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관악산이다. 여느 날보다 조금 일찍 출발해 서울대 교정 깊숙이 들어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종점에서 내려 서울대 저수지가 있는 골짜기로 걸어 들어갔다. 조금 들어가다 개울가에 버드나무 가지를 심었다. 큰절 올렸다.



서울대학교 정문은 서울대학교 교표 조형물이다. 왼쪽부터 읽으면 국립서울대학교고 오른쪽부터 읽으면 경성제국대학이다.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 경성제국대학 출신 특권층 부역 집단이 지닌 자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국립 서울대학교는 경성제국대학 연장선에 있다. 아니. 이름만 바꾼 제국대학, 그러니까 특권층 부역 집단을 재생산하는 식민 통치 미래 본진이다. 일요일이라 인적이 거의 없는 교정을 걸으며 나는 무겁게 슬프게 빌었다: 서울대학교를 정화해주소서. 내가 개울가에 버드나무 가지를 심고 큰절 올린 제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골짜기로 올라가면서 이상하리만치 나는 여러 번 길을 잃었다. 마지막에는 무엇에 홀린 듯 스마트폰 지도로 방향을 확인하는 일조차 까맣게 잊은 채 개울을 넘나들며 마침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되돌아올 수 없는 곳에 다다르고 말았다. 그제야 스마트폰 지도로 확인하고 남들에게는 길 아닌 길을 걸어 연주대 코밑 능선에 도착했다. 능선길에서 나는 특별한 인연과 마주했다. 길가, 아니 길 위에서 삶을 시작한 버섯이 행인 발에 차여 부서진 채 흩어져 있었다. 대부분 으스러졌는데 가장 작은 몇 개체가 뿌리는 뽑혔지만 제법 성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그들을 수습해 속이 비어가는 고목에 심어주었다. 버섯을 심기는 처음이었다.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그들 목소리에 끌려 길을 잃지 않았나 싶었다. 길을 잃지 않았다면 갈 생각이 전혀 없었던 러시아워처럼 붐비는 능선길에서 여차하면 짓밟혀 흔적으로만 남았을 그들을 만났으니 말이다.



나는 부드럽게 떨리는 가슴을 도닥이며 내려가는 길, 그러니까 관악산 속 지리산 골짜기로 향했다. 처음부터 헷갈리더니 마침내 또 완전히 길을 잃고 말았다. 이때도 스마트폰 지도 보는 일을 잊고 한참을 나아갔다. 더 나아가면 본디 가려던 길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판단이 서는 순간 나는 길에서 이탈해 관악·지리산 골짜기를 향해 직선으로 내 길을 내기 시작했다. 찔리고 긁히고 미끄러지고 빠지고 가던 길을 되돌아오기를 되풀이하며 가던 어느 순간 시야에 본디 가려던 길 풍경이 쑥 하고 들어왔다. 다행히 이번에도 낭떠러지가 길을 막지는 않았다. 개울가로 내려가 옷매무새를 고치고 얼굴과 손을 씻은 다음 서울대 저수지 가까이 서 있는 커다란 버드나무에서 모셔 온가지를 안전한 곳에 심었다. 큰절 올렸다.



관악산은 백악산 객산으로 외세, 그러니까 제국을 뜻한다. 버드나무 심고 큰절 올린 내 제의에는 제국과 특권층 부역 집단이 자기 풍요를 위해 더는 식민지를 착취·살해하지 말고 지구 생태계 전체가 공생 네트워킹 되게 하는 일로 나아가기를 비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제의를 숲에서 행하는 뜻은 이렇다: 제국주의 살해는 결국 옴니사이드에 이를 텐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에코사이드가 임계점을 넘지 말아야 하고 에코사이드가 임계점을 넘지 않으려면 숲이 반제국주의 전선에 으뜸 주체로 참여해야 한다.

 

관악사 운동장 가까이 이르자 포크 로더 기계음이 거세다. 크고 작은 테라포밍에 영일 없는 이 식민지 땅, 이젠 정말 징글징글하다. 제국주의 공부와 부역 서사 쓰기에 깊이 잠길수록 우울과 침묵이 육중해진다. 익사하지 않으려면 나무가, 풀이 내게 전하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부디 이 초록 만신 귀 좀 열어주시기를 빈다.

 

서울대학교 교정을 떠나면서 생각에 잠긴다. 서울대학교를 관악산으로 옮긴 이유가 뭘까? 당시 들려왔던 유언비어는 서울대 학생들이 반독재 시위를 자주 하니까 관악산 드센 기운으로 학생들 저항기를 꺾으려고 박정희가 시켰다, 뭐 이런 얘기였다. 이 유언비어가 다만 유언비어는 아닐 테다. 나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간 주술을 상상한다. 제국 첨병, 식민지 특권층 부역자를 낳고 키워내기 위해서 객산 자궁과 품에 앉혀 놓았다, 이렇게 말이다. 웃자고 하는 말 아니다. 실제로 오늘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엄연한 사건 아닌가. 소름 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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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2 1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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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3 0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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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0. 미술 애착과는 달리 내 음악 애착은 학교와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부모가 유년기 내게 미친 이상한 영향에서 시작된 듯하다.

 

열 살 이전 이미 엄마와 나는 영 생이별했지만, 길지 않은 시간 함께 살면서 내게 남긴 선명한 기억 가운데 약간 비음 섞인 미성으로 기막히게 잘 불렀던 박재란 노래 <>(1959)과 이미자 노래 <황포돗대>(1964)가 있다. 이혼 상태인데도 할머니 당부로 집에서 나와 함께 살았던 엄마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내려오곤 했던 아버지한테 새 유행가배우는 일에 이상하리만큼 진심이었다. 그런 엄마 심사를 아직도 잘 이해하기 어렵지만 엄마 노래 솜씨 하나는 그만이었다고 기억하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다.

 

아버지는 엄마보다 딴따라유전자가 더 많은 사람이었다. 하모니카를 포함해 악기 몇을 능숙히 다루었고 노래 또한 절창이었다. 작고 직전까지 남인수급 고음 미성이 쇠하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젊은 날 인기가요 대부분을 완벽하게 불렀으며, 마지막 무렵에는 은방울 자매와 문주란을 심하게 아꼈다. 아버지와 산 10년간 나는 그 노래들을 허구한 날 들었다. 그렇게 기억에 저장된 노래들을 앉은자리에서 끊지 않고 200곡 정도 부를 수 있었다. 특히 문주란 노래는 지금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부른다.


대학에 와서 내 애착에는 서양음악이 보태진다. 기숙사 룸메이트가 지닌 작은 라디오에서 어느 날 들은 경음악한 곡이 내게 다른 귀 하나를 더 선물했다. 그때부터 나는 분홍빛 음악 노트에 음악 이름, 작곡가, 악단, 주선율, 느낌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영화음악을 포함한 당대 경음악을 주름잡았던 폴 모리아, 헨리 맨시니, 퍼시 페이스, 제임스 라스트, 엔니오 모리코네, 빌리 본, 그 누구보다 만토바니가 노트를 빼곡하게 채웠다. 경음악에서 클래식 소곡으로, 관현악으로, 실내악으로 내 음악 애착은 진화해 갔다.

 

클래식에 심취해 한껏 귀가 열렸을 때는 오케스트레이션만으로 베토벤과 다른 음악을 구분할 수 있었으며, 베토벤은 단 한음을 듣고서도 곡명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바흐 <무반주 첼로 파르티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일 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이 절정에서 <함동정월류 가야금산조>가 벼락같이 나타나는 바람에 내 애착은 단박에 전복됐다. 이수자 김해숙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고 직접 그 연주를 들었다. 녹음테이프를 구해서 늘어져 들을 수 없을 때까지 들었다. 다른 음악은 더는 음악이 아니었다.

 

이 전복은 느닷없이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 사건 전후해 신학 공부를 거두고 한의학으로 돌아섰다. 그 변화를 추동한 각성이 음악 애착 변화에까지 미쳤다고도 할 수 있고 반대라고도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뽕짝에서 시작해 클래식을 거쳐 국악으로 돌아온 내 개인 여정은 우리 근현대사 축소판이다. 일본 제국 음악, 서구 제국 음악에 성찰 없이 빠져든 내 음악 편력은 여지없는 부역이다. 무지렁이 내가 이 정도면 특권층 부역자는 말할 나위조차 없다. 저들은 여전히 거기서 환호하고 있지 않은가.

 

임영웅이란 아이콘으로 대변되는 대한민국 뽕짝아니 트로트 열풍에 묵직한 긍정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마저 그 대열에 합류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내 생각은 그러나 다르다. 나는 이 떠들썩한 문화 현상을 조선일보 정치 프로젝트 소산으로 해석한다. 내 눈에는 통시적으로도 공시적으로도 정확하고 치밀한 좌표 운동이 보인다. 황국신민으로 태어나 이승만과 박정희를 추앙하며 살아온 어르신들이 미야코부시(都節) 선율을 들으며 어떤 정서에 젖어 들겠는가.

 

내 음악 감수성은 매우 복잡하나 슬플 때 뽕짝에 빠져든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반제국주의로 벼려진 지성이 단박에 무너진다.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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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음악에 비해 미술은 평범한 소시민 삶에서 조금 더 멀리 있다. 노래방은 있지만 그림방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좀 특별한 사연으로 미술과 가까이 있었다.

 

중학교 때 선명한 기억 하나가 있다. 워낙 가난해 미술 시간 준비물을 제대로 가져가지 못해 곤욕을 치르곤 했다. 어느 날 이름 모를 질 나쁜 큰 종이 몇 장을 사 내 손으로 꿰매서 종이철을 만들었다. 스케치북이랍시고 들고 갔더니 미술 선생님은 그 수제(!) 스케치북을 이리저리 보더니 여기에다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서 툭 집어던졌다. 가볍게 머리통을 쥐어박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구시렁거리며 지나갔다. 그는 우리를 교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 눈앞에 펼쳐진 도시 변두리 풍경을 수채로 담아내도록 지시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끝날 무렵 돌아와 그림 하나하나를 살폈다. 내내 아무 말도 없이 쓱쓱 지나치던 그가 내 그림 앞에 딱 멈춰 섰다. “어라? 이놈 봐라. 그림을 아네?” 이번에는 좀 다른 몸짓으로 내 머리통을 툭 치며 지나갔다.

 

고등학교에 진학했어도 미술 시간 풍경은 변함이 없었다. 아무런 의식 없이 우리는 서양식 그림 그리기를 반복해서 배웠다. 이론 수업 또한 그랬다. 딱 한 번인가 사군자를 배웠는데 그중 난을 칠 때 가장 먼저 하는 붓질을 기수제일필이라 한다는 미술 선생님 음성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가난은 나를 괴롭혔다. 물감을 아끼려고 연필 스케치 자국을 굵게 그대로 둔 위에 살짝, 거의 반투명에 가깝게 색칠한 그림을 본 미술 선생님이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과 똑같은 말을 했다. “어라? 이놈 봐라. 그림을 아네?” 학기 말 우연히 길에서 미술 선생님을 만났는데 인사를 받더니 우정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미술 선생질 20년에 실기 점수 100점 준 건 네가 처음이다.” 별명이 미친×였던 그가 유일하게 남긴 자상한 말이었다.

 

미술 선생님 두 분이 건넨 말은 무슨 주문이기라도 한 듯 오랫동안 내 삶을 그림 애착으로 이끌었다. 돌이켜보면 그 애착 고갱이에는 근원적 무지가 똬리 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림 이론, 사조에 관한 알량한 지식을 빼면 거의 들이대기식으로 그림 앞에 서곤 했다. 전시회를 무수히 드나들었고 도록과 비평을 수집하다시피 쟁여놓았다. 청전 이상범 전시회를 보고 감상문을 써서 상을 받은 적도 있다. 김병종 전시회는 거의 빠짐없이 갔고, 화가에게 어설픈 비평을 편지로 보내 답글을 받기도 했다. 토마 쿠튀르에 매료돼 한동안 심취하기도 했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본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다. 박수근, 장욱진, 조르주 루오, 클로드 모네, 에곤 쉴레, 몽세라 구디올···내 마음속 거장들이다. 물론 아직도 그림과 그림판은 잘 모른다.

 

대박 난 유명인은 아니지만 분단 서사로 한국화 그리는 칡뫼 김구가 내 오랜 벗이다. 그에게서 한국 화단 이야기를 듣고서야 더 심각하게 부역 풍경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알수록 참담했다. 대체 예술이란 인간에게 무엇일까.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한국미술 부역 서사 바깥에서 홀로 어정거리며 그림 보던 나는 과연 무엇일까. 서구 미술에 서린 제국 이데올로기, 식민지 미술에 깔린 부역 bullshit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65세 이상 노인 침 치료비로 천 원권 지폐 두 장 받고 백 원권 동전 하나 거슬러주는 한의사 나는 제 얼굴로 퇴계 이황을, 고증 잘못된 충무공 이순신을 그린 두 특권층 부역자 화가와 어떤 경계도 맞대지 않고 있을까. 내가 스스로 부역자임을 인정하는 고백 오지랖은 어디까지일까. 심사가 사뭇 엉클어진다.

 

하필 미술 이야기만은 아니다. 내 삶 모든 영역은 지울 수 없는 부역 증거들로 얼룩져 있다. 특권층이 아니어서 돈도 명예도 없으니 천행이라 여기며 증언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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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랜만에 가족이 함께 서울을 벗어났다. 그래봐야 파주 근처였지만 제법 즐거운 나들이였다. 가족과 헤어져 나는 북한산으로 향했다. 국민대학교 교정 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진입로로 들어가서 형제봉을 돈 다음 북한산 둘레길 명상 구간 일부를 걷다가 갑자기 나는 길 아닌 산비탈로 들어섰다. 스마트폰 지도를 보면서 청학사를 향해 직선으로 나아가기 위해서였다. 여러 번 이런 행동을 해와서인지 두려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청학사에서 발해진 사람 목소리가 들리기까지 미끄러지고 가시에 찔리고 직진 불가능한 지형 탓에 이탈했던 경로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나는 차분히 최단 거리를 찾아냈다. 마침내 아주 작은 도랑물 건너편에 청학사 가는 길이 눈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근처에는 인적이 없었다. 바위 위에 앉아 땀을 닦고 옷매무새를 고치면서 내가 오늘 여기 온 까닭을 다시 확인했다.

 

북한산과 백악산 경계, 동쪽 정릉동과 서쪽 평창동 사이에는 본디 고갯길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지금처럼 북한산 둘레길 제5구간 명상길 일부와 겹치는 길이 아니라, 청학사와 현재 평창동 형제봉 통제소를 잇는 최단구간 고갯길을 상상해 보았다. 바로 그 상상 지점 어름에서 나는 오늘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제의를 실행할 생각이었다.

 

첫째, 북한산에서 콩과식물인 싸리나무 묘목을 채취해 백악산에 심는다. 이는 북한산 큰 생명 기운을 백악산에 보태어 너른 공생을 꾀하려 함이다. 콩과식물은 척박한 땅에 먼저 들어가 질소 고정으로 공생 조건을 만들어 선물한 다음 마침내 표표히 사라지는 Pioneer, Networker, Releaser. 길가이긴 하지만 볕이 잘 들고 웬만한 물기운엔 견뎌낼 만한,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이 가까이 있는 곳에 조그만 싸리나무를 심는다. 누구도 해코지할 수 없게 주위를 시침 뚝 딴 풍경으로 되돌린다. 물론

 

그대로 했다. 큰절 올렸다.



둘째, 북한산을 나오자마자 백악산 들머리에 있는 개울가 바위 뒤에 버드나무 굵은 가지 토막을 심는다. 무슨 전설처럼 거기서 싹이 나 큰 나무로 자라기를 바라서가 아니다. 버드나무는 콩과식물과 마찬가지로 Pioneer, Networker, Releaser. 다만 콩과식물과는 달리 땅을 정화함으로써 공생 조건을 만든다. 이런 본성이 백악산 기운에 고루 가 닿기를 비는 간절한 마음을 담는다. 비교적 깊게 땅을 파고 묻은 뒤 다음에 와서 알아볼 수 있도록 표지목을 나만 알아차리는 모습으로 세워 놓는다. 물론

 

그대로 했다큰절 올렸다.



 

현대 과학적 논리로 따지면 내 제의에 담은 소망은 이루어질 리 없다. 나는 인과관계 너머 창발로 일어나는 네트워킹 실재를 신뢰하므로 이 일을 한다. 내 신뢰는 경험적 근거를 지닌다. 그런 경험으로 점철된 삶을 70년 가까이 이어왔다. 산 날보다 죽을 날이 훨씬 더 가까운 오늘 나는 내 생을 제국주의가 인류학으로 설명하는 짓을 관대히 허락한다.

 

이 관대함은 공명정대함을 포함한다. 나를 인류학으로 설명하려면 제국 시민도 인류학으로 설명해야 한다. 제국 시민에게도 인류학적 삶이 엄존한다. 이때 인류학은 제국주의 본성인 이원주의, 과학주의, 이성주의, 서구(특히 앵글로아메리카)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남성·가부장주의, 백인주의, 이성애주의, 비장애인주의 따위 온갖 비진리를 거절하는 반제국주의 담론을 뜻한다. 반제국주의 담론으로 제국 시민을 설명하면 혁명을 달리 상상할 필요가 없다. 나는 오늘 반제국주의 담론 주체이자 현장으로 백악산과 북한산 경계를 초대한다. 내가 백악산에 정화 기운으로 가 닿으려 한 뜻은 청와대 주인 행세하는 특권층 부역 세력을 백악산과 협력해 정화함에 있다. 내가 북한산 너른 공생 기운을 백악산에 이어주려 한 뜻은 객산, 그러니까 제국 격인 관악 기운이 백악을 제압하지 못하게 함에 있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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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0. 학문 부역 서사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김민수 교수 해직과 복직에 얽힌 이야기를 접했다. 그가 해직된 명분은 논문 표절이었으나, 실제로는 친일파 예술인을 비판한 글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여기서부터 예술계 부역 서사를 쓰기 시작해야겠다 싶었다. 모든 예술이 각기 논리와 철학을 지니고 학문과 인과관계를 주고받으므로 학문 부역 서사 다음에 자리하는 일은 자연스럽기도 하다. 일단 시작을 김민수 교수로 했으니 그 이야기부터 한다.

 

1. 이동권 님이 (https://dklee.tistory.com)에 인터뷰해서 쓴 글(2022.8.26.)을 그대로 가져왔다.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서울미대 김민수 교수가 거쳐 온 험난한 여정을 보면 우리 사회에서 친일 과거사가 청산되지 않은 여파가 어디까지 미치고 있는지 잘 말해준다. 김 교수는 지난 1996'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공예교육 50년사'라는 제하의 논문에서 서울미대 초장기 원로 교수 장발, 노수현, 장우성을 친일 미술가로 인용 언급했다.

 

이 때문에 김 교수는 학장실에 불려 가 4시간 동안 이 부분을 '삭제하라'는 협박과 회유를 당했으며, 심지어 '국가관이 의심스럽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김민수 교수 재임용 탈락의 단초가 된 '연구실적심사보고서'도 또한 이 문제와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그는 1998831일 서울대 교수 재임용심사에서 재임용 심사요건을 충족시키고도 탈락하고 말았다.

 

"친일 청산을 얘기하면 '지난 일을 따져서 무엇하느냐', '인제 와서 불신과 불화를 조장하는 저의가 무엇이냐'고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국가와 민족은 근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사에 대해 논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친일 과거사 청산은 민족주의적 이념의 차원이 아니라 현실의 온갖 부조리의 뿌리로서 '질병의 원인치료차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김민수 교수는 해방공간에서 반민특위가 오히려 친일 세력에 의해 처단되었던 역설의 역사가 사회 부조리의 서곡이었다고 본다. 미술계 역시 해방 직후 친일 미술가들이 단죄되지 못하고 되레 화단과 교육계를 장악했다는 것이다.

 

"과거사 청산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회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청산하지 못한 친일 잔재가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역사문제는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미래를 담보한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한국 미술계와 시각문화 내의 친일미술과 일제 잔재가 청산돼야 합니다."

 

김민수 교수는 서울대에서 해직된 뒤 복직 투쟁이라는 외로운 길을 걸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도 그는 학자적 자존심과 신념을 한 번도 꺾지 않았다. 마침내 김 교수는 20051'연구실적물에 대한 심사와 관련하여 심사 대상의 선정 방법에 잘못이 있다고 보이고, 심사 결과의 평가에 있어서도 심사기준을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임용을 거부한 것은 재량권의 범위를 일탈하거나 남용한 것으로 위법하다'는 법원의 최종 판결로 2005년 서울미대 교수로 원직 복직됐다.

 

"프랑스는 파리 해방 후 당시 전국미술가연맹 회장이었던 파블로 피카소가 반역자 숙청재판에 회부해야 할 미술인 명단을 파리 경시청과 검찰에 전달했습니다. 이때 블랙리스트에는 오통 프리즈, 폴 벨몽도, 폴 랑도프스키 등의 유명 미술인들이 포함돼 있었지요. 숙청위원회가 주목한 화가 중에는 점령 기간 중 독일 여행을 하면서 나치 협력을 한 것으로 보이는 화가와 화상들도 다수 포함되었을 만큼 단호하게 진행됐습니다. 이 결과 19466월 미술가 23명을 친나치 부역 미술가로 낙인찍음으로써 숙청이 마무리됐습니다. 그 당시 드골 대통령이 '예술가가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악()에 대해서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날 세계는 '프랑스에는 예술을 위대하게 여기는 사회문화적 풍토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반면 한국은 예술을 위대하게 여기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짐승은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고 하지만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한국문화에서는 거장이 죽으면 작품도 함께 잊힙니다."

 

친일미술과 일제 잔재에 대한 청산은 극소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맥을 이어오고 있다. 주류 사회의 진출과 출세를 위해서는 묵인하고 순종하는 것이 미덕이었으며, 판도라의 상자 뚜껑을 여는 것은 김 교수가 처했던 지난 고통의 세월처럼 미술계의 '왕따'로 전락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983'계간 미술봄호에 자신의 이름을 차마 밝히지 못한 9명의 필자가 공동 이름으로 '한국미술의 일제 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이라는 비평문을 내놓은 적이 있다. 그러나 친일 미술인이었던 월전 장우성과 운보 김기창 화백 등은 일간지 광고 지면에 '불신과 불화를 조장하는 저의를 묻는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계간 미술발행인이었던 중앙일보에 대해서는 사장의 공개 사과를 요구하고 나서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언론이나 잡지에 필자 9명의 글은 청탁하지도 말라고 실력행사를 하기도 했다. 그 당시 9인은 김윤수, 문명대, 박용숙, 안휘준, 이경성, 이구열, 임종국, 정양모, 최순우였다.

 

"그 당시는 친일 미술인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만큼 무섭고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아쉽게도 그동안 미술계에서는 친일 미술의 용어와 개념조차 합의된 적이 없을 만큼 그 엄혹한 시대의 논리가 진행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명백한 사료를 눈앞에 두고도 친일 미술가를 규정하는데 늘 논란이 됐고 친일 미술을 '일제 잔재' 혹은 '식민잔재'라는 말과 뒤섞어 사용하며, 어떤 이들은 특정 양식과 주제만의 문제인 양 '감각과 기법 차원에서 논의하자'고 초점을 흐리게 했습니다. 이 결과 청산해야 할 친일 미술의 쓰레기 더미가 거대하게 쌓여만 갔습니다."

 

김민수 교수는 한국 미술계에서 친일 청산이 되지 않은 원인에 두 가지가 있다고 진단했다.

 

"첫째는 청산을 가로막는 친일 미술인들과 그 후예들이 용어의 초점을 계속 흐려놓았다는 점입니다. 다른 문화예술계처럼 미술계 역시 친일 세력이 해방공간에서 지배구조의 기득권을 장악했습니다. 곧이어 친일 미술을 은폐하기 위해 독버섯들이 피기 시작한 것이죠. 둘째는 친일 미술이 '일제 잔재'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유전자가 복제되어 일상 삶과 시각문화를 지배할 만큼 자가 증식했다는 점입니다. 은폐된 친일 미술은 일제 잔재의 형태로 교육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정신과 철학이 부재한 이 복제과정은 형식주의에 사로잡힌 후진양성과 시각문화를 조장했습니다. 그러나 빈껍데기 문화보다도 더 큰 폐해는 일제 잔재의 형태로 남겨진 미술가들의 반사회 기회주의적인 삶의 가치관입니다. 바로 이것이 한국의 주류 미술가들이 '순수미술' 미명으로 현실 문제와 무관한 삶을 살고, 일제에 화필 보국한 이유입니다. 독재 권력에 아부해 미술을 환경치장술로 격하시키고, 심지어 친일했던 마음과 손으로 백범, 안중근, 유관순, 논개 등 수많은 애국지사의 동상과 영정을 도맡아 제작해 민족정기를 능욕했습니다."

 

용어마저도 생경한 미술계에서의 친일미술과 일제 잔재란 무엇일까. 김민수 교수에 따르면 이렇다.

 

친일 미술은 민족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제의 침략주의와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을 집행할 목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미술 단체와 시책 선전을 위한 미술품 제작, 저작, 교화했던 했던 친일 부역 행위의 적극성, 반복성, 자발성에 초점을 맞춘 용어라는 것이다. 즉 일제강점기에 단순히 붓을 들었다고 모두가 친일 미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반복해서부역 행위에 앞장섰던 미술가만을 친일 미술가로 규정한다는 것. 그리고 일제 잔재란 청산되지 않은 친일 미술의 결과물이 한국 미술계에 남겨준 산물로서, 친일 미술인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친일 미술의 싹을 가지고 있는 미술계의 제도적 습성, 미학적 태도, 형식과 기법 등을 총망라한 것이다. 예를 들어 김 교수는 한국은행이 최근 화폐를 교체한다면서 대표적인 친일 미술가 운보 김기창이 그린 세종대왕 초상화나 천 원권의 현초 이유태가 그린 퇴계 이황 그림을 교체하지 않는 것을 예로 들었다.

 

"중국이나 일본은 화폐 속의 역사 인물들을 일본이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기여했던 주요 인물로 모델로 삼았는데, 화폐 속 인물의 묘사가 사진에 기초하기 때문에 사실적 신뢰감을 전달하죠. 예컨대 중국 위안화의 경우, 마오쩌둥과 소수민족의 인물들을 실제 사진 이미지에 기초했기 때문에 사실성을 높였고, 일본의 만 엔권엔 19세기 말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친 계몽가이자 게이오의숙 설립자였던 후쿠자와 유키치, 오천 엔권엔 19세기 말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 천 엔권엔 근대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사진과 같은 그림이 들어있죠. 중국과 일본의 이 화폐들은 화폐가 지니는 국가적 상징성을 담아낸 역사적 인물들을 화폐에 담았고, 그 표현도 신뢰감이 생기게끔 사실성이 뛰어납니다. 반면 우리의 경우, 신뢰감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표적인 친일 화가가 영정을 그려 화폐의 상징성을 훼손시키고, 우습게도 자기 얼굴을 심하게 그려 넣은 천 원권의 퇴계 이황 그림의 코미디도 있죠. 학맥 인맥 중심의 미술계는 자기 이익만을 집단적으로 보호하는 파벌 형성에 주력한 못된 전통을 세습했습니다. 이는 천황제 가족주의 파시즘으로부터 학습한 일제 잔재 때문입니다. 이때 '순수미술'이란 온갖 속세의 죄를 스스로 씻기 위한 '면죄부'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합니다. 미술계에서의 친일 문제는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쳐버렸기에 온갖 합병증이 발생한 상태입니다. 이런 업보로 오늘날 한국 미술계에는 '친일 미술''일제 잔재', 병원으로 치면, 두 개의 수술방에서 동시에 치료해야만 하는 이중의 업보가 남겨져 있습니다. 친일 미술이라는 근본적인 종양을 제거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일제 잔재로 생긴 여러 합병증을 입체적으로 치료해야 합니다."

 

 

2. 위에 글 하나만으로도 미술계 부역 전경을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예술계 부역 전경을 상상할 수 있다. 여기에 최열 미술평론가와 인터뷰해서 쓴 이동권 님 글(2022.8.26.)을 하나 더 인용한다. 다른 시선으로 보완해 입체적 진실을 보기 위해서다.

 

최열 미술평론가는 근대미술사학회의 부회장이자 미술사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한국근대미술의 역사''한국근대미술 비평사' 등의 저자이자 친일인물사전 편찬위원이다. 그는 '교사가 음란물을 배포했다'는 죄목으로 김인규 선생을 체포한 경찰에 날카로운 공개질의서를 보내 미술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날카로운 필체로 근대미술사의 정곡을 훑어오고 있는 최열 평론가를 만나 친일 미술인들의 내적 논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 보았다.

 

"친일 미술인 중에 지금까지 반성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작가 구본웅이 해방 직후에 반성문을 쓰긴 했지만, 당시 공개적으로 쓴 것도 아니고,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발견된 것일 뿐, 진정한 반성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친일 행위에 대해 지적하고 청산을 해야겠다고 하니까 반론하는 미술인도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하지 않았던 작가가 어디 있었냐고 주장합니다."

 

1938년 조선미술전람회 17회 추천작가로 뽑힌 친일 미술인 김기창 화백은 자신의 친일 논란에 대해 "일제강점기에 친일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은 실력이 없었으며, 당시 뽑힌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들인데, 높은 나무가 바람을 많이 받는 것처럼 나는 지금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근대미술사에서 김기창 화백은 절대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명성이 자자한 작가다.)

 

하지만 최열 평론가는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오지호, 이인성 같은 대단한 작가들은 친일하지 않았다"면서 미술인들의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의 부재를 나무랐다.

 

1911년 친일 미술의 대표는 친일 매국노 이완용이 회장으로 있었던 조선서화미술회였다. 이 단체는 조선총독부의 후원 아래 운영됐으며, 서울 서화가들을 모아 결성한 조직이었다. 1915년 결성된 서화연구회에도 친일 매국노 김윤식이 깊이 관여했다. 초창기의 친일 미술인들은 친일파 관료와 총독부 아래 활동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최열 문화평론가는 '한국근대미술의 역사'에서 단체, 기관, 개인의 친일 미술 행위를 판단하는 것은 1차 시기와 2차 시기로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고 진단한 바 있다. 일제강점기 전반기인 1차 시기에는 친일 활동이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복합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일제강점기 말기인 2차 시기에는 단순명료함이 특징이라는 것. 따라서 1차 시기에는 개인의 처지와 상황 그리고 내면에 숨어 있는 은밀성을 해명하는 방식이어야 하며 2차 시기에는 친일 참여 행위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1922년 친일 미술의 결정판이라고 하는 조선미술전람회는 민중사상의 순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사회 교화에 나섰다. 전람회 위원장은 총독부 정무총감이 맡았으며 심사위원단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함께 뒀다. 당시 열린 조선미술전람회 첫 공모전에서 조선서화미술회는 회원들의 작품을 대거 출품토록 해 총독부의 종속과 협력을 과시토록 했다.

 

그러나 1935년 조선인 심사 참여제도는 완전히 폐지되고 추천작가제를 도입했다. 2차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일제 말기에는 '협력'이라는 전술이 없더라도 '지배'가 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최열 평론가가 지적했던 2차 시기의 '단순 명료함'과도 궤를 같이한다.

 

193817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심사 권한 자체가 완전히 없어지고 심사 참여제도를 도입했다. 이때 참여한 작가가 김은호, 이상범이며, 추천작가는 김기창, 김인승, 이인성, 심형구였다. 이들은 해방 이후 한국 미술계를 이끌어가는 저명인사가 된다.

 

"조선미술전람회는 일제 식민 통치기구의 하나로서 제국주의 미술 정책의 실현이자 그 산물입니다. 하지만 일제는 일제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정책의 방향을 심미주의 미학과 지역 향토색을 장려하는 쪽으로 잡았습니다. 정치성을 배제하면서 대동아공영 문화권을 겨냥하는 문화제국주의의 관철을 위한 장으로 설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참가했던 식민지 미술인들은 복잡한 층위가 형성될 여지가 큽니다. 따라서 조선 미전을 무대로 하는 활동을 일괄하여 친일 미술 행위로 해석하는 태도는 그 성격을 단순 재단하는 것입니다. 조선 미전에 응모했다거나, 입상했다는 사실만으로 또는 무감사나 추천, 참여작가로 선정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일제 부역 행위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그런 태도는 근본주의 관점으로 다층화된 세계를 부정하는 극단의 태도입니다. 다만 개인의 활동을 판단, 평가에서 방증 자료라는 점, 그리고 제국의 통치 지배 기구라는 본질을 지닌 기구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은 1927년에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조직한 조선동양화가협회 따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민족을 배반하는 일인 줄 알면서도 일제강점기 시대의 미술인들은 왜 친일했을까? 이에 대해 최열 평론가는 조선 미술인들의 친일 내적 논리는 아주 '간단하다'고 설명했다.

 

"자신들의 출세 지향적인 욕구가 역사의식이나 시대정신과 일치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친일로 빠졌습니다. 대표적인 친일 미술인은 가미가제 비행사였던 총독 아들의 흉상 '아베소위상'을 만든 윤효중입니다."

 

19604.19혁명으로 일제강점기 신궁 자리에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쓰러졌다. 19578월 당시 돈 3억 원을 들여 만든 이 동상은 이승만의 80회 생일을 기념해서 조각가 윤효중이 만든 것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동족상잔의 상처에 시름겹던 국민에게 미술의 위력을 인식시켰던 충무공 이순신 동상도 제작한 바 있으며, 이후 각종 단체와 예술원 등의 실권을 차지하면서 한국 미술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윤효중은 1948년 홍익대학교에 미술과가 생기면서부터 관여하기 시작해 1954년 미술학부장이 됐다. 그 뒤 그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과 대한미술협회 부위원장 등을 맡으면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해 '미술대학은 홍익대학교'라는 전통을 만들어온 장본인이다.

 

최열 평론가는 윤효중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 작가로 "금비녀를 일제에 바치는 작품 '금채봉납도'를 그린 김은호와 친일미술가단체인 '단광회'에서 활동했던 한국 작가 중 김인승을 꼽았다.

 

김인승은 비행기를 헌납하는 작품을 만들었으며 육군미술협회 주최로 일본에서 개최된 제36회 육군기념일 육군미술전람회 유기헌납도를 출품하기도 했다.

 

00. 이동권 님 (https://dklee.tistory.com)에는 ‘<인터넷도록> 친일 미술인과 작품이라는 글도 있다. 관심 있으신 분 일독을 권하며 미술계 부역 서사를 마무리한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미술계 부역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구본웅 김경승 김기창 김만형 김용진 김은호 김인승 김종찬 노수현 박영선 박원수 배운성 손응성 심형구 윤효중 이건영 이국전 이봉상 이상범 임응구 장우성 정종여 지성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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