蓮花益淨地水染

百姓益善權金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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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힘들수록 인간은 존재의 초월적 근원을 찾습니다. 인간의 초월적 근원은 무슨 통속한 신이나 절대 권력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힘겹게 사는 인간에게 초월적 근원은 다름 아닌 버림받은 사람들, 무엇보다 세월호사건 희생자와 그 가족입니다. 이들을 찾아서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이려면.


* 23일 자정까지 참여 가능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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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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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여러 날 동안 아주 천천히 두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배철현이 쓴 『인간의 위대한 질문』과 『신의 위대한 질문』입니다. 전자는 신약성서, 후자는 구약성서에 기록된 관건적 질문들을 토대로 오늘 여기에 필요한 참된 인간의 삶이 무엇인가 모색한 책입니다.


일단 질문으로 전체의 얼개를 잡았다는 사실 자체가 통속 기독교의 멱살을 움켜쥐는 도발입니다. 무엇보다 그 질문의 내용들을 치밀한 문헌비평으로 고증함으로써 의도된 무지와 오류를 걷어내어 혼수상태에 빠져버린 기독교 영성의 따귀를 후려갈기는 순간순간이야말로 통쾌무비 그 자체입니다.


저자는 신학자가 아닙니다. 성직자는 더욱 아닙니다. 그는 고전문헌학자입니다. 이 빼어난 고전을 기독교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는 시종 차분한 어조를 유지합니다. 삶의 중대한 길목에서 진지하게 신학을 공부했고 성직의 도상에 있다가 돌아선 저로서는 그처럼 차분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어떤 회한이 통렬하게 들이닥쳤고, 또 한편으로는 같은 결의 트임이 빚어내는 공현 때문에 영혼이 통째 웅웅거렸습니다. 두 책을 모두 읽고 생각들을 다듬던 중 테리 이글턴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출구를 잃은 급진적 충동들이 이동해 간 곳 중 하나가 하필이면 신학이다. 오늘날 신학의 몇몇 영역에서는 들뢰즈와 비디우, 푸코와 페미니즘, 마르크스와 하이데거 등을 거론하는 매우 세련되고 활기찬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런 현상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신학이 주장하는 진리들 중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많다 해도, 끊임없이 전문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아직 남아 있는 가장 야심찬 이론적 영역의 하나가 바로 신학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인간의 본질과 운명 그 자체를 주제로 삼아 생명의 초월적 근원이라고 상정되는 존재와 연관시켜 연구하는 학문이 아닌가. 분석철학이나 정치학에서는 제기하기 어려운 의문들이다.·······신학이 해결책이라기보다는 문젯거리로 점점 더 여겨지는 세계에서, 부분적으로나마 해답을 찾는 데 비판적 사고를 진작하는 것 역시 신학이다.(『신을 옹호하다』215-216쪽)


물론 여기 신학은 통속한 주류 기독교 신학이 아닙니다. 테리 이글턴의 표현대로 ‘인간의 본질과 운명 그 자체를 주제로 삼아 생명의 초월적 근원이라고 상정되는 존재와 연관시켜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광활함the Spaciousness의 맥락에서 당면한 위기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결곡 곡진한 사유 운동을 말합니다. 교리에 터한 신념의 체계는 저 초월적 근원, 그러니까 광활함의 맥락에 가 닿지 못하므로 신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신학이 해답을 찾는 데 비판적 사고를 진작할 수 있는 것은 초월적 근원, 광활함의 맥락에서 사유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초월적 근원, 광활함의 맥락이란 “구원은 굶주린 사람의 배를 채워주고, 이민자들을 환영하며, 아픈 이들을 찾아가 돌보고, 부자들의 횡포에서 가난한 사람과 고아와 미망인을 보호하는 문제다. 놀랍게 들리겠지만 우리는 종교라는 특별한 기구를 통해 구원받는 게 아니라 서로 뒤섞여 살아가는 일상적 관계의 질을 통하여 구원받는다.”(『신을 옹호하다』33쪽)라는 진리의 역동적 산실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신학으로써 배철현 이상의 날카롭고 옹골찬 질문을 할 수 있고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배철현 이상으로 날카롭고 옹골찬 회의를 품어 안아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통속한 기독교 신봉자를 향한 요청이 아닙니다. 그들은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인류에게 주어진 귀중한 선물임을 알아차린 트인 영혼의 사람에게 보내는 간곡한 요청입니다.


돌아보면 아득한 세월입니다. 법학도에서 신학도로, 다시 신학도에서 의학도로 생의 길을 바꾸는 과정에서 제가 짊어져야 했던 짐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60년을 걸어 이제 이 모든 사유와 실천의 통섭을 시작해야 할 시점에 다다랐습니다. 흔히 법학·신학·의학을 3대 신성학문이라 합니다. 그 신성이란 말 앞에 정색하고 정좌합니다. 버려진 사람들을 향한 발걸음 없이, 그들이 왜 버려졌는지에 대한 물음 없이 살 수 없는 삶이 신성한 삶입니다. 그 신성한 삶을 기록한 성서, 그 성서를 질문에 담아 극진히 성찰한 배철현의 발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두 책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썼을까, 궁금하긴 한데 그다지 궁금해 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제 삶의 결에 맞추어 먼저 『인간의 위대한 질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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