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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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8권] 황제들은 건강하지 못하였고 태후는 끊임없이 황위를 노린다. 대인수가 황위에 오르자 사직은 안정되고 민심이 빠르게 안돈되었지만 을사유신을 선포하자 또다시 반란에 휩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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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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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발해(大渤海)

                                                                                               김홍신

7. 동경천도와 역모

  대흠무의 명을 받은 황자 대굉임이 발해 강역 순람에 나섰다. 그 무렵 당제 이융기는 양국충의 간언을 받아들여 파촉으로 몽진하기로 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배를 곯은 호위 군사들이 폭동을 일으킬 지경이 되자 호위대장 진현례는 그들의 관심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기 위하여 양국충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의 아들 양훤도 아비와 같은 신세가 되었고 양귀비의 언니 한국부인과 진국부인도 칼날 아래 이슬이 되었으며 괵국부인도 아들 배휘와 양국충의 아내 배유의 목을 베고 자결하였다.

 결국 이융기는 양귀비를 포기했고 고력사가 그녀의 목을 비단 수건으로 졸랐다.

 

  이융기는 파촉으로 도망가고 태자 이형은 영무로 도망쳐 그곳에서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황위에 올랐다. 이융기는 45년 동안 지존의 위치에 있다가 황위를 아들에게 빼앗겼다.

 오장성 성주 설기는 소문이 좋지 않았는데 그의 아들 설개는 사납고 욕심이 많았다. 그는 대굉임 일행을 염낭이 두둑한 장사치로 오인하여 털기로 하고 싸움을 벌이다 죽임을 당했다. 대굉임이 순람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대흠무는 신하들에게 상을 내려 노고를 치하하는 한편, 설기를 징치하기 위해 장수 두범치를 어사로 명하고 설기를 압송하라 명했다.

 

 

  정유(757)년 정월, 연나라 황제 안녹산이 그의 아들 안경서에 의해 살해되었다.

당제 이형은 안녹산의 죽음으로 원기를 회복했다. 이예가 이끄는 당군이 연나라 군사들을 대파하고 장안에 입성하였고 사사명은 반란군을 죽이고 하북의 13주와 10만 군사를 당제 이형에게 바쳤다. 이형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귀의왕에 봉하고 범양장사 겸 하북절도사로 명했다.

 

  한번 배신하고 역심을 품었던 자는 반드시 역심을 품는다. 이형은 이듬해 장수 오승은에게 사사명을 주살하라며 그를 범양으로 보냈다. 눈치 빠르고 주도면밀한 사사명이 이형의 암살 음모를 모를 리 없었다. 사사명은 오승은을 참살하고 무술(758)6, 13만의 대군을 일으켰다. 그는 안경서의 구원 요청을 핑계로 단숨에 위주를 점령하였고, 기해(759)년 정월 초하루 연나라 황제를 칭하고 즉위했다.

 

 

 대흠무는 당나라에 원군을 보내자고 주청하는 대소신료들에게 가르친다. 본디 동이(東夷)는 동쪽의 군자가 사는 땅이라는 뜻으로 쓰였는데 중화 사람들이 오랑캐라 그 본래의 뜻을 바꾸었으며, 대의명분을 밝혀 세운다는 춘추필법 또한 세 가지 원칙, 첫째 존화양이(尊華攘夷)라 하여 중화를 높이고 다른 나라를 깎아내리고, 둘째 상내약외(詳內略外)라 하여 중화의 역사는 상세히 기술하되 다른 나라 역사는 간단히 쓰며, 셋째 위국휘치(爲國諱恥)라 하여 중화를 위해 수치스러운 것은 모두 숨긴다는 원칙에 의해 씌어졌다는 것이었다.

 

 사사명은 하북과 하남을 점령하고 낙양으로 진격하여 경자(760)년 낙양을 함락하고 당나라를 압박했다. 그러나 사사명 역시 안녹산과 마찬가지로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해 4월 당나라의 이융기가 78세로 하직하고 황제 이형도 승하했다. 그리고 장남 이예가 황위를 물려받았다. 나라 밖이 어지러운데 발해 강역은 태평성대였다. 대흠무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열일곱 살 난 대술묘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그녀의 아버지 대견강은 당나라 영주에서 호가호위하던 자로 대흠무의 고구려 출신 귀화인 우대정책에 따라 도성에 들어왔었는데 강직한 신하들과 특히, 양소화는 그들과 해적질까지 해서 돈을 모은 그녀의 오라버니 대원의가 근신이 되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대원의는 조세와 관작 등 여러 개혁 방안을 건의하면서 국구 고원을 귀양 보내고 동왕을 태자로 삼으며 양소화를 삭탈하라고 상소했다. 양소화가 대원의의 음모로 살해당했다. 대흠무는 칙서를 내려 조세를 개혁하고 관작을 일대 쇄신했다. 신석정과 난곡 정도를 제외한 원로대신 거개가 물러나고 젊은 인재들이 근신이 되었다.

 

  고구려 후손으로 산동의 맹주가 된 이정기는 천하를 경략할 꿈을 꾸었다. 등주에 세워진 발해관에서 이루어지는 교역량은 엄청났다. 당과 신라는 물론, 일본과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었고 발해가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병진(776)년 춘삼월, 황후 고흔정이 생신 축하연을 받고 그날 밤 급서했다. 먹은 음식을 토하고 입 주위가 검은 빛을 띤 채 절명한 것은 독살된 게 분명했다. 궁중 음식을 담당하는 이진무, 두필효, 임향기가 잡혀압송되었다.

 신석정과 무명선사까지 나서서 황후를 검시하여 원인을 규명하고 범인을 밝혀내자고 하였으나 대흠무는 결단코 이를 거부하였고 대굉임에게 국문을 명하였다. 국신의 수장에는 뜻밖에도 대중정 고잉을 명했다.

  드디어 엄청난 죄상이 밝혀졌다. 주모자는 국구 고원, 황자 대굉임 비인 고은공의 아버지 고극사, 대내상 고건의 아들 고군, 도독 고학성, 왕사감이었다. 고원과 고극사, 고군은 고구려 왕손으로 고원의 아들 고용을 옹립하기로 하고 황제를 시해할 역모를 꾸몄다고 했다.

 이진무, 두필효, 임향기는 효수하고 고원과 고극사, 고군은 삭탈하여 유배하였으며 왕비 고은공은 폐하여 사가로 보내졌고 관련자들도 각각 문책을 받았다. 그런데도 황제 앞에서 진언을 하던 신석정과 무명선사마저 삭탈하여 각각 태백산과 홀한해에 있는 안국사로 유배하라는 칙지가 내려졌다.

 

  대원의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신석정과 무명선사를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대흠무는 황후의 장례를 치른 후 이미 대원의의 누이동생 대술묘가 비빈의 자리에 있는데도 대원의의 딸 대귀령을 빈으로 맞아 들였다. 얼마 후 신석정이 호환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아들 셋이 벼슬을 버리고 안국사로 가서 무명선사의 뜻에 따라 다른 곳으로 잠적했다.

 

  대흠무는 조세개혁만으로 구신들을 다룰 수 없어서 대원의의 뜻에 따라 화폐개혁을 하기로 했다. 대원의는 내밀히 철광산과 동광산을 사들였고 측근들에게 더 많은 말을 사들여야 한다고 했다. 태복경으로 발해의 군마를 관장하는 대원의가 더 많은 말을 요구하는 것은 발해가 전쟁을 대비하거나 대원의가 군사를 일으키거나 둘 중 하나를 뜻했다고잉이 대원의에게 천하를 얻으라고 은근히 부추긴다. 이정기의 심복으로 있는 난욱은 황제를 비판하는데 거침이 없다.

 

  기미(779)늦여름, 발해 태자 대굉임이 병사했다. 대흠무는 한 달 넘게 편전에 나오지 않았다. 황제가 기력을 잃으면서 대세는 더욱 대원의에게 기울어졌.

이정기는 번진을 연합하여 당나라 대군과 맞섰지만 악성 종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대업은 장남 이납에게 위임되었으나 전투에서 패하고 항복하고 배신하면서 번진 연합은 패퇴했다. 그러나 이납은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번진 세력을 다시 연합하여 제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

 

  자신의 딸인 현비 대귀령을 황후에 책봉하려던 대원의와 누이인 귀비 대술묘 사이에 갈등이 생기자 대술묘는 황후를 시해한 일을 들어 대원의를 압박한다. 난욱은 대원의에게 누이 귀비를 제거하라고 조언한다. 대원의는 난욱의 의견을 듣고 여론을 조성한 다음 대흠무에게 동경 천도를 주청한다. 대흠무는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아 천도를 반대했으나 술사, 도사, 무자는 물론이고 승려와 일관, 현비와 문무 대신들은 한결같이 천도를 주장하며 대흠무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갑자(784)3월 그믐밤에 귀비궁이 화염에 휩싸여 귀비와 궁녀들이 타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황후는 독살당하고, 태자 대굉임은 병사하고, 귀비 대술묘는 불에 타 죽었으니 대흠무의 심사는 몹시 어지러웠다. 그는 용단을 내려 천도를 명했다.

 

  드디어 을축(785)년 봄, 동경으로 천도했다. 대흠무는 황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원의에게 황자에 준하는 왕호를 내려 한왕으로 삼았다. 한왕 개국공 대원의는 진단대장군의 작첩까지 받았으니, 인신으로는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었다.

 

  대흠무는 세 황자들은 상경에 남겨두고 귀비 소생의 대성진과 공주들만 데리고 동경으로 왔으며, 근신 중의 근신이요 아부의 달인인 대원의에게 정사를 맡기고 후궁들의 치마폭에 파묻혀 헤어나지 못했다.

 

  동경으로 천도하자 황후 책봉과 귀비 간택을 하자는 공론이 일었다. 그렇게 되면 태자 책봉을 미룰 수 없게 되고, 대가 세고 두루 신망이 두터운 대숭린이 태자가 되면 대원의의 위치가 위험하게 될 것이다. 대원의는 기를 쓰고 황후 책봉을 미루게 했다.

 

  이듬 해에는 황후 책봉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대귀령이 금군장수 양신장과 배가 맞아 임신하자 야반도주하는 일이 발생했다. 대흠무는 진노하여 대원의의 왕호를 폐하고 그들을 추적하였지만 두 사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사가로 물러난 대원의는 세 황자를 없앨 궁리를 한다. 상경에 있던 세 황자는 대흠무의 부름을 받고 황명대로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경으로 향했다. 간신들은 대흠무에게 황자들이 난을 일으켰으니 대원의를 불러 평정케 해야 한다고 아뢴다.

크게 놀란 대흠무는 대원의를 토적군 통수로 삼아 난을 평정케 했다. 2만의 토적군을 만난 대숭린은 그제야 암계에 걸려든 걸 알았다. 잡히는 순간 역적의 죄를 씻지 못할 것이었다. 대승린은 사력을 다해 도망쳤다. 대정한이 죽고 대숭린과 아우 대청윤은 도망쳤다.

 

  대원의는 3년 만에 왕호를 받고 권세를 회복했다. 그러나 그 위세는 예전 같지 않았다. 대흠무는 그에게 군권을 넘겨주지는 않았다. 황제가 대원의의 야심을 눈치 채고 경계하는 게 분명했다. 대원의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고지청의 득세를 견제하기 위해 대원정의 딸 후궁 대사루를 황후로 책봉하기로 하고 황제가 그토록 아끼는 재인 고송전을 신하와 간통했다는 누명을 씌워 목을 베었다.

 

  대흠무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회복되어 임신(792)년 정월에 손자 대화여를 태자로 책봉하고 대사면을 단행했다. 대사면으로 정적들이 모두 풀려나자 대원의는 시퍼런 칼날이 목덜미를 파고드는 듯한 위기감을 느꼈다.

 

  대흠무가 병석에 눕고 태자 대하여가 편전에 나서 정사를 대신하자 좌우에서 간신 대원의의 처단을 간했다. 그러나 대화여는 황제의 마음을 어지럽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진신들의 주청을 거부했다.

  대흠무는 계해(793)년 삼월 초나흘 성수 77세로 붕어했다. 바로 그 순간 침궁을 박차고 들이닥친 군사들이 대화여를 포박하고 입에 자갈을 물렸다. 그리고는 강제로 약물을 먹였다. 대흠무가 승하하고 한 식경쯤 지나 대원의가 좌상 고잉을 앞세우고 침궁으로 들어섰다. 이어 정변의 주역들이 속속 황궁으로 모여 들었다.

 

  멀쩡하던 대화여가 사수(邪祟) 증세를 보이며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시감 장국선이 대원의에게 후사를 맡긴다는 황제 대흠무의 유조를 읽었다. 대원의는 무릎 꿇어 세 번 절하고 유조를 받들었다. 대소신료들 사이에서 의구심을 갖는 자들도 있었으나 대원의는 용상에 올라 면류관을 썼. 모반으로 황위를 빼앗은 것이다.

 

  별관 궁녀 나송옥은 대화여를 해독시킬 약초를 구해 꾸준히 치료를 하여 그를 낫게 했지만 비밀에 부치고 있었고 대원의가 선제의 유촉을 조작하여 황위를 찬탈했다는 격문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대원의는 당황하여 백성들이 서로를 감시하는 10호 연좌제를 시행토록 했다.

 

  계유(793)5월 그믐, 서경압록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있었다. 승려 무명을 비롯하여 많은 정적들이 반란의 대열에 합류했다. 반란군이 늘어나자 승패는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그러자 대원의는 변방의 군사들까지 동원하라는 칙서를 내렸다. 하지만 몇 개의 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칙지를 거역했다. 황명을 거역하는 것은 곧 반란 대열에 가담하겠다는 뜻이었다.

 

  마침 흑수의 대수령들이 반란을 일으켜 남침하기 시작했다. 불안에 떠는 백성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만 무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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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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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권] 당나라에서는 양귀비가 죽고 이형이 황위에 올랐고 이후 안사의 난은 평정되었다. 고구려 유민으로 도성에 들어온 대원의가 서서히 권력의 중심에 자리하였고 대흠무가 죽자 모반을 일으켜 황위에 올랐다. 그러자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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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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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발해(大渤海)

                                                                                              김홍신

6. 불심과 진신사리

  북정군 본진을 영자성에 설치한 양소화는 동진을 하다가 배수진을 치고 있던 월희 군사들을 만났다. 기습과 유격전을 벌이면서 적의 사기를 꺾고 그들을 쳐부수는 동안 자림성이 흑수의 침공을 받아 함락되었다. 천험의 요새로 불리는 자림성을 뺏긴 양소화는 땅을 치고 후회하면서 수차례 공격을 시도하지만 속절없이 군사들만 잃고 말았다.

 

  그때 마침 장문휴가 5천의 민병을 이끌고 도착했다. 그는 한 때 그가 아끼던 장수였던 양소화가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있을까 걱정했다. 장문휴는 민병들을 흑수군의 군복과 병장기로 위장하고 가짜 군첩을 만들어 수령 낙수몽을 성 밖으로 유인해내고 성을 점령해버렸다. 성을 빠져나온 낙수몽은 적에게 포위되어 항복했다.

  성을 다시 되찾은 양소화는 장문휴의 복작을 상소했다. 몇몇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흠무는 장문휴를 보국대장군으로 복작하고 도성으로 올라오라는 칙지를 내렸다.

 

  황은에 보답하기 위해 빈손으로 갈 수 없다는 장문휴는 다시 전장으로 나아가 적장 오소걸몽을 생포하고 본진을 섬멸하기 위해 진격하다 적군의 독화살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양소화는 대흠무의 허락을 받아 장문휴와 영가혼례를 올렸다.

 

  당나라 도읍지 장안, 대문예는 시름을 이기지 못해 근래에 들어 기동을 하지 못했고 아버지만큼 한이 많은 그의 아들 대청천도 한탄 속에 울분을 삭이느라 술과 여자, 한량들과 어울려 풍류를 즐겼으며 기녀 난난과 정인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대청천은 황제 이융기의 근신인 환관 고력사의 부름을 받았고 그로부터 대흠무의 암살 제의를 받는다. 대청천은 난난을 이용하여 기인으로 불리는 설진을 포섭하였고 설진은 백제의 후손인 국사봉과 협차복을 음모에 끌어들인다.

 

  대흠무가 사냥에 나선 사흘째 되던 날 밤, 그의 사냥개 표륵이 사냥터에 잠입해 기회를 노리던 자객, 국사봉과 협차복을 물어뜯어 그들을 붙잡았고, 이튿날은 사냥꾼의 집에 숨어있던 설진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대흠무는 설진을 문초하여 암살의 배후에 대청천 이외에 당제 이융기와 그의 총신 고력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하들은 대청천을 사로잡아 능지처참하여 국기를 바로세우기를 강력히 주청했지만 대흠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객들은 모두 차열형에 처하여 국기를 바로잡으라 했다.

 

  그해 8, 당나라 조정은 평로병마사 안녹산을 영주도독으로 승급시켜 평로군사 겸 발해, 거란, , 흑수를 경계하라는 의미로 사부경락사로 삼았다가 후에 절도사로 승격시켰다. 그가 승승장구한 것은 뇌물로 조정대신이나 환관의 환심을 샀기 때문이며 얼굴에 역상이 있어 반역을 도모할 상이라고들 했다. 대흠무는 금은과 여인으로 꾀어 그를 수중에 넣기를 획책하며 이합비를 그에게 보내게 했다.

 

  보국대장군 양소화를 대신의 반열에 올리려다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대흠무는 꾀를 내어 발해 전역에 어사 여러 명을 파견하여 활동 결과 공이 있는 사람은 포상하기로 하고 양소화를 어사로 발탁하였다.

 

  서경압록부 도독 공심지는 위세가 대신만큼 당당했다. 그는 흑수정복전에서 전사한 장문휴 장군의 정인이었다가 황제의 후궁이 된 공사량의 오라버니였으며 아버지 공진방은 국구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변방의 일개 장수에서 승승장구하여 도독이 된 것은 순전히 누이 공사량 덕이었다.

  저지른 죄가 탄로 나는 것을 두려워 한 공심지는 어사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어사가 오는 길목에 비적들을 보내 목숨을 노리는가 하면 자객을 보내 증거를 탈취하기도 했으며 결국은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양소화를 공격하다 도리어 붙잡혔다. 죽어 마땅한 죄였으나 도성으로 압송할 경우 가벼운 형벌로 끝날 것이 분명하자 양소화는 선참후계하였고 그의 아버지 공진방은 안변부로 귀향을 가게 되었다.

 

  대흠무의 명을 받은 무명선사가 진신사리를 얻기 위하여 천축으로 고행의 길을 떠났다. 한편, 안녹산은 이합비에게 완전히 빠져 있어서 이제 그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황제의 신임을 얻은 안녹산은 장안으로 입조하여 양귀비와 그녀의 자매들과 친해졌고 엄청난 재물을 진상하여 궁중을 무상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가 하면 늙은 황제를 모시고 있는 양귀비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원래 뚱뚱했던 몸을 가볍게 만들기에 전념한다.

 

  구사일생으로 사막을 벗어난 무명 일행은 이번에는 총령과 탄구령을 넘어야 했다. 그들은 도와줄 사람을 물색하다 안서도호부 절도사인 고구려 후손 고선지 장군의 도움을 받게 된다. 마침내 그들은 가비라성에 도착하였다. 어렵사리 진신사리 2과를 얻은 일행은 걸음을 재촉하여 발해로 향했으며 도중에 도적을 만났기에 무명은 배를 가르고 그 속에 사리를 넣어 무사히 발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상경을 떠난 지 4년 만에 돌아오는 일행을 대흠무는 도성 밖 30리 지경에서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환대하였다.

 

  양귀비는 안녹산과 애욕을 불태웠고 안녹산은 휘하에 군사 20만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러자 부하들이 발해를 공격하자고 제의해 온다. 그러나 그들은 그날 밤 이합비에 의해서 살해되었고 안녹산은 그녀의 말에 따라 발해와는 전쟁을 않기로 결정했다. 이합비는 힘을 길러 장안을 노리라고 충동질 한다.

 

  안녹산은 거란의 수령들에게 물선을 보내 그들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은 다음 안경서를 보내 거란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융기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조정 권신들은 승승장구하는 안녹산의 위세와 군세를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고 특히 재상 양국충은 안녹산이 반역을 도모할 근거를 제시하며 황제의 마음을 어지렵혔다.

 

  황제는 심복 환관 보구림을 보내 안녹산의 동태를 파악하게 하였다. 황제가 칙사를 보냈다는 것은 배후에 양국충이 있었지만 황제의 총애가 식었다는 뜻이며 그것은 결국 양귀비의 마음에도 틈이 벌어졌다는 신호였. 칙사는 뇌물을 받고 안녹산이 다른 뜻이 없음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양국충과 태자 이형이 보구림의 상주가 거짓임을 다시 간하자 황제는 안녹산을 다시 입조하게 한다. 이합비는 일어날 일을 예견하여 안녹산을 황명에 따르게 하고 자신을 없애라는 명을 내리게 한다. 대신 양국충과 내통한 연국주를 여자로 변복시켜 참할 계획이었다.

 

  입조한 안녹산은 황제 앞에 부복하여 눈물로써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이합비를 참하라고 명하는 한편, 오랫만에 양귀비를 만나 그동안 지독히도 눌러왔을 정염의 회포를 풀어 주었다. 안녹산은 다시 황제의 신임을 얻어 돌아왔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날 양국충이 아니었다. 해가 바뀌자 양국충은 안녹산의 큰 아들 안경종을 황실 여인과 결혼시키겠다며 그의 입궐을 유도했. 그러나 양국충의 궤계를 눈치 챈 안녹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해 동짓달, 안녹산은, 양국충이 모반을 꾀하고 있으니 충신 안녹산이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달려와 반란의 무리들을 주살하라는 황제의 밀서를 받았다. 물론 이 밀서가 가짜라는 것은 이합비와 몇몇 심복들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안녹산의 거병을 막지 않았다.

 

  발해에서 보낸 기병 1천에 보병 4천이 안녹산의 친위군에 편제되었다. 을미(755)년 동짓달 아흐레, 안녹산은 드디어 20만 정병을 이끌고 범양에서 거병했다. 안녹산은 하루 60리를 진격하였고 11월 하순에는 회하까지 진격하여 중원을 놀라게 했다. 안녹산이 영창을 함락시킨 후 장안과 낙양의 젖줄인 진류성을 공격하여 태수 장개연을 물리치자 당제 이융기는 경악했다.

 

  황급히 서역의 연합군에 패하여 장안에 머물고 있던 고선지장군에게 군사를 주어 장안을 침공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동관을 지키게 했다. 고선지는 안녹산군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나 고선지는 앙심을 품고 있던 감군으로 파견된 환관 변영성의 무고로 목숨을 잃고 만다.

 

  드디어 충역지자 안녹산이 낙양에서 칭제건원하고 연국을 선포하여 황위에 오르니, 때는 병신(756)년 정월 초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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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권] 양소화를 도우던 장문휴가 전사하였고 대문예의 아들 대청천이 대흠무를 암살하려다 실패한다. 대를 이은 모반이었다. 안녹산은 양귀비와 불륜에 빠지기도 했으며 난을 일으켜 칭제건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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