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이탈리아에서 행복한 인생을 배웠다
박재현 지음 / 슬로디미디어 / 2020년 2월
평점 :

투병생활을 어떻게 하시고 어떻게 이겨냈는지 궁금해서 읽었다.
나도 10년도 넘게 투병생활을 해봐서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았다.
나도 금방 나을거라는 희망으로 병원도 열심히 다니고 백가지 가까운 약과 80군데가 넘는 병원을 다녀서 좋아지기는 많이 좋아졌는데 아직 100%는 못 고친 것 같다.
아직도 더 고쳐야 한다는게 우울한데 저자는 어떻게 그 과정을 통과했는지 알고 싶었다.
나랑 병명은 틀리지만말이다.
저자 박재현은 20대에 급성 림프종 백혈병 투병 생활을 극복하면서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깨닫게 되었다.
몸이 회복된 후 뉴욕에서 제2의 인생을 살기 시작하면서 친구들에게 따뜻한 집밥을 선물하고 싶어 시작한 ‘홈키친 원테이블’을 계기로 요리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친구들과의 인연으로 이탈리아의 다양한 매력을 경험한 뒤, 첫 사업으로 현지 투어가이드 스타트업<트립아이>를 운영했다.
이탈리아 여행을 온 많은 사람들에게 이탈리아만의 매력을 제대로 전달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현재는 서울 쌀국수<미미옥>에서 셰프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아빠랑 엄마랑 같이 가려고 했는데 코로나때문에 5월 개점이 미뤄지고 있ㄷ가고 했다.
‘캠핑맨’ 유튜버로서 어떻게 하면 몸과 마음이 더욱 건강해지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며 진정한 행복을 계속해서 찾고 있다.
진정한 행복은 찾는 게 아니라 본인이 만들어 가는 것인데 사람들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줄 안다.
행복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저자는 백혈병을 어떻게 이겨 냈는지 구구절절 늘어놓기보다는 그저 목숨을 걸고 극복한 뒤 무엇을 얻었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살면서 몸과 마음이 갖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참된 의미를 각자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회사 생활을 경험한 적이 없이 창업을 했다.
바위에 계란을 치듯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다 보니 주위 환경의 영향을 받을 때가 많았다.
물론 사업의 본질은 이익을 쟁취하는 것이지만 저자는 상대방이 돈이 되는 사업 이라고 말하는 순간 한 발짝 물러서서 다시 보게 된다.
여기서 사업을 판단하는 저자의 기준은 사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돈이 되는 사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속편한 사업은 한순간의 이익을 맛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속하기는 어렵다.
저자 또래의 청년들 대다수가 추구하는 것을 보면 ‘부’인 것 같다.
저자는‘돈을 번다는 것’이 노력의 결과인 것인지 ‘원인’ 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학창시절부터 10념 넘게 해온 태권도를 접고 요리에 빠져 셰프로 주방에 들어갔을 때, 노동의 강도는 운동과 비슷했지만 전혀 힘들거나 괴롭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투어가이드 스타트업을 할 때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지만 너무 행복하게 이탈리아의 분위기에 흠뻑 빠져 살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탈리아의 영향을 많이 받고 살고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 여행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이타리아 사람들은 대체로 불친절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행복한 무드가 있나보다.
저자는 지금도 서울 쌀국수 ‘미미옥’ 주방에서 10시간씩 서서 육수를 뽑아내도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가 아픈 뒤 아버지는 어떤 이야기나 부탁을 하면서 아버지의 대답은 늘 “그래”였다.
아버지는 어떤 경우에도 저자가 말한 것에 “안 된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언제나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긍정적으로 지켜봐 주셨다.
이 책을 쓰면서 부모님의 사랑 안에서 저자가 늘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고 한다.
저자는 항상 어떻게 하면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까를 고민했었다.
아버지는 20년 넘게 독서 모임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독서량도 매우 많고, 책에 대한 조예가 아주 깊으시다.
저자가 성공한 사업가보다 저자가 되는 것이 유일한 아들로써 인정받는 일이라 생각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이 아팠을 때를 다시 회상하게 되는 순간은 저자에게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
이 책을 통해 과거에 아팠던 분들이나 지금 투병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 그리고 저자와 비슷한 행복의 방향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작게나마 희망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무한한 사랑으로 언제나 큰 그늘을 만들어 주신 아버지와 어머니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삶의 무게를 견딘 자신에게도 ‘그 동안 사느라 애 많이 썼다’라고 오늘은 꼭 따뜻한 칭찬을 해 주고 싶다고 한다.
한국의 입시 경쟁에서 운동만큼 큰 경쟁력이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공부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운동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처럼 중학교 때 태권도를 시작하는 학생은 그만큼 드물었다.
저자는 평범한 중학교 학생이었다.
공부를 월등히 잘 하는 것도 아니었고, 운동신경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기회로 미국 보스턴에 있는 YMCA 여름학교를 가게 되었다.
보스턴에 도착해서 한국 중년 부부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다.
주인아저씨는 보스턴에서 꽤 큰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계시는 관장님이었다.
당시 저자도 태권도 1단 유단자라 반가운 마음이 컸다.
방과 후에 집에 오면 곧장 도장 일을 돕기 시작했다.
잠시였지만 도장에서 미국 수련생들과 같이 운동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면서 미국에서의 태권도 사범 일을 어깨 너머로 배우는 기회도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 올 며칠 전이었다.
관장님은 조용히 저자를 부르시더니 뜻밖의 제안을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 태권도부가 있는 학교에서 운동을 할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저자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공부가 아닌 다른 것을 한다는 것에 흥미가 생겼다.
하지만 순간의 선택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운동부에서 새롭게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어느새 풍생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중학생 때나 고등학생 때나 생활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운동부라고 하면 운동만 하고 수업 시간에는 잠만 자는 학생을 쉽게 연상한다.
운동부 학생들은 그들만의 가는 길이 있기 때문에 담임도 제약을 두지 않는다.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저자 스스로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었다.
운동 하나에만 투자하는 것보다 다른 것도 같이 준비해야 자신이 원하는 성공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막상 야간 학습을 시작해 보니 운동만 해도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안 하던 공부까지 하려니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오전과 오후에는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게 훈련을 하고, 야간에는 열심히 공부하기란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남다른 정신력이 필요했다.
밤 10시에 집에 도착해서 과외도 받으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자신을 위해 쏟아 주시는 부모님에게 실망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일 년을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결국 한국체육대학교 태권도학과 08학번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기대를 품고 학교를 다녔다.
사실 학교 분위기는 거의 태릉선수촌과 비슷했다.

오로지 올림픽 인재 양성에 집중되어 있는 체육전문학교이다.
대학교에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험을 누리면서 후회 없는 생활을 한 것 같아 뿌듯했다.
항상 좋은 기억을 만드는 것은 그 다음 일을 해나가는 좋은 원동력이자 발판이 되는 것 같다. 2008년 5월,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효자가 되고 싶은 마음에 그동안 모은 돈으로 부모님께 여행 선물을 하기로 했다.
20살이 되니 효자 노릇을 하고 싶었나 보다.
들뜬 마음으로 부모님도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 뿌듯함도 잠시 혼자 집에 있는데 갑자기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지독한 감기에 걸렸구나라고 생각하며 혼자 동네 병원으로 가서 진단을 받는데 의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물론 아무 일 없겠지 생각하면서도 불안했다.
의사는 큰 병원으로 가 보는 것인 좋겠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불덩어리 같은 몸을 이끌고 종합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으며 병실에 누워 있었다.
부모님은 소식을 듣고 여행을 마치기도 전에 곧바로 내가 있는 병원으로 찾아오셨다.
곧 의사는 저자에게 “급성 림프종 백혈병입니다.”라고 말했다.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백혈병은 림프구계 백혈구가 악성 세포로 변하여 골수에서 증식하고 말초 신경으로 퍼지는데 간, 비장, 림프계, 대뇌, 소뇌, 척수 등을 침범하는 일종의 혈액 암이라고 한다.
골수 검사는 조혈기관인 골수를 채취하여 검사하는 진단 검사 방법 중 하나로 혈액학적 질환 및 조혈기관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중요한 검사이다.
일차 항암 시기가 끝날 무렵 아빠가 아주 조심스럽게 저자 옆에 와서 책 한권을 보여 주며 설명 했다.
김성동 저자의 <감기에서 백혈병까지의 비밀>이라는 책이었다.
일단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감기와 백혈병이 무슨 연관이 있길래 이렇게 두꺼운 책까지 나왔을까?
결론적으로 이 책이 저자에게 내린 진단은 ‘오진’이었다.
저자에게 오진이라고 말해 준 유일무이한 생명의 은인 같은 책이었다.
아버지는 이 책을 읽고 저자의 병은 분명 오진이라고 확신하시고 저자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인체는 감기로 1도 화상을 입고 해열진통제로 3도 화상을 입는다.’
찬바람에 오래 노출되어 땀구멍이 닫히게 되면서 인체는 오한 발열증상이 나타나는데 이때가 바로 ‘감기’에 걸린 상황이다.
인체는 오한으로 열이 꽉 차게 된 인체는 열에 취약한 부분부터 차례로 화상을 입게 되는데 그것이 폐렴, 신장염, 간염, 등이다.
인체는 오한으로 열이 발산되지 않아서 생긴 화상 정도는 일정 기간 치유 프로그램을 가동시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원상으로 회복시켜 놓을 만큼 휼륭한 생명력을 보유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다 읽고 그냥 이 책에서 하는 말 그대로 믿어 버리기로 했다.
책 내용이 제발 사실이길 버리는 마음이 그만큼 컸다.
설령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이 책을 그대로 믿고 싶었다.
저자에게 내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느긋하게 책만 읽으며 자신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것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어떠한 물리치적 치료를 받아야 자신의 병이 사라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몸에 적신호가 오면 두려움이 커지면서 많은 생각에 빠진다.
가장 안 좋은 상황까지 생각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바닥까지 끌고 내려가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라고 없게 된 채 예민해지게 된다.
나도 아픈 게 너무 심해서 죽을지 모른다고 의사한테 들었는데 주변을 전부 정리했다.
친구들과의 연락도 전부 끓고 페이스북도 탈퇴하고 아는 사람들의 연락은 받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1차 항암 치료가 끝나고 2차를 맞아야 하나 아니면 병원을 탈출하고 자연 치유를 해야 되는가 하고 고민하는 시기에 허봉수원장님을 운명처럼 만난 것이다.
저자를 보자마자 원장님은 독한 감기와 다를게 없다면서 더 이상 병원에 누워 있어서는 안 되고, 나와서 체질에 맞는 음식을 먹으면서 생활 습관도 고치며 치료해야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하셨다.
처음 누군가와 자신의 병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며 나을 수 있다는 위로와 확신을 심어 준 일이었다.
허봉수 원장님은 저자가 병원에서 치료받은 기록지를 보자마자 오진이라고 확신하셨다.
누구나 독한 감기가 걸렸을 때 골수 검사를 하면 대부분 백혈병 진단이 나온다고 하셨다.
원장님은 초지일관 하나만 말씀 하셨다.
밥으로 못 고치는 병은 약물로도 못 고친다고 하셨다.
원장님은 오직 ‘생태섭 영양연구를’ 위해 1980년 21세 때부터 자신의 시간을 바쳐 식물에 대한 연구를 깊게 하셨다.
습하고 응달진 밭에서 자란 무와 배추가 일조량과 물 등의 환경에 의해 변화되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같은 조건 안에서 무는 잘 자라는데 배추는 그렇지못한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새 백혈병 환자라는 꼬리를 달고 살아온 지 11년이 지났다.
11년, 그래 한 번 아프면 10년은 거뜬히 지나간다.
저자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약간은 불편한 말들을 들을 때가 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노력해도 가끔 상처가 되기도 한다.
백혈병 판정을 받은 스무 살부터 가장 힘들게 자연 치유와 식이요법에 집중했던 3년 기간은 저자에게 잃어버렸다는 표현이 부정적으로 돌릴 수 있지만 기억이 자세하게 나지 않는다.
크게 기억나는 것들은 병원 생활, 항암 치료, 경주 시골 생활, 강원도 작은 절 그리고 악착같이 지켰던 체질 밥상이 전부인 것 같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병상에 누워버리는 바람에 2학년까지는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학교 특성상 체육대학이다 보니 어떤 고등학교 출신이냐에 따라 다양한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저것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다행히 빠른 속도로 몸이 회복이 되어 대학교 막바지에는 정상적으로 대학 생활도 하고 과대표에 부회장까지 역임하며 대학 생활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뉴욕에서 살게 된 큰 이유는 당시 아버지의 적극적인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생각보다 거창하거나 복잡한 것이 없이 매우 간단하다.
“일단 뉴욕에 가서 살다보면 길이 보일 거야”뉴욕은 전 세계 모든 인종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다문화 도시이다.
그래서 더욱 다양한 경험과 사고를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이곳에서 살다 보면 뭔가를 바라보고 시야도 매우 넓어질 것이라고 말씀했다.
저자 자신도 공감했고 적극적으로 응원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었다.
꿈의 도시 뉴욕에서 제2의 삶이 시작되었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떠나는 뉴욕행이었다.
막상 가려고 하니 설레기도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아마 저자보다 부모님이 더 신경 쓰였지만 오히려 저자를 위해 내색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투병 생활을 한지 4년차 밖에 되지 않았을 때라 온 가족의 신경은 저자 건강에 집중되어 있던 시기였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경솔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기였다.
저자 또한 한편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물론 지금까지는 아무 일 없었지만 한국도 아닌 먼 나라 미국 땅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나 싶은 불안감이 이었던 것이다.
뉴욕에 살기 시작했을 때, 나이 24세였다.
아무래도 한국에 있으면 투병 생활의 연장선 같은 느낌이다 보니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했었다. 잠시라도 어디 나가고 싶었다.
한국에 있으면 하루도 빠짐없이 이른 아침에 녹즙 한 잔, 점심 지나고 한 잔, 그리고 저녁 먹기 전 한 잔씩 하루에 세 잔은 꼭 챙겨야 했고, 혀가 부르는 음식이 아닌 머리가 생각하는 식단을 먹어야만 했다.
뉴욕에 와서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겸손해졌다.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이 많고 끼와 능력이 넘처 나는 인재들도 많았다.
그저 새롭게 태어나서 적응해 나가는 느낌이라 자신이 아팠던 과거를 까마득하게 잊는데 아주 좋았다.
뉴욕은 저자에게 아픈 과거를 무덤덤하게 해주었고 앞으로 새로운 인생을 스케치하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뉴욕은 요리, 음악, 미술, 연기, 공부, 비즈니스 등 아주 다양한 분야의 중심에 있는 곳이다.
모든 기회와 욕망이 있는 도시라서 누구나 뭐든 열심히만 한다면 충분히 좋은 경력도 쌓을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는 것이다.
브루클린 대학원생이 되어 진정한 자아를 찾아 나갔다.
뉴욕에서 생활한지 일 년이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뉴욕에서 영어 공부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면서 그들의 문화를 알아가는 재미로 지냈다.
그러나 걱정보다 오히려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인생에서 진정 필요한 시간이라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중요한 인생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가치관이 굉장히 멋있어 보였다.
피렌체에 살면서 ‘자신도 저렇게 낭만과 감성을 잃지 않고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이탈리아를 포함한 유럽인들이 휴식이란 시간을 인생에서 아주 중시 여겼다.
성공했거나 열심히 사람들의 인생 스토리를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극이 되고 어느 부분은 공감대 형성이 되었다.
성공한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본인 스스로 휴식을 취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스스로 올린다.
그들은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직업 이외에 시간이 더 빛나고 값진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값진 삶을 살기 위해 일을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쌀국수는 말 그대로 쌀로 만든 국수인데 왜 꼭 베트남 스타일로만 먹어야 할까,,
그래서 저자가 서울 쌀국수 육수 레시피를 개발할 때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이 바로 향신료였다.
시작은 서울이 아닌 고향 울산에서 18평의 작은 가게로 시작했다.
일단 울산에서 실력을 쌓고 서울로 진출하려는 전략이었다.
비싼 임대료의 부담을 느껴 돈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일이 즐겁다고 해도 경제적으로 적자가 지속되면 그것 또한 문제가 되기 때문인 걸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처음에는 많은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며 성루 쌀국수에 대한 손님들 반응도 지켜봐야 했다.
서울에서 쭉 살다가 울산에서 산다는 것은 당장은 지루하고 적응이 필요할 수 있지만 나중에 저자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어느 정도 양보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가게 이름은 미미옥의 뜻은 ‘아름다운 미’ ‘쌀 미’ ‘집 옥’의 한자의 뜻을 사용하여 ‘아름다운 쌀의 풍경이라는’ 뜻이다.
매장에서는 갓 도정한 쌀도 판매한다.
일반 식당과 차별화를 두고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데 집중했다.
비싼 유학도 다녀왔으니 보란 듯이 남들이 인정하는 직장을 다녀야 과정이 부합하는 결과일 것일까,,
그럼 남들이 자신의 삶을 결정해 주는 것이 되는 건 아닐까,,
유학 다녀와서 쌀국수 장사를 하면 잘못된 것일까,,
오히려 이럴 때는 길게 생각하면 본인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다.
유학을 다녀왔기 때문에 혹은 여러 경험을 해 봤기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지 방향을 잡은 것이다.
이탈리아 유학 시절에 매일 가던 카페가 있었다.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다.
분위기는 르네상스 시대의 느낌이 물신 드는 아주 낭만 있는 카페로 주말 아침 일찍 일어나서 카페테라스에 앉아 책 한권을 읽으며 따뜻한 카푸치노를 마시는 게 좋았다.
거기를 좋아한 이유는 분위기보다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카페를 들어가면 멋지게 차려입은 60세 할아버지 바리스타가 절도 있게 커피를 내려준다.
커피 맛 또한 아주 훌륭하다.
난 커피 맛이 훌륭한 건 어떤 기준인지 모르겠다.
서울시내 카페를 전부 돌아봐도 편의점이나 가게에서 파는 바리스타 룰스 카라멜 딥 프레소가 제일 맛있는 것 같다.
어느날 한 번은 저자가 주문 한 커피가 평소 3분이면 나오는데 10분째 나오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할아버지 바리스타가 오더니 저자의 주문을 잊고 다른 손님 커피를 계속 만들고 있었다며 미안하다며 금방 만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몇 분 뒤 커피와 함께 저자의 손등을 잡으면서 말했다.
“내가 이 카페에서 20년을 일했는데 지금 내 나이가 60살이 넘어서 주문을 깜빡했네. 이해해 주시게."
이 말을 듣자마자 60의 나이보다 20년 동안 카페에서 일했다는 말이 놀라웠다.
할아버지는 한 카페에서 평생 직장처럼 지금까지 일해 온 것이다.
저자가 본 그들은 정말 그들 소신껏 최대한 행복하게 잘 살아온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딱히 일에 욕심을 내지 않고 행복하게 살려고만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각자의 직업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부심을 갖으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
저자는 이픈데도 미국도 가고 이탈리아도 가면서 그들의 삶을 유심히 본 것 같다.
저자가 본 사람들은 비교가 아니라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자신의 삶에만 집중한 사람들인 것 같다.
아픈데 비교까지 하고 바삐가는 사람들을 보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못 산다.
저자는 인생의 진짜를 볼 줄 알고 잘 찾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