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시 우리나라에는 피오르가 없는데다가 세계적으로도 가기 어려운 몇몇 제한된 험지에만 있는 특이한 지리적 현상이라서 우리에겐자못 생소하다. 그래서 관광담에 앞서 피오르에 관한 개략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명칭부터 따져보면, 원래 이 말은 ‘내륙으로부터 깊이 들어간 만‘이라는 뜻의 노르웨이어 ‘fiord‘에서 유래했다. 우리나라 일부와 중국을 비롯한 한자문명권에서는 ‘협만(峽灣)으로 의역하기도 한다. - P202
피오르란 특이한 지리적 현상으로서, 형성의 기본 요인은 빙하운동이다. 한랭지대에서 발생하는 빙하 이동으로 대륙의 침식이 일어나서 생긴 U자형의 좁고 긴 협곡에 바닷물이 들어차 피오르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랭한 고위도 지대의 빙하 이동과 해양의 병존이 피오르 형성의 2대 요인이 되며, 이러한 지형적 요인이 전제되지않은 곳에서 피오르를 만나기란 만부당한 일이다. 오늘날 세계에서이러한 요인을 충족해 피오르를 볼 수 있는 곳은 노르웨이 말고는 그린란드, 스코틀랜드, 알래스카 남부, 칠레, 뉴질랜드 사우스섬, 캐나다북극 연안 등 제한된 몇군데뿐이다. - P202
그런데 문제는 그 위인의 기준이며, 그에 관한 각이한 평가다. 이를테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과정을 거쳐 어떤 결과에 이르렀는가 하는 문제에서 인류공동의 번영과 복지, 진보를 위한 개척을 본연으로 하는 탐험인가 아니면 그에반하여 사리 추구나헛된공명욕에 집착한 탐험인가에 따라 평가가판이하게 달라진다. 심지어 작위적 기준이나 편협한 판단에 따라 탐험의 성과가 영영 무시되거나 무위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미지의 세계에서 행해지는 탐험의 공과)와 허실을 가려내는 일은복잡하고 어려운 작업으로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다. - P220
더욱이 넓은 의미에서 탐험의 손익은 탐험사에서 시종 논쟁이 분분한 문제로 남아 있다. 그 동기나 목적, 과정이나 후과에 관계없이탐험의 수익이나 혜택만을 일방적으로 과장, 미화하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미지의 세계니 미개척지니 하는 구실하에 기존 세계나 토착지에 무자비한 탐험의 칼날을 들이댄 결과 발생하는 파괴나 병폐는그 무엇으로도 상쇄하거나 보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므로, 탐험은미화할 것이 아니라 그 대척점에서 도리어 배척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 P220
물론 편협하고 극단적인 ‘탐험배척론‘은 지양해야하지만, 그와 동시에 탐험에 대한 인간의 오만이나 맹목적 추종도 경계해야 한다. 부지기수의 탐험가들이 나서서 오거서의 기록을 남겨놓았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조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다. 거의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는 우주탐험을 놓고 봐도 그러하다. 이제 막 시작된 새로운 탐험의 시대 앞에서 여러 면을 다시 한번 면밀하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 P220
독일의 문호 괴테는 "호기심이 모든 걸음에 날개를달아준다"라고 호기심의 잠재적 추동력을 극구 찬양했다. - P221
많은 연구자들은 이집트 파피루스의 내구성이라든가 부력(浮力)을의심한 나머지 그런 재료로 만든 배는 장거리 대양 항해를 할 수 없을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허무한 기우일 뿐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헤위에르달은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따라서 고대이집트와 중남미 간에는 이 항로를 따라 문명의 이동과 전파, 교류가이루어졌다고 추단해도 별 무리가 안 된다는 것이 라 2호가 남긴 귀중한 교훈이다. - P241
이때부터 그는 해양오염 문제를 인공재해로 크게 걱정하면서이를 유엔에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1972년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유엔인간환경회의(UNCHE)에서 핵심 안건으로 채택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직접 작성한 상황보고서를 미국 상하원을 포함 20여개 나라의 입법기관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가 이와 같이 환경보존을 위해 노력한 결과의 하나가 유엔에서 유조선의 해상방유(油)금지법을 채택한 것이다. 이에 동조해 노르웨이 선박주협회도 ‘토르 헤위에르달 장려상‘을 제정하고 2년에 한번씩 해양오염 방지에 크게 기여한 인물에게 이 상을 수여하고 있다. - P241
1937~2002년 65년간 근 반평생을 주로 원시적 뗏목을 타고 세계3 대양을 누비면서 오로지 문명전파설 탐구에 헌신한 희세의 대탐험가 헤위에르달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없어 이제 고난과 모험의 연속인 탐험항해를 계속하기는 어려웠다. 그가 평생 천착했던 목표, 즉 고대문명들 간의 전파성 규명에는 여러가지 미흡한 점과 허점을 남기기도 했다. 어쩌면 시대의 한계일 수도있는 이런 점에 관해서는 헤위에르달 자신도 인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생의 과제는 그 미흡한 점과 허점을 보완, 시정하는 작업임을자인한 그는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작업에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투자했다. - P244
헤위에르달은 당초 목적지를 이스터섬으로 잡고 진행한 콘티키호의 1차 탐험이 뗏목의 상륙 불가로 실패한 후에도 집요하게 2, 3차 탐험을 추진했다. 그 이유는 태평양상의 어느 지역보다도 이스터섬에서남미와 상관된 유물이 많이 발견되어 자신이 주장하는 남미 인디언의 폴리네시아 이주설(이하 ‘남미이주설‘)의 유물적 전거를 쉽게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탐험 내내 남미와의 상관 유물을 찾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심혈을 기울였다. 급기야 그가 남미이주설의 전거로 찾아낸 상관 유물들은 다음과 같다. - P245
1)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스터섬 원주민들은 이미 원산지 남미에서 유입된 고구마를 재배하고 있었다. - P244
2) 섬 서남단에 자리한 오롱고(Orongo) 유적지에 있는 라노카우(RanoKau) 화산호(수심 약 10m, 섬 유일의 식수원)는 수면의 절반을 남미 볼리비아의 띠띠까까호가 원산지인 또또라(totora, 갈대)가 뒤덮고 있다. - P244
3) 섬 남쪽 해안가에 있는 아후비나푸(Ahu Vinapu) 제단의 아후(ahu,신성한 곳, 즉 제단이란 뜻) 축조법이 페루잉카문명의 성벽 축조법을 닮았다. 구체적으로 종이 한장 끼워넣을 수 없을 정도로 돌들이 빈틈없이 맞물려 있으며, 돌을 직각으로 맞물리고 끝 부분을 살짝 호형(形)으로 처리하는 축조법이 유사하다. - P245
4) 이스터섬과 남미의 일부 고대문명이 반인반조(半人半鳥, 사람과새가 절반씩 섞인 존재)의 새사람 (birdman, 鳥人) 전설을 공유하고 있다. - P245
5) 콘티키전설에 의하면 잉카제국을 세운 인디오의 태양신 콘티키가 전쟁에서 패하자 부족들을 이끌고 잉카의 이카다(Ikada)에서 이스터섬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 P245
6) 이스터섬에는 귓불을 인위적으로 길게 늘어뜨린 아나우에페(Anauepe)라는 부족이 있었는데, 남미 잉카의 지배계급인 온오네 (Onone)족도 이와 똑같은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 P245
이집토마니아(egyptomania)에서 ‘마니아‘는 그리스어로 광기라는 뜻으로, 한가지 일이나 분야에만 몰입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따라서 이집토마니아는 고대 이집트의 것에 대해서는 무조건 열광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 P250
첫째, 헤위에르달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에만 일로매진한 철저한 탐험가의 표상이다. - P254
탐험사에서 우리는 사리사욕과 손익만 따지거나 ‘발견‘이라는 허영에 들뜬 현상들을 흔하게 목격한다. 콜럼버스는 대서양 횡단 항해에 나서기에 앞서 스페인 이사벨 여왕과 일종의 계약서인 이른바 ‘그라나다 각서‘를 체결했는데(1492), 이 문서는그가 해야 할 일을 ‘섬들과 본토‘를 찾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그에게다음과 같은 특권을 부여했다. 즉 ‘발견한 땅‘의 ‘대양제독에 봉하고 ‘발견한 지역에서 국왕이 획득하는 금과 보석 및 기타 산물의 10분의 1을 차지할 권리를 가진다. 그런가 하면 포르투갈의 항해가이자 ‘인도 항로의 개척자‘인 바스쿠 다가마(Vasco da Gama)는 대포로 무장한 범선 4척을 이끌고 리스본을 떠나 아프리카 남단을 에돌아 1498년, 출항 10개월 만에 인도 서해안의 캘리컷(현 코지코드) 에도착한다. 이듬해에 그는 60배의 이익을 남겨줄 향료를 싣고 귀향한다. 역사상 서세동점의 효시라고 하는 이 해양 탐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동방에대한 서방의 식민지 약탈의 바닷길을 트는 데 있었다. - P255
이렇게 중세의 두가지 대표적인 탐험 사례만 봐도 자고로 이러저러한 미명하의 ‘탐험‘은 대부분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본연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헤위에르달의 탐험은 문자 그대로 철두철미한 탐험이었다. 오로지 해양을 통한 고대문명의 전파를탐구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었다. - P255
둘째, 헤위에르달은 평화적 글로벌리즘(globalism, 세계통합주의)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 P256
셋째, 헤위에르달의 탐험으로 문명전파론이 활성화되었다. - P257
헤위에르달은 문명 간의 상사성·공통성을교조주의적으로 전파의 근거로 삼고 그러한 상사성은 곧 전파의 결과라고 단정하면서 여러 이질 문명 간의 전파론을 고집했다. 이것은그의 전파론이 범한 편단으로서 결정적인 흠결이자 한계다. - P259
원래 수용에 의한 상사성이 전파의 근거가 되는 것은 그 전파 과정이 명명백백히 밝혀졌을 경우에 한한다. 전파 과정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상사성 일면만 보고 그것이 전파의 결과나 근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일종의 비과학적 속단에 불과하다. 헤위에르달 자신도 이러한 결점을 인지하고 그 극복에 여생을 바쳤지만, 전파를 아우르는문명교류가 학문적으로 정립되기는 고사하고 학계로부터 온갖 불가론과 비난, 조소가 쇄도함으로써 거의 고군분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시대적 제약과 난관을 뚫고 문명전파라는 초야를 개척하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 P259
넷째, 헤위에르달은 지구와 해양환경 보호의 선각자다. 그는 첫 마르키즈제도 탐험을 마치고 돌아와 쓴 탐험기 『녹색 안식일』에서 탐험내내 인간의 무자비한 자연생태계 파괴를 통탄하면서 "환경파괴로부터 지구를 지켜야겠다는 참된 열정을 불태웠다"라고 심정을 토로했다. 만년에 지술한 탐험기에서는 탐험가로서, 학자로서 "지구 보위의이념"이 그의 온 탐험생활의 저변을 관류한 "영혼"이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이처럼 헤위에르달은 지구 보호의 가치를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영혼‘으로 승화시키고 이를 몸소 실천한 참된 글로벌리스트였다. - P260
헤위에르달의 이러한 생각은 그만의 독특한 항해 원칙으로 표현되었다. 그의 3대 항해 원칙은 첫째, 탐험은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에 관한 탐구활동이기에 다국적 출신의 여러 분야 전문가들로 탐험대를 구성하고, 둘째, 배에 항상평화와 공조의 상징인 유엔 깃발을 달고 다니며, 셋째, 바다와 항해에관한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탐구를 위해 준비부터 항해의 전과정을일기 형식으로 기록한다는 것이다. - P261
이렇게 평화 이론의 황무지에서 허둥거릴 때 천우신조의 호기가찾아왔다. 평화 이론의 본산이자 개안(開眼地)인 노르웨이로의 행각이다. 평화에 관한 관심은 인간의 태생적 특성이며 갈구라는 것이일찍이 문화인류학에 의해 밝혀지면서부터 그 담론은 간단없이 이어져왔다. 급기야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94) 같은 희세의독일 철학자까지도 1795년에 발표한 『영구평화론』에서 국가 간 영구평화를 위한 3개 ‘확정 조항‘으로 1) 국가체제는 국민이 전쟁 여부를결정할 수 있는 공화제여야 하고, 2) 전쟁을 영원히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제 민족 간에 평화동맹을 결성해야 하며, 3) 영구평화에 대한 세계시민의 권리를 선언해야 한다는 유명한 주장을 피력했다. - P265
그로부터 10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대한제국의 안중근(安重根)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또오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후 사형을 언도받고 1910년 3월 감옥에서 미완의 원고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여기서 안중근 의사는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박탈하고 만주와 청나라에 대한 야욕을 가졌기때문에 동양평화가 깨지게 되었으니, 이제 동양평화를 실현하는 길은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주고 만주와 청에 대한 침략 야욕을 버리는 것이라고 통찰했다. 그런 후에 독립한 한국과 청, 일본 등 동양3국이 일심협력해서 서양세력의 침략을 막아내며, 한걸음 더 나아가동양 3국이 서로 화합해 개화, 진보하면서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진력해야 한다고 평화수호의 원대한 구상까지 밝혔다. - P265
원래 「동양평화론」은 1) 서(序) 2) 전감(鑑) 3) 현상 4) 복선(伏線)5) 문답의 5개 장으로 구상되었다. 감옥측은 집필이 끝날 때까지 사형집행을 연기하기로 약속했으나 돌연 그 약속을 어기고 1)과 2)만 집필된 상태에서 1910년 3월 26일 형을 집행했다. 그리하여 이 글은 미완으로 남은 것이다. - P266
평화학에서는 폭력을 직접폭력과 구조(構造)폭력, 문화폭력의 세가지로 구분한다. - P268
직접폭력은 일종의 유형적 폭력으로 인간에게 육체적고통을 강요하는 전쟁과 폭력적 충돌, 언어와 심리를 통한 학대 등이이에 속한다. - P268
구조폭력은 빈곤과 질병, 억압, 사회적 멸시 등을 통한고통과 재난으로서 주로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권리의 불공정한 배분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다. 직접폭력이 유형적인 데 반해 구조폭력은무형의 폭력으로, 장기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 - P268
문화폭력은 종교, 법률, 이념과 의식형태, 언어, 예술 등에 온축되어 있는 폭력으로서 학교교육이나 매체를 통해 널리 전파된다. 문화폭력은 왕왕 사회적 증오와 공포, 의혹 등을 유발한다 - P269
다음으로 평화의 구분이다. 평화학은 평화를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로 구분함으로써 평화의 개념을 크게 확대했다. - P269
소극적 평화란 체계화된 집단적 폭력이 없는 상태의 평화로서, 무력이 아닌 담판이나 조정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며, 유엔 같은 국제적 협약이나 조직에 의지해 집단적 안전을 보장하는 평화다. - P269
적극적 평화란 체계화된 집단적 폭력이 없을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협력과 통합, 회복(rehabilitation), 정의가 실현된 상태의 평화로서, 기아와 폭력, 인권침해, 난민, 환경오염 등 인간에게 고통과 불안을 안겨주는 각종 요인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실현된다. 그밖에 충돌과 평화, 비폭력과 화해 등일련의 문제에서 평화학은 고유한 이론과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 - P269
1970년대부터 여러차례 남북한을 방문한 요한 갈퉁 박사는 자신의 평화 구상을 한반도문제 해결에 적용할 여러가지 합리적 주장을내놓았다. 2000년 광주민주화운동 20주년을 맞이해 열린 ‘세계의 민주주의와 인권‘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데 이어 2016년 5월 25일 제주도에서 개최된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와 협력적 리더십‘이란 제하의 ‘제11회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에서 그는 한국은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평화적 관계를 가지며 협력해야 한다"라고 조언하면서, - P269
"대북 제재가 계속될수록 북한에는 ‘한‘이 더 쌓일 것이다.핵을 개발한 다른 국가들에는 제재를 하지 않았는데 유독 북한에만 이러한 제재를 가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라며 "미국은 북한이 붕괴할것이라고 생각해 제재를 가해왔지만 이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저는 ‘붕괴론‘이라는 개념의 붕괴를 희망한다"라는 의미심장한 견해를 피력했다. - P270
그러면서 그는 "우선 남북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통일을 위한 관계를 만들어야" 하고 "일단 관계를 가지게 되면 통일의 기반이 될 만한 단계를 구축할 수 있다"라고 통일의 방식과 전망까지를 제시했다. - P270
이 책에서 갈퉁은 미제국 붕괴의 요인을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요인은 총체적·종합적 사고에 대한 무지다. 미국의 세계적 위상이 급속하게 추락하는 것은 지금까지 지켜오던 사회적 전범을 점차적으로 비(非)전범화하다가 급기야는 반(反)전범화하여 타락시켰을 뿐 아니라,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단견으로 문제 해결에서 종합적 고려가 결핍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비유컨대 미국은 사족불구足不具)로서 대뇌가 더듬이(觸角)를 지휘할 수 없어 그냥 반신불수 상태로 내버려두는 형국이다. 경제, 국제관계, 정치, 종교가 각기 독립적인 학과로 병립함으로써 총체성을 지닐 수 없으며, 총체성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각각의 문제마저도 해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해결 능력마저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 P272
둘째 요인은 변증법적 사고의 부재다. 미국의 핵심 역량은 경제체제인데, 치명적인 약점은 경제에 미치는 정치적 후과를 신중히 계산하지 않고 무턱대고 밀어붙이는 독단적인 태도다. 예컨대, 이라크와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는 전쟁을 발동하는 것만 알았지 그 배후에이슬람세력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 P273
셋째 요인은 공평성에 대한 고려의 부재다. 어떤 문제의 해결에서다방면의 이해관계를 불편부당하게 살피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쪽에만 편중하여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군사 문제에서 그러한데, 그렇게 되면 당연히 불공평성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 P273
책에서 갈퉁은 바야흐로 붕괴에 진입하고 있는 미국을 향해 다음과 같은 요지의 조언을 남긴다. 그것은 바로, 미국은 모든 나라가 저마다 경제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의 평범한 나라로남아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동시에 140여개 나라에 군사를 주둔시키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붕괴로의 진입‘을 재촉하고 있는미국에 대한 일갈이다. - P274
스웨덴 보건당국은 심야태양의 영향을 예방하는 대책으로 1) 일상에서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유지하고 2) 침실에 어두운 커튼을 쳐 빛을 차단하며 3) 몸을 이완하는 운동을 하고 4)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고 5) 잠자리에 들기전에 수면 마스크를 착용하는 등의 구체적인 수칙을 마련하고 그 준수를 적극 독려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미 국방부도 백야 지역에 거주하는 자국민들에게 유사한 예방 수칙을 지키도록 유도하고 있다. - P282
첫째, 백야는 인간에게 수면장애를 야기함으로써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낳는다. - P280
둘째, 백야는 과잉행동과 경조증(輕燥症,약한 흥분이 지속되는 경미한 조증), 충동성 같은 비정상적이며 부적절한 행동을 초래한다. - P280
셋째, 백야 때문에 정상적인 하루 주기 리듬(circadian rhythm) 이 방해를 받아 하루 동안 빛과 어둠에 반응하는 신체의 내부 순환 과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머리가 멍해지는 의식혼탁(mentalfog)이나 두통, 소화불량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 P281
넷째, 백야 기간을 포함해 전반적인 햇빛의 부족으로 여러가지 질병이 발생한다. - P281
차제에 한가지 특기할 사항은 이상과 같은 중세 해양사, 특히 해전방식과 조선술에서 한반도의 해양강국 고려가 누렸던 선진성에 비하면 유럽은 한참 뒤떨어졌었다는 사실(史實)이다. 고려는 발달된 우리식 조선술과 항해술을 개발해 선진 해양국의 위상을 만방에 떨쳤다. 1274 년 고려-몽골 연합군의 제1차 일본원정 때 하까따(博多) 해안에서 벌어진 해전에 관해 원나라측 정사인 원사(元史)』는 "원나라 전함은 모두 돌풍에 깨졌으나 고려 전함만은 대부분 무사했다"라고 고려전함의 견고성을 전한다. 이 해전에 투입된 고려군 대선 한척의 길이는 약 30m로 90명이 탈 수 있었으며, 적재량은 쌀 3천석을 거뜬히 실을 수 있는 250톤가량이나 되었다. 240여년 후에 마젤란이 세계를 일주할 때 끌고 간 5척 배 가운데서 가장 큰 배라야 130톤밖에 안 되었다고 하니 그 우열은 자명하다. 이 원정을 위해 고려는 ‘배 위에서 말을달릴 만하다‘는 대선 300척을 포함해 모두 900척의 선박을 불과 4개월 만에 건조했다고 하니 그 출중한 조선술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 P302
그러나 고려의 최무선(崔茂宣)이 20여년의 노력 끝에 1373년경에 드디어 화약을 개발했고 화포인 주화를배에 설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화포를 배에 설치한 것은 고려가 세계에서 처음이다. 앞에서 보다시피 유럽은 고려보다 100년 뒤에야 가까스로 포를 전함에 장착해 해전에 임할 수 있었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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