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를 빨아 버린 우리 엄마 도깨비를 빨아 버린 우리 엄마
사토 와키코 글.그림, 이영준 옮김 / 한림출판사 / 199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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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빨래하는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은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 사토 와키코,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엄마》



.. 엄마는 힘차게 말했습니다. “좋아, 나에게 맡겨!” ..  (32쪽)


 도깨비를 빨든 두꺼비를 빨든 예부터 우리 나라를 비롯해 숱한 나라에서는 ‘어머니’와 ‘할머니’와 ‘언니(누나)’만이 빨래를 하고 있습니다. 양말짝이든 손수건이든 ‘아버지’나 ‘할아버지’나 ‘형(오빠)’이 빨래를 하는 일이란 더없이 드뭅니다. 빨래를 해 주는 기계가 없던 지난날이든, 빨래를 해 주는 기계가 있는 오늘날이든, 빨래하기라든지 밥하기라든지 쓸고닦기라든지 아이보기라든지 온통 여자가 할 일로 여깁니다. 대학교를 다녀도 남녀가 함께 다니고, 일터에 다녀도 남녀가 함께 다닙니다. 그러나 혼인을 하고 난 뒤에 밥상을 차리고 집살림을 맡아 꾸리는 사람은 오로지 여자입니다. 남녀 둘 모두 바깥일에 바쁘다면 ‘여자인 아줌마’한테 돈을 주며 집살림을 맡깁니다.

 이 나라 대한민국이든 이웃나라 일본이든, 할머니부터 언니까지 “좋아, 나한테 맡겨!” 하고 외치며 소매를 걷어부칩니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이든 나어린 언니이든, 당신들한테 집살림을 맡긴다 해서 손사래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빨래이든 밥하기이든 애보기이든, 이런저런 집안일을 남자한테 시키면 어떠한 말이 돌아올까 궁금합니다. 이 나라 남자들도 여자들하고 마찬가지로 “좋아, 나한테 맡겨!” 하고 다부지게 외칠 수 있을는지요.

 일본 그림책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엄마》를 넘깁니다. ‘우리 엄마’는 아주 씩씩합니다. 고되고 고달플 집일일 텐데 아무렇지 않은 낯빛으로 당차게 해냅니다. 당차게 해낼 뿐 아니라 기운이 남아돌아 고양이이고 강아지이고 도깨비이고 모조리 빨아치웁니다.

 어쩜 이럴 수 있으랴 싶으면서, 어쩜 이럴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나이 일흔이 넘든 여든이 넘든, 할머니들은 당신 딸아들한테든 손자한테든 ‘밥을 차려 주려’ 애씁니다. 당신 딸아들이나 손자가 차려 주는 밥을 얌전히(?) 앉아서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아기가 울면 당신이 먼저 일어나서 달래려 하고, 아기가 오줌이나 똥을 지르면 당신이 손수 치우려 합니다. 먼지를 보면 당신이 걸레를 빨아 훔치려 합니다. 노상 일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언제나 일을 익숙하게 해냅니다.

 집에서 하든 밖에서 하든 똑같이 일입니다. 집에서 하니 집안일이고 밖에서 하니 바깥일입니다. 집안일이 더 작다든지 더 크다든지 할 수 없습니다. 바깥일이 더 크다느니 작다느니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집안일과 집밖일을 하기 마련입니다. 집안에서는 살림을 꾸립니다. 집에서 살아야 할 사람들 삶을 토닥이고 다스리며 어루만집니다. 집밖에서는 집안에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땀을 흘립니다. 텃밭에서든 논밭에서든 스스로 농사를 짓거나 어느 일터를 다니며 돈을 벌어 곡식을 사든, 집밖에서는 집밖에서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으레 ‘하루 여덟 시간 한 주 닷새 일하기’를 이야기합니다. 이런 일하기를 제대로 지키는 곳이란 공무원 일터 말고는 없지 않느냐 싶은데, 아무튼 집밖일이란 ‘하루 여덟 시간 한 주 닷새’를 넘지 않도록 마음을 기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루 여덟 시간은 잠을 자야 몸이 튼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루에 세 끼니를 먹든 두 끼니를 먹든 한 끼니를 먹든, 밥먹는 겨를을 두어 시간 또는 서너 시간 마련합니다. 씻는 겨를을 마련하고, 쉬는 겨를을 마련합니다. 하루 씀씀이를 돌아본다면 우리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놀러 다니거나 할 겨를이란 얼마 안 됩니다. 이 땅에서 집살림을 꾸려 온 어머니들로서는 ‘하루 여덟 시간 잠자기’를 해서는 도무지 집안일을 맡을 수 없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 아버지들이 집밖에서 보내는 겨를이 길 뿐더러 집안으로 돌아와서는 손을 놓고 지내거든요. 게다가 지난날에는 연탄불을 갈든 아궁이불을 갈든 하는 몫을 어머니가 으레 했지, 아버지가 으레 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집안일이란 쉬는 날이 없습니다. 일요일이라고 밥을 안 먹을 수 있나요. 토요일이나 공휴일이라고 빨래를 쉬어도 되겠습니까. 하루에 딱 여덟 시간만 집일을 하면 되니까 설거지는 안 한다든지 아이는 안 보아도 될는지요.

 그림책 이야기일 뿐, 우리 삶에서는 얼마든지 다르지 않느냐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엄마》라는 책이 아닌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아버지’라는 책이 나오고, “아버지는 힘차게 말했습니다. ‘좋아, 나한테 맡겨!’” 하고 외칠 수 있으면 얼마나 흐뭇하면서 한결 재미나고 멋질까 하고 곱씹어 봅니다. 그림책 하나로 모든 삶과 꿈을 바랄 수 없을 테지만, 앤서니 브라운 님 그림책 《돼지책》 마무리와 같은 삶을 우리 스스로 일구지 않는다면, 도깨비를 빨아버리든 컴퓨터를 빨아버리든 고양이를 빨아버리든 시원하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우리한테 스며들기란 어려운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 그림책 이야기는 참으로 시원하고 정갈합니다. 제아무리 이 땅 사내들이 더욱 아름다우며 알찬 길을 걷지 못할지라도, 이리하여 이 땅 어머니들이 갖은 집안일을 도맡느라 힘겨운 굴레를 뒤집어쓰고 있달지라도, 그림책 어머님처럼 “좋아, 나한테 맡겨!” 하면서 꿋꿋한 마음결과 너그러운 마음씨를 건사하시거든요. 바라기로는 《돼지책》과 같은 마무리이지만, 생각하기로는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엄마》는 오늘 우리 어머니들한테 바치는 고마운 인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 또한 언제나 일만 하는 우리 어머니를 둔 까닭에, 처음 제금날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빨래며 밥하기며 쓸고닦기며 제 손으로 합니다. 열예닐곱 해 동안 빨래기계란 한 번도 안 쓰고 오로지 손빨래를 합니다. 손수 밥하고 손수 쓸고닦으며 손수 아이를 봅니다. 종이기저귀 아닌 천기저귀를 씁니다. 아이가 두 돌이 지나고 스물다섯 달째 살고 있는데, 이제까지 기저귀를 몇 만 장 빨았는지 셀 수 없습니다. 뭐, 빨래가 기저귀만 있지 않아요. 이불도 빨고 옷가지도 빨고 하니까요.

 머잖아 스무 해째 손빨래로 살아온 셈이 되는데, 손빨래를 하면 얼마나 마음닦기가 잘 되고 흐뭇하며 시원한지 모릅니다. 다만, 손빨래를 하면 힘이 들기는 꽤 들고 허리가 아프기는 꽤 아픕니다. 한 시간 남짓 손빨래를 하면 팔과 허리가 저립니다. 뒷목이 뻣뻣해집니다. 날마다 손빨래에 한두 시간이나 두어 시간을 써야 하면 손에 물이 마르지 않아요. 손빨래하는 살림살이는 손빨래로 그치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손빨래를 하고 손수 밥하고 아이를 보는 살림살이는 ‘들이는 품’에 걸맞게 두 손으로 사랑을 느끼고 온몸으로 믿음을 나눕니다. 기계나 돈한테 맡기는 집살림이 아니기에 더더욱 따사롭고 보드랍습니다. 저로서는 이토록 아름답고 즐겁다고 느끼는 손빨래를 기계한테 내어주고 싶지 않습니다. 기계를 써서 밭에 씨앗을 심으면 허리가 덜 아프겠으나, 저로서는 손으로 흙에 구멍을 내어 씨앗을 심을 때가 허리는 아프지만 굵은 땀방울과 함께 보람을 느낍니다. 물뿌리개로 약을 치면 풀을 금세 잡는다지만 호미를 들어 풀을 뽑고 캘 때 방울지는 땀과 함께 살아숨쉼을 느낍니다.

 그나저나, 일본 그림책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엄마》에 나오는 도깨비는 우리가 아는 도깨비가 아닙니다(한국 도깨비를 제대로 아는 사람부터 얼마 안 됩니다만). 일본에서 ‘오니’라고 하는 녀석입니다. 한국에서는 일본책을 옮기며 일본 ‘오니’를 으레 ‘도깨비’로 적어 놓는데, 일본하고 한국하고 문화와 삶이 비슷한 데가 많아 이와 같이 적어야 더 낫지 않느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일본 오니는 오니입니다. 김치와 기무치가 다르고 된장과 낫토가 다르며 태권도와 가라데가 다릅니다. 더구나 한국 도깨비는 이 그림책에서 나오듯이 뿔 둘에 눈 둘에 팔다리 둘이 아니며, 이 그림책 도깨비처럼 가죽 반바지를 걸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아이들한테 읽히기 좋도록 ‘도깨비’라는 낱말을 쓰는 일은 얼핏 보기에 괜찮을는지 모릅니다만, 한국과 일본은 닮은 구석이 있는 삶이라 할 수 있어도 같지 않은 삶입니다. 서로 다르고 저마다 다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고 저마다 다른 가운데 모두모두 헤아리고 어깨동무하는 고운 마음바탕을 다스릴 수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책이름에 어쩔 수 없이라도 ‘도깨비’를 써야 했다면, 책 안쪽에는 참을 밝혀야 합니다. 이 책에서는 ‘도깨비’라고 적었으나, 이 책에 나오는 도깨비는 도깨비가 아닌 ‘일본 오니’이며, ‘한국 도깨비’하고 다른 한편, 한국 도깨비란 어떤 생김새와 모습인가를 아이와 어른 모두 알아보기 좋도록 적어 주어야겠습니다. (4343.8.30.달.ㅎㄲㅅㄱ)


―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엄마 (사토 와키코 글·그림,이영준 옮김,한림출판사,1991.9.25./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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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버리는 바보, 서평단


 서평단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거저로 받아 느낌글을 띄우는 이들은 책을 버린다. 좋은 책이 더는 좋은 책답게 이어가지 못하도록 내팽개칠 뿐 아니라, 얄궂은 책이 마치 얄궂은 책이지 않은 듯 여기도록 껍데기를 씌운다.

 서평단 모임을 꾸리는 이들이나 서평단 가운데 하나가 되는 이들이나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책을 망가뜨릴 뿐 아니라, 책을 찢어발기는 싸움꾼이다. 이들 서평단이 거저로 받은 책을 날짜에 맞추어 느낌글을 마구마구 쏘아올리는 짓이란 미국과 러시아처럼 힘있는 나라가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들어 마구마구 팔아치울 뿐 아니라 쏘아대는 꼴하고 무엇이 다른가. 이들 서평단 모임에서 쏟아내는 글이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 도시마다 철철 넘치는 쓰레기를 어마어마하게 쏟아내는 꼬락서니하고 무엇이 다를까.

 책 버리는 바보인 서평단은 참 많다. 출판사 가운데 서평단을 모아 당신들 책을 알리려는 곳이 꽤 많다. 서평단 바보들한테 휩쓸리지 않으면서 조용히 제 길을 걷는 출판사와 책을 마주하기에 만만하지 않은 나날로 바뀌고 있다. 사람들은 책을 책다이 아끼고 사랑하면서 내 삶을 아끼고 사랑하기가 그렇게도 싫을까. 아니, 사람들은 책이며 사람이며 터전이며 목숨이며 고이 돌보며 어루만지는 마음을 깡그리 잃어버린 채 돈에 홀린 바보가 되어도 좋단 말인가. (4343.8.2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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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좋아 2010-08-30 00:15   좋아요 0 | URL
하하하 난 쓰레기네요^^ 책거지.ㅋㅋ 게다가 책을 버리지도 않아요 슬쩍 꽃아두어 장식도 합니다. 나 같은 책,거저(지)는 책을 찢어 발기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는데 폼이랍시고 장식을 하지요. 나 책 많이 읽네, 하고요.

님 주장에 의한다면 난 거지인 샘인데 된장님 논리가 그럴듯 하여 그냥 인정하는게 속 편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심사가 뒤틀리는 건 나 보고 바보라 해서가 아니라(일견 맞습니다). 된장님 잘난척하는 모습 꼴 사나워서... 도대체 의식 있고 진보적인 사람들은 왜 사람들을 바보만드는지 그게 궁금키도 하고 본인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것도 우숩고 말입니다. 혼자 똑똑하지요?

무례한 댓글이지만 그냥 달고 갑니다. 사과 원하시면 정중히 사과 드리겠습니다..

파란놀 2010-08-30 05:53   좋아요 0 | URL
무례한 줄 알면 됩니다. 아니, 무례한 줄 안다면, 스스로 아름다운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나는 몸소 책방으로 찾아가서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읽을 나한테 좋은 책을 산 다음 내 가방에 내가 산 책을 담아 집으로 와서 내가 손수 읽고 나 스스로 느낀 그대로 글을 씁니다.

님께서 손수 주머니를 털 뿐 아니라, 몸소 책방에서 몇 시간씩 둘러보고 살피며 책을 사서 읽어 보시면, 서평단 책읽기란 얼마나 나 스스로 내 책삶을 망가뜨리는지를 깨달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서평단 바보가 되어 스스로 책을 망가뜨릴 뿐 아니라 당신 삶까지 망가뜨리는 굴레에서 허덕일밖에 없습니다.

차좋아 2010-08-30 12:25   좋아요 0 | URL
된장님의 서평단 책읽기의 폐혜에 대한 견해는 동의할 만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무릅쓰고 시비를 건 이유는 서평단을 모함(?)해서가 아니라 특정다수를 (너무나 자유롭게) 싸잡아 비난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아서였습니다.

손수 주머니를 털어서 몸소 책방을 살피고 책을 사서 읽어보면 무언가를 깨달을수 있다, 라고 조언을 해 주시니 답례로 저도 조언 한마디 하고 물러나고자 합니다.
저랑 누가 책 값 많이 지출되는지 한번 대 볼까요?(아 농담입니다ㅋ )

된장님. 글의 날카로움만큼이나 마음이 날카로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긍할 수 있는 논리임에도 거부감이 드는 건 함부러 휘두르는 된장님의 펜끝에 질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명확하신 것 같은데 기준이 중요합니까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합니까.

최근에 된장님 서재에 글을 보고는 날카로운 글 솜씨에 반했었지요. 그래서 객이라 생각안하고 서슴없이 댓글을 올린 것 같습니다. 마치 된장님을 아는 것 같이 느껴서요 ㅎㅎ

제가 무례한 건 알고 있는데,,,, 말하고픈 욕심에 ㅎ (재밌잖아요~ 이야기 하는 건)
더 길어지면 화 내실 듯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많이 화 나신거 아니면 종종 올게요^^

파란놀 2010-09-01 11:20   좋아요 0 | URL
제가 책값으로 얼마를 쓰는가 궁금하시면, 언제라도 얼마든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책값으로 1억이 넘는 돈을 썼습니다.

..

저는 '사람하고 맺는 관계'를 그다지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사람하고 사이가 좋게 지내자면서 해야 할 말을 안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잘못을 한다면 잘못을 알려줄 노릇이고, 잘하고 있으면 잘한다고 북돋울 노릇입니다.

저는 글솜씨가 하나도 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느끼는 대로 살아가며 글을 쓰지만, 느끼는 대로란 '저 스스로 옳고 바르며 착하고 곱다고 여기며 걷는 길'입니다.

저한테는 '잣대(기준)'이든 '사람하고 맺는 관계'이든 하나도 클 수 없습니다. 크게 여길 대목이란, 나 스스로 내 삶 하루하루를 참되고 착하며 곱게 가다듬는 일이지, 다른 대목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 내가 착하고 참되며 곱게 살아가면 사람하고 맺는 관계란 저절로 제대로 풀립니다. 괜히 올바르지 않은 사람하고 사귀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내놓은 책을 이명박 대통령이든 누구이든 '그리 올바로 살지 않는 사람'이 사서 읽고 널리 알려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알고 지내는 출판사 사장님이나 편집자들 가운데에도 서평단을 운영하는 분이 많습니다만, 이분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스스럼없이 '제발 그런 짓 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분들이 매출과 영업 때문에 할 수 없이 서평단을 꾸리는 현실은 알고 있습니다.

현실을 안다고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저는 책과 말과 헌책방과 자전거와 아이키우기 이야기로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할 말을 합니다.

제 이야기를 굳이 찾아서 읽어 주시니 고맙습니다.

saint236 2010-08-30 02:42   좋아요 0 | URL
책 버리는 바보라.. 저도 서평단을 꽤 오래했지만 책을 버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촉박한 시간에 맞추어 책을 읽다보면 어느 정도 부담감을 느끼고 그것이 책을 읽는 동기가 됩니다. 공짜로 받은 책이라고 해서 그저 좋게만 서평을 올리지 않습니다. 함께 활동했던 마립간님과도 가끔 댓글로 했던 이야기가 어떻게 이런 책이 출판되었을가 하는 아쉬움을 표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건지는 책이 있으면 저는 10권이든 20권이든 사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뿌립니다. 제 독서 편식을 서평단이 많이 치료해 줘서 감사했던 기억이.

위에 올린 차 좋아 님의 글이 왠지 마음에 와서 박힙니다.

파란놀 2010-08-30 05:55   좋아요 0 | URL
글을 제대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책은 거저로 얻어 거저로 뿌려서는 안 됩니다.

좋은 책이라면 마땅히 내 돈을 주고 사서 읽을 뿐 아니라,
내 돈을 들여 10권이든 20권이든 사서 둘레에 선물해야 합니다.

저는 제가 읽고 좋았던 책을 50권이든 100권이든
제 은행계좌를 털어 사들인 다음
둘레 고마운 분들한테 선물로 드립니다.

공짜로 얻어 공짜로 선물하는 책은,
내 품과 돈을 들여 산 다음 선물하는 책하고 같지 않습니다.

서평단 책읽기조차 '편식 책읽기'임을 부디 살피시기 바랍니다.
 


 이명박이 읽은 책


 대통령 이명박 님이 읽은 책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어느 출판사에서 책 하나 내놓는다면 꽤 불티나게 팔리리라 본다. 이명박이라고 하는 분이 쓸개빠진 일을 하시든 훌륭한 일을 하시든 이와 같은 책은 불티나게 팔릴밖에 없다. 숨을 거둔 김대중 님이나 노무현 님 책도 매한가지이다.

 환경운동을 하는 어느 분이 책을 하나 새로 내놓았다. 당신이 읽은 책 이야기를 다루는 책이다. 사람마다 다른 삶이요, 다른 삶에 따라 다른 속내와 빛이 담길 책이니, 이 나라 이 땅에서 책을 밝히는 또다른 좋은 목소리가 나왔다고 여긴다. 다만, 이분이 하는 환경운동이란 무엇이요, 이분이 내는 목소리와 이분이 꾸리는 삶이 얼마나 맞아떨어지는가를 돌아본다면, 이분이 내놓은 ‘환경운동을 하는 일꾼이 읽은 책’하고 ‘토목공사로 일자리와 돈벌이를 만드는 대통령이 읽은 책’하고 무엇이 어떻게 다를는지 잘 모르겠다. 아니, 둘은 서로 똑같다고 느낀다.

 슬프다. 이와 같은 책을 쓰는 사람도 슬프고, 이와 같은 책을 나무 베고 물과 기름을 쓰며 책을 내는 사람도 슬프며, 이와 같은 책을 돈 들여 사서 읽는 사람도 슬프다. (4343.8.2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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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집에서는


 시골집에서는 일고여덟 시면 잘 무렵인데, 도시에서는 너무 시끄럽고 환하다. (4343.8.26.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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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의 힐링 포토 - 마음을 치유하는 사진
조선희 지음 / 민음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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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이 좋아 삶을 빛내고픈 사진찍기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5] 조선희, 《조선희의 힐링 포토》



- 책이름 : 조선희의 힐링 포토, 마음을 치유하는 사진
- 글·사진 : 조선희
- 펴낸곳 : 황금가지 (2005.10.14.)
- 책값 : 17000원 → 23000원



 (1) 빛이 좋아 찍는 사진


 빛이 좋지 않으면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이야기가 좋지 않으면 그림이나 만화를 그릴 수 없습니다.

 느낌과 생각이 좋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도 저도 좋지 않은 얄궂음투성이일지라도 삶이 좋으면 사진을 찍고 그림이나 만화를 그리며 글을 씁니다.

 팔월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골목마실을 합니다. 두 시간쯤 걷자니 살짝 비가 뿌릴 듯하다가 갭니다. 세 시간쯤 걸을 무렵 매지구름이 몰려들며 비가 퍼붓습니다. 지난날에는 소낙비라 했으나 오늘날에는 소낙비가 아닙니다. 지식인과 전문가들은 으레 ‘국지성 폭우’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골목을 걷다가 마주치던 퍼붓는 비이든 시골집이나 골목집에 살면서 마주하던 퍼붓는 비이든 어느 때이고 이 비를 놓고 ‘국지성 폭우’로 느낀 적은 없습니다. 오늘날 갑작스레 퍼붓는 비는 말 그대로 ‘갑작비’ 또는 ‘깜짝비’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름으로도 그닥 어울린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막비’쯤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까요. 참말 마구 퍼붓다가, 참으로 마구마구 쏟아지다 그치다를 되풀이하고 있으니 ‘막비’라는 이름 말고는 달리 무어라 가리키기 힘들다고 느낍니다.

 오늘 하루 막비를 숱하게 겪거나 느끼는 가운데 뜨거운 햇살을 함께 겪거나 느낍니다. 비가 올 때에는 비 느낌을 곱다시 실으며 사진을 찍으면 퍽 즐겁습니다. 눈이 올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그런데 비가 오는 날이든 눈이 오는 날이든, 요즈음은 예전처럼 즐겁게 사진찍기를 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반가운 비나 눈이 아닌 궂은 비나 눈이기 일쑤이며, 오래 가물다가 내리는 비마저 여느 비가 아닌 막비이기 일쑤인 탓입니다. 날씨가 미친 채 돌아간다면, 이 미친 채 돌아가는 날씨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이 고스란히 담아낼 사진에는 미친 기운이 스밀밖에 없습니다.

 골목동네에서 사진을 찍든 시골마을에서 사진을 찍든 집안에서 사진을 찍든 늘 같은 마음입니다. 언제나 빛을 받아들이거나 느끼는 가운데 사진을 찍습니다. 빛과 그림자를 아울러 담는 사진입니다.

 두어 해쯤 앞서 인천 골목동네 한복판에서 살아가던 나날, 깊은 밤에 곧잘 밤마실을 나오며 골목 사진을 흑백으로 담곤 했습니다. 깊은 밤 조용한 때에 벽에 기대거나 골목길 바닥에 퍼질러 앉아 1초나 2초나 3초쯤 셔터를 열고 사진을 찍을 때면 퍽 느낌이 좋았습니다. 아니, 참 느낌이 괜찮았습니다. 누가 알아주느냐 마느냐를 살피지 않으며 더없이 기쁘게 즐기는 사진찍기였습니다. 이 느낌을 즐기려고 따로 세발이를 안 쓰고 내 몸뚱이를 세발이로 삼아 밤골목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제 밤마실 사진은 따로 안 찍습니다. 밤마실 사진에는 밤마실대로 느낌과 멋이 있어, 이러한 느낌과 멋을 살리는 아름다운 사진 이야기를 엮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느낌과 멋을 나눌 만한 우리 나라가 아니로구나 싶으며, 앞으로도 이와 같은 느낌과 멋을 나눌 만한 이 나라 삶과 문화와 사람이 되기는 힘들겠구나 싶어 더는 밤마실 사진을 안 찍습니다.

 그렇다고 낮마실 사진을 이 나라에서 제대로 나눌 수 있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낮마실 사진부터 제대로 삭일 수 있은 다음에 밤마실 사진을 삭인다고 생각합니다. 낮마실 사진조차 차분히 들여다보면서 낱낱이 새기는 맛과 멋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곱거나 착하거나 참된 밤마실 사진을 보여준다 한들 바위한테 책을 읽어 주는 꼴입니다.

 헤아려 보면, 바위한테 책을 읽어 준다고 쓸데없는 짓이 아닙니다. 바위한테 책을 읽어 주면 바위는 우리가 바위한테 바치거나 들이는 고운 넋을 찬찬히 받아들인다고 느낍니다. 참 그렇습니다. 텃밭에 일구는 무나 배추한테 곱다시 말을 걸어 보셔요. 봉숭아하고 채송화한테 예쁘게 이야기를 들려주어 보셔요.

 사진관에서는 빛을 만들고, 길에서는 빛을 봅니다. 사진관에서는 빛을 고르고, 길에서는 모든 빛을 껴안습니다. 사진관에서는 빛을 다루고, 길에서는 빛을 어루만집니다. 사진관에서는 빛을 알맞춤하게 움직이고, 길에서는 빛이 알맞춤할 때까지 움직이거나 기다립니다.

 사진관 사진이든 길 사진이든 빛을 담는 사진입니다. 빛을 만든다고 더 나쁜 사진일 수 없고, 빛을 본다고 더 나은 사진일 수 없습니다. 맨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삶이 좋다면 빛을 만들거나 빛을 보거나 좋은 사진을 일굽니다. 삶이 나쁘다면 빛을 만들든 빛을 보든 나쁜 사진만 쏟아냅니다. 삶이 곱다면 고운 사진을 일구며, 삶이 메마르다면 메마른 사진을 일굽니다.

 날씨가 궂을 때에는 되도록 사진을 안 찍으려고 합니다. 날씨가 미쳤을 때에도 웬만해서는 사진기를 감추려고 합니다. 미친 날씨가 걷히며 자연스러운 날씨로 우리 삶터가 예쁘며 맑고 맑은 모습을 조금이나마 되찾을 무렵에 비로소 사진기를 쥐어들어 신나게 사진찍기를 즐기려 합니다. 저로서는 미친 날씨 미친 터전 미친 나라 미친 사람 미친 돈벼락 미친 이름값 미친 힘자랑 따위에 놀아나는 삶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로서는 사랑스럽고 믿음직스러우며 따스한 가운데 넉넉하고 보드라운 사진을 즐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어서 둘레에 나눈다는 생각조차 안 합니다. 나 스스로 좋아하며 즐기는 사진이라면 내 둘레에서 내가 즐기는 사진을 곱게 받아들여 줍니다. 내가 나누기 앞서 둘레에서 받아들여 주는 사진입니다. 나로서는 내가 먼저 건네기 앞서 내 둘레에서 내 몸(사진)에서 우러나오는 빛깔이나 냄새나 느낌을 선선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살아내며 사진을 즐기는 하루하루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사진찍기란 빛을 담는 즐거운 삶입니다.


 (2) 사진쟁이 조선희? 사진교수 조선희?


 사진을 찍으며 밥벌이를 하는 조선희 님 책 《조선희의 힐링 포토, 마음을 치유하는 사진》을 장만하여 읽고 볼 무렵, 조선희 님이 ‘사진쟁이’라는 이름에서 ‘사진교수’라는 이름으로 갈아탔다(그러나 사진찍기 일을 그만두지 않게 함께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나라에는 사진학과를 둔 대학교가 제법 있으니 사진을 가르치는 분이 꼭 있어야 합니다. 조선희 님 같은 분이라면 사진교수가 될 만한 그릇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이 책을 본 누군가가 내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이나 한 줄의 글 때문에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거나, 혹은 눈을 감고 깊은 마음으로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난 행복할 것이다. 누군가가 사진 한 장으로 인해 마음이 따뜻해졌다거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걸 들을 수 있다면 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진가가 될 것이다 ..  (9쪽)


 그렇지만 어딘가 아쉽고 슬픕니다. 왜 조선희 님은 사진쟁이 길을 젖혀 놓고 사진교수 길을 가야 할는지요. 조선희 님 삶은 사진‘쟁이’가 아닌 사진‘교수’가 꿈이었을는지요.

 남들이 즐거웁기(행복하기)를 바란다고 해서 남들이 즐거울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 즐거웁게 살아가면서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한다면 내 즐거움이 저절로 내 이웃한테 스며듭니다. 남들이 내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즐거웁기를 바라거나 꾀하거나 꿈꿀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 내가 일군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즐거웁다면, 굳이 내가 바라거나 꾀하거나 꿈꾸지 않아도 내 이웃은 내 사진을 들여다보며 나와 함께 즐겁습니다. 나 스스로 사진을 즐겁게 찍지 못한다거나 나 스스로 내가 사진을 찍는 가운데 내 마음을 따뜻하게 추스르지 않는다면, 내 사진이 제아무리 그럴싸하고 내가 내 사진에 붙인 말이 여러모로 그럴듯해 보일지라도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겉껍데기가 따뜻해 보인다 해서 속알맹이가 따뜻할 수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을 찍고자 하는 사람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스스로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은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은 사진을 가르칠 뿐입니다.

 사진찍기에 온몸을 바치는 길은 하루아침에 닦거나 세우지 못합니다. 사진가르침에 온마음 쏟는 길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거나 만들지 못합니다. 오래오래 차근차근 걸어가는 가운데 나 스스로 느끼지 못하며 문득 내 길을 갈 뿐입니다. 조선희 님이 사진교수라는 이름을 얻고자 했다면, 스스로 오래도록 사진교수가 되는 배움을 얻거나 다스리거나 키우거나 북돋우고 있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저 같은 쥐대기는 잘 모르는 배움길을 무척 다부지게 걸어가고 있으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배움길을 걷는 사람은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배움길을 걷느라 바빠 죽겠는데, 아니 배움길을 걸으며 살피고 곱씹으며 익힐 이야기가 한 가득인데 사진찍기에 틈을 내어줄 수 없습니다.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 또한 같습니다. 사진찍기를 하느라 하루 스물네 시간이 모자라거나 빠듯해 고단한데, 아니 사진찍기 한길을 걸어가며 돌아보고 되씹으며 곰삭일 이야기가 흘러넘치는데 사진가르침에 겨를을 낼 수 없습니다.


.. 길들여진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남편을 따라 나들이를 온 일군의 여인들은 내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남편의 눈치를 보며 황급히 얼굴을 가린다. 그리고 남편들은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며 마치 자신의 소유물을 자랑하듯 거만한 표정을 짓는다. 수백 년 수천 년 이어진 그들의 문화이지만 그 순간 난 부아가 치민다. 그러나 그녀들은 나를 더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며 마냥 어린아이들처럼 웃어댄다 ..  (26쪽)


 부질없는 소리일는지 모르나, 사진찍기는 대학교를 다니며 배우지 못합니다. 사진찍기는 사진기를 장만해서 스스로 찍어야 배웁니다. 사진찍기를 가르치는 가장 뛰어나며 가장 놀라운 스승이란 사진기입니다. 사진찍기를 가르쳐 줄 사람이란 바로 ‘내가 사진으로 담고자 하는 사진감이 되어 줄 사람(모델)’입니다.

 덧없는 말일는지 모르나, 사진찍기를 하기 앞서 마음닦기를 해야 합니다. 마음닦기를 하지 않고 사진기만 쥐어든다면 ‘사진다운 사진’ 한 장 얻지 못합니다. 사진이란 내 눈에 들어오는 ‘퍽 그럴싸한 모습’을 찍어서 남기는 종이 한 장이 아닙니다. 사진은 삶입니다. 내 삶이요 내 이웃 삶입니다. 내 삶을 나부터 잘 모르고 내 이웃 삶을 나 스스로 더 깊숙하게 껴안거나 어루만지며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는다면, 예쁘장해 보이거나 멋있어 보인다는 ‘잘 찍은 사진’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이런 사진으로 사람들 마음을 따뜻하게 덥힐 수 있을는지요.


.. 하늘에도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다.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하늘에 수많은 다른 모양, 다른 색깔의 구름 떼가 함께 존재한다 … 갑자기 사진을 찍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난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나의 뇌리를 파고든다. 한살박이는 됐을까? 어린 동생을 머리에 이고 있는 네 살쯤 된 아이를 찍었다. 그리고 쑥스러워하며 간절하게 나를 바라보는 눈을 저버리지 못하고 돈을 건넨다. 그들에게 사진을 찍히는 행위는 생존의 수단이다 ..  (83, 90쪽)


 조선희 님이 어떠한 사진길을 걸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아니, 굳이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조선희 님은 그예 ‘사진을 찍는 사람’이니까,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느끼며 껴안을 노릇입니다. 당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몇인지 어디에서 태어나 자랐는지 무슨 사진기를 쓰는지 필름인지 디지털인지 마음에 아픔이 있는지 없는지 외팔이인지 외다리인지 애꾸눈인지 알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바지를 입는지 치마를 입는지 머리가 긴지 짧은지 얼굴이 갸름한지 네모진지 알아 보았자 쓸모가 없습니다. 당신이 무슨 대학교를 다녔는지, 또는 대학교를 안 나왔는지 나왔는지, 그냥 고등학교나 중학교만 마쳤는지, 아예 아무 학교도 안 다녔는지, 학교를 다녔다면 어떤 사람한테서 배웠는지, 어떤 사람한테서 어떤 삶을 배웠는지조차 소담스럽지 않습니다. 오로지 한 가지, ‘조선희 님은 사진을 찍는다’ 한 가지만 알아야 합니다. 이 한 가지만 아는 가운데 조선희 님 사진을 들여다볼 노릇입니다. 중학교 1학년 푸름이가 찍은 사진이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가 찍은 사진보다 훌륭해야 할 까닭이 없고, 고등학교 2학년 푸름이가 찍은 사진이 대학교 4학년 젊은이가 찍은 사진보다 덜 떨어질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입니다.

 자꾸 되풀이해야 하는 말인데, 조선희 님은 ‘사진을 찍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사진을 찍다가 한두 번, 또는 여러 번, 때로는 한동안 사진가르침이라는 길을 거닐며 사진찍기라는 길을 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인지라 지치거나 고될 때가 있거든요. 어느 때에는 뒷걸음도 쳐 보고 제자리걸음도 할 수 있어요. 반드시 앞으로만 나아가야 할 우리 삶이 아닙니다. 그런데 참말 조선희 님은 왜 강단에 서서 사진가르침을 베풀어야 할는지요. 조선희 님이 강단에 서서 젊은이한테 베풀 만한 사진찍기란 무엇일는지요. 조선희 님이 베풀 사진가르침이란 당신이 하고 있는 사진찍기에 다 담겨 있지 않은가요. 당신이 내놓은 사진과 사진책이 바로 당신이 하려고 하는 모든 말과 앎과 삶에 깃든 열매가 아닌지요. 사진찍기를 배우고자 하는 젊은이라면 조선희 님 사진과 사진책을 보면서 얼마든지 배우고 가다듬으며 갈고닦을 노릇 아닌가요. 구태여 이 말 저 말 덧붙이면서 젊은이 앞에서 지식을 떠벌이고 경험을 늘어놓아야 하는지요. 그렇게 한갓진 삶인 조선희 님이온지요. 사진찍기에 품과 땀과 삶을 온통 바치지 않고 사진가르침이라는 곁길에 접어들면서 당신 삶을 흘려보내고 있어도 괜찮은지요.

 그런데,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사진가르침이 어줍잖거나 모자란 길일 수 없습니다.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한테는 사진가르침이란 어줍잖거나 모자라다는 소리입니다. 사진가르침을 하는 이들한테도 사진찍기라는 샛길로 빠진다면 어줍잖거나 모자랄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한길을 걸어갈 사람이지 두길 세길 네길 닷길을 걸을 수 없어요. 그러나, 우리 집식구 밥벌이 때문에, 우리 살붙이와 동무와 이웃이 몹시 쪼들리고 괴로운 나머지 돈을 더 벌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두길 세길 네길을 걷습니다. 어린이문학을 하던 이원수 님은 창작을 비롯해 번역 편집 강사 노릇까지 참 숱한 일을 하셨습니다. 어린이문학 창작으로는 당신 식구를 먹여살릴 수 없었거든요.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이원수 님조차.


.. 뭘 먹든 뭘 마시든 꼭 남길 만큼 주문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였다. 이곳(인도)에 와서도 처음엔 그랬다. 밥이며 짜빠띠며 카레며 마구 시키곤 남겼다. 그 남긴 음식만큼 어느 순간 부끄럼이 생겨났다. 어린 시절 그릇에 붙어 있던 밥 한 알 때문에 할아버지께 듣던 설교가 생각난다. 잊고 있었다. 자연이니 환경이니 웰빙이니 떠들어대는 사이 우린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소한(?) 것들을 너무 사소하게 생각해 왔다. 물을 아껴 본 적이 언제였더라. 어린 시절 한겨울 양동이에 데워 놓은 뜨거운 물을 아껴 써 본 기억밖에 없다 ..  (132쪽)


 궁금합니다. 조선희 님은 배가 고픈가요? 어떤 배가 고픈가요? 배가 얼마나 고픈가요? 돈이 없어 배가 고픈가요? 돈은 있는데 마음배가 고픈가요? 돈은 있고 마음배도 고프지 않으나 어딘가 허전한가요?

 거듭 얘기하지만, 사진은 삶이고, 삶이 고스란히 사진입니다. 이제까지 걸어온 조선희 님 삶이란 ‘물을 아껴 써 본 기억’이 없는 삶이며, 이러한 삶이 고스란히 조선희 님 사진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면, 《조선희의 힐링 포토》라는 책을 내놓은 2005년부터는 조선희 님이 다른 사람 마음을 다스려 준다는 거룩한 뜻을 펼치기 앞서, 누구보다 조선희 님 마음을 다스리는 가운데 당신 삶을 새롭게 태어나도록 이끌어 당신 사진이 지난날과는 사뭇 다른 ‘이제부터는 물을 헤프게 쓰지 않으며 조금이나마 아낄 줄 아는 삶’이 되었는지요. ‘없어서는 안 될 사소한(?)’ 아름다움과 빛과 넋과 말과 몸짓과 이야기를 당신 사진에 오롯이 갈무리하는 사진쟁이 길을 튼튼하게 다지고 있으온지요.


.. 이 사진을 밖에 내걸고 어디에서 찍은 사진인 것 같으냐고 물으면 몇이나 답할 수 있을까? 여긴 뉴욕이다. 그것도 뉴욕 5번가다. 그 유명한 뉴욕 5번가에서 어떤 거지가 고양이 두 마리를 볼모로 동냥을 하고 있다. 물론 사람들은 돈을 준다. 고양이가 귀엽고 측은하므로 ..  (141쪽)


 사진찍기는 빛을 즐기는 삶입니다. 사진가르침은 빛을 나누는 삶입니다. 아무쪼록 어느 길을 걸어가시든 사진이란 빛을 바탕으로 일구는 이야기이며, 이 이야기에는 우리 삶을 짙고 고루 담아야 비로소 맑고 밝으며 고울 수 있음을 아로새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삶을 빛내는 사진찍기요, 삶을 비추는 사진가르침입니다.

 뉴욕이든 뉴욕 5번가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서울이든 서울 종로이든 사람이 사는 마을입니다. 샌프란시스코이든 마이애미이든 사람과 자연이 부대끼고 있습니다. 춘천이든 전주이든 사람만 있지 않고 자연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비록 오늘날 큰도시이든 작은도시이든 자연은 찌그러지거나 짓눌려 있겠지만. (4343.8.2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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