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범의 고백 - 법의학자가 들려주는 살인 조서 이야기
마크 베네케 지음, 송소민 옮김 / 알마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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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부터 자극적이다, <연쇄살인범의 고백>이라. 이 책의 저자는 채 마흔이 되지 않은 독일 출신의 법의학자 마크 베네케이다. 이십대에 쾰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서 법의학 검사관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지난 십 수 년 동안 매우 다양한 범죄들을 현장에서 경험한 바탕으로 해서 많은 저서들을 발표해오고 있다. 그의 연구 과제는 콜롬비아 출신인 희대의 연쇄살인범 루이스 알프레도 가라비토를 비롯해서, 동유럽에 뱀파이어리즘(흡혈귀를 믿는 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마르크 베네케는 증인들의 진술을 믿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범죄의 현장에서 발견된 물적 증거들 다시 말해서 흔적을 믿는다. 이는 앵글로-색슨 계통인 미국이나 영국의 그것과는 다른 독일 민족 특유의 증거제일주의에 근거한 것일까. 그가 말하는 “경계의 경계”에서 각양각색의 범죄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들을 독자들에게 보여 주면서 판단 역시 독자들에게 맡긴다. 다시 한 번 뛰어난 법의학자의 냉정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책의 시작은 카니발리즘과 뱀파이어리즘으로 시작한다. 미신이 횡행하던 중세에 뱀파이어에 대한 두려움으로 프로이센과 동부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 죽은 사체에 대한 시신훼손 행위가 자행되어 왔다고 한다. 망자가 산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몸이 아프고 질병에 시달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법정에서조차 그런 행위를 한 이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지 않으면서, 시신훼손 행위는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와서도 뱀파이어리즘에 대한 믿음으로 루마니아에서 2004년에 중세에서 시행되던 스트리고이(strigoi:루마니아에서 뱀파이어를 지칭하는 말)에 대한 “의례”를 거행했다고 한다. 물론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을 해서, 의례에 참가한 이들을 법원에서 금고형에 처하긴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이 의례를 정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카니발리즘은 듣기만 해도 오싹해지는 주제였다. 하위문화인 사도마조히즘 과정에서 살해된 마이베스 케이스와 콜로라도의 식인종으로 알려진 알페르드 파커 케이스가 소개된다. 1972년 실제로 발생했던 우루과이 럭비 팀이 안데스 산맥에서 불시착하게 되면서 비행기 탑승객 45명 중에 16명이 살아남게 된 사건 역시 그 중심에는 카니발리즘이 자리 잡고 있다. 1993년에 영화 <얼라이브>로도 소개가 된 적이 있는데, 역시 극한 상황에서 생존만이 유일한 목적이었다는 어느 생존자의 진술로 매조지 된다. 그에 비하면 1980년대 초반 파리에서 자신의 여자 친구를 살해한 이세기 사가와의 진술은 정말 들어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고 난 뒤, 무려 29년 동안이나 인정받는 지역의 유지이자 학교 교장 선생으로 성실(?)하게 살아온 경력의 영국의 고든 파크의 경우는 연쇄살인의 범주에는 들어가진 않지만 해당 장에 나오는 대로 “진실을 위한 오랜 추적”이라는 말에 이보다 더 적합한 경우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이 책의 제목으로 선정된 “연쇄살인범”의 정의에 가장 잘 들어맞는 인물들은 3부에 등장하는 독일 출신의 위르겐 바르취와 콜롬비아의 루이스 알프레도 가라지토이다. 지은이가 말한 대로, 이 둘은 시간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놀랄 만큼의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 유아성도착자이자, 아이들을 유괴해서 잔인하게 살해한 방법도 그렇지만 전혀 자신이 한 행위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바르취의 경우에는 자신의 범행대상을 ‘사랑’했다고까지 자신이 갇혀 있던 벽에 적어 놓았었다.

300여명의 어린이들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가라지토는 콜롬비아 언론에서 “야수”(La Bestia)라고 불렀다. 가라지토의 경우에는 당시 콜롬비아에서 진행 중이던 합산 형을 폐지하려는 움직임에 편승해서, 자신의 죄를 모두 인정했다. 그리고 종교에 귀의해서 개과천선한 삶을 산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를 담당했던 전문가들은 그는 전혀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만약에 풀려난다면 언제라도 다시 연쇄살인을 할 인물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그 외에도 미국의 플로리다 주에 허공에서 갑자기 떨어진 시체에 대한 놀라운 사실, 프로이센 제국 시절 희대의 사기극을 벌인 헨리테 빌케라는 이름의 황금공주, 그리고 천문학적 금액이 걸린 미스터리로 여전히 미결 사건으로 보이는 독일 베를린 출신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라스 올리버 페트롤의 자살사건 들이 차례로 소개가 된다.

책의 후반부에서 진짜 연쇄살인범이라기 보다는 완전범죄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건으로 페루의 잉카 오솔길에서 자신의 아내 우슬라 글뤽 테슬러를 살해하고, 완전범죄를 가장한 이스라엘 출신의 이란 테슬러의 케이스가 있다. 지은이를 필두로 한 독일에서 파견된 실사 팀들은 직접 잉카 길에 오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치밀한 증거수집과 현장재현의 과정을 거쳐 아내를 살해하고 거액의 생명보험금을 수령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이란 테슬러의 범죄를 밝혀내는데 성공한다. 말미에서 이 사건에 참여했던 수사관들의 말을 통해, 어떠한 비용이 들더라도 의도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말살시킨 사건에 대한 범행을 밝혀내는 것이 법치국가의 기본 임무라고 강조하고 있다.

마르크 베네케는 이 책을 통해, 이런 다양한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범죄사건들을 소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범행과 범행자의 특징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가에 역점을 두었다”(207페이지)라고 말하고 있다. 가장 비근한 예로 뱀파이어리즘에 대한 중부유럽에서 민간의 광범위한 믿음이 그렇다. 카니발리즘은 일상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범죄행위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지만, “안데스의 기적”과 같은 극한 생존의 경우에 있어서는 예외적으로 분류가 되는 것 같다.

저자는 이런 사건들의 소개를 통해 어떤 해결책이나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지는 않다.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성도착자들의 실제와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지극히 충동적인 범죄를 제어할 수 있단 말인가. 정황에 따른 모든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다만 마르크 베네케가 헤르만 헤세의 말을 인용한 것처럼 “밝음을 이해하려는 자는 어둠”(10페이지)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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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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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 교수의 <괴물의 탄생> 표지를 보면서 참 투박하게도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아니 게다가, ‘괴물’의 머리와 몸통 사이에 서울, 스카이(SKY), 한나라당 그리고 조선일보가 들어가 있는 미적분 값은 또 무언가? 그런데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우석훈 교수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것들이, 대한민국이 이미 기형이 되어버린 자본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나 건전한 국민경제로 올바르게 서기 위해서 청산되어져야 하는 요소들이 모두 예의 공식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작년 초에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불의 기억>을 읽고 나서, 미국식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피폐된 중남미의 처참한 경제 사회상황에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딱 일 년 만에 다시 이렇게 우리 사회를, ‘괴물’이 되어 버린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을 우석훈 교수의 ‘한국경제대안’ 시리즈 4부작 중 마지막 편에 해당하는 <괴물의 탄생>을 통해 적시하게 되었다. 우석훈 교수가 그렇게 경고하고 있는, 따르지 말아야 할 중남미식 모델로 진화하고 있는 ‘괴물’의 모습은 경악, 그 자체였다.

책의 내용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책의 제목부터 설명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괴물’은 말할 것도 없이 17세기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홉스의 저서 <리바이어던>에 나오는 바로 그 괴물 리바이어던에서, 나머지 탄생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훗날 파시즘의 도래를 경고했던 <비극의 탄생>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가 있겠다. 저자는 모두 세 개의 파트로 나눠, 먼저 세계사적 경제의 흐름을 소개하고, 두 번째로는 바로 한국식 기형적 자본주의 ‘괴물’의 탄생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괴물의 해체와 그에 따른 대안들을 각각 4장씩의 구성으로 해서 강의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우석훈 교수는 먼저 워밍업 수준으로 한국 경제학에 대한 계보 설명으로 시작을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안타까웠던 점은, 당장의 무언가 성장과 발전에 공헌을 하는 응용부분의 학문들이 아닌 순수학문들이 우리나라에서는 더 이상 발을 붙일 수가 없는 현실이었다. 경제학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1930년대 <조선사회경제사>라는 걸출한 저작으로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으로 한국의 경제를 설명하려고 했던 백남운 선생과 현재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장하준 교수 정도를 저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경제학자로 꼽고 있다. 이 두 인물 간의 시간적 격차는 자그마치 70년이나 되고, 아쉬운 것은 장하준 교수 후에 한국 경제학을 이끌어나갈 연구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고전경제학의 거장이자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  자본주의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1867) 그리고 자본주의 최대의 위기였던 대공황 탈출의 신호탄이었던 존 케인스의 <일반이론>(1936)의 등장의 과정을 통해 저자는 경제학의 큰 그림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경제주체 가운데 하나인 정부를 제 1부분으로, 기업을 제 2부분으로 그리고 사회적 기업과 생활협동조합, 복지단체 등을 통칭해서 제 3부분으로 나뉘어서 균형과 견제에 따른 발전의 모델을 제시한다. 이 중에서도 3부분의 중요성은 이 책을 통해, 계속해서 반복된다.

2부 괴물의 탄생을 통해 본격적으로 기형화된 한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시작한다. 1945년 해방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근대화와 더불어 자본주의 이식이 시작된다. 뉴라이트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 따위에 대한 논의는 패스하도록 하자. 대한민국 경제의 고속성장은 다음의 두 가지 개념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을 것이다. 소위 말하는 압축성장(condensed economic growth)과 재벌(Chaebol)이 바로 그것이다.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소장은 자본주의 방식이 아닌 계획경제식 방법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중심으로 해서, 경제에 올인하는 정책을 수립하고 매진하기에 이른다. 물론 정치적으로 유신독재틀 통해 국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면서, 선 성장 후 분배를 주장했는데 이 역시 재벌 위주의 정책으로 인해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통해, 자본이 축적되지 않은 상태에서 근대화와 동시에 경제개발이라는 두 마리의 토기를 잡기 위해선 불가피하게 해외 자본의 차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유입된 대외차관은 수출입국을 국정의 좌표로 삼았던 유신 치하에서, 수출경쟁을 벌인 재벌들에게 우선적으로 분배가 되어졌다. 이렇게 시작된 정경유착의 폐단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한국 경제의 치명적인 요소로 잠복하게 된다.

고속의 산업화와 근대화의 과정에서 완전고용의 신화가 도래하기도 했지만, 1974년 석유파동으로 인한 살인적인 물가상승, 그에 따른 성장률 둔화 그리고 국민들의 뜨거운 민주화 열기로 인해 불안했던 정치경제 상황들은 다시 전두환 일당의 군사 쿠데타로 개발독재 2기를 맞게 된다. 5공의 무시무시한 폭압에 의한 국가 자본의 재조정과 인플레이션 억제가 이루어지고, 저유가 엔고 등의 경제여건 호조로 인해 다시 고속성장을 경험하게 되는 과정들이 소개된다.

다음으로 국가 권력을 초월할 정도의 힘을 가진 재벌 삼성과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줄다리기가 그려지고, 1997년 IMF 사태로 대변되는 외환위기 이래 국가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지방권력을 행사하게 된 중앙의 경제 엘리트와 지방 토호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보수언론들의 연합으로 결국 2007년 MB정부가 들어서게 되는 과정들이 소개된다. 삼성의 이건희와 노무현은 한 때, 복지국가로 유명한 스웨덴식 발전 모델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미국식 모델로 극적인 전환을 하게 되면서 한국형 자본주의의 ‘괴물’은 더욱 더 기형적 성장을 하게 된다.

중앙의 경제 엘리트들과 지방 토호들에게 부와 토지 집중현상이 빚어지고, 김대중 정권 초기에 간신히 기초를 잡기 시작했던 사회복지정책들이 일제히 후퇴를 하기 시작하면서 소위 말하는 ‘약한 고리’에 해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 현상은 더욱 더 심화되기 시작했다.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수도권 집중현상으로 인한 지방의 소외와 고용불안으로 인한 대량실업 사태는 지역 발전의 불균형과 사회불안 요소가 되고 있다. 특히, 대기업 위주의 성장이 한계점에 달한 이 시점에서 모든 이들이 대기업에 취업하거나 고용불안을 피해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 이유가 저절로 설명이 되었다.

다시 여기서 우석훈 교수는 대안경제로서의 3부분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정부나 대기업과는 전혀 작동방식이 다른 사회적 기업, 가족형 기업, 생협 혹은 생산자협동조합들의 활동을 통해 3부분이 담당하는 경제를 활성화시켜, 장기불황과 같은 위험요소에 대비해서 국민경제를 안정시키자는 것이 저자의 핵심주장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하지만, 국가정책이 오직 재벌위주의 성장과 소득증가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달성되기 어렵다는 맹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한민국 경제는 앞으로 수년 안에 극적 전환점에 서게 되리라는 것이 또한 우석훈 교수의 전망인데,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걸었던 파시즘의 길을 쫓게 될 것인지 아니면 현재 몇몇 나라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3부분을 통해 균형과 조화의 방법을 택해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게 될 것인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위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거라고 전망하고 있다.

자, 이제 문제점들을 죄다 살펴보았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대안을 찾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저자는 수년간의 연구 결과를 다음의 한 문장으로 깔끔하게 요약한다. “에너지와 자원의 투입은 줄이고, 지식과 문화의 투입은 늘리는 국민경제”(217페이지)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가장 먼저 지목하는 것은 거의 망국병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사교육 문제의 해결이다. 해마다 사교육비에 지출되는 비용은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경제에서 전혀 제 구실을 못하는 사교육 시장의 폐해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다. 모두가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내 아니만 잘되면 장땡이다라는 사고를 버리고,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꾸라는 것이다. 앞으로 대학은 정말 학문적으로 심층적인 공부를 하고 싶은 이들만이 가는 그런 시스템으로 바뀌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혁신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의 대졸자들이 스위스의 고졸자들보다 경쟁력에서도, 소득에서도 떨어진다는 말은 더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지방 토호 세력의 타파를 위해 건전하고 상식적인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방자치의 실현이 필요하다. 우석훈 교수가 말한 대로, 지방이 한번쯤 방문하고 싶은 곳이 아닌 정주(settlement)의 개념에서 정말 살고 싶은 곳으로 거듭나게 되기를 바란다. 내년에 있을 지방선거에서 다시 한 번 진정한 의미에서 풀뿌리 민주주의의 승리를 기대해 본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저자는 정부와 기업 그리고 세 번째 경제주체로서 작용하게 될 제3부분의 육성을 주장한다. ‘삼각균형의 국민경제론’이라는 멋진 타이틀로 시작을 하고 있는데, 우선 전통적인 사회기관인 종교단체들이 그 역할을 맡아주길 주문한다. 물론 기업과 정부의 협조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미국의 록펠러와 같이 사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기업들이 그러하듯이 부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차원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제3부분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초기에 정부의 협력과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제 더 이상 나 혼자 잘살겠다는 ‘부자 되세요!’의 표어는 필요 없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이상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운명 공동체이다. 내가 아닌, 우리가 잘사는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이다. 정부나 기업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고, 바라만 볼 것이 아니라 보다 경제주체로서 자주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획일적이고 암기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잃어버렸던 창의력과 독자적인 사고를 되찾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요구될 것이다. 아울러 일중독이 아닌, 보수를 조금은 덜 받더라도 인간적인 삶의 영위를 위해, 그리고 보다 크게는 건전한 국민경제 형성을 위한 개개인의 노력과 자각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순간이다.

<괴물의 탄생>과의 만남은 괴로웠지만, 이러한 깨달음으로 인해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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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 1 - 맛의 시작
허영만 지음 / 김영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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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만 화백의 <식객>을 마침내 원전 그대로 접하게 됐다. 아마 <식객>처럼 원소스 멀티유즈(one-source multi-use)의 전형적인 예도 없을 것 같다. 이웃 일본에서는 이미 일반화된 경향이지만,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식객>이 원조가 아닐까 싶다. 만화에서 출발을 해서, 영화 그리고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더 대단한 것은 만화-영화 그리고 드라마 모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개의 경우가 그렇듯이 원전의 탄탄한 구성과 성공적인 캐릭터의 창조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한 허영만 선생의 치밀한 사전조사가 뒷받침이 되어서일 것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로 허영만 선생은 “쌀”이라는 소재를 골랐다. 굳이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도 우리의 식생활에서 쌀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근대화 이전 우리나라는 농업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였다. 그리고 쌀은 우리의 주식으로 우리네 식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물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미국으로 입양된 제임스는 어려서 씹어 먹던 쌀맛 하나만을 가지고 자신의 부모를 찾아 나선다.

이 이야기는 기묘한 공명을 울리고 있다. 우리의 뿌리를 찾는 시발점은 바로 쌀이라는 거다. 그리고 허영만 선생이 만들어낸 ‘성수’라는 전국방방 곡곡에 발품을 팔아 가며 우리네 농산물들을 차로 공급하는 청년이 등장한다. 그의 도움으로 결국 자신이 그 맛의 기억을 잃지 않고 있던 순천의 해룡면에서 꿈에도 잊지 못하던 ‘올게쌀’을 찾게 되는 제임스. 에피소드의 처음에 등장하는 <우리쌀 지키기 백일 운동>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허영만 선생의 설명이 진중하게 느껴졌다.

다음은 명절을 맞이하야 고향집을 찾은 성찬이 이웃집 할머니에게 생선을 건네주고, 어릴 적 얻어먹던 고추장 굴비를 답례로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시멘트로 지어진 아파트에 살면서, 이웃에 누가 사는지 그리고 이사를 가는지 마는지 전혀 교류와 소통이 없이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네 삶의 모습에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짧은 이야기였지만 긴 여운이 남는 에피소드.

집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만든다는 가을 전어 맛을 소재로 한 3탄, 가을 전어 맛은 깨가 서말에서는 한강 인도교에 올라가 투신하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는 남자를 성찬이 텔레비전 중계로 보다 말고 직접 전어와 번개탄 숯불로 구출해내는 모험담이다. 조금은 황당한 구성이긴 했지만 그만큼 가을 전어 맛이 일품이라는 말이겠지? 전어(錢魚)는 말 그래도 먹다가 보면 돈 생각을 못하게 돼서 전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던가.

<36-2-0-60>은 약간의 수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번 편에서는 곰탕이 주인공인데, 장맛은 뚝배기라고 하듯이 음식이건 사람이건 어울림이 있어야 한다고 허영만 선생은 말하고 있다. 그야말로 청바지 입고 갓을 쓸 순 없잖은가. 레스토랑과 같은 화려한 식당이 곰탕집으로 어울리겠는가? 장터 같이 시끌벅적함이 곰탕과 같이 보통 사람들이 즐기는 음식에는 제격인 것이다. 게다가 수십 년간 만드는 방법이 바뀌지 않고 한결같이 유지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말이다. 무슨 일이든, 가장 기본적인 것에 대답이 있는 것이다.

1편의 마지막은 다시 ‘밥맛’으로 돌아온다. 성찬은 차를 끌고 다니며 야채장수를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신문사 기자인 진수를 만나게 된다. 넉살 좋게 ‘진수성찬’ 같은 커플이 어딨겠냐며 너스레를 떤다. 한편, 일본에서 온 손님들을 대접하는 역할을 맡게 된 진수는, 무언가 가장 한국적인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데이트를 미끼로 성찬을 꼬신다. 과연 성찬이 이 때 준비한 것은 무엇일까?

만화에서라면 아마 전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일본에서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주제들에 이르기까지 만화적 상상력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래서 허영만 선생이 후기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기존에 일본에서 나온 만화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캐릭터의 창조에 고심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등장하게 된 주인공이 바로 차로 야채를 파는 성찬이다. 성찬은 우리네 식재료와 식생활에 그 누구보다도 장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등장하게 되는 수많은 에피소드를 통해 성찬은 그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형성해 나가게 된다. 우리가 본 영화 <식객>에 나오는 “대령숙수” 에피소드는 만화 <식객>의 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시간적 제약이 영화보다는 덜한 드라마에서 소개된 에피소드들이 더 많을 것 같다. 드라마는 보질 못했으니 패스하도록 하자.

오늘도 만화적 상상력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계실 허영만 선생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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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습격 - 영화, 역사를 말하다
김용성 지음 / MBC C&I(MBC프로덕션)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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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불거진 뉴라이트가 주도하는 교과서 파동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역사인식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예전에는 관찬 사서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던 역사는 이제 열린 공간에서 누구나 자신만의 역사관을 가지고 벌어지는 현상들을 종합해서 판단할 수가 있게 되었다. 오늘날 역사를 접할 수 있는 루트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하다. <제국의 습격>에서 지은이 김용성 기자는 이런 다양한 방법론 중에서 영화를 통한 역사 보기의 예를 제시한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명확하게 이 책의 서술 의도를 밝히고 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 지금의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래 무자비하게 시작된 서양의 제국주의의 침탈의 근원을 찾아, 식민지화 과정과 그리고 우리의 의식 밑에 깔린 뿌리 깊은 서양우월주의 등을 해명하려는 4대륙에 걸친 긴 여정을 시작한다.

굳이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 이론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유럽 제국들은 신대륙에 착취한 금은과 같은 재화를 바탕으로 종래의 지중해 중심의 무역에서 벗어나 대서양을 넘나드는 대양무역에 나서게 된다. 르네상스 기의 상업의 발달로 자본의 축적을 통해, 산업혁명기를 맞아 비약적인 생산의 발전을 이루게 된 영국, 프랑스,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 등의 유럽 제국들은 아메리카,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로 자원 침탈과 상품 시장 개척을 목표로 한 식민지 경영에 나선다.

아시아에서는 동북아시아 3개국인 중국-일본 그리고 한국 순서로 서구 열강의 강압에 못 이겨 종래의 쇄국정책을 폐지하고 개항을 하게 된다. 이후의 과정은 각국마다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전개되긴 했지만, 일본을 제외하고 모두 전쟁을 겪거나 식민지화되고 만다. 이중에서 홍콩의 예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100년도 넘게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지난 1997년 중국에게 다시 반환된 홍콩은 현재 1국2체제로 운영되고 있는데, 김용성 기자는 <차이니즈 박스>와 <화양연화>로 홍콩에 대한 단상을 전개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감독인 왕자웨이는 시간보다는 공간적 구성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는 경향이 짙다. 전작들에서 점프 컷으로 속도감의 미학을 보여 주었던 왕자웨이는 <화양연화>에서는 느린 영상으로 홍콩이라는 공간 속에서 실종된 관계에 중점을 둔다. 마치 오늘을 사는 홍콩인들에게는 이념보다는 홍콩이라는 공간이 더 소중하다는 듯이 말이다.

다음은 이 책의 핵심인 아메리카다. 지은이는 라틴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로 나눠서 서로 다른 장으로 구성을 했지만 라틴아메리카와 미국으로 대변되는 북아메리카는 하나의 뿌리에서 둘로 나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콜럼버스의 도래 이래, 시작한 스페인의 식민지 경영은 포르투갈을 제외한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석권하기에 이른다. 제국주의 침탈의 공식처럼 선교사와 탐험가들이 앞장서면 그 뒤를 이어 군대가 진주하고, 경찰력과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들이 닥치면서 본국에서 온 정주민들을 지원한다.

원래 그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은 그들에게 수탈과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게다가 식민지 경영을 하면서 동시에 이뤄진 노예무역은 인류사의 큰 오점을 남겼다. 식민화 과정에서 발생한 계급구조는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이룬 후에도 계속해서 국가통합과 발전에 저해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아울러 식민 모국에의 종속과 소위 매판자본들의 발호는 민중들에게는 지배계급만 제국주의 국가의 총독에서 자국의 특권계층으로 바뀌게 했을 뿐이었다.

미국의 경우 역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루면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공화국 건설을 모토로 삼았지만, 그 자유가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노동력 부족을 채우기 위해 아프리카로부터 유입한 엄청난 수의 흑인들은 예외였다. 이런 이유로 해서, 미국은 건국 이래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인종문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남북전쟁이라는 내전을 통해 내부문제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한 미국은, 본격적인 팽창에 나서게 된다.

이런 점에서 미국 독립전쟁기를 다룬 멜 깁슨의 주연 <패트리어트>와 폴 해기스 감독의 <크래쉬>는 아주 적합한 케이스 스터디라고 할 수가 있겠다. 영국의 폭정에 항거해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독립의 대의를 앞세우지만, 노예제도와 같은 악습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대영제국의 압제에는 항거하지만, 자신들이 같은 인류인 흑인들에게 저지른 폭압은 정당하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모순 그 자체였다. <크래쉬>는 이민자들의 힘으로 세워진 미국이 이제는 더 이상 이민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면서, 빚어지는 인종간의 갈등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 수작이다. 나와 다름으로 시작되는 차별이 아닌, 상호간의 이해와 소통의 필요성이 짚어내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 다루고 있는 아프리카의 근현대사는 한 마디로 말해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오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현지에 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이, 오직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인위적으로 설정된 국경선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원침탈과 인종차별에 갈등을 비롯한 모든 문제들은 바로 식민지배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가 있다. 특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을 맡았던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자원약탈, 부족 간의 정쟁 그리고 소년병 문제에 이르는 오늘날의 아프리카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김용성 기자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서구인들의 시선이 아닌 아프리카인들의 시선에서 보여지는 사실들에 주목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동안 우린 너무나 할리우드에서 찍어내는 영화들에 길들여져 온 것 같다. 할리우드 영화문법은 오직 돈벌이가 될법한 영화들과 그 짝을 이루면서 우리의 의식구조를 정형화시켜온 건 아닐까? 김용성 기자는 이 책 <제국의 습격>을 통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영화들을 통해서는 새로운 시선에서의 접근을 그리고 조금은 생소한 영화들을 통해서는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던 사실들에 대한 계몽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캐나다 정주의 역사에 대해서는 미국의 그것에 비해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아카디아(Acadia) 정착지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다시 한 번 영상언어로써, 영화의 위력에 대해 그리고 그 다양한 해석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 독서경험이었다.

* 내가 찾은 오탈자

1. 어는 -> 어느 (21페이지)
2. 야마다 지로 -> 아사다 지로 (74페이지)
3. 중일전쟁 -> 청일전쟁 (77페이지)
4. 오스만트루크 -> 오스만투르크 (97페이지)
5. 스페인총독 -> 갈리아총독 (99페이지)
6. 투르먼 -> 트루먼 (115페이지)
7. 1789년 -> 1798년 (263페이지)
8. but we tried to fight -> but we tried to fight it (27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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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후회남
둥시 지음, 홍순도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책을 집어 드는 순간, 대략 5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부피에 심적 부담감이 엄습해 왔다. 띠지에 둘러져 있던 “엽기 코믹 화제작”이라는 말이 준 기대감은 당황한 느낌으로 전이가 됐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이런 걱정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가 있었다. 역시 재밌는 책은 두께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표지에 등장하는 주인공 쩡광셴(曾廣賢)이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틀어져 있는 일러스트가 보인다. 마치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뒤안길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으로, 이 책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후회”와 명징한 접점을 이룬다. 1966년 생으로 소위 ‘신생대(新生代) 작가’군이라고 일컬어지는 작가로 알려진 둥시(東西)의 작품으로, 우리나라에는 <언어 없는 생활>에 이어 두 번째로 소개되었다.

주인공 광셴(廣賢)의 이름에서 보이듯이 그가 ‘널리 현명’했다면 이 책은 아예 이 세상의 빛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부주의한 언행으로, 더 속되게 표현하자면 그 놈의 세치 혀 때문에 갖은 사건 사고를 만들어낸다. 어느 날, 우연히 흘레붙은 개들을 구경하던 광셴의 아버지 쩡창펑은 지난 10년간 섹스리스(sexless)한 삶의 보상을 엉뚱하게도 이웃 처녀 자오산허를 통해 해결하려 든다. 이 광경을 목격한 광셴은 첫 번째로 사고를 치게 된다.

광셴은 이 사실을 바로 자오산허의 오빠이자 중학교 교장인 자오완녠에게 일러바친다. 결국 당시 중국을 휩쓸던 문화대혁명 기간에 홍위병들에게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는 광셴의 아버지. 설상가상으로 그의 어머니에게 집적대던 동물원 원장의 비행을 목격한 광셴은 어머니를 모욕하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동물원 호랑이게 몸을 던진다. 이 와중에 여동생 쩡팡마저 잃어버리고, 그야말로 쩡씨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풀려난 아버지 창펑은 자신을 밀고한 사람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말에 분노한다. 광셴은 이 화근덩어리인 자신의 입을 가차 없이 손으로 내려친다. 그리고 이 장면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독자들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장면이 될 것이다.

이런 광셴을 동정하는 소녀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샤오츠. 당시 대유행하던 샤팡(下枋)을 하기 위해 멀리 농촌지역으로 광셴도 갈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샤오츠도 자원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특유의 우유부단을 발휘해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간다. 샤오츠의 적극적인 유혹을 아버지의 부정으로 인한 트라우마 덕분인지 그는 목석처럼 이겨낸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뭐 늘 그렇지만 떠난 버스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 천신만고 끝에 샤오츠를 찾아가지만, 샤오츠는 같이 하방한 위바이자와 스캔들로 한차례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야말로 엽기일색이다. 동물원에서 같이 일하는 자오징둥과 그가 기르는 개 나오나오의 부적절한 관계를 너무 크게 부풀려서 그만 자오징둥을 자살하게 만들고, 친구 위바이자의 충동질에 그만 자오징둥의 사촌누나인 장나오의 방에 침입했다가 강간범으로 몰려 자그마치 10년간의 형무소 생활을 하기도 한다. 그 와중에 동물원 동료인 루샤오옌과의 연애로 무모하게 탈옥을 시도하다가 잡혀 추가형을 선고받기도 한다. 게다가 자신의 동료 리다파오의 탈출을 밀고해서 자신의 형기를 단축시키기도 한다. 그냥 조용하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좋으련만, 참지 못하고 자신의 배신을 고백했다가 리다파오로부터 모욕을 받기도 한다.

물론 이런 그의 엽기 행각들과 주체할 수 없는 입놀림으로 그렇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광셴의 교육효과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 어쩌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될 말들만을 해서 고난 속으로 뛰어 드는지 책을 읽는 내내 혀를 찼다. 장나오의 무고로 10년간 감옥살이를 했으면서도, 자신을 옥바라지하고 아버지 창펑의 수발을 든 루샤오옌 대신 장나오를 선택하는 광셴.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그런 그를 말리지만, 그는 항상 엉뚱하고 잘못된 선택만을 해댄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꿈에도 그리던 장나오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지도 못한다. 이 장면에서는 미국 영화 <40살까지 못해본 남자>의 주인공 생각이 불쑥 들었다.

중국 문학에서 문화대혁명을 빼놓고서는 어떤 이야기도 전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다 들 정도로 문화대혁명은 중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으로 말이다. 소설 <미스터 후회남>에서도 어김없이, 문화대혁명의 여파를 엿볼 수 있었다. 많은 중국 소설들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성장통 역시 빠지지 않았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그리고 다시 장년으로 넘어가는 주인공 광셴의 변신은 중국 현대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자본가 계급의 아들로 태어나, 노동자들이 대우를 받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그의 처지는 마치 광셴이 장나오, 룻샤오옌 그리고 샤오츠 사이에서 갈팡지팡하는 계급적 고뇌의 승화로 대체된다. 아예 모택동 사후 소위 4인방이 국정을 농단하던 시절은 광셴의 암흑의 교도소에서의 교정생활로 갈음해 버린다. 그는 죄 없이 무고로 감옥에서 10년의 청년을 썩어 버린 것이다. 이것 역시 문화대혁명 후,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반강제로 시골이나 농촌에서 하방된 지청(지식청년)들의 모습이었다.

거듭되는 친구와 사랑한다고 믿었던 여인으로부터 배신, 그리고 자신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꼬이기만 하는 광셴의 인생은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자신의 부주의한 언행으로 비롯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인생이 꼬일 수가 있을까. 이것 역시 문화대혁명기의 대다수 중국 인민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떤 방향성의 제시도 없이, 혼란과 무질서 그리고 끔찍한 폭력만이 난무하고, 서로를 믿을 수가 없었던 사회적 분위기를, 광셴이라는 개인을 통해 우회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다.

한편으론 아버지의 부정을 비난하며, 청교도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광셴은 미녀 장나오를 몰래 훔쳐보는 관음증으로 대변되는 이율배반적인 환상을 품기도 한다. 이것 역시 사회주의 시스템 아래서, 서구 자본주의의 폐해라고 배척하던 물질주의에 대한 인민들의 멈출 수 없는 동경만큼이나 모순적인 모습이었다.

작가 둥시가 빚어내는 한 편의 추리소설을 연상케 하는 치밀한 구성과 적재적소의 캐릭터 배치 등은 감탄할 만했다. 예를 들어, 광셴은 장나오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미 둥시는 사전에 미리 철저한 준비를 다 해두었다. 그리고 한 번 등장한 인물들은 쉬이 흘려보내지 않고, 빈틈없는 인과관계로 묶어 놓기도 한다. 둥시가 창조한 광셴이라는 걸출한 못난이를 통해 쉴 새 없이 퍼뜨리는 해학과 익살의 바이러스는 그래서 책을 덮고 나서도 여전히 머릿속에서 준동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경고 하나! 너무 밤늦게 읽기 시작하지 마라, 새벽까지 잠을 못자는 수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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