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박물관 산책 - 문화인류학자 이희수 교수와 함께하는
이희수 지음 / 푸른숲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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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라는 정치단위가 주는 감흥, 동경, 위엄이란 실로 남다른 바 있는 듯합니다. 셀주크 투르크가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임했다가 상대가 저지른 뜻밖의 전술적 실책에  힘입어 광대한 소(小) 아시아 영토를 만지케르트에서 확보했을 때, 이들은 이곳에 룸  술탄국(國)이라는 경계를 새로 설정해서 다스렸습니다. 천 년을 지중해에서 패권자로 군림해 온 실체에 대해, 이름의 잔해라도 그대로 보존해 주는 게 자신들의 자존에 그리 해 되 것은 없다 여긴 소이입니다. 이로부터 다시 수백 년이 지나서야, 부족 시조를 달리하는 별개의 제국이 나서서, 최종적으로 "로마"란 이름을 지닌 제국의 심장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정복자인 메메드 2세는 현지의 신앙, 풍습, 언어에 대해 일단은 원상의 존중이란 관용적 정책을 취했습니다. 인종과 사고, 기질이 판이한 종족을 다스리는 제국이라면, 그 정도의 아량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덕입니다. 여튼 과거의 늙고 쇠잔한 제국을 정복한 젊은 제국은, 인수한 유산과 그 유산이 뿜어내는 영광을 가능하면 본 모습 그대로 후대에 전하려고 애썼고(쉽지 않은 결단이었겠죠), 그 결과가 우리 현대인들이 목도하는 대로, 그저 평범해 보이는 공화국 터키에 그토록 많은 "인류 문화 유산"이 분포해 있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터키 정복자들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행태에 대한 평판에 그 표현, 그 글자 하나마다 신뢰를 준다면, 이는 대단한 모순과 인지부조화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지에 가서 보아야, 투르크 제국 이전과 이후가 얼마나 긴밀하고 따뜻한 호흡을 교차하고 있었는지 그 확인이 가능할 테니까요.



이 책은 한국에서 터키사 연구, 현대 터키 정세 연구에 권위자이신 이희수 교수님이, 천연색 사진 자료와 인문적 통찰, 지론을 복합해서, 현재 터키에 대한 우리의 시각과 이해가 어떤 포지션을 잡아야 하는지, 일반 독자 입장에서 편한 접근이 가능하도록 돕는 내용입니다. 터키는 최근 IS의 발호로 다시 국경 일부가 정세 불안에 빠지기는 했으나, 그래도 서아시아에서 보기 드물게 치안 유지, 건전한 경제 성장을 달성하고 있는 국가입니다. 당장 여행자들의 안전이 위협되는 수준은 아니죠. 이 서평이 작성된 5월 31일 현재, 터키는 남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외교부에서 발동한 어느 주의단계(여행 자제 등)에도 해당되지 않은 국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고 다방면의 교류를 해방 직후부터 이뤄 오기도 했죠.

책에는 "서양이 터키에 대해 얼마나 많은 정신적 빚을 졌는지"에 잦은 언급이 나옵니다. 이 논의의 배경을 알려면, 서양이 터키에 대해 얼마나 나쁜 선입견, 편견을 지녔는지부터 먼저 살펴야 합니다. 셀주크 투르크가 소위 "성지"를 점령하고, 동시에 동서 무역의 요충지를 장악한 후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부터, 서유럽인들은 터키에 대한 경계와 증오감을 드러내기 시작했죠. 십자군의 원정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사실상 현지인들에게 피해를 준 건 우리가 잘 알듯 기독교들의 과오가 더 큽니다. 종교를 표지로 한 두 진영의 대립이 이처럼 첨예해지고 나서는, 보다 격렬한 양상으로 군사적 갈등이 야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잔혹한 만행이 자주 빚어졌죠. 어느 싸움이건 가해자가 피해자가 분명히 구별되는 건 아니고, 대개 자신이 도발한 범위에 대해선 쉽게 잊는 게 상례입니다. 중근세사 전체를 통해 투르크는 기독교 세력에 대해 공세적 태도를 유지했고, 서구 국가들은 자연 과장, 왜곡된 인식을 그들에 대해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술탄의 일인 전제정이 통치 전반에 걸쳐 불러온 해악이 근대에 이르기까지 해소, 극복되지 않고 이어졌기에, 터키에 대한 나쁜 인식이 더욱 고착된 건 일부 그들이 자초한 면이 있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불가리아와 아르메니아에서 그들이 저지른 제노사이드 역시, 비슷한 시기 제국주의 일본이 우리에게 자행한 만행을 잊을 수 없는 처지에서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소행입니다.

여튼 터키, 투르크는, 근 오백 년(그 이상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에 걸쳐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이 만나는 접점 일대의 광대한 영토를 호령하던, 세계사적으로 겨우 중화 제국 정도나 그에 견줄 수 있을 만큼 강성한 제국이었고, 통치 시스템의 지속성과 세련됨 면에서 몽골 제국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원칙과 일관성, 독특한 신조에 의해 피지배 종족 다수를 다스렸기에, 문화 유산은 지배자 고유의 것이 성취한 수준을 훨씬 넘은 기존의 유산을 넉넉히 아우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자 이희수 교수님이 지적하는바 "서양이 터키에 크게 빚진 사실"입니다. 투르크는 그때까지 현지에 내려오던 소중한 유산을 제국의 이름으로 끌어안아 품위 있는 컬렉션을 만들다시피했고, 이를 제국이 망해갈 무렵에도 사방에 흩뜨리지 않은 채 비교적 잘 보존하여 현대인이 온전히 감상하고 그로부터 정신적 효익을 얻을 수 있게 도왔다는 것입니다.

성 소피아 성당의 사연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처음으로 이 도시에 이슬람의 깃발을 꽂았을 때, 정복자의 관용 덕에 대대적인 약탈이 이 성스러운 건물에서 행해진 바는 그닥 크지 않았습니다. 이 유적이 큰 시련을 겪은 건, 그보다 이백 년 앞서 라틴인(프랑스인, 베네치아 인 등)들이 "못 받은 빚을 받아내려 자력 구제를 시도했을" 그 시점이었습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토록 대대적인 약탈, 파괴, 신앙에 대한 능욕이 행해진 적은 없었다"는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그토록 어이없는 만행이 이뤄진 점과 대조하면, 터키(투르크) 정복자들이 어느 정도 여유와 관용으로 제국을 다스렸는지 짐작이 가능합니다.

이스탄불 현지에는 1453 파노라마 박물관이라는 게 있습니다. 터키인들로서는 세계사의 거대한 전환점을 이룬 이 정복이 자랑스럽기도 하겠으나, 패배한 그리스인들에게도 지존의 황제까지 그 목숨을 바쳐 가며 마지막 투혼과 애국심, 신앙심을 불태웠다는 점에서 장엄한 긍지를 갖는 대목이죠. 저도 구경한 적 있습니다만, 이 당시에 벌어진 양측의 대접전은 인류 역사상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극적인 이벤트였습니다. 이곳을 둘러보고 온 한국의 모 전직국회의장이, 그 관람의 감흥을 살려 책 한권을 지어 내었을 정도죠. 터키 당국의 훌륭한 정책적 안목이 돋보이는 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또 그 조상들은 타 민족으로부터 인수한 바를 잘 보존한) 유산만으로 관광객을 끄는 게 아니라, 이처럼 지난 역사의 현대적 재현을 통해서도 볼거리를 제작하여 웅대한 과거의 위용을 외부인들에게 상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터키는 공화국을 수립하고 수십 년 동안의 노력으로 재건에 성공하여 현재는 인구 대국, (전성기에야 턱없이 부족하나) 영토 대국, 지역 강국의 위상인데도, 제국의 해체 몰라기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아직도 외국인들 사이에 그닥 존경받는 이미지를 쌓지 못하는 게 유감이긴 합니다.


문화 유산은 곧 지난 풍속의 자취를 더듬어, 옛 사람들이 어떤 의식과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고 삶을 영위했는지를 짐작게 하는 좋은 단서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혼사를 앞두고 시어머니 될 이가 며느리 후보자와 알몸으로 대면하며 서로의 인격과 됨됨이를 살핀 목욕탕 문화는, 오늘날 한국에서도 고부 갈등이 심한 당사자가 같이 대중탕에 다니면서 서로에 대해 한 꺼풀 깊은 이해를 도모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눈길을 끕니다. 아무래도 기원이 같은 동아시아다 보니, 현지 혼혈과 기후 적응을 통해 크게 달라진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 깊숙한 곳에서는 서로 통하는 바가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터키에 남아 있는 고대 그리스 유적이, 그리스 본토보다 더 양적 질적으로 풍부하다면 많은 이들이 놀랄 만합니다. 실상은 이 소아시아 반도부터가, 특히 서부 해안을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농경, 무역 등 여러 경제활동으로 터전을 삼던 주무대였습니다. 서양 문명의 태반 구실을 했던 그리스인들의 본향 중 한 군데를 그토록 오랜 동안 지배한 게 터키였으니, 이처럼이나 많은 박물관이 자리하여 귀한 유산을 품고 있음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터키는 세계사적으로 보기 드물게, 동과 서를 자기 한 몸에 아우른 적이 있고, 오늘날까지 인류 문화의 연속성 유지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할 큰 공적이 있습니다. 책은 올컬러 편집에 백상지 인쇄이고, 휴대하기에 가벼워 현지로 여행을 떠나는 분들이 가이드북으로 삼기에도 안성맞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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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셰프 -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셰프의 24시간
마이클 기브니 지음, 이화란 옮김 / 처음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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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이란 "먹는 존재"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거나 평가절하활 수 없습니다. 짐승과 만물의 영장을 가르는 근본적 차이점이 있다면, 의식이나 비가시적 지표 등 막연한 기준들을 일단 제외할 때, 먹을 것을 날것 그대로의 상태로 먹느냐, 아니면 정해진 조리 방식을 거친 후 섭취하느냐 하는 잣대로, 누구의 눈에도 객관적인 판정이 가능한 게 바로 "요리 문화"라는 점은 명백합니다. 프랑스인들이 그처럼 자문화 중심주의에 마음 놓고 빠져들 수 있는 것도,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정교하며 인간 보편의 미각을 효과적으로 공략, 마음을 사로잡게 하는 강력한 무기인, "프랑스식 요리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는 확고한 자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어느 미국인 요리장의 회고담을 이야기의 본 줄기로 삼고, 직업인으로서의 철학을 틈틈이 요약한 에세이집입니다. 요리사라는 직업이 아직 한국에서야 확고한 평판과 존경을 얻은 편은 아니지만, 자라나는 세대는 자신이 자라온 환경에 따라 요리장이란 직업이 얼마나 큰 성취감과 명예를 안겨 줄 수 있는지 충분히 유리한 조건을 가질 수 있기에, 일생을 두고  영위할 기능인으로서 셰프의 삶을 동경하기도 합니다. 이 책은, 그런 독자가 곁에 놓고 읽으면서, 소중한 꿈을 가꿀 수 있는 좋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비단 요리장이 꿈인 이들만 읽으라는 내용, 기획은 물론 아닙니다. 일류 요리사이자 이처럼 멋진 책 한 권을 써서 세상에 내 놓을 실력이 되는, 미국 유수의 레스토랑에서 굵직굵직한 경력을 두루 거친 저자 마이클 기브니는, 자신이 겪은 다양한 체험을 소재로 하여, "요리장으로서 한 사내가 세상과 소통, 교류, 사랑, 때로는 충돌하는 지점이 어디어디이며, 그가 직업인으로서 큰 성취감을 느끼고, 때로는 패퇴하여 상처를 입는 때가 언제인지", 본분이 이야기꾼 아닌가 싶게 재미있는 말투, 다채롭고 격조 있는 표현으로 독자에게 들려 주고 있습니다. 요리를 안 접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우리가 접하는(사람마다 빈도수에 차이는 있겠으나) 일류 요리가 어떤 과정, 어떤 절차를 통해 "창조"되는지가 궁금했던 이들에게 진진한 흥미를 안겨 줍니다.
꼭 명소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일류 요리가 아니라도 무방합니다. 솜씨가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 사람이 그 존엄을 일상에서 가장 쉽게, 자주 확인할 수 있는 절차인 요리의 음미, 이를 가능하게 하는 장인의 마음가짐이 어떤 모습인지를 엿보는 재미란, 이 가깝고도 먼 영역에 대한 호기심을 잔뜩 충족시킬 수 있게 해 주니 말이죠.

요리라는 인간 정신의 가장 미묘하고 섬세한 부분이 작동하여 빚는 문화행위, 이 비결과 내력, 애환이 모두 담긴 이 책을 읽고 제가 느낀 건, "요리장, 요리사란 직업이 예사 각오, 집념, 스태미너가 아니고선 누가 함부로 넘볼 수가 없는 영역이구나."하는 점이었습니다. 일단 고객으로 누가 찾아올지 모르는 사업 구조(설령 일류 레스토랑, 호텔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상, 비록 정해진 메뉴 안에서 주문을 받는다고는 하나, (일류일수록 당연히 메뉴의 제공 폭이 넓을 것이므로) 그때그때 손님의 요청에 기민히 응해 최상의 맛을 내게, 자신의 마인드세팅을 기민히 해 낸다는 것부터가 보통 일이 아닐 것입니다. 다음으로, 요리란 그 정신의 엄청난 집중과 고강도의 육체 노동이 수반되는 창조 행위란 점입니다. 셋째로, 요리는 그 과정에 대한 존중 감정의 밀도와는 거의 무관하게, 그 결과물에 대해선 잔혹할 정도로 까다로운 심미적 기준이 적용되는 기예의 영역이라는 점입니다. 일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은 소홀하면서, 그 일의 최종 성과를 놓고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이상형만 염두에 둔 "미학자"들이 몰려 와, 인정사정 없는 품평을 해 대는 그런 냉혹한 환경에 노출된 "예술가의 처량한 처지'라면 그건 오로지 이 셰프들뿐이라는 게 저자의 인식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리란 전쟁과도 같습니다. 영어에서 captain이란 단어는 이 프랑스어 chef와 조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유효하게 활동할 수 있는 중 가장 액티브한 단위를 이끄는 게 캡틴입니다(우리 한국 직장에서 흔히 팀장이라고 말하는). 순간의 정확한 판단으로, 한정된 시간 자원을 최대한 "영양가 있게" 사용하면서, 마침내 손님의 까다로운 미각을 "자발적으로 굴복하게 할 만한" 매혹, 압도를 이끌어내는 게 셰프라는, 주방의 대대장이 이뤄내야 할 책무입니다. 부(副)주방장을 프랑스어로 수셰프라고 하는데, 이 책에서는 이를 lieutenant라고 표현합니다. lieutenant가 본디 부관이라는 뜻이므로, 셰프와 수셰프의 관계가 captain과 lieutenant의 그것과 일대일대응을 이룸을 아주 잘 보여주는 멋진 명명이자 메타포어죠. 우리 한국어 번역본에는 이를 "중위"라고 옮겼는데, 그러면 일단 일차적 문맥 의미가 잘 안 통한다는 게 단점이겠습니다.

요리장들의 애환도 많습니다. 일류요리장(匠)으로서 익힐 기능을 다 익히고 나면, 제아무리 재주가 좋고 수완이 빼어나 고속 승진을 해도(경쟁이 아주 치열해서 일반 기업 못지 않게 라이벌을 멀리 떨구기 위한 무자비한 레이스가 펼쳐진다는군요. 초심자는 주방의 가장 힘든 직책부터 다 거쳐야 하는, 고된 사다리오르기가 기다리고 있음은 당연하고요. 허드렛일 하는 게 한이 맺혀서 반드시 셰프가 되고 말겠다고 결심한 이가 다 있으니 말 다했죠), 일단 정상에 오르면 그때부턴 내리막길 타는 게 다반사랍니다. 이유는, 고객의 입맛 트렌드가 워낙 빠르게 변해서이고, 나이가 들면 이 변화를 추겨격하는 자체가 너무도 힘들기 때문이죠. 밑에서는 더 기민하게 트렌드를 좇을 수 있는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데.. 이에 대해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애를 쓰는 그 자체가 고역입니다.

게다가 요리장들의 개성은, 대개 독불장군 타입. 자기만의 개성을 타 취향, 가치와 타협하려 들지 않는 고독한 예술가형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대세에 뒤처지지 말라는 위아래의 압력에 부대낀다는 자체가 힘든 노릇일 텝니다. 이 책에 나오는 브루클린 출신 셰프 브라이언의 경우, 키가 2m에 육박하는 거인에 다혈질입니다. 경력도 화려하고 아직 퇴물 취급 받을 나이도 아닙니다. 근데도 보수도 박한 외진 식당에서 고군분투하는 곡절이란, 바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마음껏 펼치고 싶다는, 작은 보스로서의 포부, 주인되는 삶을 끝까지 유지하고 싶다는 그 의지의 표현에 다름 아닙니다.



 


위, 셰프! 영어로 말하면 yes, sir! 이란 힘찬 응답이 주는 그 느낌과 비슷합니다. 주방에서는 당신이, 군림하는 유일한 지도자이니 그저 분부만 내리십시오!. 혹은 과연 당신이 빚은 솜씨는 세상에 둘도 없는 것이군요! 하는 감탄과 비슷합니다. 요리장은 그 작은 주방이란 공간을, 독특한 질서가 지배하는 소(小) 우주로 탈바꿈시키는 창조주입니다. 이 책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요리장, 셰프의 긍지와 자부에 대해 일반인이 잘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는, 멋진 문학적 풍미까지 겸비한 책이었습니다. 책 말미에 수록된 용어 해설집은, 이 분야에 문외한인 독자가 다른 분야에도 지식을 적용할 수 있게 잘 편집된, 유용한 참고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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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꿈결 클래식 5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민수 옮김, 남동훈 그림 / 꿈결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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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카프카의 모든 작품이 10대 청소년들에게 필독서로 꼽히는 건 아니지만, 이 <변신>만큼은 어느 권장 목록에서도 예외 없이 그 전체를 빛내는 필수 요소로 꼭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합니다. 지난 시절 유수의 출판사들에서 찍어낸 세계 문학 전집에도, 이 "변신"뿐 아니라 <성채>, <선고> 등이 끼어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자고 일어나 보니 내 몸이 벌레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가족들이 내게 베풀어 주던 따듯한 정과 사랑은, 하루아침에 냉대와 멸시, 적대감으로 돌변했다... 너무도 유명한 설정이라, 카프카를 설령 모르는 이라 해도 이 대목만은 반드시 어디애서 한 번은 들어 보았을 겁니다. 사실 카프카의 최초 창작 이후 실로 많은 작가, 예술가 들에 영향을 주어, 21세기를 사는 이라면 어느 다른 문예 영역에서 어떻게 "변신"한 형태로든 저 모티브를 접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책의 표지에는 카프카의 사진이 큼직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 모습 역시, 마치 앤디 워홀이 작품으로 빚어 놓은 그 표정의 마릴린 먼로 얼굴이 하나의 아이콘으로 대중 사이에 확고부동한 자리를 잡았듯, 우리들에게는 (개별 작품은 물론) 작가로서 카프카 본인의 명성보다 더 널리 퍼진, 실로 유례가 드물 정도로 유명한 이미지입니다. 이 책에 실린 <선고>에 나오는, 캐릭터 "아버지"의 한 대사처럼, "그래, 넌 본질적으로 순진한 아이지, 하지만 넌 동시에 악마와도 같은 녀석이었어!"(아니, 이 얼마나 기막힌 형용모순일까요)에서 구현하는 실상의 인물이 존재한다면, 바로 저 사진의 카프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분명 선하고 티없는 성품을 드러내지만, 날카로운 눈빛과 뾰족 솟은 귀의 모양은, 정말 악마의 전형적 심상을 부분 대변하고도 있습니다. 볼 때마다 느끼는 바지만, 보면 볼수록 신기한 "작품적 표상"이 저 사진입니다.


카프카의 소설은 전혀 안 그런 듯하면서도(이야기 자체는 시원시원하고 해학적인 게 많죠) 난해합니다. 과거 일본어 중역 성인본을 읽었을 때에는, 워낙 작품의 형식도 파격적인 데다(이 책에서도 그 점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번역한 문장이 명료하지 못해서, 다가서기 더욱 어려웠습니다. 이 박민수 선생님의 옮김은, 마치 1920년대 한국문학 초기의 단편을 읽는 것처럼, 우리말로 읽어내기에 전혀 장벽이나 어색함이 없는, 자연스러운 문장이라 좋습니다. 한국에서 최고 권위자 중 한 분이시니만큼, 우리 독자는 전적인 신뢰와 함께, 그 번역에 속속들이 용해되고 침투해 있을 "해석"을 영접해도 될 것입니다. 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책을 다 읽고 나서 마음이 매우 상쾌해졌다는 그 개인적 느낌에 두고 있습니다. 예전에 카프카를 두고는, 읽고 나면 저는 (감정이 아닌 생리적 반응의 일종으로서)머리가 아파 왔습니다. 카프카의 작품뿐 아니라, (당연히, 다른 사람이 쓴)그의 평전을 읽고서도 마찬가지였죠. 종래의 카프카는 제게 골칫덩이 그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문장의 의미가 명료하게 들어와서, 독자가 텍스트 자체에만 마음 놓고 빠져 들 수 있게 도와 주었습니다. 위대한 문학 작품은, 사실 어떤 언어로 옮겨져도 본연의 의미가(최소한 그 주제의식의 요체만은) 다이렉트로 독자의 의식에 전달이 되어야 정상이라고 봅니다. 게으른 독자가 흔히 즐기는 게 번역의 핑계지만, 번역도 독자를 도울 수 있는 범위까지는 최대한 돕는 게 그 본분일 것입니다.



<변신>. 저는 전에, 어제까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믿음직한 청년 가장에게, 그 쓸모가 완전히 제거되고 혐오감만을 부추기는 외모로 바뀌고 나서, 냉정히 등을 돌리는 가족들의 비정함, 몰인정, 이중인격 등을 비판하며, 인간 본성의 간사함과 잔인함(자기 귀책 전혀 없이 그런 흉측한 운명을 맞은 그레고르는 그들의 혈육입니다)을 풍자하는 소설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산뜻한 번역으로 맞은 <변신>은, 그런 선입견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더군요! 이 책을 읽고 제가 처음 받은 충격이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일단 시점이, 젊은 외판사원 그레고르 잠자 중심이긴 합니다. 그러나 잠자의 오감을 통해 관측된 바가 독자에게 잘 전달되고 있어, 독자는 그레고르 외에 다른 인물의 심리에 대해서도 세부적 추측이 가능합니다. 결정적으로, 소설 후반부 그레고르가 죽고 난 후에도, 그 "남은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이 "중계가 끊이지 않은 방송 사고처럼" 독자에게 이어져 기록되고 있습니다. 소설의 어조가 그레고르 편향이나 동정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작품에서, 독자는 그레고르에 지나친 감정 이입을 할 필요가 없고, 그걸 오히려 막는 게 작가의 의도에 가깝더군요. 물론 그레고르는 비난할 구석이 한 점도 없는 착한 인물입니다. 자신의 몸이 벌레로 변한 그날 아침에도, 그레고르는 출근 기차 발차 시각에 늦을 걱정, 출근 후 관계자들에게 뭐라고 해명(변명이 아니라 해명입니다)할지만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재변을 맞이했다면,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을 텐데 말이죠(내 몸이 괴물로 변했는데, 지금 회사나 가족이 문제인가요!). 그레고르는 일상과 생계 활동에 찌든 나머지, 개념 원형적으로 "돈 벌어 오는 기계"로 이미 오래 전부터 바뀌어 있었던 겁니다. 물론 그가 이렇게 된 데에는, 이 집에서 아무도 경제 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그의 세 식구(양친, 누이)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며, 그 다음이 각박한 사회 풍조입니다만, 일단 이건 논외입니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바뀐 후에도 의식은 여전히 사람의 그것이기에, 직립 자세를 시도하니 하반신이 찌르는 듯 아파 왔다. 다리를 접으려 하니(두뇌의 명령) 오히려 펴졌고(신체의 반응), 다리를 바라보니 저렇게 가느다란 것으로 어떻게 몸을 지탱할지 걱정이 밀려 왔다 등, 정말 벌레로 바뀌어 본 사람이 진술하는 것처럼 실감이 뚝뚝 흐릅니다. 요즘 문학에서야 이런 기교가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작품이 쓰여진 게 근 한 세기 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아야겠죠.

그런데, 그레고르에게도 큰 잘못이 있습니다. 세상에... 그게 뭐냐고요? 벌레로 바뀐 후, 그 벌레로서의 삶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는 인간으로서 존재규정이 이뤄졌던 과거에만 집착하고, 새로운 현실을 외면한 채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려 들었습니다. 그레고르의 운명이 급변한 최대의 실수가 뭘까요?(물론 그 실수를 하든 안 하든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겠으나) 제 방에서 기어나와 여동생의 연주회(?)에 참석하려 든 겁니다. "나는 인간이다. 이런 음악을 즐기고 감상할 수 있는 자가 벌레일 수 있겠는가?" 진짜 인간이었다면(이미 부질없는 희망입니다만) 자신의 행동이 몰고 올 파장을 생각해서 자제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모습을 하숙인(한때나마 실적이 좋았던 시절의 잔재로, 그레고르의 집은 중류층의 거소치곤 큰 편입니다. 그래서 그레고르가 실직을 한 후, 식구들은 하숙을 치기로 결정했죠)들에게 드러내어 상황을 재앙으로 만들었으니.....



그레고르가 가장 사랑했던 혈육은 누이동생이었습니다. 그리 넉넉지 않은 형편(최근 외판원으로서의 실적 감소, 기본적으로 지고 있는 빚) 때문에 부모님이 반대할 게 거의 분명하지만, 그는 자신의 평소 성격과는 정반대로, 따로 날을 잡아 동생을 음악 학교에 진학시키겠다는 확정적 결의를 발표할 작정이었습니다. 이 점을 동생도 알기에, 오빠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고, 적어도 벌레로 변한 초기까지는 그러했습니다. 우리 독자는 이 누이동생이 그레고르에 대해 가지는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잘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기(轉機)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이동생 자신이 취업을 하고나서부터입니다(당장 생계가 곤란하니 달리 방법이 없죠).

특히 이 누이동생은, 자기 일자리를 잡고나서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오빠의 방을 청소하되, 벌레가 서식하는 장소에 어울릴 만큼만 청소하고, 사람이었을 시절 쓰던 가구를 방에서 다 들어내자고 합니다(그래야 벌레답게 마구 돌아다닐 수 있으니). 엄마가 대청소를 하러 오빠 방에 들어가면, 막 울면서 말리기까지 하는데, 이게 오빠 모습을 보고 놀란 엄마가 충격으로 돌아가실까봐 걱정이 되어서만은 아닙니다. 사회 생활을 해 보니, 어느 존재든 그 생존(이 생존을 두고, 후에 사르트르는 "실존"으로 의미의 격상을 이룬 겁니다)에 어울리는 의식이 따로 존재한다는 거죠. 사람은 사람으로서, 벌레는 벌레로서. 우리도 저 벌레("변신"은 불가역입니다)에게 가져야 할 태도가 어느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이 딸은 어머니에게 가르쳐 주려 했던 것입니다.



하숙인들 앞에서 사고를 친 후, 누이동생은 어머니에게 절규합니다. "저건 이제 나의 오빠, 그리고 엄마 아들이 아니에요. 저건 그냥 벌레라구요! 인간이라면 배려하는 마음에서라도 이렇게 우리를 곤경에 몰아넣을 수 있겠어요?" 그레고르는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왔었고, 그의 식구들은 그 점 때문에 그를 벌레로 단죄합니다. 묘한 모순이나, 이 행동의 책임은 그레고르가 다 지게 됩니다. "존재, 본질보다 실존이 우선한다"는 명제는 여기서 확인됩니다. 그레고르의 죄는? 엄연한 실존을 부인하고 자신이 인간이라는(이었다는) 허위의식을 앞세운 죄입니다.

누이동생은 계속 비탄에 젖어 오빠를 봉양하고, "내가 음악가가 될 수도 있었는데..."라며 현실을 한 치도 직시하지 않으려는 고집을 부리며 퇴행에 머물 수도 있었을 겁니다(아주 고집이 센 성격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현실을 긍인하고, 사환 비슷한 자리나마 직장을 잡아 사회에서 단 몇 푼이라도 돈을 버는 쪽을 택합니다(엄청 하숙인들이 지루해했다는 걸로 봐서 설사 진학을 했더라도 이미 나이가 늦었을 뿐 아니라 재능 부족 탓에 연주인으로서 큰 성공을 못했을 가능성이 크죠).

아버지의 모습도 눈여겨 봐야 합니다. 그레고르는 그 운명의 저녁 밖으로 나와서 자신에게 사과를 던지려는(유명한 장면이죠) 아버지를 보고, "우리 아버지가 저처럼이나 꼿꼿한 자세로 늠름해진 적이 있었나?"는 놀라움에 빠집니다. 그의 부친은 생의 전성기에도 언제나 루저처럼 움츠려든 모습이었는데, 아들의 실직 후 좋은 자리 하나를 잡더니 눈빛이고 태도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그새 되어 있었던 겁니다.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는 활력을 무엇으로부턴가 얻은 후 참된 행복과 원기에 가득찬 거죠. 그레고르는 이에 그만 체념하고,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또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건, 아버지가 대단히 영악한 인간이란 점입니다. 그는 어느 사업가에게 큰 돈을 빌리고 변제하지 못해, 채무 이행 대신으로 아들을 그 사업가의 직장에 취업시킨 건데, 급료를 받고 생활비를 쓴 나머지를 모두 빛 청산에 쓰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자기 가족들도 모름) 비상금 조로 저축을 해 놓았던 거죠. 그레고르는 따라서 이 식구들에게 두 가지 점에서 혜택을 준 셈이고, 보통 독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대목이죠.

결론적으로, 그레고르가 변신하기 전에는 가족들이 그레고르 한 사람에만 의존하는 기생충들, 벌레였고, 그레고르의 변신 후 가족들은 "내 앞가림은 내가 건사해야 한다"는 각성으로 비로소 인간이 된 겁니다(대신 그레고르는 벌레로 남음). 한 사람이 희생하고 세 사람이 거듭나게 된 결과랄까요. 보통 이 작품의 줄거리를 두고 그레고르가 골방에서 죽은 후 가족들이 크게 안도하는 걸로 이해되는데, 그 전 이미 일자리를 잡고부터 이 가족들은 "기생 생활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큰 축복을 받은 겁니다. 다만 그레고르의 존재 때문에 그 행복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죠. 그레고르가 죽고 난 후, 이 가족들은 비로소 "왜 자신들이 구원받았는지" 알아차린 겁니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건 마지막으로 고용되어 들어온 파출부입니다. 그녀는 체격이 좋고 배짱 가득하면서도 눈치가 매우 빠른 타입인데, 밑바닥에서 오래 부대끼며 무엇이 생존 비결인지 훤히 터득한 소치입니다. 카프카는 아마, 잠자 씨네  세 식구가 지금처럼 열심히 계속 살면, 언젠가는 이 파출부의 상태에 수렴할 것으로 암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파출부는 벌레 그레고르를 보고도 놀라지 않고,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훤히 파악한 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처합니다. 그레고르의 죽음을 알린 후 고용인 잠자 씨 식구들에게 "제가 그 죽은 찌꺼기를 치웠어요. 잘했죠?"라고 물었을 때, 이 파출부는 실로 놀라운, 몇 수 앞을 내다보는 통찰과 기민성을 발휘한 겁니다. 그러나 하필, 잠자 씨네 세 식구는 그때 하필, 그 의식이 인간으로 잠시 돌아와 있었던 거였거든요. "우리의 해방이 그레고르의 변신 덕"이라는 깨달음만큼,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건 없습니다. 이 순간 그레고르-벌레에 대해선, 언급 자체를 금기시해야 마땅했습니다. 파출부가 마땅히 받아야 할 칭찬을 못 받은 건 이 때문이고요. 이 작품에서 실존의 모범생 파출부는 따라서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카프카는 여기서, 인간이란 벌레나 마찬가지로, 그 의식이나 정신에 아무 존엄도 없이, 날마다 열심히 생체 작용의 명령에 따라 살아갈 뿐인 신세임을 말하는 겁니다. 몸은 비록 벌레이나 인간다운(?) 두려움, 망설임, 죄의식, 당황함 등으로 가득한 그레고르는 벌레 취급을 당하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연민이나 동정 따윈 싹 잊은 채 일상에 충실한 모든 이들은 부지런한 인간으로 존중받습니다. 박 교수님이 후반부 해제에서 억압자/피치자 이대별 구조로 분석하시는 부분은, 상기의 이유로 제 개인적으로는 그에 대해 반대하는 편입니다. 

나머지 단편들은 아주 분량이 짧거나, 너무도 기발한 서사 구조를 갖고 있어서 독자를 놀라게 합니다. <선고>에 대해서는 이 번역본의 명료한 문장 덕에, 한 순간에 어떤 느낌이 오는 바 있었으나(카프카는 법학 박사답게 아주 치밀하고 논리적인 두뇌의 소유자였다는 사실 다시 확인했습니다. 힌트는 곳곳에 숨겨 두고 있더군요. 공정하게도요), 서평이 너무 길어져서 그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이 아이디어는 제가 박사 코스 밟을 때 논문에 쓰려고요). 현대적이면서 작품의 분위기를 잘 전달하는 남동훈님의 컬러 일러스트, 그리고 박 교수님이 직접 그리신 "잠자씨네 저택 평면도"도 다른 번역본에서 볼 수 없는 멋진 소품들이었습니다. 제가 접한 중 "가장 예쁘고 명쾌한 카프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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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44 뫼비우스 서재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독소전쟁(소련-러시아에서 "대조국[애국]전쟁"이라고 부르는)이 끝나고 냉전 체제의 기본 골격이 확정된 1950년대 전반입니다. 무대는 당연히 구 소련이고, 주인공 역시 소련인이며, 다만 소련 체제에서 정보부(KGB의 전신인 NGB) 간부 신분이자 독소전에서 전쟁 영웅이었던 걸로 설정됩니다. 여기까지도 별반 특이할 건 없는데, 이 작품에 마련된 장치 중 단연 돋보이는 건, 주인공 레오의 성격, 개성, 인격에 대한 지극히 현실적인 설정입니다. 서구 독자들에게 어필하려면 "자유를 위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불굴의 투사" 정도로 세팅되어야 하는데, 막상 그러면 또 하나의 진부한 "람보", 스테레오타입의 반공 전사 하나가 제시될 뿐입니다. 자유와 휴머니티, 개인의 양심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건 맞는데, 다만 그는 반체제 인사가 아닙니다. 사회와 체제가 그어 놓은 한계, 시스템의 펀더멘틀과는 파국적으로 충돌하려 들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 개인의 양심을 더 우선 순위에 놓을 뿐입니다.

 

이에는, 무(無)의 출발선에서 오직 자신의 능력, 의지만으로 정상에까지 오른(사회주의 체제이므로 이게 이론-현실 양면에서 가능합니다. 이 소설 나중에 등장[?]하는 흐루쇼프 서기장도 일자무식 빈농이었으나 현장에서의 실적만으로 출세한 사람이죠) 레오 자신의 경력이나 정체성 형성 과정이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체제가 자신을 만들어 주었는데, 피조물이 창조주를 배신할 수는 없죠. 영화 <엑스맨: 퍼스트클래스>에 보면, "매그니토" 에릭은 세바스천 쇼에게 "유 아 마이 크리에이터."라고 안심 시켜 놓은 후 바로 뒤통수(...)를 치는데, 최소한 저 말 자체는 진심이었습니다. 크리에이터이자 불공대천의 원수이기도 하다는 게 함정이긴 했지만.

 

여튼, 레오는 당성과 국가관, 충성심이 약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래서 실감이 나고, 일단 그녀를 위해 모든 걸 걸었음에도 현실이 지옥이면 그녀의 목을 조르기도 하는 어처구니없는 약한 모습을 노출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역전의 용사로 나치가 파 놓은 지옥에서도 살아남은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목을 조르다니, 독자는 이처럼이나 허약한 히어로의 모습을 보고 전율을 넘어 절망, 체념하기에 이릅니다. "이제 모든 게 다 끝났군. 하긴 100페이지, 300페이지 전에 끝났어도 이상할 게 없는 지옥의 연속이었지만." 소설 초에, 극심한 기근으로 생지옥을 연출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에서, 어느 여인은 고양이를 키우며 생의 의미, 희망 전체를 투사하고 있습니다(마치 1985년작 <에일리언 2>에서 어린 소녀 뉴트가 그랬던 것처럼). 레오에게 라이사는, 자신의 목숨, 평판, 경력, 부모님, 심지어 자신의 양심보다 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를 끝까지 괴롭힌 건, 라이사가 과연 자신을 사랑해서 결혼했느냐 하는 의문입니다. 이 대답이 "No"에 가까워질 때, 그는 아마 라이사도 죽이고 자신에게도 응분의 처단을 스스로 가했을 겁니다. 이렇게 되면, 독자 입장에서는 여태 응원하고 감정이입해 온 주인공을 잃는 아픔보다 더 크게, 천하의 악당 바실리가 그 특유의 변태적 가학성을 충족하며 좋아라 하는 꼴을 봐야 하는 끔찍한 고통이 밀려 오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레오는 1) 잘생겼다. 2) 두 마음 품지 않는 충직한 성격이다 3) 육체적 능력과 기민한 판단력을 동시에 갖추었다 같은 장점, 히어로의 요건을 구비하고 있지만, 뭔가 모르게 독자가 전폭적 존경, 애정을 보내기엔 부족한 인물입니다. 보통 "결함 있는 영웅"이라면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야수 같은 살인마 기질이 느닷 튀어나온다든가 하는 약점이 내세워지는 게 보통인데, 그는 OOOO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면은 거의 없습니다(그 반대라면 모를까). 대신, 전형적인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 포함) 답게, 장르물 주인공치고는 적잖게 이례적으로, 강자, 체제의 위력 앞에서 기본적으로 숙이고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건 차라리 리얼리즘입니다. 쿠즈민 총경이 "일곱번째 이름은 라이사 데미도바. 자네가 직접 조사하게."라고 악마의 한 수를 던졌을 때(그리고, 작가가 대체 독자를 어디까지 갖고 놀 것인지 경악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아직 처음 100페이지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라는 건지요), 우리 독자들은 레오가 바로 상관에게 주먹을 날릴 것으로 기대했습니다(그러면 소설이 바로 끝나지 않을까? 작가의 지금껏 스타일로 보아, 더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재주가 있었으니 그닥 걱정은 되지 않았지요). 대신, 레오는 총경의 말을 듣습니다. 지시에 순응할 뿐 아니라, 정말 아내가 스파이라서 의도적으로 나에게 접근해 온 건 아닐까 하고 의심까지 품습니다. 라이사는 의사(라기보다 구더기에 가까운) 자루빈의 그 강력한 유혹마저 뿌리치고 병상에 누운 남편인 자신을 지켜 낸, 용기와 지조를 겸비한 여성임을 우리 독자 모두가 지켜 봐 온 터라 더욱 기가 찰 모습입니다. "이 자가 지금 제정신인가? 아직도 약이 덜 깼단 말인가?"

 

이상하게도 독자는 레오가 뭔 짓을 하든 응원을 보내고 싶습니다. 결백한 수의사 아나톨리를 추격할 때에도(혹한 중에 힘 내려고 마약까지 흡입함) 레오는 분명한, 악독한 불의를 저지르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녀석을 빨리 잡아 당국에 넘기고 당신의 명예를 회복하시길!"을 외치고 있습니다. 전 아직도 제 자신의 이런 반응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능력과 의지가 탁월한 위인이라도, 사악한 체제 아래에서는 그 무엇보다 경멸스러운 죄악의 도구가 될 뿐이라는 점을 재확인시켜 주는 대목인데도 말입니다. 레오가 자신의 부모님을 찾아가 "아내를 당국에 넘길까요?"를 (전혀 본심이 아닌 채) 물을 때, "어쩔 수 없는 것 아닐까.."하는 말할 수 없이 비겁한 생각이 잠시나마 들기도 했고요. 라이사를 고발하면, 라이사만 죽고, 라이사를 고발하지 않으면, 라이사, 자신, 자신의 부모 모두가 죽습니다. 아내의 침대에서 기밀서류 은닉용(?) 동전까지 나왔을 때, 독자는 이제 체념을 합니다. 바로 그 순간, 레오는 결심합니다. "그딴 거 없으니 차라리 날 죽이쇼." 이 능청맞고 솜씨 좋은 작가가 독자를 어느 정도 갖고 노는지 짐작이 갈 겁니다. 여태 잘 따라온 독자를 양심 팔아먹은 쓰레기로 만들고, 히어로는 도마뱀 꼬리 자르듯 고결한 세인트로 탈피하게 만드니 말입니다. 농담이 아니고, 우리는 작가의 플롯 독재 속에, 전체주의 체제 안에서 최소한의 양심도 지키지 못하고 개처럼 끌려가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비참한 신민, 농노들의 처지를 간접 체험하는 겁니다. 아닐까요!

 

레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입니다. 일 개인이 어떻게 체제 타도에 나설 역량이 있겠으며, 그는 사실 그만한 각성도 의지도 결여된, 오히려 체제의 총아 위치에 놓여 있는 처지입니다. 근데 레오가 전쟁영웅, 정부 고위 간부라는 아이덴티티보다(심지어 작신의 영혼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게 있습니다. 그건, 아이들을, 마흔 명 넘는 소련 전역을 누비면서 기이한 방식으로 죽이고 다니는 연쇄 살인마를 잡아 죽여야 한다는 양심의 외침입니다. 그는 자식이 없습니다(왜 아이가 없었는지 이유는 종반에 가서야 밝혀집니다). 이런 개인적 상실감(그리고 동기가 하나 더 있었는데, 자신조차 오랜 동안 잊고 있었지요. 스포일러라서 적을 수는 없습니다) 역시,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수사의지"에 동력으로 작용합니다. 그는 역경에 부딪힐 때마다 이렇게 주위의 이웃들에게 호소합니다. "난 조국과 당, 스탈린 동지를 배신하자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다들 아이를 낳고 키우시죠? 전, 우리 나라에서 아이만 골라 잔인하게 죽이고 다니는 악마를 찾아다니다 오해를 산 것 뿐입니다." 어떤 처지에 놓여 있건, 숱한 소시민, 촌락민, 무지렁이들도 소련 인민이기 전에 "인간"이고 "자식을 키우는 부모"이기에, 레오에게 길을 내어줍니다. 그것이 신의 명령이나 되는 듯 말입니다. 시골로 가면 갈수록, 그곳에선 당 간부보다 마을의 노인이 더 큰 카리스마를 발휘합니다. 그 정체, 그 연원이 무엇인지 불가사의한 카리스마를. 우리 독자들이 짐작하듯, 그것은 인간 기원과 역사의 궤를 같이하는 "휴머니티"입니다.

 

독자가 레오에게 이처럼 큰 응원을 보내게 되는 이유는, 작가가 잔혹하게 마련해 놓은 지옥의 롤러코스터 장치가 주는 불공평한 서스펜스나, 캐릭터 개인의 매력, 혹은 숭고한 주제 의식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안타고니스트인 바실리란 작자의 비열함, 경멸스러움에 크게 빚지고 있습니다. 바실리는 실무 능력도 없고, 오로지 조직 내 정치력에만 기대어 권력의 사다리를 오르는, 어느 집단 안에서나 암적인 존재로 기능하는 전형적 악인입니다. 이 자가 잘되는 꼴, 저열한 욕망을 충족하는 꼴을 보기 싫어서라도, 우리 독자는 레오에게 없던 공감, 동정까지 다 짜내어 보낼 수밖에 없죠. 저는 쿠즈민 총경, 그리고 이 바실리가, 각각 스탈린과 베리야의 분신, 미니어처로 소설 속에 배치된 것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레오를 괴롭히는 이 악질적 상관들은, 흐루시초프가 정쟁에서 승리하고 말렌코프 등을 모조리 실각시키면서 일제히 퇴장하거나, 다른 운명(스포일러)을 맞게 됩니다. 우크라이나가 작품 초두에 지역적 배경으로 잠시 등장하는 것도 적잖은 의미를 지니는데, 허위 단서에 속은 바실리(돌머리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의 주장을 물리치고 레오가 반대 방향을 고집하는 건, 책을 다 읽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다른 동기(역시 스포일러)가 은근 심적으로 작용해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실리가 레오에게 가진 태도는, 철저히 이아고가 오셀로에게 지닌 그런 스탠스와 닮음꼴입니다(지극히 무능하다는 게 차이지만).

 

센키에비치의 <쿠오 바디스>에서, 페트로니우스는 교묘한 수사, 논리로 네로의 비위를 맞춰 가면서, 결국 폭군의 파멸과 정의의 회복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레오는 상관에게 "강력부 부장을 맡겨 주십시오. 자본주의의 주구가 우리 조국, 체제를 '범죄 침투라는 신종 수법으로' 좀먹는 시도를 기필코 막아내고 말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우와 이 아저씨 궤변 쩌네요" 같은 반응을 우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페트로니우스와는 달리, 레오는 저 말을 할 때 팔할 정도는 진심이었기 때문이죠(또, 그래야지 이 프랜차이즈가 쭉쭉 이어간다는 상업적 이유도 있지만 이건 그냥 넘어가야...). 진심과 현실 순응, 야심과 양심이 교묘한 길항 작용을 일으키며 존재를 버티게 하는 이 레오라는 주인공에 계속 응원을 보내는 건 이런 특이한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번역은 마치 한국어 원문 소설처럼 자연스럽고 가독성 높습니다만, "흐루시초프"를 "후르시초프"라고 오기한 게 눈에 거슬렸습니다. 그 이전에, 현행 바른 표기는 "흐루쇼프"입니다. 물론, 외국인 이름 표기도 이처럼 구식이라야 빈티지한 맛이 사니 다분히 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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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그림자놀이 - 2015년 제11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박소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어휴, 너무 잘 읽었습니다. "너무"라는 부사, 부사어가 문법적 혹은 화용적 오용이 아니라고 강변이 주저없이 나올 만큼, 이런 고퀄의 작품을 마음의 준비도 없이 너무 가볍게 읽은 것 아닌지 하는 죄스러움이 느껴질 만큼인데요. 뒤표지에 보면 이 작품이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이유 중 하나로 "...가독성이 좋고.... "를 들고 계십니다만, 사실 웹소설처럼 가독성도 좋으면서(진짜 좋습니다), 재미는 따로 재미대로 안기고, 묵직한 울림, 감동, 뭔지 모를 벅참까지 선사하는 작품은 정말 보기 드물게 접해 본 것 같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편안한 자세로 누웠다가 소파에 몸을 묻었다가 읽는 것만으로도 뭔가가 좀 송구스러운데, 그런 좋은 책을 읽고 독후감까지를 쓴다고 하면 이건 한 열 번 정도 더 읽고 서평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망설임도 들지만, 그래도 일단 쓰긴 써야 할 것 같네요.



처음 조생과 최생 두 백수(...) 선비가 등장하며 여차여차한 곡절을 빙자하여 구성지고 재미진 이야기 두엇이 끼어들 땐(이들은 낙방거사 과거폐인을 넘어 이제 소설폐인까지 겸하려 합니다), 액자는 그저 빈약해도 이런 삽입 설화가 무척 흥미로운 패턴으로 가겠구나 싶었습니다. 근데 그건 저의 큰 착각이었고, 소설 속 소설인 <아수라>의 창작 동기, 작가, 배후의 사연(과 혹 음모)를 밝혀내려는 본 줄기가 독자를 사로잡는 힘이 강력했습니다. 나중에는 다소 충격적인(그러면서도 많이 "열린") 결말까지 마련하는데.. 이 강렬한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이야기에 취해서 속독을 하기보다, 미스테리 소설 읽듯 머리로 재구성, 추측을 해 가며 몰입을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분명한 마무리가 충분히 가능하게 전개되는 플롯이면서도, 구태여 작가(이 작품의 실제 작가, 혹은 작중 작가로 제시되는 다른 캐릭터들)는 반쯤은 열린 채로 개개 에피소드를 꾸려 넣고 있는데, 바깥 액자까지도 끝이 그런 식이라 전체가 부분을, 부분이 전체를 모방하는 기묘한 프랙털 구조가 연상됩니다. 소설이면서 소설의 의의("현실의 반영이요 그림자")를 논하는 점에서 자기 지시의 역설을 품고 있기도 한, 다층 독해가 가능한 걸작이었습니다.

 


일단 재미만 느끼려면 액자는 무시하고 아홉 편의 단편만 읽어도 됩니다. <아수라>까지 포함하면 열 편인데, 이 <아수라>는 본편의 복제(..)이므로 수에 넣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홉 편도, 우리에게 익숙한 설화에서 모티브를 따 왔거나, 아예 definite(or extended) edition으로 개작한 것도 있을 만큼, 전혀 낯선 내용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 가락이라도 어느 소리꾼, 광대, 전기수의 리사이틀을 통하느냐에 따라 감동과 재미의 폭, 깊이가 다르듯, <바보 온달>과 <박씨전>이 이처럼 재미있는 이야기였던가 하는 생각에 새삼 신선한 각성이 몰려왔습니다. 사실 저 두 이야기는 보기에 따라 축약판일 수도 있는데, 뭔가 말 못할 사정 때문에 흐릿하고 모호한 표현에 알듯모를듯 상징만 잔뜩 담아낸 이야기를, 우리 작가님이 현대적으로 화끈하게 복원, 재구했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아니, 그게 그런 이야기였어?"). 같은 이야기라도 참 재미있게 풀어내는 분, 박식한 사항을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는 작가도 물론 있지만, 원형의 얼개, 함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억지스러운 이념 투사, 논리 비약 폭주는 물론 없고) 이처럼 자기만의 색깔을 잘 꾸려넣는 모습(그러면서도 뭔가 흐릿하던 게 눈에 확실히 어느 순간 들어오게 하는 내공! 마치 "비유를 통해 어려운 이치를 쉽게 가르쳤다는 이어도 표류의 그 스님 같네요), 역시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하신 분들은 남들이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메우거나 극복할 수 없는 어떤 갭을, 독특한 솜씨를 통해 반드시 작품 속에 만들어 놓습니다. 학벌, 이거 절대 무시 못하죠.



금오신화나 기타 설화 문학에 등장하는 일부 캐릭터나 서사처럼, <능텅감투>에서 주인공이나 스토리는 누가 무슨 잘못으로 그런 비극적 파국을 빚었다는 건지 끝내 모호합니다. 오시원은 먼 친척(인척) 뻘이 될 별당아씨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으나, 금도를 범할 배짱은 전혀 갖지 못한 좀스런 사내입니다. 정체를 모를 도깨비(혹시 별당아씨의 죽은 남편- 자신에겐 먼 조카뻘이나 됨직한 - 의 귀신일지도 모르죠)에게 능소(能消)감투-이게 소위 "도깨비 감투"입니다- 을 빌리고, 꿈 같은 운우의 쾌락을 맛봅니다. 허나, 날이 새고 집에 돌아와 보니 오생은 과연 세상에 공짜가 없었음을 깨닫게 되는데... 이 이야기를 읽고 저는, 처용 설화의 처용 역시 그저 관대해서 역신에게 노여움을 자제한 게 아니라, 뭔가 사전에 deal이 있었기에 그렇게나 초연(체념과 허탈함이 가득 밴)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해셕도 가능하다는 걸 알았네요.

<오백 년 해당화 향기>는 제목만 봐서는 모르겠지만, 몽침 시기 끝까지 고려의 자주혼을 지키려다 죽은 김통정 장군과 그 무리들의 원혼 이야기입니다. 특히 저는 "...한때 귀족과 권귀의 사병, 개돼지 노릇을 하며 기생충처럼 민생과 국부를 갉아먹던 우리였으나, 이곳에서 백성의 인심을 얻고 그들을 대변하며 싸우다가 참된 깨달음을 얻었다"는 대사에 전율이 일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삼별초의 정체성에 대해 학습하며 혼란을 느끼곤 하는데, 작가는 이처럼 간단하게 얽힌 가닥을 풀어주는 군요. 역시 학교 다닐 때 공부잘하고 볼 일입니다. 제주도란 고장의 저항사와 토색(土色)적 한(恨), 민족 항쟁의 의미, 유생, 학자의 본분에 대한 고찰 등이 두루 잘 압축된 설화다 싶더군요.


<사다리를 오르지 마라>는 괴담, 처세술, 도참비기, 애욕, 미스테리 등 다양한 소재가 들어 있는 제법 긴 분량이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불우한 서생 이은처럼 보이지만, 주제와 이야기 흐름을 처음부터 끝까지 장악하는 이는 무시무시한 권력욕과 의지를 지닌 "대감마님"이었습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작은 용원설화, 구토지설의 변용태인데, 용왕이 토끼나 자라 등에 속거나 무기력하게 의존하지 않고, 뒤에서 기미조정하는 무서운 존재로 거듭났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은은 주인공답지 않게운명의 장난(이 사실은 아니었고 대감님의 마수)에 팔랑개비처럼 맥없이 놀아나는데, 어찌 보면 이 역시 독특한 매력을 풍기는 설정입니다. 자세한 건 직접 읽어 보고 판단하시고... 전 개인적으로 (모호하고 뜬금없는 비극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언은 결국 실현되고야 말았으니..... " 그런데 대감님과 난이는 결국 다 어디로 간 건가요?

<황금비늘>이야기가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이었습니다. 평강 공주가 출궁 후 온달과 맺어지는 과정에 큰 설득력과 필연성이 부여되는! 그냥 이 버전을 정통 정본으로 삼고 교과서에 싣고 가르쳐야 할까 봅니다(다만 에로틱 묘사는 다 순화 - 이 책에는 야한 표현 걸쭉한 묘사가 은근 많으니 조심이 필요합니다). 임금이란 밖에서 넘보고 안에서 찌르며 밑에서 치받는 위험천만한 자리인데 평민을 무슨 명분으로 사위에 들이겠냐는 평원왕의 대사는 정말 실감이 났고, 옛 약혼자이자 왕족 고씨 청년이 마지막에서야 "온달에게 자신 따위는 넘보지도 못할 용기와 기품이 있었음"을 통렬히 깨닫고 그의 부탁(...)을 들어 주는 장면도 마음이 짠하더군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설화 유형의 모든 매력을 다 담아내는 솜씨.

아홉 편의 이야기 중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마지막 단편 <광대와 여인>은 진정 소름이 돋고 영혼이 감동에 관통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사연도 충격적이었지만 등장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잠언이고 십계명이고 신들린 법열의 산물이더군요. 여기다 한 구절 한 구절 인용해 보고 싶지만 저만의 감흥이 깨어질 것 같아서 그냥 자제하렵니다. 사실 이처럼 감동의 농도가 높으면 서평 쓰기보다 그저 내밀한 느낌만으로 깊은 산 속 옹달샘처럼 간직하고 싶습니다만.... 웹소설처럼 쉽고 재미있게 읽히면서 톨스토이처럼 심오하고 미당처럼 미려한 문장, 표현에다, 박경리선생처럼 토속적 아름다움을 담은, 독자로서 그저 황송하고 감사할 뿐인 작품(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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