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수영 보련암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내생각: 작가가 뭣도 모르고 그렇게 썼다.

이때 내아(內衙)에서 술상이 나오거늘 한 잔  먹은  후에  통인과 방자 물려 준다. 술기운이  도도하야 담배 피워 입에다 물고이리저리 거닐제, 충청도 공주수영(水營)  보련암(寶蓮菴)이 좋다 하나 이곳 경처 당할쏘냐.  붉을 단(丹) 푸를 청(靑) 흰 백.. ..
<춘향전, 21페이지>

충청도 공주 수영 보련암.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가?
충청도에 수군절도사는 보령 오천에 있었다.
경상, 전라에는 좌, 우수사가 있었지만 충청엔 충청수사 하나.
충청수영성 영보정. 보령시 오천면 오천항에 있다.

충청수영 영보정

오천항이 내려다 보이는 충청수영성 언덕에 위치하는 누정으로 1504년(연산군 11) 수사 이량이 지었으며 이후에 계속 보수와 개축이 이루어졌다.

정면 6칸 측면 3칸의 큰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조선시대 많은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시문을 남겼다. 백사 이항복과 다산 정약용은 이곳을 조선 최고의 정자라고 칭송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말 충청수영이 폐지되면서 1878년 영보정도 화재로 소실되고 터만 남아 있었는데 2015년에 영보정을 복원하여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http://m.viva100.com/view.php?key=20220708010001343

춘향전에 나온 ‘츙쳥도 고마수영 보련암’에 대하여, 공주대학교 강헌규

춘향전, 춘향수절가에는 전라도의 광한루와 오작교에 해당하는 경치가 아름다운 곳은 고마 수영 보련암이라는 말이 있다. 충청도에 있는 [보련 암자] 물론 고마수영이나 보련암이 아름다운 곳이라 할지라도 광한루나 오작교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글쓴이의 관심사는 고마수영과 보련암 지명의 위치를 찾는 것이다.
저의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고마수영[고마해군본부]은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었다.
2. 보련암:기록의 결과로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장소를 알 수 있다.
①경북 문경군 산북면 전두리 대승사 옆에 있다.
① 동산의 가슴 우장동 마을 풍산리에 있다. 강원도 화천군 군내면. 그런데 이 두 보련암은 춘향전의 보련암이 아닌 것 같습니다.
3.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보련암‘은 ‘영보정‘의 옛 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변경에 대한 추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련암(보련)→영보(보련)정

이러한 변화는 불교의 지배를 받는 고려 사회에서 유교의 지배를 받는 조선 사회로의 이념적 변화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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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8-21 23: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춘향전 무대가 공주 라면 실제 대화는 공주 방언으로 ?? ㅎㅎ

대장정 2022-08-22 00:18   좋아요 2 | URL
전라북도, 충청남부 사투리 비슷합니당~~^^.ㅎㅎ
 

숙종대왕 즉위 초에 성덕이 넓으시어 대대로 어진 자손이 끊이지 않고 계승하시니 아름다운 노래 소리와 풍요로운 삶이 비할 데가 없도다. 든든한 충신이 좌우에서 보필하고 용맹한 장수가 용과 호랑이가 에워싸듯 지키는구나. 조정에 흐르는 덕화(德化)가 시골까지 퍼졌으니  굳센 기운이 온 세상 곳곳에 어려 있다. 조정에는 충신이가득하고 집집마다 효자열녀로다. 아름답고도 아름답다. 비바람이 순조로우니 배부른 백성들은 곳곳에서 태평  시절을 노래하는구나.
- P9

이때 전라도 남원에 월매라는 기생이 있으니 삼남(三南)에서이름난 기생이었다. 일찍이 기생을 그만두고 성가라고 하는 양반과 더불어 살았는데 나이 사십이 되도록 슬하에 일점혈육이없었다. 이것이 한이 되어 길이 한숨 쉬며 근심하다가 그만 병이되었구나. - P9

"서울로 이를진대 자하문 밖 내달아 칠성암, 청련암, 세검정과평양 연광정, 대동루 모란봉, 양양 낙선대, 보은 속리 문장대, 안의 수승대,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가 어떤지는 모르오나 전라도로 이를진대태인 피향정, 무주 한풍루, 전주 한벽루 좋사오나 남원 경처 들어보시오. 동문밖나가시면 장림 숲 선원사좋사옵고, 서문 밖 나가시면 관왕묘(關王廟)의 엄한 위풍 예나지금이나 같사옵고, 남문 밖 나가시면 광한루, 오작교, 영주각좋사옵고, 북문 밖 나가시면 연꽃 같은 봉우리가 푸른 하늘에 깎은 듯이 솟아있고, 기이한 바위 둥실한 교룡산성 좋사오니 내키는대로 가사이다. - P15

이때 내아(內衙)에서 술상이 나오거늘 한 잔 먹은  후에  통인과 방자 물려 준다. 술기운이 도도하야 담배 피워 입에다 물고이리저리 거닐 제, 충청도 공주 수영(水營)  보련암(寶蓮菴)이 좋다 하나 이곳 경처 당할쏘냐.  붉을 단(丹) 푸를 청(靑) 흰 백.. ..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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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빈당의 탄생

˝우리가 이제는 백성의 재물은 추호도 건드리지 말고, 각 읍수령과 방백(方伯)들이 백성에게서 착취한 재물을  빼앗아 혹불쌍한 백성을 구제할 것이니, 이 무리의 이름을 ‘활빈당(活貧黨)‘이라 하리라.˝

˝함경 감영에서 군기와 곡식을 잃고 우리 종적은 알지 못하므로 그사이에 애매한 사람이 많이 다칠것이다. 내 몸이 지은 죄를 애매한 백성에게 돌려보내면 사람은  비록  알지 못할 지라도 천벌이 두렵지 아니하겠는가?˝
길동이 즉시 감영북문에 써 붙였다.

창고의 곡식과 군기를 훔친 이는 활빈당 장수 홍길동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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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8-21 20: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홍길동전 제대로 읽으시는군요 대장정님. 그러고보면 어릴적 아동용이랑은 또 다른 거 같아요. 전 민음사 춘향전 읽고 은근 야해서 놀랐어요 ㅎㅎㅎ

대장정 2022-08-21 21:16   좋아요 1 | URL
이거 읽고 바로 춘향전 읽을라고 했어요 ㅎㅎ 홍길동전 읽고 오늘 새로운 사실 알게 됐어요. 길동이 율도국을 세운줄로만 알았는데 멀쩡히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는 나라를 중국을 섬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처들어가 왕, 신하들을 죽였더군요.(사실 자살) 허균의 중화사상을.... 배경이 세종시대인데 조선군이 총쏘고, 대동미가 나오고...
 

조선국 세종대왕께서 즉위하신 지 십오 년 되는 해, 홍화문(弘化門) 밖에 한 재상이 있었다.  성은 홍이요 이름은 문이니, 사람됨이 청렴강직(淸廉剛)하여 덕망이 높은 당대의 영웅이었다. 일찍 벼슬길에 올라 직위가 한림(翰林)에 이르러 그 명망이 조정에서  으뜸이었다. 임금께서 그 덕망을 높이 여기셔서벼슬을 올려 이조판서와 좌의정에 봉하셨다. 이에 승상이 감동하여 충성을 다하여 나라의 은혜를 갚으니, 사방에 일이 없고 도적이 없으며 연이어 풍년이 들고 나라가 태평하였다. - P9

잠에서 깨어 깨달으니 평생에 한번 올 대몽이었다. 마음속으로 ‘반드시 군자를 낳으리라.‘고 생각하여, 즉시 내당에 들어가 몸종을 물리치고 부인을 이끌어 취침코자 하였다. 부인이정색하고 말하였다.
"승상은 한 나라의 재상입니다. 그 체면과 위상이 높으시거늘 한낮에 정실에 들어와 저를 노류장화(路柳墻花) 대하듯 하시니 재상의 체면이 어디에 있습니까?"
승상이 생각해도 부인의 말이 당연하지만, 그 좋은 꿈을 헛되어 할까 두려워 꿈 이야기는 입 밖에 꺼내지도 못하고 연이어 간청하였다. 그러나 부인이 옷을 떨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 P12

주위가 고요하고 그윽한 틈을 타 춘섬을 이끌고 원앙지락(鴛鴦之樂)"을 이루니, 적잖이 화는 풀렸으나 못내  마음에 걸려하였다. - P13

춘섬이 비록 태생은 천하나 재주와 덕행이 순박하고 곧은지라, 뜻밖에 승상의 위엄으로 가까이 두시니 감히 어기지 못하고 순종한 후로는 그날부터 중문 밖에 나가지 아니하고 행실을 닦으며 지냈다. 과연 그달부터 태기가 있어 열 달을 채우자,거처하는 방에 오색구름이 영롱하며 향기가 기이한데, 진통끝에 아기를 낳으니 용모 뛰어난 사내아이였다. 삼 일 후에 승상이 들어와 보고 한편 기뻐하였으나 천한 몸에서 나게 된 것을 아까워하였다. 아이 이름을 길동이라 하였다. - P13

부인이 그 까닭을 물으니, 승상이 두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부인이 전날 내 말을 들었으면 이 아이가 부인 몸에서 태어났을 것이니, 어찌 천생이 되었겠소?" - P13

이제야 꿈꾼 이야기를 들려주니, 부인이 실망하고 슬퍼하며말하였다.
"이것 또한 하늘이 정한 운수이니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하오리까." - P14

2.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다 - P15

"대장부가 세상에나매 공맹(孔孟)의 도학(道學)을  배워,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대장의 도장을 허리에 차고 대장의 단상에 높이 앉아 천병만마(千兵萬馬)를 지휘하여,  남으로는 초나라를 치고북으로는 중원을 평정하며 서로는 촉나라를 쳐 업적을 이룬 후에 - P15

얼굴을 기린각(閣)에 빛내고, 이름을 후세에 전함이 대장부의 떳떳한 일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없다‘고 하였는데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세상 사람이 가난하고 천한 자라도 부형(兄)을 부형이라하는데, 나만 홀로 그러지 못하니 내 인생이 어찌 이러할까." - P16

"소인이 대감의 정기를 타 당당한 남자로 태어났으니 이만큼 즐거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평생 서러운 것은 아비를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못하는 것이니, 위아래 종들이 다 저를 천하게 보고, 친척과 오랜 친구마저도 저를 손가락질하며 아무개의 천생이라 이릅니다. 이런 원통한 일이 또어디에 있겠습니까?" - P16

"어머니는 소자와 전생에 연분이 있어 이 세상에서 모자가되었으니, 낳아 길러 주신 은혜가 하늘과 같이 크고 넓습니다. 남아(男兒)가 세상에 나서 입신양명(立身揚名) 하여 위로 제사를 받들고, 부모의 길러주신 은혜를 만분의 하나라도 갚아야할 것인데, 이 몸은 팔자가 사납고 복이 없어 천생이 되어 남의천대를 받으니, 대장부가 어찌 구차하게 근본을 지켜 후회를하겠습니까? 이 몸은 당당히 조선국 병조판서 도장을 차고 상장군이 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산중에 들어가 세상 영욕(榮辱)을 잊고  살려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어머니는 자식의 사정을 살피셔서 아주 버린 듯이 잊고 계시면, 뒷날 소자 돌아와은혜를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니 그렇게만 짐작하고 계십시오." - P17

‘이놈이 본래 평범한 놈이 아니니, 또 천생(生)임을 한탄하여 만일분에 넘치는 마음을 먹으면, 대대로 나라에 충성하고은혜에 보답하였던 일이 쓸 데 없어지고 큰 화(禍)가 우리가문에 미칠 것이로다. 미리 저를 없애어 가문에 닥칠 화를 덜고자 하나 차마 인정에 못할 일이로구나‘ - P23

이때 투자는 비수를 들고 길동이 거처하는 별당에 가서 몸을 숨기고 길동이 잠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까마귀가 창 밖에 와서 울고 가기에 속으로 크게 의심하여 말했다.
"이 짐승이 무엇을 알기에 천기(天機)를 누설하는가?  길동은 실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구나 반드시 뒷날 크게 쓰이리라."
그냥 돌아가려고 하다가 돈에 대한 욕심이 생겨 제 몸 생각을 못하였다. - P26

칼을 들어 머리를 베어특자의 주검 있는 쪽으로 던졌다.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바로 대감 앞에 나아가 이 변괴를 아뢰고 초낭을 베려하다가, 홀연 생각하기를 ‘남이 나를 저버릴지언정 어찌 내가 남을 저버리겠는가. 또 ‘내가 잠깐의 울분으로 어찌 인류(人)을 끊겠는가‘ 하고, 바로 대감 침소에 나아가 뜰아래 엎드렸다. 이때 대감이 잠에서 깨어 문 밖에 인기척이 나는 것을 이상히 여겨 창을 열고 보니, 길동이 뜰아래 엎드렸거늘 불러 말했다.
"지금 밤이 이미 깊었거늘 네 어찌 자지 아니하고 무슨 까닭으로 이러느냐?" - P29

"아버지께서 오늘 저의 오랜 소원을 풀어 주시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으니 바라건대 아버지께서는 만세무강(萬世無疆)하소서." - P32

"소자가 이제 목숨을 구하고자 집을 떠납니다. 어머니는 불효자를 생각지 마시고 계시면 소자 돌아와뵐날이 있을 것이니, 달리 염려 마시고 삼가 조심하여 천금같이 귀한 몸을 보살피십시오." - P32

4. 활빈당 두령으로, 해인사와 함경 감영을 털다 - P36

‘내가 갈 곳 없는 처지가 되어 우연히 이곳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는 나로 하여금 하늘이 그렇게 시키신 것이로다. 이 내몸을 도적 소굴에 맡겨남아의 뜻과 기개를 펴 보리라.‘
길동이 무리 가운데 나아가 이름을 밝히며 말했다.
"나는 경성 홍승상의 아들인데, 사람을 죽이고 목숨을 지키고자 도망하여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오늘날 하늘의 뜻으로우연히 이곳에 이르렀으니, 내가 푸른 숲의 호걸 중 으뜸 장수가 되는 것이 어떻겠소?" - P37

용이 얕은 물에 잠기어 있으니 물고기와 자라가 쳐들어오고, 범이 깊은 숲을 잃으니 여우와 토끼에게 조롱을 당하는구나. 오래지 아니해서 풍운(風)을 얻으면 그 변화를 헤아리기어려우리로다. - P37

"우리가 이제는 백성의 재물은 추호도 건드리지 말고, 각 읍수령과 방백(方伯)들이 백성에게서 착취한 재물을  빼앗아 혹불쌍한 백성을 구제할 것이니, 이 무리의 이름을 ‘활빈당(活貧黨)‘이라 하리라." - P45

"함경 감영에서 군기와 곡식을 잃고 우리 종적은 알지 못하므로 그사이에 애매한 사람이 많이 다칠것이다. 내 몸이 지은 죄를 애매한 백성에게 돌려보내면 사람은 비록  알지 못할지라도 천벌이 두렵지 아니하겠는가?"
길동이 즉시 감영북문에 써 붙였다.

창고의 곡식과 군기를 훔친 이는 활빈당 장수홍길동이라. - P47

하루는 길동이 생각하였다.
‘내 팔자가 무상하여 집에서 도망나와 몸을 숲속 도적 소굴에 의지하게 되었으나 본심이 아니다.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위로 임금을 도와 백성을 구하고 부모에게 영화를 드려야 할것이나, 남의 천대를 분히 여겨 이지경에 이르렀으니 차라리이를 기회로 삼아 큰 이름을 얻어 후세에 전하리라.‘ - P48

"활빈당 장수홍길동이다." - P49

계단 아래 한 사람이 나서며 아뢰었다.
"신이 비록 재주는 없사오나 한 무리의 병사를 주시면 홍길동이란 큰 도적을 잡아 전하의 근심을 덜어 드리겠습니다."
모두가 보니 이는 곧 포도대장 이업이었다. 임금께서 기특하게 여겨 정예 군사 일천 명을 주시니, 이업은 곧바로 임금께하직 인사를 올리고 그날 즉시 출발하였다. 과천을 지나서는각각 군사를 나누어 떠나보내며 약속을 정하였다.
"너희는 이러이러한 곳을 지나 아무 날 문경으로 모여라."
이업 자신은 변장한 차림새로 며칠 후에 한 곳에 이르렀다. - P51

"허망한 일이로다! 삼가입밖에 내지 말라." - P56

길동 등이 땅에 엎드려 아뢰었다.
"불도(佛道)라 하는 것이 세상을 속이고 백성을 혹하게 하여, 땅을 갈지 아니하고 백성의 곡식을 빼앗으며, 베도 짜지 아니하고 백성의 의복을 속여 입으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머리털과 피부를 훼손하여 오랑캐 모양을 숭상하며, 임금과 아비를 버리고 세금을 내지 않으니 이보다 더 불의(不義)한 일이없사옵니다. 군기를 가져간 이유는 신(臣) 등이 산중에 있으면서 병법을 익히다가 만일 난세가 오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임금을 도와 태평을 이루고자 함이오며, 불을 놓되능이 있는곳에는 불길이 가지 않게 하였사옵니다. 신의 아비가 대대로나라의 녹을 받고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여 만분의일이라도 갚지 못할까 염려하거늘, 신이 어찌 외람되게 분에 넘는 마음을 두겠사옵니까? 죄를 따져도 죽음까지 이르지는 않을 텐데, 전하께서 조정의 신하들이 헐뜯는 소리만 들으시고이렇듯 크게 노하시니 신이 형벌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먼저 스스로 죽사오니 노여움을 더시기 바라옵니다."
여덟 길동이 한데 어우러져 죽었다. 주위에서 이상하게 여겨 자세히 보니 진짜 길동은 간 데 없고 허수아비 일곱뿐이었다. 임금께서 길동의 속임수를 보고 더욱 노하셔서 경상 감사에게 공문을 내려 길동을 잡을 것을 더욱 재촉하셨다. - P66

"이놈의 재주는 인력으로 잡지 못하겠구나. 민심이 이렇듯요동하고 그 재주가 기특하도다. 차라리 그 재주를 취하여 조정에 두어야겠다."
병조판서 직책을 내어 걸고 길동을 부르시니, 길동이 가마를 타고 하인 수십 명을 거느리고 동대문으로 들어왔다. 병조하인이 호위하여 대궐 아래에 이르니 길동이 엄숙히 절하고 아뢰었다.
"천은이 망극하여 분에 넘치는 은혜로 대사마(大司馬)》에오르니, 망극한 신의 마음이성은을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할까황공하옵니다."
길동이 돌아갔다. 이후로는 길동이 다시 소란을 일으키는 일이 없었다. 임금은 각도에 길동을 잡으라고 내린 명을 거두셨다.
39) 병조판서의 별칭. - P73

10. 율도국 정벌 - P94

근처에 한 나라가 있으니 이름은 율도국이었다. 중국을 섬기지 아니하고 수십 대를 자손 대대로 이어 오며 널리 덕으로다스리니,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넉넉하였다. 길동이 군사들과 의논하며 말했다.
"우리가 어찌 이 섬만 지키며 세월을 보내겠는가? 이제 율도국을 치고자 하니 각각 소견이 어떠한가?"
모든 사람이 즐겨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P94

의병장 홍길동은 삼가 글월을 율도왕좌하(座下)에 드리오니, 나라는 한 사람이 오래 지키지 못하는 것이오. 이런 까닭으로 은나라의 시조성탕은 하나라의 걸왕을 치고 주나라의 시조 무왕은 은나라의 주왕를 쫓아냈으니, 다 백성을 위하여 어지러운 시대를 평정했던 것이오. 이제 의병 이십만을 거느려 칠십여 성을 항복시키고 이에 이르렀으니, 왕은 대세를 능히 감당할 만하면 자웅을 겨루어 보고, 세력이 딸리면 일찍 항복하여 하늘의 명을 받으시오.
다시 위로하여 말했다.
백성을 위하여 쉬 항복하면 한 지방의 벼슬을 맡겨 그대의사직(社稷)을 망하게 하지는 않겠소. - P95

"우리 대왕은 선도(仙道)를 닦아 백일승천(白日昇天)하셨다." - P105

아름답구나! 길동이 행한 일들이여! 자신이 원한 것을 흔쾌하게 이룬 장부로다. 비록 천한 어미 몸에서 태어났으나 가슴에 쌓인 원한을 풀어버리고, 효성과 우애를 다 갖춰 한 몸의운수를 당당히 이루었으니, 고(古)에 희한한 일이기에 후세 사람에게 알리는 바이다. - P105

"소인이 평생 서러워하는 바는, 소인도 대감의 정기를 받아당당한 남자가 되었으니, 아버님이 낳으시고 어머님이 기르신은혜가 깊은데, 그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하고 그 형을 형이라못하니,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길동이 눈물을 흘려 적삼을 적셨다. 공이 다 듣고 나서 비록 길동이 불쌍하지만, 그 뜻을 위로하면 마음이 방자해질 것을 염려하여 크게 꾸짖었다.
"재상 집안에 천한 종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이 너뿐이 아니거늘, 네 어찌 방자함이 이와 같으냐? 앞으로 이런 말을 또다시 하면 내 정녕 너를 눈앞에 두고 보지 않겠느니라." - P112

"옛날 장충의 아들 길사(吉山)은 천한 소생이로되,  열세살에 그 어미를 이별하고 운봉산으로 들어가 도를 닦아서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전하였으니, 소자도 그를 본받아 세상을 벗어나려 합니다. 어머니는 안심하시고 뒷날을 기다리십시오. 근래 곡산 어미의 행색을 보니 상공의 총애를 잃을까 ...

2) 장길산 17세기 도적떼의 우두머리, 홍길동전』이 세종대왕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길동이 17세기에 활약한 장길산을 흠모하는 것은 시간적 오류임. - P113

"나도 너의 품은 한을 짐작하니, 오늘부터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형을 형이라 부르는 것을 허락하겠다."
길동이 다시 절을 하며 말했다.
"소자의 가슴 절절한 한을 아버지께서 풀어 주시니 죽어도여한이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아버지께서는 만수무강하소서." - P121

이후로 길동은 스스로 호를 활빈당(活貧黨)이라 짓고 조선팔도를 다니며 각읍수령이 의롭지 못하게 모은 재물은 빼앗고, 지극히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은 도와주었다. 백성을 해치지 아니하고 나라에 속한 재물은 추호도 건드리지 않았다. 이윽고 도적들이 길동의 뜻한 바를 알고 따랐다. - P126

아무날 돈과 곡식을 도적질한 자는 활빈당의 우두머리 홍길동이라.
하기에 함경 감사가 군사를 출동하여 그 도적을 잡으려고하였다. - P127

요사스러운 신하 홍길동은 아무리 해도 잡히지 않을 것이나, 병조판서 벼슬을 내려주시면 잡히겠나이다.
임금께서 그 방을 보시고 신하들을 모아서 의논하시니, 신하들이 말했다.
"이제 도적을 잡으려고 하다가 잡지 못하고 도리어 병조판서 벼슬을 내리는 것은 이웃 나라에 얼굴을 못 들 정도로 수치스러운 일이옵니다." - P141

"길동의 신기한 재주는 고금(古今)에 드물도다. 길동이 지금조선을 떠나겠다고 하였으니, 다시는 폐를 끼칠 일이 없을 것이다. 길동이 비록 수상하기는 하나 일단 장부다운 호쾌한 마음을 가졌으니 염려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팔도에 사면의 글을 내려 길동 잡는 일을 거두셨다. - P143

차설, 율도 왕이 삼년상을 마치니 대비가 이어서 세상을 떠났고 역시 아버지의 무덤 옆에 안장한 후 삼년상을 마쳤다. 왕이 삼자 이녀를 낳으니, 장자와차자는 백 씨 소생이고, 삼자와 차녀는 조 씨 소생이었다. 장자 현으로 세자를 삼고 나머지는 다 군(君)으로 봉하였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삼십 년만에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니 나이 일흔두 살이었다. - P154

왕비가 이어서 죽으니 선능(先陵)에 안장한 후,  세자가 즉위하여 대를 이어 태평 성세를 누렸다. - P155

『홍길동전』은 최초의 국문소설이자 영웅소설이고 사회소설이다. 이 작품은 연산군 시절 실존 인물인 도적떼의 두령 홍길동을 소재로 하여 당시 사회의 실상을 낱낱이 보여 준다. 이작품의 지은이가 허균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지만, 허균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다수 의견이다. - P157

허균(許筠, 1569~1618)은 조선이 낳은 천재 중의  천재다. 허균이 탁월한 시문을 지은 것은 그의 뛰어난 자질에 덧붙여 조선 중기 문화적 성취가 그 가문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화담 서경덕(徐敬德, 1498~1546)의 수제자였고, 삼당시인(詩人)인  손곡 이달, 명필 한석봉,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이 자주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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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탐사는 틴 성당에서 시작했다. ‘구시가‘ 한복판 언덕에 있어서 첨탑이 시내 어디서나 보일 뿐 아니라 여행안내서에 나오는 명소들이 근처에 몰려 있기 때문에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외관은고딕 양식이고 내부는 화려한 바로크 스타일로 치장한 틴 성당은 프라하의 자랑이다.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에 비하면 오래되고 아담한시골 성당‘에 지나지 않지만, 그 옛날 프라하에서는 그 정도 규모 성당을 짓는 일도 버거웠다. - P172

그런데 천문학자 티코브라헤(Tycho Brahe, 1546-1601) 의 관은 특이한 존재였다. - P174

브라헤는 덴마크 사람이고 또 과학자였는데 왜 여기 묻었을까? 그가 합스부르크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초대를 받고 프라하에와서 생애의 마지막 두 해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 P175

브라헤는 망원경이 없던 시대에 천문학자로 활동하면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관측 자료를 작성했다. 브라헤의 조수였던 요하네스 케플러 (Johannes Kepler, 1571-1630)는 그 자료를 활용해 태양계 행성의 타원형 궤도, 공전속도, 공전주기에 관한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보편적 물리법칙을 세운 뉴턴 (Isaac Newton, 1642-1727)의 시대를 예비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가톨릭의 세계관을 무너뜨린 외국인 과학자를 왕실 성당에 안장했으니, 프라하 사람들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었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 P175

체코공화국은 인구는 2020년 기준 1,100만 명에 조금 못 미친다.
국민 대부분이 체코인이며 소수의 모라비아인과 슬로바키아인, 독일인과 집시가 거주한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연방공화국을 형성했으며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하자 슬로바키아가 분리 독립했다. 종교는로마 가톨릭이 강세이지만 무신론자가 국민 절반이나 된다. - P178

슬로바키아(동), 독일(서), 오스트리아(남), 폴란드(북)에 둘러싸인 내륙 국가로 국토는 대한민국의 3/4 정도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5천 달러에 육박한다. 화폐는 ‘코루나‘이지만 프라하에서는 큰 불편 없이 유로화를 쓸 수 있었다. 체코의 전통산업은 농업과 목축업이었으나 19세기부터 철강·기계·전기·자동차·화학·의류 등 제조업이 꾸준히발전했다. 인구 130 만 명인 프라하는 제조업과 관광업·문화산업의중심으로서 국내총생산의 25%를 차지하며 1인당 역내총생산(GRDP)이 5만 달러나 된다. 맥주와 유리공예품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경제적으로 중요하진 않다. - P179

나는 얀 후스를 존경한다. 후스를 모른다고 해서 프라하 여행에지장이 생기진 않지만 알면 프라하의 공간과 체코 사람들의 정서를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고등학생 시절 세계사 교과서에서 얀 후스(Jan Hus, 1372-1415) 라는 ‘종교개혁가‘의 이름을 처음 보았다. 그렇지만후스가 그저 종교개혁가로서 프라하의 광장에 서 있는 건 아니다. 후스의 동상은 보헤미아 민족주의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담고 있다. 그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았고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럴 의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보헤미아와 유럽의 역사를 바꾸었다. - P181

후스는 프라하를 떠나 시골에 머물며 논문을 쓰다가 함정에 빠져독일 남부 콘스탄츠에서 붙잡혔다. 지하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고 종교 법정에 끌려나갔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1415 년 마지막 숨을내쉬는 순간까지 큰 소리로 기도하면서 화형을 당했다. - P183

후스의 영향력은 죽은 뒤에 더 커졌다. 보헤미아에 ‘후스파‘라는정치결사가 출현해 낡은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1419년 7월 30일 유명한 사건이 일어났다. 급진 후스파 군중이 시청사에서 시장과 판사를 포함해 보헤미아왕의 신하 일곱 명을 창밖으로 던지 죽인 것이다.
천문시계를 보려고 온종일 관광객이 모여드는 바로 그곳에서 벌어진 그 사건을 ‘제1차 프라하 창문투척사건‘이라고 한다. - P183

"영성체 의식때 일반 신도들이 신부와 같이 빵과  포도주를 먹게 하라. 설교의 자유를 인정하라.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정치 개입을 금지하라. 사제도범죄를 저지르면 처벌하라." - P184

전쟁의 성격을 규정하기 어려운 탓에 그저 ‘30년전쟁‘
이라고 하는 그 국제전은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끝이 났고 유럽의 봉건체제는 막을 내렸다. - P185

베스트팔렌조약은 종교 선택의 자유를 인정했다. 루터파와 칼뱅파를 비롯한 개신교가 국제적 공인을 받았고 신성로마제국에 속했던국가들이 저마다 영토주권과 외교권을 확보했다. 독일의 패권이 무너져 프랑스가 알자스 지방을 차지했고, 스웨덴은 발트해 연안 지역을 획득했으며,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독립했다. 유럽에 국민국가의시대가 열린 것이다. 보헤미아 민족주의에 불을 질렀던 얀 후스의 사상은 공화국의 시대가 된 지금도 보헤미아 민중의 가슴에 흐르고 있다. 눈길 주는 이가 별로 없는 얀 후스의 동상 앞에서 나는 잠시 옷깃을 여미고 예를 갖추었다. 부당한 특권을 누리며 민중을 억압하고 부패를 저질렀던 종교권력을 향해 날 선 비판을 퍼부었고 민중과 소통하려고 체코 말로 설교했던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 P185

프라하 구시가는 ‘성(聖)과 속(俗)의 칵테일‘이다. 사람이 지닌 모든 종류의 욕구와 소망과 신념을 다 품어준다. 종교건축물이 많아서겉보기에는 ‘성스럽다.‘ - P188

그래서 ‘보헤미안‘이라는 말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보헤미아인에 해당하는 체코 말은 ‘체키‘인데 뜻은 정반대에 가깝다. ‘체키‘는 슬로바키아인이나 모라비아인 같은 소수민족을 제외한 보헤미아의 체코인을 가리키는 체코 말이고, ‘보헤미안‘은 독일인과 집시를 비롯해체코인이 아닌 보헤미아 사람을 지칭하는 외국어였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보헤미안의 뜻이 달라졌다. - P188

유럽 사회의 주류로 지위를 굳힌부르주아 계급의 틀에 박힌 도덕 규범이나 행동 양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한 가치관에 따라 자유분방하게 활동하는 지식인과 예술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주로 시인·소설가. 화가. 음악인이었다. - P189

보헤미안은 사회의 지배적인 규범과 관습을 추종하지 않았다. 스스로 옳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열정을 표현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생계 불안과 사회적편견에 굴복하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다. 1960년대 서구사회에 강력한 문화적 충격을 주었던 히피(hippie)는 긴 머리카락과제멋대로 기른 수염, 미니스커트, 맨발, 샌들, 대마초 같은 것으로 자신의 내면을 드러냈다. 다음 세대인 여피(yuppie, Young Urban Professionalhippie)는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명품과 사치품을 과시적으로 소비했다. 디지털혁명 시대를 선도해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색바랜 청바지와 낡은 가방을 들고 다녔던 이들은 보보스(bobos, Bourgeois Bohemians) 라고 한다. 모두가 보헤미안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 P189

프라하성지구에는 해마다 관광객이 2백만 명이나 오는데 이 골목을 그냥 지나치는 이는 드물다. 뭐 대단한 게 있어서가 아니다.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처럼 이곳도 주거환경이 나빠서 임대료가 저렴해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는데 예술가 또는 예술가의 지인이 더러 섞여 있었다. 황금골목을 관광의 핫플레이스로 만든 사람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다. 1916년 카프카의 누이 하나가 골목의22번 집에 세를 들었는데 그해 겨울 동안 카프카가 머물면서 글을 썼다. - P220

카프카가 오늘의 황금골목을 본다면 뭐라고할까? 당황스러워서프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인생을 생각하니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볼 때보다 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독일어를 쓰는라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카프카는 평생 불운과 고독에 짓눌리며 살았다. - P221

다. 한때 연인이었던 도라 디아만트에게 맡긴 원고와 편지는 나치 비밀경찰이 빼앗아 없애버렸다. 전기작가이자 절친이었던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글을 출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 P221

카프카는 《변신》·《유형지에서》·《심판》·《성》 같은 작품을 삼십 대에 썼다. 그는 자신의 글이 인간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가 되기를 바랐다. 카프카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가 자신의 의도를  초지일관 밀고 갔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 P221

위대한 작품을 남겼으나 외로움과 고통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던 사람, 그 사람이 머물렀다는 것 말고는 아무 특별함도 없는 곳에서 지구 곳곳에서온 관광객들이 해맑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카프카가 옳았다. 우리의 삶과 우리가 만든 세상은 역설과 부조리로 가득하다. - P223

강탈한 범죄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보헤미아 민중은 그를 농민들을지켜준 의인으로 평가했다. 탐관오리 조병갑, 고부 민란, 동학혁명,
녹두장군 전봉준이 떠올랐다. 이 사건이 두고두고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는데, 드보르작과 더불어 체코의 국민음악가로 사랑받는 스메타나 (Bedrich Smetana, 1824-1884)의 오페라 <달리보르>가 대표 사례라할 수 있다. - P223

달리보르카에 전시해둔 고문도구,
달리보르와 직접 관련되었는지 여부는 모른다. - P224

스트라호프 스타디움 사이클 경기, 군인체육대회를 열었다. 체제 전환 직후였던 1990년의 롤링 스톤즈 콘서트에는 10만 관객이 모였고 본조비, 핑크 플로이드, U2도 공연을 했다.  - P238

프라하 자체는 대단했다. 프라하는 역사의 상처를 감추지 않았고, 그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지난날의 상흔은 지난 일로정리하고 오늘은 오늘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그렇게 하려고 성과 속의 공존을 허락한다. 프라하의 공기는 자유와 관용의 정신을 품고 있는 듯했다. ‘심하게 지나치지만 않다면 뭘 해도 괜찮아. 사람들이 프라히를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도시여서가 아닌가 싶었다. - P241

가해자의 상처
드레스덴은 한국에 널리 알려진 도시가 아니었다. 2014년 3월 박근혜 대통령이 드레스덴 공대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이라는 강연을 했을 때 이름을 처음 들은 이가 많을 것이다. 그 선언의 내용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달리 할 수 있겠으나 장소 선정만큼은 이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좋았다고 생각한다. 전쟁을 종식하고평화를 이루자는 호소를 하기에 드레스덴만큼 적절한 도시를 찾기는어렵기 때문이다. - P247

영국과 미국 공군은 1945년 2월 13일 밤부터 사흘 동안 네 차례번갈아 드레스덴을 ‘융단폭격‘했다. 그때마다 고열의 화염폭풍이 도심을 집어삼켰다. 군수품 공장과 기차역뿐 아니라 주택 · 상점 · 호텔 · 술집 · 교회 · 성당. 병원 · 오페라하우스 · 영화관 · 동물원 · 학교 · 엘베강의 선박까지 도심 반경 3킬로미터 안에 있던 모든 것이 터지고 녹고 부서지고 불탔다. 사망자만 20만 명이라며 연합국을 비난한 나치 정부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 폭격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몇인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전쟁이 끝나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무너진 건물에서 시신이 나왔고 지하 방공호 한군데서 1천여 명의 시신을 찾은 일도 있었다. 체코 접경지 수데텐란트(Sudetenland, 보헤미아의 독일 국경 인접 지역)에서 쫓겨나 드레스덴에임시 거처를 마련했던 피난민들은 거주자 통계에 잡히지도 않았다.
당시 시신을 수습한 사망자만 3만5천 명이 넘었다. 독일이 ‘엘베의 피렌체‘라고 자랑했던 드레스덴에는 공장 몇 개 말고는 전쟁과 관계있는 시설이 없었는데도 연합국 공군은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 P248

드레스덴 폭격 50주년인데도 독일 정부는 희생자 추모 행사를하지 않았고 텔레비전 방송은 짤막한 뉴스만 내보냈다. 기사를 보여주며 물어보았더니 독일 친구가 나지막이 말했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내놓고 말하지 않는 사건이야. 우린 그보다 더 못된 짓을 훨씬많이 했거든. 홀로코스트만 있었던 게 아니야. 코번트리(Coventry) 같은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어. 혹시라도 그 사건 가지고 막 떠드는사람 만나면 조심해야 해. 올드나치거나 네오나치일지 모르니까." - P248

코번트리는 잉글랜드 내륙의 작은 도시다. 재규어를 비롯한 고급 승용차 공장이 있어서 전쟁 때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1940년 11월 14일밤 독일 공군이 코번트리를 폭격해 수천 명의 민간인을 살상했다. 코번트리 시민들은 그때 완전히 무너진 중세 성당을 그 상태로 보존하고 바로 옆에 새 성당을 지었다. 드레스덴은 ‘가해자의 몸에 남은 상흔‘이었다. 독일 사람들은 그 상흔을 남몰래 만질 뿐 드러내 보이지않으려 했다. - P249

속도는 공간을 말살한다 - P252

집은 건축주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 종교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건축양식은 건축기술의 발전, 활용할 수 있는 건축자재의 변화,
건축주가 동원할 수 있는 재정의 규모 등 여러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 건축주의 철학과 욕망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 P258

원래 성당이었던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웅장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중세유럽의 대세였던 고딕 양식 성당들은 그렇지 않다. 높고 날카로운 첨탑과 장중한 스테인드글라스로 ‘경외심‘ 또는 ‘공포감‘을 강요한다. 고딕 양식은 가톨릭교회가 세속권력과 결탁하거나 스스로 세속권력을 능가하는 권력이었던시대의 지배적 건축양식이다. 그들이 그런 집을 지은 것은 민중이 그곳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복종하기를 원해서였을 것이다. - P258

성모교회, 벽면의 검은 점은 폭격을 맞은 돌이다. - P261

그 집들은 사회주의체제의 문화 유전자를 지닌 ‘화석‘이었다. 집은 지은 사람의 철학과 건축 시점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관한 정보를담고 있다. 동독의 사회주의자들은 ‘계급 착취의 철폐‘ ‘만인의 평등‘
‘인민의 주거 안정‘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고 ‘자유‘ ‘개성‘ ‘예술적 취향‘ 같은 것은 없애야 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취급했다. 게다가소련군의 보호를 받으며들어선 동독 정부는 돈이 없었다. 이런 철학과 환경은 동독의 모든 도시에서 동일한 ‘건축학적 변화‘를 강제했다.
최소 비용을 들여 인민에게 최대 주거 공간을 제공하는 데 적합한 고층 아파트를 지은 것이다. - P267

두 번째 밤을 지내고 드레스덴을 떠나왔다. 빈·부다페스트 · 프라하처럼 아름답거나 볼거리가 많지 않았는데도  드레스덴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독일 변방의 작은 도시지만 문명사의 여러 시대와 그시대를 이끌었던열망, 그 열망이 부른 참혹한 비극, 그 참극을 딛고이루어낸 성취를 품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드레스덴은 작지 않다. 어마어마하게 크다. - P312

성모교회는 종교적 신념과 열정이 삶의 동력이 되었던 시대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자유를 허락받았던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의 드레스덴은 문화예술을 꽃피웠지만 나치의 전체주의 폭력에 숨이 막혀 쓰러졌고연합군의 폭격에 생명이 끊어졌다. 공산주의자들이 그 폐허 위에 세운 공동주택과 문화궁전은 신념의 무모함과 열정의 허망함을 증언하고 있었다. 재통일을 이루어 독일연방공화국 작센주의 수도가 된 드레스덴 시민들은 성모교회를 재건함으로써 부활의 서사를 완성했다. - P312

성모교회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을 믿지 마. 너희는 완전한 진리를 알 수 없어. 너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관용뿐이야. 나와 다른 사람, 나와 다른 생각,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이지. 그러면 모두가 자유로워질 거야.‘
다시 가면 또 촛불 하나 켜고 기도하고 싶다. 인간의 부족 본능이 과학과 손잡고 저질렀던 야만의 상처가 다 아물기를 관용의 정신이 더욱 널리 퍼져 인간은 더 자유롭고 세상은 더 평화로워지기를!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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