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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고로드의 재판
엘리 위젤 지음, 하진호.박옥 옮김 / 포이에마 / 2014년 12월
평점 :
1.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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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폴란드의 한 마을(샴고로드) 유대인
공동체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학살을 당한다. 사건으로부터
살아남은 베리쉬는 하녀인 마리아와 함께 주점을 운영하고 있고, 그에게는
당시 마을 주민들로부터 윤간을 당하고 그 충격으로 변해버린 한나라는 딸이 있었다.
어느 날 유대인들의 명절 중 하나인 부림절 즈음, 세 명의
손님(사실
그들은 명절을 맞아 공연을 하러 온 광대, 혹은
배우들이었다)이 그
주점을 방문했고, 그들은
여느 주인들과 다르게 까칠한 베리쉬 등과 대화를 하던 중 저간의 사정을 파악하게 된다.
끔찍한 사건을 겪고 신을 부정하는 베리쉬를 보며 신을 피고로 세운 재판이라는 즉흥연극을 제안하는 세 명의 방문자들. 모든
것이 허용되는 부림절의 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연극을 허용했지만, 여관
밖에는 또다시 폭도들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2. 감상평
。。。。。。。
실제 홀로코스트를 경험하고 살아남은 작가가 쓴, 인간의
잔혹함에 관한 이야기. 이야기의
중심소재는 신의 정의로움을 두고 벌어지는 재판이지만, 사실
이건 결국 인간들 속에 있는 온갖 거짓과 비겁함, 나약함, 그리고
‘악함’을
드러내기 위한 소재였다.(실제로
재판의 결과는 나오지도 않는다) 즉
작품은 신론이 아니라, 인간론을
다루고 있다.
작품 속 폭도들은 신의 이름으로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건
나치, 히틀러와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가톨릭교회의 어두운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어디 교회만 그렇던가. 자칭
무신론의 강력한 옹호자라는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책들에서 발견되는 (종교인들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과 노골적인 증오, 저주는
뭐 그리 또 다른가. 결국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뿌리 깊은 배제의식은 인간 내부에서 나오는 것 같다. 여기에
신은 매우 적극적으로 이용당하고 있고.
물론 신은, 종교는
그런 행동과 마음을 교정하고 개선시켜야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매우 강력하고 타당하다. 신(혹은
종교나 교회)의
무능력은 공격자들의 좋은 무기이다. 하지만
(다른
신과 종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니) 적어도
교회는, 그
무능력을 전면에 내세우는 조직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신의
아들이 스스로 무능력을 감수한 채 세상에 와서, 고통
받는 세상의 일부가 되어 죽었다는 것이 핵심교리인 기관이니까. 기독교는
그 희생이 다양한 양상과 방향에서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고, 나아가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도록 만든다고 가르친다.
기독교의 신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강제하기보다는, 기꺼이
모욕과 고문을 당하는 분이다. 아마도
이 여인숙의 재판에 피고가 직접 참여했다면, 스스로
변론권을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 우리 곁에는, 그분의
변호자를 자처하는 작품 속 샘과 같은 인물들이 지나치게 넘쳐난다.(문제는
그들이 대개 변변한 사유와 고민 없이 이 직분을 수행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이다) 샘이
그랬듯 그들은 유려한 논리와 말주변으로 신을 옹호하며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피해를 강제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 속 샘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자. 과연 그
끝이 무엇인지.
작품을 읽으며 구약성경의 욥기가 계속 떠올랐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주인공(욥), 그를
찾아 온 세 명의 방문자들과의 입씨름(엘리바스, 빌닷, 소발), 그리고
갑자기 등장해 하나님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인물(엘리후)까지.. 큰
틀에서 보면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과 거의 그대로 매칭이 된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관심을 끌었던 것은 욥기의 엘리후 역을 맡은 작품 속 샘이었다.
시니컬한 캐릭터로 묘사되는 샘에게 처음부터 독자가 이입되기는 어렵다. 문제는
그가 하는 말에 딱히 논리적으로 대꾸할 말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학살에서
살아남는 은혜를 입은 당신이, 그
은혜를 베푼 신을 공격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식). 어이없는
말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이런 식으로 피해당한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언사를 내뱉는 몰지각한 교계인사들을 자주 본다.
작가는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신의 옹호자일 수 없다고 말한다.(마지막
페이지를 보라) 그들의
논리는 실제의 삶이나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갇힌 논리이다. 그것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결국
그들이 옹호하는 것은 인간의 논리 속에 갇힌 신, 철학자들의
신, 죽은
자들의 신일 뿐, 어쩌면
그들은 누구보다 강한 무신론자들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이 들었을 때, 욥과 세
방문자들 모두를 논박하던 엘리후의 성격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때로는 침묵이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는 법이다.(특히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오직
대화로만 구성된, 희곡이라는
형식의 이 작품은 역설적으로 이 사실을 강하게 증명한다. 작품 속
주점 주인 베리쉬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것은 백 마디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