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六臣)의 충(忠) 의열(烈)은 만고에 꺼짐이 없이 조선 백성의 정신 속에 살 것이요, 단종대왕의 비참한 운명은 영원히 세계 인류의 눈물로 자아내는 비극의 제목이 될 것이다. 더구나 조선인의 마음, 조선인의 장치와 단체가 이 사건에서와 같이 분명한 선과 색채와 극단한 대조를 가지고 드러난 것은 역사 전폭을 떨어도 다시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부족한 몸의 힘과 마음의 힘이 허하는 대로 조선 역사의축도요, 조선인 성격의 산 그림인 단종대왕 사건을 그려보려 한다. 이 사실에 드러난 인정과 의리 그렇다, 인정과 의리는 이 사실의중심이다―는 세월이 지나고 시대가 변한다고 낡아질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사람이 슬픈 것을 보고 울기를 잊지 아니하는 동안, 불의를 보고 분내는 것이 변치 아니하는 동안 이 사건 이 이야기는 사람의 흥미를 끌리라고 믿는다. - P100
해 저무는 청령포의 화두는 한 어린이의 무고한 죽음입니다. 그리고 정권쟁탈의 잔혹함입니다. (…)정권이 정치의 목표인 한 이념과 철학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청령포는 유괴되고 살해된 한 어린이의 추억에 젖게 합니다. 무고한 백성의 비극을 읽게 합니다. 역사의 응달에 묻힌 단종비 정순왕후의 여생이 더욱 그런 느낌을 안겨줍니다. (……)동정곡을 하던 수많은 여인들의 마음이나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체를 수습했던 영월 사람들의 마음을 ‘충절‘이란 낡은 언어로 명명(命名)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동정은 글자 그대로 그 정(情)이 동일(同一)하였기 때문입니다. 같은 설움과 같은 한(恨)을 안고 살아갔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종의 애사(史)를 무고한 백성들의 애사로 재조명하는 일이라고생각합니다. 그것이 상투적인 역사적 포펌을 통하여 지금도 재생산되고 있는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는 길이며, 구경거리로서의 정치를 청산하고 민중이 객석으로부터 무대로 나아가는 길이며 민(民)과정(政)이 참된 벗(大友)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P101
청풍명월의 고장 충청북도가 내건 지역 홍보용 캐치프레이즈는 ‘청풍명월(淸風明月)의고장‘이다. ‘맑은 바람에 밝은 달‘이라는 이 청명한 이미지는 산은 아름답고 물은 맑다는 산자수명(山紫水明)과 함께 어우러진다. - P105
충청북도의 상징적인 대처(處)는 청주와 충주이고, 유명한 명산대찰은 보은의 속리산 법주사이고, 대표적인 서원(書院)은 괴산의 화양동구곡이 있는 화양서원이지만, 충북이 내세우는 청풍명월의 고장은 제천과 단양이다 - P105
마을을 삼킨 호수는 육중한 산자락 허리까지 차올라 산상의 호수가되었고 산허리 높은 곳으로 새로 난 찻길은 호숫가를 따라 굽이굽이 돌아가는 그야말로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가 되었다. 물길 따라 충주·월악·청풍·장회 · 신단양 나루터로 이어지는 유람선이 진작부터 다니고 있다. 그 유람선을 타고 아름다운 비봉산·옥순봉·구담봉을 올려다보며 지나가자면 차라리 이국적인 정취조차 일어난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산상의 호수(피어발트슈테터호)를 연상시킨다. 그리하여 충청북도가 산자수명하고 청풍명월하다는 이미지는 여전히제천과 단양이 갖고 있다. - P106
청풍호 충주댐이 담수되면서 청풍면 전체가 수몰되어 드넓은 호수로 변했다. 이곳 사람들은 충주호를 청풍호 또는 청풍호반이라고 부른다. - P107
오후에는 단양8경 여덟 명승을 두루 돌아본 다음 신단양의 숙소에 묵었다. 여름날이라면 단양의 적성과 영춘의 온달산성에 오르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한겨울인지라 해가 짧고, 연로하신 분들을 고려해 비교적 일정을 느긋이 잡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튿날은 제천으로 올라가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과 의림지를 답사한 다음 황사영 백서사건의 배론성지와 한말 의병운동의 발상지인 자양영당을 둘러보고 박달재 마을에서 점심을 먹은 뒤 충주 목계나루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 P108
"이 호수가 충주댐으로 생긴 충주호가 아닌가요?" "맞아요." "그런데 도로 표지판이 청풍호(淸風湖)로 되어 있네요." - P109
여기엔 사연이 있다. 충주댐은 1980년에 착공되어 1985년에 준공된다목적댐이다. 북한강에는 소양강댐 의암댐 청평댐 등이 있지만 남한강에는 이 충주댐이 유일하다. 충주시 종민동과 동량면 조동리 사이의좁은 수로에 만든 높이 약 100미터, 길이 약 450미터의 댐으로 만수위때의 수면 면적은 약 3,000만평 (9,700만 제곱미터)이다. 이 댐으로 약 40만킬로와트의 전기가 생산되고 있고, 충주·제천·단양 지역에 각종 용수가공급되고 있으며, 하류 지역의 만성적인 홍수와 가뭄 피해를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 P109
이 다목적댐 건설을 위하여 수몰된 면적은 약 2,000만 평이나 된다. 단양은 단양읍 전체를 비롯하여 3개 면 26개 리의 2,684가구가 제천은5개 면 61개 리의 3,301 가구가 수몰되었다. 그중 청풍면은 전체 27개 마을 중에서 25개가 물에 잠겼다. - P109
"난 청풍이 처음인데 청풍이라면 청풍김씨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네요. 대단한 명문이었죠. 조선 말기의 대신 운(雲) 김윤식(金允植),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이 다 청풍김씨죠." "명문이고말고요. 대동법을 시행한 김육(金)도 있죠. 왕비도 둘 배출했죠. 금곡에 청풍김씨묘역이 있고, 몽촌토성 안에도 있죠." - P112
청풍김씨는 신라 김알지(金智)의 후예인 김대유(金大戱)가 고려 말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진 뒤청풍에 세거하면서 집안의 시조가 되었다. 그 자손들이 대대로 번성하여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상신(相臣, 영의정· 좌의정·우의정) 8명, 대제학(大提學) 3명을 배출했다. 왕비도 2명이나 나왔다. 김육의 손녀딸이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가 되었고,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도 청풍김씨였다. - P112
망월산성과 청풍문화재단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망월산성 자리에 수몰지구에서 옮겨온 건조물들로 역사공원을 조성하고 이름하여 청풍문화재단지라 했다. 약 1만 6,000여 평의 대지에 옛 청풍 관아 건물 5채, 고가 4채 등 43점의 문화재를 이전하고 1985년 12월 23일 개장했다. - P115
팔영루 청풍문화재단지 넓은 주차장에 당도하면 높직이 올라앉은 팔영루라는 성문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옛날엔 청풍 고을로 들어가는 성문이었는데 지금은 청풍문화재단지 출입문이 되었다. - P117
한벽루 청풍문화재단지의 하이라이트는 청풍 관아의 누각인 보물 제528호 한벽루로, 흔히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남한 3대 누각으로 꼽히는 희대의 명루이다. 이 사진은 20년 전(1995년)에 찍은 것이다. - P119
한벽루는 흔히 진주 촉석루(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와 함께남한 3대 누각으로 꼽히는 희대의 명루입니다. 혹은 호남 제1루로 남원 광한루(廣寒樓), 영남 제1루로 밀양 영남루, 호서 제1루로 청풍 한벽루를 꼽는 데 아무 이론이 없습니다. - P118
내륙의 바다 청풍호 망월루 정자에 오르니 굽이굽이 펼쳐지는 청풍호반의 풍광이 너무도 아름답다. 발아래 물에잠긴 곳이 옛 청풍 고을인데 높직이 가로지른 청풍대교 너머로 호수는 한없이 멀어져간다. 누구든 "마치 다도해 같다"고 감탄을 발하게 된다. - P124
한벽루 송시열 편액 1972년 홍수로 한벽루에 걸려 있던 10여 개의 편액은 무심한 강물이 다 휩쓸어 삼켜버려 사라지고 우암 송시열의 편액과 하륜의 기문만 복원되어 있다. 사진은 원래 있던 송시열의 편액을 찍은 것이다. - P125
생각건대, 누정을 수리하는 것은 한 고을의 수령 된 자의 마지막 일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잘되고 못됨은 실로 다스림, 즉 세도(世道)와 관계가 깊은 것이다. 세도가 일어나고 기울이 있으매 민생의 편안함과 곤궁함이 같지 않고 누정의 잘되고 못됨이 이에 따르니, 하나의 누정이 제대로 세워졌는가 쓰러져가는가를 보면그 고을이 편안한가 곤궁한가를 알 수 있고 한 고을의 상태를 보면 세도가 일어나는가 기우는가를 알 수 있을지니 어찌 서로 관계됨이 깊지 않겠는가. - P127
지는 달은 희미하게 먼 마을로 넘어가는데 까마귀 다 날아가고 가을 강만 푸르네 누각에 머무는 나그네는 잠 못 이루고 온밤 서리 바람에 낙엽 소리만 들리네 두 해 동안 전란 속에 떠다니느라 온갖 계책 근심하여 머리만 희었네 쇠잔한 두어 줄기 눈물 끝없이 흘리며 일어나 높은 난간 향하여 북극만 바라보네 <유성룡, 숙 청풍 한벽루> - P130
우리나라 정자의 미학은 이웃 나라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과 비교할때 확연히 드러난다. 중국의 정자는 유럽의 성채처럼 위풍당당하여 대단히 권위적이고, 일본의 정자는 정원의 다실로서 건축적 장식성이 강한데에 반하여 한국의 정자는 삶과 유리되지 않은 생활 속의 공간으로 세워졌다. 그 친숙함이야말로 우리나라 정자의 미학이자 한국미의 특질이기도 하다. - P132
일찍이 일본인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한·중·일 3국의미술적 특성을 비교하면서 ‘중국 미술은 형태미가 강하고, 일본 미술은색채감각이 뛰어나며, 한국 미술은 선이 아름답다‘면서 중국 도자기는권위적이고, 일본 도자기는 명랑하고, 한국 도자기는 친숙감이 감도는것이 특징이라고 했다. 그래서 중국 도자기는 멀리서 감상하고 싶어지고, 일본 도자기는 곁에 놓고 사용하고 싶어지는데 한국 도자기는 손으로 어루만져보고 싶어진다고 했다. 그런 친숙감이 우리나라 정자에도 그대로 어려 있다. - P132
목민관 황준량의 눈물어린 상소문 때는 16세기 중엽, 조선 명종 연간 이야기다. 을사사화를 비롯하여 온갖 변란이 일어나던 정치적 혼란기에 백성들이 무거운 세금을 감당하지못하여 도망가는 유망(亡)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임꺽정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때 단양군수로 부임한 황준량은 고을의 참상을 살피고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 P135
이후 갑론을박 끝에 상소한 지 꼭 열흘째 되는 5월 17일, 마침내 황준량의 상책에 따라 단양의 조세와 부역을10년 동안 모두 감면한다는 조치가내려졌다. - P139
실로 감격적인 결정이었다. 힘찬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다. 한올바른 목민관이 피폐한 고을을 이렇게 살려낸것이다. 훗날 퇴계 이황은 황준량의 행장(行狀)을 지으면서 "공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전례 없는 이러한 은전을 얻었겠는가"라고 칭송했다. - P139
지방자치제 이후 도지사·시장·군수 자리가 정치인의 몫으로 된 요즘세태를 보면, 이 지위를 옛날 원님이나 사또 벼슬로 생각하거나 정치적출세를 위한 발판 정도로 삼는 안타깝고 씁쓸하고 괘씸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지방 수령의 근본은 모름지기 백성의 삶을 보살피는 목민관이다. 목민관 황준량의 선정비는 그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이다. - P139
군수 황준량 선정비 조선 중종 때 단양군수로 부임한 황준량은 단양 백성을도탄에서 구해낸 역사상 가장 훌륭한 목민관으로 꼽힌다. 지방수령의 근본은 모름지기 백성의 삶을 보살피는목민관이다. 단양 수몰이주기념관 앞마당에 있는황준량의 선정비는 그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이다. - P139
단양8경이란 옥순봉·구담·도담·석문·사인암·상선암·중선암·하선암등 8곳을 말한다. 단양8경은 관동8경과 함께 대표적인 8경으로 꼽히고있지만 그 명칭이 생긴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 P141
다‘고 했을 정도였다. 단원은 세 차례나 임금의 초상을 그렸는데 그 공로로 47세 되는 1791년 연풍현감이 되었다. 중인 출신의 도화서 화원으로서는 가장 높은 직위에 오른 것이었다. 그러나 단원은 풍류화가였지 행정력을 갖춘 인물은 아니었다. 결국 ‘연풍의 행정이 해괴하다‘는 보고가 들어와 관찰사의 감사를 받고 재임3년 만에 파직되고 말았다. - P150
그때의 일이 『일성록(日省錄)』에는 "김홍도는 여러 해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잘한 일이 하나도 없고, 관장(官長)의신분으로 기꺼이 중매를 하고, 하리(下吏)에게 집에서 기르는 가축을 강제로 바치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정에서는 처벌을 주장했지만정조는 해직하는 것으로 끝내고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고 끝까지 단원을 보호해주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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