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B4XGvrrz8_Y 다크나이트


명절 특별 편으로 영화음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 지난번 슈퍼맨의 존 윌리암스의 영화 음악을 얘기했다. 모차르트가 살아있었다면 아마도 존 윌리암스 같은, 그런 음악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헤헤 거리며 그 미친 천재적인 실력으로 록음악이나 뮤지컬 음악을 만들었을 것이다.

만약 베토벤이 아직까지 살아있었다면- 그 고집스러운 면모, 귀족의 녹을 받아먹으며 음악을 가르치고 만들었어도 예술은 명예와 권력, 돈 그 위에 있다고 믿었으며 귀족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책을 집어던지고 고함을 치기도 했다. 엄청난 샛방 살이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이 너무 뛰어나니까 귀족들도 그런 지랄 맞은 성격이라도 베토벤을 곁에 두려 했다.

그러니까 베토벤이 살아있었다면 그는 아마도 다른 음악은 절대 하지 않고 영화 음악만 하지 않았을까. 그의 음악을 통해 영화는 완전한 하나의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체가 되는 것이다. 영화 요소에서 일 순위를 꼽으라면 영화음악이 아닐까.

그래서 베토벤은 한스 짐머로 환생하여 영화음악을 만들고 있다. 놀란의 마지막이자 완결 편인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이 영화를 완전무결하게 만들어준 것은 다름 아닌 영화음악이었고 진두지휘를 한 한스 짐머가 있었다. 그리고 다크 나이트에서 히스 레저를 완벽한 조커로 만들어준 것도 한스 짐머의 음악이었다.

세밀한 묘사를 연출하는 놀란의 천재적인 역량이 돋보였다. 조커의 테마곡을 만들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첼로를 잘 연주하는 첼리스트를 찾아가 삼고초려한 일화도 유명하고 철저한 고증을 위해, 시나리오 작가인 동생 조나단 놀란을 무려 4년 동안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시켜 그것으로 영화 테넷을 만들었다.

그런 놀란과 한스 짐머가 만나 다크 나이트를 만들었다. 한스 짐머는 일 년에 열 편이나 영화음악을 만든다. 한 인터뷰에서 도대체 왜 쉬지 않고 일만 하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내가 음악을 하는 건 취미가 아니다. 그것이 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이유다.라고 했다.

베토벤이 살아있었다면 바로 딱 저렇게 대답을 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한스 짐머의 영화음악은 600편이 넘는다. 초반의 한스 짐머는 파워 오브 원과 라이온 킹에서의 아프리카 음악을 주로 만들었다. 하지만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95년 크림슨 타이드의 음악을 하면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관계자들의 눈에 들어가게 된다. 크림슨 타이드의 음악을 듣고 충격을 받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였다.

이후 제리 브룩 하이머의 진주만, 리들리 스콧의 라스트 사무라이 등 할리우드 영화에 참여하면서 굳건한 성곽을 이루고 있던 존 윌리암스의 음악을 무너트리게 된다.  제리 브룩 하이머의 캐리비안 해적의 한스 짐머의 음악은 단연 압권이다. 빰뻐버범 하며 시작하는 캐리비안의 해적의 음악은 등에서 뭔가가 죽 타고 내려오는 느낌을 가지게 만든다. 한스 짐머는 독일 출신이다. 독일 출신답게 독일 출신 클래식의 흐름을 이어받아 영화에 쏟아부었다.

한스 짐머의 음악에는 바그너도 보이고 베토벤이 당연하지만 보인다. 한스 짐머는 영화음악을 독점하지 않고 스튜디오를 만들어 제자를 양성하고 있다. 한스 짐머의 다크 나이트를 들어보자. 그 웅장함과 정교함에서 베토벤이 보인다.


https://youtu.be/dW3_gzvh5vI

캐리비안 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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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이지만 입을 한 일자로 다물고 눈을 밀사의 눈초리로 만들어서 생활을 들여다보면 일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늘 가까이 있어서, 언제나 가까이 있는데 잘 볼 수 없는 모습들이 있다. 주머니에는 항상 휴대전화가 있기에 그 모습을 기록할 수 있다. 폰을 바꾸기 전이라 카메라의 문제로 인해 화면이 부옇다. 뭐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고 받아들인다.


평소에 늘 다니는 조깅코스가 있지만 그 코스가 질릴 때쯤에 오늘은 이쪽으로 가볼까, 하며 방향을 틀어서 낯선 골목으로 들어가게 되면 마주치는 얼굴들이 있다. 사람의 얼굴이야 스치듯 지나치며 언뜻 보이지만 인간이 아닌 것들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럴 때는 꼭 인간세상 속에 몰래 몸을 숨기고 사는 불법거주 외계인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맨 인 블랙의 그 외계 종족들이 정말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일단 들고 나면 키득키득하게 되고 여러 상상이 몰려든다. 그리고 재미없고 반복된 일상도 꽤나 그럴싸하게 보인다.  


감염병 이후 우리는 평범하기만 했던 일상을 가슴 터지도록 그리워하고 있다. 에반게리온을 보면 붉게 변한 바다를 보며 파란 시절의 바다가 있던 그 평범하던 때를 미치도록 그리워한다. 졸음에 겨워 꾸벅꾸벅 졸기도 하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하루를 우리는 너무나 기다리게 되었다. 


일상을 벗어나 일탈 속으로 들어가면 일탈 속에는 일상에서 느꼈던 편안함이 배제되어 있어서 일상을 그리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일상을 뒤로하고 불편하지만 궁금함이 잔뜩 있는 일탈을 향해 뛰어든다. 인간은 참 알 수 없는 존재다. 그래도 이렇게 일상 속에서 일탈적인 모습을 가끔씩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떠나기 싫어 붉어진 채로 나무의 끝에 매달려 그리워하는 얼굴을 만났네

당신의 얼굴을 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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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스트 레시피’의 초반에 추억의 오므라이스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 맛에 죽음을 앞둔 부자 노인은 감격하고 만다. 예전에도 EXID의 하니의 이야기를 하면서 추억에 관한 음식을 다뤘다. 우리가 흔히 혀로 느끼는 맛이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 혀의 영역에서 벗어나 뇌의 여러 구간으로 흘러들어 가 버리고 만다.


요리사 박찬일의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를 보면 시칠리아에서 송아지 내장 햄버거를 먹는 일화가 있다. 주인과 대화를 나누며 왜 시칠리아에 송아지 내장 햄버거가 있냐고 물으니 “음, 시칠리아는 가난했으니까, 고기는 먹을 수 없고, 값이 싼 내장으로 햄버거를 만들 수밖에. 그게 시칠리아의 음식이지”. 등심 같은 구잇감은 부자에게 내어주고, 내장으로 곰탕을 끓였던 우리 민중들의 음식과 흡사한 것이 시칠리아의 내장 햄버거였던 것이다.


‘행복한 세계 술맛 기행’의 저자 니시카와 오사무는 우리나라 낙지에 대한 추억도 있다. 젓가락으로 집었더니 접시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빨판이 즉시 뺨 안쪽에 달라붙는다. 이가 닿을 수 있도록 뺨을 일그러뜨려 힘주어 씹는다. 씹을 때의 촉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쾌하다. 접시 위에서는 짧게 토막이 난 낙지의 다리가 한 마리 긴 애벌레처럼 여전히 꿈틀 거린다. 블랙 유머 같은 느낌이 든다. 가나지와에서 먹어본 적이 있지만 그보다 몇 배 더 유머를 느끼게 하는 음식이다. 죽어도 다리에 남아 있는 신경의 꿈틀거림으로 생존을 항변하는 ‘죽은 낙지’의 블랙유머다. 


맛이라는 건 역사와 추억으로 기억된다. 음식 속에는 음식이 단단하게 가지고 있는 시간과 시간이 지니는 역사와 그 역사를 이루는 개개인의 추억이 내밀하게 쌓여 있다.


누구에게나 추억의 음식이 있으며 그 추억의 음식은 한 두 개가 아닐 것이다. 누구와 먹었나, 언제 먹었나, 어디서 먹었나, 에 따라 그때그때 먹은 음식은 강한 기억이 되어 추억으로 소장된다. 전어에 대한 추억이 있다. 요즘에는 찾아 먹는 음식이 없지만 예전에는 꽤나 먹고 싶은 음식을 찾아서 먹기도 한 적이 있었다. 짱뚱어탕이 너무 먹어 보고 싶은 나머지 전라도로 여행을 가기도 했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 짱뚱어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전 일이었다.


나는 전어를 무척 좋아했었다. 전어회를 좋아했는데 친구들이 그런 나를 전어를 국수처럼 먹는 놈이라고 불렀다. 전어회를 씹는 맛이 좋았다. 씹고 있으면 고소한 맛이 퍼지는데 그 맛에 빠져 들었다. 그래서 전어회를 먹을 때는 초장에 찍어 먹는 게 아니라 앞접시에 이 만큼 담아서 그 위에 된장을 조금 바른 다음 정말 국수처럼 후루룩 먹었다.


전어를 너무 먹으니까 보너스를 탄 친구 놈이 한 번은 나에게 너 먹고 싶은 만큼 전어회를 사주마, 하며 가을 전어를 사주었다. 그랬는데 내가 네 접시를 먹은 것이다. 가장 비쌀 때 가장 많이 먹었다. 적당히 기름이 올라와서 참 맛있었다. 친구 놈은 네가 먹으면 뭘 얼마나 먹겠냐며 먹을 만큼 먹으랬는데 한 접시 주문해서 먹고 또 주문하고 또 주문할 때 친구 놈의 낯빛이 변하더니 한 접시 더 주문을 하니까 무표정이 되었다.


그 횟집은 우리가 자주 가는 집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가는 횟집으로 참 자주 갔었다. 메인 회가 나오기 전에 여러 안주거리가 많이 나오는데 나는 그 집의 미역국을 좋아해서 거기에 밥을 말아서 자주 먹곤 했다. 사장님을 우리는 형님이라 불렀고, 그러다 보니 손님이 뜸 할 때에는 같이 앉아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곤 했다. 재미는 없는 사람이지만 참 순하고 선한 사람이었다. 


단골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회를 정말 많이 챙겨 주었다. 전어를 제외하고는 회에 대한 욕심이 그렇게 없어서 밑반찬으로 나오는 고동을 나는 주로 먹었다. 고동은 인기가 없어서 내가 다 먹었는데 언젠가부터는 내가 쪽쪽 빨아먹는 걸 보더니 나도 먹어보자며 친구 놈들이 먹기 시작하더니 한 번 테이블에 앉으면 고동을 보통 다섯 접시 정도 먹었다. 주인 형님은 얼마든지 있으니, 다른 손님들은 고동은 쳐다보지도 않으니 마음껏 먹으라고 했다.


그때가 한창 아버지가 투병할 때였다. 병원에서 병간호를 하느라 자주 가던 그 횟집에 나만 가지 못하게 되었다. 낮에는 어머니가 병실을 지켰고 밤에는 일 마치고 달려가서 병실의 간이침대에서 잠이 들다가 아침에 어머니가 병원에 오면 나는 일을 하러 나왔다. 그 소식이 친구들을 통해서 횟집 형님 내외의 귀에 들어갔다.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횟집 주인 형님이었다.


한 번 오라고 하기에 일하는 도중에 시간을 내서 들렀다. 그랬더니 우리가 늘 앉는 큰 자리에 내가 좋아하는 전어회와 고동과 미역국과 밥이 있었다. 병간호하려면 든든하게 먹고 가라며 밥을 차려 주었다. 그리고 아무 말하지 않고 자리를 피해 주었다. 고동을 몇 개 쪽쪽 빨고, 미역국에 밥을 말아 호로록 먹고 전어회를 된장에 찍어 먹었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모든 일들이 마무리가 되고 일상으로 돌아와 그 횟집으로 가보니 주인이 바뀌었다. 우리에게 연락도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바닷가에서 제대로 횟집을 할 거라고 종종 말하곤 했었는데 그렇게 되었다.  


며칠 전에 옆 집에서 전어회무침을 먹으라고 주었다. 보통 아파트 옆집들에게 사진으로 액자나 시계나 뭐든 만들어줘서 먹을 걸 종종 얻어먹는다. 미안할 정도로 나눠준다. 선짓국을 하면 도대체 이렇게 한 냄비를 주면 그 집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게다가 옆 집은 한식 조리사 자격증이 있어서 유부초밥, 추어탕 등 못하는 음식이 없는데 일주일에 한 번은 얻어먹는다.


그래서 전어회무침도 얻어먹었다. 전어회를 먹으면 항시 그때가 떠오른다. 그 횟집의 그 주인 형님 내외. 너무나 다정하고 순했던, 장사와는 거리가 참 먼 사람들인데 묵묵히 회를 썰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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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날이 흐리고 하늘이 잿빛이면 오후가 되어서도 오전 10시 37분 같은 기분이다. 아직 겨울의 끝자락, 패치카에서는 미미한 열을 뿜어내고 마시는 커피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고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알 수 없는 팝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오전의 사각거림이 오후가 되어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날이 하루 종일 흐리다고 해도 흐린 날에 늘 이런 기분은 아니다. 겨울이거나 겨울에서 봄으로의 경계에 있는 날, 그런 날이 하루 종일 흐려야 오후가 되어도 오전의 평온하고 고요한 느낌이 이어지는 것이다. 찬란하지는 않지만 이런 계절의 이런 날은 언제나 좋다. 보통적인데 평면적이지 않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곧 울어버릴 것 같은 5세 아이의 얼굴처럼 보인다. 날이 흐리면 고요가 대기에 침잠하고 그 많던 새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사색은 날씨에 기인한다. 깊은 사색을 하고 잠이 들면 악몽을 꾼다. 세상의 사람들이 자기 방어를 위해 전부 총을 들고 다니며 서로를 죽인다. 총을 맞은 사람은 몸에서 목이 떨어져 나가 버리고 만다. 꿈이지만 충격적이다. 나만 총이 없다. 그런데 나만 살아남고 모두가 죽는다. 죽어야 꿈에서 깨어날 수 있다. 나는 죽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 상태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꿈이다. 고립 속에서 홀로 영영 살아가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우리는 어쩌다 죽고 우리는 어쩌다 살아가고 있다. 어쩌다 살아가고 있기에 죽음을 불길하게 여겨선 안 된다.


곧 비가 내릴 것이다. 느닷없이 내리는 비에 비해 예고된 비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 그래? 그것이 뭐야?라고 물어봐도 대답할 길은 막막하다. 하지만 2월 말에 내리는 비는 3월 초에 내리는 비와도 다르고 1월 말에 내리는 비와도 다르다. 2월 말에 내리는 비는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같은 비의 느낌은 아니다. 그렇지만 독특한 무엇이 있다. 2월 말에 내리는 독특한 비는 잿빛 하늘과 메마른 도시와 표정 없는 자동차들을 차갑게 적신다.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라고 해봐야 그런 사정 따윈 봐주지 않고 비는 세상을 적신다.


랄프로렌을 잔뜩 입고 나왔던 ‘애니 홀’의 다이안 키튼이 떠오른다. 그런 애니를 보며 올비가 말한다. “나는 실은 말이지, 아주 비관적인 인생관을 갖고 있어. 말하자면, 인생은 호러블 한 것과 미저러블 한 것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어. 호러블 하다는 것은 글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치명적인 경우랄 수 있지. 예를 들면 눈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장애라든가, 그리고 음, 미저러블 한 것은 그 밖의 모든 것이지. 그러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미저러블 한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지난 영화를 보고 있으면 심연의 바닥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는 기분이 든다. 그 기분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더러운 먼지처럼 퀴퀴한 느낌일 때도 있고 폭신한 솜사탕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조금은 부드럽고, 조금은 딱딱해서 조금은 안타깝고 조금은 안정된, 그런 느낌이 든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싸구려 스킨 냄새가 난다. 후퇴한 시간의 냄새가 2월의 끝물에 흐린 바람을 타고 풍겨온다. 싫지 않은 냄새. 좋은 냄새는 아니나 나쁜 냄새도 아니다. 아무리 씻어도 없어지지 않고 아버지 등에 붙어있던 작업복 냄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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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크게 이분법으로 나누면 문과형과 이과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하루키도 자신은 문과형에 속하는 인간으로 말했다. 물론 사람들에게, 여성들에게 실질적인 인기가 있는 남자는 이과형에 속하는 남자들이다. 남자는 예술적 기량이 철철 흘러넘쳐도 여자들이 기댈 수 있는 남자는 이과형 남자들이다. 노래를 아무리 잘 부르는 남자라도, 그림을 아무리 잘 그리는 남자라도,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이과형 남자가 필요할 때에 그것을 하지 못하면 뭐야? 남자가 그것도 하나 못해요? 흥. 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제 아무리 글재주가 좋고, 고흐가 울고 갈 정도의 그림을 그리고, 들으면 눈물이 흐르는 노래를 불러도, 수도가 터졌을 때 뚝딱 고쳐버리고, 달리는 자동차가 이상이 있을 때 보닛을 열어 음, 여기가 문제군, 하며 보험 기사가 오기 전에 뚝딱 처리를 하고, 냉장고에 이상한 소리가 들릴 때 “이건 냉장고의 수평이 맞지 않아 나는 소리야” 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집 안에 있는 어떤 것들을 이용해서 지렛대로 사용해 냉장고의 수평을 맞추어 소리가 나지 않게 하는 남자들을 여자들은 좋아하게 되어 있다.


문과형에 속하는 남자들은 이과형이 속하는 남자들만큼 능숙하지 못하거나 상황 대처 능력이 부족하면 여지없이 아내나 애인이나 어머니에게서 흥, 남자가 그것도 하나 못 해! 같은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늘 생각한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는 전문가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필요할 때 전화를 하면 슈퍼맨처럼 나타나서 보통 그런 일들을 해결해준다.라는 말을 해봐야 그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 같은 경우를 보자. 나는 사진을 하기 때문에 사진에 관한 것들에 대해서 다룬다. 그렇다고 해서 카메라에 관한 걸 다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진을 업으로 하기 때문에 카메라의 고장 유무나 카메라의 기기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내가 잘 알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김없이 주위에서는 카메라 문제로 나에게 들고 왔다가 늘 허탕을 치고 간다. 가면서 어떤 사람은 꼭 이런 말을 남긴다. 아니 사진을 하면서 카메라에 대해서 모른단 말이야?


한 번은 일하는 건물 위층에 다단계 회사가 들어와서 몇 달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경우가 있었다. 그들은 행사가 많아서 늘 사진을 찍는 모양이다. 내가 일하는 사진관에서는 일반 사진은 출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가깝다는 이유로 늘 다른 사람이 내려와서 일반 사진을 출력해 달라고 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가기 일쑤다. 그래서 올라가서 여기는 일반 사진은 출력하지 않는다고 전해달라고 말했지만 묵살당했지 싶다. 그 이후에도 정장을 입은 다른 사람들이 내려와서 사진을 출력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다 사진을 출력할 것은 아닌데 단체사진을 찍으면 사진이 흐리게 나오는데 왜 그렇냐고 물었다. 사진을 보니까 초점을 전혀 맞추지 않고 찍어서 그렇다고 내가 말했다. 반셔터를 누르면 포커스를 맞춰 주니까 그렇게 찍으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려 열 번 넘게 같은 말을 하게 만들었다.


요즘은 뜸해졌지만 한 동안은 근처에서 카메라 서비스 센터나 수리점에서 해야 할 것들도 나에게 들고 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같은 닭을 취급하니 닭갈비 집에서 치킨을 내놔라 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사진관을 하면서 카메라도 고치는 사람들이 있을지는 모르나 사진과 카메라 자체는 별개의 문제다. 카메라의 영역 속에는 기기적인 부분이 많아서 이과형에 속한다. 하지만 사진의 영역은 문과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카메라를 들고 같은 곳을 촬영해도 누가 찍느냐에 따라서 사진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문과형으로 말하자면 사진은 카메라보다 사람이 담는다.


나는 주로 선물을 줄 때 사진으로 무엇을 만들어서 주곤 한다. 어머니가 고마워하는 분들의 사진을 받아와서 뭔가를 만들어 주는데, 벽걸이 시계-원목으로 된 파이가 40센티미터가 넘는 시계에 사진으로 디자인을 해서 선물로 준다. 그러면 그 시계를 어머니를 통해서 시계 주인에게 가게 되는데 그때 감사의 인사를 받게 되어서 으쓱하지만 집 안에 이과형 남자가 필요한 일이 발생하면 -요컨대 느닷없이 티브이가 나오지 않게 되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남자가 그것도 하나 만지지 못하냐는 말이 어김없이 돌아온다. 옆집 아주머니의 돌아가신 부군의 사진을 마우스로 초상화를 그려 액자에 넣어 주면 그 고마움은 어머니가 듣게 되고 이과형 남자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한 소리를 듣게 된다.


프라모델을 만들고 디오라마를 일일이 디자인하고 출력하고 잘라서 붙이고 직접 칠하는 것은 잘하는데 전기나 기기적인 부분에서는 눈만 말똥말똥 뜨고 보고만 있다. 인간이란 참 제멋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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