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늦은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나 문자가 무서운 적이 많았다. 지금도 그런 무서움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익숙해져서 그런지 아니면 조금 무뎌진 건지, 예전보다는 덜 하다. 뭐 별것도 아닌 걸로 그러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좋은 경험이 아니었기에 그 기억이 더 오래가는 듯하다. 위험한 말이 오고 가서가 아니고, 안 좋은 소식이나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이 많아서였다. 절대 유쾌하지 않을 일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밤중에 도착하는 소식 중에는 외로움, 혹은 쓸쓸함이 담겨 있는 것도 많았다. 자정을 전후로 들어오는 문자가 특히 그랬다. 밤이라는 시간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외로움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였을 수도 있다. 그렇게 문자를 보내는 이는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었고, 대개 가까운 사이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말을 웃음과 같이 건넬 수 있는 사람들이어서 다행인... 때로 바쁜 시간이 지난 후 찾아온 여유에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시간이거나, ‘그냥’이라는 이유로 스스럼없이 말문을 열 수도 있는 시간. 그래서 한밤중의 문자가 안 좋은 소식들로 불안한 것보다 괜히 마음이 허해지는 순간으로 변해가곤 했었다.

 

 

외로운 밤이 있다.

'아니 이건 그리움이야, 아니 이건 고독이지, 고독은 나의 친구인걸' 하고

아닌 체해보아야 어쩔 수 없이 사무치는 건, 외로움이다.

외로움에는 눈물이 없다.

메마른 가슴이 괴롭게 사람을 들쑤시는 밤.

(쓸쓸해서 비슷한 사람 194페이지)

 

 

 

이상한 밤이었다.

요즘, 이상하게 잘못 걸린 전화가 자주 온다. 일주일에 두세 번쯤, 그것도 밤에 주로. 지금 번호를 사용한지 1년쯤 됐는데, 그동안 잘못 걸린 전화 어쩌다 한번 받기는 했어도 요즘처럼 자주 오지는 않았다.

 

 

 

언젠가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어.

‘자신을 완벽하게 고백하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어떤 표현도 불가능하다.’

비루한 고백을 들어줘서 고마워. 오랫동안 옆에 있어줘서 정말 고마워.

마지막으로 어떤 주저도 없이 말할게.

행복해라, 꼭. (말하자면 좋은 사람 198페이지)

 

 

 

며칠 전 금요일 밤, 자정이 거의 다 되어 가는데 문자 한 통이 들어온다.

 

“00아, 잘 지내니?”

모르는 이름이기에 잘못 온 문자려니 싶어 무시했다.

몇 분쯤 지나자 다시 또 문자가 들어온다.

“00아, 나야. 보고 싶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상대방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문자 잘못 보내셨습니다.”

상대가 잘 알아들었겠거니 했다. 잘못 수신된 문자라고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했으니, 알아듣고 이젠 문자를 안 보내겠구나 했다. 그런데 이 사람 이젠 문자가 아니라 전화를 걸어온다. 순간, ‘이걸 받어, 말어?’ 몇 초의 고민을 했더랬다. 굳이 잘못 보냈다는 문자에 왜 전화를 걸어올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내 알바 아니라는 마음이 커서, 귀찮아서였다. 그래도 한 번 더 친절해도 될 것 같아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정말 00 휴대폰이 아닌가요?”

“모르는 분입니다. 전화 잘못 거셨어요. 제가 이 번호를 1년 전부터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말인가요?”

“네.”

바로 전화를 끊을 줄 알았다. 전화를 잘못 걸었다는데, 상대방은 자기가 찾는 사람이 아니니 당연히 끊어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남자, 전화를 끊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내가 먼저 전화를 끊겠다고 말하고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이 남자가 먼저 말문을 연다.

 

“죄송합니다. 00은 헤어진 여자 친구인데요.”

그래서?

“참고 참다가 1년이 넘어서야 전화를 했어요. 보고 싶어서요.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요.”

그런데?

“그 사이 전화번호가 바뀐 걸 몰랐어요. 너무 당연하고 익숙한 번호라 계속 사용하고 있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문자 잘못 보냈다는 말이 거짓말인 줄 알고 전화까지 하게 되었네요... 죄송합니다.”

“네.”

“......”

“저기요?”

“네.”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평소 하던 대로 했다. 나와 상관없는 이 얘기를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찾는 분의 전화번호가 바뀐 걸 알았으니, 이제 이 전화를 끊어야하지 않겠어요?”

“아, 예. 그렇죠. 그래야죠...”

근데 왜 끊겠다는 말이 없어?

내가 먼저 끊어야겠다고 다시 말하려고 하는 순간, 상대가 다시 말문을 연다.

“정말 거짓말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00과 목소리까지 비슷하네요. 처음엔 본인인데 아닌 척하는 줄 알았어요. 근데 말의 억양이 달라서 아닌 걸 알았어요. 그쪽은 목소리가 좀 더 낮네요.”

“저에게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저는 그쪽과 계속 통화할 이유가 없는데요.”

냉정하게 들릴 정도로 딱 잘라 말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의미 없는 대화를 계속할 이유도 없었다. 상대를 배려하고 싶어도,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모르는 사람을 찾아 데려다 줄 수도 없잖아...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사람 말투가 정말 스팸전화 끊듯이 ‘뚝’ 끊어버릴 수 없게 했다. 그렇게 나 혼자 고민하고 있는데 다시 이어져오는 말.

“보고 싶은 거 그동안 잘 참았는데, 오늘은 정말 못 참겠어서요. 한마디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안하던 짓을 했어요. 죄송했습니다. 제가 먼저 끊겠습니다...”

뚜. 뚜. 뚜...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귀신에 홀린 듯했다. 오 분에 가까운 시간동안 뭐가 지나갔나? 뭐지, 이건? 아, 진짜...

 

 

 

그게 뭐 어때서, 라고 생각하는 순간 증기처럼 아득한 두려움이 나를 덮친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잊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시간 토막들을 잃어버리고 살아왔을까.

진짜는 죄다 도둑맞고,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자아의 금고 속에는 엉뚱한 모조품만 잔뜩 쟁여져 있는 느낌이다.

스물두 살의 첫새벽처럼 나는 텅 빈 주방 앞에서 나지막이 읊조린다.

누가 너를 내게 보내주었지? (비자나무 숲 262페이지)

 

 

 

 

멀쩡한 기분이었다. 두통이 좀 심했던 거 말고 특별히 더 나쁠 게 없었다. 피곤해서 일찍 자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뭐야? 잠들려고 했던 기운을 다 깨워놓고 이상하게 멜랑콜리한 기분까지 남겨놓다니. 그 사람은 그렇게 전화를 끊고 괜찮아졌는지 어땠는지 몰라도, 그녀의 전화번호가 바뀐 것을 알고 이제 삭제하고 개운해졌는지 몰라도, 이젠 정말 그 미련을 버렸는지 몰라도... 나는 괜히 우울해졌다. 전혀 모르는 남인, 누군가의 외로움이 쓸데없이 전염된 듯했다. 수화기 너머 누군가의 쓸쓸함이 그대로 건너온 듯했다. 뭐가 이래. 아, 이런 거 정말 별론데.

 

 

잠이 다 깼다. 이대로 잠들기는 어려울 듯하여 양양의 책 제목이 생각나서 들춰보다가 문득, 내 전화번호 전 주인이 궁금해졌다. 나에게 온 잘못 걸린 전화는 남자를 찾는 전화도 있었지만 대부분 여자를 찾는 전화였다. 같은 이름의 여자를 찾고 있었다. 전화번호를 바꾸면서 번호연결 서비스를 사용하지 않은 듯했다. 그 말은, 굳이 바뀐 전화번호를 전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의미 아닌가. 본인이 먼저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이상 타인이 그 번호를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나에게 잘못 걸려온 전화를 생각해보니, 1년 동안 이 사람들은 내 전화번호 전 사용자와 연락이 없었다는 건가? 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1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사람을 찾는 거지? 전화한 그 남자는 1년 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혹시, 좁은 편도 1차선 같은 길을 가고 있었을까. 같은 마음으로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없는 길, 상한 마음에 '나 없이 잘 지내지 말라'고 소심한 복수라도 했던 걸까. 그래도 결국 쓸쓸해진 마음을 어쩔 수 없어 그녀를 찾았던 걸까.

 

 

한 사람을 떠올렸다. 늦은 밤 전화해서 내려앉은 목소리를 들려주던, 늦은 퇴근길에 걸음은 무겁고, 불 꺼진 집에 들어와 시어진 김치에 물을 만 밥으로 허기를 달랬다던, 외롭다고 푸념을 늘어놓던 목소리. 누구나 사는 게 비슷하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외롭다고 말하던 사람의 가슴은 쓸쓸했겠구나, 싶다. 이런 거였구나. 양양이 평범하다면 평범한 일상을 두고 말하면서 이런 제목을 붙인 이유를, 어쩌면 알 것도 같다.

 

늦은 밤 불쑥 이 책을 펼쳐 들었던 건, 제목에서 흐르는 그 쓸쓸함 때문이다. 아닌 체하려고 해도 안 되는, 말로 다 하지 못한 침묵이 기어코 또 다른 말이 되어 뛰쳐나오고야 마는 것. 함박눈이 펑펑 내리며 추위가 더 짙어지고, 양양의 노랫말이 되어버린 그녀의 끼적임은 그래서 '비슷한 사람'이란 이유로 우리를 붙든다. 닮아있음을 부정하지 말라고, 닫힌 창문 열고 손 뻗으면 바로 닿는 사람들이라고... 살아가는데 때로 말이 없어도 되고 표정이 없어도 되고 혼자여도 되지만, 가끔은 딱 한 마디가 필요한 때가 있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딱 한 마디만. '어쩌면 우린, 비슷하구나.' 느낄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이 필요할 때. 이 책에서 그녀가 뿜어대는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 같은 시간 앞에 괜히 민망해진다. '너도 그렇잖아' 건네는 한 마디에 모든 감정을 읽힌 듯 얼굴이 붉어진다. 나도 모르는, 혹은 모른 척하고 싶었던 감정을 타인이 살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다. 전화를 잘 못 걸었던 그 남자에게 괜찮아질 거라는, 진심어린 한 마디라도 해줄 걸 그랬나 싶은 마음에 뒤늦은 후회를 한다.

 

 

 

 

외롭게 혼자 맞이하는 쓸쓸한 죽음도 있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떠나는 행복한 죽음도 있겠지.

하지만 어차피 떠날 때는 우리 모두 혼자다.

(기억해줘 184페이지)

 

 

 

 

나답지 않게,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일에 신경이 쓰여 생각의 오지랖을 넓혔다.

이상하게, 괜히 쓸쓸해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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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는 언제나 그 책을 읽었다 - 영화와 책이 있는 내 영혼의 성장기
이하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손가락 끝의 빨간 실, 영화와 책... 『조제는 언제나 그 책을 읽었다』

 

 

같이 영화를 봐도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들을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내게도 그런 친구가 한 명 있었다. 토요일 수업이 일찍 끝나면 그 친구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가서 꼭 비디오 한편씩을 보고는 했었는데, 작은 TV 화면에 5~6명이 머리를 모아서 집중해서 보고 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은 소식이 다 끊겨서 어디서 무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그렇게 모여서 같이 영화를 보는데도 꼭 의외의 장면을 잡아내는 친구가 있었던 거다. 모두가 흘러가는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을 때, “방금 그 책 제목이 뭐야?”라고 묻거나, “뒤쪽 벽에 걸려있던 그림이 000이야?”라던가, “00이 지금 밟은 것이 뭐지?” 하는 식의 질문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은 ‘그런 장면이 있었나?’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되기 일쑤였다. 생각해보니 그런 질문을 했던 그 친구 참 여러 가지로 특이하긴 했다. 우리가 ‘일반적’이라고 부르던 것과는 약간 거리감 있는 사고방식을 가진 친구였다고 기억된다.

 

때로는 영화나 책에서 내가 놓친 부분을 누군가가 그렇게 얘기해줄 때, ‘아하, 그랬구나.’하는 어떤 발견의 미학을 만날 때가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해주는 영화와 책에 관한 이야기가 그랬다. 나에게는 오래전 영화와 책들이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했던 부분들도 있었지만, 저마다 들려주던 한 부분으로 그 기억은 금방 재생되곤 했다. 영화에서 보여주던 재미와 감동이 영화 속에서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했던 책으로 연결이 될 때는 묘한 흥분까지 느꼈다. 저자는 영화 속에 등장했던 책들 혹은 책의 한 문장 때문에 멘토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지만, 내가 만난 영화 속의 책들은 멘토와 더불어 한번은 만나보고 싶은 위시리스트 속의 책으로 담겨지곤 했기에 미뤄둔 숙제 같은 느낌이 컸다. 어쩌면 환상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책을 읽어야만 그 영화에 대해 제대로 보고 느낀 것으로 마무리가 될 거라는 판단에서였는지도…….

 

내가 생각했을 때, 떼려야 뗄 수 없는 궁합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영화와 책일 것이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어떤 영화를 만나기도 하고,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어떤 책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 책은 저자가 들려주는 영화, 그 영화 속의 책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나 영화의 흐름에 큰 매개체 역할을 하는 책을 대해 소개해주고 있다. 그 중에서 이 책의 제목처럼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영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이었다. 한참 일본 영화와 문학에 빠져 있을 때, 비공식적인 경로로 봤었던 기억이 난다. ^^ 그 영화를 보고 벽장 같이 비좁은 공간에서 웅크리고 책을 읽어가던 조제를 저절로 떠올릴 수밖에 없다. 몸이 불편한 조제를 위해 할머니가 주워다 주었던 그 책들에 파묻혀 있던 조제를 잊을 수가 없다. 그 공간에서 그렇게 책을 읽는 것만이 조제에게는 구원의 줄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물론 그 안에는 조제의 사랑이 함께 하는 것을 보는 재미도 있다. 일본 영화나 문학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누군가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기에는 현실적인 세상을 살아가느라 바빴던 내가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던 부분도 있었지만 언젠가는 그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전해질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영화에서 보여줬던 프랑수와즈 사강의 책 『한 달 후 일 년 후』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이런 식이다, 이 책은. 그 영화를 떠올리면 그 책이 저절로 생각나게 하는 것. 누군가의 욕심에 잔인함을 보게 만들었던 영화 <매치포인트>와 책 『죄와 벌』을 기억해야 했고,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두 개의 인격을 보여주었던 영화 <프라이멀 피어>와 책 『주홍 글씨』를 잊지 않게 했다. 오랜 시간동안 간절히 바라던 것을 이루어낸 영화 <쇼생크 탈출>은 책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다시 만나게 해주었으며, 그 안에 등장하던 책 때문에 울컥 눈물이 솟게 했던 영화 <아들>에서는 책 『데미안』에 대해 다른 느낌을 들려주기도 했다. 두 얼굴의 남녀가 온·오프라인에서 보여주었던 편견에 웃음 짓게 했던 영화 <유브 갓 메일>은 내가 로맨스의 고전이라 여기고 있는 책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를 그립게 한다. 운명처럼 다시 만나는 순간 사랑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내내 빌게 만들었던 영화 <세렌디피티>는 그 운명의 연결 고리인 책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메모하게 했다.

 

그렇게 23편의 영화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이 책은, ‘책’이라는 것 자체를 흥미롭게 살펴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건 저자가 책과 함께 소개해주었던 영화의 영향이 크다. 영화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이야기의 재미는 기본이고, 그 이야기에서 보여줄 수 있는 그 책의 역할이 크다는 것이다. 때로는 어떤 사건의 복선으로 자리하면서 더 눈여겨보게 만들고, 주인공과 배경의 시대적 분위기를 파악하게 해주기도 했다. 영화에 대한 이해와 책으로 연결되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현실에 대한 이해와 책 그 너머에 있는 상상이 불러올 수 있는 판타지까지 가능하게 했던 역할이 아니었을까. 물론 영화에서 보여주는, 영화 속 그 책이 말하고자 하는 역할은 눈에 보이는 딱 거기에서 멈출지 모르지만, 이미 관객이자 독자인 우리는 그 영화와 책을 접하고 나면 그 이상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지 않겠나. ^^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사랑이 이루어지고 난 후의 이야기를 그리기도 하고, 탈출한 후에 다시 만난 앤디와 레이의 미래를 열렬히 응원하기도 하면서, 도쿄타워의 그 야경을 보면서 무모한 사랑을 그리기도 하는…….

 

어쩌면 책은 영화 속의 그저 하나의 소품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저자의 눈을 통해서 만난 영화 속 한권의 책은 소품 그 이상의 이야기다. 주인공 인생의 희로애락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기도 했고, 주인공이 만나길 바라는 미래를 대신 말해주기도 했다. 주인공의 삶에 멘토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한권의 책으로 머물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여러 가지 이유로 책을 읽고 있는 이유.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 일수도 있고, 어떤 시험대를 통과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무료한 일상의 활력소 일수도 있지만, 그 모든 이유의 공통점은 자신에 다가올 어떤 느낌을 위해서가 아닐까.

 

그렇게 한 권의 책은 한 사람의 인생을 담고 있기도 했고, 한 편의 영화의 흐름을 좌우하기도 했다는 것을 저자의 이야기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한 권의 책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기에 관객들에게는 더욱 눈에 담게 되는 책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 음악을 귀에 담았다면, 영화 속의 책들은 저절로 눈에 담게 될 것이다. 영화의 흐름에 빠져 혹시 놓치고 있던 부분이 없었는지, 그 책이 영화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직접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의 어느 한 페이지를 펼쳐 기억을 더듬어 봐도 좋겠다. 그때 그 영화, 혹은 그때 그 책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나에게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어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올지 궁금해질 테니. 나 역시도 지금 이 책을 통해서, 아직 만나지 못한 영화와 아직 읽지 못한 책의 리스트를 다시금 채워가고 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 ‘영화’를 다시 만날 때 그 ‘책’과 함께 하기를 바란다고.

 

 

이 책에서 들려주었던 영화와 책.

<세렌디피티>,『콜레라 시대의 사랑』 / <친니친니>,『두 도시 이야기』 / <디 아워스>,『댈러웨이 부인』 / <컨스피러시>,『호밀밭의 파수꾼』 / <유브 갓 메일>,『오만과 편견』 / <콜드 마운틴>,『폭풍의 언덕』 / <생활의 발견>,『스콧 니어링 자서전』 / <키다리 아저씨>,『뉴욕 3부작』 / <시티 오브 엔젤>,『해마다 날짜가 바뀌는 축제』 / <이퀼리브리엄>,『갈대밭에 부는 바람』 / <장미의 이름>,『시학』 / <프라이멀 피어>, 『주홍글씨』 / <쇼생크 탈출>,『몽테크리스토 백작』 / <오래된 정원>,『살아남은 자의 슬픔』 / <스피어>,『해저 2만 리』 / <아들>,『데미안』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한 달 후 일 년 후』 / <어느 멋진 순간>,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 <매치 포인트>,『죄와 벌』 / <도쿄 타워>,『사랑의 종말』 / <레이크 하우스>,『설득』 / <카포티>,『월든』 / <마들렌>,『달의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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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9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21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녕하세요. 과학도서 출판그룹 사이언스북스입니다. :)


사이언스북스에서 갑산한의원 이상곤 원장의 신간,

왕의 한의학』이 출간되었습니다.

신동아, CBS, 프레시안에서 큰 인기를 끈 '왕의 한의학'의 정수를 한데 모은 도서로

조선 왕의 몸과 질병 속에서 조선 역사의 비밀을 풀어내는 도서입니다.

의학과 건강 특히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


 



『왕의 한의학』

낮은 한의사 이상곤과 조선 왕들의 내밀한 대화


선 왕의 질병 속에서 역사의 비밀을 읽는다!

조선 왕들의 몸을 진단하고 현대인들의 마음을 처방한다



최근 조선 시대를 무대로 한 사극 붐이 뜨겁다. 여름에는 극장가에서 이순신의 명량해전을 다룬 영화 「명량」이 1500만 관객을 돌파했고, 가을과 겨울에는 텔레비전에서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룬 「비밀의 문」, 광해군의 왕위 계승 이야기를 다룬 「왕의 얼굴」 등이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출판계에서도 조선 시대는 스토리텔링의 보고로 각광을 받고 있다. 만화 『조선왕조실록』 시리즈가 100만 부를 돌파하고 정치사에서부터 민중사, 그리고 미시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조선 역사 관련 서적들이 빈번하게 출간되며 출판 불황 속에서도 조선 시대사 관련 출판 시장은 나름의 성장세를 유지해 가고 있다. 이것은 1990년대 초⋅중반 『조선왕조실록』의 국역 완료 이후 그 범위와 깊이를 확대해 가고 있는 조선 시대 연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의 기록 문화 유산인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조선 왕들의 모습은 다채롭다. 『조선왕조실록』을 만든 사관들은 태조부터 순종까지 27대 조선 왕들의 삶과 정치적 행위 등 모든 것을 세밀하게 기록했다. 당시의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에 휘둘리고, 왕권과 신권의 우열 관계에 대해 고민하며,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따지는 민심의 향배에 불안해했던 조선 왕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록에는 조선 왕의 공식적인 삶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내밀한 사생활, 그들의 숨기고 싶었던 육체적, 정신적 아픔까지도 기록하고 있다.

조선 왕은 천명(天命)을 대리하는 초월자인 동시에 현실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절대 권력자였다. 그리고 자기만의 사생활과 육체를 가진 하나의 인간이었다. 따라서 때에 따라 공식적 삶이 주는 스트레스는 왕의 삶과 건강을 망치기도 했고, 반대로 왕의 건강과 질병은 정치사를 뒤바꾸기도 했다. 최근 『조선왕조실록』 우리말 완역 이후 『승정원일기』 등에 대한 번역과 전산화 작업이 진척되면서 왕의 육체를 둘러싼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다. 이번에 (주)사이언스북스에서 펴낸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의 『왕의 한의학: 낮은 한의사 이상곤과 조선 왕들의 내밀한 대화』는 바로 이런 학문적, 콘텐츠 산업적 연장선상에서 출간된 책이다.

전작 『낮은 한의학: 알기 쉽게 다가오는 한의학의 지혜』를 통해 대중의 눈높이에서, 현대인의 건강 수요에 맞춰 한의학의 오래된 역사와 지혜를 소개한 바 있는 이상곤 원장은 이번 책 『왕의 한의학: 낮은 한의사 이상곤과 조선 왕들의 내밀한 대화』에서 조선 한의학의 지식과 기술의 정수가 응집되어 있었을 조선 왕실의 의료와 의학, 그리고 그 발전 과정을 소개한다. 이상곤 원장은 왕들의 질병 및 치료 기록이 비로소 분명해지는 태종, 세종 때부터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 때까지 실록 및 아직 번역되지 않은 영역이 더 많은 『승정원일기』와 『약방일기』 등의 왕실 의료 관련 기록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해독해 가며 조선 왕실의 의학, 즉 ‘왕의 한의학’의 비밀을 파헤쳐 간다.


 

***


『왕의 한의학』 서평단 모집 상세 내용


하나, 『왕의 한의학』 서평단 모집 포스팅을 개인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 간단하고 성실하게 적어서 스크랩 링크와 함께 댓글로 올려주시면 응모가 완료됩니다.

둘, 응모 기간 2014년 12월 18일(목)부터 12월 25일(목)까지 입니다.

셋, 추첨인원 10명입니다. (최종 응모자 수에 따라 추첨인원이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넷, 서평단 발표일 2014년 12월 26일 금요일입니다.

다섯, 서평기간2015년 1월 1일(목)부터 1월 15일(목)까지 15일간입니다.

서평단에 선정되신 분은 12월 25일까지 개인정보를 비밀댓글로 적어야합니다.

12월 25일 이후까지 확인이 안되면 선정이 자동취소됩니다.

마지막, 첨된 서평단 분들은 서평기간인 15일간 알라딘 개인 계정으로 서평을 작성한 후, 『왕의 한의학』 서평단 발표 포스팅 알라딘 개인 블로그 및 그 외 블로그나 외부 채널 등에 남기신 서평 링크를 댓글로 달아주셔야 최종 서평이 완료됩니다.


 

※ 해당 기간 안에 서평 및 서평완료 댓글을 작성하지 않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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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표지가 예뻐서 눈에 담았다.

 

 

글자가 빽빽하게 들어 찬 소설인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책은,

글과 그림이 함께 했을 때 더 빛을 발하는, 딱 그 느낌인 듯하다.

 

사랑에 빠진 그 순간의 열정은

사랑이 끝난 후의 그 상실감과 늘 함께인 듯하다.

 

젊은 남녀의 사랑과 권태, 재회를 가볍지만 감각적으로 그려냈다고 한다.

말 그대로 동화 같은 소설을 기대하지만,

막상 그 안을 들여다 보면 깊어질 것만 같다.

 

그 사랑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줄 것 같아서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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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존재 1 - 담박한 그림맛, 찰진 글맛 / 삶과 욕망이 어우러진 매콤한 이야기 한 사발
들개이빨 지음 / 애니북스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의 웃픈 자화상.『먹는 존재1』

 

 

분명히 다르다. '먹는다는 행위 자체를 좋아한다.'는 작가와 '먹는다는 행위 자체를 귀찮아'하는 나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하루 세끼를 챙겨야 하는 당연함 따위, 나에게는 없다. 그냥 배고플 때 먹는다는 게 진리다. 그럼에도 공감했다. 마성의 유 양 때문이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에 따라오는 씁쓸한 을의 삶과 침이라도 뱉고 나와 버리고 싶은 과감함이 읽는 이에게 달려든다. 이렇게도 차지고 맛있게 욕을 하는 사람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고, 오늘 걱정을 내일로 미루고 먹고 누워있고 싶은 간절함이 저절로 들게 하는 데 어떻게 공감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마음속은 뒤죽박죽, 길거리에 나앉게 생긴 오늘이 불안하고, 간절하게 먹고 싶은 음식은 눈앞에서 춤을 추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 향이 강하다며 거부한 전 남친이 내가 소개해준 맛집에 나타나니 욕 나오고, 갑자기 찾아온 엄마 밥은 황홀경이고, 터무니없는 엄마의 기대는 언제쯤 사라질지 아득하고, 밥 대신 술을 넣어준 속은 못생긴 남자와의 하룻밤을 만들고, 그 못생긴 남자는 나를 들었다 놨다 하고. 에잇~ 욕 나오는 하루의 인생살이...

 

정말 지겨운 회식자리, 무리하게 술까지 권하는 상사에게 굴을 던지고 뱉기까지 하며 회사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유 양. 그렇다. 유 양은 후련하게 회사에서 잘렸다. 정말 잘린 건가? 회사도 사장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유 양이니, 잘린 게 아니라 스스로 나온 기회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백수다. 시간은 많지만, 통장 잔액은 줄어든다. 그러거나 말거나 먹는 것이 인생의 낙이니 룰루랄라 식탐 여행도 가능하다. 뭐든! 마음만 먹으면 가능할 것 같은 유 양이다. 클럽에서 떡으로 유혹해서 그녀의 인생에 침입한 못생긴 남자 박 병과 전 직장 동료 조예리와 조예리의 남친까지 합세하여 먹는 것에 녹아든 삶의 녹록지 않음을 풀어낸다.

 

유 양이 말하길, 배고픔이란 질 낮은 양아치 새끼 같다고 했다. 삼시 세끼 꼬박꼬박 찾아온다고 했다. 그 삼시 세끼에 인간 군상의 모든 게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 세끼를 챙겨야 한다는 데 의미를 두는 내가 아니니, 오직 유 양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이자면 그렇다. 당연하게 찾아오는 배고픔과 하루 세끼, 그것을 외면하지 못하고 뱃속에 뭔가를 채워야 하는 인간. 그 과정을 통해 나누고 쌓이는 인간관계와 사람들. 도심 어느 구석의 이야기까지 더해져 눈길을 끈다. 먹는 행위 하나에 이렇게 많은 의미와 시선을 붙들고 있는 것도 작가의 재주다. 허름한 식당에서 먹은 온메밀 국수를 다시 먹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은 거대 기업에 기죽지 말고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켜 맛으로 유지하길 바라는 간절함을 만든다. 다음에 어느 날, 문득 찾아가고 싶은 그런 곳으로 남아있길 바라게 된다. 나만의 맛집은, 맛있는 음식이 있기도 하지만 음식 그 이상으로 마음에 채워지는 뭔가를 알았기 때문에 맛집이 되는 거다. 식당의 외관이 허름해도, 어느 구석진 골목 끝에 자리해도 굳이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그런 거다.

 

한편, 분식의 맛은 길거리표가 최고다. MSG 범벅이라 하여도 그 맛을 잃으면 안 된다. 먹는 것에 그다지 관심 없는 나도 이건 쌍엄지 추켜들고 외치고 싶다. 떡볶이는 역시 길거리표다. 새빨간 국물에 퐁당 담가있는 떡과 어묵.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조합이 있다. 김밥, 순대, 튀김은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어야 제맛이다. '김떡순' 가족은 흩어지면 안 된다. 아, 어쩌면 좋아. 이 시간에 떡볶이가 먹고 싶어 죽겠다. ㅠㅠ

 

특별한 날이 아닌데도 예쁜 옷을 입고 어딘가로 나가고 싶은 날, 봄나물의 향기가 콧속 깊이 스며들어 진하게 남겨진 날, 변하고 발전하는 빙수 대신 오리지널 빙수가 당기는 날. 그렇게 하나씩 파고드는 음식의 의미가 있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에서, 괜히 기분이 멜랑콜리 해져 향으로 취해버리는 음식, 아무것도 아닌 아주머니들의 호호호 웃음소리에 같이 웃게 되는 봄나물 같은... 왜 그렇게 먹는 것을 외치는지 이런 이야기들을 떠올려보니 조금 알 것도 같다. 그냥 어느 날의 한 장면, 어떤 장소의 이미지일 뿐인데 늘 먹는 것이 함께한다. 그걸 빼놓고 생각하자니 뭔가 허전하기도 하다. 아, 그래서였구나. 내가 지낸 오늘 하루를 떠올려보니 먹는다는 행위가, 음식이 빠질 수가 없구나. 나 오늘, 방울토마토 10알과 컵라면 하나 먹었다...

 

먹는 것을 향한 원초적 욕망에 목숨 걸듯 몰입하는 것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먹는 행위 안에 간절함이 있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이다.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비굴해지는 시간도 견뎌야 하는 게 세상 속 피라미드에서 가장 밑바닥을 지탱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그게 정말 살아가는 모습일까? 내가 진정 바라는 삶일까? 유 양은 그런 삶을 탈출한다. 안다. 고민 없이 그냥 저지르는 것처럼 보이는 유 양이지만, 현실 속 우리의 마음은 유 양이면서도 그렇게 저지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유 양의 과감함에 공감하며 속을 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소시민의 아우성을 대신 소리쳐 주고 있는 것 같아서. 쌍욕의 개운함과 구석에서 빛을 못 보고 있는 숨소리를 들춰내고 있다. 그녀의 쌍욕과 거침없는 과감함에 설레는 이유다. ^^

 

먹는 것에 대한 욕망과 견딜 수 없었던 사회 구조에서 탈출하고자 했던 유 양의 몸부림은 처절하다. 탈출이 아닌 백수로 전락했다는 게 보통 사람의 시선일 테니까 말이다. 다시 들어간 회사에서마저 잘린다. 그로 인해 그녀가 꿈꾸는, 창작에 대한 욕망이 더욱 불타오르는 시간을 만든다는 게 반전이다.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그 땅을 짚어야만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하니, 그녀도 이제 다시 꿈꾸며 일어설 일만 남았다. 그 와중에, 옥탑방에서 줄어드는 통장 잔액을 우울해하면서도 맛집 투어를 시작해버리는 그녀의 욕망을 막을 수는 없다. 그녀답다. 아마 그 크기를 잴 수 없는 식욕만큼이나 그녀의 꿈 욕망도 무한할 것만 같다. 더러운 성깔밖에 남은 것 없는 여자가 결국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해야만 하는 마음을 그린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꿈꾸고 싶은 것을 꾸는 일.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판타지 같지만, 결국 누군가는 해낼지 모른다. 그 누군가는 유 양일 수도 있고,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는 순간, 그건 판타지가 아닌 현실이 된다. 그렇게 세상에 부딪히며 꿈을 현실로 만들어버리는 것. 유 양이 끝나지 않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식욕으로만 따지자면, 여전히 나는 그 식욕을 자랑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상당히 날씬한 사람으로 오해하고는 하던데, 그렇지 않다. 먹는 것에 큰 관심이 없을 뿐이다. 그런데도 유 양이 보이는 그 음식에 대한 욕망이 낯설거나 거북하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언급하는 음식들은 특별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동네에서, 집에서 흔하게 보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대부분이다. 혼자 혹은 여럿이서 먹어온 음식이다. 익숙하면서 모르는 맛이 아니기에 더욱 그 간절함에 공감할 수 있었다. 특별한 나만의 음식이 아닌 누구나 알 수 있는, 즐길 수 있는 맛. 그런 맛들이 '내'가 아닌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그래서 이건 유 양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다. 오늘도 먹기 위해 몸부림치고 살아가기 위해 버둥거리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계속되는, 아주 웃~픈 다음 편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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