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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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세먼지 수치 검색하듯, '알라딘'에도 짬 나면 접속합니다. 책 사려는 목적이라기보다, 책 덕후 알라디너들은 어떤 책을 읽을까 궁금해서 기웃거리는 게죠. 그렇게 알게 된 이름, '이언 매큐언.' 소외감을 느낄 만큼, 이미 많은 책덕후끼리 공유하는 스타 작가였더라고요. '책덕후들이 이토록 극찬하는 작가인데, 나도 입문해볼까?'하며 읽은 『솔라(Solar)』는 2010년대에 읽은 소설 중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이언 매큐언'을 더 알고 싶어서, 불과 두세 달 만에 그의 작품 다섯 편을 찾아다녔네요. 『넛셀』의 상상력, 『첫사랑 마지막 의식』의 대담함, 『칠드런 액트』의 독창성, 다 흡족했지만 그중 재미 면에서 한 권을 꼽으라면 『 Solar 』를, '걸작' 소리가 절로 나는 한 권을 꼽으라면 『어톤먼트(Atonement)』를 고르겠습니다. 500여 페이지의 소설을 한자리에서 새벽 4시까지 읽었습니다.



소설책 뒷면에 세 줄로 『속죄』의 내용을 압축해놨던데, 옮겨 보겠습니다.

시간이 멈춰버린 뜨거운 여름 오후,

소녀의 오해가 불러온 젊은 연인들의 비극,

그리고 이를 되돌리려는 한 소설가의 60년에 걸친 지난한 속죄

『속죄』 출판사 홍보 문구 중

얼핏 위 문구만 보면 한 캐릭터의 속죄, 치매로 잊거나 죽음으로써 밖에 면죄부 얻을 길 없는 죄책감이 주된 내용의 소설로 보입니다. 네, 그렇기도 합니다. 감수성이 유난히 예민하고 조숙한 소녀 브리오니가 '거짓말(이었다고 정작 자신은 생각하지 않으나), 거짓 증언'으로 친 언니의 남자친구를 강간범으로 몰아세운 후 평생 속죄하며 소설로서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분투하는 줄거리가 소설의 한 축이니까요. 실제 '면죄부'는 자가 발행 수준으로밖에 이뤄질 수 없어요. 브리오니가 사죄해야 할 친언니와 그 연인 로비는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각각 패혈증과, 폭격으로 아주 오래전 사망했거든요. 언니는 20세기 중반에서는 드물게,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한 여학생이자 남자친구를 범죄자로 전락시킨 가족(정확히는 브리오니)와 의절하고 외롭게 살았습니다. 로비는 가난한 가정부의 아들이었지만 의대 입학을 앞둔 수재였지만 브리오니의 증언으로 인생행로가 암흑 나락으로 곤두박질 칩니다. 소설의 2부에서는 로비가 그 참혹했던 전쟁터에서 연인과의 재회를 꿈꾸며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펼쳐지지요. 이언 매큐언이 영국 왕립 전쟁박물관 문서관리소를 드나들며 1940년 당시 활동했던 군인과 간호사들의 서신, 일기, 회고록 등을 자료 삼아 쓴 만큼, 현실감 넘치는 묘사가 압도적입니다. 『속죄』를 읽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던케르트』를 다시 본다면, 사지에 몰려 있는 영국 군인들 속에서 로비를 찾아내게 될 것 같습니다.



"1999년"이라는 마지막 챕터, 즉 소설의 4부에서 독자는 브리오니가 결코 언니와 로비에게 사과하거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음을 알게 됩니다. 속죄하고자 60년간 소설을 써왔다지만,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할까 가명 등 여러 소설적 장치를 쳐 놓은 까닭에 정작 쓴 사람 빼고, 누가 알까요? 사실은 로비가 강간범 아닙니다. 엉뚱한 사람 인생 망친 거예요. 라고 누가 알까요?

게다가 브리오니는 계속 강조합니다. 자신이 살아 생전 그 속죄의 소설을 출간할 수 없는 정치적인 이유들을. 강간 당한 당사자인 사촌 언니 롤라와, 그녀를 강간했지만 '로비'가 대신 누명을 썼기에 승승장구한 진짜 강간범은 놀랍게도 결혼해서 반평생 잘 살고 있거든요. 그것도 엄청난 부호로서. 까딱하면 소설가인 브리오니가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할 수 있으니, 살아 생전 원고가 출간되지 않는답니다. 속죄일까요? 누구의 속죄가 필요한 걸까요?

『속죄』에는 주옥같은 문장과 마치 캐릭터의 머릿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치밀한 심리 묘사가 매 페이지마다 펼쳐지는데, 500페이지 두께라는 걸 잊고 필사하고 싶어지기 까지 했습니다.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세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그가 속죄 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속죄』 5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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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1-04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래 전에 절판된 <위험한 이방인>
빼고는 국내에 나온 이언 매큐언의 책들
을 모두 섭렵했는데, 역시 대단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솔라>가 제일 재밌었습니다.
진지근엄해 보이는 작가 스타일과 달라서
그런가 봅니다.

2019-01-04 1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 신경인류학으로 살펴본 불안하고 서투른 마음 이야기
박한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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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이름만 보고 책 집어 드는 건 수험용 학습지 이후로 없었는데, 요새 내가 재밌다고 읽은 책들의 교집합이 뒤늦게 눈에 들어오니 그 이름, '휴머니스트.' 읽어 내려가다 보니, '휴머니스트' 출판사 책이 많네요. "팔리는, 팔릴 만한" 책 제목을 뽑아내는 편집자들의 능력이야 아서 클라크(였나요?)가 아부했다는 '신의 영역'에 속할 텐데요, 특히나 진화 생물학, 진화 심리학 분야의 책 제목은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좋은 뜻에서요. 제목만 봐도 읽고 싶어지게 만들거든요. 『우리 모두는 2% 네안데르탈인이다』라는 데,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라는 데 읽지 않고 배겨 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후손이 있겠습니까? 동의하지 않으세요?



목차를 눈으로만 훑어도 이건, 안 읽고 못 배길 책이 맞습니다. 짝짓기(mating) 전략을, 인간의 자기 기만(self-deception) 본능을, 양가적 감정을 일으키는 여성의 유방을 이야기한다는데 읽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젯 밤 잠들기 전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정신과 전문의이자 신경인류학자라는 독특한 이력의 박한선 저자가, 마치 대학 교양강의를 전개하듯 쉽고 친절하게 신경인류학과 연관된 과거와 최신, 논문들을 정리하고 우리 삶과 연결지어 화두를 던져줍니다. 전중환 교수의 『오래된 연장통』과 함께 읽어 보기 추천합니다.




이 책에서 인용한 책들


"원더박스," "협력의 진화," "북아메리카 원주민 트릭스터 이야기," "비맨" "이타적 인간의 출현," "타고난 반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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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선 2019-01-03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ㅅ쇼

밑줄긋는시간 2019-03-10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티난다
 
감염된 독서 - 질병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
최영화 지음 / 글항아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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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서점에서 밀어주던 신간, 책덕후들이 적극 추천하던 책, 『감염된 독서』를 2018년 끄트머리 한가해진 마지막 주에 읽었습니다. "질병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라는 부제가 아니었던들, 지레짐작 '책 읽기 권장' 서평 모음집으로 착각할 뻔했습니다. 이 책은 감염관리 분야 국내 권위자인 최영화 교수(아주대 의대)가 썼습니다. 처음부터 단행본 출간을 목적으로 쓴 글이 아니라, '아주대 의료원 소식지'에 쓰던 칼럼 5년 치를 모아 묶어냈답니다. 분명 원고 마감일과 얼굴 모를 독자들이 주는 압박감도 컸겠지만, 제가 상상하기로 최영화 교수는 신바람이 나서 글을 써 내려갔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요? 글쓰기야말로 그녀가 좋아했고, 좋아하고, 또 잘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아마 최영화 교수는 이 칼럼들을 쓰면서 감염내과 의사이자 교수, 동시에 두 형제의 엄마로서 바쁨에서 벗어나 어린 시절의 꿈을 만나고 다시 연장시켰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의사 되기를 꿈꾸지 않았답니다. 문학가를 꿈꾸기에 시집과 소설, 역사 책을 끼고 살던 문과 여고생이었는데 가족이 회유해서 의대를 목적으로 이과로 전향했답니다. 그제서야 의문이 풀립니다. '일단 의대 입학 후에는 『감염된 독서』에 등장하는 그 숱한 고전을 꼼꼼히 읽어나갈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을 텐데, 이미 10대 시절 다 읽었구나'하며 대략 그림을 그려봅니다. 어린 시절 읽었던 방대한 문학서적을 누에고치 삼아서 40대가 된 최영화 교수는 비단 뽑기, 수월하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신춘문예 응모하러 연습하듯, 『감염된 독서』에서 최영화는 의대교수로서라기보다는 문학도처럼 다채로운 문체와 형식을 시도합니다. 편지체, 보고서체, 자기독백형 일기체 등 문체가 다채롭고 매력적입니다. 어린시절부터 섭렵해온 문학작품의 탑에 더해, 의사로서의 경험이 워낙 풍부하기에 글에 힘이 있지요. 참 재미있습니다. 이 책 안 읽고, 2018년 넘어갔으면 어쨌을까 하며 신나게 읽었습니다.

최근 만난 『맛, 그 지적 유혹』의 저자 정소영 박사가 영문학자로서 소설을 '음식'을 키워드로 읽어냈다면 최영화 교수는 의학자, 그 중에서도 감염내과 전문의로서 문학작품에서 '감염병'의 징후를 포착하고 그에 대한 사람들(고통을 겪는 사람, 간호하는 사람, 병을 멀리하려는 사람 등)의 반응을 분석합니다. 역시 한 분야를 깊이 들어간 이들은 같은 작품을 읽어도 틈새 빛으로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는 거네요. 감탄하며 부러워합니다.

자, 이제 『감염된 독서』에서 제가 취하고 기억할 정보만 메모형식으로 기록해봅니다.

"내과 전공의가 되어 호흡기내과를 배정받았을 때 저는 객혈 환자를 볼 일이 가장 두려웠습니다...(중략)...아, 무섭다. 그렇지만 당시엔, 그리 먼 옛날도 아닌데, 장갑 끼고 마스크 쓰고 그러느라 꾸물대는 것은 회식한 뒤 돈 안 내려고 구두끈 매는 것만큼이나 치사하고 우스우며 소견 좁은 일이었습니다. 몸 사리지 않고 환자를 돌보는 것, 그것이 바람직한 자세였지요."

"벽엔 선홍색 피가 낭자했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저는 객혈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아요'라는 표정으로 굵은 혈관 주사를 시작했으며 피가래를 뽑아냈습니다. 마스크도 없이"

『감염된 독서』 202-3쪽.


'감염 따윈 두렵지 않아'하며 마스크 없이 객혈 쏟는 환자를 치료했던 의료진, 그래서 최영화 교수가 어떻게 되었느냐고요? 네, 결혁에 걸렸었지요. 이 대목에서 저는 '생의학'이 어쩌구저쩌구해도, 해당 지역의 정서 사회문화적 풍토에 따라 그 치유방식이나 몸에의 접근이 꽤 차이 나는구나싶어 재미있었어요. 100여년 전 제중원 수술 장면 사진 속 의사들이 맨손으로 집도하는 모습과 겹칩니다.

최영화 교수를 멘토로 모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르침, 후학 양성에 뜻을 세우고 재미도 느끼시는 이 분은 한센병 강의하는 고충을 다음과 같이 토로합니다.

저는 감염내과 의사로 제가 강의하는 대다수의 감염병을 가까이서 겪고 치료하지만 나병만은 본 적도 치료한 적도 없으면서 학생들 강의는 그럴듯하게, 마치 본 것처럼, 뇌와 손이 따로인 채로 열심히, 해마다 하고 있습니다.

『감염된 독서』 143족

오늘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으면서 현실이었던, 그것도 죽고 싶을만큼 고통스러운 현실이었던 환자들과 그 고통을 해결해보고자 했던 한 의사의 이야기를 문자로나마 전해 들으면서 소록도 한번 가지 않고서는 이 강의도 이제 그만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위의 책, 147쪽

비슷한 생각을 해 본 적이 많습니다. 최영화 교수야, 한센병이 워낙 드물어서 그랬다는 핑계라도 대려면 대겠지만 핑계거리도 없는 사람은 그 죄책감을 어찌합니까? 판을 키우면 판 위에 오르는 언어가 달라질텐데, 게을러서 늘 같은 판 위에 같은 판서나 계속하는 자의 죄책감은 어떻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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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망하지만 자신 신고, 고백합니다! 키스 해링, 예술계의 악동으로 유명한 그의 이름을 Kiss Haring으로 스펠하는 줄 알았네요. 하물며, 그가 어떤 외모의 아티스트인지 어찌 알았겠어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그의 작품이 성황리에 전시 중이라기에 궁금해서 웹서핑하다가 방금 알았어요. 키스 해링은 Keith Haring이라고 적고, 그는 딱 봐도 자유로운 기질의 예술가처럼 옷 입고 헤어스타일 꾸민다는 것을요. '예술의 폐쇄성'에 회의적이었던지라,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예술'을 부수고 거리로, 사람들에게로 가져왔다는 그 행적과 어울리는 이미지의 외모입니다.


사진출처: ticket.interpark.com



이왕 무식을 고백한 김에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저는 "키스 해링 탄생 60주년 기념 전시"라기에 그가 여전히 활동 중인 아티스트일 거라고 추측했는데,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20세기 말 타계했네요. 그러니 이 무식을 보충하고 실제 키스 해링의 아이콘을 비롯 작품을 직접 보기 위해서라도 꼭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 다녀와야겠습니다! 3월 17일까지라지만 이왕이면 1월 중, 평일 관람객 적을 타이밍을 노려서! 키스 해링과 친해지고 오기!



사진출처: ticket.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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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손님
히라이데 다카시 지음, 양윤옥 옮김 / 박하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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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 (haiku)"를 검색해봅니다. 원했던 답만큼 시원스러운 답변은 아니어서, 여전히 궁금합니다. "하이쿠 소설"이 뭔지. 히라이데 다카시가 쓴 『고양이 손님』이란 소설을 다 읽었는데도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 겁니다. 평론가들과 번역가가 쏟아낸 말의 향연 중에 "이 작품은 일종의 하이쿠 소설이다!"라는 표현이 있어서 찾아본 게지요. 다 보여주지 않고, 절제된 언어와 표현으로 계속 몸체를 감추려 하면서 유혹하는 소설이라고 제 식대로 정리해버렸습니다.

제목보고 짐작은 했는데, 『고양이 손님』에는 고양이를 제 자식처럼 예뻐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네, 실은 그 주인공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 이뻐하다 못해, 별명까지 '딸랑이'로 붙여준 고양이 '치비'는 그들의 고양이도 아닙니다. 같이 세 사는 처지의 가족에게 입양된 하얀 고양이이거든요. 그래서 그냥 "고양이"가 아니라, 『고양이 손님』일 것입니다. 제목이. 손님으로서의 '치비'는 도도하게, 애교 부리는 법도 없이 부부의 집을 들락이면서 마련해 준 잠자리에서 잠도 자고 갑니다. 부부는 '치비'더러 '미인'이라고 하며, 유난히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그 도도함이 못내 서운하지요. 그래서 고양이는 오로지 자기 주인 앞에서만 그 모습을 다 드러내는 법이라며, 주인 아니라 옆집 사는 이웃임을 자위하지요.

『고양이 손님』은 그 줄거리만 놓고 보면, 특별할 게 없는 내용 - 세 들어 살게 된 집에서 다른 세입자가 키우는 고양이가 제 집에 드나들다 보니 정이 옴팍 들었다가, 고양이가 죽었다 해서 많이 슬퍼한 내용- 인데도, 읽고 나면 가슴 한 수석에 아련한 감동이 남습니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보니, 지칭하는 단어가 고양이일 뿐이지 소설에 등장하는 부부는 고양이 '치비'를, "운명"이라는 단어를 번복해 쓰면서 하늘에서 보내준 자기 아이들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처럼 대하거든요.

'왔다, 돌아갔다'라고 했던 말투도 어느새 '돌아왔다, 가버렸다'라는 말로 바뀌었다. 둘이 함께 외출했던 날에는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면 어두침침한 현관 앞 작은방에 앞발을 가지런히 맞추고 부모 기다리던 아이처럼 맞아주는 일도 있었다

- 우리 고양이지.

라고 말하는 아내는 우리 고양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층 더 자신에게 보내준, 아주 먼 곳에서의 선물이라고 굳게 믿는 기색이었다

『고양이 선물』 85쪽 본문

소설 속 화자인 '나'보다도, 그의 '아내'가 고양이 '치비'에게 보이는 감정의 복잡한 선들은 분명 아기 키우는 엄마의 그것입니다. "나는 공연히 껴안으려 하지 않아. 치비를 자유롭게 놀다 가게 해줄 거야."(48쪽)면서 치비가 놀고 쉬고 먹을 수 있는 온갖 편의를 제공하며 예뻐합니다. 심지어는 밥상 앞에서 '갯가재'의 살을 발라 입에 넣어주기까지 합니다. 그녀가 입에 '갯가재' 넣어주는 속도에 발끈한 고양이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손을 물자 "이제 절교야!"하면서 화를 내는 모양새가, 꼭 '중2병' 아이 키우는 엄마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하루는 그 '아내'가 '치비'를 위해 전갱이를 구워 놨는데 치비가 먹고 가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차에 치여 죽었다더군요. 그들은 원래 '치비'의 주인이었던 이웃을 찾아가 조문하고, 꽃을 공양하겠다고 성묘를 부탁합니다. 하지만 이웃집은 냉랭한 반응을 보이는데요. 다시금 '치비'를 자식으로 생각하는 그 부부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집 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내 자식이나 다름없는 아이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는 참에 알지도 못했던 그 아이의 또 다른 반쪽의 삶을 갑작스럽게 코앞에 들이댄 것이다. 성묘랍시고 내 집 정원에 불러들여 또 한 명의 '엄마'가 울기 시작하는 모습은 차마 지켜볼 수 없다

『고양이 손님』 126쪽

이제서야 어렴풋이 이해됩니다. 소설의 말미에서 주인공 부부는 치비가 죽은 지 10년이 지나도록, 치비가 죽은 날짜를 기억하고 슬퍼하는데 갑자기 3월 11일이 아니라, 3월 10일에 치비가 죽었다는 계산을 하더니 그에 집착하거든요. 3월 10일 밤 10시부터 11일 밤 11시까지, 죽기 전 치비가 "마지막 하루를 평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냈"을 텐데 그 하루가 어땠는지 궁금해합니다. 그러면서 소설이 끝납니다. 허무했어요. 처음엔. 그러나 다시 곱씹어 보니, '치비'를 "하늘이 보내준 선물" 혹은 "운명," 다시 말해 자신들의 자식으로 생각했던 부부에게는 고양이가 죽기 전 하루 동안 무엇을 했는지 10년이 지났어도 궁금해질 터이겠지요. 『고양이 손님』은 그래서 부제를 '아이 없는 부부가 자식처럼 사랑한 고양이'로 지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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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1-01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2019-01-01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