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곡(九曲)은 어드메오 일각(一閣)이 긔 뉘러니 조대단필(釣臺丹筆)이 고금(古今)의 풍치(風致)로다 져긔져 별유천(別有洞天)이 천만세(千萬世)가 호노라
옥소 권섭 - P212
강에는 긴 다리가 놓여 있어 두 나무꾼과 지팡이 짚은 노인이 조심스레 강을 건너가는데 한편에선 두 마리 소가 사람을 태우고 느릿하게 강을 건너가고 있고 그 뒤로 송아지가 따라간다. 참으로 시정 넘치는 우리나라의 옛 강마을 풍경이다. - P218
이처럼 단원의 산수화는 명승에 국한되지 않고 평범한 풍광에 시정을듬뿍 담아낸 것이 많다. ‘버드나무 위의 새‘, ‘밭가는 농부‘ 등 아주 일상적인 소재를 보편적 회화미로 승화시켰다. 그래서 단원을 가장 조선적인 화가라고 하는 것이다. - P218
이럴 때면 회화라는 장르가 얼마나 위대한가 절감할 수 있다. 겸재와 단원이 없었다면 조선시대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고 그 옛날의 풍광이 어떠했는지 상상하기 힘들 뻔했다. - P219
영춘현 단양의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변해버렸지만 영춘(永春)만 은아니다. 오늘날 영춘은 단양의 한 면에 지나지 않지만 그 옛날엔 당당한 현(縣)으로 청풍. 단양·제천과 함께 사군(四郡)을 이루던 고을이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영춘은 고구려 때는 아조현(阿朝縣)이었고, 신라 때는 자춘현(子春縣)으로 개칭되어 영월(내성군)의 속현이었다. 고려 때 영춘이라 불리며 원주에 속했다가 조선조 정종 때 충청도로 이속되었고, 태종 13년(1413) 에 현감이 파견되었다. 그러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단양군의 한 면이 되었다. 오늘날 영춘은 1,00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인구 3,000명 정도의 산골이다. - P220
내가 구례에서 하동까지 섬진강을 따라가는 길을 우리나라에서 ‘둘째로‘ 아름다운 길이라고 한 것은 이 영춘가도와 쌍벽을 이루어 어느 것이더 낫다고 할 수 없어 그렇게 말해두었던 것이다. - P222
영춘가도 영춘가도는 50리 옛길이다. 근대로 들어오면서 그 길이 신작로로 닦였고, 현대로 들어서면서는 2차선 찻길이 되었지만 영춘가도는 아직도찾아오는 사람이 뜸하여 길가로 식당·여관·가겟방이 들어서는 관광지의 상처를 받지 않았다. 길은 줄곧 남한강을 따라가며 강물이 비집고 내려오는 육중한 산줄기가 둘러 있고, 길가산비탈에 이따금 호젓한 마을과 외딴집들이 나타난다. 가로변엔 언제 심었는지 플라타너스와 벚나무가 제법 장하게 자라 늘어서 있고, 넓은 강둑엔 옥수수나 감자 같은 강원도 작물들이 재배되며마을 입구 길가엔 접시꽃과 해바라기 같은 낯익은 풀꽃들이 철따라 꽃을 피우고 있다. - P222
영춘 북벽 영춘의 강 건너는 깎아지른 병풍바위가 족히 400미터쯤 이어졌는데 영조 때 현감이었던 이보상이 석벽에 ‘북벽‘이라는 글씨를 새긴 뒤 영춘 북벽이라 불리게 되었다. 영춘 제일의 명승이다. - P239
베틀재 영춘에서 영월로 올라가는 길로 충북 · 경북 · 강원 3도가 다 조망된다는 베틀재를 넘어가는 산길(935번 지방도로)이 새로 열렸다고 하여 그쪽으로 가보았다. 듣던 바대로 깊고 깊은 산속에 베틀재 전망대가 나온다. - P240
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이다. 그 많은 산성 중 가장 멋지고 감동적인산성을 셋만 들어보라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보은의 삼년산성, 상주의견훤산성, 그리고 영춘의 온달산성을 꼽을 것이다. - P241
온달산성 온달산성은 서쪽으로 돌아가야 제맛이다. 그리고 동쪽 성벽에 이르는 순간 누구든 아! 하는 감탄사를 발하고 만다. 성벽은 산비탈을 타고 포물선을 그리며 동벽은 앞면, 북벽은 뒷면을 엇갈려 보여주며 힘찬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그 아래로 남한강은 더욱 푸르고 길게 펼쳐진다. - P244
내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북한편‘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나는 온달 이야기는 시답지 않은 옛날이야기로만 알고 있다가 바보 온달이야기의 주인공은 평강공주라는 호암 문일평(文一平, 1888~1939)선생의 글을 읽고 큰 깨우침을 받았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평강공주는 아주 진보적이고 평민적이고 영웅적인 왕녀였다. - P249
이 이야기는 바보 남편에 장님 시어머니를 모신 지극한 사랑 끝까지신의를 지키는 믿음, 자기 능력을 극대화하는 인간적 성실성, 바보 남편을 전쟁영웅으로 보필하는 훌륭한 아내, 그리고 처연히 저세상으로 떠나는 대범한 죽음, 저승으로 가는 순간에도 변치 않는 사랑, 거기에다 최고의 지배층과 최하의 평민이 만나는 사회적 일체감을 다른 사람 아닌 평강공주를 통해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구려 사람들은 요즘 영국인들이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그리듯 평강공주를 기렸던 것이다. - P249
옛날에 한양에서 남한강 뱃길을 이용해 경상도로 갈 때는 죽령을 넘어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편한 길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경부선에 해당하는 길목이었던 것이다. 단양8경의 아름다움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된 것도 사실은 죽령 덕이 크다. - P250
죽령은 소백산 산자락을 비집고 넘어가는 높은 고개다. 소백산은 국망봉(해발 1,421 미터)을 비롯하여 1,000미터가 넘는 준봉들이 월악산과 속리산을 향하여 남쪽으로 힘차게 치달리는데 도솔봉(해발 1,314미터)과 연화봉(해발 1,394 미터) 사이 산세가 잠시 주춤하면서 낮게 굽이진 곳이 있다. 그사이를 비집고 넘어가는 고개가 죽령이며 그 너머가 경상도 풍기이다. - P250
『삼국사기』에 의하면 죽령 고갯길은 신라아달라 이사금 5년(158) 3월에 열렸다고 한다.『여지도서』에도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가 죽령길을 개척하고 순사하여 죽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개 서쪽에 죽죽사라는 사당이 있다"고 했다. 이것이 죽령의 내력이다. 멀리서 죽령을 바라보면 산자락 사이가 마치 말안장처럼 우묵하게들어가 그 틈새를 가르고 고갯길이 났지만 워낙에 산이 높은지라 해발689 미터가 되는 험한 고갯길이다. - P250
‘위험물‘ ‘화기물‘ ‘폭발물‘ ‘접근금지‘ ‘책임 안 짐‘… 그리고 해골바가지 그림까지 곁들이며 뒤차에게 안전거리를확보하라고 경고한다. 그 화물차 경고문 중 정말로 겁이 나서 가까이 접근하기무섭게하는 기발한문구가 있었다.
"초보운전"
그래서 노자(老子)는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며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고 했고, 나는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라고 했던 것이다. - P253
돌미륵을 술종공의 미륵과 일치시킬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가있는데, 더 정확한 증거가 나타나 이를 증명할 때까지 믿지 않는 것이나, 일단 믿고 일치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느냐 하는 것은 피장파장이라고 생각된다. - P258
최근 단양은 관광객을 부르며 ‘사랑의 고장‘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구담에는 퇴계와 두향이의 사랑이 서려 있고, 온달산성에는 바보 온달과평강공주의 사랑이 들어 있고, 죽령에는 모죽지랑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단양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많은 사람들이 단양을사랑해주기 바라는 단양 사람들의 절박한 마음을 나는 이해한다. - P258
거기에는 역사적 내력이 있다. 제천은 그 범위가 여러 번 변했다. 삼한시대엔 마한 땅이었다가 4세기 초에는 백제의 영토가 되었고, 5세기에는 고구려 영토로 되어 내토군(吐郡)이라 했다. 그때 청풍은 사열이현(沙熱伊縣)으로 제천이 아니었다. 6세기에 신라 영토로 편입되어 통일신라 때 내제군(郡)으로 개칭되면서는 청풍이 내제군 관할로 들어왔다. 고려시대엔 제주군(堤州郡)으로 개칭되었는데, 조선시대엔 제천은 현, 청풍은 도호부로 위상이 역전되었다. - P262
일제강점기 들어 1914년 군현을 통합· 개편할 때 다시 청풍을 흡수하여 제천군이 되었다. 그리고 1980년 제천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읍 이외지역은 제원군(나중에 제천군)으로 독립해 있다가 1995년에 제천시로 다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 P263
"다른건 몰라도 제천의 면 이름 하나는 정말 잘 지었어. 다른 시군에가보면 군내면 군북면 군남면 산내면 산외면·산북면·동면,서면남면하면서 방향만 가리키고 있어서 각 고을의 정체성이 보이질 않아요. 그런데 제천은 봉양·청풍. 한수·백운·송학·덕산·금성..얼마나 멋있고서정성이 있냐. 그 점에서 지자체 중 제천이 가장 좋은 전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어때? 너도 잘 몰랐지?" - P264
장락사 칠층모전석탑과 아파트 단지 안목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누구든 처음 이 탑을 보는 순간 저렇게 멋있는탑이 제천 시내에 있고 그것도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 P266
"이 탑은 시내에 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 거 같아요. 저기 고층아파트를 배경으로 보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제천이 문화적으로 역사가 깊고 당당하다는 걸 보여주잖아. 유럽에 가면 중세시대 건물이 도심 속에 있는 것이 얼마나 멋있던가. 그러니까 자네도문화재 행정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점을 강조해야 해요. 이 앞에 있는 잔디밭에 무얼 짓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러다간 끝장나는 거지." "예, 명심하겠습니다." - P268
의림지 (명승 제20호)는 밀양 수산제, 김제 벽골제, 상주 공갈과 함께중학교 때부터 교과서에서 삼국시대 인공 수리시설로 배우고 외워서 익히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그때 이미 관개용 저수지를 만들어 농지를 관리할 정도의 사회구조를 갖고 있었다는 물증이되기 때문이다. - P269
그때 의림지 둑의 축조 방식이 드러났는데 기가 막힌 자연친화적 수축법이었다. 둑을 쌓기 전에 개천 바닥에는 둥근 자갈이 깔려 있었는데, 그 바닥을 깊이 파서 진흙을 깔고 그위에 지름 30~50센티미터 되는 통나무를 가로세로로 묻어가며 버팀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물이 닿지 않는 바깥 면은 굵은 자갈을 섞은 흙으로 덮어 마무리했지만 물에 닿는 안쪽 면은 진흙과 모래흙, 소나무 낙엽을 충충이 다져얹고 다시 굵은 자갈이 섞인 모래흙을 두껍게 덮었다. 이렇게 해서 진흙층은 물의 침투를 막고 낙엽층은 공기가 차단되어 부식되지 않은 채버텨낸 것이다. 지금의 모습은 발굴 뒤인 1973년에 복구해놓은 것이다. 현재 의림지는 둘레 약 2킬로미터, 수심은 8~13미터가량이며 약 300정보의 논에 물을 대고 있다. - P271
수란(水蘭)과 산국화 향기가 시드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水蘭山菊惜香哀
조그만 배를 타고 넓은 강을 더디게 올라가네(...) 小悼沿泂百頃遲
누가 장마와 가뭄으로 차고 준다고 말하겠는가 誰云澇旱被盈虧
방죽 노래(大堤曲) 한 곡조를 큰소리로 부르니 高唱大堤歌一曲
뛰어오르는 물고기와 나는 오리가 각기 천연의 제 모습이네 跳魚飛鵬各天 - P273
최영희(崔永禧) 선생이 쓰신 한국사 기행ㅡ그 터』 (일조가 1987)였다. 특히 최영희 선생이 제천의 배론 천주교 성지와 장담(長潭)의 자양영당을 쓴 글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상한 일도 있다. 19세기 한국의 사상과 정치의 갈등이충청도 제천군 박달재 산골짜기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박달재 마루턱에서 제천을 향해 왼쪽으로 10리에 있는 배론에서는골수 천주교인들이 숨어 있었고 오른쪽 10리에 있는 장담에서는 골수위정척사론인(衛正斥邪論人)들이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상대를 사것으로 규탄하여 타협할 수 없는 극과 극의 양)한극이 시기의 차이는 있었으나 박달재를 사이에 두고 산골짜기에 자리잡게 된 것은 우연한 일만은 아니었다. 사교로 몰린 천주교인들은 나라의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아야 했고, 주자학의 전통을 이은 위정척사론인들은 개화의 물결 속에서 세속을 떠나 그 전통성을 이어나가기위해서였다.
이 글이 나로 하여금 배론과 상담 마을을 답사하게 이끌었던 것이다.한국사 책이면 반드시 나오는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 백서가 쓰인곳이고, 1895년 을미의병운동의 첫 봉기가 일어난 곳이라니 그야말로 ‘한국사의 그 터‘가 아니던가. - P274
탁사란 ‘이것을 씻는다‘는 뜻으로 초나라 애국시인 굴원(屈原)이 어부사(漁父詞)」에서 "냇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냇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고 한 탁영탁족(濯纓濯足)에서 왔다. 즉 군자는 시류에 나아가기도하고 물러나기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탁사정이 멋있는 것은 사실 정자가 아니라 계곡 때문이다. 탁사정계곡은 규모는 작아도 참으로 어여쁘고, 그윽하고, 환하다. 아마도 제천최고의 탁족처는 탁사정 계곡일것인데 여기까지 와서 그런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 P276
자양영당으로 오는 길에 강만길 선생님은 의병운동에 대해 간략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19세기 말 조선왕조가 멸망의 길로 들어설 때 이에 저항하는 투쟁이크게 두 가지가 있었어요. 하나는 의병의 근왕(勤王) 투쟁이고, 하나는 만주 독립군의 독립투쟁이죠. 의병운동은 여러 가지 한계를 갖고 있었지만 조선 군대가 해산할 때 - P276
그 수가 8,800명 정도였는데 전국에서 크게 세 번에 걸쳐 일어난 의병의전사자를 3만 내지 4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니 그 투쟁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죠. 그리고 의병운동은 자기 한계를 인식하고 결국 독립투쟁으로 이어갑니다. 이것이 의병운동의 역사적 의의입니다." - P277
자양영당 구한말 의병운동이 처음으로 일어난 곳으로, 1906년 처음 세워질 때는 주희·송시열·이항로·유중교 네분, 8·15해방 직후 유인석 · 이소응 두 분이 더해져 현재 여섯 분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이분들이 위정척사파의 정신적 지주와 맥을 잇는 학자들이다. - P277
첫째, 거의소청(擧義淸):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는 것. 둘째, 거지수구(去之守舊): 고국을 떠나 옛 정신을 지키는 것. 셋째, 자정수지(自淸志): 스스로 목숨을 끊어 뜻을 이루는 것. - P278
의병기념탑 자양영당의 의병전시관 앞에는 우리가 으레 볼 수 있는 기념탑이 있다. 국내 어디를 가나 관습상 이런 탑이 있어야 기념관이 된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갖고 있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제는 좀 달라질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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