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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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모두가 우울증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울증은 그냥 없애기만 하면 되는 그런 질병이 아닙니다. 모든 병이 사실은 그렇거니와 우울증 역시 진실의 전령입니다. 우리 모두 무엇엔가 홀려 허깨비로서 삶을 살고 있으니 제발 좀 돌아보라고 외치는 ‘광야의 예언자’입니다. 썩은 가치에 매몰되어 잠자고 있는 영혼을 깨우는 가차 없는 혁명의 소리입니다.

  ·······우울증은 우울한 삶을 가리킵니다. 다양한 증상들은 각기 우울한 삶의 에피소드를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우울증은 우울한 삶을 혁파하라고 절규하는 영혼의 외침입니다. 우울증을 통해 슬픔에, 수치심에, 무기력에, 죄의식에 중독된 자신의 참혹한 모습을 직시할 수만 있다면 우울증이야말로 실로 찬란한 희망입니다.

  우울증이 축복이자 희망이 되어가는 도정에서 우리가 아프게 배우는 것은 다름 아닌 ‘현실성’입니다. 비현실이 현실을 비틀어버린 ‘비극’이 우울증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볼 줄 아는 눈, 본 그대로를 살 줄 아는 몸, 산 그대로를 사랑할 줄 아는 마음, 이런 도저한 현실성에 깃드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울의 그림자와 아름답게 결별합니다.

  현실성의 요체는 생명의 한계성입니다. 완전한 생명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슬픕니다. 그 슬픔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하지만 그 아픔이 우리를 간절하게, 사무치게 살도록 하는 힘입니다. 간절함을, 사무침을 각성하라고 간절하게, 사무치게 부르는 음성이 바로 우울증입니다. 불완전함을 보듬어 안고 죽음을 향해 가는, 그러나 꼭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아니 한 번이어서 지극히 아름다운 인생을 사랑한다면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벗이여, 지. 금. 여. 기. 가 비로소 참된 자기 인생을 찾을 수 있는 희망의 시공간입니다. 우울증이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그대의 삶을 고요히 돌아보십시오.(299-300쪽)




1


반쪽 빛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반쪽 어둠을 찾아 영접하는 것이다.


영혼은 본래부터 완전하였다.


2


영혼의 혈거


그 바닥엔


우주먼지로 지어진 밥상 하나


그 위엔


먼지의 밥 한 그릇 숟가락 두 개


바라보며 나누어 먹으며 가끔 입가를 닦아주며



_<소울메이트> 전문 (김선우의 『녹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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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0장 두 번째 문단입니다. 

 

故君子不可以不修身. 思修身 不可以不事親. 思事親 不可以不知人. 思知人 不可以不知天.

고군자불가이불수신. 사수신 불가이불사친. 사사친 불가이부지인. 사지인 불가이부지천.


그러므로 군자는 그 때문에 몸을 닦지 아니할 수 없다. 몸을 닦으려고 생각한다면 부모를 섬기지 않을 수 없다. 부모를 섬기려고 생각한다면 사람을 알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을 알려고 생각한다면 하늘을 알지 않을 수 없다.

 

2. 앞 문단에서 이미 신身을 실천이라 번역한 바 있습니다. 군자가 군자인 증거는 실천에 있습니다. 말과 명상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생득적인 것도 아니고, 한 번 하면 영구히 자격증이 부여되는 것도 아닙니다. 간단없이 닦아야[수修] 하는 것입니다. 삶의 조건은 그 때 그 때 다르기 때문이지요.

 

이런 실천의 수련은 부모(친족)를 모시는 일에서 처음 사회적 위치를 획득합니다. 이는 단순히 효의 가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부모를 모시는 행위는 부모를 닮는 행위입니다. 부모를 닮아야 하는 까닭은 부모가 바로 사회적 실천의 발원지이기 때문입니다. 부모한테서 중용이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모시듯 이웃人을 알아 갑니다. 그 이웃은 부모한테서 시작된 생명 연대의 한 지평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안다는 것은 물론 인식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소통의 앎입니다. 삶을 공유하는 앎입니다. 함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앎입니다. 서로 대동大同의 원리를 깨우치는 앎입니다. 더불어 성찰함으로써 성취를 일궈내는 앎입니다. 결국 그 이웃은 남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천하무인天下無人!

 

이웃을 아는 것은 하늘 이치를 아는 것에 닿아 있습니다. 하늘 이치는 생명의 연대성이니 이것이 곧 인仁이요, 중용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미誠微(제16장)입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숭고한 하늘 이치란 것도 따지고 보면 이웃과 섞는 일상의 삶, 부모 섬기는 평범한 실천이 그 고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단도직입으로 요약하자면 실천으로서 내 몸의 움직임이 곧 하늘의 이치와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늘의 이치는 다시 부모와 이웃에게 구체화되므로 어디 신비한, 아니 허황한 높은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곁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용』은 『신약성서』와 포개집니다. 작은 이웃 한 사람에게 대하는 그 태도를 곧 하느님을 대하는 태도로 평가하겠다는 예수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결국 하늘은 우리 안에, 그것도 몸 안에 있습니다.


3. 하늘, 하면 높이 있는 것으로, 그러니까 수직적 무엇으로 생각하는 유구한 인습을 좇아 우리는 하늘 품은 사람, 하면 고매함을 떠올립니다. 그런 사람이 혹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여태껏 우리가 말해온 중용의 차원에서 그 있음은 없음과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중용에서 말하는 하늘은 높이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굳이 그런 명사 어법으로 말한다면 옆에 있는 무엇입니다. 정확히 동사 어법으로 말한다면 옆으로 또 옆으로 무한히 번져감입니다. 이런 하늘을 품은 사람은 고매하지 않습니다. 옆 사람, 또 그 옆 사람과 어금버금합니다. 그 어금버금함으로 끊임없이 번져가는 영혼의 의지가 다를 뿐입니다. 그 다름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기존의 어휘가 없습니다. 단도직입으로 “중용하다”는 새 말을 쓰면 좋겠습니다.


이 “중용한”, 그러니까 하늘 품은 사람은 ‘정치경제학 비판’을 영성으로 지닌 사람입니다. 그는 살해 정치, 수탈 경제를 직시합니다. 자유와 평등의 경사傾斜 문제에 관여합니다. 버림받은 사람의 편에 섭니다. 약자의 손을 들어줍니다. 어둠 속에 함께 머무릅니다. 옹골차게 오지랖이 넓은 사람입니다. 하여 그가 빚어가는 하늘은 드넓음the Spaciousness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자, 자기 곳간만 채우는 자, 자기 떨거지만 챙기는 자, 그러기 위해 남을 죽이는 자, 남의 것을 빼앗는 자, 거짓을 일삼는 자가 고매함을 가장하고 세상을 호령합니다. 매판독재분단고착 세력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대한민국이 바로 그런 세상입니다. 바로 그 매판독재분단고착 세력에 맞서서, 바로 그 대한민국을 자주민주통일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경계를 드넓음에로 허물어가는 치열한 사람이 진정 하늘 품은 사람입니다.


진정 하늘 품은 사람이 백범을 테러리스트라 하겠습니까. 진정 하늘 품은 사람이 강정마을에 미군기지 건설하는 것을 찬성하겠습니까. 진정 하늘 품은 사람이 쌍용자동차 노동자 해고가 정당하다 하겠습니까. 진정 하늘 품은 사람이 부정과 은폐와 조작으로만 굴러가는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겠습니까. 진정 하늘 품은 사람이 세월호사건, 이제는 지겹다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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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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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래. 나도 죽는다!’ 아주 분명한 몸 감각으로 죽음의 느낌이 다가들 때 슬픔보다 간절함에 목이 멥니다. 제 목숨과 삶에 대해 지닐 수밖에 없는 근원적 그리움이 가슴을 적셔 옵니다. 더 살고 싶다는 안타까움이 아니라 송구함과 감사함으로 온 영혼이 젖어듭니다. 목숨도, 삶도 따뜻한 어머니 품에서 나오는 향 맑은 아픔이며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이 그리움으로 우울증 앓는 벗들과 마음을 나누어 왔습니다. 온 정성을 기울였으나 다만 한 올 바람으로 스쳐 가버린 인연도 있습니다. 어물어물 당황하며 맞았으나 평생 인연으로 함께 흘러가는 인연도 있습니다. 허망함과 뿌듯함이 수도 없이 교차합니다. 누군가는 허구한 날 슬픈 사람과 살다시피 하는데 그대는 슬프지 않은가,·······묻습니다. 물론 슬픕니다.·······그러나 그 슬픔,·······모두 사람의 것입니다. 올만해서 왔습니다. 갈만하면 가지 않겠습니까. 아, 그들이 채 가기도 전에 스러지는 사람이 드물지 않습니다. 허나 그들 또한 알지 못할 또 다른 인연으로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내릴 것입니다.

  하루 삼만 삼천 번씩 꿈을 꿉니다.·······우울증을 앓는 많은 이웃을 무애자재無碍自在의 땅으로 초대하는 꿈. 제 팔 뻗어 닿는 곳에 있는 사람들, 제 입 열어 들을 수 있는 곳에 있는 사람들, 그들만이라도 함께했으면 하는 꿈.·······부디 이 꿈이 예지몽豫知夢이 되어·······켜켜이 쟁여진 정한의 매듭을 푸는 실마리로 살아나기를 삼가 빕니다.(292-293쪽)


우울과 불안이 모질게 엉겨 붙어 있는 청년이 어느 날 상담 중에 문득 문맥을 끊고 간절한 눈빛으로 제게 말했습니다.


“쌤 아프지 마세요.”


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쌤 아프시면 누가 고쳐요?”


제가 되물었습니다.


“누구? 너? 나?”


그가 돌연 무거워진 낯빛으로 대답했습니다.


“둘 다요.”


순간 제 온몸은 커다란 눈시울이 되어 붉게 젖어들고 말았습니다. 하마터면 그를 끌어안고 엉엉 울 뻔했습니다. 재빨리 노을을 거둬들이고 웃으며 말해주었습니다.


“쌤은 아파도 안 아파!”


이 말은 그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준 것입니다. 물론 이 말도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는 합니다. 제가 본디 하려던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쌤은 늘 아파서 안 아파!”


늘 아팠던 장엄 스승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제게 그런 장엄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 아닙니다. 장엄을 향한 숭고의 여정에서 무수히 실패한 자가 지니는 비애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가 다시 오면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네가 고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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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의 문서들은 대개 오랜 세월에 걸쳐 편집, 가필된 복합 저작물입니다. 시대와 상황, 그리고 손을 대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더하거나 덜어지고, 심지어 왜곡까지 되면서 오늘날의 최종(!) 텍스트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중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사에 가탁된 최초 저자에서 주희까지 이르는 동안 숱한 손길이 이런저런 변형을 가한 것이지요. 그래서 문맥의 흐름이 부자연스럽기도 하고, 중복도 있고, 억지로 우겨넣은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전문가의 문헌비평이 세밀하게 밝혀낼 문제입니다. 저는 다만 제 삶과 인격 수준에서 그런 어기語氣와 내용을 가려보고 나름대로 독법을 선택하면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중용』을 읽기 시작할 때 텍스트 전체를 보고 그 구조를 살피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조심스레 가다 보면 그럴 때가 오려니 하고 있었는데 제16장에서 많이 망설이게 되더니 급기야 제17장부터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멈추고 유심히 『중용』 뒷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중용』 텍스트는 대략 16장 내지 20장을 경계로 하여 앞 뒤 내용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2장에서 시작한 전반부는 중용에 대하여, 후반부는 성誠에 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1장은 이런 차이를 통합하기 위해 주희가 집어넣은 서론 또는 총론이 아닐까 합니다.

 

문제는 제16장부터 제20장까지입니다. 제 눈에는 제17장에서 제19장은 확실히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추정컨대 후대에 끼워 넣어진 듯합니다. 이 판단에 의거, 우리 읽기에서 제외하겠습니다. 문헌비평 지식을 전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리는 결단이라 오류 가능성이 있지만 억지스러워 보이는 내용을 구태여 견강부회하거나, 동떨어진 상태 그대로 문맥과 상관없이 주절주절 떠드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보정할 기회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제16장도 느닷없이 귀신 이야기가 나와서 만만치 않게 낯설기는 합니다. 허나 앞서 읽은 대로 성미誠微를 중용의 다른 묘사로 읽으면 제16장이 『중용』 전반부와 제20장 이하 후반부를 잇는 지도리로 자리매김 되어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제20장 내용도 뭔가 복잡하고 어수선합니다. 다섯, 셋, 아홉 등 숫자를 통한 열거 어법 모두가 공자의 오리지널 어록인지도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중복된 문장이 걸러지지 않은 것을 보면 후대의 편집 과정에서 뒤섞임이 일어났음에 거의 틀림없습니다. 성誠을 직접 언급하는 후반부부터 진정성이 있는 본문으로 보고 싶으나 큰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전반부를 성을 설명하기 위한 토대쯤으로 이해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냥 처음부터 진행합니다.  

 

2. 제20장 본문 첫 부분입니다.

 

哀公問政. 

애공문정. 

子曰 文武之政 布在方策 其人存則其政擧 其人亡則其政息. 

자왈 문무지정 포재방책 기인존즉기정거 기인망즉지정식.

人道敏政 地道敏樹 夫政也者蒲盧也. 

인도민정 지도민수 부정야자포로야.

故爲政在人 取人以身 修身以道 修道以仁.

고위정재인 취인이신 수신이도 수도이인. 

仁者人也 親親爲大 義者宜也 尊賢爲大 親親之殺 尊賢之等 禮所生也.

인자인야 친친위대 의자의야 존현위대 친친지쇄 존현지등 예소생야.

  

애공이 정치를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문왕과 무왕의 정치는 방책에 펼쳐져 있으니 그러한 사람이 존재하면 그러한 정치가 이루어지고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그러한 정치는 멈춘다. 사람의 도는 정치에 민감하고 땅의 도는 나무에 민감하다. 대저 정치라는 것은 창포나 갈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를 행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사람을 취하는 데는 몸으로써 하고 몸을 닦는 데는 도를 가지고 하며, 도를 닦는 데는 인仁을 가지고 한다. 仁이란 人이니 친족과 하나 됨이 으뜸이고 의義란 의宜이니 현명한 사람을 높이는 것이 으뜸이다. 친족과 하나 됨에 있어서의 순서와 현명한 사람을 높이는 데 있어서의 등급이 예가 생겨나는 바탕인 것이다.

 

3. 정치는 단순히 제도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습니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사람의 존부에 정치의 존부를 일치시킨 것입니다. 좋은 토양에서 나무가 잘 자라나듯 훌륭한 정치가의 손에서 바른 정치가 빚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치를 행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고위정재인故爲政在人].

 

그러면 훌륭한 정치가인가 아닌가를 어떻게 판단할까요? 그의 실천, 곧 신身을 보고 압니다. 그 실천의 수련이 도리에 의거하는가를 보고 압니다. 그 도리의 수련이 어짐, 곧 인仁에 의거하는가 보고 압니다. 요컨대 어짐을 실천하는 사람이 훌륭한 정치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짐이란 무엇일까요? 인자인야仁者人也. 초 간단 답인데, 그게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질다는 것은 사람답다는 것이다, 어진 사람이야말로 사람이다, 대략 이런 뜻으로 읽어서 큰 무리가 없겠지만 아무래도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이 느낌을 해소하는 일은 일단 뒤로 미루고 문맥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친족과 하나 됨이 으뜸이다, 곧 친친위대親親爲大라는 말이 인자인야의 이를테면 콘텐츠입니다. 물론 친족이란 말이 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마치 친족처럼”으로 읽으면 금방 괜찮아 집니다. 마치 친족처럼 사람과 사람 관계가 연속성, 일치성 속에 있는 것이 바로 어짐이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짐이란 생명의 연대성입니다.

 

인자인야 친친위대仁者人也  親親爲大 뒤에 의義란 의宜이니 현명한 사람을 높이는 것이 으뜸이다, 곧 의자의야 존현위대義者宜也 尊賢爲大라는 말이 따라 나옵니다. 대구對句임에 틀림없지만 그 위상이 문제입니다. 의義를 인仁과 대등한 범주로 놓으면 인이란 가치로 훌륭한 정치가를 판단한다는 전체 논지가 어그러집니다. 그러므로 형식적 대구를 전체 뜻에 종속시켜 의를 좁은 의미의 인의 대칭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을 높이는 인간관계는 친친親親의 연속성과는 달리 불연속성을 전제해야 합니다. 현명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불일치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차이점을 설명하는 말이 바로 친친지쇄 존현지등親親之殺 尊賢之等입니다. 쇄殺는 차이가 없다는 뜻이고 등等은 차이가 있다는 뜻이니 확연히 구분됩니다.

 

결국 어짐仁은 생명의 수평적 연속성을, 옳음義은 수직적 불연속성을 담당합니다. 이 구별된 가치의 통합에서 예가 생깁니다[예소생야禮所生也]. 그러면 예禮가 인仁의 상위개념일까요? 아닙니다. 예는 인을 성찰적으로 살핀 인의 다른 이름입니다. 미분화적 인은 그저 친친지쇄親親之殺지만 분화적 성찰 이후 인은 존현지등尊賢之等이라는 의의 관점을 포괄하는데 바로 그것을 예라 이름 한다는 것입니다.

 

사물의 이치로 보면 인이 예의 근원입니다. 친親을 거치지 않은 현賢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연속성을 전제하지 않은 차등은 그 자체로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허나 역사적 사실로 보면 인은 이상태理想態이고 예는 현실태現實態일 것입니다. 불연속적 계층구조가 정치의 질서를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절대 평등의 이상은 현실 정치의 폭압과 착취를 막기 위한 가치적 영원회귀로서 작동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예에 발을 디디고 인을 추구하는 실천 과정이 바로 바른 정치인 것입니다. 문득 20세기 혁명의 전설 체 게바라의 말이 떠오릅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지니자!”


4. 바른 정치의 목표이자 기준인 어짐仁이 모든 인간이 “마치 친족처럼” “하나 되는” 생명의 연대성을 뜻한다면 그 구체적 방법은 무엇일까요? 개인적으로 파자破字해서 글자 뜻 새기는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이 경우는 어쩐지 꼭 그래야 할 것만 같아 그리 해 보지요. 간결합니다. 인仁은 두二 사람人입니다. 둘이 모여 이루는 그 관계가 사람됨의 본령이라면 바로 그게 소통, 즉 관통과 흡수 아니겠습니까?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어짐이 곧 중용입니다! 서로 소통함으로써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어짐이라는 말입니다.

 

5. 그런데 본디 인人은 보편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동이東夷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다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다시 보면 인자인야仁者人也라는 말은 어짐이란 동이족의 가치 내지 품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 즉 중용이 동이족의 사회정치적 실천이자 이념이라는 말입니다.

 

이리 말하면 대뜸 우파 민족주의를 떠올리시며 실소를 머금으실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저 또한 막무가내 민족을 주려 끼고 열 올리며 현실 부조리를 외면하는 우파, 아니 수구 민족주의 할 생각 조금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저는 인, 즉 중용이 오늘 이 땅에서 사회정치적 실천이자 이념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가 동이족임을 자랑하는 일이 얼마나 가소롭고 기막힌 자기기만인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입만 열면 공맹을 말하고 도리를 논하는 이 땅의 이른바 ‘주류’는 지금 일본과 미국에 자기 영혼의 정체성identity을 두고 끊임없이 매판의 세상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어찌 인을 안다고 할 것입니까? 이들이 어찌 중용을 실천한다고 할 것입니까? 이들이 어찌 동이족임을 자랑할 자격이 있다고 할 것입니까? 정녕 동이의 후예라면 평등한 상호소통을 회복하여 중용의 중용됨을 널리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정녕 동이의 후예라면 매판독재분단고착의 사슬을 끊고 자주와 민주, 그리고 통일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할 것입니다. 정녕 동이의 후예라면 지금 당장 세월호사건 진실 규명부터 분명하게 하여 참된 생명연대가 무엇인지 온 인류 앞에 실천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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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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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나의 문명을 떠받치는 뼈대는 세 개가 있다고 말합니다. 식량공급체계, 상하수도체계가 그 둘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바로 보건의료체계입니다. 그렇다면 수천 년을 이어온 우리 문명은 이런 요건, 특히 보건의료 부분의 요건을 만족시켜 왔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그럼에도 제국주의 역사를 통해 이식된 서구식 보건의료체계의 핵심 주체 대다수와 일부 국민들은 한의학을 의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의학을 부정하는 그 분들은 ‘양’의사를 의사라고 부릅니다. 그 명칭은 서양의학이 보편의학이라는 자부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보편의학은 없습니다. 서양의학은 ‘어떤’ 의학일 따름입니다. 양약은 ‘어떤’ 약일 따름입니다. 그 분들의 확신은 서구 문명의 홀로 주체적 독선에 귀의한 데서 비롯하였습니다. 다른 문화권의 역사를 인류학이라 이름 한 것과 맥락이 같습니다. 그런 인지 도식에서 나온 이름이 보완, 대체의학입니다. 생각하면 참으로 오만한 표현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그들이 주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인류학의 대상인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문명을 부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논리대로 따지자면 서양의학이 한의학의 보완, 대체의학인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전도된 식민지적 의식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양의학과 한의학은 상-하, 주류-비주류, 심지어 참-거짓 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국민보건의료체계 자체는 물론 시장 점유, 의료인 처우, 소비자 의식 등 모든 면에서 그렇습니다. 이 자학 현상은 우울증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울증 치료 하면 신경정신과 양의사와 프로작을 떠올립니다. 한의사와 사역산四逆散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거의,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우울증 환우들이 실제로 신경정신과에 가서 어떻게 심리상담 치료를 받는지, 항우울제가 어떤 진단 과정을 거쳐 처방되는지, 그 약이 효과가 없으면 어떤 의학 논리로 전방되는지, 얼마나 많은 환우들이 병의원과 상담소를 떠돌며 헤매는지 안다면 상황은 어떤 식으로든 달라질 것이 분명합니다.(255-256쪽)


독립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해주지만 실질적으로는 식민지 상태를 유지 온존시키는 제이차세계대전 이후 제국의 식민지주의 전략을 신식민지주의neocolonialism라 합니다. 이런 전략이 노리는 것은 자기착취의 위장된 본질입니다. 자기착취는 다시 자발성의 위장된 본질을 지닙니다. 신식민지주의 중첩적 질곡 아래 허우적대고 있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신식민지주의가 만들어낸 세계체계의 부조리 현상에 질병과 의학이 예외일 리 없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이 바로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은 자발적으로 자기 생명과 존엄을 부정하는 마음의 질병입니다. 물론 이 자기부정의 배후에는 결백한 어머니, 정의로운 민주공화국이 앉아 있습니다. 저들은 본디오 빌라도처럼 맑은 물에 두 손을 씻었습니다.


이 잔혹한 풍경에 제국의 은총이 구원으로 등장합니다. 은총의 옥함 속에는 프로작과 토건 치료(정신분석, 인지행동치료 등), 그리고 폐쇄병동이 들어 있습니다. 자비가 더 너른 오지랖을 펼치면 그 마름들이 들고 나타나는 ‘인문치료’나 ‘즉문즉설’에도 대박의 기회가 열립니다. 가해자가 가호의 옷을 입고서 피해자의 마지막 피톨까지 착취해가는 형국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우울증을 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일이 그러므로 치료의 큰 시작입니다. 자발적 자기착취 체제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 없이 치료에 임하는 것은 신식민지주의 부역 행위입니다. 범죄 지식을 의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범죄 행동을 의료라 할 수 없습니다. 이 허위와 탐욕을 놓지 않아서 ‘선생님’ 대우를 받는 자들에게 화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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