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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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너’에게 먹임으로써 ‘나’ 자신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다. 사랑은 우리를 다른 존재가 되게 한다. 그것이 봉헌의 기적이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아름다운 둘이 되기 위해서다.(593쪽)

 

칼릴 지브란을 듣습니다.(연 구분-인용자)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시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결혼식에 가면 주례가 흔히, 아니 거의 빼놓지 않고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로 사랑을 강조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며느리 아니고 딸이라며 시아버지더러 안아주라 하고, 사위 아니라 아들이라며 장모더러 안아주라 합니다. 이런 언행들이 모두 호들갑 떠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주례를 설 때, 반대로 서로 남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 호들갑은 도리어 현실 인식을 모호하게 하고 왜곡시켜 진실을 흐트러뜨릴 따름입니다. 부부는 정녕 일심동체일까요? 그래야 할까요? 이미 칼릴 지브란이 답을 주었습니다.

 

저명인사 부부가 TV 대담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들은 한 평생 부부싸움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사회자와 방청객이 함께 감탄의 소리를 내지르는 광경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실은 감탄이 아니라 탄식해야 할 것입니다. 한 평생 부부싸움이 성립하지 않을 조건은 딱 두 가지입니다. 서로 싸울만한 거리 밖에 있었거나, 어느 한 쪽이 늘 죽어지냈거나. 후자의 경우, 가부장적 우리사회에서라면 당연히 여성 배우자 쪽일 것입니다. 둘 다 부부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감탄과 존경을 보내는 일이 어찌 난센스가 아니겠습니까.

 

자아를 버리지 않는, 그러니까 봉헌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봉헌의 쌍방향성 여부입니다. 쌍방향성이 확보되어야 ‘타자성의 긍정과 자기 상실의 긍정이라는 이중긍정’(593쪽)이 가능합니다. 나를 버려 너를 살리는 행위가 마주 이루어짐으로써 자타와 생사의 모순이 공존의 역설로 달여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일방적 희생의 자기해체도, 일방적 수탈의 자기구축도 세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주는 사랑이 희생이 아니고 받는 사랑이 수탈이 아닐 때 비로소 이중긍정의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사회는 이중부정의 힘에 맹렬하게 이끌리고 있습니다. 헤게모니블록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타자성의 부정, 자기상실의 부정 말입니다. 극소수 헤게모니블록은 파렴치한 자기구축을 위해 절대다수의 타자성을 잔혹하게 부정합니다. 그 파렴치와 잔혹은 4월 16일 이후 전방위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드러날수록 파렴치와 잔혹이 더해간다는 사실입니다. 대체 누가 이 상황을 만들었을까요. 대체 어찌 해야 아름다운 둘이 될까요. 분노가 쌓이는 이상으로 두려움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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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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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곳을 향해 걸어가라·······. 단 유의할 것이 있다. 느리게 걸어야만 그리움은 살아남는다.(568쪽)

 

 

느린, 늘인 걸음으로”(569쪽-황동규의 재인용) 떠돌며 살아온 삶이라면 저 또한 누구 못지않습니다. 사십대 중반까지 이 골짝 저 들녘을 배회하다가 친구들보다 이십오 년 늦게 대학에 들어가서 오십대 초반 한의사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친구들로 치면 이제 삼십대 중반 직장인 정도인 셈입니다. 이미 현직에서 물러난 친구들이 많은 현실이고 보면 다른 것은 몰라도 남은 시간만큼은 제 느린, 늘인 삶이 더 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 동안 친구들과 만나는 일도 느린, 늘인 시간 속에 두어왔습니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그들과 이따금씩 어울리는데 소통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미상불 제 느린, 늘인 삶이 가져다 준 사유의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그 차이 가운데 아마 그리움에 대한 태도가 가장 크지 않나 싶습니다. 베이비부머 선두 세대로서 속도에 휘말려 살 수밖에 없었던 친구들은 대부분 오늘에만 집중함으로써 삶의 두려움을 내쫓기에 바빴으므로 그리움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개별적으로 만나든 여럿이 왁자하게 만나든 가만히 오가는 이야기들을 챙겨보면 오늘을 자랑하거나 변명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어제도 내일도 그저 그것을 위해 동원되고 소비될 뿐입니다. 추억도 없고 전망도 없습니다. 이른바 대박난 자도 이른바 쪽박난 자도 부유하는 오늘의 이야깃거리를 서로 붙들고 되씹을 뿐입니다. 드물게 누군가 제법 육중한 화제를 꺼내들지만 이내 농지거리와 술잔 부딪는 소리에 묻히고 맙니다. 뒤끝 없는 만남입니다.

 

그들이 오늘에 매달리는 것은 두려움, 그러니까 결핍 때문입니다. 결핍 문제에 대하여 자랑하거나 변명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반응reaction입니다. 병리 상태에서 성찰은 불가능합니다. 성찰은 결핍에 대한 건강한 감응response이기에 말입니다. 결핍을 무턱대고 채워 넣으려 하지 않고 세계의 진실로 받아들이면서 자기 삶의 결을 들여다보는 힘은 느린, 늘인 시간 속에 자기를 맡길 때 생깁니다. 어제와 내일의 소통인 한에서 오늘은 위대합니다.

 

친구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어떤 슬픔이 있습니다. 삶에 대한 두려움과 무지를 개인적 욕망으로 엮어 노년의 문턱까지 허덕지덕 달려오는 동안 그들의 생각은 오직 제 가족에 묶이고, 그들의 말은 다만 지배 문법에 갇혀버렸습니다. 그들의 눈은 사회의 어둠을 돌아볼 수 없고, 그들의 입은 더 이상 진실을 추구하지 못합니다. 그들과 함께 한 시대가 깊은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 이 도저한 결핍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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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란 수동적인 정념이 아니라 능동적인 기술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구체적인 대상이 있어서 그 대상과 결합하면 소진되는 감정이 아니라 ‘보편적’인 어떤 것이어서 늘 충족의 유예 상태 속에서 존재를 추동하는 욕망의 기술이고, 그 덕분에 지금 여기 ‘나’의 결핍을 ‘객관적’으로 반성할 수 있게 하는 인식의 기술이니까 말이다.(568쪽)

 

 

 

 

그리움은 끼쳐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움은 번져가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애틋함에 젖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움은 애틋함이 배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움은 추억의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는 낙엽이 아닙니다.

그리움은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입니다.

 

그리움은 어제의 불씨를 빌어 오늘의 애태움을 피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움은 오늘이 어제를 찾아가 내일을 함께 여는 일입니다.

 

그리움으로 여는 내일은 더해서 채우는 부요의 나날이 아닙니다.

그리움으로 여는 내일은 밝혀서 바르게 하는 진실의 나날입니다.

 

그리움 없이는 오늘 광화문 위에 하늘도 없습니다.

그리움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단 하나의 극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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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한 것은 아니다

역사가 구성한 존재다

인간이니까, 는 없다

인간이려면, 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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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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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외면하지 않지만 그 상처를 더 깊이 파고들어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564쪽)

 

상처를 외면하고 쓰는 시는 시가 아닙니다. 그 시 아닌 시를 읽고 치유로 나아간다 말하는 경우 또한 치유가 아닙니다. 상처를 더 깊이 파고들어 쓰는 시는 어떠할까요? 더 깊은 시로서 더 깊은 치유의 지도地圖가 될까요?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물론.

 

상처를 더 깊이 파고든다는 것은 대체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요? 더 아파하고 더 절망한다는 것일까요? 그러면 여태까지 덜 아프고 덜 절망하고 있었다는 것인가요? 그런 정도 차이가 존재할까요? 그런 사실을 타인이 알 수 있기는 할까요? 아닙니다, 물론.

 

말을 조금 바꾸어보겠습니다. 그 상처보다 더 깊은 상처로 파고든다고 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여태까지 별 것 아닌 상처 때문에 엄살을 부리고 있었다는 것인가요? 그런 정도 차이가 존재할까요? 그런 사실을 타인이 알 수 있기는 할까요? 아닙니다, 물론.

 

 

상처의 진실은 객관적 사실로 묶을 수 없습니다. 아이 둘 잃은 상처는 하나 잃은 상처의 두 배입니까. 둘 잃은 부모에게는 아이가 더 있고 하나 잃은 부모에게는 그 아이가 외동아이였다면 어떤가요. 상처의 더 깊은 곳, 더 깊은 상처란 없는 것이 아닐까요.

 

시가 되어 나올 상처라면 상처의 깊고 얕음은 따질 일 아닙니다. 그 상처 그 자체가 있는 그대로 옴팡진 진실입니다. 설혹 더 깊은 상처가 더 깊은 깨달음 주어 위대한 삶으로 인도한다손 치더라도, 과연 누구에게 그 길을 권할 안목과 자격이 있을까요.

 

인간의 인간다움은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깊은 곳은 당최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붓다와 예수의 삶은 깊은 것이 아니라 넓은 것이지 싶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삶도 팔 벌려 유민이네를 껴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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