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감상에 사로잡힌 건 아니다. 그리움을 느낀 것도 아니다. 만나고 싶은 얼굴을 떠올린 것도 아니다.

아무런 이벤트도 일어나지 않을 주말을 맞이하고,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건 오랫동안 질리도록 반복했다.

아무 데나 좋아, 모임만 있다면 어디라도 좋아.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마코에게 들었겠지만, 마나베 초등학교가 통폐합이라나 뭐라나 해서 폐교하게 되었대. 그래서 학교 건물이 없어지기 전에, 어쨌든 육 년 내내 붙어 다닌 우리 넷이서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할까, 한잔해야 한다고나 할까. 어때? 우리 가게에서."

자동응답기의 메시지 램프가 깜빡이지 않아도 연연하지 않았던 건 나한테 용건이 있는 사람은 모두 휴대전화로 걸어왔기 때문이다. 모두, 그들 모두가.

우리 가게. 자랑스레 말하던 야스시의 목소리가 귀에 남는다. 한잔해야 한다고나 할까, 어때, 우리 가게에서? 곱셈도, 나눗셈도 제대로 못하고, 구구단 암송 시험을 네 번이나 다시 치른 야스시의 ‘우리 가게’.

그런 엄마에게 나는, 유키코는 내 소중한 친구였어, 그렇게 말하지 마! 하고 반발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보는 눈이 없는 집 안에서 그런 퍼포먼스로 엄마와 충돌하는 건 어리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나이에도 제법 계산을 할 줄 아는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줄곧 우등생이었다.

동네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며, 까딱 잘못했다간 마에짱 미아가 될지도 몰라, 하고 마사코는 웃었다.

"만약에 눈이라도 내린다면 말이야, 눈이 내린다면 그건 유키코의 눈이야. 기억하고 있어? 걔 정말 피부가 희었잖아. 그래서 선생님도 유킹코(일본에 전해지는 어린아이 모습을 한 눈의 정령)의 유키코라고 부른 적이 있었어."

도쿄에서 몇 년 만에 십 센티미터에서 십오 센티미터가량의 적설량이 예상되오니 출근길에 나서는 시민들과 학생 여러분은 교통 정보에 주의해 주시고요, 미끄러지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십시오

"아이들을 노린 변태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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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만물이 예전의 모습으로 소생하듯 내 곁을 떠났던 님도이 봄이면 돌아오실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 P96

봄이 주는 나른함 속에는 알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것이 스며있다. 따스한 햇살 비끼는 날, 바람도 자는 꽃그늘 아래 앉아 있노라면 돌연 무심한 상태를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 조는 것도 아닌데먼 곳을 응시하다가 깜빡 시간과 공간을 잊는다. 일종의 삼매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움이 깊으면 병이 되는 것은 대체로 기다림의대상이 분명히 존재할 때이다. 그러나 막연히 봄날이 주는 애상적감회 때문에 그리움의 정회를 느끼는 경우는 이와 다르다. 어쩌면그것은 만물의 소생 혹은 부활과는 대조적으로 우리 몸은 서서히스러져가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 P97

봄이 가면 병든 사람 어쩔 수 없어
문 나설 때는 적고 문 닫을 때 많아라.
두견새는 공연히 화려한 그리움 간직하고아직 꽃 지지 않은 청산에서 울음을 운다.

春去無如病客何
出門時少閉門多
杜鵑空有繁華戀
啼在靑山未落花
백광훈白光勳, <봄이 지난 뒤春後>, 
《기아雅》 권3 - P98

당나라 시인 두심언의 시구에서절묘하게 표현한 것처럼, "근심스런 생각에 봄을 보아도 봄을 맞은것 같지 않다愁思看春不當春<봄날 서울에서의 감회春日京中有懷>"는 심정이 그대로 읽힌다. 
가슴속 가득 그대 향한 그리움이 일렁이는데 어찌 봄날이 봄날 같을 수 있겠는가. - P98

같은 작품을 읽어도 언제 읽느냐에 따라  보는 눈과 느끼는 감흥이 다르다. 백광훈의 작품을처음 접한 것은 이십대 말이었다. 당시 나는 서울살이의 고달픔에한껏 처져 있었다. 봄날의 그리움이나 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을 읽으면 어딘지 모르게 나와는 동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유치한 감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 P99

그런데 마흔 무렵 읽은 백광훈의 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흐르는 세월이 눈에 들어왔고, 문을 닫는 사람의 심정이 내마음속으로 절절이 스며들어왔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작품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99

사립문 닫으니 여름이 문 두드리고

꽃 피면 날마다 스님과 약속을 하고
꽃지면 열흘 지나 대나무 사립문 닫는다.
모두들 이 늙은이 정말 우습다 하니
한해의 근심과 즐거움이 꽃가지에 있다 하네.

花開日與野儈期 
花落經旬掩竹扉
共說此翁眞可笑 
一年憂樂在花枝
이산해李山海, <이 늙은이此翁>,
《箕雅》권3 - P99

돌아보면 내가 걸어온생애가 마지막 봄날 아지랑이 속에서 아련하게 보이는 듯하다. 다시 고개 들어 앞을 바라보니 어느새 여름이 코앞에 성큼 다가와 있다. 사립문 닫고 내 그리움을 달래노라니 여름이 문 밖에서 서성거린다. 이렇게 봄이 다 가고 나면, 채울 수 없는 내 그리움도 가는봄과 함께 다할 것인가. - P101

夏, 소만小滿
보리밭에서 보낸 한철

어른들은 오전 내내 밭에서 보리를 베느라 바빴다. 초여름 볕이 제법 따갑다.  허리를 굽히면 목 뒤쪽은 햇볕에 완전히 노출된다.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살갗은 시커멓게 변하고,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비오듯 한다. 허리는 끊어질 듯 아프지만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허리를 펴는 것조차 눈치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보리밭 옆을 뛰어다니면서 밭이랑 사이에 이따금씩 숨어있는 새앙쥐 집을 들추거나 새집을 뒤지며 놀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보리 까끄라기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면서 춤을 춘다. 어떤 것들은 벌어진 내 옷 틈새로 들어와 등을 간지럽힌다. - P102

잘 구워진 보리이삭의 맛을 어찌 잊으랴!

점심을 먹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나서 다시 보리밭으로 나간다. - P102

열두어 살 먹은 아이들로서는 어른들의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지짐작이나 하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야 옆에서 뛰어다니다가 물이나 떠오거나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오가는 정도의 잔심부름을 거드는 것뿐이다. 사실 우리가 그 주변을 서성거리는 이유는 순전히 먹을거리가 심심찮게 생기기 때문이다. 새참이나 점심이 나오면 어느 때보다 풍성한 음식에 그저 신이 났다. 어머니는연신 우리들의 잔망스러움을 탓하며 눈치를 주시지만, 그거야 슬며시 무시해버리면 그만이다. 게다가 어른들의 귀여움을 든든한배경으로 우리는 마음껏 성찬을 즐겼다. - P103

보리타작 소리 높고 동이에 술은 가득
늙은이 일없이 황폐한 마을에 누워 있다.
아이 불러 방 아래로 바람막이 치게 한 건새로 옮겨 심은 자죽 뿌리 흔들릴까 두렵기 때문.

打麥聲高酒滿盆
老人無事臥荒村
呼兒室下遮風幔
恐擾新移紫竹根
신영희辛永禧, <보리타작 풍경卽事>, 
<기아箕雅> 권31 - P106

힘들게 넘던 보릿고개에도 희망은 있다
겨울이면 이따금씩 보리밭으로 나가서 눈이 남아 있는 이랑 사이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보리 이삭을 밟았다. 보리밟기는주로 2월 후반기에 이루어졌다. 날씨가 춥다고 방구들을 지고 사는아이들을 불러 모아서 할머니는 그렇게 보리밭으로 우리를 데리고다니셨다. 땅이 풀리면서 보리 뿌리가 뜨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해토머리가 되기 직전에는 그렇게 보리밟기를 했다. - P107

우리는 가난했으되 가난이 무엇인지 전혀 짐작도 못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가난은 언제나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만들어내는 음험한 욕망 덩어리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었으므로, 우리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라 우리의삶이었다.

농가의 젊은 아낙들 밥도 없이
빗속에서 보리 베어 풀숲 사이로 돌아온다.
생나무 축축해서 불은 붙지 않는데
문 들어서자 딸아이는 옷자락 당기며 운다.

田家少婦無野食 
雨中刈麥草間歸
生薪帶濕烟不起 
入門兒女啼牽衣

이달, <시골집田家行>, <기아箕雅> 권3 - P108

먹을 것 없는 살림살이에 이른 보리이삭이라도 잘라서 끓여 먹으려는 젊은 아낙과, 굶주림에 지친 딸아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들밥도 없이 주린 배를  참아가며 보리를 베고 있는 모습, 비에 젖어 불이 잘 붙지 않는 축축한 땔나무, 치맛자락 당기며 우는 아이가 보릿고개를 넘고 있는 가난한 농가의 풍경 한 폭을 가슴 아프게포착하고 있다. - P108

보리밭두렁에 바람 불자 푸른 물결 비끼는데
풀뿌리로 흘러 모이는 물에 어린 개구리 시끄럽다.
부러워라, 한가한 나비 한쌍
동풍 부는 풀과 꽃에 난만히 취해 있구나.

麥隴風來翠浪斜
草根肥水嗅新蛙
羨他無事雙蝴蝶 
爛醉東風野草花
주밀周密, <들을 거닐며野步> - P110

힘없는 민초들의 삶을 지탱해준 보리가 아니던가. 한겨울 먹을게 없으면 보리 이삭을 나물처럼 잘라서 멀건 국이라도 끓여 먹을수 있었고, 보리 이삭 팰 무렵 식구들이 굶주리면 익지 않은 푸릇푸릇한 이삭이라도 잘라서 물에 끓이거나 익혀 먹었다. 보리 한 알이라고 우습게 보면 안 된다. 그 거뭇거뭇하고 거친 보리의 표면과미세한 주름살 속에 우리 조상들의 한숨과 절망과 삶에 대한 희망이 온통 뒤섞여 가득하지 않은가. - P111

보리 향기, 고향의 냄새여
보리밭을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농촌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변방이 되어버렸다. 우리 유전자 속에는 여전히 농부의 힘찬 숨소리가 각인되어 있는데, 우리 주변에는 보리밭이 사라졌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라도 보리밭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오랜만에 옛 친척을 만난 듯 보리밭은 흐뭇하고 친근한 향기를던진다. - P112

천 척 맑은 실 가는 봄빛 말리는데
때까치 소리 없고 제비는 바쁘다.
긴긴 날 집 위로 홰나무 그림자 짙은데
살랑거리는 산들바람에 보리 향기 풍긴다

晴絲千尺挽韶光
百舌無聲燕子忙
永日屋頭槐影暗 
微風扇裏麥花香

범성대范成大, <초여름初夏> - P112

보리 냄새 설핏 풍기는 밭길을 만나기 어려운 시대라 해도, 제비의 시끄러운 소리를 처마 밑에서 듣기 어렵게 된 시대라 해도, 여전히 여름이 다가오면 그 향기와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어린 시절왁자하게 떠들어대면서, 뜨거운 오후의 햇살과 밭에서 피어오르는열기를 헤치며 골라 먹던 잘 구워진 보리 이삭이 그리워진다. - P113

세월이 흘러 그 아이들 중 더러는 세상을 떠나고 더러는 여전히 고향에남아 쓸쓸한 농사꾼이 되고, 더러는 이렇게 글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여름의 길목에서, 눈을 들어 고향 쪽을 바라본다. 하늘 저쪽에내 어린 시절이 걸려 있다. - P114

夏, 망종芒種
그 즐거운 노동에 대하여 - P115

곡우 막 개고 입하 지나자
늙은 농부 달력보며 농사꾼 일깨운다.
"올해 4월은 망종인데
서쪽 논에 올벼는 뿌렸는지요."

穀雨初乾立夏徂
老農看曆戒田夫
今年四月仍芒種 
早稻西疇已播無

남용익, <시골에 살며村居雜詠>,
《호곡집壺谷集》권6 - P120

동아시아 사회에서 ‘귀거래‘의 전형은 동진東 말기의 유명한시인 도연명에 의해서 제시되었다. 그는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겨우 몇 말의 봉록을 받기 위해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하면서, 미련없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 심정을 읊은 작품이 그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다. 남용익의 작품은 바로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더욱 깊이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 P120

곡우가 지나고 입하도 지났는데, 어째서  저이는 벼를 뿌릴 생각도 않는지 걱정이다. 봄이 온 농촌 들녘을 한가로이 다니면서 천지 만물의 생의를 즐기던 어설픈 선비 농사꾼에게, 노련한 농부는 파종의 적기를 알려준다. - P121

몸으로 하는 공부, 몸으로 견디는 노동
 모내기 현장은 건강한 노동이 돋보인다. 모를 꽂느라고 허리는끊어질 듯이 아프지만, 모심기 노래에 맞추어 한 줄 두 줄 넘어가다 보면 힘든 줄을 모른다. - P121

농부가 모 던지면 아낙네 이어받고
어린 아이 모 뽑으면 큰 아이는 모심는다.
삿갓은 투구요 도롱이는 갑옷이라
머리 위로 빗물 흘러 어깨까지 축축하다.
아침밥 불러서 잠깐 동안 쉬지만
머리 숙이고 허리 꺾은 채 대답도 않는다.
볏모 뿌리 자리 못 잡고 모종 아직 펴지지 않았으니
거위 새끼 병아리 오리 조심해야지.

가을이 되어 수확한 알곡을 세금으로 수탈당하더라도, 당장 모내기를 하는 농부들의 마음은 즐겁기 그지없다. 그게 바로 농민의마음이다. 그러니 언제나 모내기 현장에는 활력이 넘친다. - P123

이제는 농촌에 젊은 일꾼들이 사라진 지 오래고, 논밭전지는 끝없이 밀려드는 인간의 욕망에 치여서 급속도로 사라진다. 기계화된 농촌에는 떠들썩한 농번기 대신 요란한 기계음이 쓸쓸하게울린다. 우리 농촌의 풍속도가 달라지면서, 어쩌면 조선 후기 이래전승되어온 농경문화는 전혀 다른 형태로 바뀌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모내기 이야기를 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학생들에게, 농부들의 괴로움을 읊은 시나 그들의 건강한 노동을 노래하는 시를 이해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 P123

夏, 하지夏至
문명의 옷을 벗어던지고
더위는 마음속에 있는 것정말 날이 길어졌다. 저녁을 먹고 아이와 함께 산책을 나섰지만,여전히 해는 하늘 저편에 떠있다. 밤이 길면 꿈도 많듯이 낮이 길면 할 일도 많아지는 법인가. 요즘은 어찌나 바쁜지, ‘바쁘다는 말이 입버릇처럼 붙었고 바쁜 것이 생활이 되었다.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은 뒤 이렇게 산책을 하는 것이 얼마만인가. 저녁 약속이 취소되는 바람에 이렇게 한가한 여름 저녁 한때를 보내고 있다. - P125

하지 지난 뒤에 밤이 비로소 길어지니
땅도 점점 서늘해져 날씨도 서늘해져야 하거늘,
수그러들어야 마땅한데 더더욱 타오르니불같은 이 열기가 해에서 나온다는 걸 못 믿겠구나. - P126

엄청난 위력에 어떤 것도 대항 못하고
잠깐이라도 출입하는 건 생각 못한다.
그대여, 높이 누워 부채 흔들지 마오
마음과 기운 안정되면 내 몸도 건강하니. - P127

태초의 모습으로 뒹굴다 보니, 문득 세상의 어지러운 생각이 사라진다. 바쁜 생활 속에서 모든 것을 잃고 살아가다가, 다시 자신을 돌아본다. 여기까지 나를 데려온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윤증의 시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벌거숭이 몸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여름날 저녁이다. - P134

夏, 소서小暑
봉숭아 꽃물에 소망을 담아

한여름 더위에 깊어가는 고절감孤絶感
바람이라도 건듯 불면 드넓은 논은 푸른 융단인 양 물결친다. 제법 웃자란 볏모들은 뜨거운 여름의 별을 견딜 준비라도 한 듯 검푸른 빛이 역력하다. 저 건강한 몸에서 우리 인간을 먹여 살리는 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한껏 몸을 누이며 논물에얼굴을 씻고, 다시 일어서며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켠다. 푸른 융단이 바람에 따라 몸을 뒤집으면 희끗한 볏잎의 뒷면이 비늘처럼 반짝인다. - P135

이 시를 지은 소연(464~549)은 훗날 남제의 황제를 시해하고 스스로 양나라의 황제가 되어 양무제로 불린 인물이다.
비교적 많은 작품을 지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약간의 시와 짤막한 구절 60여 수만이 전한다. 전쟁터에서 이름을 날리던 무장이, 황제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가  된 사나이가, 저렇게 정감 넘치는 시를 지었다는 게 참 뜻밖이었다. 최고의 권력가조차 섬세한 감성을 표현하게 만든  사회의 문화적 토대가 자못 궁금하다. - P140

봉숭아에 대한 전설은 여러 가지가 전한다. 그러나 하나같이 그이야기의 저변에는 슬픈 정서가 깔려있는 걸 보면, 봉숭아빛이 어딘지 모르게 애상에 잠기게 하는 점이 있는 모양이다. 봉숭아물을들이는 것은 우리나라에도 오래 전부터 있었던 풍습인데, 주로 규방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 P143

夏, 대서大暑
한잔 술 기울이니더위가 사라지네

며칠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며 사람을 들볶는다. 대서大暑답게 한여름 더위의  맹렬함이 사람을 지치게 한다. 시원한 곳을 찾아 피서를 떠나는 일조차 귀찮게 느껴질 정도다. 불볕더위란 말이 명실상부하게 다가온다. 바람 한 점 없는 여름 하늘에 작열하는 태양은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힌다. 이 더위를 어떻게 지날까 근심부터 앞선다. - P146

술동이 챙기는 일이야 잊을 수 없는 일이요, 약간의 음악을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게다가 커다란 솥과 그릇 일체를 갖추고 개장국을 끓일 수만 있다면더할 나위가 없다. 조선 후기 기록에서 삼복과 관련하여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개장국이었으니, 그 음식의 유래가 짧지 않다는것을 짐작한다. 어떻든 술과 안주와 음악이 구비되었으니 녹음 우거진 그럴 듯한 계곡을 찾기만 하면 된다. - P150

이에 비해 예전 선비들은 어떤가. 그들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다라도 이내 <창랑滄浪歌>를 떠올린다.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에 등장하는 창랑가는, 정치 현실의 어지러움을 벗어나 자연 속에은거하여 살아가는 지식인의 노래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려네.

滄浪之水清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굴원, <창랑가>, <어부사> 중에서 - P152

우리 몸이 몇천 년을 간직하고 전승해온 절기의 변화는, 근래 들어 급격히 파괴되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러자니 몸은 갈수록 약해지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병들이 횡행한다. 그렇게 치자면 여름에는 역시 무더위와 이글거리는 태양이 있어야제 맛이라는 것이다. - P154

그러나 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아니라면 곡식이 어찌 여물겠는가. 흔히 하는 말처럼 시련이 있어야 열매가 튼실하게 맺는 법이다. 여름을 온전히 버텨낸 곡식만이 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저녁이 되어 바람이라도 선듯 불고 달빛이 환히 비추면 그 상쾌한 기분이야 무엇으로도 견줄 바 없다. - P154

장마에도 맑은 정경 만나
높은 누각에서 달빛 얻었다.
때는 바야흐로 대서인데
밤기운 홀연 서늘함 살짝 돈다.
손님과 조곤조곤 시를 평하고
스님 잡고 긴 시간 얘기 나눈다.
내일 아침 다시금 어지러워지리니
문서 여전히 상에 쌓여 있다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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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四節氣, 夏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 것은 유두날 풍습이다. 음력 6월 보름이유두일이기 때문에, 절기로 치면 대서 무렵과 비슷하게 겹친다. - P91

夏, 입하立夏
하늘 끝 그리움 벗어나니 여름이 왔네
산그늘 쪽으로 진달래가 붉다. 봄이 끝날 무렵, 산그늘은 진달래로 온통 환하다. 햇살이 따가운 쪽보다는 응달쪽을 선호하는 진달래는 한때 어려운 시절을 대변하는 꽃이기도 했다. 진달래가 무성하게 피어났다가 서서히 사라지는 기색이라도 보일라치면 철쭉이산을 점령할 채비를 한다. 여름 첫머리는 언제나 그렇게 붉은 산과더불어 시작된다. 벌써 입하가 코앞이다. - P93

선생님들은 선생님들대로 조를 짜고 마을을 배분하여 곳곳을 돌아다니셨다. 아마도 학생들이 집안 일손을 도우면서 등교하지 않으니, 그들을 가정방문해서 상황을 점검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들은 우리들에게 눈길을 주시기보다는 논두렁 주변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서 어른들과 말씀을 나누셨다. - P94

지금이야 농촌 인구가 줄어들면서 모내기도 기계에 의존하는 형편이 되었다. 사회 상황이 그렇게 우리 농촌 현실을 몰아가기도 했지만, 노동이 사람에서 기계로 옮겨가면서 우리 기억 속에 아련히남아 있는 고향 이미지는 사라져버렸다. 가지런히 모가 꽂힌 논을바라보면서, 왠지 모르게 구불구불 빼뚤빼뚤 어설프게 줄을 맞춘 옛날의 논이 그리워지는 것은 내가 나이를 먹은 탓만은 아닐 것이다. - P95

그대는 오지 않고 봄날 저무네  - P95

강 언덕엔 수양버들 산에는 꽃들
이별 생각에 맥없이 홀로 길게 탄식한다.
애써 청려장 짚고 문 밖 나가 바라보니
그대는 오지 않고 봄날 저무네.
岸有垂楊山有花 
離懐俏俏獨長嗟
强扶藝杖出門望
之者不來春日斜
송희갑宋希甲, <봄날 그대를 그리며春日待人>, 《기아箕雅》 권31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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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치유 리라이팅북
두권째 필사 ˝내가 아주 작았을 때˝
4.28~7.7, 71日간 101편
실제 필사일수 겨우 칠일 ㅠㅠ

어릴적 부르던 동요들이 많이 나온다.
노래 가사와 아주 조금은 다르지만 친숙한
동요가 많고 그 동요들의 작가들을 알수 있어 좋다.

김소월, 강소천, 이원수
백약란(?), 잠자리 날아다니다~~
권오순(?), 송알송알 싸리잎에~~
어효선(?), 우리들 마음에 빛이~~
서덕출(?), 송이송이 눈꽃송이~~
이동진(?),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박경종(?), 초록빛 바닷물에~~
최계락(?), 개나리 노란 꽃그늘아래~~
박홍근(?),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한인현(?),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다음권은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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