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라이프 - 우리가 꿈꾸는 또 다른 삶
쓰지 신이치 지음, 김향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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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기름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요즘, 친구들 사이에선 차를 팔아야겠다는 말을 심심찮게 듣게 된다.  물론 그 말을 실천으로 옮기는 친구는 거의 없지만 다들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과연 지금 시점에서 석유가 고갈되면 어떻게 될까?"  
모든 공장이 문을 닫고, 전기마저 끊긴 암흑세계에서 나는 살아날 수 있을까?
나는 농사 지을 줄도 모르고, 먹거리를 생산할 텃밭도 한 뙈기 없는데 무엇으로 내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 공포감이 밀려온다.  나와 내 가족의 생명과 안전을 나는 그 무엇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의존도는 얼마나 되는지...  단 한 번도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성공'이나 '부'로 대변되는 환상에 사로잡혀 오늘도 나는 내 삶을 즐길 여유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이규(李珪)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한국계 일본인이다.
코넬대학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메이지가쿠잉대학 국제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전 세계적으로 환경운동과 문화운동을 하는 한편, 환경공생형 비즈니스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는 영어에도 존재하지 않는 슬로 라이프(slow life)라는 말을 처음으로 세상에 퍼뜨린 인물이기도 하다.  저자는 경제, 문화, 환경, 정치, 먹거리 등 다양한 분야의 키워드를 주제로 자신의 생각과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며 독자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그것은 강제적이거나 강압적이 아니며 어떠한 규칙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 새롭고 평화롭고 친환경적인 삶을 디자인해 나가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돈과 직결되지 않는 모든 것을 잡일, ,잡담, 잡생각, 잡지, 잡념, 잡음 등으로 표현하며, 그런 일들을 천시하거나 터부시하여 왔다.  오직 효율성과 '빨리빨리'라는 속도에 나 자신을 맞추고 끝없는 경쟁구조로 내몰았던 것이다.
상대가 자연이든 사람이든,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게 하는 일에 점점 더 서툴러지고 있다.  요컨대 함께 살아가는 일에 점점 더 서툴러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왜냐하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기다리고 또 기다려주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는 지금 남을 사랑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기다림을 뺀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P.55)
더글러스 러미스가 주장하듯 경쟁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기본적인 정서는 공포심이다.  뒤쳐질지 모른다는 공포, 급기야는 낙오되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우리는 언제나 그 대열의 앞에 서야 하는데 그  줄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정황조차 없는 긴박함과 절박함을 갖추어야만,  사람들은 비로소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일주일 생활비가 10달러에서 30달러로 바뀌는 것을 진보라 여겨 왔던 이유는 이러한 공포를 이용한 개발의 논리가 대중을 세뇌시켰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인구는 점차 줄어 가는데 1년에 몇십 만 채의 아파트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현상을 보면서도 아파트값이 매년 오를 것이라는 환상과 함께 그 대열에 참여하지 못하면 낙오자로 전락할 것이라는 공포를 심어주는 것은 성장을 지향하는 기업과 국가의 얄팍한 눈속임이다.   아무런 까닭도 모른 채, 우리는 그들의 논리에 잘도 이끌려 단문형 냉장고를 양문형 냉장고로 바꾸고,  일반 세탁기를 드럼세탁기로 바꾸며 살아 왔다.  우리의 정원이자 텃밭인 그린벨트를 해제하고, 수십만의 빈곤층이 생성돼도 GDP는 성장하고, 범죄와 질병이 증가해도 성장은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성장 논리의 세뇌에서 벗어날 시점이 되지 않았을까?  경제학자 슈마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술은 인간이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법칙과 원리로 발전해 간다.  반면 자연계는 성장과 발전을 '언제, 어디서 멈출 것인가'를 알고 있다.  자연계의 모든 것에는 킈,빠르기,힘의 한도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 일부인 인간도 자연계 안에서는 균형, 조화, 정화의 힘이 작동동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기술이라는 것은 크기,빠르기,힘을 스스로 제어하는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기에는 균형, 조정, 정화의 힘이 작동하지 않는다. (P.123)
요즘 아이들의 교육을 보면서 무서움을 느낄 때가 있다.  전에는 한 분야만 잘해도 그럭저럭 밥벌이는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학습 분야가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능력이나 한계를 초과하는 범위로 확대되었다는 느낌마저 지울 수 없다.  성장의 논리로 따진다면 인간은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오직 자신의 능력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어쩌면 협동과 조화를 상실한 현대사회의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세계의 시간 틀은 둘로 나뉜다.  첫째는 지구와 생물의 생태적인 시간의 틀, 거기에는 지구의 역사와 함께 발맞추어 온 생물 진화의 원대하고도 유장한 시간의 흐름, 개개 생명의 삶과 죽음의 사이클 등이 포함된다.  둘째는 산업이나 상업 등의 경제적 시간의 틀이다.  비즈니스는 속도를 다투고 변화를 좋아한다.  거기에는 가속화의 끊임없는 변화, 무한한 성장이 철칙이다.  이에 반하는 자는 그에 따른 제재를 받게 된다.  이것이 현대 세계의 지배적인 시간의 틀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P.199)
'녹색 성장'이라는 슬로건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자연 환경과 생태계의 보호나 개선을 의미하는 '녹색'과 경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성장은'절대 같이 어울릴 수 없는 상반된 개념이다.  여기에는 그럴 듯하게 포장된 속임수만 존재한다.  결국 녹색이냐 성장이냐는 선택의 문제이지 공생이나 조화의 문제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가끔 사람들은 불가능한 것조차 광고라는 프랑켄머쉰에 들어갔다 나오면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곤 한다.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며 기다림 속에는 길게 이어지는 다양한 상념, 근원적인 어떤 것으로의 지향, 그 궁극적인 소실점에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와 마주하게 된다.
이 필연적인 상념의 터널을 통과하는 행위, 그 자체가 바로 '삶'이다.  우리는 지금도 기다림의 긴 터널을 '설레임'과  동반하여 천천히 걸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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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영혼의 편지 (반양장)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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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 나라의 예술 수업은 이발소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내게는 그랬다.
먹고 살 것이 급했던 나의 어린 시절에 예술이란 그저 희망 없는 사람들의 끄적임이나 흥얼거림 정도로 인식되었고,  예술가란 백수의 고상한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예술 수업은 교과 밖의 과외 수업으로 변질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한 달에 한 번 머리를 깎으러 들렀던 이발소에는 밀레의 '만종'이나 푸쉬킨의 시 '삶이 그대릉 속일지라도'가 걸려있었고, 오래된 전축에서는 트로트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예술가는 오직 밀레, 푸쉬킨, 이미자 세 명 뿐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그리고 어른이 된 이후에도 그림은 그저 새로 산 아파트의 벽면을 장식하는 사치품이나 시간이 지나면 은행 이자보다 더 높은 수익이 기대되는 투자 대상 쯤으로 여겼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는 한때 주식이나 부동산에 더이상 매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미래의 투자처는 그림 밖에 없다는 생각에 잘 알지도 못하는 그림릉 구경하러 화랑이나 전시회를 뻔질나게 드나들었었다,  그림을 보는 안목이 중요하다는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 언질을 성경처럼 가슴에 품고는 그 안목을 어찌 높일까 고민했었다.  어린애 같은 발품을 오래도 팔고 나니 지치기도 했고, 원하던 안목도 높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자연스레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대학시절 방배동의 지하차고를 빌려 미대 친구들로부터 데생을 배웠던 경험이 내 미술 공부의 전부였던 나는 그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그림과 화가에 대한 나의 편견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펼친 순간 미술 이론 시간에 그 이름만 듣고 배웠던 반 고흐의 치열한 삶과 예술혼을 경외심과 감동으로 읽어나갔다.
그림이란 게 뭐냐? 어떻게 해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까? 그건 우리가 느끼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서 있는, 보이지 않는 철벽을 뚫는 것과 같다.  아무리 두드려도 부서지지 않는  그 벽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인내심을 갖고 삽질을 해서 그 벽 밑을 파내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럴 때 규칙이 없다면, 그런 힘든 일을 어떻게 흔들림 없이 계속해 나갈 수 있겠니? 예술뿐만 아니라 다른 일도 마찬가지다.(P.93)
이 책은 고흐가 28살의 늦은 나이에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면서 그에게 경제적 지원과 작품의 판매를 대행했던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37년의 짧은 생애 동안 지독한 고독과 가난에 시달렸던 고흐는 그가 그림 그리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1872년 8월부터 1890년 7월 29일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668통이나 되고, 879점의 그림을 남겼다.
진정한 화가는 양심의 인도를 받는다.  화가의 영혼과 지성이 붓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붓이 그의 영혼과 지성을 위해 존재한다.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캔버스가 그를 두려워한다. (P.134)
칼뱅파 목사이셨던 고흐의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했던 맏아들에 대한 불신과 종교적 신념의 차이로 그를 멀리했으며, 그로 인해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한편으로는 죄책감과 무력감에 시달렸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지원했던 테오를 위해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림에 열중했으며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유화나 수채화 보다는 데생에 매달리기도 했고 끼니를 거르기도 했다.  그러는 도중 문학을 공부하겠다는 여동생 윌에게 그는 이렇게 충고하고 있다.
너무 기를 쓰고 공부하지는 말아라.  공부는 독창성을 죽일 뿐이다.  네 자신을 즐겨라! 부족하게 즐기는 것보다는 지나치게 즐기는 쪽이 낫다.  그리고 예술이나 사랑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마라.  그건 주로 기질의 문제라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P.156)
정형화된 비례나 그림의 형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모든 감정과 느낌을 한 장의 그림에 담으려 노력했던 고흐는 그 시대 화가들에게 이단아요, 반항아였을 것이다.  그에 더하여 사촌 여동생과의 사랑에 실패한 후 거리의 창녀 시엔과의 짧은 사랑, 그리고 고독.  고갱과의 동거와 간질 발작으로 결별.  그리고 정신병원과 요양원 생활.  그리고 자살.  
색채를 통해 서 무언가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서로 보완해 주는 두 가지 색을 결합하여 연인의 사랑을 보여주는 일, 그 색을 혼합하거나 대조를 이루어서 마음의 신비로운 떨림을 표현하는 일, 얼굴을 어두운 배경에 대비되는 밝은 톤의 광채로 빛나게 해서 어떤 사상을 표현하는 일, 별을 그려서 희망을 표현하는 일, 석양을 통해 어떤 사람의 열정을 표현하는 일, 이런 건 결코 눈속임이라 할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것이니까.(P.208)
실로 예술이란 평온한 대지를 바라보며 가파른 벼랑의 중간 쯤에 놓인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고 노는 일이 아닌가.  더구나 진보적 예술가에게는 동시대에서 맛볼 수 있는 열광이나 영광도 기대하지 못한다.
진보란 그런 게 아니겠는가.
마부 없는 마차가 경사진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는 것.  우리는 그때 짐짝처럼 실려 눈을 감은 채 그 위태로운 순간을 견디는 것.  그 순간이 끝났을 때 우리가 도착한 새로운 곳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어느 위대한 예술가나 선각자가 우리를 대신해 그 마부석에 앉아 고독과 위험을 감내하며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했음을 깨닫게 되는 것.
나는 그 위대한 예술가의 영혼 스케치를 가슴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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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드혼 농장 이야기
핀드혼 공동체 지음, 조하선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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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은 지 이틀이나 지났는데 리뷰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나는 몹시 당혹스럽다.
리뷰보다 이 책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판타지 소설인 듯도 하고, 신화나 전설인 듯도 하고, 신비주의 철학서인 듯도 하고, 유기농법을 다룬 농업서인 듯도 하고, 공동체를 다룬 사회과학서인 듯도 하다.
나는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 번 책을 잡으면 다 읽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고집스런 나의 성격 탓에 어찌어찌 다 읽기는 했지만 책의 내용을 곰곰 되새겨 봐도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다.  물질계에서만 살아온 내가 이 책에서 말하는 ’데바’나 ’자연령’, ’엘리멘탈’, ’폰’, ’판’과 같은 낯선 용어와 그 영혼계로부터 받은 메세지를 날짜별로 기록한 글을 읽으며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어느 정신병자의 황당한 이야기로 치부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한 <라이브러리 저널>의 서평을 인용해 보자.
"이 책에서 핀드혼 공동체의 설립자들과 그 멤버들은 수년 동안 자신들이 여러 자연령들과 접촉하게 된 경위와, 그 자연령들의 메시지를 통해 어떻게 채소, 과일, 꽃 등의 재배에 기적적인 결과를 얻게 되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웃어 넘길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각자의 자유이다.  아무튼 이 책은 놀랍고도 매우 다름다운 책이다."

1962년 11월의 어느 눈 내리던 날, 큰 호텔의 지배인이었던 피터는 캐러밴 트레일러(이동식 주택)를 몰고 스코틀랜드의 척박하고 황량한 땅 핀드혼으로 갔다. ’저렇게 황량한 곳에서, 또 저렇게 작은 캐러밴 속에서 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야’라고 생각했던 피터는 그날부터 그곳에 정착하여 그 작은 캐러밴 속에서 여섯 명(피터, 아일린, 도로시, 아들 삼형제)이 7년 동안 살며 농장을 일구었다.
삶을 통해 아주 힘든 영적인 훈련을 받아 온 아내 아일린과 피터, 그리고 도로시는 모든 것을 신(내면의 안내자)께 맡기고 그들이 핀드혼에서 해나갈 일이 세상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그 인도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도로시와 아일린은 ’데바’와 소통한 것을 기록하고 피터는 그 기록에 따라 농장을 꾸려나간다. 
자갈과 모래로 이루어진 스코틀랜드의 척박한 땅에서 이탄과 잡초를 걷어내고, 말의 배설물과 짚단을 모아 퇴비를 만들고, 해안가에서 해초들을 따오고, 벌채장에서 나무재를 모으는 등 땅을 기름지게 하기 위하여 온갖 궂은 일을 다하였다.  이렇게 일군 땅에 채소와 버섯과 각종 허브와 과일나무를 심기까지 그리고 에상치 못한 풍성한 수확을 거두기까지 원예 분야에 문외한이었던 피터는 오직 데바와 자연령에 의지하여 그들의 지시와 안내에 따랐음을 기록하고 있다.  농장이 확대되고 핀드혼의 생산물이 타지역에 비해 월등한 품질임을  인정받게 되자 핀드혼 공동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점차 방문객도 증가했다. 
그렇게 핀드혼 사람들은 식물을 재배하면서 배운 것을 그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데 적용하게 되었다.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던 핀드혼 농장의 초창기에 신의 인도에 따라  정신없이 농장을 가꾸는데 매달렸던 그들은 신의 분명한 계획과 의도가 자신들에게 내재했었다고 회고한다.   농장이 확대되면서 물리학과 화학을 연구하던 록이 합류하고, 영적이고 비교(秘敎)적인 주제를 다루는 강사이자 교육가로 활동하던 데이비드가 참여했다.
록은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시작하면 되는지 '판'에게 물었고 대답은 이렇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언젠가 신념이 충분히 강해진다면 당신들도 이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목적만을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일어날 것이다.'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하세요.  '내가 그랬던 것처럼 10년 동안 시골의 비교적 고립된 장소에 살라'라고.  자연령들과 통신하는 것은 할 일 없을 때 심심풀이로 하는 게임이 아닙니다.  나는 내 백성들에 대한 인간들의 경멸적이고 오만한 태도를 익히 보아 왔습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태도는 우리들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보다도 더 나쁜 행위입니다.  그런 인간들로부터 일찌감치 떠나도록 하세요.  그리고 진실로 내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고 우리를 진정으로 만나보기 원하는 진실한 사람들과 만나도록 하세요."(P.214)
핀드혼의 원예가들은 에일린을 통한 신의 목소리에 의해 인도받고, 도로시를 통해 데바들과 이야기를 하고, 록을 통해 자연령들과, 데이비드를 통해 다른 차원의 실재들과 접촉하였다.
그러나 1974년 이후 록은 이 세상을 떠났고, 데이비드는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원예 전문가 프레드 바턴이 새로 참여함으로써 자연령에 의존하던 초기 핀드혼 농장은 이제 인간의 창조 능력과 자연의 생명력에 의해 새로운 조화의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환경문제의 해결방안에 있어 균형 잡힌 환경의 유지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의 영적인 관계 즉 ’의식’이라는 측면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이 책은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  자연은 이용하고 착취해야 할 상품이나 지배해야 할 대상은 결코 아닌 것이다.  이 책에서는 자연의 모든 측면을 조정해 나가고 있는 정령이나 지성을 지닌 영적 존재, 자연의 신들을 미개한 문화에서 나오는 신화나 전설로 여기던 우리에게 이 신화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숙한 나는 여전히 초월적인 실재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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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만났던 사람을 보면서 깊이 깨달은 것이 있었다.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일수록 ’연대’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잘못 인식하는 것 중에 ’인맥’이라는 용어가 있다.  내 생각에 ’인맥’은 경제적 여건이나 사회적 지위가 비슷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일시적 결합 쯤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혹시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 그 까닭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약자의 입장에서 강자를 알고 지내는 것을 ’인맥’으로 생각하며 자랑스럽게 그 사실을 떠벌릴 수 있겠지만, 강자의 입장에서 약자를 알고 지내는 것을 동일하게 생각하느냐의 문제이다.  강자에게 그것은 부끄러운 사실일 뿐이고 자랑할 만한 일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것은 마치 짝사랑 하는 사람이 자신도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여기서 ’인맥’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착각의 연속인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보듯이 한병태에게 엄석대는 ’인맥’이고 친구일 수 있겠지만 엄석대에게 한병태는 결코 ’인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약자의 입장에서 인맥은 ’연대’가 더 정확하다.  여기서 말하는 ’연대’는 봉사나 헌신에 가깝다.  자신의 이해타산을 목적으로 모이는 일시적 결합이 결코 아닌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연대는 강자를 이길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적 연대’에 깊은 불신을 드러낸다.  마치 선천적으로 ’연대’를 미워하는 유전인자를 타고난 듯하다.  그들의 DNA에 깊이 각인된 것처럼.
때로는 실소를 금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있는데 자신의 딴에는 한껏 머리를 써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모질게 대우하면서 취한 영리 행위가 마치 자신이 선천적으로 부자가 될 가능성을 타고 태어난 것처럼 자랑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약자의 주변 환경은 구조적으로 그런 기술을 배우고 익히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들이 취한 행동은 강자가 보기에 너무나 어설프고 서툴러서 순진해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같은 약자의 입장에서도 한두 번은 통하지만 장기적으로 묵인되는 것은 어렵다.  그러함에도 그들은 그렇게 한다.  금전적으로 부족하니 영리 행위는 그렇다 치더라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서로 돕고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공되고 자신의 환경이 개선되는 것인데, 봉사나 헌신이 마치 오직 남에게 주는 것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피에르 신부님이나 테레사 수녀님, 또는 법정 스님이 보시기에도 그들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회적 연대’는 결국 자신을 위한 가장 빠른 영리 행위이자 가능성의 실현이며, 삶의 의미를 제공함으로써 시련을 극복하게 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인 것이다.  이것은 결국 나와 타인을 위하는 상생의 원리인 것이다.
내가 이 글에서 마르크스 주의나 공산주의를 선동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배려와 사랑의 실천은 결국 나를 위하는 길임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여러 자기계발서에서 사랑을 강조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인격적 대우나 절대적 믿음을 많이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의 작은 사랑과 봉사는 얼마나 큰 감동으로 기억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리 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지낼 때가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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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 오묘함에 매번 감탄하게 된다.

우리 곁에 늘 있는 것에 대하여 그 숨겨진 비밀을 어쩌면 그리도 잘 찾아내는지...
그리고 너무나 익숙하여 새로울 것이 없다 생각했던 것들을 어쩌면 그리도 새롭게 다가오게 하는지...
이를테면 김춘수의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싯구는 현대의 양자 역학을 너무도 절묘하게 설명하고 있다.
몸짓(wave)은 떨림이요,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 영혼의 교감을 통하여 실재하는 그 무엇으로 존재하게 되는 과정. 어떤 과학자가 이보다 더 절묘하게 양자 역학을 설명할 수 있을까?
김소월이 친구의 죽음을 보고 읊었다는 '초혼'에서 "부르는 소리는 빗겨 가지만/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라는 싯구에서 하늘과 땅 사이가 넓다는 익숙한 생각이 이 시에서 얼마나 새롭게 다가오는가.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는 또 어떤가.
"한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라는 싯구에서 어쩌면 낯설게 느낄 수 있는 서구 여인의 이름이 시를 통하여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와 이어진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박목월의 시 '나그네'에서 "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 리"라는 구절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진양조의 유려한 가락이 보폭에 실리도록 한다.
천상병의 시 '귀천'을 읽노라면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에서 멀리만 하던 죽음이 오래된 친구와의 약속처럼 한결 편하고 가깝게 다가온다.
서정윤의 시 '홀로서기'에서 "기다림은/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좋다"는 구절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애환을 치료하였을까?
이것 뿐이랴! 
지금도 어느 곳에서 우리에게 전해줄 숨겨진 이야기를 한 편의 시로 옮기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으리라. 

시는 과학이요, 철학이요, 음악이며, 치료제이며, 그 모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알지 못하는 것과, 익숙했던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시를 통하여 느끼고 학습한다. 그 모든 시의 고마움을 가슴 깊이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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