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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아리움
데이비드 밴 지음, 조연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나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어.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되길 바란단다. (중략) 우리
삶은 단 한 번뿐이야. 그래서 용서받길 바라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되는 거야. (181p)
자신이 바라는 것을 상대에게 말하는 것, 이루어지라고 계속 그렇게
말하고 결국 이루어내는 것, 과연 그것에 ‘용서’가 들어가도 될까? 데이비드 밴의
<아쿠아리움>을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울 국제 축제’에 참석차 방한했던 작가와의 서면인터뷰 글을 읽다
보니, “내 소설 중 비극이 아닌 작품은 처음”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나는 그의 작품을 처음 읽는 것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이 이야기가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이런 것이 우리가 용서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과거를 모두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현재에 받아들이고
또 인식하면서 끌어안는 것, 천천히 내려놓는 것 말이다.(337p)
사실 나는 용서는 노력으로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문장이 그렇게 내 마음을 흔든 것인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끌어안고, 내려놓아야 하는 것, 그런 것이 용서와 닮아 있는 감정일 것이다. 시간을 강물의 흐름에 비유하듯이, 인생 역시 아무리 거친 바위가
나를 할퀴어도 그냥 그렇게 지나가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물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그 곳에 던져두고 온 감정을 돌아봐야 했던 케이틀린의 엄마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열두 살, 마냥 어리다고는 할 수 없는 소녀, 케이틀린이 20년이 흐른 후에 그 시절을 회상하는 식의 글임에도
그녀의 어머니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이 비극적으로 다가온 것일까?
그 유리 안쪽에서 녀석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우리를 보았을까? 아니면 그저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을? 거울로 만든 집처럼?(14p)
케이틀린은 엄마가 데리러 오기 전까지의 시간을 아쿠아리움에서 보낸다. 그녀에게
아쿠아리움은 하나의 세상이고, 또 그녀의 꿈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어류학자가 되어 수조가 아닌 바다로 떠나고 싶어하는 케이틀린에게 한 노인이 다가온다. 물고기를 보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물고기에 자신을 투영하곤 한다. 어쩌면 그러한 교감이 있었고, 엄마와 단 둘이 살아가는 것에 외로움을 느끼던 케이틀린에게 외할아버지의 존재는 너무나 반가울 것이다. 문제는 엄마이다. 외할아버지는 엄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떠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케이틀린과 엄마가 갈등을 할 때마다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어쩌면 케이틀린의 생각과 달리 아쿠아리움은 물고기에게 지극히 안전한 곳일지도 모른다.
왜 굳이 바다로 나가야 할까? 왜 굳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고집스럽게 여러 가지 의문을 가슴에 품고 있었지만, 가족을 통해 이야기하는 상처와 용서에 대한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니 올해 읽은 소설 중에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다만 그러한
감동과 아름다움에 빠지기 싫다고 투정하고 있는 나의 오기가 용렬해 보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