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러의 서재 광고가 참 많이 나온다. 대대적이다, 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주야장천 나온다. 마치 책을 읽지 않는 너희들아, 너희 것들을 위해서 우리가 이 정도나 했어, 그러니 닥치고 들어 봐,라고 하는 것 같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을 시대에 듣는 책 읽기로 그 갈증이 해갈이 좀 된다면 괜찮은 일일까. 우리나라는 성인이 책을 일 년에 한 권 정도 본다고 몇 해전 통계가 있었다. 도대체 통계라는 건 왜 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그만큼 책을 읽지 않으니 책 좀 읽어라, 라는 말이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우리나라는 전 세계 출판 7위다. 어마어마하게 책을 찍어 내고 있는 나라다. 그러니까 그만큼 읽고 있다는 말이다. 책을 읽는 사람도 없는데?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책을 읽는 사람들이 계속, 꾸준하게 읽는다는 말이다. 요컨대 문화를 소비하는 주 축은 2, 3, 40대 직장여성이다. 그들이 월급을 받으면 읽고 싶은 책을 듬뿍 구입하여 읽고 리뷰를 올리고 인증샷을 찍는다. 그 리뷰가 알음알음 사람들 사이로 퍼져 나간다.


남자들 같은 경우 책보다는 다른 것에 투자하는 경우가 더 많다. 게임이 그렇고 자동차나 낚시 같은 여가에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그렇다면 게임에 투자를 한다고 해서 책에 투자를 하는 것보다 삶에 있어서 질이 떨어진다거나 덜 현명한 것일까.


먼저 밀러의 서재 같은 어플이 나온 이유를 광고에서 찾아보면 요즘 시대에 바빠서 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왔다고 한다. 현대사회의 사람들이 눈뜨는 순간부터 바쁘게 움직이기 때문에 이동을 하거나 운동을 하면서 책을 들을 수 있게 만든 것이 밀러의 서재라는 플랫폼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렇게 어플로 책을 듣는 사람들은 원래부터 책을 읽는 사람들이 다음이 궁금한데 진짜 시간이 나지 않아서 이동 중에 듣기 위해서 그럴 수 있다. 그건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책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거나 원래 책 읽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밀러의 서재가 생겼다고 해서 그 어플을 이용해서 책을 읽는다? 글쎄, 정말 그럴까. 물론 광고라는 게 과장이 있지만 광고에서처럼 또는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출근길에 책을 들을 수 있어서 집중이 될까.


요즘 시대처럼 바빠진 시대 그 이전의 시대,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해방 전후를 기점으로 해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때에도 소공녀라든가 이상한 나라 엘리스 같은 책들이 전쟁통에서도 유통이 되었다. 책이라는 건 바쁜 시대뿐 아니라 전쟁 속에서도 읽을 사람들은 어떻든 악착같이, 죽기 살기로 읽었다. 소설가 황석영이 소설가의 길로 접어든 계기가 바로 그 전쟁통에서도 자신의 어머니가 소설책들을 어딘가에서 구해서 읽게 해 줬기 때문이다. 대부분 까막눈에 책이라는 건 읽지 않았을, 또는 사는 게 힘들어서 책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시절에도 꾸준하게 책이 좋아 책을 읽었던 사람들 중에서 1, 2대 문인들이 된 작가들이 있다.


백석이 그렇고 김유정이 그렇고 김해경이 그렇고 윤동주가 그랬다. 그 외에 많은 문인들이 고통스럽게 글을 적어서 역사를 남기고 책을 펴냈다. 그 시기를 지나 6, 70년대 신문이 보급되면서 신문에 실린, 매일 연재되는 소설을 읽기 위해 사람들은 너도나도 신문을 받아보거나 잡지를 사서 열심히 읽었다. 그러다가 70년대 중후반 티브이가 보급되면서 굳이 책에서 재미를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


재미있는 것들이 쏟아지는 현대 사회에서 굳이 책을 읽게 하기 위해 밀러의 서재가 나왔다는 건 좀 뭐랄까, 아무튼 그렇다. 책을 재미로 읽습니까?라고 누가 할지도 모른다. 당연하지만 책은 재미로 읽는다. 책이 재미있기 때문에 읽는 것이다. 그래서 읽다가 그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과 사유를 하는 것이다. 책을 의무로 읽는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밀러의 서재는 300만 구독자가 있고 십만 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다고 전투적으로 광고를 하지만 책이라는 건 원래부터 줄곧 읽던 사람들이 현대 사회에서 하루의 빡빡한 사이클 속에서 읽을 시간이 모자랄 때 책 읽어주는 어플을 이용해서 읽으면 갈증의 해소가 된다, 정도로 생각이 든다.


의문이 드는 건 하루가 정말 빠듯할 때, '책'을 '늘 '읽'는 '사'람'이 하루가 정말 밥도 못 먹을 정돌로 빡빡하게 돌아간다고 해서 책을 읽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의 나의 팔로우 대부분이 책벌레들이다. 그 속에는 가정주부가 많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도 회사에 보내고 집안일을 하며 장을 보느라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다. 하지만 어떻든 시간을 내서 한 달에 10권씩 읽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여성은 일까지 하는데 매일 조금씩 책을 읽는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하루 종일 시간이 남아도 책은 읽지 않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도 매일 책을 조금씩 읽고 있다. 매일 약간의 페이지를 읽고, 매일 일정량의 글을 쓰고 있다. 그러기를 거의 15년째 이어가고 있다. 하루가 엄청나게 빡빡하게 돌아가도 약간의 책은 늘 읽고 있다. 하루가 빠듯하게 돌아가니 느긋하게 카페에 앉아서 좋아하는 소설을 읽을 시간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탈 때, 주차장까지 걸어갈 때,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 조금씩 읽는다. 이 정도의 시간만으로도 장편소설 한 권을 한 달 내에 읽을 수 있다.


책을 늘 읽는 사람이 책을 읽지 못하는 경우는 신변이나 신변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다. 시간의 없음과는 무관하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병이 들거나 입원을 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럴 때 책이나 읽고 있을 수는 없다. 모든 신경이 그쪽에 쏠려 있기 때문에 책 따위는 보지 못한다. 그럴 때 아픈 사람을 두고 밀러의 서재로 책을 듣고 있을 수 없다. 당연하지만.


나는 읽어주는 것으로 책을 듣던 적이 있었다. 이 이야기도 한 번 적었는데 그때는 하루키의 에세이를 유튜브로 읽어주는 걸 잠들기 전에 왕왕 들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집중해서 듣게 되지 않는다. 소설은 더 그렇다. 집중해서 듣는 사람도 있겠지만(그렇기에 300만 명의 구독자가 있겠지만) 쉽지 않다. 읽어주는 책에 집중이 되는 경우는 자신이 쓴 소설을 소설가가 직접 읽어주는 경우다. 우리는 그 사실을 예전의 김영하의 팟캐스터에서 확인을 했다. 자신이 쓴 소설이나 또는 김영하가 추천해주고 싶은 소설을 직접 읽어주면 다른 것에 신경이 분산되지 않는다.


책은 아니지만 글을 읽어주는 건 오래전부터 유명인의 입으로 계속 해왔었다. 김혜수나 이병헌이 시를 낭독하는 앨범이 판매가 되기도 했다. 그들의 정확하고 감정이 실린 언어로 읽어주는 시를 듣게 되면 시에 대해서 또 다른 세계가 보인다. 그리고 여러 학교에서 크고 작은 시 낭독 대회가 열리곤 했다. 마찬가지로 이때에도 모든 학생이 시를 좋아하거나 시집을 읽고 있거나 시낭송 테이프를 듣지는 않았다. 아주 소수의, 몇 명 없는 시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시를 읽고 낭독하기를 즐겼을 뿐이다.


그렇다면 밀러의 서재 같은 어플이 취지처럼 썩 소용이 없을 것 같은데 이렇게도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 위에서 의문을 가진 점인데 그건 아무래도 책을 읽게 되면 좀 똑똑해지거나 현명해져서 삶의 질이 윤택해진다는 것에 접근한다. 책을 많이 읽으면 머리가 좋아져서 행복해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다. 책을 많이 읽으면 과연 일반적으로 말하는 행복에 도달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일반적인 행복보다는 일반화가 아닌 부분의 덜 불행화 정도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 부분은 문지혁 작가도 유튜브를 통해서 세세하고 꼼꼼하게 말하고 있다.  https://youtu.be/wq5Op0plgC8


나도 책을 적게 읽는 건 아니지만 나 같은 경우를 보면 똑똑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 중에도 현명하고 똑똑하고 좋은 사람이 흘러넘친다. 내가 책을 읽게 된 건 학창 시절부터 시간이 날 때 음악 듣는 것 빼고 딱히 할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로 소설책만 읽고 있어서인지 현실적인 감각은 제로에 가깝다. 자기 개발서를 읽었다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나는 자기 개발서를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다. 또 머리가 나빠서 읽고 나서 돌아서면 까먹는다. 그래서 하루키의 소설은 대부분 4번 이상 읽었지만 대략적인 줄거리 빼고 세세한 것은 기억이 없다. 특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열 번도 넘게 읽었지만 그저 웃음만 나온다.


내가 매일 책을 읽는 건 습관이 되었다. 일단 습관이 되고 나면 손에 소설책이 들려 있어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하다. 아이가 처음 인형을 받아 들고 그 인형을 오랫동안 손에서 놓지 않는 경우와 비슷하다. 그 인형이 꼬질꼬질해져도 일단 손에 들려 있으면 아이만의 세상은 안정된 세계인 것이다. 이런 습관은 마치 고대시대 궁전에서 치르는 의식처럼 행해지고 있다.


또 어플로는 채워지지 않는 책 고유의 표지 디자인을 영접하는 것이다. 같은 하루키의 책이라도 시대별로, 출판사별로 디자인이 다르기 때문에 그걸 손에 쥐고 보는 재미가 있다. 꼭 책의 내용을 읽지 않더라도 칩 키드가 디자인한 북커버를 손으로 들고 본다는, 일종의 성취욕을 채울 수 있다. 게다가 하루키의 에세이에서 처럼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삽화를 보는 재미 때문에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 이런 기분 좋은 촉감과 마음에 드는 시각을 어플은 채우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책 읽어 주는 어플은 어쩐지 의무로 책을 읽어야만 하는 기분이 든다. 꼭 책을 읽지 않더라도 책장에 몇 권의 책이 꽂혀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다른 책과는 다르게 소설이란 답이 확고한 것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다 읽고 난 후 느끼는 대로 수많은 생각의 결말이 가능하다. 다행인 것은 소설 속에서는 꽤나 현명한 캐릭터가 등장하니 읽으면서 그들에게 이입되어 읽는 동안 주인공들과 함께 소설 속 세계에서 좌충우돌하며 현명함에 도달할 수 있다. 시인이 시를 다 쓰고 나면 더 이상 그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라 읽는 독자의 것인 것처럼.


나는 전자책으로도 책을 읽었고, 들려주는 것으로 책도 읽어 봤지만 이렇게 대대적으로 책 읽어주는 어플 광고를 할 만큼은 아닌 것 같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과 공간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꾸준하게 읽어 왔다. 책을 읽지 않던 사람은 꼭 책이 아니라도 책 그 이외의 것에서 충분히 삶의 질과 양을 채울 수 있다. 그 속에는 경험을 통한 지식의 터득도 있고 현명함도 확실하게 있다. 책을 많이 읽는 것과 똑똑해지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상관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꼭 종이책을 선호하지는 않는데 아이패드에도 책이 잔뜩 들어있지만 시간이 지나 지금에서 보면 좀 불편하지만 종이책을 계속 불안하게 들고 다니며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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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표층적으로는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지만 심층적 드라마적 요소가 강하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상실을 토닥여준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세진의 죽음을 부정하며 끝까지 소녀의 미스터리한 죽음을 파헤치는 현수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면서 현수가 가지고 있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슬픔, 어둠, 외로움, 무엇보다 다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에 나도 모르게 이입이 된다. 감당할 수 없는 일, 돌이킬 수 없는 일에서 자유롭고 싶지만 그 기억은 나를, 나의 정신은 잠이 들면 꿈속까지 찾아와 나를 옭아맨다. 그럴 때 나는 그만 세상과 잡고 있던 끈을 놓고 싶은 마음이 든다. 고개를 떨구고 흐느끼고 있을 때 누군가 나의 어깨를 잡아 준다. 그 손이 너무 따뜻해서 그만 소리 내어 울고 싶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 사람은 나와 무관한 사람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흐르는 음악이 정말 좋다. 마지막 음악을 듣고 있으면 차분하게 이정은이 노정의에게 손을 내밀어 따뜻하게 잡아줬던 마음이 느껴지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온다.


평범해 보이는 이 지루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죽기 살기로 버티고 있다. 누군가 행복해 보인다면 그 사람은 행복하지 않은 수많은 시간을 견뎌냈기 때문이다. 내가 죽을 만큼 힘들고 아무도 없다고 느낄 때 나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사람은 의외로 나와 비슷한 처지의 나를 모르는 타인인 경우가 있다.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말은 정말 죽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이렇게 살기 싫다는 말이다.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건 그저 그렇게 흘러갔을 뿐이라고, 그러니 괜찮다고, 지금 잘하고 있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해주는 영화다. 그러니 처음에 영화에 속을 수 있다. 악착같이 살아내느라 제대로 상처를 받고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괜찮다고 손을 내미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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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무력감에 시달리는 연속의 나날을 맞이한다. 도대체 이 한 없이 떨어지는 결락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무래도 벚꽃 때문일지도 모른다. 벚꽃은 불꽃의 미학을 닮아서 만개와 동시에 무화된다. 화려할 때 꺼지는 불꽃. 삶이란 찬란하게 피어올랐다가 그대로 소멸하고 만다. 벚꽃이 온 세상을 덮어버리는 봄이라 아찔해서 슬프고 기쁘다. 슬프면서 기쁘니까 무력감에 시달리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무기력에도 입맛은 떨어지지 않아서 같은 양의 운동을 매일 조금씩 해도 살은 쪄 버린다. 무력감이 가득한 봄날에는 밥을 비비자. 비밤밥을 해 먹으면 먹는 동안에는 맛있어서 껌뻑 죽는다. 밖에서는 벚꽃 때문에 좋아 죽고, 비빔밥을 먹을 때는 비빔밥 때문에 좋아 죽는다.


봄에는 당연하지만 봄나물이 많이 나온다. 나물을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고추장에 비벼먹는 맛이 좋다. 고추장은 외가에서 담근 매실 고추장이다. 외가 특유의 맛이 있다. 외가가 있는 곳에서 보내주는 모든 음식은 그 지역 특유의 맛이 있다. 이제 그 음식을 매년 몇 번이나 보내주던 큰 이모가 작년에 죽었기 때문에 이제 이 고추장을 마지막으로 그 특유의 맛은 추억만으로 남을 것이다. 있던 사람이 없어지면 그제야 부재가 존재를 증명하게 된다.


돼지고기도 좀 구워서 잘라 넣고 고추장을 넣고 봄나물을 넣고 참기름을 넣고 땡초를 썰어 넣어서 비벼주면 된다. 이렇게 비벼 먹으면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드는데 한 가지 생각은 곧 밀어 버린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맛있어서 좋아 죽기 때문에 무력감을 잊는 동시에 살찌는데? 같은 생각이 동시에 든다. 하지만 이내 뒤의 생각은 발로 밀어 버리게 된다. 어떻든 비벼 놓은 건 다 먹어야 하고, 보통 다 먹고 나면 좀 있다가 한 반 더 비벼 먹게 된다. 인생이란 참 생각처럼 가지 않는다. 가끔 영국 친구인 죠가 오면 이렇게 밥을 비벼주면 오우오우 하며 잘 먹는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작년, 올해도 왔을 텐데 코로나 이전에는 젓가락질도 한층 늘었다.  


무기력을 잊게 해 주니 비빔밥은 기력의 음식이다. 간결한데 맛은 풍부해서 우리는 가끔 반찬이 시원찮을 때 냉장고를 열어 그 안의 것들을 고추장과 함께 비벼서 먹곤 한다. 가끔 전문가들은 고추장은 모든 맛을 눌러 버리는 강력한 맛이 있기에 비빔밥으로 고추장을 많이 넣으면 고추장 맛밖에 안 난다고 하지만 그래서 어쩌면 비빔밥을 우리는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에서도 고추장처럼 강력한 맛을 한 번이라도 낼 수 있다면 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무기력할 때는 기력의 음식 비빔밥을 크게 와앙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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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평은 그 시기에 드물게도 자신의 오페라 무대를 가지고 자신의 노래로 자신의 공연을 했다. 중국 땅에 오페라를 알리고 싶었던 단평이었다. 오페라는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 같은 것이었다.


단평을 좋아하던 운언은 단평의 공연을 늘 보러 왔다. 단평 역시 운언을 사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아름다웠고 뜨거웠다. 단평은 운언을 위해 ‘야반가성’을 작곡하려 하지만 완성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 꼭 ‘야반가성’을 완성해서 당신 앞에서 불러 주리라 단평은 운언에게 약속한다.


단평과 운언의 사랑은 아름다웠지만 신분을 넘은 사랑을 했기에 두 사람의 사랑은 너무 위험했고 너무 험난했다. 사랑이란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았던 두 사람을 아름답게 위태위태하게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사랑은 나날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하지만 운언은 집에서 점찍어 놓은 곳으로 혼인을 가게 되었다. 운언은 그게 싫어 도망가려다 붙잡히고 만다. 그날 밤 한 무리들에 의해 단평의 극장은 불에 타고 단평은 죽는다.


팔려가다시피 시집간 운언은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고 집에서 쫓겨난다. 운언은 불타버린 극장에 매일 와서 단평을 기다리다 미쳐간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흐른다.


10년 후 다 쓰러져가는 극장에 새롭게 나타는 극단이 공연을 하려 하지만 실력이 엉망이었다. 실력이 검증되지 않으니 사람들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공연에서 주인공 역의 위청은 노래 실력 때문에 고민이 많다. 그때 위청에게 의문의 남자가 암막 뒤에 나타나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하라고 한다.


그 의문의 남자는 죽은 줄 알았던 단평이었다. 단평은 10년 전 불에 타 죽은 게 아니라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운언과 단평의 사랑을 방해하기 위해 단평의 얼굴에 염산을 뿌리고 극장에 불을 낸 것이었다. 단평은 염산 때문에 얼굴의 반이 흘러내렸지만 죽지 않고 극장에 숨어 살며 야반가성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위청은 대면하지 않았던 단평의 말대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하면서 고음이 되지 않는 부분은 단평이 무대 뒤에서 대신 불러주었다. 단평이 노래를 부를 땐 운언을 생각하며 슬픔을 가득 채워 설움과 그리움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며 단평은 눈물을 흘린다.


얼굴의 반이 없는 단평은 매일 미친 여자의 모습으로 극장에 나타나는 운언 앞에 나가지 못했다. 반이 흘러내린 얼굴로 앞에 나설 수 없어서 죽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운언에게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단평은 얼굴의 반이 날아가 버렸고 운언은 정신의 반이 날아가 버렸다. 그렇지만 위청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위청이 죽은 단평으로 착각한다. 사랑에 눈이 멀어 미쳐갔지만 운언 앞에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단평은 위청을 통해 운언에게 야반가성을 들려 주려했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에 염산을 뿌린 조 씨가 운언에게 총을 쏘게 된다. 총을 맞고 쓰러진 운언을 보고 그들 앞에서 단평은 절규한다. 마침내 운언 앞에 나타난 단평은 반이 없는 얼굴로 10년 동안 운언을 위해 만든 ‘야반가성’을 불러준다.


밤이 깊어서야 나와 당신은 비로소

영혼을 활짝 열고 꾸밈없는 마음을 내어 놓습니다

부드러운 입맞춤은 한밤중에

음악이 되어 당신의 마음에 다가갑니다

별님에게 간청합니다

달님이 증인이 되어 주세요

일생을 다해서라도 기다리겠습니다

언젠가는 제 소망이 이루어져서

당신과 함께 영원을 찾아 날아갈 것입니다


반만 살아있는 얼굴의 단평과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운언은 세상의 고통과 불행을 다 가지고 행복한 길을 떠난다. 사랑은 그런 거라, 진부한 ‘진정한 사랑’이라는 건 그런 거라, 목매고 목숨을 걸 만한 거라고, 어디가 망가지고 부서지고 보이지 않아도 사랑을 찾아가는 거라 알려주었던 단평과 운언의 사랑. 영화 야반가성이었다.



https://youtu.be/SaVIEThrg_M  야반가성 뮤직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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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장국영의 기일이다. 그랬다. 믿기지 않았던 그날 홍콩에서는 장국영의 추모에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사스 때문이었다. 사스가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었지만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장국영의 믿기지 않는 추모행렬에 동참했다.


작년에도 그랬고 18년이 지난 올해도 그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추모할지도 모른다. 장국영이 살아있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은 걷어 치우고 장국영은 47살의 아름다운 나이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팬들의 곁을 떠났기에 언제나 그 모습으로 기억된다.


이반이었던 장국영은 금지옥엽에서 이반이 아닌 연기를 했다. 금지옥엽의 주제곡인 ‘추’는 내내 좋아서 유튜브 덕분에 왕왕 듣고 본다. 남자로 분해 깜쪽같이 장국영을 속인 원영의가 피아노 앞에서 어설프게 연주를 하니 장국영이 피아노 앞에서 ‘추’를 부르고 비틀스보다 더 신나게 ‘트위스트 엔 샤우트’를 부른다. 우리의 기억 내면에 장국영은 그렇게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데이와 우희의 삶을 갈라놓는 것이 힘들었던 패왕별희의 도즈. 우희로서만이 패왕의 온도를 느끼는 인생이지만 변혁과 전통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두려운 병처럼 퍼지는 집단사고 속에서 무서운 건 자신 속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의 도즈를 연기해야 했던 장국영. 보는 동안 도즈의 감정에 휩쓸려 파도처럼 너울거렸던 패왕별희.


학창 시절 장국영의 영화보다는 노래를 더 많이 좋아했다. 장국영의 모든 노래가 좋았다. 고교시절 사진부 암실에서 주성치와 장국영의 가유희사 같은 시나리오를 써보리라, 라며 선배들이 빠져나간 암실에서 조금씩 시나리오를 적어보기도 했다. 가유희사 속에서 장국영은 주성치와는 다른 매력으로 웃음을 주었다. 18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꼭꼭 쓰고 다닌다. 마치 장국영을 추모라도 하듯이.


장국영의 영화는 자주 볼 수 없었지만 장국영의 노래는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장국영, 영어 이름은 레슬리. 대부분 영화 속에 나오는 장국영을 좋아하지만 나는 장국영의 노래가 좋았다. 레슬리가 부르는 투유는 늘 한국을 자주 찾았던 장국영의 모습이 떠오른다. 손바닥에 한글을 적어 이선희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이소라의 프러포즈에 나와서 함께 찍은 사진을 이소라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앨범을 몇 개나 가지고 있었는데 커버를 잃어버려 직접 써서 커버를 만들기도 했다. 앨범은 다 잃어버리고 두 개 정도 남아있다.  왜 소중하게 다루지 않았을까. 


장국영의 목소리에는 늘 옅은 비애가 서려있다. 그 목소리가 노래가 되었을 때 알 수 없는 끌림에 딸려가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장국영이 신나게 부르는 노래도 어딘지 모르게 슬픈 비를 맞는 기분이다. 


https://youtu.be/WSfj9ieBfog 장국영 투유 라이브



학창 시절 사진부 암실에서 선배들에게 허벅지를 난도질당하고 아픈 다리를 주무르고 있을 때 한 선배가 장국영을 들어보라며 주고 갔다. 겨우 일어나 암실 창가에 앉았다. 햇살이 창을 투과해 다리에 내려앉았다. 욱신거리는 다리 위에 앨범을 올리고 ‘최애'를 들었다.


그때 노래를 듣고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가 있을까 생각했다. 넋을 놓고 듣고 또 들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하얀 눈이 떠올랐고 그 속에서 빛처럼 부서지는 내 몸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 초라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나를 스쳐갔던 소중한 사람들과 소중한 시간들. 지나간 것들을 기억하고 추억한다는 건 그 순간을 눈물을 흘리며 몇 백번이나 떠올렸을까.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도 나에게는 최고의 순간이었을 그 어느 때. 그때를 기억하는 건 나에겐 찬란하고 빛나는 자산인 것이다.


그때 맞이했던 포근한 온도와 나른한 햇살과 아카시아 꽃과 같은 향을 앞으로 만나지 못할지라도 나의 추억 속에서는 그 장소, 그 공간 그 시간이 그대로 우뚝 서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장국영이 열심히 무대 위에서 땀을 흘리며 ‘최애’를 부르고 있다. 넌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하면서, 너 자체가 사랑이라고 하면서.


https://youtu.be/W9jq62-MIUE 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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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활짝 웃게 만드는 것도 가족, 나를 크게 울리는 것도 가족이다. 가족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고, 가족을 맹신하는 사람도 있지만 가족은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고 더 불행하게 만든다. 가족은 나를 덜 행복하게 하거나 덜 불행하게 하지는 않는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그런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남매의 여름밤은 그렇게 남매의 기억 속에 추억으로 단단하게 자리 잡아 시간과 멀어질수록 생생하게 떠오를 것이다.


영화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늦었다며 잠을 깨운다, 지각이라는 불안감에 후다닥 일어나 가방을 메고 마당으로 나가니 밤인 것이다. 그렇게 여름밤, 아버지는 나를 놀렸다. 누구나에게 다 있을 법한 이야기, 여름밤의 선명한 기억은 박제가 된 채로 나이를 들어 버렸다.


영화 속에서 누나지만 아직 어린 옥주의 힘듦을 위로해 주는 말을 내뱉는 더 어린 동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동주가 누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의 말은 고작 “라면 끓여줄까?”였다. 진정으로 괜찮냐고 물어봐 주는 건 가족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동주는 그저 친구가 좋고 노는 것이 좋은 어린이지만 누나 옥주와 싸우고 난 후 옥주가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고 하니 "우리가 싸웠나?"라고 무심하게 말한다. 


이런 장면은 나를 대입하게 된다. 나와 여동생도 어린 시절에는 이런 것으로 종종 싸우고 붙어있었다. 하지만 긴 시간을 돌아봤을 때 그건 너무나 미약하리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조카를 데리고 일 년에 몇 번 집에 오면 어린 시절의 앨범을 꺼내 들어 보며 그때를 웃으며 이야기한다. 옥주와 동주는 서로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지만 결국에는 모기장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같이 잠을 잔다. 남매가 여름밤을 같이 보내는 시간은 그리 몇 번 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의 연기가 연기가 아니라 너무 실제 같아서 보는 내내 옥주와 동주에게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창을 타고 들어온 그 여름의 햇살. 여름밤의 달빛. 할아버지가 듣던, 전축에서의 노래. 할아버지의 부재가 남긴 존재의 증명은 결국 옥주의 눈물을 터지게 만든다.


영화를 보는 동안 옥주와 동주의 가족을 보는데 이상하게 나의 유년시절 깨끗한 여름밤 기억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죽지 않으면 따라다닐 어린 시절의 지독한 선명한 여름밤의 기억. 그 기억을 통해서 현재가 힘들지만 어떻게든 삶을 지탱하게 만드는 동력일지도 모른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남매인 옥주와 동주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아직 어린이의 마음을 가진 채 그만 미숙한 어른이 되어 버린 남매, 아빠와 고모인 병기와 미정의 여름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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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03-30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끝까지 못봤네요. 다시 봐야지 하고는. 남동생이 제 아들이랑 이미지가 겹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어요. 마지막엔 눈물이 터지는군요. 저 할아버지를 보고, 열한 살 아들이 묻더군요. 엄마, 아빠도 나중에 저렇게 돼? 초점 없고 굼뜬 늙은 할아비 모양새가 아들 눈에 이상해 보였나봐요. 연기인지 리얼인지 구분이 안되는^^;;

교관 2021-03-31 12:48   좋아요 0 | URL
아드님이 귀엽습니다. 그때에만 할 수 있는 질문이고 그때에만 가질 수 있는 궁금함인 것 같아요. 그때를 또 지나고 나면 어른이 되어서 할 말을 속으로 삼킬지도 모르니까요 ㅎㅎ. 활달하고 운동 잘 하고 싸움도 잘 하고 노래 잘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엄청 많다고 전해주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