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한 번쯤은 만화 속 캐릭터와 함께 항해해도, ‘동료가 되라’는 주인공의 말이 마치 차원 너머 나에게 하는 말인 듯 설레어도, 이 세계를 구해달라는 말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도 될 텐데.
아무튼 이런 분위기는 만화를 본다는 것을 일종의 롤러코스터, 항해의 시작, 불시착과 표류로 여기는 나에게는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유치하다’. 사람들이 대체 어떤 대상에 이 말을 쓰는지 한참 고민한 시기가 있었다. ‘유치하다’는 단어는 감상을 너무나 단편적으로 설명하고 작품을 납작하게 눌러버린다.
작품이 성숙하지 않다는 뜻으로 유치하다고 평가하는 걸까? 그렇다면 세상에 성숙한 작품이 있다는 것인데, 나는 성숙한 작품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작품은 시대에 따라, 읽는 이에 따라, 해석에 따라 천차만별로 평가되니까.
사람들은 주인공이 감성 충만한 작품을 볼 때 ‘오글거린다’는 말을, 주인공이 완전한 선(善)일 때 ‘유치하다’는 말을 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고와 인식을 확장하고(있다고 믿고), 정해진 틀을 벗어나려 노력하고(있다고 믿고), 뻔한 담론을 타파하려 하고(그렇겠지?), 관습을 의심하며 세상을 바꿔보려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선명한 선악 구도가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기는 하다(그런 사람들이 이해되는 건 아니지만).
일본 만화 시장에 내적, 외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준 〈우주소년 아톰〉(1952년), 〈기동전사 건담〉(1979년), 〈아키라〉(1982년),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년) 같은 SF 작품들은 감시 사회, 운석 충돌, 지구 멸망, 전쟁 등의 소재를 다루며 전반적으로 종말과 전쟁의 불가피함, 패전국이라는 패배 의식, 그리고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에 대한 두려움, 그 두려움을 바탕으로 한 영웅 출현의 소망 등을 기저에 깔고 있다.
"우리들은 디지털 몬스터야!" "우린 너희를 지키기 위해서 기다린 거야."
그 진화는 쿠가몬을 물리치고 이기기 위한 진화가 아니었다. 쿠가몬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진화였다.
언뜻 보면 비슷한 듯 보이지만, 무언가를 무찌르고 싶다는 마음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은 어느 것이 선행되느냐에 따라 그 색이 완전히 달라지고 디지몬은 후자였다. 디지몬은 아이들을 지키고 싶어했다.
나는 거기서 비밀의 열쇠를 돌려 다른 차원으로 가는 문을 열어버렸다.
나는 스스로 선택받은 아이가 되었지만, 차원의 문을 여는 디지바이스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