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해야 할 것
수잔 손택 지음, 김유경 옮김 / 이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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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이자, 비평가, 연출가로 알려져 있는 손택이다시피, 다방면에 박식하다. 이렇게 많이 알고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것을 글로 써낸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여기에는 영미 문학(문화) 또는 서양 문학(문화)에 대해서 무지한 내 자신의 상태가 그를 더 대단하게 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손택이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 중에 솔직히 읽은 게 없다고 해야 하나? 이거야 우리가 세계문학에서 다뤘던 사람들을 이야기하지 않고, 아직은 우리나라에 덜 알려진 작가들을 그들의 위대함을 찾아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니, 내 무지가 그냥 무지가 아님을 위안하여도 되는지...

 

내가 본 것들, 내가 읽은 것들, 그곳과 이곳으로 나누어져 있는 책이다. 각 부마다 나름대로의 일관성은 있지만, 굳이 이렇게 묶을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짜피 안 보고, 안 읽고, 못 가본 곳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손택의 글은 읽을 만하다. 그 이유는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과 같은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시선을 가지고 어떻게 대상을 바라보는지를 손택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1부에서는 주로 무용과 영화와 그림 등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를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문화적인 대상을 감상할 때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때로는 지루하기도 하고, 뭔 얘기인지, 원 작품을 알 수 없으니 그냥 손택의 논의를 따라가는 것이 좀 짜증나기도 하지만... 방향을 바꾸어서 작품에 접근하는 방식이 어떠한지 파악하는 방법으로 읽으면 읽을 만하다.

 

2부는 그래도 1부보다는 조금 친숙하다. 문학 이야기니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해도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도 친숙한 것 아니던가. 여기에서 가장 기억에 부분은 구절은 읽기와 쓰기에 관한 부분이다. 작가는 쓰는 사람이라 읽지 않는다고 하는 작가들에 대해 손택은 자신은 작가이기에 읽는다고 말한다. 쓰기 위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 먼저 읽을 수밖에 없다고.

 

우리나라에서도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좋은 시들을 많이 읽어라라고 답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마찬가지다. 글쓰기에 대한 자세는 동양이건 서양이건 나름대로 자기만의 스타일을 확립한 사람들은 글쓰기만을 고집하지 않느다. 그렇게 쓰기까지는 얼마나 많이 읽어야 했는가. 또 읽을 것인가.

 

그래서 손택은 자신의 작품을 자신이 읽을 수 있어야 좋은 작가라고 말하는 듯이다. 작가에게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글 하나만으로도 손택의 이 책은 나에게 의미가 있다.

 

3부는 그곳과 이곳이다. 이분법으로 갈려진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이분법으로 갈라놓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게다. 손택은.

 

여기서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도 하지만, 사실 여행이란 이곳과 그곳을 극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요소이니 말이다. 예전에는 그곳을 야만의 장소로, 다시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이상의 장소로 인식했던 여행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주요 내용은 사라예보에서 있었던 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내전(사실 내전이라는 말보다는 학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이 한창인 사라예보에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했던 일을 중심으로 그곳과 이곳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우리는 그곳을 배제의 장소로 이곳과는 다른 장소로 인식하기 위해서 그곳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어느 곳이나 다 사람이 살 수 있는 곳,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 그리고 평소에 말이 많던 지식인들이 그곳에 대해서는 왜 입을 다물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

 

그곳에 대해서 약간의 지식이 있었던 나는 손택의 이 글이 가슴에 와닿았다. 멀리서 그곳이라고 지칭했을 땐 이미 그곳과 이곳은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 지금 우리도 그곳이라고 부르는 장소가 한둘이 아니지 않은가.

 

먼 나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얘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많이 부끄러웠다. 나 역시 그곳은 이곳과 다른 곳으로 구분짓고, 나는 안전한 이곳에서 그곳을 방관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나를 반성하게 만든 글이다.

 

그래서 이 책은 뒷부분으로 갈수록 흥미를 끈다. 생각할거리를 제공해 준다. 손택의 글들이 참 자유분방하게 쓰였다는 생각이 들지만(번역의 문제는 아닐테고), 읽으면서 마음이 콕콕 박히는 글들이 있다. 그 점이 손택의 글을 읽게 하는 점인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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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덥다, 더워. 이 말도 이제는 상투어가 되어 버렸다. 같은 말도 자꾸 하면 효력이 떨어지는데...이제는 더위를 몸이 받아들여야 하는지... 더위에 계속 시집을 읽고 있다. 어쩌면 이 여름이 가기 전까지는 계속 읽을 수밖에 없으리라.

 

이 더위에 방학을 생각한다.

만약 방학이 없었다면 학생은 어떻게 지낼까? 나는 학생 때 방학이 없었다면 견딜 수 있었을까? 내 어릴 때는 여름이 견디기 더 쉬웠다. 젊어서였을까? 여름엔 놀 거리들이 풍부했고, 해는 길었으며 우리는 힘이 넘쳐났다. 더위 쯤이야 땀 한 번 뻘뻘 흘리고, 냇가에 가서 물에 한 번 풍덩 들어갔다 나오면 됐는데... 그래도 방학이 없는 학교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에게 방학이 있는가? 방학 때 더위를 식힐 만한 곳이 있는가? 또 놀 시간이 있는가? 밖에 나가보면 학원을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 학원으로 가는 아이들, 그리고 길가에 주욱 늘어서 있는 학원 차량들이 보인다. 이 아이들에겐 방학도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기간이구나. 하여 이 아이들은 방학을 이중으로 받아야 한다. 학교에서 하는 방학과 학원에서 하는 방학.

 

덥다고 공부를 안 할 수야 없지만, 적어도 방학기간 만큼은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밖에 능소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이상하다. 예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능소화가 요즘은 왜이리도 잘 보이는지... 여름이면, 아니 여름이 되기 전부터 여름까지 능소화는 그 주황색의 꽃을 우리게에 보여준다.

 

담장을 넘어서든지, 아니면 가로수 옆을 타고서든지, 예전엔 양반꽃이라고 했다던데... 양반이 국민의 대다수가 되고, 이제는 아예 없어진 사회를 반영하는지, 우리에게 이 능소화는 잘 보인다. 그래 야안과 상민이 어디 있고, 꽃 중에 양반꽃이 어디 있어.

 

길을 걷다가 능소화를 보고 눈이 즐거워지고, 더위를 잠깐 잊기도 한다. 이 더운 여름에 저 꽃들은 그래도 잘 버티고 있구나. 나도 버텨야지 하면서.

 

윤재철의 "능소화"란 시집을 펼치다. 반성 시리즈 두 권을 읽었더니... 갑자기 학생들이 생각이 나고, 풍요로움 속의 비루함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집단이 학생들 아니던가. 윤재철 시인이 교사라는 생각과, 예전에 이 시집에서 매우 많은 학교 관련 시들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펼쳐보다.

 

그래 방학이란 본래 학교를 놓아버리는 기간인데... 학생들은 학교를 놓아버리되, 학원을 놓아버리지 못했고, 이들은 공부와 비슷하지만 공부는 아닌 공부를 하느라 이토록 고생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 

 

시집에는 시인의 개인적인 체험도, 생각도, 서정도 담겨 있지만, 학생에 중점을 두고 읽은 이 시는 2부가 압권이다. 우리나라 학교의 모습이 시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래 이게 바로 학교다. 이게 바로 우리 교육현실이다. 

 

획일화, 경쟁, 생각 하지 않음, 통제, 일방적 지시 등등.

 

다양성, 협동, 생각 함, 자율, 토의와 토론을 통한 일처리 등등은 사라지고 없다. 참 암울한 모습이다. 이 암울한 모습 속에서 시인은 그래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한다. 제도를 바꾸려고 투쟁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지만, 그래도 이 아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준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한다.

 

하여 오히려 그런 시들 속에서 우리는 교육 현실이 잘못되었음을, 반드시 바뀌어야 함을 인식하게 된다. 슬픈 교육현실, 그 현실을 더위 속에서도 피어나 자신의 모습을 알리고 있는 능소화란 제목의 시에 담고 있다. 그래서 슬프다. 덥다. 그렇지만, 꽃은 피어나고, 학생들은 자라난다. 덥다고 나가떨어지지 않고, 물방울 하나 떨어뜨려 주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교사 아니던가.

 

이 시에 나타난 학교 현실을 보자. 우선 시험 때 이런 학생이 있다.

'중간 고사 수학 시험지 받자 마자 / 쭉 한번 훑어보더니 / 번호 이름 쓰고 그냥 엎드려 잔다'('지성이' 1-3행) 특별한 아이인가. 아니다. 학교에서 시험 때면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모습이다.

 

여기에 '교문 지도 하는데 / 한 녀석이 반은 사복이고 반은 교복인 채 / 가방도 없이 쓰레빠만 신고 들어오길래'(겁먹은 송아지 1-3행) 이런 학생도 있고,

'공부하는 놈들은 처음부터 젖혀 두고 / 힘자랑 하는 놈들끼리 / 서로 다른 중학교 출신들끼리 / 불알을 늘어뜨리고 눈 부라리며 / 뿔싸움을 한다'(각축 2연)고 학기 초면 어김없이 벌어지는 순위 정하기 싸움이 있으며,

'환호작약 해방/ 더러는 이리 튀고 저리 튀며 / 식용유 붓고 밀가루 뿌리고 / 교복을 찢는다'(졸업식 2연)고 뉴스에도 나왔던 졸업식 모습도 보이고,

'학교에는 1,710개 번호가 산다네 / 컴퓨터도 이름은 모른다네 / 단지 오엠알 카드 까맣게 칠한 / 번호로 1,710명 얼굴을 기억한다네 / 학교에는 번호들이 하루 종일을 모여 산다네'(번호들의 세상 마지막 연)이라고 익명으로,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고 번호로 존재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름이 아닌 번호로 지내는 아이들, 비대화된 학교의 비인간적인 모습 아니던가. 우리는 작은 학교를 추구해야 하는데,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학교을 없애려고 하는 모습은 교육과는 배치되는 모습 아니던가.

 

이 밖에도 학생부에 끌려와 부모님이 빌고 있는 모습과 머리카락을 왜 단속하는지 모르겠다는 아이들, 매점에서는 살아있는 아이들, 수능 때 몇 십만의 아이들이 똑같은 자세로 대기하고 있는 그 비인간적인 모습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렇다고 시인은 이것들을 어떻게 고치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사실들을 사실적으로 우리에게 교사인 시적 화자의 눈을 통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본다는 것이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보여지길 꺼려하는 것들을 보여주는 일, 이 또한 시인의 일이 아니겠는가. 자, 어떻게 바꾸어갈 것인지는 우리 몫이고, 시인은 이런 학교의 현실을, 생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지금 아이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시 한 편. 과연 이것이 아이티 강국의 모습일까. 생각해 보자.

 

내공

 

휴대폰을 늘 손에 달고 다니며

틈만 나면 귀신 같은 손놀림으로

자판 눌러대는 아이들을 보면

엠피 쓰리 귀에 꽂고 볼펜 돌려가며

시험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면

내가 허전하다

 

도무지 혼자 있지 못하는 아이들

아이티 상품이 없으면 젖꼭지 빼앗긴 듯

외롭고 쓸쓸한 아이들

수염은 거뭇거뭇 덩치는 코끼리만 한 녀석들이

손바닥보다 작은 아이티 기기 속에 파묻혀

없다

 

옛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농경 문화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만 안테나 달고

도무지 내공이 없는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이 허전하다

이 문명이 참으로 허전하다

 

윤재철, 능소화, 솔, 2007. 내공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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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를 벗어야 언론이 산다 - 한국 언론의 보도 관행과 저널리즘의 위기
박창섭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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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제 4부라고도 한다. 그만큼 정치와 밀접히 관련이 있는 집단이다. 행정, 입법, 사법에 이어 언론이라는 4부가 제 구실을 해야지만 민주주의가 잘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4부가 잘 이루어질까? 우리나라 행정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입법을 관장하고 있는 국회가 정상적으로 굴러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지, 그리고 사법부는 올해 대법관 임명 청문회로 인해 홍역을 치르지 않았던가. 

 

여기에 언론은 자유로운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자. 과연 언론은 공정하고 진실한 보도를 하고 있는가. 언론인들은 지식인으로서, 또 언론인으로서 자신들의 책임을 인식하고 책임있는 보도를 하려고 하고 있는가?

 

사람들이 신문을 안 본 지, 뉴스를 멀리한 지 오래되었다고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는가? 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언론에 "야마"라는 게 있단다. 처음 듣는 말이다. 하긴 이는 언론인들끼리 은어처럼 사용하는 말이라고 하니, 그리고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도 않은 말이니, 언론인과 접촉이 없는 내가 이 말을 들었을 리가 없다. 내가 아는 야마는 기껏해야 일본어로 '산'이거나 우리가 비속어로 쓰는 '야마가 돈다'는 말밖에는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야마'란 말이 언론에서는 너무도 광범위하게, 그러나 중요하게 쓰이고 있단다. 이 '야마'가 없으면 기사가 되지 않는단다. 도대체 '야마'가 뭘까? 딱부러지게 사전식으로 정리할 수 없다. 이 책의 저자도 기자 생활을 16년 했고, 저널리즘을 공부했으며, "야마"를 가지고 책을 썼음에도 '야마'란 말을 무엇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고 한다.

 

다만, 이 '야마'란 말은 보도의 내용과 관점, 의도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66쪽), 내용 야마, 관점 야마, 의도 야마(67쪽)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즉 기사에 깔려 있는 내용과 그 내용을 선정하게 된 관점, 그리고 그 기사를 내보낸 의도 등을 종합적으로 '야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쉽게 '틀'이라는 말로도 할 수 있는데, 이 틀보다는 더 정교하게 기사를 규정하는 존재가 '야마'라고 할 수 있다.

 

'야마'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각 신문사마다 어떻게 이런 야마가 작동하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사실, 야마에 따라서 관점이 달라지며, 의도가 달라지기에 내용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러므로 같은 사안이라도 기자가 취급하는 취재원부터, 사실들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야마의 구현 방식을 살피기 위해 우리 사회에서 쟁점이 되었던 두 가지 사안을 예로 들어서 각 신문사의 야마를 파악하고 있다.

 

두 개의 사안 중 하나는 미디어법안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무상급식안이다. 이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중립적인 성향의 한국일보를 대상으로 어떻게 기사화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이를 읽다보면 같은 사안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내가 어떤 신문을 보는지에 따라서 내 관점도 알게 모르게 조정당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사실 정보화시대라고 하지만, 어떤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 여러 언론에서 정보를 얻는 사람은 이 책에서도 나와 있지만 13%정도라고 하고(305쪽) 있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가지 매체에서 정보를 얻는다는 얘기가 된다. 나역시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자신이 어떤 신문을 보느냐에 따라 즉 그 신문사의 "야마"에 따라 자신의 관점이 고정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점을 깨닫게 해준 점이 이 책이 지닌 장점이다.

 

언론의 사명을 '진실'과 '공정'이라고 한다는데, 우리가 진실과 공정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읽는 독자인 우리들이 깨어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 독자들이 깨어있어야 언론들이 진실과 공정 보도를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역으로 깨달았다고나 할까.

 

이책의 말을 받아 정리하면 이렇다, '야마'를 벗어야 언론이 산다. 마찬가지로 언론이 살아야 정치가 산다. 정치가 살아야 민주주의가 산다. 민주주의가 살아야 우리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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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잠시 쉴만도 하련만... 여름은 제 세상이라는듯이 자기의 존재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런 더위에 다들 지쳐떨어지고 있는데... 무슨 유럽 사람들처럼 여름 휴가를 한 달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날씨는 점점 더 우리들을 괴롭히는데...

 

이것 역시 우리들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하면 무슨 소리냐고 할 사람도 많겠지. 지구 온난화를 인정하는 사람도 있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기온이 계속 오르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으리라.

 

열대야가 일어난 날수가 늘고 있고, 수온이 상승해서 물고기의 종류가 바뀌고 있으며, 과일의 북방한계선이 점점 위로 올라오고 있으니... 게다가 요즘은 우리나라 최고기온을 경쟁이라도 하는듯이 계속 올리고 있으니...

이런 날들이 계속되면 사회계층에 따라서 더위에 대한 피해가 나타난다. 아무래도 힘없는 사람, 못 사는 사람, 경제적으로 하위층에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고통을 받게 된다. 이런 더위에 집 안에서 에어컨을 틀어놓고 쉴 수도(어떤 사람들은 에어컨조차도 없고) 없고, 땡볕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힘들 때일수록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는 자세. 이것이 바로 반성하는 자세 아니던가. 이 시집 전에 읽었던 시집이 "반성"이었다. 풍요로운 80년대를 비루하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의 모습을 시로 표현했었는데... 이 시집을 읽은 다음 이번엔 무슨 시집? 하다가 제목이 "반성하다 그만둔 날"이라서 이 시집을 골랐다.

 

연속해서 읽는 시집인데, 하는 반성이고, 하나는 반성하다 그만둔 날이니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고 말이다. 사실 예전에 다 읽은 시집인데...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으니 예전엔 그다지 큰 감흥을 주지 못했나 보다 하는 생각도 있고, 2008년에 나온 시집이니 1987년에 나온 김영승의 시집보다 21년 뒤에 나왔으니, 내용도 좀 다르겠지란 생각도 있고... 또 하나 이 시집을 고른 이유는 출판사, 실천문학사라는 점도 있다. 실천문학사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의식이 있는 책들을 냈던 출판사였으니, 이 시집에도 사회의식이 담겨 있으리라는 생각도 있었다.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시집은 '이 시다'라고 마음에 꽂히는 시는 없다. 어떤 시집에서는 시 하나가 마음에 들어 전체 시집을 빛내기도 하는데... 그만큼 쉬운 언어로 쓰여진 시들인데.. 읽어나갈수록 시들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된다.

 

한 편 한 편의 시가 자기 소리를 내고 있는데, 이들이 뭉쳐서 전체적인 소리를 낸다. 어라? 이게 이 집의 매력이었구나. 그래서 한 편의 시가 내 맘에 꽂히지는 않았지만, 시집이 강렬한 인상을 내기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이 시집의 배경은 "가리봉"이다. 가리봉이라면 잘 모르는 사람이 있겠으니, "구로공단"이라고 하자. 요즘은 "구로디지털단지"로 바뀌어 굉장히 세련되어진 곳. 이 곳의 80년대는 우리나라 산업화의 그늘이라고 할 수 있는, 김영승의 시에서 나타난 풍요로움 속의 비루함이 전체적으로 몰려 있는 곳이었다. 물론 그 전에는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이 강하게 결합했던 곳이기도 하고.

 

일명 공순이 공돌이들이(이런 말들을 썼던 사람들...자기들도 노동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던) 몰려 있던 곳, 가출 청소년들이 모여들었던 곳, 그 곳에서 자기 청춘의 삶을 시작한 사람. 그 곳의 삶을 시 속에 복원시켜 내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그 곳에서 나오려 한다. 그 곳은 자기 시의 고향이지만, 그 고향을 떠나 또 다른 삶을 살려고 한다. 그래서 "반성하기를 그만둔 날"이다.

 

이제는 세상이 변했으므로,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미래를 찾아 떠나야 한다.

이러한 내용의 시들이 많이 들어 있는데... 2부가 독특하다. 2부는 시인의 개인사를, 가리봉이 아닌, 그녀의 고향인 해남(?)에서의 일을 담고 있다. 특히 어머니, 아버지의 일을.

 

2부가 눈물나게 슬프다. 아버지의 첩으로 살아가야 하는 어머니. 이런 어머니와 아버지로 인해 겪어야 했던 설움들... 가리봉에서의 생활보다는 시인의 어린 시절을 담은 이 2부의 시들이 아프게 마음에 다가온다. 어머니와 화해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그런 어머니를 결국 하나의 여자로 받아들이게 되는 모습이, 2부에 걸쳐 펼쳐진다. 좋다.

 

더운 날,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았던 시절을 그려낸 시들을 읽으며 다시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생각해 본다. 나는 반성을 해야 하나,

 

반성을 그만두어야 하나.

 

나는 아직도 반성해야 한다. 그만큼 나는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으므로.  

 

무더위,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송가. 김사이의 시 한 편을 보자.

 

무엇을 위하여 종은 울리나

 

나는 잘렸다

터무니없이

 

5월 연둣빛 나무 이파리를 보는데

휴대전화로, 그래 휴대폰으로

해고통보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해고사유는 '잡담'이다.

그리고 더 이상 회사에 갈 필요도 없었다

눈만 뜨면 전쟁을 치르듯이 아이 맡기고

30분 일찍 전철에 구겨져가던 내 밥그릇 자리

그러나 나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였고

비공식적으로 잘린 거다

어디에도 내가 흘린 피는 없다

어디에도 내가 살기 위해 노력했다는 흔적도 없다

자본이 숨 쉬기 위해 내가 숨죽이다가

이름도 인격도 빼앗긴 결과다

이제 더 이상 내가 가난한 집 딸이고

돈 벌어야 하는 아내고 한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자본은 너무 자유롭고 나는 갇혀 있다

자본은 너무 안전하고 나는 위태롭다

이제 종이 울리면 쉬러 가는 것은

내가 아니라 자본, 그래 돈이라는 것이

정규적으로 쉬러 간다

 

언제든지 공식적이지 않게 나는 잘리고

무엇을 위하여 종이 울린단 말인가

 

김사이, 반성하다 그만둔 날, 실천문학사 2008 초판, 무엇을 위하여 종은 울리나 전문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 내가 꿈꾸는 사회. 종은 우리를 위해서 울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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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매혹적이다. 반성이라. 도무지 반성이란 모르고 사는 현대에서 반성이라는 제목으로 반성이라는 시들만 주욱 실려 있는 시집이다. 그렇다고 반성1부터 반성 844까지(이 시집은 반성 연작시인데... 차례를 보니 844번이 가장 뒷번호다. 다 실려 있지는 않고 중간중간 빈 번호들이 있다.) 순서대로 되어 있지는 않다. 내용들에 따라서 이 반성 연작의 순서는 바뀌어 실려 있다.

 

일일삼성(一日三省)이라고 자신을 하루에 세 번은 살펴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 살펴봄이라는 말은 반성이라는 말과 같고, 반성이라는 말은 자신을 떨어뜨려 놓고 바라볼 수 있다는 말과 같으니, 자신을 떨어뜨려 놓는다는 일은 시와는 거리가 맞지 않을 듯하지만, 시인이 세상을 주관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은 결국,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자신과 분리하고, 세상을 바라본다는 의미라고 생각하면, 시인에게 반성은 필수품이어야 한다.

 

반성. 그러나 이 시는 직설적이지 않다. 무엇을 반성하고 있는지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비루한 자신의 삶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얼마나 비루하냐면 자신의 삶을 자신이 능동적으로 살지 못하고 억지려 밀려서 산다고 표현한다. 일명 밀어내기

 

반성 72

 

나는 대변을 보는 게 아니라

밀어내기 하는 것 같다.

만루 때의 훠볼처럼

밀어내는 것 같다.

죽기는 싫어서 억지로 밥을 먹고

먹으면 먹자마자

조금 있으면 곧 대변이 나온다.

안 먹으면 안 나온다.

입학도 졸업도 결혼도 출산도

히히 밀어내는 것 같다.

먹고 배설해 버리는 것 같다.

사랑도 이별도

죽음도.

 

김영승, 반성, 민음사, 2009년 개정판 2쇄. 반성 72 전문 

 

비루한 삶이기 때문에 온갖 비속어가 시에 등장한다. 따라서 아름다운 시가 아니다. 시에는 술과 피와 정액이 난무한다. 자신이 사는 곳을 잠수함이라고까지 표현했으니... 이 시의 전체적인 주조는 액체이다. 액체 중에서도 끈끈함이 느껴지는 맑음과는 거리가 먼 그런 액체.

 

왜 사는 곳이 잠수함인가. 간단하다. 반지하방에 살기 때문이다. 반지하방, 가난한 사람들의 거처. 그 곳에 존재하는 습기, 축축함, 그리고 삶의 고달픔.

 

시인이 시집을 낸 때는 80년대다. 우리나라가 풍요로움의 절정을 향해 치달릴 때다. 흥청망청, 우리도 곧 선진국이 된다고, 경제는 호황을 이루고, 세계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은 높아지고 있는 때... 이 때 다들 행복할까? 이런 질문을 시인은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질문에 시인은 우리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다는 답을 내린다. 자신의 삶에서, 또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의 삶을 보고서. 그래서 모두들 행복에 겨워해야 한다고 할 때 아니라고, 아닌 삶들이 도처에 있다고, 과연 이것이 행복이냐고 시인은 질문을 한다.

 

이 질문이 때로는 비속어로 나타나고, 비꼼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 시집에서는 많은 시들이 논리성이나 체계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말이 안됨, 말들이 꼬여 있음, 비논리성 등등이 시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바로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80년대의 모습이다.

 

80년대 자조적으로 유행했던 말. 3S. SEX, SCREEN, SPORTS.

 

이 때 우리를 휘감았던 이 말들은 액체와 긴밀한 연관이 있다. 끈적끈적한, 우리네 삶에 달라붙는. 우리네 삶을 더 밝고, 명랑하고, 풍요롭게 해주어야 할 대상들이 위로부터의 강제로 인해 우리 삶을 더 어둡고, 더 힘들고, 가난하게 해주는 대상으로 전락한 시대가 80년대 아니던가.

 

이러니 시인이 반성할 수밖에. 그가 반성 연작시를 쓸 수밖에. 그렇다고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다 칙칙하지는 않다. 본래 어두움 속에서도 밝음이 있듯이, 어려운 삶에서도 행복이 있다. 어쩌면 낮은 곳에서 사람들은 더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를 보자.

 

반성 100

 

연탄장수 아저씨와 그의 두 딸이 리어카를 끌고 왔다. 

아빠, 이 집은 백 장이지? 금방이겠다. 머.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그 아이들이 연탄을 날라다 쌓고 있다.

아빠처럼 얼굴에 껌정칠도 한 채 명랑하게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딸을 낳으면 이 얘기를 해 주리라.

니들은 두 장씩 날러

연탄장수 아저씨가 네 장씩 나르며 얘기했다.

 

김영승, 반성, 민음사. 2009년 개정판 2쇄. 반성 100 전문

 

이 시집이 87년에 처음 출간되었으니 2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시에 나온 내용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80년대 풍요로움의 뒷모습이 사라지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반성하고 있는가. 나는? 나는 반성하고 있는가? 되새겨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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