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패스는 일상의 그늘에 숨어 지낸다 - 범죄심리학자 이수정과 프로파일러 김경옥의 프로파일링 노트
이수정.김경옥 지음 / 중앙M&B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최근에 읽었던 혼다 테쓰야의 <짐승의 성>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모든 범죄에 이유를 밝힐 가치는 없지만, 사람들은 범죄의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범죄가 발생하는 정신적, 사회적 구조를 해명하고 범죄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거기서 도출된 이론을 통해서 범죄를 예방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건 당연히 무섭지만, 가해자가 되는 것도 똑같이 무서운 일이기에, 자신과 범죄자는 뭐가 다른가. 그들과의 경계선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이기도 하다고 말이다. 과연, 범죄자가 되는 사람과 되지 않는 사람과의 경계선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어쩌면 나는 그 해답을 이 책을 통해서 찾고 싶었던 것 같다.

T는 겨울만 되면 여성을 납치하여 강간, 살해한 후 국도변에 암매장했다. 그가 바로 경기 서남부권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의 장본인이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동일범이 여러 해에 걸쳐 저지른 연쇄살인이었고, 부녀자만 무작위로 골라 잔혹하게 죽였다는 점에서 전 국민을 공포에 떨게 했다. 검거된 범인의 선한 얼굴과 서글서글한 성격이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평소 이웃 주민과도 잘 어울리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외국이나 영화에서나 보던 두 얼굴의 사이코패스가 바로 우리 곁에 있었던 것이다.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는 몇 달 전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사이코패스에 대해, 미해결사건 해결을 위해 프로파일링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해서 인상적이었다. 프로파일러 김경옥 박사는 유영철 사건 이후로 여성 프로파일러들의 활약에 대해 언급한 기사를 통해 만났었는데, 두 분 모두 언론 매체의 단골 패널이기도 하다. 혼란스러운 사건현장에서 놓치기 쉬운 단서를 여경들이 찾아내는 경우가 많으며, 여성들만이 가질 수 있는 섬세함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피의자의 입을 열게 하는 경우도 있고 말이다. 실제로 강력범죄 피의자들을 직접 면담하는 그들 직업의 특성이 여성이라는 강점을 만나 어떻게 범죄분석 업무와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도 매우 궁금했고, 실제 범죄자들의 심리를 구체적인 검사 자료와 관련 연구 자료 등을 토대로 세밀하게 분석해낸 그들의 프로파일링 노트도 굉장히 기대가 되었다.

이 책에는 마치 경쟁하듯 살인을 게임처럼 즐겼던 연쇄살인범, 우발적 살인이 계획 살인으로 진행되었던 보험사기극, 단지 웃음소리가 거슬려 살인을 저지른 소시오패스, 아이에게만 성적 만족을 느끼는 소아기호증 범죄, 죄의식조차 가지지 않는 연쇄강간범, 산후우울증으로 아기를 죽인 엄마, 환청과 환상으로 인한 범죄, 게임 중독, 병적 도벽, 방화광으로 인한 충동조절장애를 가진 버인들,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묻지마 범죄, 가정폭력이 낳은 비극, 한국의 음주 문화가 만든 범죄까지.. 우리가 숱하게 뉴스 보도를 통해서 만나보았던 수많은 범죄들이 분류되어 있다. 크게 범주를 사이코패스, 성범죄, 정신질환, 성격장애, 충동조절장애, 한국형 범죄로 나누고, 각각 하위 분류로 세분화되어 들어가면 실제로 벌어졌던 범죄의 사례, 그 범죄자와의 면담을 통해 밝혀낸 사실, 그리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실제 사건 속 범죄자들의 심리적 매커니즘이 범죄심리학자와 프로파일러의 분석을 통해 보여지고 있다. 범행 동기가 불분명한 사건 발생시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윤곽을 파악하기 위해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그들은 문제를 분석하고 이해해서 재범을 막고, 범죄의 순환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

대량 살인이나 묻지마 형태의 살인은 개인 차원의 예방이나 보호가 가능한 범죄가 아니며, 사회 정책적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특히 이들의 근본적 범죄적 동기가 응축된 분노, 불만 등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하며, 따라서 개인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불만, 분노에 직면했을 때 즉시 전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국민의 정신건강 관리 시스템이 일반화될 필요가 있다. 또한 더불어 감기에 걸리면 병원에 가듯,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의 심리적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사실 나는 프로파일링이라는 것이 이미 벌어진 범죄에 대해 자료를 통해 '사후분석'을 하고,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 주목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보니 프로파일링팀이 사건이 발생하면 바로 현장에 투입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들은 사건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훼손되지 않은 현장을 관찰하여 현장에 남겨진 물리적 증거뿐 아니라 범인의 행동 흔적을 찾아내고, 범행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여 범죄자를 분석한다고 한다. 그러니 유능한 프로파일러는 명확하게 나타난 증거뿐 아니라 직접 볼 수 없는 범인의 행동이나 생각까지도 현장에서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셜록과도 같은 존재가 진짜 현실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내가 프로파일러가 하는 역할이라고 막연히 추측했던 것은 바로 범죄심리학자였는데, 그들은 실무자가 아니라 연구자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검거된 시점 이후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진 학문이기도 한데, 일반적인 정서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사회가 그들의 동기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면서부터이다. 이들 범죄심리학자들은 범행 당시 피고인의 정신 상태를 설명하거나 책임 능력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고, 향후 재범 위험성을 평가하기도 하고, 교정 단계에서도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한다. 이들 모두 사회의 어두운 이면에 관심을 가지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끝없는 탐구를 지치지 않고 해나가면서 변화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살인사건 검거율이 무려 97퍼센트로 상당히 높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하지만 미해결 사건들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게다가 범죄의 원인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게 세상에 너무나도 많다. 그러니 누구나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범죄자와 일반인이 크게 다르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일상에서 겪는 갈등과 스트레스는 대동소이하니까 말이다. 평범한 사람도 극단적인 순간에 자기 조절 능력을 잃어버리면 범죄자가 될 수 있다. 범죄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나누는 차이가 결국 순간적인 자제력뿐이라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되지만, 덕분에 이 책에 등장하는 실제 범죄자들의 사례에 그릇된 편견 없이 만날 수 있게 된 것 같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가 없는 새벽,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침대 옆에 두었던 핸드폰이 울린다. 요양원에 계신 아빠는 또 할아버지를 찾으신다. 할아버지 어디 계시냐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그렇게 아빠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해서 찾곤 하신다. 아버지가 요양원에서 지내신 지 어느덧 2년이 지나가고 있다. 여든이 훌쩍 넘으신 나이라 체력적으로도 노쇠해지셨지만, 가끔은 기억이 왔다 갔다 하시기도 한다. 치매란 가장 가까운 기억부터 하나씩 사라지는 거라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오래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얘기를 자주 하시곤 해서 가족들을 안타깝게 하시곤 한다. 살아오면서 한번도 어머니를 챙기거나, 존중하거나, 아꼈던 적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요양원에 계시면서 부쩍 어머니를 찾으신다. 그렇게 삶은 마치 농담처럼 아버지의 오랜 기억들을 옅어지게 만들어 두 분이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시간들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제는 아버지에게 그 어떤 애정도 남아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를 외면하시지 못한다. 어쩌면 그런 게 40년차 부부의 정이라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요즘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면서 그렇게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지금 당장이든, 혹은 내일이든, 아니면 수십 년 후라도. 시기만 다를 뿐이지 태어난 이는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니 말이다. 바쁜 일상에 치여 정신 없이 하루를 보내느라, 우리가 잠시 잊어 버리고 살 뿐, 죽음은 그렇게 우리 곁에 함께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여태 가까운 이의 죽음을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에게도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라는 자각이 서서히 들고 있다.

 

 이유의 <소각의 여왕>에서 해미는 재수학원을 다닌 지 석 달 만에, 고물상을 운영하는 아빠의 일을 돕기 시작한다. 할머니도, 엄마도 병을 앓다가 떠나 버린 뒤 그들에게 남은 거라고는 고물상 밖에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아빠가 몰래 하던 유품정리 일을 시작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유품 정리사로 살아가게 된다. 해미라는 캐릭터가 워낙 밝고, 엉뚱하기에 그렇겠지만, 그녀는 죽음을 꽤나 무심하게, 덤덤하게 여기며 말한다. "자연사를 했든, 자살이든 살인이든, 죄다 똑같아. 부패가 되고 가스로 복부가 부풀어오르고 복부에 든 가스가 새어나오면서 부패액이 흘러나와. 인간이라는 형태가 무너져 내리는 거지...." 유품 정리사 업무를 장에게 설명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인간도, 죽음도 모두 그저 티비 속에 나오는 만져지지 않는 형태의 무엇인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짐작하던 '죽음'과 실제의 '죽음'은 이렇게 다르구나 싶어, 서글퍼지기도 했고 말이다. 엄마의 죽음에 방관 혹은 기여했을지 모른다는 트라우마 속에서 죽은 자들의 유품을 처리하며 살아가는 해미의 이야기는 끔찍한 일에 무심하고, 무거운 일엔 활기차게 진행되다 어느 순간 스스로 소멸하게 된다. 이 험난하고 서글픈 세상 살면서 그저 그런대로 괜찮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정상인 지도 모르겠다.

파울로 코엘료의 <스파이>에서는 더 험난한 세상을 살아야 했던 여인이 등장한다. 1917 10 15일 파리, 검은 실크 스타킹과 실크 레이스로 장식된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여우 털로 소매와 옷깃을 장식한 발까지 늘어지는 긴 모피 코트를 입고, 펠트 모자와 검은색 가죽장갑까지 착용한 한 여인이 감방을 나와 처형 부대가 대기하는 장소로 향한다. 열두 명의 병사들이 몸을 곧추세우고 총을 어깨에 바짝 붙이는 순간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던, 여전히 태연했고 두려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오로지 자신이고자 했던 당당한 여인, 마타 하리. 1차 세계대전 당시 이중 스파이 혐의를 받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마타 하리의 삶을 재구성한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우리 인생은 가장 사소한 부분까지 계획되어 있노라고, 태어나 공부하고 남편감을 찾기 위해 대학에 가고, 비록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남자일지라도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도록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늙어가고, 거리의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인생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척하지만 사실은 '너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어'라고 말하는 마음의 목소리를 잠재우지 못한 채 생의 마지막 날들을 보내는 것'이라는 문구가 내내 가슴에 박힌 가시처럼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다. 사실 내 삶도 저렇게 정해져 버린 게 아닐까, 하다가도 어떻게 여자들의 생을 이렇게 서글프게, 단정지어 말할 수 있을까. 싶다가도 사실 대부분 여자들의 삶이 그렇지 않던가 싶어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한번도 결혼을 꿈꾼 적이 없다. 지나가다 보이는 그 어떤 아기에게 빈말이라도 예쁘다고 말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내 인생의 목표는 언제나 사회적 이름을 갖는 거였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아니라 오롯하게 나 자신으로 살고 싶었다. 그랬던 내가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졌으며,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와 집안일에 매진하기 시작한 지 벌써 이년 반이 지나가고 있다. 하루 종일 아이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고, 저녁이면 퇴근해 돌아온 남편을 챙기고, 쓰러지듯 잠을 자고 다시 아침이 되는 식의 일상이 무한 반복되고 있다. 어쩌면 나는 내가 생각하던 사람이 전혀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내가 꿈꾸던 삶과는 정반대의 생을 살고 있는 셈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꿈꾸었던 대로 살 수는 없는 게 세상이라지만, 나는 지금 제대로 걷고 있는 건지,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 건지 자꾸만 의문이 든다. 남성 중심 시대에서 여성의 권리를 표명했던, 20세기 첫 페미니스트였던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 마타 하리처럼 삶의 어느 순간에도 진정한 나로 살고 싶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이를 위해, 남편을 위해 밥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그들을 위해 내가 가진 시간 거의 전부를 내어 주고 있다. 물론 그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잔잔한 일상의 기쁨 또한 매우 소중한 일이다. 누군가는 생기지 않는 아이를 위해 몇 년씩 고통 속에서 힘들어 하고, 또 누군가는 연인이 없어서 쓸쓸한 겨울을 보내기도 할 테니 말이다.

그러다 만난 <황석영의 밥도둑>은 읽는 내내 따뜻한 집밥을 먹는 것 같은 푸근한 위로를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누군가와 함께 먹는 음식의 위대함과 기쁨을 이렇게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 또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사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밥상은 작은 우주와 같다. 아니, 밥 먹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이리 거창한 비유를 할까 싶을 수도 있지만, 음식만큼 일상에서 손쉽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또 있을까 잘 생각해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끼니를 때우거나, 시간에 쫓겨 대충 배만 채우거나, 단지 먹는다는 행위 자체에만 목적을 두며 살고 있긴 하지만, 언젠가 인생을 되돌아보면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한 음식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황석영 작가가 펼쳐내는 음식 이야기는 작가의 전 생애를 거치며 바로 삶 그 자체를 그리고 있는 것처럼 무궁무진하다. 나라의 경제가 신통치 않았던 육십 년대에 보낸 군 시절의 음식들, 유년시절 전쟁 직후의 음식들과 미군부대의 퓨전 요리들, 구치소와 감옥에서 보낸 다섯 해 동안의 음식들이며 첫사랑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음식과 김일성 주석과 함께 먹었던 특별한 음식 등등 너무도 다양한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한 추억이 펼쳐진다.

코끝을 자극하는 매콤한 향, 치익 소리를 내는 밥솥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밥 냄새, 혀끝에 맴도는 익숙한 감칠맛까지. 그 모든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부엌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나는 하루 동안 나를 스트레스 받게 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나를 괴롭히던 문제들은 내일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은 여유로움이 생긴다고 할까. 세상에 먹는 일만큼 중요한 게 또 뭐가 있겠냐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어떤 문제도 더 이상 껴안고 있겠다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니 말이다. 그렇게 따뜻하고 푸근한 한끼 식사는 우리를 잠시나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가 주곤 한다.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문제 거리들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일이 또 오늘 같이 반복될 거라는 거라는 걸 생각하면 얼마나 지루한가. 거기다 오늘도, 내일도 늘 비슷한 반찬에 끼니를 때우기 위한 식사가 된다면 식사 시간이 즐거울 수가 없을 것이다.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요리들이 내 시린 마음마저 만져준다면, 그저 그런 생각만으로도 한 끼 식사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으로 시작해서, 엄마가 아닌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하다, 결국은 매일같이 마주하는 식사로 결론이 나고 말아버린 이상한 이 글은, 그럼에도 내가 같은 일을 여전히 반복하며 아이와 씨름하고, 남편과 투닥이며 견뎌내야 할 일상에 대한 일종의 자기 위안이다. 언젠가는 항상 꿈꿔왔던 인생에 가까워질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로, 이렇게 쌓이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상들이 결국엔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줄 거라는 믿음으로, 가족을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야말로 그 모든 것들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오늘도 그렇게 책을 읽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락방 2016-12-14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혀 이상하지 않은 글인데요, 피오나님. 잘 읽었습니다.
읽다가 [곰스크로 가는 기차] 생각이 났어요. 혹시 그 책을 읽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 책 속에서 남자는 곰스크로 떠나고 싶어하거든요. 그런데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서 떠나기보다는 정착하게 돼요. 그때, 마을의 누군가가 그에게 이렇게 말해줘요.

˝사람이 원한 것이 곧 그의 운명이고, 운명은 곧 그 사람이 원한 것이랍니다. 당신은 곰스크로 가는 걸 포기했고 여기 이 작은 마을에 눌러앉아 부인과 아이와 정원이 딸린 조그만 집을 얻었어요. 그것이 당신이 원한 것이지요. 당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기차가 이곳에서 정차했던 바로 그때 당신은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기차를 놓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 모든 순간마다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건 나쁜 삶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의미없는 삶이 아니에요. 당신은 아직 그걸 몰라요. 당신은 이것이 당신의 운명이라는 생각에 맞서 들고 일어나죠. 나도 오랫동안 그렇게 반항했어요. 하지만 이제 알지요. 내가 원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만족하게 되었어요.˝


피오나님 글을 읽는데 곰스크로 가는 기차 생각이 났어요. 피오나님, 좋은 글이에요.

피오나 2016-12-14 10:01   좋아요 0 | URL
ㅎㅎ 그 책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어요.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봐야겠네요^^ ˝당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이라는 문구가 와닿네요. 그렇죠. 뭐든 억지로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제가 선택한 거죠. 잊고 있었던 뭔가를 깨달은 느낌입니다. 제가 아직 철이 덜 들었나봐요. 아직도 배워야 할게 많네요.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루클린의 소녀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비밀에 가득 쌓인 약혼녀, 혹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연인, 과거를 지우고 타인이 되고자 했던 누군가라는 설정만 들어도 웬만한 스릴러 한 편이 떠오를 것이다. 그만큼 평범한 소재와 설정이지만, 그것을 누가 이야기로 만드느냐에 따라 작품은 완전히 색채를 달리한다. 판타지와 미스터리에 세련된 연애 소설 느낌마저 가지고 있는 기욤 뮈소라면 어떨까. 아마 당신의 오늘 밤은 이 책에게 시간을 고스란히 내주어야 할 것이다.

갑자기 머리에서 발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소설을 쓰다 보면 간혹 등장인물이 작가를 기습하는 순간들이 있다. 작가가 미처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등장인물 스스로 이야기에 끼어드는 경우이다.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내 손가락이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매우 좋은 글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내가 의도하고 쓴 글이 아닌 만큼 당장 지워버리면 그만이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이야기 전개상황에서 매끄러운 윤활유 역할을 해주는 문장이었다. 작가인 나에게는 간혹 발생하는 돌발 상황으로 그때마다 매우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작가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등장인물 스스로 이야기에 끼어든 셈이니 정말이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라파엘과 소아과 의사인 안나는 결혼을 3주 앞두고 있다. 그들은 앙티브의 코트다쥐르 해안에서 늦여름의 마지막 햇빛을 만끽하며 둘이서 오붓한 주말을 보내고 있는 참이었다. 그들은 결혼식의 증인이 되어줄 친구 두 명과 라파엘의 아들 테오, 그렇게 세 사람만 하객으로 참석하는 소박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라파엘은 곧 부부가 될 사이에서 비밀은 없었으면 한다고, 아직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 있다면 시원하게 털어놓으라고 말을 건넨다. 결혼을 약속했지만 난 아직 당신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었기에, 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숨기고 싶은 비밀 한두 가지쯤은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서로 생각의 차이를 인정해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라고 하며 그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

"지나간 일을 돌이킬 수 있을까?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 지나간 과거를 들쑤셔 상처를 헤집어놓을 필요는 없다는 뜻이야."

그럼에도 라파엘은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각오가 되어 있다며, 무슨 이야기를 듣는지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 자신하며 그녀에게 비밀을 얘기할 것을 종용하고, 마침내 안나는 태블릿pc를 꺼내 사진 한 장을 그에게 보여준다. "내가 저지른 짓이야"라고 말하며. 끔찍한 사진에 너무도 놀란 그는 충격을 받아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가방을 집어 들고 펜션을 나와 버렸고, 그 후로 안나는 종적을 감 춘 채 사라져 버린다. 뒤늦게 라파엘이 자신의 실수를 자각하며 그녀를 찾지만,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라파엘은 같은 건물에 살면서부터 친분을 다져왔던 전직 형사 마르크와 함께 안나의 과거로부터 자취를 찾아 그녀를 찾기 시작한다. 안나의 집부터 수색하기 시작한 그들은 그곳에서 40만 유로나 되는 지폐더미가 담긴 가방과 위조된 신분증 두 장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본명이 클레어 칼라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가 이미 오래 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게다가 클레어 칼라일은 희대의 사이코패스로 알려진 하인츠 키퍼에게 희생된 소녀들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 대체 라파엘의 약혼녀는 어디로 사라진 것이며, 그녀의 정체는 뭘까.

"아이를 임신 중이라고 했지? 엄마가 되면 당신도 알게 될 거야. 세상은 자식을 가진 사람들과 갖지 않은 사람들로 나뉘지. 부모가 되면 훨씬 행복해지기도 하지만 무한히 약한 존재가 되기도 해. 자식을 잃은 슬픔과 좌절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거야. 평생 십자가를 짊어지고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고통이 주어지니까. 당신은 오늘이 평생 최악의 날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최악은 미래형이야. 내게 있어서 최악은 루이즈와의 추억이야. 어느 날 아침 문득 잠에서 깨어나 딸아이의 목소리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루이즈의 눈빛,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던 습관, 머릿속에서 낭랑하게 울려 퍼지던 웃음소리를 영원히 듣지 못하게 된 거야."

벌써 국내에서 출간되는 기욤 뮈소의 작품이 열세 번째인데, 어쩌다 보니 그 동안 그의 작품들을 모두 읽었다. 재미있는 건 항상 전작과 비슷비슷한 느낌인데, 매번 페이지에서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몰입하게 되고, 꼭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선 매번 소설 속 인물이 페이지 바깥으로 걸어 나오거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열 개의 알약이 존재한다거나, 현실에서 만난 두 남녀가 실제로는 전혀 다른 시간대에서 살고 있었다거나, 타인의 죽음을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거나 판타지적인 요소와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적절하게 배치되어 호기심을 자아내곤 했다. 하지만 그 어처구니 없게 비현실적인 소재를 너무도 현실적인 인물들의 일상과 엮어 놓는 실력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있을 법하다고, 그럴듯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갈수록 그의 작품들이 '스릴러' 형식에 치중하고 있어 더욱 반가운데, 이번 작품으로 본격 스릴러 작가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는 프랑스 현지의 평을 이끌어내었다고 한다. 스릴러화 될수록 판타지적인 부분보다는 현실적인 사건들을 그리고 있어 더욱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아지고 있다. 특히나 이번 작품의 주인공이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는 아빠인데다, 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건들이 모두 아이의 실종과 연관되어 있어 부모의 입장에서 읽기에도 더욱 몰입할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막판의 반전 또한 기욤 뮈소 작품의 백미인데, 어이없을 정도로 황당한 설정과 상황들을 결국은 설득력 있게 만들어주고, 인물들을 현실의 땅에 발 붙이도록 해주는 것 또한 바로 이 반전의 역할이다. 반전의 역할이 깜짝 쇼가 아니라, 납득과 안도를 주는 장치라고나 할까. 기욤 뮈소의 작품을 그 동안 꾸준히 읽어왔던 독자들이라면 이게 어떤 느낌인지 잘 알 것이다. 그가 워낙 작품 스타일이 크게 바뀌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매번 새로운 작품을 만날 때마다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만드는 묘한 능력을 가진 작가라 작품 속에서 반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짐승의 성 스토리콜렉터 51
혼다 테쓰야 지음, 김윤수 옮김 / 북로드 / 201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서재에 책을 보관하는 기준은 딱 한 가지이다. 다시 읽을 것인가.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을 것인가. 혼다 테쓰야의 <짐승의 성>은 명백하게 후자다. 너무 잔인하고 끔찍해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 마자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졌다. 작품이 형편없어서가 아니다. 이런 잔혹함을 감당하기엔 내가 마음이 너무 약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인간은 무서운 것이 아닐까.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건 당연히 무섭지만, 가해자가 되는 것도 똑같이 무서운 일이다. 자기 안에도 범죄의 싹이 있을 수 있다. 지금은 괜찮더라도 언제 자신도 범죄자가 될지 모른다. 그래서 알고 싶은 것이 아닐까. 자신과 범죄자는 뭐가 다른가. 범죄자가 되는 사람과 되지 않는 사람과의 경계선은 어디에 있는가.

자동차 정비 공장에서 일하는 스물아홉의 신고는 현재 스물넷인 세이코와 동거 중이다. 같이 근무하는 이들이 질투할 정도로 귀여운 그녀에게 푹 빠져 행복감에 취해 살던 신고는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가서 웬 노숙자 같은 지저분한 영감이 밥을 먹고 있는 걸 보고 당황한다. 세이코는 곰을 닮은 그 남자를 아버지라 소개하지만, 분명 예전에 보여줬던 사진 속의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가난하고 지저분한 낙오자 같아 보이는 그는 집에서 별다른 말도 하지 않고, 특별한 일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 채 시간을 보내기만 한다. 시간이 지날 수록 그의 존재가 불편한 신고는 급기야 그의 뒤를 따라다니기 시작하고, 뭔가 꼬투리를 잡아서 그를 내보겠다 마음 먹는다. 그런데 남자는 점점 수상 쩍은 행동과 의미를 알 수 없는 일들을 벌이고, 신고는 점점 더 그의 정체를 파악할 수가 없다.

한편, 한 소녀가 경찰서로 신변보호를 요청하는 전화를 걸어오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소녀는 온몸에 상처가 많았고 오랜 기간 학대나 고문에 가까운 행위를 받은 것처럼 보이는 상처가 몸 곳곳에서 발견된다. 소녀 마야가 학대, 감금을 받았던 곳은 선코트마치다 403, 그곳에 있었던 남자 우메키 요시오와 여자 야쓰코를 피해 도망쳤다고 한다. 다음 날 경찰이 403호를 방문하자 집에서 나타난 여자 역시 폭행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였고, 우메키 요시오라는 남자는 찾을 수 없었다. 그 집은 고다 야스유키라는 남자 이름으로 계약되어 있었는데, 그 역시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마야는 자신의 아빠인 고다 야스유키가 두 사람에게 살해되었다고 밝혔고, 아쓰코 역시 자신들이 그를 죽였다고 시인함으로써 사건은 상해에서 살인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그리고 맨션의 욕실에서 나온 DNA는 무려 다섯 명, 더구나 그 중 네 명은 혈연관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후 마야와 야쓰코의 취조에 의해서 밝혀지는 사실들은 너무도 놀라운 일들 투성이라, 눈을 의심하게 만들고, 내 심장을 당황스럽게 했으며, 그 잔혹하고 끔찍함에 머리까지 아파왔다. 딸이 아버지를 죽이고, 동생이 언니를 죽이고, 서로가 서로를 고문하고 학대하는 지옥도. 교묘한 말로 꾀어 재산과 정신을 빼앗아, 결국 직계가족끼리 서로 학대하고 폭행하고 죽이게 만들고는, 그 시체를 다지고 삶고 믹서로 걸쭉하게 갈아 흘려보내 존재의 흔적조차 완전히 없애 버리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져도 되는 것일까. 소설 속 상황이라고만 치부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그것이 실제 현실에서 벌어졌던 일이라고 하니, 어디 가서 토악질이라고 하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뭐 이런 엿 같은 상황이 다 있나. 끔찍함과 서글픔을 넘어서 분노마저 생겼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하고, 대체 왜 그런 짓을 당하고 있는 건지. 누군가 경찰에 신고만 했더라도 이렇게 막장에 이르게 되진 않았을까. 피해자들에게도 그 어떤 동정이나 연민이 들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도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도망치려고 들지 않았던 그들의 나약함에 분통이 터졌기 때문이다.

우메키 요시오라는 사내는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전혀 다른 생각도 한다.

우메키 요시오 같은 인간은 어디에나 있지 않을까.

그 평온한 마치다 거리에도 나타났는데, 이 조용한 오이즈미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지금도 바로 뒤쪽 주택에서 누군가가 감금되어 고문당해 살해되고 해체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우려가 늘 망령처럼 뇌리에 자리 잡고 있다.

혼다 테쓰야는 경찰 소설로 유명한 작가이다. 우리가 흔히들 일본 경찰 소설의 대가하면 떠올리는 작가들, 요코야마 히데오, 사사키 조, 곤노 빈, 다카무라 가오루가 있지만, 나는 거기에 혼다 테쓰야도 더한다. 특히나 혼다 테쓰야는 남자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여자 경찰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에 특별한 재능을 보여왔다. 대표적으로 히메카와 레이코 형사 시리즈와 지우 시리즈에서는 경찰이라는 전형적인 마초 조직에서 남자들과 겪어야 하는 여자 경찰들의 갈등과 그들만의 심리 묘사가 돋보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직접적인 사건 묘사는 상당히 센 면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이번 <짐승의 성>에서는 폭력, 고문, 살인, 상해, 납치, 감금 등 그야말로 잔인하고 엽기적인 범죄 소설의 모든 것을 총망라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함부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작품이다. 심장이 약하신 분들이나 임산부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는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작품이다.

게다가 더 무시무시한 것은 이 작품이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2년에 실제로 있었던 '기타큐슈 일가족 감금살인사건'을 소설로 재구성한 작품이라고 하니 말이다. 2002 3, 일본 후쿠오카 현 기타큐슈 시에서 17세의 소녀가마쓰나가 후토시오가타 준코에 의해 1년 동안 어느 아파트에 감금되어 학대와 고문을 당했다며 경찰을 찾아온다 그로 인해 서서히 드러난 진실은 그 아파트에서 무려 7명이 살해되었다는 것. 그것도 딸이 아버지를, 사위가 장모를 살해하고 해체하는 등 그야말로 짐승만도 못한 참극이 벌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이 사건은 그 엽기성 때문에 보도 제한 조치가 걸려 뒤늦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혼다 테쓰야는 소설을 통해서 이 잔악한 사건의 본질을 파헤치고자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범죄 수사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범인이 범죄를 동기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 말이다. 그는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왜 그런 말을 했고, 왜 사람을 죽인 건지. 어떤 일을 하게 만드는 것. 어떤 행동에 대한 동기를 알아야 그를 이해할 수 있으니 말이다. 동기 없는 범죄는 바로 그 이해할 수 없음으로 인해 엄청난 공포를 몰고 온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해 영역을 넘어선 존재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게 마련이니 말이다. 혼다 테쓰야의 <짐승의 성>에서는 '누가' '어떻게'보다 더 중요한 ''의 영역이 빠져 있다. 사건의 범인도, 벌어졌던 참극도 극 초반에 모두 밝혀지지만, 우리가 페이지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알 수 없는 건 바로 범인의 동기이다. 작가는 말한다.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건 당연히 무섭지만, 가해자가 되는 것도 똑같이 무서운 일이라고. 당신 안에도 범죄의 싹이 있을 있다고. 범죄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면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 없다는 것과도 같다고 말이다. 극중 우메키 요시오 같은 인물이 거리 어디에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오싹했다. , 정말 마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이 책을 절대 추천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강심장인 분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길 바란다. 당신이 상상도 못할 이런 세상도 존재한다는 걸 경험해보시길. 절대 직접 겪으면 안 되는 경험이니, 간접 체험을 통해서라도 말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6-12-13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내용은 언뜻보면 영화 크리피 와 비슷한 부분도 있네요. 같은 일본이라..같은 사건으로 다룬건가 싶은구석도 있는데 이웃집 여학생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라는 얘기.. 있을법한 얘기라고 생각해요. 단절된 이웃관계때문에 ..

피오나 2016-12-13 11:40   좋아요 1 | URL
이웃의 범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현대 사회의 단절감에 대해서는 <크리피>가 떠오를 수도 있겠네요 ^^ 사건은 전혀 다른 거라..그려가는 방식은 다르지만요. 일본 작가들이 잔혹한 사건들을 좀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내는 것 같기는 합니다. <살육에 이르는 병> 도 그랬고, 기시 유스케의 작품들도 그랬고요.

낭만인생 2016-12-13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입을 다물지 못하겠네요.. 소설이라고만해도 기겁할 일인데 실화라니.... 마음이 무너집니다.

피오나 2016-12-13 12:45   좋아요 1 | URL
그죠? 이런 일이 벌어지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자각만으로도 끔찍해집니다. ㅡㅜ

cyrus 2016-12-13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끔찍한 생각이지만, 요즘 우리나라도 일본에 일어날법한 흉악 범죄 발생 빈도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피오나 2016-12-14 09:26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세상이 갈수록 각박하고, 끔찍해져 가고 있어요ㅡㅜ

냥냥이 2017-01-31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서평만 봐도 소름이.. ㅜ.ㅜ 용기가 생긴다면 읽고 싶지만, 저도 고민되네요..

피오나 2017-01-31 10:24   좋아요 0 | URL
하핫.. 이 책은 진짜 각오를 좀 하시고 읽으셔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잔인해서....^^;;;
 
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새벽의 7>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라는 인물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프라하의 도살자', '피에 젖은 사형집행인'등의 별명으로 불리며 유태인 학살의 주요 계획자였으며, 하인리히 히믈러를 월등히 뛰어 넘는 수준으로 190이 넘는 장신에, 4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취미로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수영, 스키, 승마, 펜싱 등 스포츠에도 만능이었으며 똑똑하고 비상하기로 소문한 인물이었다. 영화는 그를 암살하는 작전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최근에는 체코 레지스탕스 2명의 코드네임을 따서 <앤트로포이드>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로랑 비네의 <HHhH> 역시 바로 그 하이드리히 암살작전에 대해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기존의 그 어떤 이야기와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소하고도 낯설게 역사를 이야기한다.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는 싸움이다. 이런 이야기는 솔직하게 할 수밖에 없다. 얽히고설킨 수많은 등장인물, 사건들, 날짜들, 끝없는 원인과 결과, 사람들, 실존했던 사람들, 그들의 인생, 활동, 빙산의 일각처럼 다뤄 보는 그들의 생각, 실망스러운 인간관계의 덩굴이 멈추지 않고 언제나 더 높고 더 무성하게 퍼지는 역사의 벽, 그 벽에 번번히 부딪히는 나.

특이하게도 이 작품에서 '' 1인칭 화자가 아닌 작가 자신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을 구상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글을 쓰는 전 과정을 그린 일종의 작가 노트와 소설이 번갈아 가면서 진행되는 구성이다. 작가는 '실존인물' '실제사건'이라는 역사 소설의 기본 공식을 매우 충실하게 따르면서 그 이야기를 잘 전달하기 위해 허구의 그 어떤 것도 첨가하지 않을 작정이라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녹음, 속기 자료를 토대로 에피소드와 대사를 구성하고 취재, 집필 과정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는데, 덕분에 그가 그리고 있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그 긴박한 시간 속으로 독자가 완전히 '몰입'하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인물이 처한 상황에 감정 이입을 하거나 극적인 구성을 따라가며 긴장감을 느끼거나 극에 몰입해서 내가 책을 읽고 있다는 현실을 잊어버리는 일은,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절대 일어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체, 이 작품의 정체가 뭔가.

'역사적인 사실을 매우 정확하게 고증하는 소설도 있고, 실제 일어난 사실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소설도 있고, 왜곡까지는 아니지만 역사적 진실이라는 벽을 교묘히 우회하는 역사 소설도 있다.' 하지만 로랑 비네는 자신이 역사를 픽션으로 다루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며, 매 순간 모든 장면이 실화라는 느낌이 고스란히 살아 날 수 있게 글을 쓰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사 교과서를 쓸 마음은 없기에, 개인이 겪은 사건을 중심으로 써 나갈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저 일어난 일들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작가의 시선이 개입될 수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그는 '역사적 사실을 쉽게 풀어내기 위해 등장인물을 만드는 것은 증거를 위조하는 것과 같다'며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다가 205 챕터에 이르러 (전체 257 챕터) 자신이 쓰고 있는, 혹은 쓰고자 하는 소설의 방식에 대해 정의한다. 자신이 쓰고 있는 것은 '인프라 소설(실화, 가상의 내러티브, 작가의 생각이 결합된 소설)' 이라고 말이다. 작가가 스스로의 작품에 대해 이해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도 날카로웠던 부분들이 조금은 뭉툭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시종일관 대체 무슨 작품이 이렇지? 싶어 다소 불편한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이야기가 소설처럼 구멍이 뚫려 버린다. 일반 소설이라면 소설가가 구멍의 자리를 정하지만 조심성이 지나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카를 다리를 지나 바츨라프 광장을 거슬러 올라 박물관 앞을 지나는 장례 행렬 사진들을 훑어본다. 다리 난간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석조 동상들이 하켄크로이츠를 굽어보고 있다. 뭔가 역겨운 느낌이 든다. 차라리 성당 회랑에 매트리스를 깔고 자는 게 낫다. 조그만 자리가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말이다.

<HHhH>라는 독특한 제목은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로 불린다(‘Himmlers Hirn heißt Heydrich).’라는 뜻이다. 나치의 수장 히믈러가 있었지만, 실질적인 권력과 유태인 학살의 계획을 세웠던 건 하이드리히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하이드리히가 아니다. 그는 작전의 표적이지 주체가 아니므로, 그에 대한 이야기는 배경을 설명해 주는 역할에 그친다. 그를 암살한 두 영웅, 즉 유인원 작전이라 불렸던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의 주체였던 가브치크와 쿠비시가 진짜 주인공이다. 로랑 비네는 이들 두 사람을 단순히 소설 속 문단을 이루는 검은색 글자로만 표현되는 등장인물이 아니라 역사 속 인물로 생생하게 그려내고자 했다. 그렇게 역사 속 특정 영웅에 집중하기 보다는, 다양한 인물들이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간 속에서 매우 입체적으로 보여지고 있다. 흥미로운 건 끊임없이 작가가 개입해서 자신이 '이야기를 쓰고 있음'을 밝히지만, 어느 순간 역사의 한 복판에 서서 그 사건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 거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우리는 2차 세계 대전을 겪어 보지 못한 세대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아무리 최선을 다해 실화에 가깝게 스토리를 구성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이라고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게 사실이다. 설마 저런 일이 진짜 벌어졌을까. 인간이 실제로 저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까. 싶을 만큼 믿어지지 않는 일들이 역사라는 이름 아래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있었던 사건들을 나열하는 방식보다는, 역사지만 픽션으로 재창조하는 방식을 더 선호하는 편이었기에 작가가 끊임없이 토를 달고, 코멘트를 붙이고, 주석을 덧붙이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의 그런 노력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역사와 소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고, 현실과 픽션 사이의 경계에서 부단히 글을 쓰고 있는 '작가의 존재'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전혀 껄끄러움없이 말할 수 있다. 자고로 역사 소설이란 이렇게 쓰는 거다. 그렇지 않은가. '역사' 소설이라는 그 자체보다 그것이 쓰이는 방식에 대한 치열한 고민만으로도 이 작품은 우리를 2차 세계 대전의 그 언저리 어디쯤인가로 데려가고 있으니 말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는재로 2016-12-10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읽으면서 가장공감할수없는게 폴란드에서는 테러리스트였던 그들을영웅으로 인정하고학교수업에 관람하는코스를만든것 한국이었다면 인정은커녕 아예심기거스릴까 악당으로교과서에 수록했을테러리스트들 그래서 멋있다 그리고올바른정의라생각되는

피오나 2016-12-13 08:24   좋아요 0 | URL
그죠. 저도 공감할 수 없는 부분들도 많았어요. 근데 저는 내용보다는 이 책이 쓰여진 형식에 더 관심이 가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