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제3권] 당나라의 토평군에게 쫓기면서도 굴하지 않고 요동으로 이동하여 동모산에 근거를 잡고 드디어 발해를 건국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대발해(大渤海)

                                                                                               김홍신

 

2. 다시 뜨는 고구려 혼불

 

  당나라 황제 무측천은 조칙을 내려 대중상과 대조영, 거란의 이진충과 손만영의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그들을 죽여 없애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이진충이 그렇게도 원하던 거란의 왕위에 올랐다 대조영의 예측대로 이진충이 무상가한에 올라 사방을 공격하자 그동안 동조를 꺼리던 각처의 거란 수장들이 군사를 내어 본진과 합류했다, 군사와 군마가 계속 늘어났다. 그런데도 이진충은 고구려군이 요하를 건너 안동도호부를 쳐부수고 요동 땅으로 달려갈 것을 두려워하여 대문예와 그가 이끌고 간 군사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볼모로 삼고 있었다.

 

 

  당나라 조정은 거란과 고구려 유민들이 연전연승한다는 소식에 원병을 추가로 보냈다. 싸움은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이 와중에 수세에 몰린 이진충이 대중상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이진충이 대중상의 조언대로 항복하겠다는 간계를 써서 영주성을 점령하려고 온 당나라군을 모조리 섬멸하였다.

 

 

 

 

  이진충의 약속을 받은 대중상은 요하를 건너 접전을 벌였고 무측천은 대조영에게 칙서를 보내 이진충과 서로 싸우게 할 목적으로 이호경식지계(二虎耕食之計)를 펼친다. 이진충은 대조영에게 군자금을 청하고 대조영은 요동성 공격 채비를 서둘렀다. 요동성 안에는 이미 주석모가 세작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주석모는 성주 공손강이 그의 딸들에게 진작부터 욕심을 품고 있었음을 알고 그의 딸을 이용하기로 했다. 잔치가 끝나고 밤이 깊어지자 주화랑은 성주의 가슴에 칼을 꽂았고 자신은 성주의 칼 아래 목숨을 잃는다.

 

  그 시각, 대조영의 군사들은 성문을 열고 사정없이 짓쳐들어 요동성을 함락시켰다. 위기를 느낀 안동도호 배현규가 기병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거란군이 서진하는 동안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은 계속 동진하면서 당나라의 크고 작은 성을 빼앗아 군세가 날로 높아졌다. 대조영의 배현규와의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하였고 이진충은 유관을 점령하였다. 거란군의 형세는 날로 늘어 기병의 수효만도 얼추 5만이니 되었다. 대중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진충은 손만영의 의견에 따라 유관을 도성으로 삼아 중원을 핍박할 생각을 가졌다. 거란은 수주와 단주, 미승을 공략하여 재화를 실어 날라 비축했다.

 

  거란군의 행영에 당나라의 칙사가 당도했다. 칙서에는 영주와 귀주를 봉지로 줄 테니 대중상과 대조영을 잡아 바치라는 것이었다. 이진충이 당나라를 안심시키고 서진 채비를 서두를 즈음 당나라는 돌궐을 부추겨 군사를 일으키게 했고 무유의를 영주로 달려가게 했으며 조인사와 마인걸이 이끄는 토격병을 출병시켰다.

 

  적의 총공세를 감당할 수 없음을 직감한 이진충은 대조영에게 원군을 청하기로 하고 군사 역밀의 제안에 따라 대중상과 대문예를 구고려 진영으로 돌려보낸다. 대무예와 대문예, 두 손자를 앞세운 대중상은 당나라 군사를 이끄는 장현우와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다. 대조영의 스승 손담은 초모한 군사 2천여 명에 5천 군사를 증원 받아 안시성 공략에 나선다. 손담은 야간 전투를 벌여 적들을 성 밖으로 유인하여 궤멸시키고 안시성을 점령했다. 이제는 기회를 보아 안동도호부를 깨뜨릴 계획이었다.

 

  대조영은 손담의 주장을 받아들여 돌궐의 묵철가한에게 대문예와 아우 대야발을 사자로 보냈다. 대야발 일행이 돌궐의 지경에 들어서 밤을 보내다 이리떼를 만나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사달두와 사사란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묵철을 만나 화친의 약속을 받는다. 묵철은 대조영에게 달릴 때 붉은 땀을 흘린다는 명마, 한혈마를 징표로 주었다. 그런 과정에서 사사란이 대문예에게 연정을 품고 두 사람은 후일을 약속한다.

 

  대중상은 거란군과 연합하여 숭주로 향하고 당 조정은 허흠적을 숭주로 보낸다. 허흠적은 싸움에 패하여 생포된다. 대조영은 오골성을 겁략하고 백암성을 빼앗게 했다. 유관에 머물던 이진충은 당나라 대군의 진병과 돌궐의 남진으로 사태가 급박해지자 허흠적을 끌고 가서 안동도호 배현규를 회유하라는 군령을 내린다. 그러나 허흠적은 오히려 싸우도록 배현규를 독려하자 화가 난 복지량이 허흠적의 목을 날려 버린다. 그 모습을 본 배현규는 복지량을 공격하여 그를 죽이고 본진까지 쳐들어가 거란군을 짓밟았다.

 

  그 무렵 돌궐의 묵철가한은 양주를 공략하여 양주도독 허흠영을 사로잡고 당나라에 세 가지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첫째, 당나라에 빼앗긴 영토와 백성을 돌려받고, 둘째, 거란의 배후를 공격할 때 필요한 군자금을주며, 셋째, 당나라 황실과 국혼을 맺자는 것이었다. 가장 당황한 것은 거란이었다. 당나라는 묵철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며 결국 돌궐이 거란의 배후를 엄습할 것이 분명했다. 한편, 신성을 치기 위해 진병했던 고구려군도 기습을 노렸으나 계책을 미리 파악한 배현규에 의해 패퇴하고 말았다.

 

  양주 함락에 놀란 당나라 조정이 묵철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약조했으나 묵철은 당나라를 믿지 않았고, 연합하여 당나라를 공격하자는 거란 이진충의 제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대조영에게 함께 거란을 치자는 서신을 보내왔다.

 

  대중상의 의견에 따라 대조영은 걸사비우에게 1만 군사를 주어 3만으로 위장케 하고 거란이 보기에는 원군 같고 돌궐이 보기에는 거란을 배후에서 치려는 기세를 유지하게 하였다.

 

  이진충과 손만영이 각각 영주와 창성을 지키게 되자 당나라 군사들이 그들을 멀찍이 에워쌌고 묵철이 남진하여 영주와 창성의 양도를 갈라놓았다. 이진충은 다친 군마와 부상병을 앞세워 당나라 군사들을 몰아쳤고 일단 승기를 잡자 더욱 강하게 당군을 추격했다. 그러다 그만 돌궐의 군사를 만나게 되자 그들을 피하여 당나라 진영을 뚫고 영주로 입성하려 하였으나 도중에 매복에 걸려 그만 황천객이 되고 말았다.

 

  이진충이 죽자 한 차례 실랑이가 있었지만 손만영이 그 뒤를 이었다. 이후 손만영은 돌궐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어 이진충의 원수를 갚았다. 돌궐군은 참패를 설욕하기 위해 송막을 기습하여 이진충과 손만영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무상가한에 올라 기세가 등등해진 손만영은 기세 좋던 돌궐 군사들을 거침없이 깨뜨리고 돌궐 지경까지 추격했다. 그리고는 대조영의 도움을 받아 돌궐과 당나라의 진병을 막을 수 있었다. 거란 대장군 이해고와 고구려 대야발의 연합군이 기주를 함락시켰다.

 

  박작성 근처에서 고구려 유민이 군사를 초모한다는 풍문을 듣고 주석모, 대화인, 손재가 나섰다. 그들은 복국을 핑계로 유민들을 갈취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던 검연각과 안무를 제압했다. 주석모와 대화인은 부부의 연을 맺는다.

 

  요서와 요동 일대에 매서운 겨울이 닥쳤다. 손만영의 거란군은 겨울이 깊어 갈수록 더욱 용맹을 떨쳤고 당군을 몰아쳐 여러 성을 깨뜨리고 영역을 넓혀 나갔다. 국호를 주로 바꾼 당제 무측천은 45만의 정예병을 투입하여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다. 손만영은 대조영을 찾아 화친을 청하고 대조영은 원군을 지원하기로 했다. 봄이 오고 당나라 18만 정병이 영주를 겨냥해 진격하자 손만영은 고구려 군사 3만에 말갈과 해의 군사 2, 그리고 휘하의 7만을 합친 12만의 대군으로 협석곡으로 진군했다.

 

  전투가 벌어지고 당군이 무서운 기세로 공격했다. 그때 갑자기 당나라 진영에서 퇴각을 알리는 징소리가 급하게 울렸다. 연합군이 선봉에 포로로 잡혔던 당나라 군사를 내세웠던 것을 당나라 장수 왕효걸이 눈치 챈 것이었다. 연합군의 차도살인(借刀殺人) 전술이었다.

 

  야간 공격을 감행한 연합군은 허수아비를 안고 화살을 막으며 치고 들었고 그렇게 밀고 밀리는 전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벌어졌다. 서로가 물러설 수 없는 전황이었다. 그러나 혈전을 벌인지 사흘이 지나면서 당군이 밀리기 시작했고 협석곡 동쪽까지 추격당한 왕효걸은 연합군에게 협공을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당나라의 대참패였다.

 

  묵철은 함께 유주를 공략하자는 손만영의 제안을 거절했고 대조영은 손만영과 함께 유주를 공격하여 전리품을 나눠 가졌다. 진노한 무측천은 묵철의 청을 수락하기로 했다. 묵철가한은 연합군이 유주를 공격하자 즉시 거란의 본거지 중의 하나인 유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당나라 조정이 묵철의 요구를 들어주어 돌궐군이 출병하게 하고 다시 수십만 대군을 진발시켰다 한다. 거란이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을 예상한 대조영 진영에서는 위계로써 나라를 세우고 당나라에 복속하는 척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고구려와 말갈은 잔치를 크게 벌여 각각 진국과 허국을 선포하고 대중상과 걸사비우가 등극하는 한편, 포로들을 석방하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복속을 청했고 그 사실을 돌궐의 묵철에게도 알렸다. 손만영은 고구려의 복국 선포가 위계임을 간파했으며 하북을 공략하여 돌궐의 진병을 멈추고자 한다. 중원 깊숙이 서진하던 거란군은 당나라 대군과 돌궐군의 협공에 전진을 멈추었다. 해족의 수령 이석명이 묵철가한에게 항복한 후 거란을 향해 창끝을 겨누었고 습 또한 돌궐에 항복했.

 

  거란은 전후좌우로 60만 대군에게 포위된 상황이었다. 손만영은 급히 모든 군사를 영주성으로 회군시켰다. 새벽부터 비가 내리는 날 기습전을 벌이지만 당나라 궁노수들에게 밀려 퇴각을 하였고 야율사로 역시 돌궐을 맞아 전투를 벌이다 패해 퇴각했다.

 

  당나라 군사들이 영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손만영은 성을 떠나 혈로를 뚫었다. 맹장 야율사로가 영주성을 사수하다 전사했고 군사들이 전멸했단다. 손만영이 고구려 정주성에 의탁하자 날마다 패잔병과 부상병들이 무리지어 정주성으로 몰려 들었다.

 

  당나라 장구철이 손만영에게 항복을 권하는 군첩을 보냈다. 장구철이 이끄는 대군이 정주성에 도달했다는 급보를 들고 손만영의 방문을 연 역밀은 깜짝 놀라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피범벅이 된 이부자리에 머리 없는 손만영의 시신이 반듯이 눕혀져 있었다. 한 때 그의 비복이었다가 시위낭장이 된 노궁노가 호원랑에게 혹하여 섬기던 주인의 목을 벤 것이었다. 노궁노는 손만영이 수급을 들고 당나라 장구철의 진영을 찾았다. 이진충이 전사한 지 꼭 이홉 달 만에, 영주 봉기를 일으킨 지 일 년 여드레 만에 손만영은 머리 없는 귀신이 되어 저승길을 밟았다.

 

  정주성을 벗어난 거란의 이해고와 측근들은 고구려로 가자는 역밀의 말을 듣지 않았고 역밀과 개례를 없애기로 모의하였다. 이해고가 개례와 항복을 막던 역밀의 두 아들을 죽이고 당나라에 항복했다. 이해고가 항복하자 대조영은 당나라와 돌궐을 걱정하게 되었다 그러자 안무와 검연각이 찾아와 계책을 상신하여 허락을 받는다. 안무와 검연각은 32백의 군사와 함께 당군의 복장을 하고 돌궐을 친 다음 다시 돌궐의 복장을 하고 당군을 격파하고 돌아온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이해고 일당의 처리를 놓고 다른 주장들이 있었으나 사면하고 벼슬을 내렸다. 을유(697)99, 무측천은 반란이 평정되었다고 결론짓고 사면령을 내린 후 대중상을 진국공에 봉하고 말갈수령 걸사비우를 호국공에 봉했다.

 

  고구려 진영에서는 도읍지를 정하는데 의견이 분분하였다. 태백산과 홀한해, 동모산이 거론되었다. 동진을 계속하던 대중상은 백암성에서 무측천의 칙서를 들고 거들먹거리는 당나라 사신 이걸명을 크게 꾸짖어 돌려 보내고 그 모습을 본 걸사비우는 급히 말을 몰아 말갈군 행영으로 돌아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제2권] 강대한 적, 당나라를 상대로 고구려 유민과 말갈, 거란, 돌궐이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사투와 머리 싸움을 벌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대발해(大渤海)

                                                                                               김홍신

 이 소설의 머리글에서 작가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 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말로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과제(공정)'란 뜻이며 이는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만들기 위해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한 연구 프로젝트이다)에 충격을 받고 발해공정을 작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자랑스럽고 영광스럽다며 독자들이 우리 발해를 품에 안고 꽃을 피워 우리 민족의 기품을 되살려주기를 청하고 있다.

익히 배워 온 발해가 갖는 민족사적 의의와 자긍심을 다시 한 번 느껴 보기로 했다.

 

1. 혈로를 뚫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짓쳐드는 나당 연합군의 기세는 가히 경천동지의 광풍에 비견되었다. 요동도행군대총관 이적 및 계필하력과 유인궤, 학처준, 설인귀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나 하면서 거침없이 내달렸고 웅진도독 유인원과 신라의 대당대총관 김유신도 대군을 휘몰아 평양성을 향해 진격을 서둘렀다.

 

  평양성이 무너지면 고구려 사직이 멸망한다. 막리지 연남건은 변방의 장수들에게 급히 평양성으로 달려오라고 명했다. 대형 검모잠이 평양성으로 향했으며 진국장군 대중상도 아들 대조영과 함께 5천여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향했다.

 

  연개소문의 장자 연남생은 당나라로 도주하여 고구려 정복의 길잡이가 되었고 아우 연정토는 12개 성을 바쳐 신라에 투항했다. 대중상과 대조영이 살수를 건넜을 때 김인문과 김유신이 20만 정병을 거느리고 평양성으로 진격했다는 급보를 받았다. 그들은 전력 질주하여 무사히 평양성에 당도하였다. 하지만 적군은 물밀 듯이 밀려들었고 공성(攻城) 무기는 강력했다. 고구려왕 고장이 항복할 뜻을 비쳤으나 막리지 연남건은 거절하였고 군권을 승려 신성에게 맡겼다.

 

  어두운 밤을 틈타 대중상과 대조영은 적의 배후를 치고 양도(糧道)를 끊기 위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평양성을 탈출한다. 적장 진기덕이 끈질기게 추격했지만 진기덕의 군마가 화살을 맞고 날뛰자 진기덕이 고꾸라지며 적진이 무너졌다. 하지만 그날 아침 승려 신성은 성루에 흰 기를 꽂고 성문을 활짝 열었다. 무진(668)921, 705년 동안 천하를 진무하며 수나라를 물리치고 당나라와 맞겨루던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는 걸출한 영웅 연개소문이 죽은 이후로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왕위를 둘러싼 암투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연개소문의 세 아들은 권세를 거머쥐기 위해 분열했었고 결국 멸망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당군은 항복하는 자까지 무참히 도륙했다. 부녀자를 백주대로에서 겁간했고, 아이 밴 여자와 어린 계집까지 능욕했다. 갓난아이까지 내던져 죽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대조영은 기필코 고구려를 일으켜 세우겠다며 평양성으로 돌아가겠다는 대중상을 설득하여 태백산으로 향하기로 하고 진기덕을 비롯한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며칠을 길을 놓았을까. 적장 정용진이 진기덕을 앞세워 추적해 왔다. 한바탕 격전이 벌어진다. 진기덕의 방면을 반대했던 동태진이 그의 칼 아래 목숨을 잃었고 대조영이 진기덕의 목을 베는 한편, 매복에 걸린 정용진에게 활을 쏘아 그를 생포했다. 대중상은 적의 병장기와 군량을 모두 빼앗고 포로는 모두 풀어 주었다.

 

  태백산에 도착하여 산채가 세워지고 인마가 안돈되자 대중상은 가솔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포수들을 불러들여 태백산의 산세를 익혔다. 당나라 조정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고 도호에 임명된 설인귀는 왕과 대신을 포함한 민호 4, 무려 2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당나라로 압송하고 남자는 모조리 죽이고 여자는 모두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게 했다.

 

  대중상은 태백산에서 천지신명과 단군성조, 태백신령에게 제를 올리고 고구려의 정기를 잇게 해주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태백산은 성산이기는 했으나 군마와 군량을 비축할 수 없고 군사를 모병할 수도 없는 곳이었.

 

  그들은 옥저 땅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그들이 영봉산성에 자리를 잡고 고구려 유장 대중상이 고구려 복국을 꾀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패잔병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찾아 들었다. 넉넉한 자들은 말과 양 떼를 몰고 오거나 수레를 가득 채워 오기도 했다. 그 즈음 대중상의 부인과 딸 대화인이 당나라 영주 고려영의 관리 하경복의 사가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대조영은 지체없이 행장을 꾸렸다. 대조영은 평소 대화인을 흠모하고 애중하던 장수 주석모와 유시복과 함께 심복 몇 명만 데리고 영주로 향했다.

 

  일행은 하경복의 사가를 면밀히 정탐하고 그믐밤을 기다려 담을 넘고 불을 질러 어수선해진 틈을 이용해 모녀를 구출하여 영봉으로 돌아온다. 구출 당시 대화인은 하경복의 잠자리 수발을 거절한 대가로 심한 매질을 당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듬해 봄, 대중상은 군사들을 풀어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게 하고 군마장도 꾸몄다. 그리고 원래 고구려의 주력부대인, 기병이 타는 말에 갑옷을 입힌 개마를 탄 중무장한 개마무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개마무사는 흑수말갈이나 돌궐은 물론이고 당나라나 거란까지도 두려워하는 용맹한 군사였으며 전장에 나서면 연전연승이었다.

  고구려 유장 검모잠이 한성에서 고구려 마지막 왕 고장의 서자인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고 고구려를 선포했다. 영봉산성에도 안승의 교서가 당도했고 대조영을 비롯한 장수들이 출병 채비를 서둘렀다.

 

  대조영은 검모잠의 명을 받아 3천 군사를 거느리고 궁모성 부근에 진을 쳤다.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연지광의 조언으로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놀잇감 화살을 만든 군사들은 그것을 진짜 화살과 섞어 적진을 향해 퍼붓자 수많은 적군이 죽어 시산을 이루었으며 남은 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고 대조영은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안동도호부의 원군이 도착하여 검모잠의 행영을 공격하였고 대조영과 검모잠의 군사는 궁모성으로 퇴각했다. 검모잠은 패퇴의 책임을 대조영에게 물으려고 칼을 빼 들었다. 같이 맞대응하였지만 결국 포박되어 옥에 갇혔다. 송여신 역시 대조영의 석방을 간하다가 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대중상이 군사를 이끌고 남진하자 검모잠은 즉시 대조영을 풀어주었다. 대조영을 풀어준 검모잠은 대조영을 선봉장으로 삼아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는 각각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치열한 저항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형국이어서 당나라 조정에서는 안동도호의 다급한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원군을 출병시켰다. 승리에 도취되고 권세를 장악하여 오만해진 검모잠은 왕위를 노리려는 불순한 마음을 품고 있다가 부하 장수 검도삭에 의해 살해된다. 안승이 신라로 파천하려하자 대조영은 이를 반대하였고 결국 안승은 신라로 몸

을 위탁하러 떠난다.

 

  대조영은 군사를 거느리고 대중상에게로 돌아갔다. 대조영은 천하 경륜을 위한 세상 순람길에 나섰다. 요동성에 당도하여 파괴된 동명성왕의 사당을 보았고 안시성에서는 고구려의 기개를 보았다. 임유관을 지나 유주에 들어서서 첫사랑 설화를 닮은 여연을 만난다. 유주는 원래 백제 땅이었다고 한다. 당나라 이연수가 편찬한 북사와 영호덕분이 쓴 주서에 의하면 백제가 진()으로부터 양()까지 약 250년 동안 장강 유역에 거주했다 하고, 또 영락 14년에 왜국과 함께 발해만의 대방계까지 진출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대조영은 백제의 후예들을 만났다. 그 중 여신은 여연의 할아버지로 대조영에게 광채가 상대방의 눈을 부시게 한다는 백제특유의 갑옷 명광개를 선물하기로 했다. 영봉산성으로 돌아온 대조영은 아버지께 고하고 결혼을 서둘렀으나 여연이 오는 도중 당나라 군사들의 습격을 받고 죽임을 당함으로써 첫사랑 연설화와 함께 대조영의 가슴에 또 하나의 깊은 상처를 그었다.

 

  신성에 진을 친 적군이 머지않아 영봉산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는 정탐병의 보고가 있자 대조영은 아버지의 명을 받고 새로운 군진을 세울 곳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몇날 며칠을 재촉하여 동모산을 거쳐 숙신 땅으로 들어선 대조영은 대중상과 친한 말갈의 걸무개를 만났다. 걸무개의 안내를 받아 홀한해 부근의 지하삼림을 본 대조영은 그곳을 최적의 요새로 판단했다.

 

  위급을 알리는 북소리가 산성에서 울렸고 적장 한승사가 군사 2만을 이끌고 영봉산성으로 쳐들어왔다. 숙신에서 돌아온 대조영을 맞은 대중상은 철수를 결심하고 영봉산성을 조카 대원영에게 맡겨 며칠 간 지키다 뒤따르도록 하고 성을 떠났다. 하지만 며칠을 버틴 대원영은 당군의 포위를 뚫지 못하여 마침내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마침내 대중상 일행은 지하삼림에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남해성의 최도윤을 만났고 그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황무지를 개간하고 군사들을 조련하기 시작했다. 점차 생활이 안정되어 갔고 대조영이 임사빈의 딸 임소진을 아내로 맞았다. 걸사비우로부터 영주 땅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정보를 들었다. 거란 추장 이진충이 당제 이치에게 불만을 품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

 

  고구려가 수, 당의 집요한 침략을 방비할 수 있었던 것은 돌궐, 거란, 말갈 등을 비롯한 여러 부족과 동맹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는데 연개소문이 병사하자 동맹이 깨어졌고 당나라가 거란이 고구려 정복의 선봉에 서면 나라를 세워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래서 수만 명의 거란 군사들이 고구려 정복 전쟁의 선봉에 섰는데 정작 고구려가 망하자 당나라는 돌변했고 거란을 달래 송막을 다스리게 했을 뿐 거란 창업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진충의 불만은 당연한 것이었다.

 

  대중상은 명검 한 자루를 이진충에 보내 그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는 한편, 영주의 동태를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꿈속에 나타난 백발의 동명성왕의 현몽을 듣게 된다.

 

  영주도독 조홰는 성정이 모질고 잔악해서 그 횡포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조세와 부역이 무겁고 굶어 죽는 자가 생겨도 구휼하지 않았다. 를 기다리기 28, 이제 봉기할 기회만 기다리면 된다.

 

  당시 당나라는 무측천이 황제로 등극하여 막강지권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적인걸이 거란과 대중상의 거병을 우려하자 대수롭지 않게 대응하였. 그러나 적인걸은 자객을 동원하여 대조영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조홰가 이미 정혼을 한 고승직의 딸 고명주를 탐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진충은 적인걸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황이 급해진 이진충은 대중상을 찾아가 고구려를 침공했던 일을 무릎 꿇고 사죄하고 영주를 공격하기로 했다. 거란과 대중상의 군사들이 영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거란의 장수 손만영과 이해고, 낙무정과 열리곤, 돌욕 등이 좌우에서 짖쳐들었고 대중상을 중심으로 달신과 걸사비우 등 명장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

 

  영주성은 함락되었다. 조홰는 도망치다 창을 맞고 수급이 남문에 내걸렸다. 대중상은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갈 채비를 했다. 하루도 쉼 없이 영주 일원과 요하 줄기를 따라 전투가 벌어졌다. 이진충은 당나라 장수에게서 노획한 정탐록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새로 진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을 확인하고는 분노를 억누르며 기필코 거란을 세우겠다고 다짐했다.

 

  대조영의 아들 대문예는 심나호가 이끄는 당군과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두지만 군령을 어기고 무모하게 패군들을 추격하다 많은 부하들을 잃게 되자 치죄를 당하였으나 조인구와 그의 아내 고명주에 의해 목숨을 구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 제1권] 평양성이 함락되어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중상과 대조영은 복국을 다짐하며 길을 떠나 태백산을 거쳐 흘한해 지하삼림에 자리를 잡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