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독서가 낯설고 시작하기를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충고는 일단 읽기 시작해봐라라는 것이다. <모비 > 좋다는 이야기만 듣고 문학동네와 작가정신판본으로 모자라 만화 버전까지 사둔  일년 만에 별다른 기대감을 가지지 않고 펼쳤다거의 900쪽에 이르는 벽돌 책을 아껴가면서 읽게 되더라

 

주인공 이슈마엘이 식인종 출신의 동료와 만나는 장면에서 무서워하는 내용은  어떤 코미디 보다  웃겼다고래와 포경 업에 관한 넓고 세밀한 정보는 책을 놓기 싫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실제로 모비 딕을 만나 추격하고 사냥을 하는 장면은 거의 말미에 수십  등장하며 별다른 극적인 서사가 없는데도소설이 주는 즐거움을 오롯이 채워주는 명작이라니무엇보다 <모비 > 빠져들게 하는 요소는 고전은 오래된 미래라는 명제를 틈나는 대로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눈은 여러 물체를 한꺼번에  수는 있지만 동시에  가지 물건을 세밀하게 관찰   없다는 구절을 읽고  여태 살도록  생각을 자각하지 못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고전을 누가 낡은 것이라 했는가. 19세기에 쓰여진 책을 읽고 21세기를 사는 사람이 새로운 지식을 얻는데 말이다

 

상류층 출신의 이슈마엘이 포경선에서 제일 하급 직원 그러니까 노꾼으로 취업을 하려고 하다가 자괴감에 빠져들었다노꾼은 선장항해사작살꾼보다 아래 그러니까 노예의 신분이나 다름없다스스로 노예의 길을 걷겠다고 덤벼들다가  자괴감에 빠지지 않겠는가

 

이슈마엘의 반문에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우리들 중에 노예가 아닌가  누구인가

 

명칭이 노예가 아닐  40~50명으로 구성된 포경선의 조직 사회와 내가 근무하는 직장의 생태가 노동의 종류를 제외하면 뭐가 다른 것인지 찾지 못하겠더라이젠 교사는 노동자라는 생각에 반감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교사는 전형적인 감정노동자다

 누구도 교직의 사명감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학교는 그저 직장이고 교사는  벌어 먹기 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교직 생활의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고 실제로 그렇다형사처벌이라는 용어가 공문서에 흔히 등장하고 실제로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하는 행위가아닌 단순한 행정적인사적인 실수를 해서 형사처벌을 받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다학교에서 하는 모든 행위를 하기 앞서서 무슨 탈이 생기지 않을까라는생각을 항상 먼저 하게 된다 생각이  모든 가치보다 앞서는 것이 현실이다.

 

나쁜 짓을 하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명제에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니고 처벌에 대해서 과도하게 의식을 해야만  탈없이 교직생활을   있다는 뜻이다.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는 여학생의 치마가 짧으니 실수라도 치마 밑을 본다는 고발(?) 당할 수가 있으니  선생들은 급식소의 제일 끝에서 창가를 향하는자리에만 의무적으로 앉아야 한다는 지침을 심각하게 시행할지 말지 고려를 했었다.

 

관리자라고 어디 노예가 아니던가가만히 보면 평교사보다  눈치를 보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하다이재용이라고대통령이라고 마냥 편하고 상전 노릇만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세월이 갈수록 19세기 고전의 통찰이 더욱 현실화되는 것이다고전은 오래된 미래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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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8-13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어제 리뷰에서 모비 딕을 아껴가며 읽으셨다기에
의아했습니다. 전에 모비 딕은 지루해서 완독하기가 어렵다고 하던데
안 그런가 봅니다. 그러니 저도 문득 읽어보고 싶네요.
그런데 작가님은 역시 진정한 독서가십니다.
모비 딕의 버전을 여러 가지로 갖고 계시는군요. 대단하세요!!^^

박균호 2020-08-13 19:04   좋아요 0 | URL
독서가라기 보다는 수집가에 더 가깝지 않나요? 아무래도 극적인 서사가 별로 없으니 지루하게도 느낄수도 있는데 글에 언급한 저런 내용에 주목하다보니 정말 재미나더라구요.

2020-08-13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13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0-08-14 1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기엔 너무 두껍습니다. ㅋ
이젠 3백 쪽 이내의 책을 선호하게 됩니다.

박균호 2020-08-16 07:35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러시군요. 그런 분량이 편하긴 해요.
 

특이하다고 할 수도 있는데 나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이념보다는 가족애가 우선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형제인 염상진과 염상구는 서로를 향해서 총구를 겨눠야 하는 처지다. 형 염상진은 빨치산을 동생인 염상구는 우익의 편에서 형을 소탕해야 하는 입장이다.
마침내 염상진이 토벌군에 의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빨갱이라고 모욕을 받을 때 염상구는 가슴에 넣어두었던 형제애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놓는다. ‘살아서 빨갱이지 죽어서도 빨갱이냐’고 형을 보듬는다. 내 입장에서는 태백산맥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지점이었다.
시험 기간이라 일찍 퇴근해서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넷플릭스로 삼국지를 보기로 했다. 과연 책으로 읽었던 때와는 다른 감동이 느껴졌다. 이제 막 여포가 천하의 절색 초선의 꼬임에 빠져서 주군인 동탁을 향해 창을 겨누는 순간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내가 피식피식 웃으면서 <뽕숭아 학당>을 봐야 하니 지금 보고 있는 삼국지를 그만 보란다. 식겁했다. 그놈의 임영웅, 뽕숭아 학당.
그건 그렇고 마치 등 뒤에서 아내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착각을 했다. 가족 계정으로 묶인 사용자들은 다른 사용자가 어떤 영상을 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모양이다. 새삼 참 무서운 세상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아내의 목소리 뒤로 딸아이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아내의 여포인 딸아이는 분명 대낮에 운동이나 공부를 하지 않고 골방에 혼자 누워 넷플릭스에 빠져 있는지 애비를 탓하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아내에게 한마디 항변도 하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넷플릭스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일으켰다. 몇 번을 돌려보아도 지겹지 않은 <살색의 감독 무라니시>를 보다가 딸아이에게 들키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이라는 안도감으로 아내에게 전혀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키보드로 손을 뻗는데 전화기 너머로 딸아이의 목소리가 커졌고 무슨 말을 하는지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빠는 혼자 사는데 넷플릭스라도 봐야지. 아빠는 그냥 보게 하고 엄마가 나중에 봐”
이십 년 동안 마음에 두었던 염상구의 형제애가 새삼 또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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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8-12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색의 감독..이 도대체 뭔가 해서 검색해봤네요ㅎㅎ; 저는 조카가 제 계정으로 넷플릭스 시청 중인데 가끔 이 아이가 뭐 보나~ 체크-_-해 보게 되더라구요 호호^^ 효녀 따님이시네요. 흐뭇하셨을 듯. 그러나 임영웅의 늪은 매우 깊은가봐요. 일흔 넘으신 제 엄마도 영웅 앓이 중^^;;;;;;

박균호 2020-08-12 21:53   좋아요 0 | URL
ㅎㅎㅎ 감히 불후의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av에 대한 순수하고 열정적인 태도 ㅎㅎㅎㅎ 리스펙트하게 되던데요. 그리고 초반에 주인공이 영어교재 영업사원으로 일하면서 성공스토리가 나오는데 너무 재미나요 ㅎ
 
혼밥 판사
정재민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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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 판사>라는 제목이 입에 착 감기지 않았다. <혼밥>과 <판사>가 따로 노는 느낌이다. 마침 표지도 아래위가 다른 세상처럼 구분이 된 디자인이다. 요즘 시대에 혼밥이 드문 일도 아니어서 혼밥을 하는 판사라고 해서 그다지 신기한 일은 아니다. 


불운하게도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는 무려 900여 쪽에 달하는 <모비 딕>을 아껴가면서 읽은 터였다. 제목만 읽고 판사 양반이 유유자적하게 고급 음식점이나 맛집을 탐방한 이야기를 모은 책으로 생각했다. 삐딱한 자세로 읽어 나간 지 3분 만에 혼자 지내는 골방에서 육성으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깡치를 떼고 나면(쟁점이 복잡하고 다툼이 많아서 기록이 너무 두툼한 사건에 대한 선고를 마치고 나면) 마치 학창 시절에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난 듯한 기분이 든다. 몸과 정신이 아주 피곤한데도 그동안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은 것인지 몸에 해로운 일탈을 하면서 더 놀고 싶어진다. 그런 날은 라면을 먹게 된다. 


뭔가 거창한 일탈(?)을 상상하다가 기껏 라면이라니. 거참 재미난 분이라는 감탄과 제대로 각을 잡고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임영웅이 부르는 노래처럼 독자를 밀고 당기는 탁월한 글쓰기 실력을 갖춘 작가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을 “시베리아 벌판에서 굶주리는 늑대”라고 지칭하던 어느 필로폰 중독자는 “칼에 꽂혀 있는 시뻘건 오소리의 간을 보고 그만 눈이 멀어서 핥아먹다가 아가리가 칼에 베이는 줄도 몰랐습니다”라며 마약의 중독성을 시적으로 표현한 적도 있었다. 나도 옛날에 노란 냄비에 담겨 있던 뻘건 라면을 보고 그만 눈이 멀어서 핥아먹다가 나트륨에 몸이 베이는 줄도 몰랐다.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이토록 유머가 넘치는 글이라니. 급기야는 경외심과 감탄을 연발하면서 읽은 <모비 딕>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저자 정재민은 그만큼 매력적인 인물이고 <혼밥 판사>는 그만큼 재미난 장면이 이어져 있었다. 


이혼 재판을 이야기하면서 천연스럽게 내놓은 다음 구절도 혼자서 키득 키득 웃게 만든다. 


자기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토록 밝은 표정으로 들뜬 목소리를 내는 남편은 처음이었다. 그때 내가 대꾸할 겨를도 없이 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남편에게 삿대질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이 인간아. J가 네 사위다. 얼마나 집구석에 관심이 없으면 니는 네 사위 이름도 모르나?


암이 재발해서 죽음을 목전에 둔 모친이 평소에 좋아하던 칼국수를 같이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 저자는 거절한다. 밀가루 음식이 환자에게 좋은 것이 없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얼마 뒤에 모친은 세상을 달리했고 저자는 마지막 만찬을 거절한 일을 후회한다. 이어지는 다음 문장이 이랬다


칼국수가 나왔다. 잘 빗은 머리칼처럼 질서 있게 차곡차곡 면발이 쌓여있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후회되는 일이 많은 것은 세상 모든 자식의 공통분모다. 내 어머니가 요양원에 계실 때 내가 찾아 뵐때마다 어머니는 냉장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어머니의 간식을 나에게 권하셨다. 고집스럽게 권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어머니의 몫이니 먹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언성을 높여가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때 맛있게 먹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혼밥 판사>는 음식 이야기와 판사 재직 시절 에피소드가 함께 하는 책이다. 내가 썼다면 에피소드 따로 음식 이야기 따로 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따로국밥이라고 해야겠다. 밥을 먹으면서 불고기를 반찬으로 먹는 그런 식이다. <혼밥 판사>는 재판 이야기와 음식이 함께 어우러진다.


맛있는 음식이 차려지는 가운데 재판 이야기가 오버랩된다. 이런 책에서 드라마틱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그려지는 경우는 처음이다. 혼밥과 판사 이야기가 따로 노는 따로국밥인 줄 알았더니 고기와 국물이 잘 어우러진 꼬리곰탕과 같은 책이다. 욕심 같아서는 드라마로 제작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은은한 영상미와 감동이 밀려오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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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8-12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 소개 기사에서 보고 궁금했던 책인데 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 저도 읽어보고 싶어요. 세상엔 능력자가 참 많아요. 판사님 작가님@_@;;;;; 보관함에 넣습니다^^

박균호 2020-08-12 21:55   좋아요 0 | URL
음...순수하고 착한 심성이 느껴져서 좋았어요.
 

얼마전 내가 인세를 제법 받았다는 사실을 실토하였다. 아내와 딸은 부의 재분배를 요구했는데 아내는 소박하게도 향수 하나면 충분하단다. 향수를 좋아하는 아내에게 지금까지 향수를 선물해준 적이 없으니 귀띔 해준 것이 감사하다.
인터넷과 주위 여자분들께 탐문 조사를 한 결과 적당한 것을 골랐다. 생각한 것보다 비싼 가격에 놀랐지만, 모름지기 아내에게 하는 선물인데 그 정도는 써야겠더라. 어이없는 것은 인터넷 쇼핑몰에는 팔지 않고 오직 오프라인 매장에 연락해야만 살 수 있다고.
어찌어찌하여 주문을 하고 배송을 기다리는데 담날인가 아내의 화장대에 내가 주문한 향수가 다소곳이 자리 잡고 있다. 옳거니, 내가 없는 사이에 아내가 택배를 받았구나 싶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따로 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부부 사이에 그 정도 일에 따로 인사를 하고 그런 것은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의아하게도 다음날 향수가 배송된다는 문자를 받았다. 업체에서 실수로 두 번 보낸 것으로 생각하고 이제 막 아파트 입구에서 나에게 배송할 요량으로 택배 상자를 들고 오는 기사에게 반품할 것이니 다시 가져가라고 부탁을 드렸다. 한 달쯤 지났을 때 아내가 느닷없이 ‘당신 향수 온 거 반품했지?’란다. 그제야 눈치를 챘다. 어지간히 무던한 양반이다.
내가 천리만리를 거쳐서 선정한 진상품이 사실은 아내가 이미 사용하고 있었던 제품이었다. 아내의 화장대에 있던 향수는 아내가 구매한 것이고 거의 다 사용해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찌나 부주의한지 카드 사용 명세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었다. 자칫하다간 센스 있는 남편이 될 뻔한 기회를 놓쳐버렸다. 어느 날 갑자기 기관장으로 승진할 기회를 놓쳤다고 해도 이토록 아쉬울까.
다행히 만회할 기회가 왔다. 오늘이 바로 아내의 생일이 다가왔다. 생일 선물로 문제의 그 향수를 선물하면 되지 않겠는가. 감동의 무게는 덜 하겠지만 말이다. 주말부부라 얼굴을 보지 못하는 아내에게 전에 없이 이모티콘을 보내고 생일을 축하한다는 문자로 부족해서 전화를 걸어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자연스럽게 선물 이야기가 나왔는데 아내는 물건을 싫고 미션 하나를 줄 테니 그것만 잘 수행해 달란다. 미션 내용은 문자로 통보하겠단다. 잠시 뒤에 도착한 아내의 미션을 보고 숨이 멎는 듯했다. ‘임영웅이 부른 ’바램‘을 불러 달라고’
자비로운 아내는 친절하게도 직접 불러주기가 머쓱하면 녹음을 해서 보내줘도 된다고 했다. 나는 학창 시절 음악 시간을 제일 싫어했다. 타고난 음치였다. 똘똘한 강아지에게 시켜도 나보다는 더 잘 부를 것이다. 당연히 성적은 항상 수우미양가 중에서 ‘양’이었다.
군대 시절 구보를 하면서 뒷줄에 선 고참이 장난삼아 나에게 군가를 독창하라고 했을 때 차라리 나를 죽여주시라는 심정으로 하지 않고 버티다가 구타를 당한 것이 얼마나 자주였던가. 모래에 원산폭격을 두 시간 시켜도 나는 끝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한동안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다가 ‘하긴 해야겠다’라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고참이 시키는 노래를 하지 않았다고 번번이 고초를 겪는 나를 안타깝게 여긴 다른 고참이 한 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균호야, 넌 참 쉬운 일을 어렵게 만드는구나’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그 고참이 다시는 나에게 노래를 시키는 용기를 내지는 않았을 터인데 말이다.
무엇보다 명품백이나 고가의 화장품을 마다하고 남편이 불러주는 노래 한 곡을 소원하는 아내의 ‘바램’을 거절할 수는 없다. 시험 기간이라 일찍 마치는 날인데 점심도 마다하고 퇴근을 했다. 빨리 집에 가서 ‘바램’을 녹음해야 하니까.
운전하는 내내 임영웅이 부르는 그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 차 속에서 미친 사람처럼 크게 따라 불렀다. 과연 어려운 노래였다. 대학 시험을 볼 때도 이토록 비장하지는 않았다. 원룸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로 반주를 틀어놓고 학교에서 출력해온 ‘바램’ 가사를 낭독하기로 했다. 아내는 잘 불러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고 다만 불러달라고만 했다.
엄숙하게 작업을 시작하였지만, 뜻밖의 난관을 만났다.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 단 2~3초를 녹음하다가 혼자 웃음보가 터져 저 멈추기를 거의 열 번 이상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상상을 하기로 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을 하면 웃음이 터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봤는데 노래 부르기에 너무 집중을 하다 보니 ‘생각’이라는 것을 여력이 생기지 않았다. 계속 웃음이 터져 나온다.
노래를 부르면서 내 코를 쥐어박아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머리를 너무 세게 쥐어박았다가 하마터면 욕이 튀어나올 뻔 했다. 결국 웃음이 없이는 완창을 못 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반주를 배경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 불가능하고 반주를 듣고 나서야 노래를 할 수 있겠더라.
결국 웃음이 터지면 터지는 대로, 내가 지금 국어책을 읽고 있는 게라는 생각이 들면 드는 대로, 불굴의 의지로 노래 부르기를 이어나갔다. 웬 노래가 이렇게 긴가. 가사가 복사용지 한 장을 가득 채운다. 녹음이 진행될수록 나의 가벼운 목소리는 휴대폰 녹음 앱으로, 나의 무거운 영혼은 깊고 깊은 심해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웃음을 참느라 한 소절을 읽고 입을 털어막아가면서 몰입한 결과 마침내 나는 ‘바램’을 완창하였다. 기념비적인 일이다. 러닝타임이 무려 4분 2초에 달하는 대작이었다. 세상에 없는 음치의 노래가 기초공사를 차곡차곡 하다가 마침내 거대한 불협화음의 성이 완공되어 있었다.
노래도 아니고, 낭독도 아닌 정체불명의 ‘중얼거림’ 정도로 정의해야겠다. 아내와 딸은 이 파일을 영구 소장할 것이다. 틈나는 대로 내 앞에서 그 노래를 틀면서 나를 놀려대겠지.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어쨌든 나는 아내의 생일을 기념하여서 노래를 불러주었으니까.
떨리는 손으로 아내에게 나의 불후의 명작을 보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넋이 빠져나가 있는데 아내의 답장이 왔다. 아내에게 난생처음 듣는 찬사를 들었다. “아주 감동적이야” “고마워”라는 답장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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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8-05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임영웅 노래 어려운데ㅜㅜ;;;; 녹음 성공 축하드립니다. 저도 음치박치라ㅠㅠ 막 웃으며 읽었지만 그 노력에 공감하고 감동받습니다^^

박균호 2020-08-05 23:43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어렵더라구요. 근데. 전 모든 노래가 다 어려워서..ㅎㅎㅎ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2020-08-06 0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06 0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06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06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06 16: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 산소에 잡초가 많이 생겨서 조만간 벌초를 해야겠단다. 두어 시간을 운전해야 갈 수 있는 어머니 묘소에 딸이 찾아뵙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닌데 숙모님도 함께 오셨다고 한다. 그날이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 생신이란다. '죽고 나서 산소를 잘 꾸미는 일 쓸데 없는 짓이다'. '살아 있을 때 찬물 물 한 바가지 주는 것만 못하다'는 어머니의 소신을 신봉하는 나는 그날이 어머니 생신인 것도 몰랐다.


 알았다고 해도 산소에 갈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세상을 달리한 동서의 생일을 맞아 일삼아 산소를 찾아뵙는 숙모님의 정성에 새삼 감탄을 하게 된다. 며느리 사이의 정서를 남자인 내가 가늠할 수는 없다. 다만 혈육이 아니더라도 짐작할 수 없는 정과 의리가 있다는 사실만 감지할 뿐이다. 감히 내가 가늠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다. 그분들끼리의 추억과 정서가 있을 것이다.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않는 내가 부끄럽기도 하다. 몰랐으면 모르데 알고는 지나칠 수가 없어서 형제들이 각출해서 어머니와 아버지 산소를 손보기로 했다. 인부가 두 명이 왔는데 한 분은 여든이 훨씬 넘어섰다. 그런데도 봉분을 부수고 새로 조성하는 일을 능숙하게 잘하신다. 


비석에 쓰인 함양박씨라는 문구를 보시더니 ‘탑골에 박 씨가 아무개가 있는데’ 라시며 우리 집안 어른의 존함을 술술 말씀하신다. ‘할아버지, 방금 말씀하신그분이 이 묘의 주인이세요, 저는 아들이고요’라고 말씀드렸다. 3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력과 형제들의 존함을 어제 일처럼 말씀하신다.


꿈에서조차 보기 힘든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을 만나면 마치 아버지를 눈앞에서 뵌 것처럼 감격스럽고 눈물겹다. 세상을 먼저 떠난 동서의 생일을 기억하고 발걸음을 주는 것과 우연히 만난 옆 동네 어른에게 아버지의 흔적을 듣는 일은 이제 다음 세대에서는 겪을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숙모님과 그 어르신이 건강하고 오래 사시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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