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가 82호를 내었다. 처음 나올 때는 얼마 못 갈 줄 알았더니, 대안학교들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민들레가 필요하겠단 생각이 든다.

 

말이 82호지, 햇수로 따지면 13년이 넘는다. 사람으로 치면 태어나서 유치원,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생이 된 나이다. 많은 경험을 하고, 이제는 어느 정도 자생력을 갖춘 셈이다.

 

이번 호는 특이하다. 기존의 편집진이 잠시 쉬고, 그동안 민들레를 애독해왔던, 또는 사랑해왔던 사람들이 편집진이 되어 만들어냈다.

 

일명 "독자가 만든 특별호"

 

대안 교육을 다루는 잡지답게 편집도 특이하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민들레 스스로 축하할 나이도 되었고, 다른 사람들이 축하할 나이도 되었다고 본다.

 

마치, 앨범에 헌정 앨범이 있듯이 이번 호는 민들레에 대한 민들레 헌정호라고 하면 되겠다.

 

각지에서 각자 나름대로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사실 교육이라기보다는 배움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만, 생활했던 사람들이 민들레와 얽힌 사연들을 풀어내고, 자신들의 고민을 풀어내고, 삶을 풀어내고 있는 호다.

 

읽을거리가 다양하고, 그리고 전문적인 글보다는 각지에서 스스로 배우는 삶이란, 또 우리에게 필요한 배움이란을 고민하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마음에 와닿는다.

 

그리고 나하고 비교를 한다. 물론 나는 아직도 제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삶조차 규범적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민들레는 나에게 늘 자극을 준다. 앞으로도 계속 자극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지 못했던 점들을 계속 깨우쳐줄 것이다.

 

네 삶의 자리는 지금 거기야, 그런데, 거기에만 머물러 있을 거야 하면서...

 

꼭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대안적인 삶이다, 좋은 삶이다, 바람직한 삶이다라는 생각을 버린지는 오래다.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자신을 버리지 않고, 자신을 원망하지 않고, 남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생활을 한다면 그도 괜찮은 삶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자기합리화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민들레가 꾸준히 자극을 주고 있으니... 바람직한 삶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하고 있으니... 고민하는 사람... 방향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위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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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서정홍 지음, 최수연 사진 / 보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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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시인이라고 한다. 서정홍을. 그가 농사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농부시인이란 말을 꼭 붙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사실 직업인으로서의 시인은 시를 발표하고, 공식적으로 문단에서 인정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면,직업인이 아닌 자연인으로서의 시인은 우리 모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시인이냐를 직업으로 따지지 말고, 삶으로 따진다면, 굳이 농부시인이라고 두 직업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시인이란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직업 중에서 시인에 가장 가까운 직업이 농부이리라. 농부는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돈이 안되는 하늘을 바라보며, 자연과 하나되어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농부는 기업농이 아님을 다들 알리라.

 

서정홍 시인은 전에 낸 시집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시집 제목은 "내가 가장 착해질 때"이고 시 제목도 '내가 가장 착해질 때'이다.

 

이랑을 만들고 / 흙을 만지며 / 씨를 뿌릴 때 .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내가 가장 착해질 때 전문)

 

이번 시집에도 같은 제목의 시가 있다. 앞의 시가 밭에서 일할 때 자연과 하나가 되어 순수함으로 돌아간 자신을 이야기한다면 이번 시는 그러한 노동의 결과를 내 몸으로 받아들일 때를 이야기하고 있다.

 

내 손으로 / 농사지은 쌀로 / 정성껏 밥을 지어 / 천천히 씹어 먹으면 /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서정홍, 밥 한 숫가락에 기대어, 보리, 2012년. 내가 가장 착해질 때 전문)

 

이렇게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사는 모습이 이 시집 곳곳에서 나타난다. 그렇다고 농부의 삶이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고 해서 편하다거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시인은 농부이기 때문에 농부의 삶이 얼마나 힘든 삶인지를 시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실 농부가 되는 길은 하늘이 인도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힘든 길이고, 이렇듯 사람을 살리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가볍게 생각하는 음식들이 이런 험난한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생각을 하면, 버려지는 음식들은 최소한 없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힘들지만, 버리지 못하는 농사일, 그것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여 서정홍 시인은 삶 자체도 시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이번 시집에 시로써 살아서 실려 있다. 이 시집을 읽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농부에 대해, 농사에 대해 그동안 잊고 있었던 마음이 되살아 난다.

 

어려운 말 하나도 없이, 우리가 쓰는 일상언어들이 그대로 시에 실려 있으며, 시골 생활의 모습들이 가감없이 잘 표현되어 있다. 어쩌면 시로 살려낸 농촌 풍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래서 이번 시집에는 죽음과 관련된 시들이 제법 많다.

 

이제 농촌은 노쇠해가고 있고, 죽음을 늘 곁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며칠마다 노인들이 죽어가고 있는 농촌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경원하지 않는다. 죽음 역시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자연과 하나되는 삶, 아니던가.

 

따라서 자연은 똑똑한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연과 닮은 사람을 우리는 똑똑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허생전"에서 허생도 무인도에 사람들을 데려가지만, 그가 그곳에서 데리고 나온 사람은 바로 똑똑한 사람들이다.

 

똑똑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망치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어떤 재벌 총수가 한 말과 너무 다르지 않은가. 똑똑한 사람(천재) 한 명이 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시인은 알고 있다. 똑똑한 사람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이는 자연과 더불어 생활한 시인의 삶이 말해주는 것이리라. 그런데도 시인은 이를 '못난이 철학'이라고 했다. 못난이가 바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받아들여도 좋으리라.

 

못난이 철학

 

똑똑한 사람이 없으면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만들지 못할 것이고

무기가 없으면

비참한 전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똑똑한 사람이 없으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무시무시한 핵발전소도

만들지 못할 것이다.

 

똑똑한 사람이 없으면

수천수만 년

잘도 흘러가던 아름다운 강을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파헤치는 짓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똑똑한 사람이 없으면

집을 두세 채 가진 사람도

집이 없어 애태우는 사람도

없어질 것이다.

 

똑똑한 사람이 없으면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

느리고 미련한 사람들이

서로 나누고 섬기며

모두가 가난하면서도

모두가 부유한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네 것 내 것 따지기 좋아하고

사람 위에 앉아 사람 부리기 즐기고

돈벌이 되는 곳에 똥파리처럼 달려들고

명예와 권력 따위에 눈치 빠르고

땀 흘려 일하지 않고 떵떵거리며 살고 싶은

똑똑한 사람이 없으면......

 

서정홍, 밥 한 숫가락에 기대어, 보리, 2012년. 못난이 철학 전문 

 

좋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시들을 읽으며 나도 착해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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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미지와 시 - 우리시대의 지성 5-017 (구) 문지 스펙트럼 17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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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시전집을 읽으면서 날이미지시란 도대체 무엇일까 궁금했다. 시만 읽고 이해하기엔 내 시적 독해 능력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오규원이 날이미지시에 대한 자신의 시론을 글로 발표했던 것들을 하나로 묶어놓은 책이다.

 

그래서 오규원이 주장하는 날이미지시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는 날이미지시를 이렇게 말한다.

 

현상 그 자체가 된 언어를, 즉 사변화되거나 개념화되기 전의 현상화된 언어를 '날이미지'라고 하고, 날이미지로 된 시를 '날이미지시'라고 이름 붙였다. (오규원, 날이미지와 시, 문학과지성사. 7쪽)

 

'날이미지시'는 개념화되거나 사변화되기 이전의 의미인 '현상'을 이미지로 하고 있는 세계이다. (89쪽)

 

따라서 이런 날이미지시는 은유의 수사법보다는 환유의 수사법에 더 친근하다고 한다.

 

은유는 유사성에 의한 선택과 대치라는 우리들 사고의 한 축이며, 환유는 인접성에 의한 결합과 접속이라는 한 축이다. (14쪽)

 

은유는 대체할 수 있는 사물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환유는 인접하고 있기 때문에 대체불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은유적 사고에서는 끊임없이 다른 사물로, 또는 다른 대상으로, 관념으로 대체하려는 사고를 하게 되는데, 환유적 사고는 사물을,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환유적 사고에서는 인간의 주관적 관념을 배제한 날것 그대로를 시에 드러내려 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시들은 결국 어떤 대상에서 우주 전체를 보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한다. 시에 관해서는 철저해서 자신의 시도 들여다보고 들여다봐 날이미지시에 맞게 고쳤던 시인.

 

그가 자신의 시를 예로 들면서 날이미지시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어서, 현상을, 언어를 인식으로 예술로 표현하는 그 시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고나 할까.

 

김춘수의 무의미시와 오규원의 날이미지시에 대한 비교가 이 책에 나오는데, 날이미지는 리얼리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그래서 현실에 간여를 하지 않는 것 같으나 시 자체로 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무의미시와는 이런 점에서 갈린다고 할 수 있다.

 

시인에게는 시인 자신만의 방법론이 있어야 한다는 오규원의 주장. 좋다.

 

오규원의 시를 깊이 있게 읽고 싶은 사람은 이 작은 책을 참조하는 것도 좋겠다.

 

덧글

 

92쪽의 표에서 인식, 내용 밑에 있는 사실적 현상은 사실적 환상으로 바꾸어야 한다.

 

117쪽의 1994년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는 세잔이 이 때 살지 않았으므로 년도가 잘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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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열정
수잔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이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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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제목이 "토성의 영향 아래"란다. 토성의 영향이란 우울, 느림 등을 의미한다고 하고. 벤야민에 대한 글의 제목인데, 이렇듯 손택은 벤야민을 좋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벤야민은 우리에게도 잘알려진 사람이기도 하고.

 

손택의 읽기를 빌려 다른 작가들에 대해서 읽는다. 어떨 때는 쉽고 재미있게, 어떨 때는 너무도 어렵고 지루하게...

 

폴 굿맨, 리펜슈탈, 지버베르크, 카네티, 아르토에 대해서 들어본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서양문학과는 거리가 먼 나는 이들을 수전 손택을 통해서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러니 나는 손택의 눈을 통해서 이들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중의 굴절.

 

손택이 한 번 굴절 시킨 작가들을 내가 또 한 번 굴절시키고 있다. 이것이 작가들이 하고자 하는 본질에 얼마나 다가갈 수 있을까? 아니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 반드시 진실이고, 또 작품의 본질일까?

 

아니리라. 작품의 본질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작가에 따라서, 또 독자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 고정된 형식으로 존재하지 않고, 유동적인 가소성이 있는 존재로 작품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손택이 읽은 작품을 손택의 눈을 통해 읽어도 나는 손택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니 받아들일 수가 없다. 비록 그 작품을 읽지 않았다고 하여도 손택의 주장에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립한 다음, 손택의 글과 비교를 해보면 더 좋겠지만 그럴만한 능력은 되지 않으니, 손택의 읽기를 따라가되, 내가 받아들이는 것은 손택의 읽기 방법이다. 그리고 그 읽기 방법을 통해 내 읽기 방법을 정립해가는 것.

 

다행히도 벤야민과 바르트 정도는 어느 정도 읽어서, 이 부분을 재미있게 읽었다. 역시 배경지식이 있어야 읽기가 쉽다. 그러니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그런데도 난해하다고 손택도 인정하고 있는, 게다가 이 책에서는 분량도 가장 많은 아르토에 대해서는 도무지 뭔 소린지 하면서 읽었고... 초현실주의와 비슷하나 초현실주의도 아닌 사람이 아르토라고 하니...

 

아르토에 대한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손택은 이렇게 말한다.

 

극도로 지루하거나 도덕적으로 끔찍하거나 읽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운 작품에 대해, 그 작품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서는 거의 말해주지 않는 (때로는 심지어 감추기까지 하는) 재미난 사실들을 논함으로써 그 작가를 고전으로 만든다. 어떤 작가들은 읽히지 않기 때문에, 본래 읽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학적, 지적 고전이 된다. (수전 손택, 우울한 열정, 이후 2009. 237쪽)

 

아르토를 통독하는 사람에게, 아르토는 지독하게 멀리 있는, 도무지 흡수할 수 없는 목소리고 존재이다. (수전 손택, 우울한 열정, 이후, 2009. 238쪽)

 

결국 이 논의를 보면서 나는 아르토란 사람의 작품에 흥미를 지니는 일을 포기했다. 흥미를 지녀봤자 머리만 아플 따름이라고 먹지 못하는 포도를 신포도라고 한 여우를 따라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손택의 아르토 읽기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난해하다는 '이상'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 번쯤은 정독하면서 조용히 이상에 대해 생각해봐야겠다는 도전의식은 생긴다.

 

손택의 글들, 참 다채롭다. 읽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천천히, 찬찬히 읽어볼 필요가 있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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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당분간 읽었던 시집을 손에서 놓으련다.

긴 휴가기간이 끝나가고, 나 역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기 때문이다.

 

좀 우습기는 하다. 시 역시 일상에서 언제든지 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는 시를 손에 잡기가 쉽지 않다. 아니 이건 핑계다. 더 많은 시를 읽을 수 있음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또는 생각하기 힘들다는 핑계로, 또는 삶과 관계 있는 글들을 읽어야 한다는 이유로 시집을 잘 잡지 않는다.

 

그럼에도 새로 구입한 시집은 읽는다. 이게 무슨 일? 새로운 시집들은 읽어가면서, 기존에 읽었던 시집들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다시 내게 다가올 때를 기다린다고 하면 되나?

 

마치 오래된 된장이 맛있듯이, 김치 중에도 묵은지가 있듯이, 시집들은 내 책꽂이에서 잘 익어가고 있으리라. 그동안에 새로운 시집들이 또 익기를 기다리며 자기 자리를 차지하겠고.

 

긴 휴가의 끝. 대미를 장식할 시집은 선택하겠단 고민도 없이 눈에 들어왔다. 이선관의 시집.

 

"지구촌에 주인은 없다"와 "우리는 오늘 그대 곁으로 간다"

 

환경생태시집이라고도 하고,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기도 하고, 자유 민주에 대한, 평등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는 시집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더위로 고생한 이번 여름, 녹조가 심해져서 물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하고, 온갖 콘크리트 덩어리들로 인해 우리가 이래도 되나 하기도 했고, 에어컨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통해서 오히려 더위를 더 가중시키는 사람들의 모습도 겪었고, 자동차가 뿜어내는 매연과 연기와 그 소리로 고생도 했고...

 

더 이 시집이 눈에 띠는 이유는 재생지로 만들어졌다는 점. 1997년과 2000년에 나온 시집이라, 시집의 종이 끝들이 벌써 누렇게 변해가고 있다. 아마도 몇 해가 더 지나면 바삭거리면서 잘못 넘기면 부서지고 말리라.

 

요즘 종이가 온갖 약품으로 무겁고 빛나고 매끄러운데 비해서 이 시집 둘 다 종이는 예전에 우리들이 어릴 적 쓰던 종이와 같다. 그래서 더 친근하고, 환경 생태시집이라는 이름에 걸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이선관 시인의 시가 바로 이러한 재생지와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할까. 겉으로 화사하게 꾸미려 하지 않고 시인의 본분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서 그 고민을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말로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생각과 나의 글은 투박한 뚝배기에 담아논 텁텁한 막걸리에 비유하면 적당하리라. 기교도 부릴 줄 모르고 서양냄새도 풍길 줄 모른다. 그냥 살아왔기게 살아왔음의 흔적, 바람이 불면 사그라질 것 같은 ...... 살아있다는 증명이라도 하듯.

 

이선관. 우리는 오늘 그대 곁으로 간다, 실천문학사, 2000년. 후기에서

 

이미 시인은 우리나라가 경제개발에 열을 올리던 1970년대에 독수대(毒水帶)란 시를 써서 환경오염을 경고했었다고 한다. 이 시들이 "지구촌에 주인은 없다"에 실려 있다. 다행이다. 환경시의 처음을 볼 수 있어서 말이다. 이 독수대 말고도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대부분 환경과 생태에 관한 시들이다. 시인이 얼마나 환경오염에 민감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경고를 한다. 쉬지 않고. 우리는 이 경고를 얼마나 들었던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마치 앞에서 읽었던 김영무의 '오늘의 예언자는'과 같다.

 

환경시의 원조격인 독수대1을 보자

 

독수대 (毒水帶)1

 

바다에서 /둔탁한 소리가 난다. / 이따이 이따이

 

설익은 과일은 / 우박처럼 떨어져 내린다. / 이따이 이따이

 

새벽잠을 설친 시민들의 / 눈꺼풀은 아직 열리지 않는다. / 이따이 이따이

 

비에 젖은 현수막은 / 바람을 마시며 춤춘다. /  이따이 이따이

 

아아 / 바다의 유언 /  이따이 이따이

 

이선관, 지구촌엔 주인이 없다, 살림터. 1997. 독수대1 전문

 

그래서 이러한 환경오염을 없애기 위해서는 시인은 '생명을 가진 지구가/ 망가져 죽어가기 전에/ 한 사람의 의인이 필요로 하기보담/ 열 사람의 넝마주의가 /절실히 필요로 할 때라고/생각합니다'(열 명의 넝마주의가'에서)고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시를 읽을수록 환경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사무치게 된다. 시인의 절규가 투박한 직설적인 말투로 인해 직접 우리에게 다가온다. 안다는 것, 실천한다는 것임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환경과 생태를 생각하는 시인이 통일에 대해서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분단 자체가 이미 반환경적이고 반생태적이기 때문이다. 비무장지대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도처에 깔려 있는 지뢰들과, 그리고 대치상황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수입되고 있는 무기들... 여기에 에너지 문제라는 핑계로 원자력 발전소까지...

 

"우리는 오늘 그대 곁으로 간다"에서는 원자력 문제와 분단 문제, 그리고 민주주의 문제가 시집에 고루 실려 있다. 아마도 시인이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2011년에 일어난 후쿠시마 사태를 보고 더 경악을 했으리라. 시인은 이미 체르노빌 사태에 대해서 여섯 편의 시를 써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시들도 생각해볼 만하지만, 여기서는 통일에 관한, 오늘이 8.15광복절이니 말이다. 그런 시를 한 번 보자. 정말로 통일은 이렇게 왔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광복은 해방인 동시에 분단이었으니, 광복절에 분단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통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일도 좋겠단 생각이 드니 말이다.

 

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왔으면 좋겠다

 

 

여보야

이불 같이 덮자

춥다

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따뜻한 솜이불처럼

왔으면 좋겠다

 

 이선관, 우리는 오늘 그대 곁으로 간다, 실천문학사, 2000년.

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왔으면 좋겠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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