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김형경 '성에' 윤대녕 '누가…' 후보 올라
2004 동인문학상 제5차 심사독회
성에 - 性의 '동물사회학적 접근' 신선
누가 걸어간다 - 환상 개입시켜 현실 부조리 풀어
'방에 관한 기억' 등 여섯작품은 검토중



▲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인 김화영 박완서 이청준 김주영 유종호 이문열 정과리씨(왼쪽부터)가 심사독회에 앞서 송죽헌 앞뜰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창종기자 cjkim@chosun.com
“적(敵)이 있어야 소설이 잘 써집니다. 깨부수고 싶은 게 있어야….”(김주영) “저도 몇 년간 공격을 당하다 보니 소설이 잘 보이데요.”(정과리) “아침에 일어나면 ‘에이’ 하고 버리지만 전날 밤 반주라도 한잔 걸치면 (적들의) 이름을 칠판에 적어놓고 (소설로 형상화할) 연구까지 해요.”(이청준)

지난 7일 오전 서울 운니동에 있는 한식집 송죽헌에서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들은 이런 ‘고백적 대화’를 주고받으며 차를 마셨고, 올해 제5차 심사독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김형경 장편 ‘성에’(푸른숲), 윤대녕 소설집 ‘누가 걸어간다’(문학동네)를 곧바로 후보작에 올렸다.

때론 적개심조차 문학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털어놓는 경지일까. 대나무가 마당에서 흔들리자 창가 쪽이 봄햇살로 화사했다.

우선 ‘성에’는 긍정 평가와 비판이 적당히 섞였다. “박진감을 갖고 주의 깊게 읽었다. 분석심리학이나 동물사회학을 인간이 사는 모습으로 환원시키는 노력이 각별했다.”(박완서) “성의 박물지적 탐험을 인간 사막에 조명한 소설이다. 성을 생리현상, 종족보존본능, 문화적 환상이라는 세 분석틀로 접근했다.”(정과리) “성의 쾌락 에너지와 죽음 에너지가 맞물려서 힘을 발휘했다.”(김화영) “사랑의 공간을 인위적으로 마련하고 존재를 탐구한 후에야 개별적 현상이 보인다는 것을 성으로 실험했다. 장용학의 ‘원형의 전설’(1962)에 나오는 공간을 닮았다.”(이청준) “한꺼번에 다 읽었다. 굉장히 센 물살을 만난 것 같았다. 검불과 흙을 쓸어내듯 강한 힘이 있었다.”(김화영 박완서)

심사위원들은 비판 의견도 냈다. “소설에 드러내는 많은 지식을 오히려 극복해야 한다.”(박완서) “작가의 강한 에너지가 조절돼야 한다. 소설이 강의는 아니다. 공부한 것이 무르익어 나오면 좋을 것이다.”(김화영 이청준 김주영)

윤대녕의 ‘누가 걸어간다’도 평가와 비판이 섞였다. “아노미(anomie) 상태에 빠진 현대인은 상호이해가 불가능하므로 인간관계가 피상적으로 흐른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호소력과 현실감 부분이 아쉽다.”(유종호) “일상 속에 환상의 난입이 윤대녕 소설의 특징이다. 일상으로부터의 이탈을 그려오던 과거와는 달리 이번 소설은 환상의 난입을 통해 현실의 부조리와 살기 힘듦을 비추고 있다. 전반적인 개연성의 문제는 있다고 본다.”(정과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일련의 장편에 비해 오랜만에 낸 단편집이 돋보였다. 늘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단점이면서, 일관되게 다루는 한 가지 주제를 갖고 있다는 점은 큰 장점이기도 하다. 해체되는 가정이기 때문에 그런지 오피스텔을 주 무대로 만나는 사람들의 우연한 조우에 얽히는 주제를 우리 문단에서 지루할 정도로 끝까지 쥐고 있는 드문 작가다. 다른 한편 시적(詩的) 소설의 대표적 작가라고도 할 수 있다. 구성이 무리라는 인상은 있다. 그러나 주제를 대변하기 위한 구성일 것이다. 그런 세계의 형성이 나쁘지 않다. 이번 작품은 상당히 잘 썼다고 봤다. 자칫 통속으로 흐르는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김화영)

심사위원회는 서성란 소설집 ‘방에 관한 기억’(문이당), 이응준 소설집 ‘무정한 짐승의 연애’(문학과지성사), 한승원 소설집 ‘잠수거미’(문이당), 강석경 장편 ‘미불’(민음사), 권지예 장편 ‘아름다운 지옥’(전 2권·문학사상사), 강영숙 소설집 ‘날마다 축제’(창비) 등 여섯 작품을 다음 독회에서 계속 검토하기로 했다.

이날의 화두는 여전히 ‘작가의 바보스러움’이었다. 그것이 바로 미학적 전략이요, 작가정신의 미덕인 것이며, 고급한 호소력이란 뜻이다. “작가는 할 소리 다 하면서도 스스로는 어리버리해야 하는데….”(이청준) “소설가가 깨닫기 시작하면 읽기 싫어지지요.”(김화영)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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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4-05-14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틈이 있는 사람이...좋죠...
 

미켈란젤로 신화의 거미줄을 걷어낸다
미켈란젤로/앤소니 휴스 지음/남경태 옮김/한길아트

▲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1475~1564)는 생전에 이미 엄청난 유명세를 누렸고 당대에 각광 받았다. 그가 죽은 뒤 장례식이 성대하게 거행됐고 그의 시신을 서로 가져가려고 피렌체와 로마가 경쟁했다. 살아 있을 때 나온 전기만 3권. 그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미켈란젤로 연구는 셀 수가 없을 정도다. 저자는 이처럼 유구한 신격화의 역사를 갖고 있는 위대한 인물을 땅으로 끌어내린다. 미켈란젤로를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뒤 홀로 고독하게 걸작을 만들어낸 천재로 과장하지 않는다.

대신 수많은 도시와 공국이 세력다툼을 벌이는 한편, 미술이 교황·귀족·상인들의 의뢰를 받아 제작되던 시대 상황 속에서 활약한 예술가의 초상을 자세하게 그려낸다.

돈과 권력, 정치의 소용돌이 안에서 그의 걸작들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배경과 과정을 풀어가는 동시에 괴팍하고 야심만만했으며 오만했던 미켈란젤로를 독자 앞에 내세운다.

때문에 책 속에는 창작을 둘러싼 예술가의 형이상학적 고뇌보다는 작품을 의뢰받고 제작하기까지의 줄다리기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예를 들어 명작 ‘다비드’가 얼마나 훌륭한 조각인지에 대한 찬사나 감상보다는 제작회의에 대한 기록, 설치를 둘러싼 일화 등을 꼼꼼하게 풀어나간다.

(정재연기자 whauden@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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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5-12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어보고 싶은데(한길사의 아트 앤 아이디어 시리즈 모두), 26000-28000이라는 가격때문에 아직 사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야, 달리, 렘브란트, 샤갈 등등 보관함에 넣은지 한참 지났는데.. 150권 예정이라는 군요. 싱가포르에서 인쇄하여 도판의 질이 아주 좋다고 합니다. 혹시 사보시게 되면 리뷰 좀 꼭.. ^^;;

파란여우 2004-05-12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능을 인정받으면 돈이 생기고 돈이 모아지면 권력과 명예를 쥐게 되는것이 순서입니다. 그것을 초월한 명예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인간사의 일이라고 여깁니다. 역시 책값이 만만치 않군요..저도 님의 리뷰를 대신 기대해도 되나요?^^

stella.K 2004-05-12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혹시 '이주의 리뷰'에 당선이되서 당첨금이 생기면요. 그러기 위해선 판다님과 파란여우님이 밀어주세요. ㅎㅎ
 

중국 후한의 王符가 쓴 정치 사상서
왕부 지음/임동석 역주/건국대학교 출판부

▲ 잠부론
‘잠부(潛夫)’란 ‘잠겨 있는 사내’, 즉 세상의 벼슬길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오로지 독서와 저술로 일관한 사람을 말한다. 환관과 외척의 농단으로 민중의 고통이 극심했던 시기, 그는 고향에서 붓을 들고 세상을 포폄했다.

중국 후한의 왕부(王符·85~162)가 쓴 이 사상서는 왕충의 ‘논형’, 중장통의 ‘창언’과 더불어 당시의 3대 저작 중 하나다. 정치의 득실, 관리의 사치와 부패, 형법제도의 불공정성과 백성의 고통 등을 신랄하게 비평하고 있는 이 책은 성씨의 유래와 분파 등 귀중한 자료들이 수록된 동양고대사 전공자의 필독서이지만 이제서야 처음으로 완역됐다.

“제왕으로서 존경해야 하며 하늘도 심히 사랑하는 바는 바로 백성이다.” “아래에서 비루한 자를 데려오면 임금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한다.” 1900년 전 고대인의 글에서 이처럼 날카로운 현실인식이 담긴 정치평론을 접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급기야 “위정자는 개개인의 행복을 적극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사상으로까지 이어진다. 대안도 분명하다. 친인척을 배제한 능력 위주의 인사, 농업생산의 신장과 민생안정…. 그는 관상이나 점을 미신으로 치부했으며 오직 지혜를 바탕으로 한 부단한 학습을 통해 현자와 성인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때로 보석과도 같은 고전이 주는 향기는 현대의 시시한 저작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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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낮은 나의 밤보다 아름다운가

이우일 등 지음/청림출판

 

‘아침형 인간’이 이데올로기적 강제로 작용하는 시기, 사람들은 어설픈 규범적 선동에 불안마저 느끼곤 한다. 여기 사회 각계 인사 19명이 ‘아침형’이란 틀에 일대 반격을 가한다. 자유·낭만의 시간, 고독·젊음의 표상,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질 수 있는 감성적 시간 ‘밤’ 을 위한 항변이다.

“이젠 ‘낮잠형 인간’ ‘토막잠형 인간’이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을 듯하다. 도대체 사람들은 어떤 틀을 분류해 가둬 놓지 않으면 안 되는 족속들인가?”(이은희 연구원) “조형인간(朝型人間)을 옮겼다고 해도, 일본어의 냄새가 강하게 남아 있다. 형(型)은 자동차나 로봇에 붙여야 하는 말이지, 인격을 가진 인간에게 붙일 말이 아니지 않은가?”(박상현 미술사 석사)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오리 다리가 비록 짧지만 이어주면 걱정거리가 되고 학의 다리가 길지만 끊으면 슬픈 일이다. 만물은 제각기 나름의 타고난 본성을 따를 때 각자 모두 행복할 수 있다”는 장자의 말을 인용한다.

강용혁 한의사는 사상의학을 동원, “소음인(少陰人)들은 아침형 인간의 라이프 스타일에 체질적으로 안 맞는다”고 말한다.

“‘난 반드시 ○○해야 한다’ 같은 자신과의 약속도 싫고 규칙을 깰수록 재미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이우일 일러스트레이터) “올빼미 목을 비틀어도 밤은 반드시 온다”(신동민 일러스트레이터)처럼 자유인을 위한 속시원한 일갈이 이어진다. 그들은 또 말한다. “당신의 낮은 정녕 나의 밤보다 아름다운가?”라고.

(박영석기자 yspark@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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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진/우맘 > 폴 오스터 신간 -신탁의 밤-

[이주의 신간] 우연으로 쌓아올린 운명, 그 세겹 이야기
소설가가 소설 속 주인공으로… 짜릿한 글 맛 낸 추리적 작법

신탁의 밤/폴 오스터 글/황보석 옮김/열린책들

“세계는 내 머리 속에 있고, 내 몸은 세계 속에 있다.”

뉴저지의 뉴어크에서 가구점 집 아들로 태어난 폴 오스터(Paul Auster·57)는 무명 시절 열일곱 군데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적도 있다. 지금은 “재치 넘치는 언어, 도회적(뉴욕적)인 감성”을 통해 “동시대인들의 열망과 좌절, 고독과 절망, 강박 관념 등을 그려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해 왔다”는 평을 듣는 세계적 작가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뛰어난 연주가의 스타일과 음악적 구조 때문에 오스터의 소설을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처럼 작가가 주인공이 되는 소설가 소설은 일종의 유체이탈이다. 소설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소설 속의 주인공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극도의 리얼리즘과 극도의 작가주의를 동시에 겨냥하면서 가장 기묘한 방법으로 소설의 입체성을 획득한다.

오스터는 ‘스모크’(1996) ‘블루 인 더 페이스’(〃) ‘다리 위의 룰루’(1998) 같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거나 감독을 하기도 했다.

운명은 우연(偶然)을 먹고 자란다. 운명의 침입으로 얼룩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생은 대개의 경우 열정과 비밀의 구렁에 내던져져 있다. 우리는 때로 무작위적인 우연의 힘에 저항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 내면에 잠복한 미래의 암시를 염탐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게 글쓰기의 전부인지도’ 모른다.(287쪽)

스승처럼 알고 지내는 선배 작가 존 트로즈가 그의 삶에 엄청난 결과를 안겨줄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주인공 시드니 오어(Sidney Orr)는 아직은 크게 성공하지 못한, 서른네 살 소설가다. 아내인 그레이스 테베츠는 ‘어느 순간 와 닿는 빛의 강도와 색조에 따라 색이 변하는 눈’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다. 오어는 출판사 미술부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그레이스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까지 이른 마당이다.

오스터의 신작을 기다리는 세계 곳곳의 열성 팬들은 제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겠으나 무엇보다 스토리의 묘미가 압권이다. ‘이야기는 모든 운명의 증언이기’ 때문일까. 2003년에 발표했던 이번 장편도 대략 세 겹으로 겹쳐지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당신이 펼친 소설 속 주인공인 시드니 오어는 소설을 쓰는 작가다. 그런데 독자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것은 오스터의 소설 속에서 주인공 오어가 쓰는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닉 보언도 뉴욕의 한 출판사에서 소설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닉 보언은 1927년에 쓰인 후 원고 상태로 전해오는 어떤 소설을 읽고 있는데, 그 세 번째 소설의 제목이 ‘신탁의 밤’이다.

정리하자면, 소설①의 주인공은 소설가 시드니 오어, 소설②의 주인공은 출판편집인 닉 보언, 소설③의 주인공은 영국군 대위 르뮈엘 플래그다. 마치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에서처럼 이 세 주인공들은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전혀 다른 액자에 갇혀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 역시 우연, 운명 그리고 현재에 징후를 드러내는 미래의 검은 망토 자락에 휘둘리는 삶을 견디고 있다.

소설③의 주인공 플래그 대위는 제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박격포탄 폭발로 눈이 멀고 간질병을 닮은 발작 증세를 일으킨다. 그는 발작 도중에 미래를 이미지로 예언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얻지만, 사랑에 빠진 여인과 결혼하기 전날 예기치 못했던 발작을 일으키고 그 애인이 채 1년도 가지 않아서 어떤 행위를 할지 미리 알게 된다. 플래그 대위가 그처럼 가혹한 운명의 벼랑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독자의 궁금증은 더욱 가렵다.

이 같은 소설③을 읽게 되는, 소설②의 주인공 닉 보언은 아무런 예고 없이 11층 아파트의 건물 정면에 붙어 있는 이무기 돌이 떨어져 삶이 끝날 수도 있었다는 경험 때문에 ‘인생을 닥치는 대로 바꾸기로’ 결심한다(이 또한 대실 해밋이란 소설가의 작품 속 일화를 소설 속 작가 오어가 재창조한 것이다). 그는 직장과 아내를 버리고 전혀 낯선 도시인 캔자스시티를 향해 밤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닉 보언은 예순일곱 살 먹은 흑인 택시운전사를 만나고, 세계 유명도시의 전화번호부를 수집하는 기묘한 일에 휘말리다가 지하의 방사선 대피소에 홀로 갇히게 된다. 자, 닉 보언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스토리로 소설②를 쓰던 소설①의 주인공 시드니 오어는 아내 그레이스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돈을 좀 벌어볼 요량으로 타임머신에 관한 공상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가 퇴짜를 맞기도 하며, 중국인 문구점 주인이 안내하는 갈봇집에 가서 오럴 섹스를 경험하기도 한다. 또 존 트로즈의 아들인 제이콥이 오어의 아파트를 도둑질하는 사건과 그레이스가 아무 말 없이 외박을 하는 일도 벌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을 몰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시드니와 그레이스는 ‘옷을 반쯤 벗은 채 침대로 가려다 결국 그러지도 못한 채 바닥에 구르며’(240쪽) 격렬한 섹스에 탐닉하기도 한다.

시드니 오어가 아내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은 연역적 추론을 통해서였다. 불명확했던 과거의 애매함들에 대해 마치 현재진행형 소설을 쓰듯 특정 구도를 설정하자 모든 일의 아귀가 희한하게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시제(時制)로서 과거이자 소설 작법상의 미래였다.

▲ 폴 오스터는 문학성과 대중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 작가다. 현재 뉴욕의 브루클린에 살고 있다.
오스터의 최대 출세작인 ‘뉴욕3부작’(1986)에 나오는 주인공 퀸은 빨간 공책에 글을 썼고, 이번 장편에서 주인공 시드니 오어는 파란 공책에 글을 쓴다. 둘 다 소설가다.

오스터는 거의 예외 없이 추리적 작법을 즐겨 쓴다. ‘어디로 갔어? 어떻게 된 게야?’ 같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면서 찡한 여운이 남는 것은 이중 삼중의 상자를 뚫고 우연의 총탄 세례를 맞아가며 운명적 사랑을 껴안는 휴머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운명의 바닥에는 허무주의라는 배설구를 만들어 카타르시스를 돕는다. ‘사람은 우연한 일로 죽으며 눈먼 우연이 용서해 주는 동안에만 살아 있다’(80쪽)는….

세 겹으로 장치한 ‘소설가 소설’의 장점은 소설가와 소설 사이의 공간을 좁힐 수 있다는 점이다. 그때 수집하는 아이디어와 에피소드는 피부감각적으로 적나라하다. “나는 스스로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한다”는 오스터는 재래식 리얼리즘의 강박관념을 깨고, 대신 허구(소설)보다 더 기이(奇異)한 사실들을 채집한다.

또 하나 오스터의 작법은 ‘상자 속에서 상자 꺼내기’(차이니즈 박스)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쓰는 테크닉이다. 오스터를 오스터답게 만드는 것은, 풀면 또 나오고 풀면 또 나오는 ‘다중의 상자’라는 구조 밑에, ‘막다른 방은 없다’는 오스터 특유의 문학적 전략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뉴욕3부작’에서도 ‘방안에는 창문 없는 칸막이 방으로 통하는 문이 또 하나 있었고’(196쪽), 이번 장편에서도 소설②의 주인공이 갇히는 지하 벙커에는 ‘또 하나의 방’이 있다. 이것은 ‘그전까지 썼던 모든 것은 지금 이야기하려고 하는 끔찍한 일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287쪽)는 긴장고조 방식이다.

이번 장편은 ‘환상의 책’ ‘달의 궁전’ ‘공중 곡예사’ 등에 이어 국내에 번역되는 열다섯 번째 책이며, 황보석은 그중 아홉 권을 번역했다. 소설가 김영하 같은 오스터 매니아뿐 아니라, 오스터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독자들께도 진심으로 권해 드린다.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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