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요, 엄마 하영 연대기 1
서미애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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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터뷰를 거절하고 침묵하던 희대의 연쇄살인범 이병도.

사형수로 수감 중인 그는 일면식도 없는 범죄심리학자 선경을 지목하며 면담을 요청한다.

선경은 그가 자신을 어떻게 아는지, 왜 자신을 지목해 인터뷰를 허락했는지 의문을 가진다.

한편, 또 한 명의 낯선 사람이 선경의 삶에 끼어든다.

갑작스러운 화재 사고로 오갈 데가 없어진, 남편이 데려온 전처의 딸 하영.

선경은 첫날부터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게 되자 하영의 존재가 부담스러워지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등장인물 설명 중 약간 상세한 소개가 포함돼있습니다.)

 

이 작품은 신간이 아니라 개정판으로, 당초 2010(노블마인)에 처음 출간됐던 작품입니다.

작가 후기를 보면 단순 개정판이 아니라 시리즈를 염두에 둔 새 출발이란 뜻이 담겨있는데,

독자들이 이 작품의 뒷이야기를 너무 궁금히 여긴 탓도 있고,

거듭 읽다 보니 나도 뒷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는 작가의 의지도 가세한 것으로 보입니다.

내년(2019)에 후속작이 나올 예정이라니 벌써부터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서미애의 팬이라면 잘 자요, 엄마가 지독히 역설적인 제목이란 점을 진작 눈치 챌 것입니다.

책을 읽기도 전에 꽤나 비극적인 모자 혹은 모녀 관계가 등장할 게 분명하고,

엄마라는 캐릭터가 따뜻함이나 모성애라는 의미보다는

그와는 정반대로 악마 또는 비극의 산실 역할을 맡을 거란 점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대학에서 범죄심리학을 가르치는 이선경입니다.

어느 날, 그녀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두 개의 미션이 동시에 부여됩니다.

하나는 참혹한 연쇄살인마 이병도의 뜻밖의 요청으로 그와 면담을 진행해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남편과 전처 사이에 태어난 하영이라는 11살 소녀를 떠맡게 된 일입니다.

이선경은 이병도와의 면담을 통해 그의 악마성의 근원이 어머니의 오랜 학대임을 간파합니다.

, 남편이 데려온 하영 역시 친모로부터 지독한 학대를 받아왔음을 눈치 챕니다.

특히 11살 소녀라는 외피에 어울리지 않는 공격성과 잔혹성을 지닌 하영을 지켜보며

이선경은 자기도 모르게 연쇄살인마 이병도와 하영을 동일선상에 놓기에 이릅니다.

 

이야기는 이병도 면담하영과의 동거등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말하자면 완성된 소시오패스첫 걸음을 뗀 소시오패스의 이야기인 셈입니다.

학대 엄마는 두 소시오패스의 공통점이자, 악마성의 근원지로 설정됩니다.

두 소시오패스의 이야기는 별개의 이야기처럼 전개되며 위기감을 고조시키다가

막판에 이르러 예상치도 못한 방식으로 한데 합쳐집니다.

 

사건보다는 이선경-이병도-하영의 불안정하고 시한폭탄 같은 심리에 방점을 둔 작품이라

미스터리라기보다 심리스릴러로 보는 게 맞다는 생각입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설정은 꽤 센데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병도와의 면담은 그의 고백과 회상에만 의존할 뿐 특별한 사건을 일으키지 못했고,

하영과의 동거는 대체로 상투적인 전개를 벗어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이나 엔딩 직전의 클라이맥스 모두 다소 예측한대로 흘러가서

초반의 강렬한 설정에 비해 살짝 맥이 빠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이 모든 아쉬움과 걱정은 막판 몇 페이지의 엔딩에서 모조리 전복되고 맙니다.

2010년에 출간됐던 초판을 읽은 독자들이 후속작을 줄기차게 요구한 이유도

이 전복적인 엔딩을 읽고 나면 100%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작품이 딱히 연쇄살인범은 타고 나는가,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에 집착한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두 소시오패스 캐릭터가 등장하다 보니 그 문제가 자주 거론되긴 합니다.

서른 넘어 갑자기 살인마가 되는 경우는 없다.”라는 대사를 쓴 점이나

작가가 두 소시오패스에게 공히 학대 엄마라는 외부요인의 영향을 설정한 걸 보면

연쇄살인범은 만들어지는 것이며, 주변의 노력에 따라 피할 수 있는 재앙으로 본 것 같은데,

워낙 논란이 있는 주제라서 독자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는 있지만

작가는 캐릭터와 스토리를 통해 충분히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쳤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때론 학대로 인한 인간의 내적 파괴가 당연한 인과관계처럼 설정된 점은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했고 읽는 내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병도와 하영을 데칼코마니처럼 그린 점은 극적이긴 해도 위화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 “선경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두 완벽한 소시오패스를 한꺼번에 만난 걸까?”라는,

조금은 지나쳐 보였던 운명적 우연은 비극의 무게감을 감소시킨 부작용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서미애는 아린의 시선’, ‘당신의 별이 사라지던 밤에 이어 겨우 세 번째 만난 셈인데,

읽은 작품마다 생생한 캐릭터와 완결성이 돋보이는 이야기 때문에 푹 빠져들곤 했습니다.

이번에도 첫 페이지를 연 뒤 단숨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독했는데,

그녀의 두 번째 장편임에도 믿고 읽는 작가 서미애의 힘이 잘 배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년에 출간될 이 작품의 후속작 소식이 하루빨리 들려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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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
이케이도 준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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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굳이 이 작품의 장르를 규정하자면 금융 미스터리가 적절해 보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미스터리 서사 자체가 그리 강렬한 작품은 아닙니다.

살인, 횡령, 사기, 배임 등 다양한 사건들이 벌어지긴 하지만

범인의 정체나 동기는 교과서적이면서 단순하고,

막판에 거듭 반전이 일어나긴 해도 충격적이라기보다는 씁쓸한 맛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이 작품의 미덕은 은행이라는 (2007년 당시 기준으로) 엘리트 직장에 대한 고발이자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갖가지 욕망에 대한 적나라한 리포트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도쿄제일은행의 나가하라 지점입니다.

도쿄 중심부 점포가 아닌 탓에 대체로 무기력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긴 하지만

이곳에 근무하는 은행원들의 욕망은 역설적으로 오히려 더 치열하고 간절합니다.

지점장으로의 승진을 위해 부하직원들을 짓밟고 일어서려는 부지점장,

어떻게든 감점을 피하고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얄팍한 리더쉽만 발휘하는 지점장,

그리고 승진, 전보, 신분상승을 위해 스트레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은행원들이 있고,

배임과 횡령 등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은 끝에 파멸에 이르는 은행원들이 있습니다.

 

작가는 연작단편 형식을 통해 그들 하나하나의 성장과 파멸을 디테일하게 그리는 것과 동시에

‘100만 엔 분실 사건과 니시키 대리의 행방불명을 단초로 삼아 미스터리를 전개시킵니다.

탐욕을 자아내는 과 종일 씨름해야 하고, 그날그날의 실적이 바로 드러나다 보니

최고위층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하루하루가 전쟁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고

갈등과 반목과 경쟁은 극한에 이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런 와중에 100만 엔 분실사건이 터지면서 은행은 혼란에 휩싸입니다.

고위직은 어떻게든 사고를 감추려 하고, 말단들은 제멋대로 추측한 범인을 비난하고,

중간간부는 작은 단서들을 토대로 범인을 찾으려 분투합니다.

그런 와중에 늘 묵묵히 업무를 수행하던 니시키 대리가 실종되는 사건까지 터지자

이번엔 본점의 인사부와 감사부까지 나서 나가하라 지점을 압박하기에 이릅니다.

지난한 과정 끝에 진실이 드러나긴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이 진실이라 확신하지 못합니다.

누구도 탐욕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누구도 떳떳하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가 샤일록의 아이들이란 점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7년의 도쿄제일은행 나가하라 지점과 2018년의 은행은 분명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인지 다소 아날로그적인 느낌이 강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몸담은 인간들의 민낯은 직접 지켜보듯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미스터리가 취약한 점이나 많은 챕터가 오픈된 엔딩으로 처리된 점이 다소 아쉬웠지만,

주조연을 막론하고 모든 인물이 100% 공감할 수 있는 상황과 역할을 부여받은 덕분에

수록된 단편 중 어느 하나 심심하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다른 분들의 서평 역시 대부분 취약한 미스터리를 지적하고 있는데,

스트레스와 탐욕의 갈등 속에 자신만의 탈출구를 찾으려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은 괜찮은 텍스트가 돼줄 것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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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요 네스뵈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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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의 두툼한 분량에 꽤 익숙한 편임에도 727페이지의 무게감은 남달랐습니다. 더구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았다는 사실까지 더해져서 첫 페이지를 열기도 전에 이미 분량과 서사에 압도되다시피 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원작 맥베스를 언제 읽었는지, 제대로 읽긴 했는지조차 불분명한데다 캐릭터나 스토리 모두 상식적인 수준 밖에 기억 못하지만, 일부러 원작에 대한 정보를 구하지 않은 채 무작정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무대가 11세기 스코틀랜드에서 1970년대 가상의 도시로 옮겨졌다는 점, , 권력에 눈이 먼 왕 맥베스는 능력과 매력을 겸비한 특공대장으로, 맥베스를 부추겨 피의 향연을 벌이게 만든 레이디 맥베스는 야망 넘치는 카지노 업주로, “맥베스가 왕이 되리라!” 예언했던 여신 헤카테와 세 마녀는 도시를 지배하는 마약상으로 변신한 점은 초반 작가의 말과 각주를 통해 본의 아니게 예습(?)할 수 있었습니다.

 

불행한 고아 출신에 약물중독자였던 맥베스는 경찰사관생도를 거쳐 특공대장에 이릅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카지노 업주 레이디의 연인이기도 한 그는 25년간 도시를 지배했던 부패한 경찰청장 사후 조직의 3인자에 등극합니다. 하지만 맥베스가 경찰청장이 될 것이다.”라는 마약상 헤카테의 말에 현혹된 레이디로부터 신임 경찰청장을 제치고 도시 권력의 정점에 서야 한다.”는 부추김을 받은 맥베스는 처음엔 다소 소극적이었지만 첫 번째 피맛을 본 뒤로 광기 어린 폭주를 시작합니다. 수많은 인물들이 무자비하게 제거되면서 맥베스의 지위는 점차 상승합니다. 레이디로부터는 광기의 에너지를, 마약상 헤카테로부터는 마약과 폭력을 제공받은 맥베스는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채 폭주하지만 그의 정점은 너무나도 짧고 허망했습니다.

 

맥베스는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존재들을 잔인하게 제거한 것은 물론 마약에 취해 악몽에 시달리는 명백한 악당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맥베스에 대한 레이디와 헤카테의 평가는 전혀 다릅니다. 레이디는 그를 용감하고 가차 없는 행동주의자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한 독기가 없고, 이른바 정의를 사랑했고 남들이 정한 원칙을 충실히 지키는 인물”(p156~157)로 여겼고, 마약상 헤카테는 사랑에 홀딱 빠진 마약쟁이 겸 도덕주의자”(p188)라고 평가합니다. 실제로 맥베스는 작품 내내 다중적인 캐릭터를 발산합니다. 탐욕스런 살인자이자 유년기의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마약과 악몽에 시달리는 가련한 인물이기도 하며, 또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죽인 인물들에 대한 지독한 회한에 빠지는 인물 등 단지 권력욕에만 매달리는 악당보다는 상처 입은 처연한 캐릭터라고 할까요?

 

어쩌면 맥베스에게 중요한 건 권력이 아니라 레이디를 향한 사랑이 전부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처음과 끝이었고 그의 탄생이자 삶이자 죽음이라는 표현대로 그의 폭주는 레이디 때문에 시작됐던 것이고, 그의 몰락 역시 레이디의 파멸과 부재(不在)에서 비롯됐기 때문입니다. 레이디를 기쁘게 하기 위해 권력투쟁과 살육전에 나섰지만, 레이디가 망가지기 시작하면서 깊은 혼란에 빠지거나 과도한 광기를 증폭시켰고, 레이디가 자신을 떠난 뒤로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는 꼴을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

 

원작과 무관하게 한 편의 스릴러로서의 맥베스의 미덕은 별 5개도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해리 홀레 시리즈에서 맛봤던 지독한 폭력과 우울감은 여전했고, 깊은 울림과 능구렁이 같은 매끈함을 선사하는 요 네스뵈의 필력도 곳곳에서 감지됩니다. 늘 비 또는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인 채 마약, 폭력, 살인, 부패경찰이 지배하는 도시 속에서 각자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이 벌이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그 자체로 페이지터너입니다.

 

다만, 0.5개를 빼게 만든 딱 한 가지 아쉬움은 주인공들의 변화에 관한 설명이 많이 부족했거나 설득력이 약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레이디의 부추김 때문이었다 해도 능력과 매력을 겸비한 특공대장 맥베스가 스스로 권력투쟁과 살육전에 뛰어드는 계기는 읽는 내내 목에 걸린 가시마냥 설득력이 약해 보였습니다. 애초 그는 권력엔 조금도 관심 없는 철저한 현장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도 마다하지 않던 레이디도 중반에 갑자기 캐릭터가 변하는데, 물론 그럴 만한 사건이 있긴 하지만 다소 설명이 부족하거나 비약이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두 주인공의 변화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인데, 다 읽은 지금까지도 ?’라는 질문이 여전히 제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대표작을 현대 소설로 재탄생시키는 호가스 셰익스피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출간됐는데, 찾아보니 반갑게도 그 목록 가운데 길리언 플린의 이름이 눈에 띄었습니다. 더구나 집필한 작품이 햄릿이라니 더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작품은 몰라도 길리언 플린의 햄릿만큼은 꼭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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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아델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이현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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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가을에 읽은 넬레 노이하우스의 끝나지 않는 여름이후

거의 2년 만에 접한 서구권 미스터리 작품입니다.

아르테의 포스트(‘관능뿜뿜! 여성 소설 4’)를 보곤 호기심이 발동해 찾은 작품인데,

‘12번째 공쿠르상 여성 수상 작가라는 타이틀과 함께

해당 수상작인 달콤한 노래가 심리스릴러라는 점도 제 구미를 자극한 대목입니다.

여성작가가 쓴 여성에 대한 관능(적인)소설”, “현대판 보봐리 부인’.”,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욕망에 관한 절망적 보고서라는 평에서 엿볼 수 있듯

이 작품의 핵심코드는 여성의 성적 욕망입니다.

 

35세의 아델은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신문사 기자로,

다정하고 유능한 의사 남편 리샤르, 3살 아들 뤼시앙과 함께 파리의 부촌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평온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성의 힘으로는 떨쳐내기 어려운 본능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끝없는 성적 욕망입니다.

스스로 나 자신보다 더 힘센 어떤 게 날 움직인다.”고 고백할 정도로 통제불능인 그 욕망은

아델로 하여금 끝없이 남자들을 수집하게 만드는데,

문제는 그 욕망이 상대를 가리지도 않을뿐더러 결코 채워지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아슬아슬하던 아델의 욕망의 폭주는 어느 날 갑자기 멈춰버립니다.

한없이 따뜻하던 남편 리샤르가 그녀의 욕망의 실체를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작품에 관심이 갔던 것은 원초적 호기심보다는

과연 작가가 아델이라는 여자와 그녀의 통제 불능인 성적 욕망을

비슷한 소재의 전작들과 어떻게 다르게 그렸을까, 라는 남다른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좀더 아델이 주체적이기를 바랐고, 그녀의 욕망이 1차적 본능에 그치지 않기를 바랐고,

, 결과적으로 그녀의 욕망이 기성의 담론을 뛰어넘어 자립적으로 그려지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델은 저의 바람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는 캐릭터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놈저놈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상대를 고릅니다.

하지만 그 욕망의 정체가 단지 육체적 갈망인지, 마조히스트 또는 새디스트적인 탐욕인지,

(좀 억지스럽긴 해도) 자아의 실현을 위한 몸부림인지 통 모호하게 보였습니다.

, 욕망 실현에 가장 방해(?)가 되는 남편과 아들에 대한 아델의 태도 역시

어딘가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이거나 구태의연하게만 보입니다.

가령, 현실적인 이유(돈 잘 버는 의사 남편) 때문에 내재된 욕망을 억압하고 결혼을 택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욕망이라는 걸 깨닫고 주체적인 삶을 선택했다면

이 작품이 은폐되고 다뤄지지 않은 여성의 성욕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는 소설.”이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이 충분히 납득이 됐겠지만,

작품 속 아델은 결국 욕망 대신 현실을 택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오픈된 엔딩이긴 해도) 그녀의 마지막 선택이 나름 주체성을 띄긴 했지만

읽는 내내 이렇게 쉽게 포기할 욕망이었나?’라는 의문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 “‘야한소설로 느껴질 수 있지만 읽을수록 슬퍼지는 건 왜일까요?” (아르테 포스트),

아델의 섹슈얼리티 속엔 아주 슬픈 무언가가 있다.” (리베라시옹),

그녀의 정원에 쾌락은 없다. 슬픔만 있을 뿐.” (뒷표지 홍보카피)

유독 아델의 슬픔을 강조하는 한 줄 평이나 카피가 많았는데,

아델의 욕망 자체가 불분명하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그 슬픔을 체감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더불어, “섹스, 거짓말, 배신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이 소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작가 본인의 코멘트도 다소 당황스러웠는데,

어디에서 어떤 색깔의 사랑을 읽어야 했던 건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미혼이든 기혼이든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욕망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여러 조합 중 가장 불행하거나 상대적으로 억압받아온 것은 당연히 유부녀일 것입니다.

아델을 통해 결혼에 묶였지만 여전히 활화산 같은 욕망을 지닌 유부녀를 그리려 했다면

19세기와 20세기에 그려진 비슷한 처지의 주인공들과는 조금은 달라야 했다는 생각입니다.

욕망의 근원은 비슷할지 몰라도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과정이나 엔딩만큼은

이전 세기의 주인공들보다는 조금은 더 진보적이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아델에게서는 이전의 주인공들의 그림자 이상의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다소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레일라 슬리마니의 필력에는 나름 관심이 생긴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2016년 공쿠르상 수상작이자 심리스릴러인 달콤한 노래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아기가 죽었다. 단 몇 초 만에.”라는 첫 문장부터 불온한 기운을 내뿜는 달콤한 노래

과연 어떤 색깔의 심리스릴러일지 사뭇 기대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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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탄의 문 1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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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정보관리회사, 일명 사이버패트롤에서 아르바이트 중인 대학생 고타로는

같이 일하던 선배가 노숙자들의 연쇄실종사건을 조사하다 실종되자 직접 그를 찾아 나선다.

선배가 실종된 장소로 추정되는 한 유령 빌딩에 숨어든 고타로는

그곳에서 옥상의 조각상이 움직인다는 괴소문을 확인하러 온 전직 형사 쓰즈키와 마주친다.

도시의 어둠 속, 거대한 날갯짓 소리와 함께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은

현재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문의 연쇄살인사건과 연결되고,

고타로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의 힘을 빌려 직접 진상을 밝히기로 결심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미미 여사의 작품은 현대물과 시대물을 가리지 않고 믿고 읽는 편입니다.

특히 모방범으로 일본 미스터리에 입문한 저로서는

그녀의 사회성 짙은 서사가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지금껏 거의 실패(?)한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책읽기를 경험했습니다.

인상적인 표지와 제목으로 유명한 에도 시리즈를 비롯한 시대물 미스터리는

판타지와 미스터리의 매력까지 잘 배합돼서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별미 같은 작품들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소(솔직히... 아주 많이) 낯설고 당황스런 느낌을 피할 수 없었는데,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에도 시리즈에서나 볼 법한 판타지가 현대물에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미 여사라고 해서 현대물 판타지를 쓰지 말란 법은 없지만,

예상치도 못한 뜻밖의 전개에 제가 생각해도 과할 정도의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일단 초반부터 여러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집니다.

교살 후 희생자의 발가락이나 손가락을 절단하는 연쇄살인사건,

주인공 고타로의 이웃집 여학생이 연루된 학교 내 왕따사건,

그리고 고타로가 소속된 사이버패트롤에서 감지한 노숙자 연쇄실종사건 등이 그것입니다.

고타로는 노숙자 연쇄실종사건을 조사하던 선배가 실종되자 그의 흔적을 뒤쫓게 되고

오래전부터 방치돼온 한 유령빌딩 인근에서 유력한 단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편, 고타로와 함께 투톱 주인공을 맡은 전직형사 쓰즈키는

유령빌딩 옥상의 괴물 조각상이 저절로 움직인다는 이웃 노파의 진술을 듣곤

형사로서의 촉을 발동하여 남몰래 조사를 진행하던 중 심상치 않은 상황을 목격합니다.

두 사람은 운명처럼 유령빌딩에서 조우하게 되고,

그곳에서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비현실적인 존재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사실, 초반에 그 비현실적 존재를 목격한 소녀와 노파 이야기가 나올 때만 해도

뭔가 지극히 현실적인 트릭이 깔려있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왜냐하면... 미야베 미유키니까...’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때문이었는데,

진짜 비현실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것은 물론 또다른 비현실적 존재까지 고타로 앞에 나타나자

그때부터 마치 어울리지도 않은 옷을 억지로 입은 듯한 불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 ‘정령’, ‘다른 영역(세계)’, ‘테두리’, ‘시원(始原)의 대종루를 수호하는 전사

명백한 판타지 아이템들이 등장하면서 난독의 증세까지 겪게 됐는데,

그런 탓에 1권은 어찌어찌 다 읽었지만 2권은 계속 읽을지 여부를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2권에서는 (1권의 엔딩으로 미뤄보아) 고타로와 쓰즈키가 비현실적인 존재의 힘을 빌려

연쇄살인사건, 인터넷의 폐해 등을 해결하는 이야기가 전개될 것으로 보이는데,

비현실적인 존재에 대한 소화불량 상태에서 더는 몰입하기 어려울 것 같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판타지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닌데,

다른 세계의 존재가 등장하는 판타지와 현대물 사회파 미스터리의 조합

제겐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서사인 것 같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이 작품은 (제가 못 읽은) ‘영웅의 서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인 듯한데

그 작품의 소개글을 찾아보니 역시 저와는 인연이 아닌 작품으로 보입니다.

 

이 서평은 혹평이 아니라 취향이 달라 소화하지 못한 사연입니다.

영웅의 서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또 미미 여사 특유의 판타지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비탄의 문역시 충분히 열광하며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막 출간된 작품이라 한두 달 쯤 지난 뒤에 다른 분들의 서평을 찾아 읽으려고 합니다.

그 서평들 속에서 제가 미처 찾아내지 못한 미덕을 발견한다면

그때라도 비탄의 문에 다시 한 번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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