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누구나 바꿀 수 있다! - 아나운서와 함께 하는 하루 10분 목소리 트레이닝 목소리
우지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요즘들어 스타일이 좀 더 각론적으로 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지금까지 외형에 치중했다면, 앞으로는 자기만의 개성에 치중할 때 인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개성을 나타내는 것은 목소리가 아닐까요? 이 책은 목소리 트레이닝에 관한 책입니다. 전 아나운서 출신의 보이스 트레이닝 강사인 우지은 씨가 쓴 <목소리, 누구나 바꿀 수 있다>를 소개합니다.
 

2년 전 쯤인가 보컬 파워라는 책이 있었습니다만, 이 책은 더 실용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무엇보다 목소리의 대가들인 아나운서 출신이 저자라는 게 마음에 듭니다. 보다 나은 커뮤니케이션을 원하는 직장인들에게 많이 어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목소리는 사실 전달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목소리는 상대에게 잘 전달되어야 하고 듣기 좋아야 합니다. 혹시 내가 무슨 말을 할 때 "뭐라고?"라고 자주 묻나요? 그런 분이 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 대중들에게 목소리로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업무를 하는 분이라면 꼭 읽어두면 좋겠습니다. 

 


 


  이 책은 읽기에만 그치지 않고 직접 연습하고 따라하는 훈련을 해야 하는 행동을 요구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제사한 그림과 설명을 넣어 가독성이 있도록 꾸며졌습니다. 특히 부록으로 CD가 제작되어 따라하는데 큰 무리가 없습니다. 보다 전달력을 높이기 위한 발성에 관한 내용도 실렸지만, 저는 발음교정에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가 발음교정부분이 아닐까 싶은데요, 방송국 아카데미에서나 배울 수 있는 내용이 함께 포함되어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좀 더 정확한 발음을 필요로 하는 건 요즘 더 강조되고 있는 시점이라 유익했습니다. 이 책이 주는 최대의 장점은 프로페셔널한 저자가 쓴 책이라서 신뢰도가 높다는 점, 그리고 발음교정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해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일 겁니다. 목소리 트레이닝을 위한 책, <목소리, 누구나 바꿀 수 있다>로 전달력이 강한 목소리를 갖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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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책쟁이들 - 대한민국 책 고수들의 비범한 독서 편력
임종업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미쳐야 미친다>가 과거라면, <한국의 책쟁이들>은 현재의 독서광들이다!

  무슨 책의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머리를 움켜쥐었나보다. 책갈피로 머리카락 하나가 소리 없이 떨어졌다. 손으로 치우려고 하다가 ‘아서라, 그냥 둬도 괜찮지 않겠나’ 싶어 그냥 두었다. 나중에 온통 백발(외가 식구들이 모두 백발인데, 난 외탁이란다. 서른이 막 넘어서자 귀 옆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이 되어 다시 볼까 싶다만 이 책을 다시 본다면 젊은 시절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만나면 새롭겠다 싶었다. 알 수 없다. 있지도 않은 자식이 발견한다면 ‘뉘 머리카락’일지 궁금해 할 것도 같았다. 

  흔적. 내가 읽은 책에는 흔적이 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몇 날 며칠 집어들었다 끼적거리고, 다 읽고 나면 언제 읽었노라 표시를 한다. 완完 자도 넣고, 주제넘게 서명도 한다. 어떤 책은 이러기를 네 다섯 번을 하고, 어느 책은 시작만 하고 아직 맺음을 못한 책도 있다. 온라인에 책읽은 소감을 적은 리뷰를 하기 전에는 색지가 들어간 앞장에 독후감을 적었더랬다. 어린 동생들이 봐도 좋고, 훗날 생길지도 모를 자식이 읽어봐도 좋겠다 싶었다. 책에서 건진 생각들, 느낌들을 적었다. 그 날의 日記도 조금 넣었다. 흔적. 눈으로 쫓아 표식이 나질 않아 굳이 읽었노라 표시했다. 접고, 줄을 치고, 괄호를 넣고, 행간에 비평 아닌 비평도 함께. 모두 읽고 나면 무게는 그대로일진대 두께는 늘었다. 읽었구나 싶어 흐믓해진다. 세상을 헤엄치는 나라는 물고기의 비늘이 한 개 더 생겨난 것처럼. 책에 흔적을 남기고 나면 내가 책이 되고, 책이 내가 된다. 

  미필적 고의에 의해 생기는 흔적도 적지 않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는 눈물 흔적이 그득하다. 고등학생 시절 할머니의 장례를 보러 강릉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에서 읽은 최인호의 <천국의 계단>보다 눈물 흔적이 더 많은 것 같다. 재채기를 할 때는 내 침이 뭍었을테고, 마른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길 때도 침이 묻었을테다. 라면 국물이 튄 적도 있을테고, 한 여름엔 과일즙도 떨어졌을 게다. 커피가 엎어져 테두리가 염색된 책들도 꽤 많다. 모든 흔적에는 시간이 뭍었고, 사연이 뭍었다. 그리고 그 속에 나도 함께 뭍혀 있다.

  그래서 방안에 그득히 있는 책 중에 흔적이 있는 책은 내 책이요, 아직 흔적이 없는 책은 내 책이 아니다. 잃어버려도 모르고, 누구에게 준다 해도 딱히 상관이 없다. 새 책은 아직 값을 치루지 않은 서점의 쌓인 그것들과 다름 아니다. 책을 펴보지 않아서 그 책이 누군지 아직 모른다. 흔적을 남기지 않아서 아직 내 비늘도 아니다. 아직 읽지 않은 책이 꽂힌 책장을 살피기는 그래서 괴롭다. 이 책을 들자니 저 책이 울 것 같고, 저 책을 뽑으려 하니 바로 옆 책이 함께 달려 나온다. 더 괴로운 것은 모두 읽어내지 못하면서도 계속 해서 새 책을 들인다는 것이다.

 책장에 무사히 분양이라도 받으면 좋으련만 세로로 꼽히지 못한 채 가로 누워 제 배 위에 동지를 맞아들이는 책들이 백 수십 권이 넘는 형편이니 또 괴롭다. 이것이 병病일까, 벽癖일까 고민했다. 그런데 책 한 권을 읽고 고민하기를 관두기로 했다. 광狂이라 표현해도 부족할 사람들이 그득했기 때문이다. 책고수라 불려도 절대 부족하지 않을 사람들이 책 한 권에 모였다. 임종업의 <한국의 책쟁이들>이다.



 

    책 읽는 재미 중 하나는 책을 모으는 재미다. 휑하던 방 한켠에 커다란 책장을 들여놓고 ‘이 너른 곳에 언제 책을 모두 채울꼬’ 걱정을 한다만 세월이 세월을 먹을 무렵이 되면 또 책장 걱정을 해야 한다. 이를 몇 번 하다 보면 책장 값이 책 백여 권은 살 수 있는 정도가 되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도 만나게 된다. 한 권 한 권이 모여 한 칸을 채우는 재미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실제로 머리로 가슴으로 그만큼을 소화했는가는 알 수 없지만(그랬기를 바라지만) 흔적이 뭍은 책들이 그득함은 절로 뿌듯해진다. 정도가 심해지면 독서를 위한 책을 넘어 책을 위한 책으로 번지게 된다. 어떤 책이든 초판 1쇄 권을 손에 넣고 싶고, 추앙하는 작가가 생긴다면 그의 모든 책을 손에 넣고 싶어진다. 신간을 파는 서점을 넘어서면 헌책방을 찾게 된다. 값이 헐어서 좋고,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없어 귀해져서 좋다. 혹여 저자의 서명이 있다면 더 좋을테고, 항상 생각에 있던 책을 만난다면 산삼을 캔 심마니의 기분이 든다. 이 정도 되고 나면 ‘독서인’이 아닌 수집가, ‘책사냥꾼’이 된다. <한국의 책쟁이들>은 책사냥꾼들의 이야기다. 그것도 한 분야에 대해 궤를 뚫어볼 만큼 탁월한 지식과 독서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저자가 헌책방을 순례하면서 이들을 발굴하고, 인터뷰를 했으니 르뽀요 다큐멘터리다. 좀처럼 보기 드문 작업의 책이 아닐 수 없다.

  책에 담긴 스물 여덟의 책사냥꾼들은 실로 대단하다. 이들을 논하기는 입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북카페를 차리기 위해 이십수 년 몸담았던 회사를 그만 둔 사장도 있고, 결혼도 하지 않고 노년을 책과 함께 보내는 전직 비즈니스맨도 있다. 책을 사느라 재산을 탕진한 사람은 손으로 꼽기도 어렵다. 이들이 관심을 갖는 장르도 다양하다. 책장이 있는 서재 대신 온라인에 서가를 꾸민 이가 있는가 하면, 낮엔 북카페였다가 밤엔 개인 서재로 바뀌는 전천후 서재도 만나게 된다. 



 

   이 즈음에서 책 수집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람이 뭔가를 수집한다는 것은 남에게 보여 과시하기 위한다기 보다는 스스로가 만족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편 심리학적으로는 ‘손실 기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손실을 싫어한다. 똑같은 대상을 놓고도 그것을 얻었을 때 느끼는 행복은 그것을 잃었을 때 느끼는 처참함의 두 배에 달한다고 한다. 이것이 손실 기피loss aversion이다. 예를 들어 딱히 필요 없던 물건을 손에 넣는다면 ‘무엇이 생겼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자기에게 달라고 한다면 내가 필요가 없음에도 주기는 영 마득찮다. 이렇듯 사람들은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 대, 동일한 것을 얻었을 때 느끼는 기쁨보다 두 배로 큰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러한 손실기피는 타성, 즉 현재 갖고 있는 것을 고수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창출하도록 돕는다. 만약 10년 동안 애용하던 만년필을 경매에 내놓는다면 나는 소비자가보다 더 높은 값에 내놓을 것이다. 소비자가 이상의 가치는 내가 그 만년필과 함께한 세월의 가치가 뭍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 속의 주인공들에게 있어 그들이 소장한 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헌책방을 뒤져 찾아낸 보물을 어떻게 남에게 넘길 수 있을까? 소중한 책을 찾아낸 기쁨은 계속 추구하고 그것들을 잃어버릴 슬픔을 마다하니 책이 모일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도 책은 자신이라는 물고기의 비늘인 셈이다. 

  이 책을 통해 ‘미쳐야 미친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 전문가 뺨치는 식견으로 무장하 이들을 만나면서 ‘사랑에 빠진 인간의 열정’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케 했다. 1800년대 미국의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가장 고귀한 질병, 바로 애서광증(愛書狂症)에 일찌감치 푹 젖어버린 분'이라며 젠틀 매드니스Geltle Madness라 표현했다. 책에 빠져버린 점잖은 미치광이, 책에 빠진 점잖은 사람들이 이들이 아닐까. 무엇인가 미치도록 좋아하고 싶거든 이들처럼 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미쳐 있기에 행복한 사람들이다. 책을 덮고 난 소감은 그저 미칠 것을 찾지 못해 아쉽고, 혹은 아직 덜 미쳐서 부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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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죽음을 앞두고 후회되는 한 가지가 뭔 줄 아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다 전해주지 못한 거라네!" 

  봄이 채움이라면 가을은 덜어냄이다. 비우고 또 비워 더 이상 비울 것이 없게 되는 날, 소리 없이 첫눈이 내린다. 마음이 비워지니 추워지는 것 같다. 비워지는 마음만큼 겉옷의 두께가 두꺼워진다. 겨울은 죽음이다. 모든 것이 생장을 멈추고 마지막을 고한다. 혹은 죽은 듯 웅크리고 이듬해를 기약한다. 그래서 눈 내린 신새벽처럼 고요하다. 죽음의 겨울보다 가을이 더 추운 것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덜고, 비우고, 시들어감을 체감하며 목격하기 때문일 것이다. 매일 낮길이가 짧아지는 만큼 추위를 체감한다. 다가올 시듦과 죽음을 예감한다. 가을이 우울한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지난 밤 내리는 빗소리를 듣다가 뜬금없이 책장으로 섰다. 몇 해 전 읽은 책 한 권이 ‘잘 있는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이유가 왜인지는 알 수 없다. 성큼 다가온 가을이 내게 수작을 건 탓 일게다. 반갑게도 아래쪽 한 켠에 잘 있었다. ‘있구나’ 안심하며 책을 꺼냈다. 이 책을 읽던 몇 해 전 가을 꽤 많은 눈물을 훔치던 기억, 눈물을 닦으며 흣하고 웃었던 기억이 났다. 책을 읽던 그 때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엔 없다. 괴로움인지, 외로움인지, 그리움인지 알 수 없지만 드넓은 광야에 혼자 있던 느낌은 아직 남아 있다. 아마도 그 해 가을도 올 가을 처럼 비움을 체감했던가 보다. 알 수 없지만, 내가 비움의 덧없음을 탄식하던 그 때, 이 책은 ‘그 비움은 버림이 아니라 나눔’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책장을 펼쳤다. 제목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Tuesday with Morrie>이다. 가을 빗소리가 책장 넘기는 소리에 젖어들었다. 



 

    꽤 유명한 스포츠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던 사내 미치 앨봄은 어느 날 한 TV 프로그램에서 낯익은 모습의 노인의 인터뷰를 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코치(그는 교수를 그렇게 불렀다)인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s 였다. 모리 코치는 근위축성측삭경화증, 루게릭병으로 잘 알려진 병에 걸려있었다. TV를 통해 본 코치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본 지 16년 만이었다. 대학시절 많은 남다른 가르침과 사랑을 전해줬던 코치와 16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 것이다. 미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리 교수님, 저 미치 앨봄입니다. 1970년대에 선생님 제자였습니다. 아마 기억 못하시겠지만요...”

그런데 대뜸 하시는 말씀이,“왜 코치라고 부르지 않아, 인석아?” 

  한 통의  전화로 미치Mitch Albom교수를 다시 만나게 되고, 그 후 매 주 화요일마다 투병중인 모리교수를 찾게 되었다. 모두 열네 번에 걸친 ‘화요일의 만남’은 모리 교수의 ‘마지막 강의’였다. 죽음을 목전에 둔 교수는 화요일마다 늙은 제자에게 사랑, 일, 공동체사회, 가족이 나이든다는 것, 용서나 후회의 감정, 결혼과 같은 인생에 대한 사려 깊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한편 미치는 녹음기에 그의 강의를 담으며 모리교수의 괴로운 투병을 함께 했다. 

 난 세 걸음쯤 물러나 그들이 함께한 이야기를 지켜봤다. 스산한 가을비 창가에 혼자 앉아 있었지만 이 책을 펴면서 세 명이 되었다. 세 명의 온기는 따뜻했다. 잦은 기침과 불편한 듯 답답한 목소리을 듣는 대목에 절로 내가 헛기침을 하는 것을 빼고는 평온한 순간이었다.

  루게릭 병이란게 참으로 고약한 병이다. 아래에서 위로 차츰 굳어져서 석화石化가 되는 병이다. 얄궃은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신체임에도 고통은 계속된다는 점이다. 그 고통을 잠시 생각해 본다. 채무를 갚지 않는다고 신체를 묶은 채로 드럼통에 넣어 잘 개어진 콘크리트를 붇는 어느 깡패영화처럼 온 몸이 돌덩이가 되어간다면, 게다가 덜어낼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된다면 어떨까. 어느 날 하반신이 마비되어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되고, 점차 위로 올라와 손가락까지 움직이지 못하더니 목도 움직이지 못한다면...턱을 움직이지 못해 저작詛嚼을 못하고, 혀도 움직일 수 없다고 그랬던가. 마지막엔 눈과 머리만 깨어난 산송장이 된다고 했던가. 얼마 전 본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젊은 배우의 연기를 생각하니 나이 76세의 모리 교수의 병상은 차마 상상하기 힘들다.

  온 몸이 돌덩이가 될 것을 알고, 결국 죽을 것을 아는 그가 제자 미치를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은 ‘사람다운 인생의 의미’이다. 대공황기에 잠깐 경험한 공장에서 노동자를 착취하는 모습을 보고서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깨달음으로 가르침의 길을 택한 그이기도 하지만, “땅 속으로 들어가고 나면 그걸로 끝이야.”라는 그의 말처럼 아무것도 가져갈 것도 없는 죽음 앞에서 무슨 사념邪念이 있겠는가. 경청해야 할 이유는 곧 흙으로 되돌아갈 가장 순수한 순간의 인간의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리 코치는 우리 인생의 덧없는 생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의미 없는 생활을 하느라 바삐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자기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느라 분주할 때조차도 반은 자고 있는 것 같다구. 그것은 그들이 엉뚱한 것을 쫓고 있기 때문이지. 자기의 인생을 의미 있게 살려면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해 바쳐야 하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헌신하고, 자신에게 생의 의미와 목적을 주는 일을 창조하는 데 헌신해야 하네.” 77 쪽

또한 사람이라면 ‘오늘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이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봄직 하지만 그렇지 못한데, 그 이유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미치, 우리의 문화는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놔두지 않네. 우리는 이기적인 것들에 휩싸여 살고 있어. 경력이라든가 가족, 주택 융자금을 넣을 돈은 충분한다, 새 차를 살 수 있는가, 고장난 난방 장치를 수리할 돈은 있는가 등등. 우린 그냥 생활을 지속시키기 위해 수만 가지 사소한 일들에 휩싸여 살아. 그래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우리의 삶을 관조하며, ‘이게 다인가? 이게 내가 원하는 것인가? 뭔가 빠진 건 없나?’ 하고 돌아보는 습관을 갖지 못하지.” 

선생님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누군가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줄 사람이 필요하네. 혼자선 그런 생각을 하며 살기는 힘든 법이거든.” 103 쪽

  바로 우리 모두 평생의 스승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마치 곧 이 세상에 없을 그가 자신이 살아온 세상을 말해주는 것처럼 보다 앞선 삶을 산 이들의 도움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노인老人. 그들은 우리 생의 스승이요, ‘살아있는 도서관’인 셈이다. 그는 죽는 법을 배우면 사는 법도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다른 이의 죽음을 확인하면서도 자신이 당장 죽을 지도 모른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는 모두 잠든 채 걸어다니는 것처럼 살기 때문이다.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일을 기계적으로 하고 살다는 것은 반쯤 졸면서 사는 것이다. 모리 코치는 어떻게 죽어야 좋을지 배우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운다고 했다. 자기가 언제쯤인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매사가 아주 다르게 보인다면서.

 그에게 가족관은 곧 ‘사랑’이다. 병들어 죽음을 체험하는 그에겐 그 무엇보다 특별한 것이었다. 그는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야기한 어떤 주제보다도 ‘가족’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 사실, 가족이 없다면 사람들이 딛고 설 바탕이, 안전한 버팀대가 없겠지. 병이 난 이후 그 점이 더 분명해졌네. 가족의 뒷받침과 사랑과 애정과 염려가 없으면, 많은 걸 가졌다고 할 수 없겠지. 사랑이 가장 중요하네. 위대한 시인 오든이 말했듯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네. (중략) 가족이 지니는 의미는 그냥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지켜봐주는 누군가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것이라네.

  누군가 ‘애인은 내가 보낸 하루를 증언해주는 사람을 갖는 것이고, 배우자는 내가 마지막 죽는 순간의 증인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누군가 나를 사랑의 눈으로 지켜본다 함은 따뜻함이다. 더 이상 외롭지 않음이다. 가족은 배우자가 목격하지 못한 그 전 시간까지도 증인이 되어주는 사람들인 셈이다. 그리고 내가 없고 난 다음에도 그 시간을 증언해 줄 사람인 것이다. 그들이 날 부르면 난 살아나는 셈이고, 그들이 있는 한 난 죽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 자식을 갖는 것 역시 ’다음 생에서도 갖고 싶은 다시 없을 소중한 경험‘이라고 덧붙였다. 

‘나이 먹는 것’, 즉 늙어감에 대한 생각 또한 새로운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그는 ‘젊음은 차라리 싫다’며 이렇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젊음을 강조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잘 들어보게. 젊다는 것이 얼마나 처참할 수 있는지 난 잘 알아. 그러니 젊다는 게 대단히 멋지다고는 말하지 말게. 젊은이들은 갈등과 고민과 부족한 느낌에 늘 시달리고, 인생이 비참하다며 나를 찾아오곤 한다네. 너무 괴로워서 자살하고 싶다면서... 그런데 젊은이들은 이런 비참함을 겪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둔하기까지 하지. 인생에 대해 이해하지도 못하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데 누가 매일 살아가고 싶겠나? 이 향수를 사면 아름다워진다거나 이 청바지를 사면 섹시해진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조작해대는데 바보같이 그걸 믿다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 어디 있어.” 

“늙어가는 것이 두렵지 않으셨어요?”

“미치, 난 나이 드는 것을 껴안는다네.” (중략)

“선생님이 어떻게 더 젊고 건강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해요.”

그는 눈을 감았다.

  “아니, 부러워한다네. 젊고 건강한 사람들이 헬스클럽에 가거나 수영을 하러 갈 수 있는 게 부럽지. 혹은 춤을 추러 가거나 하는 것이. 그래, 춤추러 갈 수 있는 것이 가장 부러워. 하지만 부러운 마음이 솟아오르면, 난 그것을 그대로 느낀 다음 놔버린다네. 내가 벗어나기에 대해 말했던 걸 기억하지? 놔버리는 거야.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 ‘그건 부러운 마음이야. 이젠 이런 마음에서 벗어나야겠다.’ 그런 다음 거기서 걸어 나오는 거지.”

(중략)

  “살면서 현재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좋고 진실하며 아름다운지 발견해야 하네. 뒤돌아보면 경쟁심만 생기지. 한데 나이는 경쟁할 만한 문제가 아니거든. 사실, 내 안에는 모든 나이가 다 있네. 난 3살이기도 하고, 5살이기도 하고, 37살이기도 하고, 50살 이기도 해. 그 세월들을 다 거쳐왔으니까. 그때가 어떤지 알지. 어린애가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어린애인 게 즐거워. 또 현명한 노인이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현명한 어른인 것이 기쁘네. 어떤 나이든 될 수 잇다는 것을 생각해보라구! 지금 이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이가 다 내 안에 있어. 이해가 되나? 이런데 자네가 있는 그 자리가 어떻게 부러울 수 있겠나. 내가 다 거쳐온 시절인데?” 166-171 쪽 요약

  그렇다. 젊은이를 부러워함은 부질없다. 젊은 시절을 거쳐온 지금이 있기 때문이다. 초로의 중년이 탱탱하고 싱그러운 외모를 쫓는다면 세월을 잊고 싶은 것일 뿐, 추할 뿐이다. 부러워해야 할 건 내가 헛되이 보낸 젊은 시절의 시간이다. 하지만 모리 코치의 말대로 그 젊음은 내가 다 거쳐온 시절이 아니던가. 후회가 되거든 지금 하면 되는 일이다. 젊은 시절 공부를 못해 그들이 부럽다면 이제라도 공부를 하면 될 것이다. 여행이 꿈이었다면 그 시절의 마음으로 지금 여행을 떠나고, 뜨거운 사랑이 부럽다면 지금의 동반자와 다시 사랑을 시작하면 된다. 심지어 나이트클럽을 이제 한 번 가본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나의 이런 변화를 두고 주위가 추하다 말하면 그들이 아직 모른 것이고, 젊은이들이 추태라 흉보면 ‘너희들이 아직 나이듦을 모르는 것’이다. 내가 보낸 시절을 마냥 부러워하는 것이야 말로 추한 것이고 추태가 아닐까. 사그러짐을 체감하는 이 가을을 무색하게 하는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면 나는 죽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잠에서 깨면, 나는 다시 태어난다.”고 말했다. 이 아포리즘은 간디는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하루’에 대해서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모리 교수와 함께 하면서 이 말을 하루를 ‘삶과 죽음의 가까운 거리’로 생각하고 싶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은 마음껏 사랑하는 법, 그리고 용서하는 법을 알려준다. 무엇보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을 감수하며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기꺼이 나누는 모리를 보면서 인간에게 사람으로 사는 가장 숭고한 마음은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랑은 다름 아닌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타인에게 주는 것'이다.  

  이 책은 지난 해 췌장암에 걸린 중년의 교수가 가족과 학생들을 앉혀두고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 감동적인 책 <마지막 강의>를 생각나게 한다. ‘다가오는 매일의 ’오늘‘을 미련 없이, 후회 없이 보내야 한다’는 그의 말이 시들어가는 모리 코치의 목소리와 오버랩되었다. 그가 생을 마감하면서 던진 ‘타인에게 나누는 삶’이라는 화두는 이것이다.

'마음을 나눌 사람을 찾았나?'

'지역사회를 위해 뭔가 하고 있나?'

'마음은 평화로운가?'

'최대한 인간답게 살려고 애쓰고 있나?'

  이유없는 상실감을 느끼게 하는 가을에 모리 코치는 큰 위안이 되었고, 가르침이 되었다. 내년 가을에도 그런 기분이 든다면 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펼 것이다. 이 책은 내게 있어 ‘가을에 만나야 할 스승의 강연집’이다. 내가 느끼는 가을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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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hug! 아프리카
김영희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PD 쌀집 아저씨, 아프리카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다!

 

  대한민국에서 몸과 맘이 가장 바빴던 사내가 짐을 싸서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가 몸과 맘을 바쁘게 했던 이유는 한가로운 주말 저녁 국민의 웃음과 감동을 책임졌었기 때문이다. 김영희라는 이름보다는 ‘쌀집아저씨’로 더 잘 알려진 이 사내의 사연 깊은 아프리카 여행이야기는 <헉! 아프리카Hug Africa>에 고스란히 담겼다.

  내가 이 책을 든 단 한 가지 이유는 ‘예능에 능한 사내가 예능이 없는 아프리카로 떠났다’는 점이었다. 왜냐고 묻고 싶었다. 그 답을 알 방법은 책을 드는 수 밖에 없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양심냉장고’를 비롯 ‘칭찬합시다’, ‘21세기 위원회’,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느낌표!’ 등 국내에 많은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키는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생각을 넓혔던 그에게 어느 날 ‘아이디어’가 고갈됨을 느끼게 된다.

 그에게 봉착한 문제는 다름 아닌 그가 성공으로 이끌었던 프로그램들에 있었다. 단순히 흥미를 던져주는 오락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의 의견을 한데 모으는 사회성’이 권력화勸力化 되면서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혀 몸과 마음이 바닥을 치는 느낌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얘야, 너는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니?”



 

   이 질문을 화두 삼아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는 왜 아프리카로 떠났을까? 저자는 ‘알 수 없는 이끌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이 싫어진 때문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는 프로그램을 통해 목젖이 드러난 웃음 뒤에 페이소스같은 여운을 남겨 사람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는 계기를 삼고자 했다. 하지만 그 반향과 더불어 사람들의 뜻이 변하고, 움직임이 변하는 큰 흐름 뒤에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만나게 되었다. 자유로운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생각을 저지당하고, 조정당한다면 더 이상 ‘온전히’ 저 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 된다. 그는 사람이 싫어졌을 것이다. 아니 사람이 뭉쳐사는 ‘시스템’이라는 문명에 학을 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반대되는 자연의 대륙 아프리카로 떠났을 것이다. 갑자기 그가 떠난 이유를 짐작함은 참으로 실없다는 생각도 들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것을 짐작하게 했다. 이 책에서 그는 ‘광활한 자연’과 ‘순수한 사람’에 주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질리도록 만끽하고 돌아왔음을 알게 된다.

  책 읽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다. 우선 기존의 여행책에는 찾아볼 수 없는 아프리카 대륙을 말한다는 점이 첫 번째 이유이고, 책의 주인공이 생각 많고 재미있는 아이디어맨이라는 점이 두 번째다. 세 번째는 프로페셔널하지 않은 사진이고 마지막 네 번째는 글만큼이나 재미있고 상상력 높은 그림들이다. 책 한 권 전부가 몇 시간짜리 오락 다큐멘터리였다. 

 이야기의 절반은 그가 본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문명인을 웃기는 조금 더 문명인 셈인 쌀집 아저씨가 자연의 품으로 뛰어들어 그 속에 사는 자연인을 만나니 온통 신기한 것 투성이다. 검은 대륙의 검은 사람들도 신기하다. 특유의 냄새와 낯선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들에게 가졌던 편견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에피소드들이 이 종종 눈에 띈다. 기다림에 익숙하고, 교통수단보다는 도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서 ‘시간의 유한함’은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런 그들을 본 저자는 처음 ‘몇 푼 안되는 차비가 없는 그들’에게서 연민을 느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그들이 생에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몸으로 느끼며(심지어 맨발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람이 본디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면 동물animal은 움직이는animate 생물creature여야 정상인 것이다. 오히려 시계라는 인조물에 갇혀 24시간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조급해지는 문명인이 실은 사람이 아닌 ‘쳇바퀴 속 다람쥐’였음을 알게 된다. 그는 말한다.   

  “문명은 더 이상 인간을 움직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므로...인간은 걷지 않는 한 더 이상 동물이 아니다.“ 34 쪽 

  재미있는 것은 그는 ‘문명화 덜된 자연인’에게서 느꼈던 연민을 느끼는 반면, ‘너무나 문명인스러운 자연인’에게는 지나친 반감을 갖더라는 것이다. 대자연의 품속에 있는 사람들이 문명인이 됨을 이율배반적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가 아프리카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여행책자 <론리 플레닛>이다. 김영희는 처음 책이 말하는 바를 곧이곧대로 믿었다. 가지 말라는 곳은 가지 않았고, 하지 말라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정말 그럴까?’ 아니었다. 검은 피부에 검붉은 눈자위를 가진 무서운 그들이 사실은 웃을 때 드러나는 ‘흰 이’만큼 순수했다. 그는 동부 아프리카 최대의 슬럼, 키베라에 들어가 돈 한 푼 빼앗기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준 풀 카트를 함께 씹어 먹고 악수하고, 포옹하며, 작별 인사를 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그의 말을 듣고 따라할 건 아닌 듯. 쌀집 아저씨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경계할 만큼의 외모와 풍채를 지녔기 때문이다. 한 날은 칼을 든 강도를 두 번이나 만나는 데 욕을 해대는 그의 목소리와 표정으로 물리치는 대목을 보면 아무나 따라할 건 아니지 싶다.

  이야기의 나머지 절반은 자연이다. 십여 시간을 버스로 달려도 지평선인 대지, 검붉은 노을, 끝없이 쏟아지는 빅토리아 폭포, 위로 흐르는 나일강, 바다 같은 사막까지... 가는 곳곳 마다 자연은 다른 모습으로 그를 대했다. 김영희는 자연 속에 자신이 있음을 감탄한 것이 아니라 동시간대에 태고의 자연이 존재하고 있었음에 감탄했다. 또한 그 속에 순응하는 사람들에게 감탄했다. 사람도 자연에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글 꼭지의 마지막엔 그가 느끼는 감상이 요약되었다. 글을 읽다보면 그 대목에 주목하게 된다. 꿈보다 해몽이라 했던가? 이미 존재하는 사실을 그만의 감성으로 재해석하는 대목은 다분히 시적詩的이었다. 그는 아이디어맨이 확실했다.

  그는 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살아있는 대륙의 자연을 만끽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검은 피부의 사람들을 통해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느끼고 돌아왔다. 그 소감을 마지막 글 ‘나는 왜 아프리카에 왔을까? 에 대한 대답’편에 잘 드러냈다. 

  “아프리카 여행이 끝나가는 날, 쿠마시의 노천 시장에서 나는 그 답을 찾았다. 바글거리는 시커먼 그들에게서 나는 꿈틀거리는 생명을 보았다. 실아있다는 것! 마치 갓 건져 올린 생선이 펄떡이듯 아프리카의 사람들은 펄떡였다. 날것처럼 살아 있었다. 생명의 힘! 내가 살아온 곳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원초적 생명이 거기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꿈틀거림이었다.

 그렇다! 바로 이것을 보기 위해 나는 그토록 먼 길을 달려와 지금 여기에 있다. 나는 내 안의 꿈틀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나로 하여금 아프리카에 오도록 한 그 무엇이 그토록 나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 그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이것이 바로 내가 아프리카에 온 이유였다! 살아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희망인거야! 살아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353 쪽

  아마도 그는 잃었던 소신所信을 얻어왔을 것이다. 자연自然이 스스로自 그렇듯然 존재하는 것이 자연인 것처럼 사람은 자신이 믿는 바대로 살아가는 것이 ‘단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사는 것임을 배웠을 것이다. 자신을 믿는다면 자신이 믿는 바대로 행동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꿈틀거리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신이 인간에게 준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를 통해 ‘살아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껏 상상하지도 않았던 아프리카 대륙을 그를 쫓아 밟아보고 싶어졌다. 올해 다시 PD로서 브라운관으로 복귀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이제 그가 연출한 프로그램을 보면 화면 뒤에 숨은 그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멋들어진 기행문이었다. 

P.S : 그가 ‘꿈틀거리며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첫 번째 프로젝트는 이 책에서 시작했다. 쌀집 아저씨라는 인간, 멋진 동물anima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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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센스로 일하라 - 일 잘하는 직장인의 필수 스펙
모치즈키 미노루 지음, 이정은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성공은 수학성적과 상관없다 숫자센스에 좌우된다 ! 

  세계에서 제일가는 상인으로는 유태인 상인을 꼽는다. 유태인을 최고로 꼽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생활 속에는 항상 숫자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양인은 "오늘은 매우 덥군요" 또는 "날씨가 좀 추워진 것 같군요"라고 말한다면, 더위와 추위에 대해서도 숫자로 환산하는 유태인들은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더울만 하죠. 오늘은 화시 80도 거든요.”

 유태인의 상술을 배우려면 생활 속의 숫자에 익숙해야한다. 숫자에 익숙해지고 능통해 지는 것이 유태인 상술의 기초이며 돈벌이의 기본이 된다. 또한 그들은 다른 것은 놓고 다녀도 계산기를 늘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유태인의 숫자 사랑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한다. 유태인과 거래를 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그들은 ‘협상의 천재’라고 말한다. 그들은 할인율 정도는 머릿속에서 암산으로 끝내기 때문에 가격 협상에 강하다. 상대가 계산기로 두들기기도 전에 그 답을 알고 있는 유태인들은 거래를 할지 안할지 이미 판단을 마친다. 그러므로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유태인들이 탁월한 암산능력을 발휘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들은 숫자로 생각하고 숫자로 판단하기를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은 것이다. 생활 속에 숫자가 녹아들어 있어서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이상스러울 정도이다. 그렇다면 유태인이 아닌 우리도 숫자에 강하도록 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책 <숫자센스로 일하라>는 업무성과를 높이는 방법으로 숫자를 활용하는 법을 알려준 책이다. 회계사인 저자 모치즈키 미노루는 ‘숫자센스‘를 일 잘하는 직장인의 필수스펙으로 보았다. 

  유태인 뿐 아니라 대부분의 부자들이 숫자에 강하다. 어쩌면 숫자를 잘 읽고, 계산을 잘하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들의 공통점은 ‘숫자 읽는 힘’ 즉 ‘숫자센스’는 훈련으로 강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회계, 자금조달, 마케팅 등 ‘지식으로서의 숫자’는 숫자센스가 아니라고 말한다. 숫자에 대한 두령움을 없애려면 숫자를 사용할 때 기초가 되는 ‘도구로서의 숫자’를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숫자센스‘란 무엇일까? 

  “영업과 프리젠테이션, 일정계획 등 업무를 진행하다 보면 다양한 문제에 부딪힐 때가 있다. 바로 이렇게 발견된 문제를 풀 때, 숫자를 바탕으로 조리 있고 논리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이 바로 숫자센스다.” 6쪽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숫자로 해결하는 능력’을 전달하려고 했다.숫자를 읽는 능력을 통해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문제점 파악)과 숫자로 생각하는 능력을 통해 목표설정, 균형 잡힌 해결책 제안과 효율적인 시간관리능력(해결책 제안)을 키울 수 있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숫자로 전달하는 능력을 통해 영업, 프리젠테이션, 미팅 등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하는 능력 등을 키울 수 있다고 보았다. 

  숫자센스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크게 숫자를 읽는 능력일 것이다. 숫자를 읽는 능력은 올바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제대로 숫자를 읽을 수 있다면 ‘문제점으로서의 가치’도 평가할 수 있어 문제점이라고 하는 것들을 상당 부분 걸러낼 수 있다. 숫자를 읽는 능력은 일반적으로 TV나 신문 등 미디어에서 언급하는 기사나 보도내용을 제대로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미디어는 시청자와 독자의 이목을 끌기 위해 기사의 일부를 부각시켜 보도하는 경향이 많다. 특히 경제뉴스에서는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큰 숫자를 사용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매스컴에서 우량기업을 다룬다면 자산, 연매출 등 긍정적인 이미지를 주는 숫자를 이야기하는 반면, 실적이 나쁜 기업이나 문제점을 일으킨 기업에 대해서는 부채총액, 지불이자등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숫자들을 언급하는 경향이 있다. 숫자센스가 있다면 보도내용의 숫자를 그대로 믿을 것이 아니라 추가적인 내용에 대한 확인을 걸쳐 판단해야 할 것이다. 환율 하락, 물가 인상, 수출 감소 등은 무조건 경제에 악재를 주는 것이 아니라, 국내경제의 경기시점이 어디인가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이고, 그 다음 이러한 경기지표에 대해 상대적으로 이익을 얻는 산업은 어디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숫자를 읽는 능력을 향상시키면 숨겨진 숫자를 찾게 되어 하나의 숫자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목적에 맞는 숫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큰 숫자에 현혹되지 않게 된다.

  이 밖에도 업무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숫자에 대해 이를 제대로 읽어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책에 대한 대안과 실행하는 활용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미디어의 기사나 업무상의 보고서에 나오는 숫자에 대해 단순하게 ‘많고 적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볼 것이 아니라 범위를 넓혀 그 숫자가 주는 의미를 이해시키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마디 숫자가 더 명확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하나의 숫자는 많은 메시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 숫자가 주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악영향으로 미칠 수 있음을 이 책은 경계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숫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숫자센스’를 키우기 위해 숫자와 친해질 수 있다면 이 책을 통해 얻는 소득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는 이론적으로 해명할 수 없거나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에 부딪치면 '불가사의하다' 라고 말한다. 혹시 불가사의는 숫자의 단위라는 것을 아는가? 일, 십, 백, 천, 만 이렇게 시작해서 억, 조, 경까지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숫자다. 하지만 그 이상을 넘어가면 해, 정, 제, 극, 항하사, 아승지, 나유타, 불가사의不可思議 등으로 단위는 펼쳐진다. 가장 큰 숫자는 무량대수無量大數이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때 ‘불가사의’하다고 하지만, 이 또한 숫자이기에 결국 해명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수학성적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흔히 ‘숫자에 약하다’고 말한다. 숫자는 수학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숫자는 글자와 함께 수를 읽는 문자에 불과하다. ‘숫자에 약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쩌면 수학에 대한 트라우마로 ‘숫자 읽기를 포기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예 숫자를 등하시 했던 사람들이라면 ‘숫자센스’는 숫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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