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동경천도와 역모
대흠무의 명을 받은 황자 대굉임이 발해 강역 순람에 나섰다. 그 무렵 당제 이융기는 양국충의 간언을 받아들여 파촉으로 몽진하기로 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배를 곯은 호위 군사들이 폭동을 일으킬 지경이 되자 호위대장 진현례는 그들의 관심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기 위하여 양국충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의 아들 양훤도 아비와 같은 신세가 되었고 양귀비의 언니 한국부인과 진국부인도 칼날 아래 이슬이 되었으며 괵국부인도 아들 배휘와 양국충의 아내 배유의 목을 베고 자결하였다.
결국 이융기는 양귀비를 포기했고 고력사가 그녀의 목을 비단 수건으로 졸랐다.
이융기는 파촉으로 도망가고 태자 이형은 영무로 도망쳐 그곳에서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황위에 올랐다. 이융기는 45년 동안 지존의 위치에 있다가 황위를 아들에게 빼앗겼다.
오장성 성주 설기는 소문이 좋지 않았는데 그의 아들 설개는 사납고 욕심이 많았다. 그는 대굉임 일행을 염낭이 두둑한 장사치로 오인하여 털기로 하고 싸움을 벌이다 죽임을 당했다. 대굉임이 순람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대흠무는 신하들에게 상을 내려 노고를 치하하는 한편, 설기를 징치하기 위해 장수 두범치를 어사로 명하고 설기를 압송하라 명했다.
정유(757)년 정월, 연나라 황제 안녹산이 그의 아들 안경서에 의해 살해되었다.
당제 이형은 안녹산의 죽음으로 원기를 회복했다. 이예가 이끄는 당군이 연나라 군사들을 대파하고 장안에 입성하였고 사사명은 반란군을 죽이고 하북의 13주와 10만 군사를 당제 이형에게 바쳤다. 이형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귀의왕에 봉하고 범양장사 겸 하북절도사로 명했다.
한번 배신하고 역심을 품었던 자는 반드시 역심을 품는다. 이형은 이듬해 장수 오승은에게 사사명을 주살하라며 그를 범양으로 보냈다. 눈치 빠르고 주도면밀한 사사명이 이형의 암살 음모를 모를 리 없었다. 사사명은 오승은을 참살하고 무술(758)년 6월, 13만의 대군을 일으켰다. 그는 안경서의 구원 요청을 핑계로 단숨에 위주를 점령하였고, 기해(759)년 정월 초하루 연나라 황제를 칭하고 즉위했다.
대흠무는 당나라에 원군을 보내자고 주청하는 대소신료들에게 가르친다. 본디 동이(東夷)는 동쪽의 군자가 사는 땅이라는 뜻으로 쓰였는데 중화 사람들이 오랑캐라 그 본래의 뜻을 바꾸었으며, 대의명분을 밝혀 세운다는 춘추필법 또한 세 가지 원칙, 첫째 존화양이(尊華攘夷)라 하여 중화를 높이고 다른 나라를 깎아내리고, 둘째 상내약외(詳內略外)라 하여 중화의 역사는 상세히 기술하되 다른 나라 역사는 간단히 쓰며, 셋째 위국휘치(爲國諱恥)라 하여 중화를 위해 수치스러운 것은 모두 숨긴다는 원칙에 의해 씌어졌다는 것이었다.
사사명은 하북과 하남을 점령하고 낙양으로 진격하여 경자(760)년 낙양을 함락하고 당나라를 압박했다. 그러나 사사명 역시 안녹산과 마찬가지로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해 4월 당나라의 이융기가 78세로 하직하고 황제 이형도 승하했다. 그리고 장남 이예가 황위를 물려받았다. 나라 밖이 어지러운데 발해 강역은 태평성대였다. 대흠무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열일곱 살 난 대술묘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그녀의 아버지 대견강은 당나라 영주에서 호가호위하던 자로 대흠무의 고구려 출신 귀화인 우대정책에 따라 도성에 들어왔었는데 강직한 신하들과 특히, 양소화는 그들과 해적질까지 해서 돈을 모은 그녀의 오라버니 대원의가 근신이 되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대원의는 조세와 관작 등 여러 개혁 방안을 건의하면서 국구 고원을 귀양 보내고 동왕을 태자로 삼으며 양소화를 삭탈하라고 상소했다. 양소화가 대원의의 음모로 살해당했다. 대흠무는 칙서를 내려 조세를 개혁하고 관작을 일대 쇄신했다. 신석정과 난곡 정도를 제외한 원로대신 거개가 물러나고 젊은 인재들이 근신이 되었다.
고구려 후손으로 산동의 맹주가 된 이정기는 천하를 경략할 꿈을 꾸었다. 등주에 세워진 발해관에서 이루어지는 교역량은 엄청났다. 당과 신라는 물론, 일본과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었고 발해가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병진(776)년 춘삼월, 황후 고흔정이 생신 축하연을 받고 그날 밤 급서했다. 먹은 음식을 토하고 입 주위가 검은 빛을 띤 채 절명한 것은 독살된 게 분명했다. 궁중 음식을 담당하는 이진무, 두필효, 임향기가 잡혀압송되었다.
신석정과 무명선사까지 나서서 황후를 검시하여 원인을 규명하고 범인을 밝혀내자고 하였으나 대흠무는 결단코 이를 거부하였고 대굉임에게 국문을 명하였다. 국신의 수장에는 뜻밖에도 대중정 고잉을 명했다.
드디어 엄청난 죄상이 밝혀졌다. 주모자는 국구 고원, 황자 대굉임 비인 고은공의 아버지 고극사, 대내상 고건의 아들 고군, 도독 고학성, 왕사감이었다. 고원과 고극사, 고군은 고구려 왕손으로 고원의 아들 고용을 옹립하기로 하고 황제를 시해할 역모를 꾸몄다고 했다.
이진무, 두필효, 임향기는 효수하고 고원과 고극사, 고군은 삭탈하여 유배하였으며 왕비 고은공은 폐하여 사가로 보내졌고 관련자들도 각각 문책을 받았다. 그런데도 황제 앞에서 진언을 하던 신석정과 무명선사마저 삭탈하여 각각 태백산과 홀한해에 있는 안국사로 유배하라는 칙지가 내려졌다.
대원의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신석정과 무명선사를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대흠무는 황후의 장례를 치른 후 이미 대원의의 누이동생 대술묘가 비빈의 자리에 있는데도 대원의의 딸 대귀령을 빈으로 맞아 들였다. 얼마 후 신석정이 호환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아들 셋이 벼슬을 버리고 안국사로 가서 무명선사의 뜻에 따라 다른 곳으로 잠적했다.
대흠무는 조세개혁만으로 구신들을 다룰 수 없어서 대원의의 뜻에 따라 화폐개혁을 하기로 했다. 대원의는 내밀히 철광산과 동광산을 사들였고 측근들에게 더 많은 말을 사들여야 한다고 했다. 태복경으로 발해의 군마를 관장하는 대원의가 더 많은 말을 요구하는 것은 발해가 전쟁을 대비하거나 대원의가 군사를 일으키거나 둘 중 하나를 뜻했다. 고잉이 대원의에게 천하를 얻으라고 은근히 부추긴다. 이정기의 심복으로 있는 난욱은 황제를 비판하는데 거침이 없다.
기미(779)년 늦여름, 발해 태자 대굉임이 병사했다. 대흠무는 한 달 넘게 편전에 나오지 않았다. 황제가 기력을 잃으면서 대세는 더욱 대원의에게 기울어졌다.
이정기는 번진을 연합하여 당나라 대군과 맞섰지만 악성 종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대업은 장남 이납에게 위임되었으나 전투에서 패하고 항복하고 배신하면서 번진 연합은 패퇴했다. 그러나 이납은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번진 세력을 다시 연합하여 제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
자신의 딸인 현비 대귀령을 황후에 책봉하려던 대원의와 누이인 귀비 대술묘 사이에 갈등이 생기자 대술묘는 황후를 시해한 일을 들어 대원의를 압박한다. 난욱은 대원의에게 누이 귀비를 제거하라고 조언한다. 대원의는 난욱의 의견을 듣고 여론을 조성한 다음 대흠무에게 동경 천도를 주청한다. 대흠무는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아 천도를 반대했으나 술사, 도사, 무자는 물론이고 승려와 일관, 현비와 문무 대신들은 한결같이 천도를 주장하며 대흠무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갑자(784)년 3월 그믐밤에 귀비궁이 화염에 휩싸여 귀비와 궁녀들이 타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황후는 독살당하고, 태자 대굉임은 병사하고, 귀비 대술묘는 불에 타 죽었으니 대흠무의 심사는 몹시 어지러웠다. 그는 용단을 내려 천도를 명했다.
드디어 을축(785)년 봄, 동경으로 천도했다. 대흠무는 황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원의에게 황자에 준하는 왕호를 내려 한왕으로 삼았다. 한왕 개국공 대원의는 진단대장군의 작첩까지 받았으니, 인신으로는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었다.
대흠무는 세 황자들은 상경에 남겨두고 귀비 소생의 대성진과 공주들만 데리고 동경으로 왔으며, 근신 중의 근신이요 아부의 달인인 대원의에게 정사를 맡기고 후궁들의 치마폭에 파묻혀 헤어나지 못했다.
동경으로 천도하자 황후 책봉과 귀비 간택을 하자는 공론이 일었다. 그렇게 되면 태자 책봉을 미룰 수 없게 되고, 대가 세고 두루 신망이 두터운 대숭린이 태자가 되면 대원의의 위치가 위험하게 될 것이다. 대원의는 기를 쓰고 황후 책봉을 미루게 했다.
이듬 해에는 황후 책봉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대귀령이 금군장수 양신장과 배가 맞아 임신하자 야반도주하는 일이 발생했다. 대흠무는 진노하여 대원의의 왕호를 폐하고 그들을 추적하였지만 두 사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사가로 물러난 대원의는 세 황자를 없앨 궁리를 한다. 상경에 있던 세 황자는 대흠무의 부름을 받고 황명대로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경으로 향했다. 간신들은 대흠무에게 황자들이 난을 일으켰으니 대원의를 불러 평정케 해야 한다고 아뢴다.
크게 놀란 대흠무는 대원의를 토적군 통수로 삼아 난을 평정케 했다. 2만의 토적군을 만난 대숭린은 그제야 암계에 걸려든 걸 알았다. 잡히는 순간 역적의 죄를 씻지 못할 것이었다. 대승린은 사력을 다해 도망쳤다. 대정한이 죽고 대숭린과 아우 대청윤은 도망쳤다.
대원의는 3년 만에 왕호를 받고 권세를 회복했다. 그러나 그 위세는 예전 같지 않았다. 대흠무는 그에게 군권을 넘겨주지는 않았다. 황제가 대원의의 야심을 눈치 채고 경계하는 게 분명했다. 대원의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고지청의 득세를 견제하기 위해 대원정의 딸 후궁 대사루를 황후로 책봉하기로 하고 황제가 그토록 아끼는 재인 고송전을 신하와 간통했다는 누명을 씌워 목을 베었다.
대흠무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회복되어 임신(792)년 정월에 손자 대화여를 태자로 책봉하고 대사면을 단행했다. 대사면으로 정적들이 모두 풀려나자 대원의는 시퍼런 칼날이 목덜미를 파고드는 듯한 위기감을 느꼈다.
대흠무가 병석에 눕고 태자 대하여가 편전에 나서 정사를 대신하자 좌우에서 간신 대원의의 처단을 간했다. 그러나 대화여는 황제의 마음을 어지럽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진신들의 주청을 거부했다.
대흠무는 계해(793)년 삼월 초나흘 성수 77세로 붕어했다. 바로 그 순간 침궁을 박차고 들이닥친 군사들이 대화여를 포박하고 입에 자갈을 물렸다. 그리고는 강제로 약물을 먹였다. 대흠무가 승하하고 한 식경쯤 지나 대원의가 좌상 고잉을 앞세우고 침궁으로 들어섰다. 이어 정변의 주역들이 속속 황궁으로 모여 들었다.
멀쩡하던 대화여가 사수(邪祟) 증세를 보이며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시감 장국선이 대원의에게 후사를 맡긴다는 황제 대흠무의 유조를 읽었다. 대원의는 무릎 꿇어 세 번 절하고 유조를 받들었다. 대소신료들 사이에서 의구심을 갖는 자들도 있었으나 대원의는 용상에 올라 면류관을 썼다. 모반으로 황위를 빼앗은 것이다.
별관 궁녀 나송옥은 대화여를 해독시킬 약초를 구해 꾸준히 치료를 하여 그를 낫게 했지만 비밀에 부치고 있었고 대원의가 선제의 유촉을 조작하여 황위를 찬탈했다는 격문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대원의는 당황하여 백성들이 서로를 감시하는 10호 연좌제를 시행토록 했다.
계유(793)년 5월 그믐, 서경압록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있었다. 승려 무명을 비롯하여 많은 정적들이 반란의 대열에 합류했다. 반란군이 늘어나자 승패는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그러자 대원의는 변방의 군사들까지 동원하라는 칙서를 내렸다. 하지만 몇 개의 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칙지를 거역했다. 황명을 거역하는 것은 곧 반란 대열에 가담하겠다는 뜻이었다.
마침 흑수의 대수령들이 반란을 일으켜 남침하기 시작했다. 불안에 떠는 백성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만 무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