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騎手방은 성인 한 명이 웅크려 앉을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다. 누워 있을 수도, 발을 뻗고 앉을 수도 없을 만큼 비좁다. 하지만 이 방을 쓰는 기수는 누워 있을 이유도, 발을 뻗고 앉을 이유도 없다.

신장 150센티미터, 몸무게 40킬로그램의 기수는 창문 하나 없는 사각형의 방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렸다.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 누군가는 내 존재 이유며 최대의 장점이라 말했지만 아무래도 그 말은 틀렸다고 본다.

내가 추론해낸 바를 말하자면, 고통은 생명체만이 지닌 최고의 방어 프로그램이다. 고통이 인간을 살게 했고, 고통이 인간을 성장시켰다. 내가 이것을 깨닫게 된 이유는 물리적인 것과 비물리적인 것으로 나뉜다.

사람들에게 역사적인 날이란, 무언가를 처음 시작한 날을 의미할 때도 있었지만 기적이 일어난 날을 더 많이 칭했다. 기적. 오늘은 내 짧은 생에 두 번째로 기적이 일어난 날이었다.

연재를 만나기 전까지 콜리는 C-27로 불렸다.

2035년 미국과 중국, 일본에서 만들어진 부품들이 알맞게 조립되어 콜리는 한국 대전에서 탄생했다.

규정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사회질서는 모두가 약속된 규정을 어기지 않아야 유지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간이 재미있는데 왜 말이 달리나요? 그럼 인간이 달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투데이의 등에 앉아 달릴 때마다 콜리는 숨을 쉬었고, 호흡이 생명의 특권이라면 콜리는 그 순간만큼 생명이었으며, 생명은 살아 있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콜리는 살아 있었다.

콜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을 투데이가 달릴 때만큼은 살아 있다. 그렇다면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민주에게 묻지 못했다. 투데이의 몸값이 5,000만 원이상을 웃돌기 시작하자 둘을 관리하는 매니저가 따로 붙기 시작해 민주와 만나기 힘들어졌으며 새로운 매니저에게 자신이 살아 있다고 말하면 매니저의 반응은,
미친 로봇이네

콜리의 곁에 민주가 있었더라면 그 일을 막을 수 있었을까. 민주는 콜리의 말을 못 들은 척하지 않았을 테니까. 둘을 관리했던 매니저는 투데이가 아파한다는 콜리의 말을 듣고도 듣지 못한 척하거나 시끄러우니 닥치고 있으라고 말했다. 콜리는 매니저의 명령을 따라 소리를 껐고, 투데이는 그렇게 신기록을 경신한 지 3개월 만에 무너졌다.

"우연재."
이건 소녀의 이름.
"너는 브로콜리."
"줄여서 콜리."

그리고 이건 콜리의 이름.
콜리는 그렇게 콜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콜리에게 삶의 2막을 열어준 위대한 소녀의 이야기를 할 차례다.

연재
연재가 기억하는 자신의 최초 일탈은 열한 살 때의 일이다.
연재는 그날 정규 수업을 마치고도 학교에 남아 며칠 후에 있을 체육대회 이어달리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게 못 견디게 지겨워졌던 찰나 연재는 정해진 레일을 이탈했다. 하필 견딜 수 없었던 그날이 체육대회였던 건 유감이었지만, 연재는 커브길에서 방향을 틀지 않고 그대로 질주했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힘차게

이 동네를 벗어난다고 해서 갈 곳이 마땅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하지만이런 생각조차도 현실을 살아가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알고 있었다. 순간의 변명밖에 되지 않았다. 간절하게 원했다면 진작 뛰어나갔어야 했다. 지금이 생각이 들기도 전에 말이다.

"향후 점장님이 저를 자르기 전까지 그만둘 생각 없어요. 미성년자 근로를 위한 본인 신청서 작성했고요, 부모님이랑 학교장 확인도 받아왔어요. 지방 노동관서에 신청을 해줬는데 심사는 아직 안 나왔지만 곧 허가발급 될 거예요. 저 쓰시는 거 불법 아니니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저는 근로계약서만 잘 써주시면 노동청에 신고하지도 않을 거고요. 주말일인데 저는 불금이나 불토의 개념도 없어서 술 마시고 늦게 출근하거나못 나오는 경우도 없을 거예요. 저 담배 종류도 다 외웠는데 여기서 한번 읊어볼까요?"

"다 살아남으려고 아등바등하는 거 아니냐. 너도 이제 몇 개월 후면2학년인데 공부에 매진할 때야. 공부해, 인마. 남들 주말이면 학원 돌아다니느라 바쁘다던데. 지금 돈 벌어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 나중에 돈 버는게 진짜 돈 버는 거다."

"어서 오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저 베티를 불러주세요."
"허."
연재는 헛웃음을 뱉었고 점장은 멋쩍게 웃었다. 언제는 로봇 따위와는 일하지 않는다더니. 자고로 직장 동료 간에는 서로의 정서적 유대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었나.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연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점장이 묻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택받은 아이들의 길고 긴 모험은 끝났다.
허나 차원의 문은 완전히 닫혀버린 게 아니다.
왜냐하면 선택받은 아이들의 모험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고 마지막도 아니기 때문에.
디지몬 세계의 문은 꼭 다시 열릴 것이다.
모두가 디지몬을 잊지 않고, 다시 만나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면.
그래, 지금이라도 곧.

-〈디지몬 어드벤처〉 마지막 화 리키의 내레이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의 영지는 대략 세 가지 조건을 갖추면 된다. 바위, 소나무 그리고 냇물이다. 냇가에 넓적한 바위 암반이 있고, 그 옆에 노송이 있으면 대개 그러한 장소는 옛날 신선이나 도사, 고승들이 노닐거나 수도했던 터라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

암반에서는 기가 나온다. 기가 너무 세게 나오는 곳에서는 구안와사가 오기도 한다. 경락이 막혀 있는 일반인이 바위에서 잠을 자면세게 들어오는 기운을 감당하지 못해 턱이 돌아가는 것이다.

역마살! 출가 승려가 전공 필수로 지녀야 할 살이다. 만해 역시 젊었을 때부터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저 산에서 또 다른 산으로 시베리아로 만주 벌판으로 일본으로 안 돌아다닌 데가 없다. 역마살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그런가 하면 만해가 한창때 주로 머물렀던 절인설악산 백담사와 오세암, 금강산 건봉사가 대체로 골기가 어린 암산의 절들이라는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국토 곳곳에 폐사지가 그토록 많은 이유
우리나라에는 많은 폐사지가 산재해 있다. 폐사지를 답사할 때마다여기 있던 절들은 언제 어떻게 없어지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우리나라 사찰에 크게 피해를 준 네 가지사건으로 첫째로는 몽골의 침략, 둘째, 임진왜란, 셋째는 억불 정책과 묏자리 쟁탈전, 넷째는 6.25전쟁이다.

금사망보, 어려운 말이다. 옥편을 찾아보면 ‘망자의 뜻이 ‘이무기, 구렁이‘란 뜻이니까 ‘금사망보‘를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누런금줄을 몸에 두른 구렁이로 태어나는 과보"를 의미한다. 구렁이의몸에 체크무늬 형태의 누런 금줄이 둘러쳐져 있는 모습에서 이 말이유래한 것 같다.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으면서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인데 어떻게 이걸 쉽게 떠날 수 있겠는가! 몸으로 감싸고 있어야지! 인색하게 재물을 모은 부잣집의 곳간에는 대개 구렁이가 발견되게 마련이다. 불가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로 한 번 금사망보를 받으면 길게는 3천 년을 간다고 한다. 3천 년 동안 구렁이의 몸을 받고 있으면서 자기가 전생에 저지른 죄업을 갚는 것이다.

악은 어디에서 오고, 왜 존재하는 것인가. 왜 세상에는 선만 존재하지 않고, 악도 존재하는 것인가. 이것은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제기한 화두인데, 혜공은 배를 타고 다니면서 항상 이것에 의문을 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대서양 항해 중 ‘순간, 홀연히‘ 이의문이 풀려버렸다고 한다. 선과 악이 둘이 아니라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분명 새로 깐 기억이 선명한데 이상하게 물처럼 밍밍했던 소주.

"아무 맛이 안 나."

"소주가 물처럼 느껴지면 인생이 힘든 거야. 네가 지금 힘들어서 그래. 그만큼 힘든 거야."

"엄마, 지구는 왜 우주에 둥근 채로 있어? 근데 왜 인간은 밖에 못 나가고 지구에만 있어? 왜 다른 세계는 없어?"

디지몬 세계를 답답하게 느끼며, 내가 사는 이 세계로 오고 싶어서, 나에게 잘 지냈냐고 물어오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잊고 있던 〈디지몬 어드벤처〉를 1화부터 다시 보았다. 그 세계가 여전히 그곳에 있음에, 모니터 너머에 나처럼 답답해하는 고래가 갇혀 있음에 어떤 위로를 느꼈다.

내 왼팔에는 고래몬이 있다. 나는 디지몬 세계로 가는 것에 실패했지만, 고래몬은 더 큰 세계를 넘나들기를.

내 문장은 빛나지 않을 거야

내 문장은 빛나지 않을 거야. 나한테 사랑이 없으니까.

한마디로 세상을 구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단계를 깨고 올라가야 한다.

모험 만화에서 진화, 기술의 획득은 곧 성장이다. 디지몬이 진화하려면 아이들이 필요하고 아이들에게는 문장이 필요하다. 문장은 용기, 우정, 사랑, 지혜 따위의 추상적인 단어로 되어 있고 아이들이 성장하기 위해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십대 초반인 주인공들이 깨닫는 것은 바로 각자의 잠재력인 셈이다. 달리 말하면 그들이 타고난 재능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나의 첫 망상은 산에 숨어 사는 호랑이였다.

그다음 망상은 새벽마다 지구를 구하는 소녀 히어로였다. (가끔은 내가 히어로일 때도 있었지만)

"꼭 책을 읽어야 소설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너 한글 쓸 줄 알잖아. 그럼 됐지."

그때 친구가 해준 말은 여태껏 내가 뼈에 새기고 있는 삶의 이정표 중 하나다.

공부는 더 자세히 알기 위한 후속 단계이지, 출발점에서부터 이고 가야 할 건 아니란 말이다.

"너는 지금 네 인생의 바닥을 치고 있구나. 실컷 쳐라. 지금 너는 네 안에 있는 이야기를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바닥을 치는 시기인 거다. 그렇게 손바닥으로 자신의 바닥을 쳐봐야 다른 사람의 마음도 울릴 줄 아는 거야. 그 마음으로 소설을 써라."

세계라는 도피처

한때는 상대방 탓이라 생각했고, 한때는 나에게 그 탓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모든 건, 망할 놈의 상황 탓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죄송해서 사과한 적은 별로 없다. 어쩌겠는가. 내가 원하지 않았고,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된 것을. 중증 환자와 관련된 사정은 정말로 불가항력 같은 것인데. 하지만 꼬박꼬박 사과한다. 약속이 틀어진 것에 화가 나거나 실망했을 상대방을 위한 말이고, 동시에 환자인 가족을 지키기 위한 말이다.

타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 택한 방법이 약속을 잡지 않는 거였다. 누구와 어떤 것도 기약하지 못했다. 내 삶은 엄마를 축으로 둔 회전체였다.

"아빠는 그렇게 생각해. 엄마가 아프지 않았으면 물론 엄마에게 더 좋았겠지만, 그게 정말 우리 삶의 최상이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 더 나쁜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어. 겪어보지 않은 세계가 최상일 거라 생각하지 마. 지금 우리의 현실이 가장 행복하고, 견딜 수 있는 상황일 거야."

아르바이트로 바득바득 모은 3백만 원을 다 쓸 순 없으니 그중 백만 원만 여행에 투자하기로 했다. 목적지 상하이, 기간 3박 4일, 목표 살아남기, 사유 도피.

나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구가 감추고 있던 멋진 장면들을 보며 차차 알게 되었다. 내가 엄마를 살리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 이상하리만치 존재 이유를 절실하게 찾던 소녀가 드디어 이유를 찾은 것이다.

"나 소설 쓸래. 딱 1년 동안 소설에 매진할게. 그런데도 책도 못 내고 상도 못 타면 그때 깔끔하게 포기할게. 어때?"
"그러든가."
"마음대로 해."

다행히 그해 『무너진 다리』를 출간하고 『천 개의 파랑』으로 수상해서 아직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결말이다. 나의 디지몬이 기억하는 대로, 나는 작가가 되었다.

악당의 심장에는 검은 톱니바퀴가 있다

지금은 바이러스로부터 비교적 자유롭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여기저기서 퍼트린 악성 바이러스가 마구잡이로 활개 치고 그 바이러스와 대응하기 위해 백신 개발 역시 활발하게 일어나던 것을 생각하면 〈디지몬 어드벤처〉가 얼마나 그 시대를 담았는지 알 수 있다.

아포칼립스는 신약성경 마지막 권 『요한 묵시록』의 영어명이다. 여기서 ‘묵시’란 ‘숨겨진 어떤 것이 드러남’을 의미하는데, 원래 존재했으나 알아차리지 못했던 ‘예정된 종말’을 뜻한다. 즉, 묵시록은 하느님이 ‘선택받은 신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쓴 편지이다.

"내일은 어떻게 할 거야?"
"글쎄. 내일은 모르겠는데."

나는 나를 살게 했던 디지털 세계를 떠나보낸다. 그래도 언젠가 정말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아주 옅은 희망은 마음 깊은 곳에 감춰두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괜찮아, 다시 진화하면 돼

아무튼, 디지몬 : "길고도 매우 짧은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 천선란

통상 진화는 경험치를 바탕으로 한 성장, 다음 단계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하지만 디지몬 세계관에서의 진화는 그 개념이 조금 다르다. 한국에서 단순히 ‘진화’로 번역한 것과 달리 영어권에서는 ‘digivolve’라 번역했다. ‘digital’과 ‘evolve’의 합성어이다.

현실 세계에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듯이 당연히 디지털 세계에도 데이터 총량의 법칙이 있다.

디지몬의 진화는 결국 데이터를 응집시켜 몸집을 키우는 것인데, 이는 디지몬에게 육체적인 부담을 안긴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쌓아두고 있으면 트래픽이 초과하여 컴퓨터가 느려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