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에 말씀이 있었다." 나는 계속 말했다. "그렇다면 말에서 신이 태어날 수도 있다는 뜻이지."
일찍이 인간은 믿었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그러다 어느 순간 말했다. 신은 죽었다고. 그래서 세계와 인간만이 존재한다고.
신이 죽을 수 있다면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신이 없는 세계에서 인간이 신을 잉태하면 된다. 지금이야말로 말이라는 ‘정보’를 본떠 만들어진 이 세계에 ‘정보’에 의해 창조된 신을 만들어야 한다.
지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키에 어울리는 새로운 신을.
나는 예언자였던 걸까, 죄인이었던 걸까. 말이 신을 만든다면, 사람이 신을 만든다면 사람은 신을 쓰러뜨릴 수도 있는 걸까. 신의 잘못을 메시아가 바로잡을 수도 있는 걸까.
나의 신이여, 나는 믿고 있습니다. 이 손에 새겨진 피의 표식은 성흔이 틀림없다고.
∷ 가모 저택 사건
역사가 먼저냐, 인간이 먼저냐. 영원한 수수께끼지. 그렇지만 난 이미 결론을 내렸어. 역사가 먼저야. 역사는 자기가 가려는 쪽을 지향해. 그것을 위해 필요한 인간을 등장시키고, 필요 없게 된 인간은 무대에서 내리지. 때문에 개개의 인간이나 사실을 대체하더라도 상관없는 거야. 역사는 스스로 보정하고 대역을 세우면서 사소한 움직임이나 수정 등을 모두 포용할 수 있거든. 그러면서 내내 흘러가는 거지.
∷ 이유
노부코는 언젠가 국어선생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람은 ‘보다’라는 단순한 동작을 못한다고 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관찰하다’, ‘내려다보다’, ‘재보다’, ‘노려보다’, ‘쳐다보다’처럼 특정한 의미가 있는 눈동자 동작뿐이고, 그냥 단순히 ‘본다’는 동작은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과연 노부코를 포착한 된장국 아저씨의 눈동자는 그가 아니면 의미를 알 수 없는 어떤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 누군가
어린애는 모든 어둠 속에서 괴물의 모습을 찾아낸다. 불쑥 내 머릿속에 그런 말이 떠올랐다. 어디서 읽은 구절일까? 육아 관련 책인가? 그래서 부모들은 애들이 뭔가를 두려워할 때 무시하고 웃어넘겨서는 안 된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행복 속에서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까 불안해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배짱이 필요한 걸까. 그게 양동이 하나의 분량이라고 한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건 한 컵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 컵이 양동이로 자라리라는 전망도 없다. 결혼한 지 칠 년. 나는 언제나 내 컵을 소중히 들고 다녔다. 작지만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낫다.
∷ 화차
특히 젊은 사람들이 이런 속임수에 걸려들기 쉽습니다. 소비자신용은 젊은 층 이용자 개척에 힘을 쏟고 있으니까요. 어느 업계나 마찬가지겠지만, 기업은 고객에게 달콤한 말밖에 안 합니다. 이쪽이 현명해지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현 상태에서는 그 부분이 뻥 뚫려 있는 겁니다. 대형 도시은행에서 학생용 신용카드를 발행한 지 올해로 딱 이십 년째인데, 그 이십 년 동안 어느 대학교가, 고등학교가, 중학교가 이 신용사회에서의 올바른 카드 사용법을 지도했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하는 일인데 말이죠. 도립 고등학교에서는 졸업을 앞둔 여학생들을 모아 메이크업 강습을 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멋을 부릴 여유가 있으면 신용사회로 나가는 데 필요한 기초 지식을 가르치는 강습도 같이 해야 옳은 거 아닙니까?
∷ 낙원
아카네는 강한 에너지와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카네의 자아의 중심에는 한결같은 욕구가 있었다. 그 어느 것이나, 잘만 펼치면 아카네가 남들 못지않은 성숙한 여성으로 커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요소였을 것이다.
∷ 우리 이웃의 범죄
세상에는 불공평한 일 따위는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 말이다. 선생님도 부모님도 "노력해라, 노력하면 보답받을 거야"라고 하지만, 말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지 않은 이유는 본인들 삶 주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잔뜩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것도 모르고 "노력하자, 노력하면 보답받지 못할 일은 없어"라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자라 버리면, 어른이 되고 나서 자기를 차고 월급을 더 많이 받는 남자와 결혼해 버린 옛 애인을 죽여서는 보스턴백에 쑤셔 넣어 내다버리는 전개가 되는 거다.
∷ 레벨 7
닭과 달걀이다. 어느 쪽이 먼저지? 어린 시절의 다케조가 자신이 착한 아이가 되고 싶어 하며, 장난친 죄를 누군가 다른 친구에게 덮어씌운 게 발단일까. 아니면 두뇌가 명석하고 ‘착한 아이’인 다케조를 주위에서 시기하며 약간 따돌린 것으로부터 모든 게 시작되었을까?
어느 쪽이든 먼 옛날 일이다.
∷ 쓸쓸한 사냥꾼
그동안 가게가 큰 적자를 내지 않고 굴러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가바노 유지로가 생전에 확보해 둔 손님들이 좋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과 ‘즐거움을 주는 책만 취급한다’고 하는 경영 방침 덕분이었으리라.
책이란 함부로 남에게 선물하는 게 아니지. 뭔가를 준다고 하는 것은 강제하는 일이기도 하잖아? 관심 없는 물건이라면 받는 입장에선 오히려 부담이지. 대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남에게 권하기는 해도 선물은 하지 않는 것 같은데.
∷ 이름 없는 독
이 넓은 세상에는 우리의 상식 범위 안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를 가지고, 그 사고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막연히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특히 도시에서 살아가다 보면 싫어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이렇게 폭발적으로, 바로 옆에 출현하게 되면 아무래도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게 된다. 화가 나면서도 공포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액션으로 연결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 마술은 속삭인다
"마모루, 자물쇠라는 건 말이지, 다름 아닌 사람의 마음을 지키는 거란다."
네 아버지는—할아버지는 슬픈 듯이 말했다.
"자물쇠를 따는 기술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 여벌 열쇠 하나도 혼자서 못 만드는 사람이었지. 그런데도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다른 사람의 돈에 손을 대고 말았어. 그건 많은 사람들이 맡겨 놓은 마음의 자물쇠를—그걸 ‘신용’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만—멋대로 여는 짓이었지.
∷ 대답은 필요 없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은 있어.
태어났을 때부터 따라붙어 다니는 읽기 힘든 희귀한 성姓처럼.
아무리 연습해도 극복할 수 없는 서투름과 같이.
어쩔 수가 없는 것은 있어.
불문율
"지하도의 비라."
아사코는 몸에서 접시를 떼고 그녀 쪽으로 돌아섰다.
"계속 지하에 있으면 비가 내려도, 줄곧 내려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 그런데 어느 순간 별생각 없이 옆 사람을 보니 젖은 우산을 들었어. 아, 비가 내리는구나, 그때 비로소 알지. 그러기 전까지 지상은 당연히 화창하리라고 굳게 믿었던 거야. 내 머리 위에 비가 내릴 리가 없다고."
어수룩하지, 하고 그녀는 말했다.
"배신당할 때 기분이랑 참 비슷해."
∷ 고구레 사진관
그런데 요즘 들어 다시 슬금슬금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아예 ‘재미 삼아’ 하는 거라고 익스큐스를 끝낸 텔레비전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나 명백하게 픽션인 영화가 단서가 되었다. 70년대 당시의 열광과는 다른 종류의 좀 더 오락에 가까운 취급 방식이긴 하지만 여전히 심령사진이나 심령 영상은 존재하며 사진에 유령이 찍히는 일이 있다는 ‘상식’도 건재하다. 요즘에는 오로지 인터넷으로만 정보가 퍼져나가 도시 전설화하는 패턴이 많다고 한다.
∷ 스나크 사냥
아 참, 『스나크 사냥』이란 이야기 아세요? 이것도 슈지 씨가 해준 이야기예요. 루이스 캐럴이란 사람이 쓴 아주 이상한, 긴 시 같은 건데 스나크라는 것은, 그 이야기에 나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 이름이에요.
그리고 그걸 잡은 사람은 그 순간에 사라져 버리죠. 마치 그림자를 죽이면 자기도 죽는다는 그 무서운 소설처럼.
"우리는 피해자끼리 서로 죽이고 상처 입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라고요.
게이코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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