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본능에 충실한 삶‘과 ‘우리가 의식하고 싶어하는 삶‘ 간에는 언제나 깊은 괴리가 있다는 말과 함께 그 괴리를 좁힐 순 없지만 그 사이를 넘나드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얘기를 했었다. 다만 이것은 언제나 용기를 필요로 하며 그 이면에는 공포 내지는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살펴봤었다. 오늘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올바른 마음가짐에 대해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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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중후반부를 보면 저자가 인도 불교와 붓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들을 많이 했던 흔적들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소개된 저자의 연보를 통해 저자의 주변 환경적인 영향 때문인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었다.

독자인 나는 저자에 관한 단편적인 사실이나 생각 등에 국한되기 보다는 저자의 주변 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본문의 내용과는 별개로 환경적인 요소가 한 사람에게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주변 환경과 관계없이 뭐든지 자기가 하기나름이라고 말하는 경우들도 종종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말에 그닥 동의하지 않는다. 환경의 중요성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옛말에 무슨 ‘맹모삼천지교‘ 같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내가 하는 생각과 습관 그리고 환경까지 3박자가 종합적으로 어우러져야 가장 최선의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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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문 내용으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이어가보면, 저자의 인도 불교와 붓다에 대한 생각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관련된 내용들을 배울 수 있었다. 이름부터 생소하게 느껴지는 신들을 비롯해 인도 불교와 붓다가 지향하는 가치관과 생각들이 무엇이고 다른 종교들과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만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 대해 잠시나마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미리부터 마음속의 동요를 억누르거나 ‘미친 짓‘이라는 등의 말을 입에 올리지 말라. 오히려 그 동요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라! 모든 성장은 그러한 상태와 결부되어 있으며 고난과 고통 없는 성장은 있을 수 없다.

‘망상‘이 당신을 괴롭히더라도 눈을 감지 말고 그 망상이 마음속에서 분명해지도록 애써 보라. 그렇지 않으면 여느 사람처럼 당신의 내부에 있는 혼돈과 점점 더 반목하게 될 뿐이다. 당신은 그 혼돈과 친구가 되어 그것을 받아들이고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고통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이 고통의 세계를 가장 빨리 통과할 수 있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생각

서로 반대되는 것은 모두 착각이다.

칸트, 피히테, 헤겔, 바그너 ...(중략)... 괴테나 횔덜린, 니체, 그림 형제, 아이헨도르프 ...(중략)... 모차르트나 바흐, 슈베르트

인내하는 것은 어렵다. 인내는 사람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고행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힘든 일이면서 그와 동시에 유일하게 배울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이 세상의 자연과 성장, 평화, 번영, 아름다움은 모두 인내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인내는 시간과 침묵, 그리고 신뢰를 필요로 한다.

인내는, 개인의 일생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정도 참고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이 필요하며, 개인의 판단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과의 연관성도 고려해야 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인내‘와 더불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신앙, 지혜, 천진난만함, 그리고 소박함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상대로 싸우고 매듭을 풀었다가 또다시 매듭을 짓고는 한다. 그런 행위가 마침내 끝이 나면 완전한 이해와 흠 없는 조화, 그리고 완결된 미소와 긍정적인 대답을 얻을 수 있고 목표가 마침내 달성되면 우리는 비로소 미소를 지으며 숨을 거둔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며 이생의 삶을 다하고 환생하기 위해 실체가 없는 곳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것이다.

여섯 줄의 선으로 이루어진 연필 스케치나 네 줄의 시와 같이 아무리 하찮은 예술 작품도 과감하고 맹목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고 단호하게 뛰어들어 호두 껍질 안에 숨어 있는 혼돈을 창조해 내려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술가의 고뇌다. 그들은 인내와 열성, 애정을 가지고 시나 그림, 소설 등의 작품을 형상화한다. 그와 더불어 세상은 매시간 더 풍부해지고 충만해지며 다양해지지만, 그래도 예술가는 자신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계속해서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내면서, 매일 그리고 매시간 홍수처럼 밀려오는 꿈과 생각들을 억눌러야 한다. 원하던 것의 천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빈약한 멜로디로 창작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창작에 대한 강박 관념은 끔찍하다. 그것은 시도를 거듭할수록, 또 작품을 많이 쓸수록 더 심각해지고 가슴은 불행과 체념으로 가득 차게 되며 정신은 광포해지고 강렬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결과가 나온다. 그 결과란 글쟁이의 평가나 시민의 박수갈채, 어느 소녀의 편지와 같은 ‘성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ㅡ그러한 오해는 우습지만 참을 만하다ㅡ 실제의 결과, 즉 마침내 예술가 앞에 놓여 있는 ‘작품‘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토록 하찮고 아무것도 아닌 작품 말이다.

세상에는 자기가 완성한 작품을 사랑하는 예술가도 있다고 한다.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문학 작품을 참회의 고백으로 이해한다면 ㅡ현재의 나로서는 그렇게밖에 이해할 수 없지만ㅡ 예술은 멀고 다양하며 꼬불꼬불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길의 목표는 점점 힘이 빠져 완전히 탈진해 버릴 정도로 개성 혹은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완전하고도 구석구석 낱낱이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더 고차원적인 것, 이를테면 개인이나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 뒤따를지도 모른다.

예술은 평범의 차원을 뛰어넘을 것이고, 예술가는 성인聖人이 될 정도로 성숙해질 것이다.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예술이 예술가에게 끼치는 영향은, 예술가 본인의 인격에 있어서만큼은 고해나 심리 분석이 할 수 있는 기능 이상의 것을 이루는 셈이 된다. 니체의 후기 작품이나 스트린드베리의 고백서, 플로베르의 글은 모두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술가의 종착지이자 목적지는 이제 더 이상 예술 행위나 작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잊고 단념하는 것, 그리고 영혼의 평온함을 누리며 기품 있게 존재하기 위하여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늘 고뇌하고 편협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아를 희생하는 것이다.

개인을 초월하는 자아, 즉 세상과 시간이 더 이상 사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정신적인 상태에서 세상의 혼돈이 음악으로 바뀌고 그로 인해 성인으로 발돋움하는 것이 예술가의 목표일 것이다.

다만, 예술가에서 성인으로, 고백과 참회에서 신의 품 안에 안식하는 것으로 이르는 그 길이 진정한 길인지, 또 그 길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가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인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인간은 자기 무의식이 표현하며 드러내는 의미와 그 중요성에 스스로 매료됨으로써 심리 분석을 할 때에는 자기 자신을 잊고 그것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다.

그와 동일 선상으로 예술가는 참회의 고백을 할 때 스스로를 내던지고 자신의 진심을 말하며 쉴 새 없이 자기감정을 토해 냄으로써 자신의 편협한 자아와 점점 더 깊은 유대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문제와 고뇌, 그리고 콤플렉스에 점점 더 깊이 끌려 들어갈 수도 있다. 결국 그것은 예상과 정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그 예술가를 성인과는 정반대의 존재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내가 ‘성인‘이라고 할 때는 정의로운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마음이 일치하는 경건한 사람, 자신의 감각이 전해 오는 것을 모두 신의 섭리, 즉 필연적인 것으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상반되는 두 가지를 하나로 보고 모든 관점에서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것을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은 예술가의 고백이ㅡ예술가가 거기에 어떤 의미를 두든 상관없이ㅡ결코 순수한 고해가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순수한 고해란 단순히 억누르던 감정을 터뜨리는 것이며, 해방이자 단념 그리고 폭로다. 그에 반해 예술가의 고백은 언제나 자기변명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예술가는 고해를 과대평가하고, 그것에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애정을 쏟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고백이 솔직하고 신중하며 또 완벽하고 가차 없는 것일수록 다시 온전한 예술, 온전한 작품, 온전한 자기 목적이 되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예술가는 자신의 고백에 몰두하고 자신의 과제와 자신이 이룬 성과 전체를 자신의 고해에 옮겨놓음으로써 늘 자신의 개인적인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주위를 방황하는 경향이 있다. 어차피 예술가는 자신의 인생에서 이룬 성과와 자기변명을 모두 자신의 작품에 옮겨 놓고, 그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 지니는 의미를 과장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성인의 고백을 문인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금방 뚜렷해진다. 이를테면 아우구스티누스와 루소를 비교해보자. 한 사람은 신에게 자신을 내맡겼기 때문에 스스로를 희생시키고 있는 한편, 또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변명하고 있다. 두 사람은 같은 동기를 가지고 출발점에 섰으나 그들의 종착지는 완전히 극과 극이었다. 한 사람은 성인이 되고 또한 사람은 문인이 되었다. 한 사람은 자기 개인을 극복하여 위대한 인물이 되고, 또 한 사람은 자신의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흥미로운 사람에 그치고 말았다. 내 생각에 니체는 그 두사람의 중간쯤 되고, 스트린드베리는 루소에 아주 가깝다.

숱한 경험으로 쌓아 온 자아를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단칼에 단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태어나던 시각에 토성과 화성, 목성과 달이 떠 있었던 것처럼, 신앙심 깊고 경건한 부친과 개신교의 전통인 세례식이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Vedanta(베단타): 인도 6파의 하나로 그 시조는 기원전 1세기 무렵의 철학자 바다라야나이다. 《우파니샤드》를 중시하며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을 견지한다.

Upanisad(우파니샤드): 인도 브라만교의 성전인《베다》를 운문과 산문으로 설명한 철학적 문헌들로서 기원전 1000~600년경에 활약한 힌두 스승들과 성현들의 사상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100가지 정도가 알려져 있다. 기원전 3세기에 만들어진 이 성전은 사람, 신, 우주의 이치를 밝히고 있으며 그 일부인 범아일여 梵我一如 사상은 모든 힌두 사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다.

Visnu(비슈누): 힌두교의 세 주신主神의 하나.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신으로 후에 크리슈나로 화신化神한다.

Indra(인드라): 인도의 베다 신화에 나오는 비와 천둥의 신. 하늘의 제왕으로 몸은 모두 갈색이고, 팔은 네 개이며, 두 개의 창을 들고 코끼리를 타고 다닌다. 불교에서는 제석천또는 십이천의 하나로 동방의 수호신이다.

Brahma(브라흐마): 인도 철학에서 창조를 주재하는 신이자 우주의 최고 원리로 ‘범梵‘이라고 번역하여 부른다.

Krsna(크리슈나):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영웅신으로 악한 왕을 죽이고 수많은 악귀와 용왕을 퇴치했으며 농업과 목축을 관장했다. 질서의 신 비슈누의 화신化神이라고 전해진다.

개혁자들로 이루어진 청교도 신앙은 소수의 사람만이 할 수 있을 법한 자기희생을 요구한다. 자기희생은 그 소수의 사람들조차 아주 드문 경우에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욕구, 혹은 희망 사항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것은 내게는 아주 힘든 일이며, 혹여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언제나 그 희생은 불완전한 모습에 그칠 뿐이다.

개혁적인 생채가 짙은 종교는 그렇게 좋지 못한 시선을 견뎌 내야 하는 열등감을 가르치고 있다.

‘나의 행동과 삶은 아무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아무런 결실도 없이 그냥 쓸쓸하게 사라져 가고 있구나.‘

"정말 슬픈 일이군요. 살다 보면 그렇게 슬픈 일이 많지요. 저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슬픔을 견디려고 애써 봐도 아무 소용이 없으면 포도주를 한 병 마셔 보세요. 그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면, 머리에 대고 총을 쏘는 방법도 있다는것을 잊지 마십시오."

Josef Englert(엥글레르트)(1874~1957): 헤세의 친구로 직업은 엔지니어. 헤세의 작품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klingsors letzter Sommer》에서 ‘마술사 유프‘로 등장한다.

나는 ‘지도자‘로서의 공명심은 전혀 없지만, 예술가로서의 명예욕이나 자만심에 관한 부분에서는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나 자신도 잘 알고 있다.

불교 신자들에게는 열반에 대해 논하는 것이 금지되어있다. 붓다는 사람들에게, 열반이 소멸인지 아니면 신과의 합일인지, 또 부정적인 것 혹은 긍정적인 것인지, 축복인지 아니면 단순히 안식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스스로도 그것을 거부하였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열반은 개개인이 완전한 전체로 회귀하는 것이며 개체화의 원리 뒤로 물러나는 구원의 단계, 즉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개개의 영혼이 만물의 영혼인 신에게로 귀의하는 것이다.

상캬라 철학은 처음과 끝이 없는 두 가지 존재, 즉 물질과 정신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몸속에 있으며 우리가 정신 그 자체로 오인하기 쉬운 가장 섬세한 기관(신경계를 말한다)이 물질과 정신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변화는 오로지 물질에서만 일어나고, 모든 과정은 물질의 경우에만 진행되는 반면, 정신은 늘 변함이 없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Sankara(상캬라) (700~750): 인도의 철학자로 불이일원론파不二一元論派의 시조이며 《브라흐마수트라 주해》 를 남겼다.

나는 ‘구별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다시 말해서, 나와 내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의 정신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 또 내가 그 체내 기관을 나의 진정한 자아와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기쁨과 슬픔의 경지를 초월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삶을 살아간다면 나에게 환생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육체를 떠남과 더불어 무의식 상태가 시작되어 내 영혼이 영원히 존재하더라도 거기에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나와 물질 사이에 (뿐만 아니라 나와 환생가능성 사이에) 접촉이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심리학을 정교하게 분석하며 사색하는 방법은, 가끔씩 명상을 취하는 것과 더불어 희한하게도 요즈음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Sansara (윤회: 고통을 모두 짊어진 채 영원히 생과 사를 되풀이하는 것을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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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의 아버지는 자신의 어머니, 즉 저자의 할머니를 전쟁 통에 잃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었고, 이로 인해 저자의 아버지가 술로 슬픔을 달랜다는 얘기도 간략하게 나마 나왔었다.

저자의 가정사가 순탄치 않았다는 것은 어느정도 알고 있었지만 저자의 할머니가 동유럽 국가인 크로아티아 내전 때 돌아가셨다는 것은 이번 독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또한 동유럽 국가들 간의 내전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 처음 알게 되었다. 이는 다른 국가나 대륙들에 비해 동유럽 쪽 역사에 내가 무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동유럽 쪽 국가들의 역사에 대해서도 새롭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듯하다.

뭐 아직 자세하게는 알 수 없지만 대략적인 이야기를 살펴보니 우리나라로 치면 6.25와 비슷한 전쟁이 당시의 크로아티아에서도 있었던 것 같다. 관련된 내용들을 검색해보면 더 자세한 내용들을 알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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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어어 읽다가 저자의 누나, 삼촌에 관한 얘기들이 나오는데, 가족 이야기와는 별개로 중간중간에 동유럽 쪽 관련 지명 같은 것들이 등장한다. 동유럽 쪽에는 배경지식이 거의 전무한 나인지라 이렇게 새롭게 접하는 지명들을 인터넷에 검색해보면서 관련 사진들을 구경하는 시간을 잠시 가져보기도 했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동유럽 여행을 직접 가봐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적으로 기존에 익숙한 서유럽이나 북미 쪽에 비해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질 만한 것들이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러한 것들은 이 책을 통해 얻어갈 거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었는데 속된 말로 얻어걸린(?) 느낌이다. 비록 우연이기는 하나 이런 식으로 잘 몰랐던 세상을 간접 경험하는 것도 독서의 묘미라면 묘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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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쭉 읽어 나가다가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발견했다. 저자가 자신이 살던 동네에 가서 동네 아이들에게 자기 공을 빼앗는 아이에게 돈을 주겠다고 내기를 걸고 공놀이를 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얼핏보면 그냥 가벼운 놀이처럼 보이지만 실은 저자 본인이 공을 빼앗기지 않고 지키기 위한 훈련의 연장선이었다.

이렇게 자신이 하는 일과 관련하여 따분하고 지루하게 느끼지 않고 그것을 놀이로 승화시켜 즐기려고 하는 저자의 태도는 가히 본받을만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힘든 일일지라도 즐겁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서 한다면 실력은 실력대로 늘면서 동시에 그 시간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보스니아의 비옐리나Bijelina 지방 출신이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벽돌공으로 일했고, 가족과 친지들도 모두 그 지방에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비옐리나 지방은 유린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다시 무슬림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세르비아인들은 도시에 쳐들어가 수백 명의 무슬림을 살육했다. 아버지가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이 그때 죽임을 당했고, 아버지 가족과 친지들은 고향을 두고 떠나야만 했다. 비엘리나는 완전히 세르비아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그들은 비옐리나로 넘어와 빈집들을 차지하고 살았다. 아버지가 살았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아버지 집에 쳐들어와 주인이 된 것이다. - P50

인제 와서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았던 이유도 이해가 간다. 아버지는 저녁 내내 텔레비전 앞에서 고향 소식이 들려오거나 고향에서 전화가 걸려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전쟁은 아버지를 집어삼켜 버렸고, 아버지는 내전의 추이를 지켜보는 데 집착했다. 아버지는 의자에 꼼짝없이 앉아서 술을 마시며 비통해했고, 유고슬라비아 노래를 들었다. 그런 날 나는 집 밖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 집은 또 다른 세계였다. - P51

나는 이소룡처럼, 또 무하마드 알리처럼 되는 게 꿈이었다. - P52

크라구예바츠Kragujevac 시의 라드니치키 Radnicki 복싱 클럽 ...(중략)... 네레트바Neretva 강 - P53

스웨덴의 영웅, 이를테면 전설적인 스키 선수 잉게마르 스텐마르크Ingemar Stenmark 같은 선수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 P53

하지만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는 전설적인 선수였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지껄이든 알리는 자기 방식대로 일을 처리했다. 그는 절대 변명하는 법이 없었고, 그 모습은 절대로 잊히지 않는다. 진짜 멋진 남자였다. 나도 알리처럼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최고다‘고 자부하는 알리의 당당한 태도를 흉내 냈다. - P53

로센고드에서는 만만하게 보이면 살기가 어려웠다. 어떤 녀석이 헛소리를 지껄이면 ㅡ 가장 심한 욕은 계집애 같은 놈이라고 놀림 받는 것인데 ㅡ 맞받아쳐야 한다. - P53

제 발등을 찍지 말라는 말 - P54

매년 11월 30일이면 ‘위대한 전사‘로 추앙받는 스웨덴 왕 칼 12세 Charles XII의 죽음을 기념해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모여 행진을 하는데, - P54

로센고드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으르렁거리며 살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늘 세상에 각을 세우고 살아가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 P54

내가 억누를수록 그 기억은 더욱 나를 괴롭혔다. - P54

아버지들의 세계에서 사는 남자라면,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사나이처럼 당당히 맞서야 한다. 그 세계에서는 이른바 신세대 남성들의 유약함은 통하지 않는다. 배가 아플 수도 있고 우울할 수도 있지만, 그딴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 P56

나는 어릴 때도 양면적인 데가 있었다. - P59

나는 규율이 잡혀 있지만, 사나운 야성도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나름대로 정립한 내 신조가 있다. 말과 행동이 달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네까짓 게 뭐야. 나야말로 대단한 놈이야" 하고 말만 뱉으면 곤란하다. 당연히 그만한 실력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 P59

나는 위대한 선수가 되고 싶었고, 또 그에 걸맞게 우쭐대며 살고 싶었다. - P59

발칸반도 출신 사람들은 한 번 뒤틀리면 아무도 못 말린다. - P60

돌에 새긴 계명을 바꿀 수 없듯이 우리가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 P61

중요한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 P62

들장미를 뜻하는 퇴른로센Törnrosen - P62

나는 멋진 트릭 플레이로 아이들을 놀래주고 싶었고, 그러려면 그 동작이 몸에 익을 때까지 반복해서 연습해야 했다. - P63

두뇌 회전과 발이 빨라야 인정을 받았다. - P63

키가 작고 몸집이 빈약한 나는 쉽게 태클로 저지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기술을 익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아이들의 탄성 소리를 듣지도 못할 것이고, 나를 시합에 끼워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 P63

나는 축구공을 껴안고 잠드는 날이 많았고, 잠자리에 누워 이튿날 보여줄 묘기를 궁리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 보듯 반복해서 그 동작을 머릿속에서 그렸다. - P63

어머니 동네 축구장이 워낙 비좁아 나는 자연스레 좁은 공간에서 상대의 허를 찌르는 움직임을 익힐 수 있었다. - P67

"즐라탄을 보자마자 뭐가 돼도 될 줄 알았다" "그가 아는 것은 모두 실질적으로 내가 가르쳤다" "즐라탄은 최고의 동료였다" 어쩌고저쩌고하며 떠벌이는 사람들은 넌더리가 난다. 죄다 헛소리다. 나를 알아봐준 사람은 없었다. - P67

이랬느니 저랬느니 나중에 말들이 많았지만 그런 말들은 사실이 아니다. 빅클럽에서 나를 찾아와 우리 집 문을 두드린 적도 없었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허세 가득한 아이일 뿐이었다. "타고난 소질이 있는 놈이니 지금부터 잘 보이자" 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보다는 ‘누가 이 촌놈을 받아준거야?‘ 하는 분위기였다. - P67

나는 약자인 만큼 이를 악물고 연습하고 분투했다. 이미 말했지만, 그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P68

살려면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나는 내 처지에 대해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 P68

친구들이나 나나 앞뒤 분간 못하고 놀았고, 그저 센 놈이 되기만을 바랐다. - P68

나는 그 시절에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나 같은 놈이 존중을 받으려면 다른 애들보다 다섯 배는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열 배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회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력도 없는데 나같은 놈에게 기회라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 P71

코치들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코치들의 말을 듣고 부분 전술과 전략 등필요한 축구 기술을 모두 배워야 한다. 하지만 코치들의 말을 무시할 줄도 알아야 한다. 내가 드리블을 계속하고 발재간을 부리는 것은 그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코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되 무시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게 내 신조였다. - P74

대개는 내 방식대로 행동했다. 그것이 내 무기였다고 할 수 있다. 나처럼 허름한 공동주택 단지에 사는 녀석들이 도련님 흉내를 내는 걸 지켜봤지만, 게네들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도련님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예 정반대로 행동하기로 작정했다. 내 방식을 더 세게 밀고 나가기로 한 것이다. "20크로나밖에 없는데"라고 말하는 대신에 "땡전 한 푼 없어"라고 대답했다. 그러는 편이 훨씬 멋져 보였다. 덕분에 갈수록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 P75

나는 로센고드 출신의 불량아였고,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그게 나였고 나도 차츰 나다움을 즐길 줄 알게 되었다. 스웨덴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모범적 태도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전혀 신경 쓰지도 않았다. - P75

나는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 P77

‘남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는다‘도 내 신조였지만 ‘남의 말을 귀담아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또한 내 신조였다. - P77

나는 공을 받을 때 가능한 한 단번에 처리할 수 있도록 열심히 훈련했다. - P78

컴퓨터를 쓰고부터는 호나우두와 호마리우가 하는 속임동작이나 발재간이 담긴 영상을 족족 내려받은 뒤 그 기술이 몸에 밸 때까지 연습했다. 우리는 영상을 수도 없이 돌려 보며 동작을 확인했다. 어떻게 한 거지? 어떻게 저런 동작을 할 수 있지? - P78

우리는 그런 동작이 몸에 익을 때까지 연습을 거듭했고, 됐다 싶으면 실전에서 써먹기도 했다. 토니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한 단계 더 나갔다. 나는 동작을 더 세분해 더욱 정교하게 기술을 재현했다. 사실 나는 미친 듯이 거기에만 매달렸다. - P78

나는 남다른 선수가 되고 싶었다. 나는 코치들의 가르침도 실천하려고 노력했고, 덕분에 날이 갈수록 실력이 향상되었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마음 상하는 일도 많았다. 우리집 문제도 분명 악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구단에서 겪는 문제 말고도 내게는 골치 아픈 문제가 많았다. - P79

재미도 재미지만 뭔가 강력하게 나를 내세울 거리가 필요했다. 그러지 않으면 나 같은 놈은 애들에게 주목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 P84

남들보다 센 척하고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게 어린 맘에는 멋져 보였지만, 그런 태도는 장기적으로 보면 득 될 게 없었다. 정말 중요한 자리에는 틈만 나면 브라질 선수처럼 개인기를 부리는 다혈질 악동이나 이민자 출신을 원하지 않았다. - P87

나는 잃을 게 없었다. 그래서 내 실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 밀고 나갔고, 당연히 사람들은 나에 대해 쑥덕거렸다. "저 녀석은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봐"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멋대로 지껄여라!"라고 중얼거리면서 하고 싶은 대로 했다. 나는 계속해서 발재간을 부렸고, 선배들을 거칠게 밀어붙였다. - P89

나는 멋진 선수가 되는 꿈을 꾸며 훈련장에서 춤을 추듯 공을 갖고 놀았다. - P89

내가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보여줄 것이 더는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불공평했다. 나 같은 애들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스타 선수가 될 수 없는 세상이었다. 나는 끝났다. 내 기대는 틀려먹은 것이었다. 다른 길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거기에 뛰어들 기운이 없었다. 하릴없이 축구를 계속할 뿐이었다. - P90

"즐라탄, 이제 애들하고는 그만 뛰어야지." - P91

"이젠 어른들하고 뛸 때가 되었다." - P91

공중으로 10미터는 붕 떠오른 기분이었다. - P91

조깅 시간에는 이따금 해찰했지만, 말뫼 구단 트레이닝 세션에는 단순히 참여하는 수준이 아니라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뿐 아니라 어머니 동네에 있는 축구장에 가서 하루에도 몇 시간이고 기술 훈련을 했다. - P94

내가 즐겨 쓰는 수법이 하나 있었다. 로센고드 동네로 가서 아이들에게 "나한테서 공을 빼앗는 놈 있으면 지폐 한 장 줄게" 하고 외치는 것이다. 겉모습은 놀이였지만 내게는 기술을 단련하는 시간이었다. 공을 지키기 위해 몸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터득할 수 있었다. - P94

동네 애들을 데리고 노닥거리지 않을 때는 축구 비디오게임을 하곤했다. 한 번 앉으면 10시간까지 게임에 몰두한 적도 있었고, 게임을 하면서 해결책을 찾아내 실제 경기에서 써먹는 일도 많았다. 거의 온종일 축구를 하며 지낸 셈이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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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5-02-17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라탄이란 축구 선수를 잘 몰랐습니다.
어쩌다 가끔씩 동영상 속의 그의 모습 속에서 어렴풋이 이소룡의 흔적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역시 이소룡과 알리가 되는 꿈을 꾸었었군요..ㅎㅎ
소년들의 로망은 세계 공통이었네요..ㅎㅎ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02-17 17:23   좋아요 1 | URL
예 저도 저자에 대해 대략적으로만 알고 자세한 사항들은 미처 몰랐었는데, 다른 책들이랑 번갈아 읽느라 초반부만 살짝 읽어봤는데도 잘 몰랐던 사실들에 대해 많이 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저자가 어릴 때 자라온 가정 환경과 주변 환경들이 결코 순탄치 않았기에 이소룡이나 알리같이 강하고 멋진 사람이 되기를 꿈꿨던게 아닐까 짐작해봅니다..ㅎㅎ 그리고 말씀 주신바와 같이 저자가 축구하는 스타일을 보면 이소룡의 발차기가 연상되는 듯한 모습들이 종종 나오곤 하는데 어릴적 꾸었던 꿈을 현실에서 바람직한 방법으로 실현시킨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국적은 다를지 몰라도 동양이든 서양이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어느정도는 비슷한 로망들이 존재하는 듯합니다. ㅎㅎ
 

마음이 무거울 때 저자가 하는 방법을 따라해보는 것도 좋겠지만, 나만이 가지고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일단 밖으로 나가서 무작정 걷는다거나 혹은 낯선 장소로 무작정 떠나보면서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히는 것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아니면 만사 다 제치고 잠을 청해보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자고 일어나면 좋지 않았던 컨디션이 회복되면서 다시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 살면서 각자 자신만의 스트레스 해소법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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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고통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 이유가 삶에서 고귀한 가치를 느끼기 위함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싶어 긴가민가하기도 했었지만 두번. 세번 곱씹어보니 굉장히 심오한 의미가 있는 말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뭐든지 쉽게 얻어지는 것보다는 어렵고 힘들게 얻어지는 것이 더욱더 귀하고 가치있는 것인 경우들이 많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위에서 저자가 말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마음이 무거울 때 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노래를 부르고, 경건하게 행동하고, 술을 마시고, 음악을 연주하고, 시를 짓고, 산책을 나가는 거다.

아무리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정말로 원하지 않는 것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채 어정쩡한 중간 상태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다. 그런 이도저도 아닌 상태에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쁜 일이 더 많이 생겨서 고통을 받는 것이 다음에 찾아오는 축복의 순간을 더 큰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위기는 다시 극복할 것이고, 더 자주 그렇게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했다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겉으로 드러난 나의 내면적 삶의 모습일 뿐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

힘든 시기에는 자연으로 나가서 수동적이 아닌, 적극적인 자세로 그것을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약이 없다.

우리 작가들은 여러 방면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아픔을 언어로 표현해야만 하는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고통을 경험해야만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표현이 격앙되거나 감성적이거나 고통스럽거나 우습거나 혹은 불평불만처럼 보일 때가 있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혼자서 외롭게 성장해 나가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고 도와준다는 의미를 지니기에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과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연대감을 준다.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표현해 보아야 한다.

실제로 사람이 두려움을 갖는 대상은 한 가지뿐이다. 몸을 내던지는 것,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 안전했던 모든 것을 뿌리치고 훌쩍 몸을 던지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진 경험이 있는 사람, 그렇게 큰 믿음을 경험하고 운명을 철저하게 믿은 사람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세상은 언제나 다시 태어나고, 또 날마다 죽는다. 모든 생명은 신이 내뱉는 호흡이며 모든 죽음은 신이 들이마시는 숨결이다.

몸이 무너지는 것을 애써 거부하지 않는 사람은 쉽게 죽고 쉽게 태어날 것이다.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두려움에 떨고 힘들게 죽으며 마지못해 다시 태어나게 된다.

목표는 두려움을 낳는다. 목표 자체가 착각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혼자 우주에 매달려 있는 한 축복 속에 살아 숨 쉬며 축복 속에 죽어 갈 수 있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는 다른 휴식이 있다. 그것은 몸을 내던지는 것이다. 거부하지 말라! 기꺼이 죽어라! 기꺼이 살아라!

시간은 참으로 묘하다. 그것은 자기 내면으로 고통받으며, 세상을 더 힘들고 복잡하게 만드는 섬세한 발명품이자 정련된 도구다.

인간이 간절히 원하고 소원하는 것들은 언제나 그 고약한 발명인 시간에 의해서만 분리되었다. 그것은 스스로 자유로워지고 싶은 사람이 거칠게 앞으로 달려 나가기 위해 집어던져야할 목발이고, 부목이다.

새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내일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려워하면 오늘과 현재를 잃게 되고, 그것과 관련된 현실을 잃어버리게 된다. 넉넉한 시간과 관심은 고스란히 오늘에 허락하라!

나는 자살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비겁함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것이 삶을 살아가고, 삶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주는 출구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수사적 표현으로 고귀한 척하는 수치스러움

문제점들은 ‘해결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이며, 그것은 그저 우리에게 고통 그 자체만을 주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 고통은 곧 우리의 삶이 되며, 기쁨이라는 감정과 삶에서 느끼는 고귀한 가치는 오직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옥으로부터 탈출하라. 그것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시작이 있으면 최상의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무언가를 깨닫거나 혼돈을 뚫으려는 의지가 있는 독자들은 내 책들을 통해 우리 시대의 이상과 도덕 뒤에 숨어 있는 혼돈을 볼 수 있다.

혼돈을 새롭게 정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오늘날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으로 겪는 경험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암울한 시간에도 사랑하는 벗이여, 나를 허락해 다오. 기분이 상쾌하든 우울하든 난 삶을 결코 탓하고 싶지 않았다.

햇빛과 악천후는 둘 다 하늘의 얼굴. 달콤하든 씁쓸하든, 운명은 내게 훌륭한 영양이 되리니. 영혼은 얽혀있는 길을 간다. 그것의 언어를 배우라! 오늘 그대에게 고통이었던 것이 내일은 축복이 되리라.

신을 믿지 않는 자들만이 죽음을 택한다. 신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처절한 괴로움과 유쾌한 즐거움을 통해 심오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

아버지의 부름 같은 것을 받고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그런 곳. 우리는 그 마지막 계단에서 비로소 쉼을 느낄 수 있다.

내 삶이 그런 진통을 겪을 때마다 결국 나는 무언가를 얻었다. 그것들은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 자유와 영혼과 심오한 감정들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로움과 몰이해와 아픔도 있었다.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의 삶은 그런 진통을 겪을 때마다 정상적인 것, 바람직한 것, 건강한 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타락의 길을 가고 있었다.

목표는 평화와 안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새롭게 파멸시키는 것이고, 늘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었다.

절망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정당화시키려는 진지한 시도가 만들어 낸 결과다.

절망은 삶을 덕망과 정의와 이성으로 살아가고, 책임을 완수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한 결과로 생겨난다.

절망의 이편에는 아이들이 살고 있고, 저편에는 깨어난 자들이 살고 있다.

나는 절망이 다시 은총으로 바뀌는 것, 그리고 우리 삶의 껍질을 벗김으로써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자주 체험하였다.

문화와 정신, 그리고 그 요구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그에 따라 살고자 한다면 반드시 절망이 따르는 법이라고. 그 절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가 주관적인 체험이나 상황을 지나치게 객관화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그러면 우리는 심리 분석가가 꿈을 해석할 때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볼 수 있게 된다.

심리 분석가는 꿈의 ‘명백한‘ 내용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한다. 그는 융통성이 없어 보이는 대상들, 또 질병과 건강, 고통과 기쁨처럼 딱딱해 보이는 개념들을 그런 식으로 다루는 방법에 익숙해진다.

그와 같은 구원을 체험하는 것이 또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막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러한 체험을 통해 어떤 절망이든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더욱 강해진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건강‘해질 수 없으며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다. 물론 내게도 고통이 없는 날이란 드물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또다시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고 운명을 사랑하게 된다.

다시 밝은 빛을 보고자 한다면 슬픔과 절망을 뚫고 나아가야만 한다.

"나는 원한다, 나는 원한다, 나는 원한다!"

"가고 싶다. 가고 싶다. 가고 싶다!"

"가야만 해, 가야만 해, 가야만 해!"

나는 진심으로 의욕을 갖고 더 씩씩하게 행동하려고 애썼다. 그러자 호수 크기만 하던 하늘이 갈수록 더 커졌고 길은 오르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슬픔이 절정에 달하면 상황이 호전된다.

정신착란에 대한 두려움은 대부분 삶에 대한 것이거나 우리의 성장과 본능이 요구하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다.

본능에 충실한 삶과 우리가 의식하고 싶어 하고, 의식하려고 노력하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깊은 괴리가 있다. 그 괴리를 좁힐 수는 없지만, 그 사이를 뛰어넘는 것은 수백 번도 가능하다. 그럴 때마다 항상 용기가 필요하며 뛰어넘기 전에는 공포가 우리를 엄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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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
품절


일단 포장지를 뜯자마자 드립백 전체적으로 풍기는 진하고 그득한 향이 좋았습니다. 마실 때는 목 뒤로 넘길 때 포장지 맨 밑에 써있는 밤 꿀 맛이 은은하면서 달달하게 느껴졌고 포장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써있는 오렌지와 건포도는 직접적인 맛보다는 미세하게 느껴지는 향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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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독서를 하는 목적이 제각기 다르겠지만, 저자의 경우 책이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을 통해 생각을 하고 발전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목적으로 인해 저자는 자신이 읽는 책 속에서 질문을 찾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좋은 건 일단 벤치마킹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책을 읽고, 책 속에서 질문을 찾아야 한다. 그 훈련이 끝나면 스스로 질문을 만들 수 있다. 그 질문으로 나는 어디까지 발전할지 모른다. - P37

당신이 아끼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져주라. 그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질문을 던져주라. 그 순간 당신은 소크라테스가 된다. 위대한 철학자라 불리는 소크라테스가 한 것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 것밖에 없다. 질문을 던지는 행위는 그만큼이나 위대한 것이다. - P37

"인생은 모든 게 잠깐인 것을, 그렇게 모질게 살지 않아도 될 것을, 바람에 귀를 기울이고 물처럼 흐르며 살아도 될 것을, 말 한마디 참고 물 한 모금 건네며 잘난 것만 재지 말고 못난 것도 쓰다듬으며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듯 서로 불쌍히 여기며 원망 말고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며 살걸 그랬다." - P39

우리는 돈이 독이 되는 줄도 모르고 인생을 바쳐 돈을 번다. 독을 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얼마짜리인가를 알아야 한다. 딱 필요한 만큼만 벌면 된다. 그리고 딱 필요한 만큼을 알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 - P39

책을 읽고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내게 필요한 돈만 벌면서 나머지 시간은 내가 태어난 이유, 즉 가치 있는 삶을 사는 데 집중해야 한다. - P39

사람은 저마다 각자의 그릇이 있다. 그릇의 크기로 행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 그릇에 딱 맞는 돈만큼 가질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책을 읽는 건 바로 내 그릇의 크기를 알기 위해서다. - P40

책을 읽고 사색을 통해 돈을 정복할 수 있다. 심지어 돈을 거절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을 거절할 때 느끼는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 P40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 그리고 그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즐거움. - P40

무조건 돈을 우선순위에 두고 아등바등하는 것은 돈에 끌려가는 것이다. 절대 행복할 수 없다. 어느 순간에는 돈을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때 진짜 세상이 보인다. 내가 태어난 이유를 알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의 답을 알게 된다. - P40

당신은 얼마가 필요한가? 얼마를 벌 생각인가? 돈이 왜 필요한가? 어디에 쓸 것인가? 무조건 많이 벌 생각이었다면 지금 당장 금액을 정하라. 당신이 필요한 돈을 계산해보라. 모르겠다고 포기하지 마라. 지금 계산된 돈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살아가면서 계속 바뀐다. 계산해보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 P40

돈 때문에 주눅 들지 마라. 애써 많이 벌려고 하지 마라. 돈보다는 하루하루 설레고 신나게 살아갈 방법을 고민하고 그런 삶을 살아라. 그런 일을 찾아라. 그런 일은 반드시 있다. - P41

놀고 소비하며 즐기는 것은 단편적인 행복이다. 인간은 생산적인 삶을 살 때 행복하다. 특히 자신의 생산 활동으로 타인을 도와줄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그런 일을 찾아라. - P41

당신이 생산할 수 있는 것 중에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이 있다. 모르겠다면 책을 읽어라. 책이 찾아줄 것이다. 없다면 만들어줄 것이다. 남을 이롭게 하는 생산을 하면 돈은 저절로 따라온다.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 P41

"딱 한 문장으로 만들어보세요." - P42

질문을 길게 한다는 건 내 생각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뭐가 중요하고, 뭐가 중요하지 않은지 모르기 때문에 주절주절 말이 길어지는 것이다. - P43

자신이 파는 상품이나 자신이 하는 일을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건 아직 스스로도 핵심을 모른다는 의미다. 즉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 - P43

추상화의 위대함도 사물의 본질에 집중해 단순화한 것에 있다. - P43

‘차가운 추상‘이라 불리는 네덜란드 화가 몬드리안, 액션 페인팅의 선구자 잭슨 폴록, 입체파 화가 피카소는 모두 사물의 본질에 집중한 이들이다. 그들도 처음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다가 차츰 선을 단순화하고 또 단순화해서 본질만 남겼을 것이다. - P43

피카소는 사물을 분해한 후 재창조했고, 몬드리안은 단순화하여 수직과 수평의 선만 남겼다. 본질만 남긴 것이다. - P43

딱 한 줄로 만들어야 해결하기도 쉽다.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해결 방법을 찾기도 쉬운 것이다. - P43

시인들은 한 페이지, 한 단락에 하고 싶은 말을 담는다. 그야말로 본질을 보는 사람들이다. 시인들도 단순화했다가 재창조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 P43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압축의 힘을 훈련하기 위해서다. 많은 책이 비유와 압축으로 쓰였다. 그 이유는 보다 많은 사람이 각자의 고통과 상황에 맞게 스스로 해석하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서다. - P44

숨은 의미를 깨닫기 시작하면 독서가 즐거워진다. 즐거움과 더불어 엄청난 능력도 얻게 된다. 바로 시간을 압축하는 법을 알게 된다. - P44

시간을 압축하고 시간을 만들어 쓰는 능력 - P44

내 문제를 한 문장으로 만들고 계속 쳐다보자. 그러면 고민이 해결된다. 만약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백퍼센트 성공한다. 그러니 지금 당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 문장으로 만들어보자. - P44

당신은 지금까지 살면서 타인에게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말았다. 당신은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여 타인의 시선 속에 머물러왔다. 당신은 아버지와 어머니, 선생님, 사랑하는 사람, 자녀, 종교, 그리고 이 사회를 위해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 P46

세월이 흐른 후 당신은 스스로에게도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보지만,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다. 당신 자신을 삶의 우선순위 최상단에 올려놓아 보는 건 어떨까? - P46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일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
조건 없이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실재하는 당신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점점 더 사랑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 P46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모든 것이 흐릿해질 때 단 하나 반대로 갈 수 있는 게 있다. 바로 눈빛이다. - P47

나이를 먹었다는 건 수많은 경험을 했다는 뜻이다. 이런 경험은 눈빛에 쌓인다. 그래서 눈빛이 깊어진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건 아니다. 책을 읽고, 사색을 한 사람만이 눈빛이 날카로워지고 어린아이처럼 맑아진다. 육신은 늙었지만 정신은 어려진 것이다. - P47

흐릿한 눈빛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냥 무섭다. 더 이상 생각하기 싫다. 그래서 더 흐릿해진다. 하지만 독서를 통해 눈이 맑아지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일, 향기로운 일이 된다. - P47

끌려다니며 사는 사람의 눈빛은 흐리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눈빛은 생기가 없다. 나이가 들면 그나마 남아 있던 약간의 날카로움마저 사라지고 흐릿한 눈빛을 가지게 된다. 그런 눈빛으로 죽음을 맞이하면 안 된다.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 P47

진짜 죽음 앞에 가면 한순간 눈빛이 빛난다. 깨달음의 순간이다. 이때 ‘아, 내가 지금까지 잘못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얼마나 비참한 죽음인가! 그런 죽음을 맞고 싶지 않다면 내 삶을 내가 지배해야 한다. - P48

나 자신의 행복을 최우선에 두고, 나를 사랑하라. 책을 읽고 생각하라. - P48

세계 3대 종교가 모두 동양에서 탄생했다.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서아시아), 불교는 인도,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생겨났다. 이처럼 우리 동양인들은 훨씬 크고 위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민족이다. - P50

우리는 충분히 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책을 통해 서양의 훌륭한 철학을 배우고, 생각을 통해 그 철학을 뛰어넘어야 한다. 뛰어넘는다는 것은 우리만의 자기만의 확고한 철학을 만든다는 뜻이다. - P51

우리 모두가 책을 열심히 읽는다면 어느 날 저절로 선진국에 진입한 대한민국을 만날 것이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생각의 크기가 이미 선진국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경제 역시 저절로 발전한다. 웹 3.0시대는 상상력의 시대다. - P52

글로 말을 이겨 나를 세뇌시켰던 철학을 벗어던지고 생각에 날개를 달아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위대한 상상력을 만들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쪼그라든 가슴을 펴라. 우리는 생각이 큰 민족이다. - P52

지금이 기회다. 생각으로 과학 위에 군림할 수 있다. AI는 서양이 만들었지만 그것을 지배하는 정신은 동양에서 만들 수 있다. 당신이 해야 한다. 나 하나만을 위한 작은 생각에서 벗어나라. 남을 위한, 더 나아가 인류를 위한 위대한 생각을 하게 해달라고 책에게 부탁하며, 읽고 생각하라. 서양에서 동양으로 기회가 넘어오고 있다. - P52

믿고 읽어라. 그리고 서두르지 마라. 위대한 생각은 책 몇 권 읽는다고 후다닥 나타나는 게 아니다. 위대한 생각은 느리지만 크고 확실하게 나타난다. 한 번 발현되면(발현‘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발현‘되는 것‘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 P53

유럽이 동양을 이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책 읽는 사람이 동양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유럽도 책을 읽지 않는다. 그래서 기회다. 생각해보라. 책이 아니면 우리가 무엇으로 서양을 이기겠는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 P53

서양을 이겨서 세계 1위의 강대국이 되겠다는 작은 생각이 아니다. 이 지구는 동양이 머리가 되고 서양이 손발이 될 때 가장 이상적으로 자라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당신의 머리를 원한다. - P53

불필요한 고통이란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상상하며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 남들과 비교하여 자기 스스로를 비하하고 괴로워하는 것, 지금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것 등이다. 이런 고통들은 책을 읽으면 절대 겪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다. - P54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불안하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일주일에 세 번만 도서관에 가서 30분씩만 앉아 있으면 된다. 그리고 내가 올리는 영상을 보고 5분만 시간을 내서 긍정 확언을 따라 외쳐라. 이렇게만 해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싹 사라진다. - P55

남들과 비교하여 자신을 비하하는 고통 역시 독서로 치유된다. 19세기 영국의 사상가 존 러스킨John Ruskin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에서 "진정한 부는 역량 있는 사람의 손에 들려진 가치"라고 했다. - P55

책을 읽으면 진정한 부가 내 속에 쌓이니 남과 비교할 이유가 없어진다. 내 안에 진짜 부가 쌓여 있는 사람은 명품으로 치장하지 않아도 주눅 들지 않는다. 늘 자신감이 충만하다. 자신을 어디에 데려다 놔도 맨손으로 부를 일으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이런 사람은 절대 남과 비교해서 자신을 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한다. 고개를 떨구지 않는다. 항상 정면을 보고 당당하게 걷는다. - P55

지금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혼란스럽다면 계속 책을 읽으면 된다. 읽다 보면 어쩔수없이 자신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왜 태어났는가? 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언제 가장 행복한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는가?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책을 읽다 보면 뇌가 그 답을 찾기 위해 저절로 움직이게 된다. - P56

물론 이런 질문의 답이 쉽게 찾아지지는 않는다. 몇 년, 몇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그 과정 속에서 나는 계속 성장하기 때문이다. - P56

인간은 성장하는 동안에는 행복하다. 성장이 멈추는 순간 격정이 시작된다. 매일 성장하는 사람은 결과가 당연히 좋을 거라고 믿기 때문에 고통이 없다.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매일 성장하는 자신을 느끼기 때문에 언젠가 내 삶이 정확한 나만의 궤도에 오를 거라는 것을 안다. - P56

우린 쓸데없는 걱정과 고통을 너무 많이 겪는다. 책을 읽음으로써 이 모든 걸 몰아내자. 원리는 간단하다. 독서를 통해 걱정과 고통을 없애면 그 자리에 그만큼의 열정이 생긴다. 이것이 성장의 선순환이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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