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지금껏 오해한, 세상을 지배한 단어들 - 단어들은 어떻게 논쟁의 대상이 되었는가!
해롤드 제임스 지음, 안세민 옮김 / 앤의서재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중대한 사회적 전환의 순간들이 새로운 문제를 낳고 새로운 단어가 생기는 데 영감을 준다는 통찰에서 출발한다. 단어는 사상을 요약하기 위한 수단이고, 사상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전망을 제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이 지금껏 오해한, 세상을 지배한 단어들 - 단어들은 어떻게 논쟁의 대상이 되었는가!
해롤드 제임스 지음, 안세민 옮김 / 앤의서재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위기는 다시 생각하고 방향을 전환하기 위한, 즉 기본으로 돌아가기 위한 시간이다." 이 문장은 이 책 『당신이 지금껏 오해한, 세상을 지배한 단어들』의 '여는 글' 「논쟁의 대상이 된 단어들」이란 서문에 쓴 저자 해롤드 제임스의 말이다. 독자가 이 문장에 공감하고 크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위기'는 위험한 때이자 기회라는 의미로 설명하는 사전적 풀이에 식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자의 다음 문장이 더 매력적이고 설득력을 높인다. "이 책은 중대한 사회적 전환의 순간들이 새로운 문제를 낳고 새로운 단어가 생기는 데 영감을 준다는 통찰에서 출발한다." 즉, 단어는 사상을 요약하기 위한 수단이고, 사상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전망을 제시한다.

이러한 전망은 개인적인 관점에서의 경험을 일반적이거나 심지어는 보편적인 이해로 전환된다는 저자의 말은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는 말로 자신이 가진 철학의 핵심을 설명했다고 한다. 저자는 '번역'에 대해서도 "번역은 때때로 상품, 서비스, 심지어는 약속 간의 등가성을 확립하는 손쉬운 교환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화, 정책, 경제 전쟁에서 일종의 탄약으로 발사되는 단어들(몇 가지 사례를 들자면,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제국주의와 헤게모니, 다자주의, 지정학, 포퓰리즘, 테크노크라시, 부채의 정치, 글로벌리즘, 세계화, 신자유주의)은 그 의미가 명료하지 않아서 교환을 용도로 사용되지는 않고, 대신 논점을 흐리게 하거나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는 데에 사용된다고 지적한다.

 


 

이 책에서 검토하는 모든 단어들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그동안 이들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비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곰곰이 생각하는 대상이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통화(通貨)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루는 단어들도 영향력의 중심에서 등장했다. 통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영국이 19세기를 지배했고, 미국이 20세기 후반을 지배했다. 사상도 생산과 유통의 중심에서 등장한다. 이곳에서는 사상이 출현하고, 충돌하고, 개선되고, 왜곡된다.

19세기 전반, 혁명의 물결 속에서 프랑스 특히 파리에서는 국가, 사회주의, 민주주의 같이 그 의미가 잘 변하는 단어들이 등장했다. 19세기 후반 독일이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독일도 지적 강국이 되었다. 과거에 프랑스 정치 용어들이 침투했던 것에 자극받은 독일 사상가들은 마흐트폴리틱과 게오폴리틱을 포함한 새로운 정치 용어들을 발전시켰다. 20세기 중반, 이러한 독일 용어들 중 상당수가 대서양을 건너 호된 시련의 장으로 들어갔다. 나치 시대에 박해받은 희생자들이 이 용어들을 가져오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용어들이 세계 질서의 개념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새롭게 떠오르는 초강대국을 위한 새로운 언어의 일부가 되었다. 또 19세기 초에는 정치적 근대성의 핵심 개념들이 등장했다. 여기에는 국가와 국민주의 이외에도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가 있었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물론 훨씬 더 오래된 것이지만, 과거와는 다른 종류의 조직과 공직자를 뽑기 위하여 추첨이 아닌 선거에 의존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재발견되었다.

 


 

이러한 용어들이 공생하는 예로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개념적 반의어, 즉 음과 양이다. 사회주의는 변화하는 세계의 불편한 특징들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새로운 개념인 자본주의를 바판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구식 장인들, 새로운 제조업 노동자들뿐 아니라 재산을 날려버릴 수도 있는 귀족들, 사회적 자본이 손상될지도 모르는 지식인들은 모두가 자신이 새로운 거대한 괴물 앞에서 취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꼭 사회주의를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본주의를 개탄했고, 그중 집단주의적 충동에 호소하는 일부 사람들은 지지자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이 두 반의어는 여전히 서로 얽혀 있다.

20세기 끝 무렵,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은 사회주의의 실패를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했다. 이들 두 개념의 상호의존성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구소련의 농담이 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자본주의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의미한다. 공산주의는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앞으로 살펴보겟지만, 적은 비용으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로 이들 두 개념의 수렴 혹은 통합이 가속화되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19세기에 등장하고 나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의미가 복잡했다. 이들은 다른 상황에서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세계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고, 조직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자본주의는 국경을 넘은 현상으로 상당히 일찍이 인식되어 세계적인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로 정치 질서를 실현하는 장소는 국가 체제의 특징에 의해 좌우되었고, 이러한 특징은 국민국가가 국가의 정상적인 존재 형태라는 믿음에 점점 더 좌우되었다.

 


 

저자는 오남용되는 용어들이 우리들에게 혼란을 주고, 세계 질서를 해치는 쪽으로 작동하는 점은 경계되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이들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되새기고, 시대에 뒤떨어진 용어를 정리한 후 새로운 개념의 용어 창출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앞선 잘못된 용어들은 그대로 놔두고 이른바 '포스트~'의 과도기적 용어 사용으로 세계의 평화적이고 안정된 질서 회복, 기후 변화 등으로 위협으로부터의 해방, 국제 관계의 질서 유지 등 많은 문제들이 코로나 펜데믹을 거치고 있는 우리 앞에 놓인 당면과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독자가 여러 용어들이 이 책에서 제 뜻을 찾고 질서회복에 나서야 한다는 당위성만큼이나 공감하는 것이다. 첵에서 '헤게몬'이라는 단어가 국제 관계를 다루는 문헌에서 하나의 표준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헤게몬은 1945년 이후 산업과 금융뿐 아니라 군사력과 정치권력에서 대단한 우위를 갖고서, 1970년대부터 오랫동안 진행된 상대적 쇠퇴와 변해가는 세계 질서에 관한 논의를 주도하던 미국을 표현하기 위해 변함없이 사용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명한 정치학자 로버트 코헤인은 헤게몬에 대하여 이탈에 직면해서도 체제 유지를 위한 비용을 기꺼이 지불할 의지와 능력을 가진 국가라는 가장 분명하고도 깔끔한 기능적 정의를 제시했다. 헤게몬은 강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의 재정적 부담을 떠맡을 의지와 능력이 있어야 한다. 모든 지적이 미국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다자주의는 국제 질서의 모든 구성원들을 복잡한 협상 과정으로 끌어들였다. 모든 측면이 상충 관계를 지니고 있어서, 어느 한 영역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영역을 양보해야 한다.

 


 

책에 따르면 미국의 45대 대통령이었던 도널드 트럼프는 재임 당시 파시스트로 널리 불렸다.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본인 역시 자신의 반대 세력을 좌파 파시스트 집단으로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외에도 “글로벌리즘, 글로벌리스트”라는 단어를 남용하며 글로벌리스트를 국익을 해치는 적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20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 “자유”라는 단어를 35회나 외치고, ‘반지성주의’를 언급함으로써 많은 정치 비평가와 언론인들이 그가 사용한 단어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연일 열을 올리기도 했다.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한 나라의 경제와 사회, 심지어 국경을 뛰어넘어 이웃 나라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그 뜻이 잘못 전달되거나 지도자가 개념을 인지하지 못한 채 남용하게 되면, 정치 세력과 지지자들을 분열시키는 분쟁의 도구로 사용되고 만다.

30년간 세계화를 연구해 온 프린스턴대학교의 해롤드 제임스 교수는 우리가 겪는 정치, 경제적 혼란 중 많은 부분은 개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사용하는 단어들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생산적인 정치 논쟁과 발전을 방해하는 단어들의 진짜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이 책을 통해 각 개념들의 역사적, 언어학적 기원을 밝히는 데 천착한다. 또한 단어들이 세계사에서 어떠한 족적을 남겼고, 어떻게 잘못 사용되었는지를 통찰함으로써 정치 언어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장애가 아니라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제공한다. ‘민주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포퓰리즘???’ 많이 들어는 봤지만, 명확한 개념을 몰라 의견을 제대로 피력하지 못했다면, 자신의 비전과 공약을 명확히 드러내며 타인을 설득해야 하는 정치인, 혹은 정치 지망생이라면, 경제적, 정치적 관점에서 세계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이 책이 그 지적 목마름을 해소시켜 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저자는 이 책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이, 1970년대 이후 자기만족에 빠져들었던 여러 나라들이 세계화라는 새로운 물결에 의해 허물어졌듯, 새로운 질서에 대한 요구가 극에 달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전히 세계화는 자주 언급되는 단어이지만, 지금의 세계화는 이전과는 다르다. 물리적 요소에는 제약이 더 많아졌지만, 비물리적인 요소, 즉 정보의 세계화는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초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와의 투쟁이 생산 수단의 소유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듯, 우리는 앞으로 데이터를 소유하기 위한 운동을 벌여야 할 것이다. 또한 저자는 이처럼 새롭고도 잠재적으로 위험한 전개를 이해하고 설명하려면 역사적 맥락에 근거한 새로운 단어가 요구될 것이며, 이해를 증진하고 공동체를 강조하는 단어도 필요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 이후의 세계는 우리에게 “단어가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한 더 많은 이해를 요구할 것”이라고 말한다.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앞둔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논쟁의 대상이 된 단어들을 단지 정치 논쟁으로 치부하지 말고, 명확한 이해를 기반으로 지리적,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는 소통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이 지금껏 세상을 지배한 단어들, 혹은 앞으로 지배할 단어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는 당신에게, 새로운 세계화의 시대에 자기주장을 분명히 내세우고 싶은 당신에게, 단어의 명확한 개념과 역사적 해석, 그리고 지적 성찰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신자유주의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번영이 아니라 자유에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자유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다. 그러나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항상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하게 했다.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고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서로 다른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종종 스스로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자신의 역량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pp.403~404)

 

저자 : 해롤드 제임스

해롤드 제임스는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유럽 연구(EUROPEAN STUDIES), 역사와 국제 문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가치의 창출과 파괴THE CREATION AND DESTRUCTION OF VALUE』 외 다수가 있다.

 

역자 : 안세민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캔자스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과정을 수학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한국에너지공단, 현대자동차 등에서 일했으며, 현재는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지적 행복론』,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안티프래질』, 『베조노믹스』,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회색 쇼크』, 『자본주의 사용설명서』, 『경쟁의 종말』 등 다수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충동과 광기의 암호를 해독하다
리처드 레티에리 지음, 변익상 옮김 / 애플씨드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자들은 이 책에서 인간의 어두운 감정, 곧 충동과 광기의 심연을 생생하게 마주하게 된다. 편집증, 우울증, 종교적 망상, 상실감, 정신 장애, 성격 장애 등이 개인의 삶 속에서 거부되고 억압되어 있다 끝내 충동과 광기로 분출되어 끔찍한 범죄로 나타나는 모습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충동과 광기의 암호를 해독하다
리처드 레티에리 지음, 변익상 옮김 / 애플씨드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충동과 광기의 암호를 해독하다』을 단기간, 즉 일주일이나 한달 내에 읽고 이해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이 책은 사회학 책이기도 하고, 법의학서, 심리학서, 정신의학서, 범죄수사학서, 철학서, 신경심리학서 등 많은 학문이 혼합되고 분석되고 하나의 사실로 체계를 굳혀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어떤 이론을 설명하는 책도 아니고, 저자의 30년 경험의 법의학 심리학자로서의 활동, 정신의학적 판단에 따른 법정 증언과 철학적 사색, 그리고 범죄자와의 대화를 통한 심리 분석 등을 토대로 끔찍한 범죄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정신 상태를 분석해내는 방법을 담은 논저에 해당된다.

어쩌면 가설에 불과할지, 아니면 이 분야의 독보적인 이론서로 평가될지는 더 두고봐야 할 일이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레티에리는 30년 동안 1,000건 이상의 끔찍한 범죄를 조사한 미국의 저명한 법의학 심리분석가이다. 저자는 법원이나 변호사의 요청으로 끔찍한 범죄자의 정신 상태를 평가하고 법정에서 증언하는 전문가 증인으로 활동했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인간의 어두운 감정, 곧 충동과 광기의 심연을 생생하게 마주하게 될 것이다. 편집증, 우울증, 종교적 망상, 스트레스, 애정결핍, 상실감, 정신 장애, 성격 장애 등이 개인의 삶 속에서 거부되고 억압되어 있다 끝내 충동과 광기로 분출되어 끔찍한 범죄로 나타나는 모습을 맞닥뜨릴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독자들은 인간의 원초적 감정과 함께 거짓과 속임수가 난무하는 형사법 체계에서 벌어지는 법 집행자들의 범죄와 ‘침묵의 벽’이라는 왜곡된 하위 문화, 여성에게 더 가혹한 사법 체계의 어두운 그늘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서문 「시작하면서」를 통해 저자가 법의학 심리학자라는 생소한 분야에 발을 디디게 된 이유부터 설명한다. "처음부터 내가 법의학 심리학자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돌이켜보면 뉴욕 시립대학에 다닐 때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쓴 『문명과 불만』의 어느 한 부분을 읽으면서 불씨가 생겨난 것 같다. 조금 과장해서 그 순간 정말로 넋이 나갔다. 『문명과 불만』에서 프로이트는 모든 사람이 충동과 억제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둘 사이의 불안정한 타협을 통해서 '공손함'이 나온다고 주장했다.

나는 전통적인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제력을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주장은 달랐다. 프로이트는 '예의' 또는 '공손함'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개인의 욕망과 공동체의 기대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통해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예의 또는 공손함'은 충동과 욕망을 억제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기는 불안을 참고 견디려는 개인의 적극적인 의지라고 주장했다. 처음에 나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정확히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깊게 고민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프로이트의 주장을 뭔가 안다고 생각했으나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기증이 났다." 솔직한 고백과 함께 프로이트와 그의 저서 『문명과 불만』에서 자신의 학문과 경험의 시작이라고 토로한다.

 


 

이후 저자는 자신의 직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정신적 장애가 어떻게 범죄 행위를 일으키는지 직접 지켜보았다. 자제력과 예의를 잃은 피고인의 깊은 내면도 범죄심리학으로 생생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한다. 원초적 감정이 만연하고, 거짓과 속임수가 난무하는 형사사법 체계는 인간 본성의 전체 스팩트럼을 탐구할 수 있는 배양접시 역할을 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인간의 건강하면서도 파괴적인 힘의 원동력으로 '다이모닉(daimonic)'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아울러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피고인을 조사한 보고서로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끔찍한 살인사건에 노출되었을 때 자신의 상태는 어떠했는지도 공유하기로 한다. 또 법의학 심리학자일 뿐 아니라, 정신분석가로 훈련도 받았기 때문에 법의학의 관점에서 범죄를 평가하는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었고, 아울러 정신분석가로서 환자의 내면세계에 공감하며, 행동의 이면에 놓인 동기와 감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는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고 말한다. 범행 순간에 피고인의 정신 상태가 어떠했는지, 곧 그가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법의학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법의학 심리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수많은 경험으로 검증된 진단검사와 같은 도구와 함께, 정신분석학적 해석은 피고인의 독특하고 섬세한 심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나아가 저자는 법의학과 관련된 수많은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찰·검사·판사 등 사법 전문가와 법의학 전문가가 마주하는 윤리적인 딜레마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은 큰 성과로 판단하고 있다. 객관성이나 정의감 같은 직업의식이 개인적인 성향이나 이해관계와 어떻게 충돌하는지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범죄심리학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형사사법 체계에 종사하는 이들의 불완전한 본성과 법적·도덕적 결정을 둘러싼 갈등도 깊게 파헤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정신분석학과 심리학, 신경과학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작업을 해나갈 것임을 밝히기도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때때로 피고인과 보통의 정신분석 환자를 비교할 것이며, 이런 비교를 통해서 양쪽 다 정서적 갈등과 원초적 감정이 폭넓게 나타나지만, 일단 가슴 아픈 비극이 발생하면 형사소송 절차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만나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저자는 "인간의 본성은 어떤 사람에게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그려진) 시스티나 성당을 만들 힘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만들 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 두 가지 모두 인간의 본성이고 본성에서 비롯된 힘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독자는 이해한다. 저자는 이 두 극단 사이의 거리는 가깝고, 경계도 쉽게 허물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 1부에서는 '다이모닉' 개념을 소개한다. 다이모닉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으로 잔혹함과 숭고함이 함께 준재하는 역설적인 잠재력이다. 여기에서는 독자들에게 다이모닉의 심리적 발달을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이 내용은 일련의 사건에 대한 법의학적 분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부에서는 장마다 특징적인 사건을 자세히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저자가 전문가로서 결론에 도달한 법의학적 절차를 설명한다. 예컨대, 6장에 등장하는 냉혹한 사이코패스로 판명된 카리스마 넘치는 랜들을 조사한 과정과 그의 악랄함을 알게 되었을 때 저자에게 나타난 감정적 반응 같은 것이다.

피고인과 사법 전문가를 통해서 알게 된 풍부한 인간 본성과 그로부터 비롯된 분노·기만·체면 등도 폭넓게 살펴본다. 곧 폭력 범죄가 발생한 상황을 살펴보면서, 검사가 무죄 정보를 숨길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도 함께 다루었다. 예민한 수용자에게 사설 정신병원보다 훨씬 더 동정적인 교도소 정신건강 부서도 빼놓지 않는다. 3부에서는 잔혹함이나 숭고함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다이모닉의 본질적 특성을 다루었다. 발달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 신경과학의 새로운 성과에 비추어보면 인간 본성의 합리성에 기초한 법률 체계가 때로는 부당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주장도 소개한다. 나아가 형사사법 제도가 더 인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긍정적인 방향을 찾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은 3부로 나뉘어 「인간의 본성」, 「충동과 광기」, 「정의롭지 않은 인간의 본성」이란 제목으로 구성됐다. 각 부에는 2개, 8개, 3개의 챕터로 각각 구분돼 인간의 '본성과 본능'부터 범죄자는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까지 13개의 챕터에서 살펴본다. 이 과정에 독자는 하나의 재밌는 숙제를 떠안았다. 바로 각 챕터마다 가장 앞, 제목 밑에 우리가 흔히 명언, 명구로 알려진 위인들의 문장을 하나씩 접할 수 있다. 이 문장들은 각 챕터의 주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독자의 짧은 지식으로는 제대로 헤아리지 못해 혹시 이 책을 읽는 독자로서 관심을 갖고 살펴볼 분들이 있기를 바라면서 여기에 적어본다.

 

01. 인간의 본성과 본능

사람처럼 굴곡진 나무로는 어떤 것도 똑바로 지을 수 없다. - 이마누엘 칸트

02. 과거의 삶이 현재를 규정한다

과거는 절대 죽지 않는다. 심지어 과거도 아니다. - 윌리엄 포크너

03. 눈을 멀게 한 유대 관계

어떤 이들은 그저 평범하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쓴다는 사실을 아무도 깨닫지 못한다. - 알베르 카뮈

04. 여성 살인자

연인의 증오는 연인의 사랑보다 강하다. 서로에게 증오의 상처는 치료되지 않는다. - 에우리피데스

05. 종교적 망상

공포는 가면을 벗는 것이다. - 로버트 블록, 영화 〈사이코〉의 원작자

06. 매력적인 악마, 사이코패스

초자연적인 악의 근원을 믿을 필요는 없다. 인간만이 모든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 조지프 콘래드

07. 참을 수 없는 분노의 폭발

친정으로 사악한 모든 것은 순수함에서 시작된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08. 친부모의 영아살해

나는 슬픔으로 만들어진 여자다. - 에우리피데스 〈메데이아〉

09. 성도착과 성폭력

하나의 죄악이 또 다른 죄악을 자극하는구나. 살인은 연기의 불꽃처럼 욕정에 가깝다. - 셰익스피어 〈페리클레스〉

10. 청소년 범죄인가, 성인 범죄인가

본질적으로 몽둥이로 바뀐 작은 나무에서 잎이 돋아나기를 기대할 수 없다. - 마르틴 부버

11. 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식물은 자신에 관해 식물학자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 한스 켈젠

12.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저지르는 범죄

여기에 이유 따윈 없어 - 아우슈비츠의 경비원이 프리모 레비에게 한 말

13. 범죄자는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춤추는 별을 낳으려면, 영혼 안에 혼돈이 있어야 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마누엘 칸트는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꼽힌다. 그런데 (이 장 첫머리의 인용문에서도 확인되는) 인간 본성의 불가피한 비뚤어짐을 꿰뚫는 그의 통찰은 무척 역설적이다. 어쩌면 인간의 전반적인 경험을 심리적으로 잘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칸트가 말한 인간의 비뚤어짐을 예방하는 해독제가 될 것이다."(p.25)

 

저자 : 리처드 레티에리(RICHARD LETTIERI, PHD)

법의학 신경심리학자 및 심리분석가로서 약 30년 동안 개인의 심리 치료뿐 아니라 형사 재판에서 전문가 증인으로 활동했다. 전문가 증인의 역할은 범죄자의 정신이상 여부, 범행 시점의 정신 상태, 그리고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정신 상태인지 조사하고 평가하는 일이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박사를 취득하고 채프먼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심리분석 뉴센터, 페퍼다인 대학의 석사 및 박사 과정의 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오렌지 카운티(ORANGE COUNTY)와 샌버나디노 카운티(SAN BERNARDINO COUNTY) 고등법원 전문가 증인 위원이며 미국 심리학회(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미국 신경심리학회(NATIONAL ACADEMY OF NEUROPSYCHOLOGY), 심리과학협회(ASSOCIATION FOR PSYCHOLOGICAL SCIENCE), 미국 심리학 법학회(AMERICAN PSYCHOLOGY-LAW SOCIETY), 새로운 정신분석센터(NEW CENTER FOR PSYCHOANALYSIS) 회원을 역임하고 있다.

 

역자 : 변익상

한국코치협회에서 인증한 KPC로 청소년과 성인에게 라이프 코치(LIFE COACH)로 청소년과 학부모의 성장과 성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법무부 위촉 보호관찰위원을 맡고 있으며 공저로 〈코치 100% 활용하는 법 : 코칭을 만난 당신에게〉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자를 위한 도시는 없다 - 처음 만나는 페미니스트 지리학
레슬리 컨 지음, 황가한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시'와 '여자'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이 책 『여자를 위한 도시는 없다』는 도시와 여자가 불가분의 관계라는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역사상 여자들은 늘 현대도시의 문제로 간주되어 왔다. 산업혁명기에 유럽의 도시들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서로 다른 계급의 사람들과 이민자들이 거리에서 마구 뒤섞이게 되었다고 저자 레슬리 컨은 말한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 규범 가운데 엄격한 계급 구분과 딱딱한 예법은 지체 높은 백인 여자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으나 도시에서 여성과 남성, 여성과 우글거리는 군중 간의 접촉이 증가함에 따라 이 예법은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빅토리아 시대 '런던'이라는 '논쟁적 지역'은, 특히 안전 및 성폭력과 관련된 논의에서, 여자들도 '대중의 일부가 될' 여지를 마련해 줬다고 역사가 주디스 윌코위츠를 인용, 저자는 말한다. 이 혼란스러운 과도기가 의미하는 바는, 겉모습만으로는 계급을 구분하기가 점점 어려워져서 거리를 지나가던 숙녀가 최악의 모욕을 당할 가능성, 즉 '매춘부'로 오인받을 위험이 생겼다는 것이다. 어떤 여자들은 도시의 어수선한 무질서로부터 보호받아야 했던 반면, 어떤 여자들은 통제되거나 재교육받거나 추방당해야 했다. 도시 생활에 대한 관심 증가에 따라 점점 가시화된 노동 계급의 실태를 중산층이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 주장은 이 책의 서문(들어가며)의 제목 「남자들의 도시」 '도시는 콘크리트로 쓴 가부장제다'란 표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표현에 따르면 공장이나 일반 가정에서 일하기 위해 도시로 이주함으로써, 집 안의 질서를 '전복' 하는 여자들보다 비난하기 쉬운 대상이 또 어디 있겠는가. 여자들이 유급 노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자 그들에게는 약간의 독립성이 생겼지만 자기 가정의 가사에 할애하는 시간은 당연히 줄어들었다. 그 결과 가난한 여자들은 실패한 주부로 묘사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들이 자기 집을 깨끗하게 유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노동 계급의 '풍기문란'이라고 비난받았다. 이 풍기문란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서 여러 가지 문제 행동으로 나타났고 이 모든 것은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여성의 순수성 및 청결에 관한, 빅토리아 시대의 다소 과장된 공포가 어느 정도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대까지도 여자들의 도시 경험은 여전히 물리적, 사회적, 경제적, 상징적 장벽에 가로막히는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청결하지 못한 공중화장실은 여자들을 백화점 화장실로 향하게 한다. 스타벅스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커피 한 잔을 사야 할 때도 있다. 축구장, 농구장은 소년들을 상정한 공간이다. 중산층 여성들을 위한 도시 환경은 편리하지만 성평등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임금 격차에 따른, 여성들 간의 불평등을 심화한다.

 


 

『여자를 위한 도시는 없다』는 도시에 숨어 있는 성 편향성을 드러내며 차별 없는 공정한 도시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5개 항으로 나눠 논의하는 책이다. 페미니스트 지리학은 성차별주의가 지표(地表)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이해하는 학문이다. 도시 계획, 교통, 주택 등의 분야에서 젠더와 형평성 자문 활동을 하는 페미니스트 지리학자인 저자 레슬리 컨은, 남성 중심의 도시가 여성의 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자신이 겪은 도시 생활 경험과 함께 풀어낸다. 이 책은 공중화장실, 돌봄 시설, 여성 안전 등 여성을 고려하지 않은 도시 인프라뿐 아니라, 도시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 여성의 활동을 제한하는 도시 계획, 도시가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응하는 방식 등 도시에 만연한 가부장적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또한 중산층 백인 여성에 편향되지 않도록, 젠트리피케이션(구시가지의 낙후 지역이 재개발을 통해 가치가 상승하면서 원주민들이 밀려나는 현상)으로 인해 교외로 내몰리거나 도시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저소득층 여성, 강한 차별적 시선을 받는 흑인 여성, 유색인 여성, 장애인 여성, 레즈비언 등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애초에 도시 계획의 '표준 인간'에 여성은 없었다. 남자들은 여성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불편함, 차별이라는 장벽을 만날 일이 거의 없다. 도시는 남성의 경험을 '표준'으로 삼아, 남성에 의해 설계되어 왔기 때문이다. 여성이 원하는 도시의 모습은 무엇인가? 이 책은 여성 친화적 도시 건설을 위한 친근한 안내서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 책은 도시 환경에 새겨진 성 편향성과 그런 도시 환경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여 준다. 도시 계획에서 여성의 경험은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 여자들은 용변을 보는 데 오래 걸리고, 생리 중에 해결할 것이 많다. 아이의 배변을 도우러 같은 칸에 들어가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급하게 기저귀를 갈거나 수유를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공중화장실은 칸이 좁고, 여성들이 원하는 만큼 위생적이지 않다. 화장실은, 여자들이 백화점이나 커피숍으로 향하는 이유 중 하나다. 또한 국공립 어린이집이 부족해 대기자가 터무니없이 긴 것은 소득 격차에 따른 여성 차별을 야기한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중산층 여성은 당장 저소득층의 보모를 고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택 정책은 독신, 결혼 가정, 핵가족, 노인 부부 등 '전형적인' 가정 모델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친구와 부동산을 공동 소유 하는 것은 흔치 않은 데다 문제의 소지가 크다. 그러나 전통적인 가부장제에 따른 가정 형태가 규범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면 타인과 관계 맺는 다양한 방식도 정책에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주거, 운전, 육아, 노인 돌봄, 간호 등 여성이 필수적인 일들을 서로 의지해 공동으로 수행하고자 한다면 이를 뒷받침하는 인프라를 갖추는 것은 경제적 관점에서도 충분히 투자 가치가 있다.

 


 

이 책은 이와 함께 도시 인프라뿐 아니라,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도 살핀다. 10대 소녀들이 쇼핑몰 푸트 코트를 점령하거나 다 같이 화장실 가는 것을 시시하고 유치하다고 여기거나, 대중 매체에서 여자들의 우정을 시기와 질투로 그려내는 것은 여자들이 합심해 우정의 힘으로 세상과 자신들을 바꾸는 것을 막는다. 도시를 바꾸고자 의견을 표출하는 시위 현장에서조차 성 편향성이 발견된다. 남자들은 카리스마와 비전이 있는 공식 지도자가 되는 반면, 여성 지도자들은 곧잘 언론 매체에 무시당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여성은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의 경우 가정이나 직장 같은 사적 공간이나 지인에게 폭력을 당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데이터가 충분히 모였음에도, 도시는 가정 폭력, 지인에 의한 성폭행, 근친상간, 아동 학대 등은 예외적인 것처럼 평소에 관심이 매우 적다.

이 책에서 저자는 여성으로서 자신이 어떤 경험을 하는지, 자신의 몸이 도시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탐구한다. 컨은 거듭 우리가 몸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도시에서 실제로 자신이 어떤 성 차별을 겪는지, 도시 계획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공감을 얻을 수 있고, 거기서부터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성별과 페미니즘과 도시 생활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도시를 변화시킬 방법을 스스로 찾게 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여성 친화적 도시를 실현하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 세심하게 접근한다. 컨은 백인 여성인 자신의 안전 욕구가 유색인 동네의 순찰을 강화하지는 않는지, 유모차 출입에 대한 욕구가 장애인 및 노인의 욕구와 연대할 수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산층 여성이 사는 동네에는 깨끗한 공원, 카페, 서점, 유기능 식품점 등이 생겨나기 시작하는데, 이는 언뜻 여성을 위한 변화 같지만 오히려 저소득층 여성을 소외시킨다는 점을 짚어 낸다. 젠트리피케이션이 가져온 중산층에 한정된 이득은 남녀 분업에 기여하지 않는다. 그밖에 이 책은 흑인 여성, 유색인 여성, 장애인 여성, 레즈비언이 겪는 차별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인다. 흑인 여성은 심각한 인종 차별을 겪기도 하며, 직장에서 먼 곳에 떨어져 사는 유색인 엄마는 가사 노동과 유급 노동을 힘들게 병행해야 한다. 장애인 여성은 신체적 학대와 성폭력에 취약하며, 레즈비언 커플은 게이 동네에서조차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공간을 찾기 어렵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컨은 도시 계획, 정치, 건축에 폭넓은 실제 경험을 가진 대표들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성 주류화, 즉 여성이 사회의 주류 영역에 참여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모든 계획과 예산 결정이 성평등이라는 목표에서 출발해야 함을 의미한다. 세계 곳곳은 도시 계획에 젠더 관점을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성 주류화가 기존의 성 역할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컨은 서울시가 직장 여성이 통근길에 겪는 불편을 줄이기 위해 하이힐 굽이 끼지 않는 보도블록, 여성 전용 주차장 등에는 신경 쓰지만, 가사 노동이나 돌봄 노동에서 나타나는 남녀 간 불균형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별로 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물리적 환경의 변화뿐 아니라, 여성들의 연대를 강조한다. 집에서, 거리에서, 화장실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안전하다고 느끼고 싶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대할 수 있다. 여성의 연대는 유급 노동, 돌봄 노동, 사회적 재생산을 새롭게 조직할 방법에 대해 소통하는 것을 활성화한다. 다양한 인종과 계층의 여성이 겪는 문제와 다양한 도시 생황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 사회가 유색인 여성을 차별하고 있을 수도 있고, 우리가 해외 도시를 방문하거나 거주할 때 차별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성 친화적 도시는 배타적이지 않다. 여성 친화적 도시는 나이, 질병, 장애, 인종, 계급, 성적 지향 사이에 장벽을 허문다. 여성 친화적 도시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 갈 것인가? 이 책을 통해 여성이 연대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며 여성 친화적 도시를 실현할 방안을 함께 모색할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저자 : 레슬리 컨(LESLIE KERN)

차별 없는 미래 도시 환경을 제시하는 페미니스트 지리학자. 1975년생으로, 2002년 토론토 대학교 온타리오 교육 연구소OISE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2008년 요크 대학교에서 여성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4년에는 네브래스카 대학교에서 페미니스트 지리학 콘퍼런스를 조직했으며 2015년 풀브라이트 재단의 지원을 받아 조지아 케네소 주립 대학교 방문 교수를 지냈다. 현재 마운트 앨리스 대학교 지리환경학과 부교수로서 도시 사회 지리학, 젠더와 도시, 젠더와 인종 및 환경 정의에 관한 과정을 가르치고 있으며, 대학교 내 여성 및 젠더 연구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다. 주된 연구 주제는 젠더와 젠트리피케이션이다. 도시 계획, 교통, 주택, 공적 공간, 안전 설계 분야에서 젠더와 형평성 자문을 하는 그녀는 2020년 로스앤젤레스 공평한 공간 프로젝트, 2021년 뉴욕 시민 주택 계획 위원회, 바르셀로나 산츠 기차역 재건설, LA 메트로 젠더 행동 프로젝트 등에 참여했다. 『로이터』, 『가디언』 등에 칼럼을 기고한 바 있으며, 블로그와 트위터, 라디오, 팟캐스트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여자를 위한 도시는 없다』는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다. 그 외에 『성(性)과 도시 재활성화SEX AND THE REVITALIZED CITY: GENDER, CONDOMINIUM DEVELOPMENT, AND URBAN CITIZENSHIP』를 썼다.

 

역자 : 황가한

서울대학교에서 불어불문학과 언론정보학을 복수 전공한 후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근무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한영번역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보이지 않는 여자들』, 『현대적 사랑의 박물관』, 『보라색 히비스커스』(2019년 올해의 청소년 교양 도서), 『아메리카나』, 『제로 K』, 『사랑 항목을 참조하라』(2018 세종도서 교양 부문), 『엄마는 페미니스트』 등이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