니까.

외국여행이 일반화되면서 범람하는 여행 에세이와의 변별점을 기대했는데 사실 그런 점은 별로 느끼지 못한 것 같다. 그냥 동료 여행자의 편안한 글쓰기에 읽기에 부담이 없어서 좋았다. 하긴 그런 평범함 속에 진리가 숨어 있기 마련이니까. 아무래도 유럽 여행은 무리인 것 같고, 가까운 곳이라도 한 번 바람이나 쐬러 다녀와야겠다. 그리고 보니 강원도도 내겐 너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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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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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책을 샀는데, 하룻저녁에 다 읽어 버렸다. 그만큼 흡입력이 있다는 말일 게다. 2년 전, 너무 오른쪽으로 간 게 아닌가 싶었는데 <낯익은 세상>으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오고 있는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작 <강남몽>에 실망이 커서 그랬는진 몰라도 기대를 뺀 게 주효했을까. 따라지 인생이 판치는 꽃섬에 사는 인간 군상에 대한 서사에 흠뻑 빠져 버렸다.

주인공 딱부리는 올해 열네 살이다. 아버지는 교육대로 끌려가 부재중이고, 딱부리는 산동네 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는 엄마와 함께 살다가 아수라 삼촌을 따라 꽃섬에 입성한다. 이제 본격적인 소설의 무대가 될 꽃섬에서 그를 반겨주는 건 쓰레깃더미와 절로 코를 쥐어 싸게 만드는 악취다. 나보코프가 즐겨 쓴 공감각적 이미지의 중첩이 소설의 서두를 장식한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제 그들의 생활의 터전이 될 쓰레기 유치장에서 자재를 골라내 얼기설기 오두막을 짓는다.

아수라 아저씨의 빽으로 쓰레기 투기장 일선에 배치된 엄마를 따라 딱부리는 또래보다 훨씬 큰 덩치에 특유의 깡다구로 바로 쓰레기 분류 작업에 투입된다. 타인에 의해 폐기된 물건은 이들 쓰레기 수집꾼에 의해 철저하게 분류되고, 재생(再生)의 순간을 맞이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꽃섬, 샛강말 그리고 도회지 사람의 분류처럼 쓰레기에도 등급이 있다. 중산층 가정이나 미군부대에서 나온 쓰레기가 왔다란다.

꽃섬에 버려진 쓰레깃더미처럼 딱부리는 자신도 다른 이에 의해 유기(遺棄)된 게 아닐까 하는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이렇게 청소년 딱부리가 느끼는 소외(isolation)의 감정은 우리 사회에서 작금에 진행 중인 다양한 소외의 원형이다. 점차 공고화되는 경제력에 의한 보이지 않는 계급화는 꽃섬 사람들에 대한 외부인의 살벌한 시선으로 치환된다. 쓰레기에 묻혀 사는 꽃섬 사람들에게서 나는 악취는 주홍글씨처럼 그들을 따라다닌다. 땜통과 김서방네 막내의 도움으로 횡재한 딱부리가 도시에 나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악취와 거렁뱅이 표식처럼 달라붙은 주워 입은 의복을 바꾸는 것이다. 그들은 타인과 어울려 살기를 원하지만 어떤 물적 토대도 없는 그들을 사회는 매몰차게 거부한다.

이런 사회 구조적 모순의 경계에 작가는 땜통을 통해 꽃섬의 원주민인 김서방네 식구를 슬쩍 등장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이승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진짜 엄마는 도망가고, 아버지인 아수라와도 데면데면한 땜통은 신내림을 받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빼빼엄마를 딱부리에게 소개해 준다. 이놈의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어떻게 하나같이 정상적 삶의 궤도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걸까. 어쨌든 김서방네 막내가 메밀묵 타령을 하자 딱부리네는 추석을 맞아 정성껏 준비해서 그들을 위로한다. 작가는 왜 생뚱맞게 귀신 이야기를 집어넣었을까? 사회비판 소설에 판타지적 요소가 나오니 당혹스럽다.

추석 즈음에 나서 종교단체의 배급과 이어지는 사진 촬영은 지난 세기, 오지의 밀림을 방문한 선교사들의 그것과 다름없다는 묘사는 정말 일품이었다. 딱부리와 땜통은 영혼의 구원보다는 육신의 허기를 채우기에 급급하고, 전리품처럼 그들이 나눠준 송편과 라면상자를 옆구리에 낀 그네들의 모습은 처연하다. 발할라의 신전에서 파견한 헬리콥터는 꽃섬에 기생하는 파리와 모기를 소탕하기 위해 무시로 소독약을 뿌려댄다. 좋다고 헬리콥터를 쫓은 아이들에게 발할라 전사는 “니들도 소독되구 싶”냐고 호통을 내지른다. 그들에게 꽃섬 사람들은 파리나 모기 같은 존재라는 말일까.

아수라 아저씨의 막장드라마식 칼부림으로 소설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귀신의 도움으로 횡재한 딱부리는 땜통을 데리고 도시 나들이에 나선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맘모니즘에 물든 현실이 가감 없이 그려진다. 꽃섬이 딱부리와 땜통에게 생존의 공간이었다면, 역설적으로 꽃섬과 대척점에 서 있는 도시는 온전한 소비와 쾌락의 공간이다. 작가가 전작 <강남몽>에서 ‘강남’이라는 특정 공간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았다면, <낯익은 세상>에서는 실재하면서도 허구적인 ‘꽃섬’으로 공간이동을 시도한다. 비교 극과 극 체험이라고 해야 할까? 극락과 나락을 오가는 공간의 선택이 독자는 당혹스럽다.

소설에 꽃섬 사람들의 미래에 대해 어떤 언급도 없는 게 아쉽다. 대략 그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꽃섬에 둥지를 틀게 되었는지 과거는 유추해 볼 수 있지만, 불투명한 미래는 갑작스러운 화재와 함께 밤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창대한 시작과 전개와 비교하면 결말은 상대적으로 힘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물론, 문학이 작금의 현실을 반영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해피엔딩도 어울리지 않긴 매한가지다. 아무리 딱부리네가 귀신의 도움으로 횡재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시에 나가 성공해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식의 결말은 아슬아슬하게 버텨온 현실을 배반하는 설정일 테니 말이다.

살면서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공간에 대한 낯선 초대장은 만족스러웠다. 그런 공간을 담보로 해서 얻어낸 결과에 대해서는 시간을 두고 곰곰이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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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9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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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틀 전 밤에 잠자기 전에 조금만 읽고 자야지 하는 생각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비채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스물아홉 번째,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기리노 나쓰오 작가의 작품으로 민완 여탐정 무라노 미로가 등장하는 두 번째 작품과 만나게 됐다. 조금만 읽고 자야지 하는 내 바람과 달리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분주하다. 결국, 백 쪽이나 더 읽고 나서야 간신히 잠이 들 수가 있었다.

노란색 표지와 붉은색 코트를 입고 어디론가 뛰어가는 소녀의 일러스트가 인상적인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은 자살한 남편을 뒤로하고, 아버지 무라노 젠조의 뒤를 이어 탐정업계에 뛰어든 무라노 미로의 이야기다. 성인 비디오에 출연하는 여성 배우의 인권을 생각하는 모임을 이끄는 와타나베 씨의 의뢰를 맡게 된 미로. 얼토당토않은 성인비디오에 출연했다가 봉변을 당한 것으로 보이는 잇시키 리나라는 내레이터 모델을 찾는 것이 임무다.

확실히 여자 탐정이라는 이점을 충분히 살려 무라노 미로는 사건 해결에 필요한 단서를 하나씩 주워 모은다. 그 과정에서 이웃에 사는 동성애자 도모 씨에게 애정을 느끼기도 하고, 리나가 출연한 비디오 회사의 사장인 야시로와 관계를 맺기도 하는 일탈에 빠지기도 한다. 철저하게 중립을 지켜야 하는 탐정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거짓말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너무 완벽해서 빈틈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런 유능한 탐정보다는 미로처럼 조금은 허술하고 인간적인 매력을 보여주는 탐정 캐릭터가 더 마음에 든다고 할까.

미로는 사라진 리나를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도 마다치 않고, 고양이 시체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사건에 집중한다. 물론, 야시로 일당에게 험한 일을 당할 뻔도 하지만, 특유의 깡으로 위기를 정면 돌파한다. 문제는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야시로의 카리스마에 빠져 버렸다는 점이지만. 아무래도 홀로 뛰다 보니, 그야말로 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모양이다. 홋카이도에서 은퇴해서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고 있던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한편,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도미나가 요헤이가 죽었다는 뉴스를 보던 중 도미나가 역시 리나가 가지고 있던 “빗방울 화석”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미로는 이 “빗방울 화석”이 결정적 단서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소설은 사라진 AV 배우 리나 찾기와 그녀를 찾는 탐정 미로의 시시각각 바뀌는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가난해서 옷 따위에는 쓸 돈도 없거니와, 미행에 필수인 자동차 한 대 없어서 빌려야 하는 그녀의 처지가 안쓰럽다. 하지만, 명탐정의 딸답게 특유의 오기로 자신의 실수를 딛고 사건 해결에 나서는 미로의 활약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는 이성애자에게 동성애자 친구는 어울리지 않는 걸까. 도무지 접점을 만들어낼 수 없는 이웃 도모 씨 대신에 고른 야시로는 자신을 알리바이로 철저하게 이용한다. 그런 감정의 기로에서 흔들리는 그녀의 모습에 완전무결한 탐정의 그것보다 훨씬 더 정감이 간다.

기리노 나쓰오 작가는 사건에 얽힌 다양한 캐릭터를 등장시키면서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말해 그녀는 장르 소설을 쓸 줄 아는 작가다. 역시나 독자의 일반적 추리를 뛰어넘는 결말이 인상적이다. 마무리가 너무 급작스럽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들긴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느꼈던 스릴과 재미로 충분히 보상됐다. 덤덤했던 전편에 비해, 무라노 미로의 인간적인 매력이 듬뿍 밴 시퀄에서 이 시리즈에 반하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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