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

 

심오한 질문이라기보다는 가끔씩 하는 질문이다.

 

여기에 여러 사람들이 답을 내놓았는데, 어떤 사람은 인간의 본질은 경쟁에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인간의 본질은 협동에 있다고 한다.

우리가 쓰는 말인 인간(人間)란 말은 '사람 사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사람 사이란 홀로인 사람이 아니라 함께 사람을 의미한다. 함께 인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함께 산다는 뜻이다. 함께 산다는 말, 이는 협동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인간은 협동을 통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이 인간이라는 말에 이미 포함되어 있단 뜻이다.

 

지금 대선을 앞두고 각 후보들이 여러 후보들이 공약을 내걸고 자신들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각 후보들이 명심해야 할 바는 우리가 모두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협동의 대표적인 사례가 협동조합이다. 나만의 이익이 아닌 우리의 이익, 공유지의 비극이 아닌 함께 했을 때 더 좋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단체, 또는 사람들의 관계가 바로 협동조합이다.

 

이번 호의 특집은 바로 이러한 협동조합이다. 세계의 협동조합의 모습을 보여주고 왜 협동조합이 필요하나를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있는 협동조합에 대해서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회의 모습은 이러한 협동조합들이 연합을 이루어 함께 살아가는 사회이리라.

 

꿈 속의 일이 아니라,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 협동조합. 이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대안적 삶일 것이다.

 

여기에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원자력에 대한, 아니 핵이라고 하자, 핵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핵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계속 환기시키고 있다.

 

마찬가지로 돈에 대해서도. 우리를 구속하는 대상으로서의 돈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돈에 대해서도 요즘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연재하고 있다.

 

대안적 삶, 저 멀리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곁에 있음을, 우리가 살아야 함을 녹색평론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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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철학하기 -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바꾸는 101가지 철학 체험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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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무슨 구름 따먹는 얘기 같이 들리면, 그것은 우리가 철학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아무나 하는 학문이 아니라, 철학자라는 아주 특수한 집단만이 하는 학문이라는.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영어를 분석해보면 철학은 지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지 않나? 그냥 무언가를 추구하면 그것이 바로 철학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철학을 어려워한다. 이유가 무얼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일상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철학이라는 말이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담 철학은 무엇일까?

 

낯설게 하기

바로 이것이다. 늘 바라보는 나를 다른 모습으로 바라보기. 내가 늘 하던 일을 낯설게 바라보기. 낯설게 느끼기. 어? 하는 느낌이 드는 순간, 우리는 철학의 세계에 들어간다. 철학이란 자명하다고 생각한 일들이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떻게 낯설게 하나? 그것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 책에 나와 있다. 그것도 무려 101가지씩이나.

 

어떻게 생각하면 참 엉뚱한 발상이다. 그러나 철학이란 바로 이런 엉뚱함에서 낯설음이 생기고 낯설음에서 발생하지 않나?

 

처음을 보자. 내 이름 불러보기. 세상에 자기 이름을 불러보기가 일상에서 철학하기의 첫장면이라니... 그러나 내가 내 이름을 불러본 적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 보면, 거의 없다. 내 이름은 불려지기만 했지 스스로 부르는 경우는, 그것도 큰소리로 부르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자기 이름을 부르다 자신의 다른 존재를 깨닫게 되니, 철학의 낯설음,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일에서 시작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마지막은 섬세한 애무를 탐험하기이다. 자기 이름으로 시작해서 자신의 몸을 구체적으로 느끼는 과정, 이것도 역시 자신을 또 하나의 자기로 분리시켜 놓고 느껴보는, 낯설음의 일종이다.

 

소크라테스

가 생각이 났다. 철학자하면 배운 것이 늘 소크라테스니... 그런데, 소크라테스를 우리 어릴 적에 소쿠리 장수라고 했던 일이 생각났다. 왜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소쿠리 장수라고 했을까? 발음이 비슷해서이기는 하겠지만, 일견 생각해보면 소크라테스가 소쿠리 장수인 것이 맞겠다 싶다. 소쿠리에 철학을 담는.

 

우리의 일상에서 많은 일들이 사실은 철학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존재하는 일들을 낯설게 보게 하지 않았던가. 그의 대화법이든, 산파술이든, 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사실은 정확하지 않음을 깨닫게 했으니... 그는 소쿠리에 그러한 지식들을 담아, 그것을 사람들 앞에 내놓음으로써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사람이었으리라.

 

이런 소크라테스와 관계되어 또 하나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는 말. 이 역시 일상에서 낯설음을 경험하라는 말이다. 배부른 돼지라는 소리는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오로지 동물적 인간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일차원적인 인간, 즉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지 못하는 인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인간은 평생토록 철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고, 이는 자신을 성찰할 능력도 기회도 얻지 못하는 삶을 산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이 책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어 보라고 우리를 유혹한다. 그러면 다른 세상이 보일 것이라고. 한 번 해보라고. 무엇이 두렵냐고, 우리가 그냥 할 수 있는 일들인데...

 

그래, 여기에 나온 101가지 방법들은 참 황당하기도 하다. 이게 뭔 철학이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철학 맞다. 철학이 별거던가?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는 일, 그것이 바로 철학 아니던가.

 

또 이 책에 나온 101가지 방법, 참 쉽기도 하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한 번쯤 해볼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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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 쌍용자동차 이야기
공지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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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하나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전태일 재단을 방문하려다 무산되고, 전태일 동상에 헌화하려다 무산된 일. 그 때 막은 사람들이 쌍용차와 관련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일을 놓아두고 어떻게 전태일을 방문할 수 있느냐는 논리.

 

1970년대에는 전태일이 있다면, 그 전태일이 전태일로 끝나지 않고, 수많은 전태일들이 나왔는데... 2000년대 말에 들어와서 쌍용차가 바로 그 전태일이 되었다.

 

40년이 넘었는데도 전태일이 원하는 세상은 아직도 멀었으니... 전태일 재단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겠는지.

 

국민통합의 우선은 소외된 사람들, 이미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을 보듬어 안을 때에 가능하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명망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국민통합과는 좀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2000년대의 전태일, 이미 22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의 잘못이 아니라, 먹튀자본들의 잘못으로 그 피해를 온전히 노동자들이 감내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해결하지 않고는 국민통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쌍용차 문제에 대해서 힘있는 사람의 답을 듣고 싶어한다. 그 답이 어떠냐에 따라 국민통합인지 아니면 소외된 사람들은 계속 소외될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기에...

 

또다른 하나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고양원더스 야구단을 찾아간 소식. 여기에서 패자부활전이 필요하다고, 패자들도 다른 삶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한 소식.

 

패자부활전! 그렇다면 쌍용차 노동자들은 패자들이 아닌가. 이들에게 한 약속, 기업이 정상화되면 우선 채용한다는 그 약속만 지켜도 이들이 이렇게 좌절하고, 목숨까지 버리지는 않았을텐데...

 

단지 말뿐이 아니라 현실에서 가능한 패자부활의 모습을 보여주려면 지금,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는 진짜 패자들, 이 땅에서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경영자들의 잘못으로, 죽도록 일만하고도 일자리를 잃고 다른 일자리도 얻지 못하고 있는, 게다가 사회적으로도 배제되고 있는 그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세상에서 쉬운 것이 말하는 것이지만, 이 말을 실천으로 바꾸는 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사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려면 패자부활전이 있는 사회를 만들려면, 진정 패자들이 누구인가? 지금 부활전이 필요한 패자들이 누구인가 찾아야 한다. 알아야 한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패자들도 아니다. 그들은 패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패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도 처벌받지 않는다. 약속을 파기하고 처벌받지 않으니 패자가 아닌 사람들이 패자가 되어 버린다. 그 패자들은 어떠한 부활전도 가지지 못한다.

 

그냥 사회에서 누락된 사람으로, 잊혀진 사람으로, 아니 사회 위험인물로 낙인 찍힌다.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명확하고 그 경계를 넘지 않으려는 보통사람들과는 달리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그들에게는 바로 한 걸음이 곧 죽음이 된다. 아니 죽음을 늘 안고 산다.

 

읽기 싫은 책이다. 너무도 슬퍼서, 너무도 화가 나서, 너무도 나 자신이 무력하다고 생각해서.

 

하지만, 무력하다고 손을 놓고 있기에는 쌍용차 일은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지금은 이렇게 겨우 책 한 권 사서 읽어주고 있지만, 여기서 더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아마도 작가인 공지영 씨는 바로 여기서 가슴 아파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기에 이를 르포라는 형식으로 글을 써서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으리라. 출판 수익금 전액을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기부하겠다고 하면서...

 

전태일이 역사 책에서만 나왔으면 좋겠다. "그 땐 그랬지." 했으면 좋겠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으면서 이게 뭔 내용이야. 이게 현실적인 소설이야 하는 소리를 했으면 좋겠다.

 

그 많은 민주투사들이, 전태일의 친구들이, 전태일 정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이제 사회 지도층으로 올라서고 있는데, 왜 아직도 전태일은 현재형인가? 어째서 우리에게 과거는 과거로 머물지 않고 현재로 계속 남아 있는가?

 

읽으면서도 "전태일 평전"을 읽을 때처럼 마음이 아프고, 더 읽고 싶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읽는다.

이게 현실이야.

이게 바로 지금 현실이고, 우리 아이들이 자랐을 때도 겪을 현실이야.

우리가 바꾸지 않는다면...

 

정신 똑바로 차려!

 

이 책은 이를 말해주고 있다.

 

덧말

 

어처구니 없게도 이 책에서 부분적으로 교육의 중요성이 나온다. 노동자 교육이 아니라, 제도권 교육... 생존을 위해서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을 빨갱이로 모는 말을 하는 교사가 존재하는 제도권 학교 말이다. 이게 말이 되나? 노동은 신성하다고 말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헌법에 보장된 파업권을 행사하는 노동자들을 정당한 권리 행사라고 이야기는 못해줄망정, 빨갱이라고 하는 교사 앞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노동 교육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학교에서만이라도 교사가 그런 소리, 파업하는 노동자 = 빨갱이라는 말을 할 수 없게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란 말인가?

그 교사는 자신의 말로 인해 아이들이, 노동자의 아이들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 생각해 보았을까?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데... 이 부분, 참 마음이 아팠다. 아직도 그런 교사들이 있다는 사실에.

교육이 변하지 않으면, 교사가 바뀌지 않으면 노동자들은 계속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할 때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든다.

아무리 교사의 권위가 떨어졌다고 해도 학교에서는 아직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교사니까 말이다.

 

의자놀이에 대해서는 설명을 안해도 알 거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도 나와 있으니.. 그 잔인한 게임이 우리가 즐겨 하던 게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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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재익, 크리에이터 - 소설.영화.방송 삼단합체 크리에이터 이재익의 거의 모든 크리에이티브 이야기
이재익 지음 / 시공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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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에 <나는 가수다>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일까?'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자신은 크리에이터라고 말한다. 크리에이터?

 

굉장히 내용이 진지하고 어려울 것 같지만 아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 책에서 이재익은 크리에이터에 대해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오직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를 한다. 그의 경험, 그래서 재미있다. 쉽다. 그렇지만 무언가 남는다.

 

이런 크리에이터에 대해 이재익이 말해주고 있다. 누가 크리에이터이고, 어떻게 해야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으며, 어떤 모습의 크리에이터가 좋은 사람인지를...

 

크리에이터란 말이 귀에 거슬린다면 그냥 우리 식으로 창조자라고 해도 되겠고, 아니면 창의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 정도, 그것도 아니면 그냥 신(神-종교적 의미의 신이 아니고,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뜻에서)이라고 해도 되겠다.

 

21세기가 되면서 우리는 이제는 단순한 정보의 시대도, 지식의 시대도 아닌 창의성의 시대라고, 창의적인 사람이 살아남는 사회가 되리라고 했었다.

 

창의적인 사람을 다른 말로 하면 크리에이터라고 해도 좋으리라. 남들이 생각 못했던 것을 생각해내고, 그것을 단지 자신의 생각 속에 가두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또 볼 수 있게 만들어내는 사람이니 말이다.

 

첨단 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정보를 몰라서 일을 못한다는 소리는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인터넷이든, 아니면 다른 경로를 통해서든 우리는 원하는 정보를 쉽게 그리고 빠르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그 사람이 뛰어난 사람이다 아니다를 결정하는 요소가 될 수 없다.

 

정보는 이제 평준화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고급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서 알기는 힘들고, 또 그러한 정보는 고도의 지적 훈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필요한 정보는 평준화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평준화된 정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 활용의 면에서 창의적인 활용을 하는 사람이 남보다 앞서 갈 수 있게 된다. 이들을 우리는 크리에이터라고 부른다.

 

크리에이터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이 책에 나와 있는 이재익이라는 사람으로 한정해서 보면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라디오 피디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광고업계에 종사하는 사람, 영화계에 종사하는 감독 등과 또 다른 예술계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크리에이터라고 할 수 있지만,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크리에이티브하지 않다. (영어가 많이 들어간다. 크리에이티브를 창의적이라고 생각하자.)

 

따라서 이재익은 크리에이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야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는 자신이 이미 어느 정도 크리에이터로 남들에게 인식이 되고 있으며,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또 자신이 직접 경험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게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재익이라는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크리에이터는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자신이 소설가로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도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가 경험을 서술하면서 우리 눈 앞에 펼쳐진다. 우리는 그가 펼친 세계를 따라가면서 보게 되는데, 단지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소설가로서의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직접 자신의 작품을 예로 들어서 설명해주고 있어서 더욱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시나리오 작가와 라디오 피디의 이야기에서도 반복된다.

 

그래서 소설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고, 시나리오가 어떻게 구성이 되며 어떻게 영화화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얽힌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냥 재미로만 읽어도 된다. 재미로 읽다보면 흥미를 느끼고 흥미를 느끼다보면 무언가 찾아보려 할테니 말이다.

 

세 가지 크리에이터의 삶을 하나로 통합하여 살고 있는 이재익. 어쩌면 크리에이티브하다는 말은 한 분야에만 매몰되어 있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며, 그 분야들을 자신의 관점에서 통합시켜낼 수 있는 사고력을 지니고 있고, 이를 결과물로 만들어낼 끈기와 실천력이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이 점이 이 책에서 이재익이 말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고...

 

일상에 매몰된 삶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에 매몰돼 더이상 다른 것들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그냥 자신의 삶은 이거다라고 규정하고 산다. 이는 이미 크리에이터하고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이 단순히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사람, 크리에이터를 직업으로 갖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만 유용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한 삶은 창의적인 삶이고, 우리 모두는 창의적인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재익은 세 분야에서 크리에이터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만, 우리는 각자 어떤 분야에서 크리에이터로서의 삶을 살지 이재익의 이야기를 통해 꿈꾸고 실현하려 노력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삶이 훨씬 즐거워질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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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 문서고와 증인 What's Up 10
조르조 아감벤 지음, 정문영 옮김 / 새물결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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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표현하기 힘든 현실, 그래서 가능하지 않아야 했던 일이 가능했던 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는 대량학살을 대표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냥 대량학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죽 했으면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는 불가능하다는 아도르노의 말도 있겠는가.

 

하지만, 아우슈비츠는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고, 또한 아직도 가능태이다. 누가 아우슈비츠가 단지 과거의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겠는가.

 

세계 도처에서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경험했고, 또한 우리 역시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한 사람들이란 말인가.

 

단지 이 말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고 해야 하나.

 

그 말로는 이 말이 지닌 의미가 다해질 수 없단 생각이 든다.

 

아우슈비츠의 증인과 증언과 그리고 무슬림, 부끄러움과 주체, 문서고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그다지 두껍지 않은 이 책이지만, 내용은 참 무겁다. 그리고 어렵다.

 

철학에 약해서인지 몰라도, 언어에 대한 지식이 얇아서인지 몰라도 이 책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무슨 흥미거리로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다간 큰 코 다친다.

 

최소한 윤리와 법에 대해서, 그리고 말들의 어원에 대해서 언어학에 대해서, 푸코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 아니, 꼭 알고 있어야 한단 법은 없지만, 알고 있으면 읽기에 유리하다는 얘기다.

 

이런 지식이 옅은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든 책이었는데... 그래서 내 나름대로의 해석에 오독이 많겠지만, 어쩌랴 책은 오독을 필수로 한다는 얘기로 위안을 삼으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더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한마당, 1994 개정판 3쇄. 살아남은 자의 슬픔

 

첫 장을 읽으면서 이 시가 생각났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말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 말을 대신 해주는 사람, 그들이 바로 살아남은 자들이다. 그렇다면 말하지 못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소위 무슬림이라고 하는, 이 책에서는 이슬람교도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가장 비참한 수용소 생활을 하고, 결국은 대부분이 죽어나간 사람들이다. 정말로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수용소에서 극한의 생활을 했고,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생활을 했는데, 비인간과 인간이 함께 존재했던 공간, 인간이 비인간이 되고, 다시 비인간이 인간이 된 공간에서 증인은 누구여야 하는가. 당연히 이슬람교도들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증언을 할 수가 없다.

 

증언을 할 수가 없으면, 현실이 현실이 아니게 되는가. 과연 그런가. 그러나 말해지지 못하는 일이 현실로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 과거가 현재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에게는 언어가 필요하다. 즉 언어로 말해져야 한다. 아니 인간이 언어로 말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인간이다.

 

여기서 증인이 필요하다. 그 일에 대해서 증언을 해줄 사람,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주체성을 회복한 사람이다. 주체성이 없는 사람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 즉 이 책에서 말하는 이슬람교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주체성을 지닌 사람은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이는 부끄러움을 알 수 있는 사람이다.

 

즉, 부끄러움을 알 수 있다는 얘기는 주체성이 있다는 얘기가 되고, 어떤 일에 대해서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단 뜻이 된다. 그 사람이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는 과정, 이것이 바로 증언이다. 우리는 이런 증언을 통해 아우슈비츠를 비현실에서 현실로 끌어오게 된다.

 

현실로 끌어온 아우슈비츠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환기시켜준다. 우리가 기억을 되살리는 이유는 과거를 현재로 끌어와 미래로 나아가는 힘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있다. 그냥 문서고에 저장하는 지식으로 과거를 끌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이슬람교도들처럼 인간이 아닌 비인간의 극한까지 갔던 사람이 증언을 하지 못한다면 과연 그것을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 그 증언이 얼마나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그들 역시 브레히트의 시에 나온 것처럼 부끄러움을 아는, 그러나 죽어가는 자들에게는 강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존재 아니겠는가.

 

그래서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과, 이슬람교도들이 하는 증언의 간극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되는데...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증언을 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이슬람교도들의 증언이 실려 있다.

 

아우슈비츠의 진정한 증언은 이슬람교도들이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이 책에서 실현이 되고 있다고 해야 하는지....

 

우리나라에 아우슈비츠(또는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책들은 제법 된다. 만화로는 "쥐1,2"가 있고, 책으로는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있다. 이들을 생각하면서 이 책을 읽으면 굳이 철학이나 언어학에 대한 지식이 얕더라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법과 윤리의 문제가 이 책에 나오는데, 지금 이 시대는 어쩌면 법이 모든 것을 좌우하고 윤리가 쇠퇴한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여기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그 유명한 아이히만의 주장도 역시 법적으로는 자신은 무죄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죄가 있다는 말, 이는 현대의 병폐이지 않을까 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우리들은 법보다는 윤리를 회복하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윤리가 회복이 된다면, 아우슈비츠는 과거의 기억에서 우리를 추동하는 힘으로 작동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사람이되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는 사람들을 이슬람교도라고 했을까. 유대인들은 죽어가면서도 이슬람교도들을 자신들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참...... 이슬람교도란 번역이 자꾸 거슬렸는데... 무슬림이 이슬람교도들이니 어쩔 수 없지만, 종족 차별로 죽어가면서도 또다른 종족을 끌어들이다니... 이것이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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