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에 말씀이 있었다." 나는 계속 말했다. "그렇다면 말에서 신이 태어날 수도 있다는 뜻이지."

일찍이 인간은 믿었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그러다 어느 순간 말했다. 신은 죽었다고. 그래서 세계와 인간만이 존재한다고.

신이 죽을 수 있다면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신이 없는 세계에서 인간이 신을 잉태하면 된다. 지금이야말로 말이라는 ‘정보’를 본떠 만들어진 이 세계에 ‘정보’에 의해 창조된 신을 만들어야 한다.

지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키에 어울리는 새로운 신을.

나는 예언자였던 걸까, 죄인이었던 걸까. 말이 신을 만든다면, 사람이 신을 만든다면 사람은 신을 쓰러뜨릴 수도 있는 걸까. 신의 잘못을 메시아가 바로잡을 수도 있는 걸까.

나의 신이여, 나는 믿고 있습니다. 이 손에 새겨진 피의 표식은 성흔이 틀림없다고.

∷ 가모 저택 사건

역사가 먼저냐, 인간이 먼저냐. 영원한 수수께끼지. 그렇지만 난 이미 결론을 내렸어. 역사가 먼저야. 역사는 자기가 가려는 쪽을 지향해. 그것을 위해 필요한 인간을 등장시키고, 필요 없게 된 인간은 무대에서 내리지. 때문에 개개의 인간이나 사실을 대체하더라도 상관없는 거야. 역사는 스스로 보정하고 대역을 세우면서 사소한 움직임이나 수정 등을 모두 포용할 수 있거든. 그러면서 내내 흘러가는 거지.

∷ 이유

노부코는 언젠가 국어선생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람은 ‘보다’라는 단순한 동작을 못한다고 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관찰하다’, ‘내려다보다’, ‘재보다’, ‘노려보다’, ‘쳐다보다’처럼 특정한 의미가 있는 눈동자 동작뿐이고, 그냥 단순히 ‘본다’는 동작은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과연 노부코를 포착한 된장국 아저씨의 눈동자는 그가 아니면 의미를 알 수 없는 어떤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 누군가

어린애는 모든 어둠 속에서 괴물의 모습을 찾아낸다. 불쑥 내 머릿속에 그런 말이 떠올랐다. 어디서 읽은 구절일까? 육아 관련 책인가? 그래서 부모들은 애들이 뭔가를 두려워할 때 무시하고 웃어넘겨서는 안 된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행복 속에서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까 불안해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배짱이 필요한 걸까. 그게 양동이 하나의 분량이라고 한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건 한 컵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 컵이 양동이로 자라리라는 전망도 없다. 결혼한 지 칠 년. 나는 언제나 내 컵을 소중히 들고 다녔다. 작지만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낫다.

∷ 화차

특히 젊은 사람들이 이런 속임수에 걸려들기 쉽습니다. 소비자신용은 젊은 층 이용자 개척에 힘을 쏟고 있으니까요. 어느 업계나 마찬가지겠지만, 기업은 고객에게 달콤한 말밖에 안 합니다. 이쪽이 현명해지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현 상태에서는 그 부분이 뻥 뚫려 있는 겁니다. 대형 도시은행에서 학생용 신용카드를 발행한 지 올해로 딱 이십 년째인데, 그 이십 년 동안 어느 대학교가, 고등학교가, 중학교가 이 신용사회에서의 올바른 카드 사용법을 지도했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하는 일인데 말이죠. 도립 고등학교에서는 졸업을 앞둔 여학생들을 모아 메이크업 강습을 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멋을 부릴 여유가 있으면 신용사회로 나가는 데 필요한 기초 지식을 가르치는 강습도 같이 해야 옳은 거 아닙니까?

∷ 낙원

아카네는 강한 에너지와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카네의 자아의 중심에는 한결같은 욕구가 있었다. 그 어느 것이나, 잘만 펼치면 아카네가 남들 못지않은 성숙한 여성으로 커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요소였을 것이다.

∷ 우리 이웃의 범죄

세상에는 불공평한 일 따위는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 말이다. 선생님도 부모님도 "노력해라, 노력하면 보답받을 거야"라고 하지만, 말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지 않은 이유는 본인들 삶 주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잔뜩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것도 모르고 "노력하자, 노력하면 보답받지 못할 일은 없어"라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자라 버리면, 어른이 되고 나서 자기를 차고 월급을 더 많이 받는 남자와 결혼해 버린 옛 애인을 죽여서는 보스턴백에 쑤셔 넣어 내다버리는 전개가 되는 거다.

∷ 레벨 7

닭과 달걀이다. 어느 쪽이 먼저지? 어린 시절의 다케조가 자신이 착한 아이가 되고 싶어 하며, 장난친 죄를 누군가 다른 친구에게 덮어씌운 게 발단일까. 아니면 두뇌가 명석하고 ‘착한 아이’인 다케조를 주위에서 시기하며 약간 따돌린 것으로부터 모든 게 시작되었을까?

어느 쪽이든 먼 옛날 일이다.

∷ 쓸쓸한 사냥꾼

그동안 가게가 큰 적자를 내지 않고 굴러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가바노 유지로가 생전에 확보해 둔 손님들이 좋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과 ‘즐거움을 주는 책만 취급한다’고 하는 경영 방침 덕분이었으리라.

책이란 함부로 남에게 선물하는 게 아니지. 뭔가를 준다고 하는 것은 강제하는 일이기도 하잖아? 관심 없는 물건이라면 받는 입장에선 오히려 부담이지. 대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남에게 권하기는 해도 선물은 하지 않는 것 같은데.

∷ 이름 없는 독

이 넓은 세상에는 우리의 상식 범위 안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를 가지고, 그 사고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막연히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특히 도시에서 살아가다 보면 싫어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이렇게 폭발적으로, 바로 옆에 출현하게 되면 아무래도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게 된다. 화가 나면서도 공포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액션으로 연결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 마술은 속삭인다

"마모루, 자물쇠라는 건 말이지, 다름 아닌 사람의 마음을 지키는 거란다."

네 아버지는—할아버지는 슬픈 듯이 말했다.

"자물쇠를 따는 기술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 여벌 열쇠 하나도 혼자서 못 만드는 사람이었지. 그런데도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다른 사람의 돈에 손을 대고 말았어. 그건 많은 사람들이 맡겨 놓은 마음의 자물쇠를—그걸 ‘신용’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만—멋대로 여는 짓이었지.

∷ 대답은 필요 없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은 있어.

태어났을 때부터 따라붙어 다니는 읽기 힘든 희귀한 성姓처럼.

아무리 연습해도 극복할 수 없는 서투름과 같이.

어쩔 수가 없는 것은 있어.

불문율

"지하도의 비라."

아사코는 몸에서 접시를 떼고 그녀 쪽으로 돌아섰다.

"계속 지하에 있으면 비가 내려도, 줄곧 내려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 그런데 어느 순간 별생각 없이 옆 사람을 보니 젖은 우산을 들었어. 아, 비가 내리는구나, 그때 비로소 알지. 그러기 전까지 지상은 당연히 화창하리라고 굳게 믿었던 거야. 내 머리 위에 비가 내릴 리가 없다고."

어수룩하지, 하고 그녀는 말했다.

"배신당할 때 기분이랑 참 비슷해."

∷ 고구레 사진관

그런데 요즘 들어 다시 슬금슬금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아예 ‘재미 삼아’ 하는 거라고 익스큐스를 끝낸 텔레비전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나 명백하게 픽션인 영화가 단서가 되었다. 70년대 당시의 열광과는 다른 종류의 좀 더 오락에 가까운 취급 방식이긴 하지만 여전히 심령사진이나 심령 영상은 존재하며 사진에 유령이 찍히는 일이 있다는 ‘상식’도 건재하다. 요즘에는 오로지 인터넷으로만 정보가 퍼져나가 도시 전설화하는 패턴이 많다고 한다.

∷ 스나크 사냥

아 참, 『스나크 사냥』이란 이야기 아세요? 이것도 슈지 씨가 해준 이야기예요. 루이스 캐럴이란 사람이 쓴 아주 이상한, 긴 시 같은 건데 스나크라는 것은, 그 이야기에 나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 이름이에요.

그리고 그걸 잡은 사람은 그 순간에 사라져 버리죠. 마치 그림자를 죽이면 자기도 죽는다는 그 무서운 소설처럼.

"우리는 피해자끼리 서로 죽이고 상처 입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라고요.

게이코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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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탁병탄"
도량이 커서 선악을 구별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뜻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소년 본인에 대한 프로필은 보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살해된 그의 부모가 기삿거리가 되었다.

"지방 사람들은 도시 사람보다 어수룩해 보여도 한번 안 된다고 마음먹으면 요지부동이에요. 어머니 입에서 가즈미는 그 여자 아이고, 내 손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는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지만서도."

"걸리면 뭐든 다 들통이 나는군요."

외삼촌은 유전자 검사로 고지로와 가즈미가 부자지간으로 판명되는 것이 두려웠던 게 아닐까? 매사에 눈치가 빠른 인물이라면 그런 식으로 위기를 관리하는 것이 어울린다.

"지금도 시바노 가즈미라고 불러요. 나는 반대했습니다. 데라시마라는 성으로 바꾸자고. 그런데 가즈미가."

―아버지의 가족들이 불편해할 거예요.

자기를 학대하고, 보험금을 노려 살인까지 계획했던 어머니에게 죄송함을 느낀다. 그것이 시바노 가즈미에게는 진정한 갱생일까.

그런 의문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게 타당한 선악의 구별일까. 본인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을까.

"‘검은 메시아’라고 합니다. 인간이 아니고 괴물 같은 거죠. 그게 여기저기서 다른 사건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나, 아이를 희생물로 삼는 범죄자를 퇴치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 괴물을 시바노 가즈미가 보았다고 한다.
―정말이에요, 아버지.
그 괴물은 나예요.

인터넷 사회를 그다지 잘 알지는 않지만, 거기서 오가는 이야기들이 항상 ‘진실’이고 ‘진정한 자신’을 이야기한다고 믿을 만큼, 나는 순박하지 않다. 특히 이런 주제를 둘러싸고는 단순하게 이야기가 흘러가는 양상이 재미있어 끼어드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데루무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올리는 글에는 그들을 그렇게 반응하게 만드는 흥미 이상의 무언가가 전해졌다.

―그 사람들은 그냥 주저앉아서 언젠가 구원받을 거라고 생각할 뿐이니,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요.
구원을 기다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자들.

―아버지,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어요. 내가 한 짓은 잘못된 거예요.

―자기들만이 진실을 안다고, 정의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렇게 되어 버린다구요.

유체이탈은 일정한 조건하에서 건강한 사람이라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시바노 가즈미에게 이것은 일종의 긴급 피난이자, 경도의 괴리 증상이었으리라. 그가 처한 가혹한 상황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다.

청소년 사건은 대부분 학교나 가정에서 발생한다. 학교와 가정은 이 세상에서 가장 굳게 닫힌 밀실이다. 제삼자의 눈으로 봤을 때 밀실에서 일어난 사건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명해도 결말은 늘 애매모호하다. 구원받아야 될 자가 구원받지 못하고 상처는 그대로 방치된다. 가해자는 보호를 받아 제재받지 않는다.

죄악이 지상을 활보하고 있다. 정의의 가치는 티끌보다 가벼웠다.

"그래도 우연일 뿐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어요. 다만 세상은 아직 쓸 만하구나. 우연이 정의를 행사할 때도 있으니까."

친딸을 건드릴 만큼 정신의 균형을 잃어버린 남자가 액셀과 브레이크를 혼동해서 실수를 저질렀다.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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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여자애라서 그런 일을 당했다고 말해야지만 자기들이 안심할 수 있어서야. 불량 소녀였으니까 그런 식으로 남자에게 살해당한 거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들 그렇게 믿고 싶은 거야. 그 언니가 우등생에 주위 평판도 좋았다면 그런 아이가 집착이 강한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사건은 엄청나게 충격적이고 무서운 일이 됐을 거야. 왜냐하면 자기나, 자기 딸도 남자를 잘못 사귀면 언제든 같은 꼴을 당할 수 있다는 얘기니까. 그러면 모두들 두려워지겠지. 그래서 그 언니를 깔아뭉개고 싶어 해. 그런 짓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로 만들고 싶어 해."

‘남자친구’의 속성은 사악함의 결집,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냐? 죽은 사람은 변명도, 설명도 못 한다고. 일방적으로 매도해 버리는 건 너무하잖아."

"내가 제일 감탄한 대목은 자기가 아사코에게 왜 그런 쓸데없는 소문이 떠도느냐고 물었을 때의 대답이야."

―자기들이 안심할 수 있어서야.

―그래서 그 언니를 깔아뭉개고 싶어 해.

산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나그네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친절한 부부가 있었다. 사실 이 부부는 지친 나그네에게 음식과 목욕을 권하고, 안심한 나그네가 완전히 잠들면 살해해 금품을 빼앗았다.

"나그네에게 권한 침상은 베개가 돌로 되어 있어. 그 베개를 베고 잠든 나그네의 머리를 망치로 때려죽였지."

"그런데 이 부부에겐 딸이 하나 있었어. 딸은 부모의 극악무도한 행동을 말리고 싶어 했어. 그래서 어느 날 몰래 나그네와 잠자리를 바꿨지. 자신이 돌베개를 베고 누운 거야.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부부는 여느 때처럼 망치를 휘둘러서 딸을 죽였어. 나중에야 아, 내 딸이었구나,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는 이야기야."

인과응보. 나쁜 짓을 하면 돌고 돌아서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교훈의 구비전승이다.

"저자 선생님과 이야기를 해 봤어. 이런 인과응보의 사고방식이 우리 마음속에 뿌리를 내려 여간해서는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세태를 보면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 앞으로 십 년쯤 후에는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옛날이야기를 다루는 그림동화에서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시더군."

다들 피해자에게 무례한 짓이란 걸 알면서도 보다 자세히 알고 싶어 하고, 알려졌으면 해. 그 내막에 무언가 자신과는 다른 ‘나쁜’ 요소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니까. 사이비 종교에서는 재난을 겪은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행실이 나빴기 때문이니 인과응보라고 하잖아.

"사람은 죽으면 그뿐이에요. 나쁜 짓을 할 리가 없죠. 무서운 건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신물이 나도록 가르쳐도 안 돼요."

기타바타케 형사와는 오자키 경찰서에서 만났다. 책을 많이 읽고 역사를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돌베개’의 벡터가 죄악감이라는 형태로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시자키가 그렇게 말하자 사와노 선배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벡터가 하타 아유미를 죽인 아사이 유스케에게도 남아 있었을까……."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보는 것은 자기 마음의 내면뿐이다.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아름다운 것도, 추한 것도.

살짝 당황하던 소년이 미야코의 말처럼 고집스러운 눈매로 이시자키를 바라본다. 약간 들뜨기는 했어도 뜻밖에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삼월 말, 눈 섞인 차가운 비가 내리는 오후였다.

"부모를 죽이고 담임 선생님도 죽이려다 학교에서 인질극을 벌였죠. 이래도 기억나는 게 없습니까?"

십이 년 전 사월의 어느 아침, 사이타마 시내의 자택에서 자고 있던 생모와 그녀의 내연남을 군용칼로 찔러 죽인 후 사체의 목을 절단, 태연히 교복으로 갈아입고 등교해 같은 흉기로 담임이었던 여선생에게 상처를 입히고 인질로 붙잡아 경찰과 두 시간 넘게 교실에서 대치했던 열네 살 소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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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나는 숙부님 얼굴을 봐도 모르지. 너무 오랫동안 못 만났고 이제는 완전히 할아버지잖아. 숙부님이 먼저 말을 거셨어. 내가 아버지 젊었을 때랑 똑같아서 금방 알아보셨대."

"틀림없이 그리우셨던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완구점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해 물어볼 게 있다면서 경찰이 찾아왔다. 두 달 전 일이다. 구미코도 무척 놀랐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우락부락한 형사는 덜렁덜렁 말했다.

엄마는 어머나 하고선, "구미코, 국수 붇겠다. 불 좀 꺼 줄래?" 하고 부탁했다. 이건 어른들 이야기니까 넌 저쪽으로 가 있어, 라는 뜻이다.

"뭐, 본심은 그런 셈이죠. 할아버지처럼 문제될 게 없는 사람이 먼저 나서면 뒤따르는 사람들도 변명거리가 있잖아요. 가게 문을 닫으면서 할아버지 핑계를 대면 만사 오케이다, 이거죠."

"여럿이 합세해서 노인을 장난감 취급하다니."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아빠가 거칠게 한마디 하는 것을 슬쩍 들었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몰랐지만 슬펐다.

완구점은 계속 문을 열지 않았다. 정보지 등의 취재가 있고 나서 보름쯤 지나 할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이튿날 아침, 가게 셔터 앞에 쓰러져 있던 것을 행인이 발견했다.

지난날 완구점이 있던 그곳, 지금은 빈터가 된 그곳에 다케타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희미하고, 얇고, 반쯤 투명한 모습으로 혼자 서 있다.

그래도 표정은 똑같네, 그때와 똑같은 표정이야, 텔레비전 볼 때처럼 멍한 얼굴이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꽤 돈이 되는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꽤 인기가 좋았어. 그래서 이번 십 주년 감사 대바겐세일에 또 하게 됐지."

오 년간 계속 창고 안에 처박혀 있었겠지. 햇볕을 쬐지 않아서 색이 많이 바래지는 않았어도 대신 여기저기 잿빛 곰팡이가 피어 있다. 두 개의 기다란 귀가 후줄근하게 풀이 죽어서 오른쪽 귀는 세워 놔도 금방 주저앉는다. 핑크색 몸뚱이 곳곳에 흰 반점이 퍼져 있는 까닭은 창고를 청소하던 직원이 인형탈 곁에서 표백제가 묻은 대걸레를 휘둘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표백제가 묻은 곳만 핑크색이 없어진 것이다. 이는 인형탈을 창고 안에 그냥 방치했다는 뜻이다.

가난한 학생에게 아르바이트는 생명줄이다. 괜찮은 자리가 있어, 하루에 만 엔이고 마트 바겐세일을 도와주는 거니까 힘들지도 않아. 그렇게 알려 준 친구의 얼굴이 그때만 해도 부처님처럼 보였다. 하지만 취소하겠어, 넌 사기꾼이야, 인신매매범이야.

"덥고 무거워서 어깨가 많이 결릴 거야. 걸을 때는 발밑을 조심하고. 평소보다 두 배는 몸집이 커지니까 생각지도 못한 곳에 부딪치는 일이 많아."

전부가 인형탈을 쓰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핑크색 토끼 인형탈을 쓰고 눈구멍으로 밖을 보고 있으면.

출근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인형탈을 쓰고 있는 내 눈에는 봉제인형의 행진으로 보였다.

스파이더맨 영화를 봤구나.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면 엄마가 하는 말부터 들어야 한단다.

장난감이나 인형을 입고 있는 사람들 뒤에는 저렇게 생긴 검은 손이 붙어 있지 않다. 마트에 온 누구도 저렇게 기분 나쁜 손에 씌지 않았는데.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않는 건, 몸에 두르고 있는 인형과 장난감이 지켜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무언가를 소중히 여겼던 추억.
무언가를 좋아했던 추억.

사람은 그런 기억들에 의해 지켜지며 살아간다. 그런 기억이 없는 사람은 서글프리만큼 간단하게 검은 손을 등에 짊어지게 된다.

오 년 동안 창고에 처박혀 있으면서 텅 빈 인형탈 속으로 무언가가 들어왔던 것이다. 나쁜 것이 아닌 아주 깨끗한 무언가가. 그것이 인형탈 속에 쭉 살아 숨 쉬며 신비한 힘을 주게 된 게 아닐까.

그 핑크색 토끼 탈은 또다시 창고에 갇힐 것이다. 언제 다시 밖으로 나올까. 하지만 여러분, 만일 시내 마트에서 인형탈을 쓰고 일하게 된다면 제 이야기를 꼭 기억해 주세요.

당신이 거울을 들여다보면 과연 무엇이 비칠까요?

<우미스나 지구 핫카초 읍민회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의뢰하는 이들의 세대차는 있지만, 세상은 ‘나’에 대해 말함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시대로 돌입한 듯하다.

"유령이 나타나게 된 살인사건이 뭐지?"

"아빠 몰라?" 아사코가 싫다는 눈으로 쳐다본다. "무로마치 시대라느니, 전국시대라느니, 그런 것만 좋아하니까 현대 사회에 캄캄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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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융자 담당도 아니고, 책임질 수 없는 약속은 못 해."

"뭐야, 재미없게. 그럼 융자 부서에 있는 높은 녀석을 남편으로 삼으면 되잖아. 그럼 쉽지?"

"유키코가 왔어. 이건 유키코 발자국이야. 걔가 온 거야. 유키코가 와 줬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조그만 고무장화 발자국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그는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동물적인 직감으로 꿰뚫고 있었다. 내가 유키코를 죽였다는 것을. 내가 그 빨간 체크 머플러를, 유키코가 쓰러진 후에도 계속, 숨이 끊어질 때까지 끌어당기고 유키코를 버려 둔 채 도망쳤다는 것을.

나는 유키코가 미웠다. 나처럼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나처럼 착한 아이도 아니면서 언제나 생글생글 웃고 있는 유키코가 미웠다. 그 하얀 뺨이 미웠다. 스기지와 나란히 집에 돌아가는 유키코가 미웠다. 마코가 글을 읽는 게 재미있다며, 아무런 계산 없이 웃음을 터뜨려 마코를 기쁘게 할 줄 아는 유키코가 미웠다. 야스시에게 늘 놀림당하면서도 다른 아이가 괴롭히면 제일 먼저 야스시가 달려오게 만드는 유키코가 미웠다.

내일, 눈이 그치고 쌓인 눈을 파헤쳐 보면 열두 살의 내가 죽어있을 것이다. 이십 년 전 유키코를 죽였을 때 유키코와 함께 내 손으로 죽여 버린 나 자신이. 단단하게 얼어붙어 작은 몸을 움츠리고.

누구도 애도하지 않고 누구도 슬퍼해 주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은 영원히 멈춰 있을 것이다.

상가 모퉁이의 완구점 이층 창가에는 밤마다 교수형에 쓰는 올가미 밧줄이 걸린다.

"다시 조사할 거라면서요? 할머니의 변―사."
"변사요? 이상하게 죽었다는 뜻인가요?"
"그래요, 정말 무서운 일이잖아요. 소문 다 났어요. 알죠? 실은 영감님한테 살해됐다는 거. 이층 창가에서 이렇게 목이 졸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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