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메티가 사랑한 마지막 모델
프랑크 모베르 지음, 함유선 옮김 / 뮤진트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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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쩌다 우연히 처음 마주친 그날 오후, 벌써 삼십 년도 훨씬 전인 그해 여름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분명 논픽션을 표방하고 있는데 강렬한 단편 소설 같았다. 저자는 여자 친구와 헤어진 분한 마음으로 미술관의 전시실에서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을 초상화로 대면하고 그로부터 삼십 년도 훌쩍 지나서야 프랑스 니스의 영국인 산책로의 덜컹거리는 승강기를 타고야 올라갈 수 있는 작고 초라한 아파트에서 늙어버린  그 빛나던 소녀를 만나 이 이야기를 듣게되어  이렇게 쓰게 된다. 충실한 아내가 있고 이미 충분히 성공한 위대한 노년의 조각가와 거리의 소녀는 나이 차가 사십을 뛰어 넘는다. 어쩌면 아주 진부하고 비윤리적이고 신파조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가 그렇지 않게 된 데에는 저자의 자코메티의 예술에 대한 깊은 교감과 그의 어린 뮤즈였던 이 작고 나이 든 여자의 삶의 무게 그 자체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기능했다.

 

가랑비가 내리던 파리의 몽파르나스 거리의 밤을 자코메티와 까롤린은 팔짱을 끼고 걸어 다닌다. 자코메티는 자신이 전혀 지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예술에 대하여 가지는 모든 느낌, 생각을 이야기하고 여자는 그저 남자가 말하는 모든 것에 매혹되어 듣고 또 듣는다. 삼십 년도 더 뒤에 이 날을 회고하는 여자의 말은 그녀를 빌리지 않고 언어에 기대지도 않고 이미지로 떠오른다. 추적 추적 내리는 비. 여자는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 든 조각가의 곁에 서 있는 상황을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뮤즈, 모델이 된다. 작업실에 갇혀 있던 나날들 속에 여자는 "빛이 나게 해주었다."고 자코메티를 회고한다.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그 고단한 여로를 여자는 자신의 늙은 연인 덕분에 배우게 된다. 남자는 병들고 투병하고 아주 많이 살아야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자신이 죽고 남을 여자에게 이야기해준다.

 

"죽음이 나를 맞이하려고 준비하고 있어. 내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서 고생했는지 모르겠어."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어요."

 

2010년 소더비 경매에서 자코메티가 이야기한 그 "아무것도 아닌 것" 중 하나인 <걸어가는 남자1>이 천억이 넘는 가격에 낙찰되었다,고 한다.(옮긴이의 말 참조) 죽음은 얼마 안 되는 공평한 일 중 하나이고 자코메티의 말처럼 '항상 마침내 사물들을 제 자리에 갖다 놓는 것'이라지만 자신과 함께 세상 전체가 암전되어버리고 나면 생이 그려낸 모든 궤적은 언어로 그려내는 지도 속 어딘가에 어렴풋이 남으며 존재와 생과 반목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생 전체를 바쳤던 남자와 우연히 그 남자의 마지막을 동행하게 되었던 청춘을 회고하는 노년의 여자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언어로 옮기는 남자의 앙상블이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그러고 보면 그 누구에게도 '예외'란 없는 듯하다. 자신이 남긴 것들로 마침내 불멸의 성취를 이루어낸 남자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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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에 관하여
율라 비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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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낳고 나면 겁이 많아진다. 옛어른들의 "간이 바닥에 두 번은 떨어져야 아이를 키운다",는 말, "애간장을 녹인다",는 표현은 그 강도가 무시무시하지만 단순한 엄포나 거짓말이 아니었다. 특히 아이의 몸과 관련된 문제가 그랬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의 시누이 다리야가 안나에게 가는 길 마차에서 아이들과 관련된 상념에서 아이들의 건강과 관련된 끊임없는 불안을 떠올리는 대목은 모든 어머니들을 만나게 한다. 임신 중간중간 각종 검사들의 출발부터 "나의 아이는 당연히 건강하고 건강할 것이다."라는 기본 전제는 든든한 지지대를 잃기 시작한다. 현대 의술의 발달은 판단 지점이나 조력 지점이 미묘하지만 마음껏 불안할 수 있는 영역에 어머니들을 모이게 했다는 점에서 과거 그러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어머니들이 지녔던 근본적인 무기력의 무기와 겨룰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모성은 불확실, 불안과 힘겨루기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기는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B형 간염 접종을 시작으로 무수히 많은 백신의 일정의 단계를 차곡차곡 밟아 간다. 아기를 안고 병원에 가서 그 일정을 따르는 일은 기계적으로 행해지다 어느 순간 때로 의문을 야기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도 이렇게 주사를 많이 맞았나? 이 예방주사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각종 보존, 첨가제, 부작용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충분히 부풀릴 만한 많은 확인되지 않은 근거, 사례들이 인터넷에 범람하며 나는 아이를 각종 전염병으로부터 보호한 게 아니라 오히려 각종 유독한 물질에 무방비로 내맡긴 듯한 죄책감에 혼란스러워진다. 보존제에 수은이 있다던데(이미 제거되고 생산된 지 오래다), MMR과 자폐증이 상관관계가 있다던데...제약회사도 이윤을 남겨야 하는 사기업인데 과연 백프로 선한 의도로 백신을 생산할까? 등, 끝이 없다. 그렇다고 필수접종을 건너뛸 용기는 없으니 슬그머니 선택 접종인 독감 예방 주사를 건너뛰기 시작한다. 그런데 마치 그런 의도를 간파하기라도 한 듯 독감 주사를 맞추지 않은 그 해에 A형 독감 광풍이 불었고 큰 아이는 육개월이 되지 않아 미처 독감 접종을 하지 못한 아기 동생까지 감염시켰다.

 

엄마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예방접종에 대한 의견 개진은 대단히 민감한 문제다. 무조건적 거부도 선별적 거부도 또 그 거부 자체에 대한 반감도 대부분 아이를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문제이기에 어떤 논리의 대결 구도로 가면 모두가 상처 입는 논쟁이 되고 만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러한 접종의 문제를 공공의 문제로 인식하는 엄마들의 의견이 귀에 들어왔다. 단지 내 아이를 보호하고 보호하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 공공의 면역을 형성함으로써 다른 아이들까지 함께 치명적인 질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하는 문제가 예방접종의 장으로 들어온 것이다. 실제 미국 상류층에서 자신의 아이에게 MMR을 맞추지 않음으로써 홍역 전염을 일으켰던 사례는 접종의 문제가 단순히 개인의 선택권으로만 수렴될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 책은 어린 아이를 키우며 예방접종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많은 의구심, 혼란, 불안에 대하여 실제 어린 아이를 키우며 저자 율라 비스가 가졌던 그 불확실성에 대한 천착, 때로 그것을 교묘하게 부추기고 이용하고는 책임감 없이 발을 빼는 집단에 대한 비판적 성찰들과 더불어 찬찬히 모색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나아가 우리가 접종을 통하여 형성하게 되는 면역의 장이 공공의 장이라는 이야기는 모성이 사적인 공간 안에 고이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되는 일이 공공의 영역에 걸쳐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시인도 언론인도 아니고 그저 에세이스트이자 시민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오만하거나 감정적이나 지나치게 학구적이지 않아서 와닿는다. 자신에게서 끌어올리는 감정을 부정하지도 않지만 최선을 다해 사실 논거를 수집하는 과정은 흥미롭다. 최초의 종두법부터 최근의 수두파티, 홍역 파동, 제3세계의 백신 접종을 둘러싼 논란 등의 사례가 그렇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두려움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으로 무엇을 할까? 내게 이 질문은 시민이 된다는 것과 어머니가 된다는 것 둘 다에 있어서 핵심적인 문제처럼 느껴진다. 어머니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힘과 우리의 무력함을 조화시켜야만 한다. 우리는 아이를 어느 정도까지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전혀 취약하지 않게 만들 순 없는 것처럼, 아이도 전혀 취약하지 않게 만들 수 없다. 도나 해러웨이가 말했듯이, <인생이란 취약성의 기간이다>.

-p.231

 

저자는 진부한 은유에 대하여 경계하지만 덧붙여 언급한 "시민이 된다는 것"이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힘과 우리의 무력함을 조화시켜야만 한다."는 이야기가 시선을 잡아 끈다.

 

삶은 지극히 사적이지만 결국 공적인 공간을 넘나들며 전개된다. 그러니 우리는, 어머니는 연약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더불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아이들과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려는 숭고한 노력으로 강건해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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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2-07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이란 취약성의 기간이다... 인생에 관한 여러 가지 정의들 중에서 가장 공감한 내용입니다.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르고, 질병의 고통을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이런 취약함을 잊으려고, 종교에 심취하거나 죽음과 관련된 이미지를 회피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합니다.

blanca 2016-12-07 19:13   좋아요 0 | URL
물 흐르듯이 평화롭게 살고 싶다, 하다가도 산다는 것 자체가 전투적 불안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때로 들어요.

GD 2017-01-2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남의 글을 읽고 글을 남겨보긴 처음입니다.제가 요사이 생각하는것과 무관하지않아서 주의깊게 읽게되었습니다.저는 일생이제까지살면서 나혼자만 잘산느것에 치중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글을 읽으면서 그렇게 살아왔다는데에 생각이 드네요 정말 난 한참 이기적인 인간이였구나하고말이죠 내이야기가 아니니 관심없던 나를 우리가족이야기가 아니니 무심했던 나를 반성하게 만드는 어머니의 힘이 대단합니다. 제가 어머니가 될수는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누가 어머니들을 욕보이지 말았으면 하는심정으로 고맙게읽은 글에 댓글을 남깁니다.좋은하루되세요

blanca 2017-01-23 10:24   좋아요 0 | URL
GD님 댓글은 저를 돌아보게 하네요. 항상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가진다는 건 큰 의미가 있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런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파가 왔는데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캐나다 퀘백주에 사는 오십 대의 그녀는 구순이 넘은 노모와 순리에 따른 작별을 하게 된다면 중앙아메리카 지역으로 떠나는 꿈을 꾼다고 했다. 맑지만 차가운 공기, 단풍나무 꿀, 그녀가 마침내 여장을 꾸리고 녹슨 스페인어를 갈고 닦을 그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그런 꿈을 꿀 수 있는 그녀가 한편 부러웠다. 이미 다 읽어버린 책처럼 나는 이제 꿈을 꾸지 않는데... 가고 싶은 곳을 떠올려 본 적도 오랜 일인 것 같다.

 

 

 

 

 

 

 

 

 

 

 

 

 

 

 

성 빅토르의 후고가 1128년경에 쓴 <디다스칼리콘>을 통한 이반 일리치의 읽기에 대한 통찰이 쉽게 와닿는 것은 아니었다. 후고는 "읽기를 존재론적인 치료 테크닉으로 인식하고 해석했다."는 문장에 표시를 한다. 또는 "읽는 사람은 모든 관심과 욕망을 지혜에 집중하기 위해 스스로 망명자가 된 사람이며, 이런 식으로 지혜는 그가 바라고 기다리던 고향이 된다."는 대목에도 잠시 멈춘다. 888년 전 수도사에게 읽는 일은 생 그자체였으며 그의 앞의 경전은 육화하였다. 그 앞에서 읽는 일은 "자신의 '자아'에 불이 붙어 빛이 반짝이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책은 추상적이 아닌 구체적이고 육체적이고 살아 움직이는 말씀 그 자체였다. 여기에서 읽는 일은 부차적인 여흥거리가 아니라 살면서 자신을 발견하고 점화하여 실현하는 일로 승화한다. 이러한 책의 존재론적 지위와 읽기에 대한 존중이 경건하게 느껴진다. 읽고 해석하고 배우고 체화하는 일은 매우 엄중하고 지엄한 일이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마침내 책이 돌아왔을 때 위화는 고등학생이었다. 그는 친구에게서 "사랑에 대한 책", <춘희>의 필사본을 받아들고 친구와 그 책을 함께 읽으며 필사하여 자신들만의 <춘희>를 소유하기로 한다. 친구가 가지고 온 아버지의 공책에 둘은 릴레이식으로 마침내 이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를 베끼기 시작한다. 꼬박 하룻밤이 걸려 둘의 협동 작전으로 베껴낸 <춘희>는 서로의 필체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느 불완전인 책이라 반드시 함께 읽으며 자신이 필사한 대목을 이야기해 주어야 했다. 그렇게 위화는 친구와 함께 <춘희>를 읽어냈다. 당시에 읽는 일은 때로 반혁명으로 곡해되었다. 대자보를 읽고 정부의 홍보물을 통해서만 읽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던 시기가 끝나가며 마침내 위화는 위대한 작가의 초입인 본격적인 읽기의 여정에 힘겹게 가까스로 합류한다. 그 여정은 코믹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면서도 '읽기'가 가지는 개인의 성장의 혁명적인 역할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오늘의 텍스트는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폄하된다. 그것을 밀고 이미지가 떠오른다. 즉각적이고 말초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숱한 이미지, 영상들이 읽기가 점유했던 혹은 숙성되어야 했던 공간을 차지하고 성장과 퇴락을 좌지우지한다. 이것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더이상 관심을 끌지 못한다. 세태는 한편 분명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거대한 진실의 눈을 가리고 있다는 점을 자각한다면 무조건적으로 그것에 압도되는 것은 분명 지양되어야 할 지점일 것이다.

 

여전히 읽는 일은 유효하고 지엄하고 생을 좀더 덜 저질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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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6-11-26 1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다,의 의미를 곱씹어 보게 합니다. 첫눈이 와요. 좋은 조짐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요.

blanca 2016-11-29 10:00   좋아요 0 | URL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꾸 비관이 되어서...그럴수록 더 의지적으로 낙관해야겠지요...
 

그에게 가장 위대한 경험은 '자기가 자기 자신임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몽테뉴는 자신을 위해서 자신과 어떤 일에 대한 경계를 찾아내는 데 골몰했다. 무슨 일에든 자신을 완전히 내주지 않고 빌려주는 정도로 끝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나아가 "영혼의 자유를 지키면서 분명히 옳다고 생각되는 드문 순간 말고는 그것을 빌려주지도 말아야 한다"라고 했다.

-김남주 <사라지는 번역자들> 중 

 

 

 

 

 

 

 

 

 

 

 

 

 

 

너무 당연한 몽테뉴의 이야기가 지금 이 시대에는 마치 거기 그렇게 어떻게든 있으려는 그녀를 정조준한 것 같다. 하기사 옳고 그름에 대한 자각의 순간이 이해 관계에 대한 직관으로 당연히 대체된다면 나머지 이야기는 시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나날이 참담하다.

 

이 책의 저자인 번역자 김남주는 프랑스 문학 번역자다. 로맹 가리, 카뮈의 책을 번역했다. 더불어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도 그녀의 손을 빌렸다. <사라지는 번역자들>은 저자가 남프랑스 아를의 번역자 회관에서 묵으며 세계 각국의 번역자들과 보낸 시간들 속에 '번역'이 가지는 근원적인 한계, 질문, 자신들이 번역했던 작품들에 대한 교감이 녹아 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페르시아어로 번역한 이란인과 페르시아의 시인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의 시를 불러내는 시간, 몽테뉴를 번역한 불가리아인과 볶음밥을 함께 먹는 순간, 인세를 적게 받아도 너무 사랑하는 시인이라 그 번역 과정 자체를 행복해했던 프랑스계 폴란드인 번역자와 심보르스카의 시를 주고받는 찰나. 이 모든 시간은 모국어가 아닌 구두의 번역 행위 속을 통과한다. 저자가 이야기한 '출발어'와 도착어' 사이는 멀고도 가까운 지점에서 손을 잡으며 놓치고 마는 것들을 뚫고 결국 만나는 그 작은 것들로 소통하며 교감한다. 번역은 꼭 다른 언어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타인과 이야기하는 그 모든 순간의 은유가 될 수 있을 터다. 나는 '이것'을 이야기하면 상대는 때로 '저것'으로 오해한다. 나의 생각, 마음 속을 떠도는 모든 언어가 발화되는 순간부터 그것은 어느 정도의 과장, 거짓, 착각의 옷을 입고 '너'를 향해 출발한다. 그것은 또한 '너'가 이미 단단히 쌓은 자신만의 철책의 경계를 힘겹게 뚫고 '너'의 언어로 이해, 해석을 거쳐 다시 되튕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人間'이 되는 것은 결국 그 둘 사이의 언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것을 포기하는 순간 인간은 사람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의미의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세상 속에서의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나 사라진다. 이것을 진실로 자각한다면 세상은 조금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다. 자녀를 통해 부, 권력, 명예를 세습할 수 있다는 욕망도 다 허상이다. 생은 한번 뿐이다. 모파상의 <벨아미>에서 자신의 궁색한 처지를 비관하다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무대로 탐욕을 가지고 기어오르기 시작하게 된 청년 뒤루아는 하필 화려한 야회가 끝난 뒤 동행한 노시인의 엄중한 조언을 듣게 되어 밥맛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두고두고 그에게 떠오르게 된다. 그는 청년 뒤루아가 추구하는 그 모든 것의 민낯을 드러낸다. 모든 것에는 결국 '죽음'이라는 종결이 있기 마련이라는 자각과 자신의 상황 자체에 매몰되지 말고 그 상황에서 물러나 자신의 삶 그 자체를 객관화시키는 현명함을 가지라는 이야기는 젊디젊은 욕망쟁이 청년을 불편하게 만든다. 늙은 남자는 자신 앞에 남아 있는 죽음 앞에서 인간들이 욕망에 좌지우지되며 미쳐 날뛰는 세상을 서글프게 바라본다.

 

 

 

 

 

 

 

 

 

 

 

 

 

 

 

 

잿빛하늘이 맑게 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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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1-21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듣는 것보다 말하는 존재의 성격이 더 강하죠. 듣는 것도 말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말을 배우듯.
동물들의 대화가 상호적인 것과는 매우 다르죠. 인간의 강한 자의식 때문에 이런 큰 차이가 난다 싶어요.

독서가 말하기 위해서 인가, 잘 듣고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 인가는 읽는 이의 성향에 따라 많이 달라지겠죠. 종교가 독특한 것은 한없이 들으려 하는 그 자세. 지금은 너무 변질되고 파편화 되었지만 이것도 인간이 만든 삶의 순리라면 순리겠죠.
듣는 일에 몰두하는 번역자는 겸손할 수밖에 없겠다 생각합니다.

blanca 2016-11-22 12:59   좋아요 0 | URL
나이가 들수록 그런 성향이 더 강해지는 것 같아요. 잘 들어주는 것이 사실 대화술의 절반인 것 같아요. 사실 듣는 순간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 해야 하는 말을 짚어보게 되잖아요. 상대를 진정한 의미에서 존중한다면 사실 절로 듣는 일이 즐거워야 되는데... 저도 유념해야겠어요.

기억의집 2016-11-21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간 벨아미가 순시리와 닭으로 오버랩 되네요~ 탐욕!

blanca 2016-11-22 13:00   좋아요 0 | URL
아, 몇 년 전에 읽고 다시 읽었는데 게다가 그런 벨아미 같은 놈이 잘 나가는 해피엔딩이었다니. 어젯밤에 다 읽고 기분이 절로 나빠져서 처분하려고요...모파상한테는 미안하지만...
 
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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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기억하게 될지 너는 안다, 그는 생각에 잠긴다. 허술한 기억이 무엇을 간직하게 할지 너는 안다.

 

 

 

여든한 살에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렇게 많이 늙어도 참 괜찮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절필을 선언해버린 나이 든 필립 로스의 결심이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트레버가 늙고 또 나이 들어 다시 한번 젊은 남녀의 사랑에 충분히 이입하며 그 안에서 유장한 삶들을 담을 수 있다,는 예시는 그의 결심을 아쉬운 것으로 만든다.

 

6월의 초저녁, 아일랜드의 라스모이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 대부분 이곳에서 계속 살았다."는 설명만으로 충분히 상상이 가능한 이 소박한 작은 마을의 코널티 부인의 장례식으로 이야기는 풀려 나간다. 장례식은 물론 망자의 것이기에 어느 정도 아쉽고 슬프지만 그 장례식으로 인해 하나의 사랑이 시작되었고 끝났으니 존중받을 만하다. 남은 남매는 이미 충분히 나이든 중년의 코널티 남매다. 누이는 젊은 시절 사랑을 잃었고 죽은 어머니를 대신해 라스모이 마을의 '광장 4번지' 민박집을 운영하게 되고 남동생 조지프는 이런 저런 코널티 가가 남긴 저탄장 등 마을의 시설들을 관리하게 된다. 사랑은 우연히 장례식 날 출사를 나온 청년 플로리언이 수녀원에서 지내다 가정부로 왔다 주인의 아내가 된 엘리에게 길을 묻다 피어난다. 나이 든 코널티 양은 이 은밀한 여름의 우정, 사랑을 자신의 그것에 빗대어 목격한다. 신분 차에서 시작된 결혼 반대로 사랑의 도피를 한 부모의 유산인 저택을 처분하며 이미 떠나기로 예정된 플로리언과 유부녀이자 아내와 아이를 실수로 죽게 한 나이 든 남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엘리의 교감은 이미 해피엔딩을 가정한 것이 아니었다. 이 사랑을 둘러싸고 흐르는 라스모이 마을 사람들의 삶의 정경은 단조롭지만 평화롭고 아름답다. 저마다 잃어버린 것들이 있지만 그것이 영원히 그들을 압도하는 것은 아니다. 양을 치고 농사를 짓고 밥을 짓고 서명을 하는 등의 생업, 일상을 영위하며 그 틈새를 흐르는 생의 저류는 어쩐지 눈부시다. 트레버의 언어는 간명하고 절제하고 빛난다. 그의 언어를 통과해 나온 삶은 어떤 것이라도 충분히 위대해 보여서 눈물이 난다. 사랑도 고통도 이별도 중언부언하거나 과장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깔끔하게 떨어진다. 언어가 이 삶의 난삽함을 이겨낸 듯하다. 그것이 착각일 지라도 그가 정리한 삶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어서 삶을 살 만한 것이라 믿게 만든다.

 

불가능한 것은 하나도 없다.

정말 그렇다. 마침내 사랑의 도피를 포기하고 남게 되는 엘리와 그런 엘리를 떠나며 자신이 기억할 것들을 그러모으는 그의 남자와 이미 한참 전에 잃어버린 사랑을 추억하며 엘리의 이별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정리하는 코널티 양에게는 여전히 그러한 것들을 치유하는 시간의 양이 있을 테니 말이다. 기억도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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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11-15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리뷰가 참 좋네요, 블랑카님. 언제나처럼요. 안그래도 이 책 읽어보고 싶었는데, 블랑카님 빨리 읽으셨네요. 제목도 좋아요. 여름의 끝, 이라는.

사랑의 도피를 포기하고 남게 되는 이야기라니,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blanca 2016-11-16 11:37   좋아요 1 | URL
아, 정말이지, 최고였어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트레버를 읽는다‘, 이런 표현을 많이 써서 트레버가 대체 누구야? 그랬거든요. 다 읽고는 너무 좋아서 일어났다니까요. ㅋㅋ 제인에게 헌정되어 있어 찾아보니 제인은 트레버가 사십 년 넘게 함께 한 아내 이름이더라고요. 다락방님도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시이소오 2016-11-15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결하고 절제되어 빛나는 리뷰. 언제나 좋군요. ^^

blanca 2016-11-16 11:37   좋아요 1 | URL
책이 너무 좋으니 리뷰는 그 감동의 반도 못 담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