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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대발해(大渤海)
김홍신
이 소설의 머리글에서 작가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 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말로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과제(공정)'란 뜻이며 이는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만들기 위해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한 연구 프로젝트이다)에 충격을 받고 발해공정을 작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자랑스럽고 영광스럽다며 독자들이 우리 발해를 품에 안고 꽃을 피워 우리 민족의 기품을 되살려주기를 청하고 있다.
익히 배워 온 발해가 갖는 민족사적 의의와 자긍심을 다시 한 번 느껴 보기로 했다.
1. 혈로를 뚫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짓쳐드는 나당 연합군의 기세는 가히 경천동지의 광풍에 비견되었다. 요동도행군대총관 이적 및 계필하력과 유인궤, 학처준, 설인귀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나 하면서 거침없이 내달렸고 웅진도독 유인원과 신라의 대당대총관 김유신도 대군을 휘몰아 평양성을 향해 진격을 서둘렀다.
평양성이 무너지면 고구려 사직이 멸망한다. 막리지 연남건은 변방의 장수들에게 급히 평양성으로 달려오라고 명했다. 대형 검모잠이 평양성으로 향했으며 진국장군 대중상도 아들 대조영과 함께 5천여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향했다.
연개소문의 장자 연남생은 당나라로 도주하여 고구려 정복의 길잡이가 되었고 아우 연정토는 12개 성을 바쳐 신라에 투항했다. 대중상과 대조영이 살수를 건넜을 때 김인문과 김유신이 20만 정병을 거느리고 평양성으로 진격했다는 급보를 받았다. 그들은 전력 질주하여 무사히 평양성에 당도하였다. 하지만 적군은 물밀 듯이 밀려들었고 공성(攻城) 무기는 강력했다. 고구려왕 고장이 항복할 뜻을 비쳤으나 막리지 연남건은 거절하였고 군권을 승려 신성에게 맡겼다.
어두운 밤을 틈타 대중상과 대조영은 적의 배후를 치고 양도(糧道)를 끊기 위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평양성을 탈출한다. 적장 진기덕이 끈질기게 추격했지만 진기덕의 군마가 화살을 맞고 날뛰자 진기덕이 고꾸라지며 적진이 무너졌다. 하지만 그날 아침 승려 신성은 성루에 흰 기를 꽂고 성문을 활짝 열었다. 무진(668)년 9월 21일, 705년 동안 천하를 진무하며 수나라를 물리치고 당나라와 맞겨루던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는 걸출한 영웅 연개소문이 죽은 이후로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왕위를 둘러싼 암투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연개소문의 세 아들은 권세를 거머쥐기 위해 분열했었고 결국 멸망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당군은 항복하는 자까지 무참히 도륙했다. 부녀자를 백주대로에서 겁간했고, 아이 밴 여자와 어린 계집까지 능욕했다. 갓난아이까지 내던져 죽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대조영은 기필코 고구려를 일으켜 세우겠다며 평양성으로 돌아가겠다는 대중상을 설득하여 태백산으로 향하기로 하고 진기덕을 비롯한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며칠을 길을 놓았을까. 적장 정용진이 진기덕을 앞세워 추적해 왔다. 한바탕 격전이 벌어진다. 진기덕의 방면을 반대했던 동태진이 그의 칼 아래 목숨을 잃었고 대조영이 진기덕의 목을 베는 한편, 매복에 걸린 정용진에게 활을 쏘아 그를 생포했다. 대중상은 적의 병장기와 군량을 모두 빼앗고 포로는 모두 풀어 주었다.
태백산에 도착하여 산채가 세워지고 인마가 안돈되자 대중상은 가솔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포수들을 불러들여 태백산의 산세를 익혔다. 당나라 조정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고 도호에 임명된 설인귀는 왕과 대신을 포함한 민호 4만, 무려 2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당나라로 압송하고 남자는 모조리 죽이고 여자는 모두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게 했다.
대중상은 태백산에서 천지신명과 단군성조, 태백신령에게 제를 올리고 고구려의 정기를 잇게 해주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태백산은 성산이기는 했으나 군마와 군량을 비축할 수 없고 군사를 모병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
그들은 옥저 땅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그들이 영봉산성에 자리를 잡고 고구려 유장 대중상이 고구려 복국을 꾀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패잔병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찾아 들었다. 넉넉한 자들은 말과 양 떼를 몰고 오거나 수레를 가득 채워 오기도 했다. 그 즈음 대중상의 부인과 딸 대화인이 당나라 영주 고려영의 관리 하경복의 사가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대조영은 지체없이 행장을 꾸렸다. 대조영은 평소 대화인을 흠모하고 애중하던 장수 주석모와 유시복과 함께 심복 몇 명만 데리고 영주로 향했다.
일행은 하경복의 사가를 면밀히 정탐하고 그믐밤을 기다려 담을 넘고 불을 질러 어수선해진 틈을 이용해 모녀를 구출하여 영봉으로 돌아온다. 구출 당시 대화인은 하경복의 잠자리 수발을 거절한 대가로 심한 매질을 당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듬해 봄, 대중상은 군사들을 풀어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게 하고 군마장도 꾸몄다. 그리고 원래 고구려의 주력부대인, 기병이 타는 말에 갑옷을 입힌 개마를 탄 중무장한 개마무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개마무사는 흑수말갈이나 돌궐은 물론이고 당나라나 거란까지도 두려워하는 용맹한 군사였으며 전장에 나서면 연전연승이었다.
고구려 유장 검모잠이 한성에서 고구려 마지막 왕 고장의 서자인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고 고구려를 선포했다. 영봉산성에도 안승의 교서가 당도했고 대조영을 비롯한 장수들이 출병 채비를 서둘렀다.
대조영은 검모잠의 명을 받아 3천 군사를 거느리고 궁모성 부근에 진을 쳤다.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연지광의 조언으로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놀잇감 화살을 만든 군사들은 그것을 진짜 화살과 섞어 적진을 향해 퍼붓자 수많은 적군이 죽어 시산을 이루었으며 남은 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고 대조영은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안동도호부의 원군이 도착하여 검모잠의 행영을 공격하였고 대조영과 검모잠의 군사는 궁모성으로 퇴각했다. 검모잠은 패퇴의 책임을 대조영에게 물으려고 칼을 빼 들었다. 같이 맞대응하였지만 결국 포박되어 옥에 갇혔다. 송여신 역시 대조영의 석방을 간하다가 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대중상이 군사를 이끌고 남진하자 검모잠은 즉시 대조영을 풀어주었다. 대조영을 풀어준 검모잠은 대조영을 선봉장으로 삼아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는 각각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치열한 저항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형국이어서 당나라 조정에서는 안동도호의 다급한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원군을 출병시켰다. 승리에 도취되고 권세를 장악하여 오만해진 검모잠은 왕위를 노리려는 불순한 마음을 품고 있다가 부하 장수 검도삭에 의해 살해된다. 안승이 신라로 파천하려하자 대조영은 이를 반대하였고 결국 안승은 신라로 몸
을 위탁하러 떠난다.
대조영은 군사를 거느리고 대중상에게로 돌아갔다. 대조영은 천하 경륜을 위한 세상 순람길에 나섰다. 요동성에 당도하여 파괴된 동명성왕의 사당을 보았고 안시성에서는 고구려의 기개를 보았다. 임유관을 지나 유주에 들어서서 첫사랑 설화를 닮은 여연을 만난다. 유주는 원래 백제 땅이었다고 한다. 당나라 이연수가 편찬한 ‘북사’와 영호덕분이 쓴 ‘주서’에 의하면 백제가 진(晋)으로부터 양(梁)까지 약 250년 동안 장강 유역에 거주했다 하고, 또 영락 14년에 왜국과 함께 발해만의 대방계까지 진출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대조영은 백제의 후예들을 만났다. 그 중 여신은 여연의 할아버지로 대조영에게 광채가 상대방의 눈을 부시게 한다는 백제특유의 갑옷 명광개를 선물하기로 했다. 영봉산성으로 돌아온 대조영은 아버지께 고하고 결혼을 서둘렀으나 여연이 오는 도중 당나라 군사들의 습격을 받고 죽임을 당함으로써 첫사랑 연설화와 함께 대조영의 가슴에 또 하나의 깊은 상처를 그었다.
신성에 진을 친 적군이 머지않아 영봉산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는 정탐병의 보고가 있자 대조영은 아버지의 명을 받고 새로운 군진을 세울 곳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몇날 며칠을 재촉하여 동모산을 거쳐 숙신 땅으로 들어선 대조영은 대중상과 친한 말갈의 걸무개를 만났다. 걸무개의 안내를 받아 홀한해 부근의 지하삼림을 본 대조영은 그곳을 최적의 요새로 판단했다.
위급을 알리는 북소리가 산성에서 울렸고 적장 한승사가 군사 2만을 이끌고 영봉산성으로 쳐들어왔다. 숙신에서 돌아온 대조영을 맞은 대중상은 철수를 결심하고 영봉산성을 조카 대원영에게 맡겨 며칠 간 지키다 뒤따르도록 하고 성을 떠났다. 하지만 며칠을 버틴 대원영은 당군의 포위를 뚫지 못하여 마침내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마침내 대중상 일행은 지하삼림에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남해성의 최도윤을 만났고 그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황무지를 개간하고 군사들을 조련하기 시작했다. 점차 생활이 안정되어 갔고 대조영이 임사빈의 딸 임소진을 아내로 맞았다. 걸사비우로부터 영주 땅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정보를 들었다. 거란 추장 이진충이 당제 이치에게 불만을 품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구려가 수, 당의 집요한 침략을 방비할 수 있었던 것은 돌궐, 거란, 말갈 등을 비롯한 여러 부족과 동맹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는데 연개소문이 병사하자 동맹이 깨어졌고 당나라가 거란이 고구려 정복의 선봉에 서면 나라를 세워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래서 수만 명의 거란 군사들이 고구려 정복 전쟁의 선봉에 섰는데 정작 고구려가 망하자 당나라는 돌변했고 거란을 달래 송막을 다스리게 했을 뿐 거란 창업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진충의 불만은 당연한 것이었다.
대중상은 명검 한 자루를 이진충에 보내 그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는 한편, 영주의 동태를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꿈속에 나타난 백발의 동명성왕의 현몽을 듣게 된다.
영주도독 조홰는 성정이 모질고 잔악해서 그 횡포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조세와 부역이 무겁고 굶어 죽는 자가 생겨도 구휼하지 않았다. 때를 기다리기 28년, 이제 봉기할 기회만 기다리면 된다.
당시 당나라는 무측천이 황제로 등극하여 막강지권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적인걸이 거란과 대중상의 거병을 우려하자 대수롭지 않게 대응하였다. 그러나 적인걸은 자객을 동원하여 대조영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조홰가 이미 정혼을 한 고승직의 딸 고명주를 탐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진충은 적인걸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황이 급해진 이진충은 대중상을 찾아가 고구려를 침공했던 일을 무릎 꿇고 사죄하고 영주를 공격하기로 했다. 거란과 대중상의 군사들이 영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거란의 장수 손만영과 이해고, 낙무정과 열리곤, 돌욕 등이 좌우에서 짖쳐들었고 대중상을 중심으로 달신과 걸사비우 등 명장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영주성은 함락되었다. 조홰는 도망치다 창을 맞고 수급이 남문에 내걸렸다. 대중상은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갈 채비를 했다. 하루도 쉼 없이 영주 일원과 요하 줄기를 따라 전투가 벌어졌다. 이진충은 당나라 장수에게서 노획한 정탐록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새로 진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을 확인하고는 분노를 억누르며 기필코 거란을 세우겠다고 다짐했다.
대조영의 아들 대문예는 심나호가 이끄는 당군과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두지만 군령을 어기고 무모하게 패군들을 추격하다 많은 부하들을 잃게 되자 치죄를 당하였으나 조인구와 그의 아내 고명주에 의해 목숨을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