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제임스 - 나사의 회전 외 7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31
헨리 제임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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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의 소설을 처음 만난 건 『워싱턴 스퀘어』였다. 한 여성의 결혼과 유산 상속에 대한 이야기였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남성 작가임에도 여성의 입장을 섬세하게 표현한 글이었다. 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겠다고 작정했으나 여태 읽지 못했고, 이번에 현대문학에서 나온 헨리 제임스의 단편집을 읽게 되어서 좋았다. 무려 여덟 편의 단편집이라는 것. 그동안 읽고 싶었던 「나사의 회전」과 「데이지 밀러」까지 수록되어 있어 무척 기분좋은 독서였다.

 

일단 「나사의 회전」은 너무도 유명한 작품이다. 콜린 퍼스 주연의 영화로도 개봉되었던 것 같은데 책을 읽고난 뒤 영화를 보고 싶어 찾아봤으나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웠다.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내용이었기에 영화로는 어떻게 그려졌나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실망감을 감추고 그 다음 작품을 읽으려고 했으나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른 작품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작품이었다.

 

유령이란 게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나사의 회전」속 가정교사는 정말 유령을 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신경 쇠약증에 걸려 헛것을 본 것일까. 유령들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것일까. 유령을 믿지 않지만 전혀 없다고도 볼 수 없다. 지난 연휴때 비소식이 예보되었음에도 가까운 해수욕장으로 캠핑을 떠났었다. 저녁부터 내리는 비 때문이었을까. 잠을 청했다가 놀래서 깼다. 꿈 속에 어떤 젊은 엄마가 나타나 사진 석 장을 내밀며 한 장만 골라달라고 했다. 그때 느꼈던 게 죽은 아이의 사진이로구나 했다. 그때가 새벽 3시 30분경이었는데 옆 텐트에서 자고 있었던 여동생이 비명을 질렀다. 잠을 잘 수가 없었는데, 그때 생각했던 게 우리가 야영을 했던 곳이 무덤이 아닐까 했다. 여동생 또한 한 아이가 텐트 문을 열고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했다. 이런 것을 보면 유령이 있다는 건데. 

 

 

 

단편 중 「제자」와 「나사의 회전」에서 가정교사가 주인공인 소설에서 느껴지는 건 가정교사는 아이들을 훈육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을 무척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돈을 주지 않아도 제자 곁에 있었고, 무심한 그의 부모를 피해 달아날 생각까지 했다. 이 모든 게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나사의 회전」에서 보면 스물두 살의 여성인 가정교사는 저택에서 보이는 유령들 때문에 아이들을 보호하려했다. 혹시라도 그 유령들이 아이들이 데려갈까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가정교사의 역할과 의무, 아이들을 대하는 감정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양탄자의 무늬」는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사람들이 과연 작품속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을 건네는 소설이다. 작가는 평론가들에게 명쾌한 단서를 준다고 여기고 있으나 평론가가 느끼는 단서와 작가가 의도한 단서는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책을 읽는 것은 즐거움을 주는 게 아니라, 어떤 탐구의 대상이 되었고, 그에 비례하여 즐거움이 줄어들었다. 저자의 힌트를 따라가지 못하는 그 순간부터 나는 그 책들에 대한 지식을 직업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명예로우리라고 생각했다. (309~310페이지)

  

작품들이 지닌 전반적인 의도, 진주알 들을 꿰는 줄, 묻힌 보물, 양탄자의 무늬(346페이지)를 아는 일은 지난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평론가라 할지라도 작가의 의도를 어떻게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

 

 

부모를 따라 여행을 많이 했던 작가의 이력 답게 여행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품고 있는 주인공들도 만날 수 있었다. 「네 번의 만남」과 「데이지 밀러」 혹은 「제자」라는 작품에서도 여행자들을 주인공으로 했다. 여행중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가정교사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설정과 꿈에 그리던 유럽 여행을 떠났다가 미술학도인 사촌에게 여행자금으로 모아둔 모든 돈을 주고 만 여성의 이야기가 「네 번의 만남」 이었다. 주인공 남자가 그토록 염려했건만 어리석은 행동이 빚은 결과물이었다. 또한 「데이지 밀러」에서도 미국인 여행자 데이지 밀러의 이야기를 한다. 다소 자유분방하거나 바람둥이로 표현되지만 자신만의 감정에 충실했던 데이지 밀러였다. 어떤 행동을 하느냐 또한 결국 그 나라, 그 도시의 관습에 따라 평가된다는 내용이었다.  

 

경제적 궁핍을 해결하고자 모델 일을 하려 했던 모나크 소령과 그 부인에 관한 이야기인 「실제와 똑같은 것」은 사람은 바꾸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고, 「중년」에서는 새로운 소설을 펴낸 유명한 작가가 절벽 산책길에서 자신의 책에 열광하는 젊은 길동무로 인해 열정을 다시 찾은 이야기였다.

 

헨리 제임스는 여성의 섬세함, 작가로서의 고뇌, 가정교사라는 직업, 유령의 존재 유무에 대해 깊이 파고든 작가로 여겨졌다. 가장 의미있었던 작품이 「나사의 회전」과 「양탄자의 무늬」였다. 유령의 존재와 작가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쓰는 가, 그에 대한 질문을 건넸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하지만 때때로 작가가 무슨 의도로 이 글을 썼는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저 내가 느껴지는 감정대로 읽기는 했지만 답답함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책을 읽는 행위는 스토리에 대한 즐거움도 있지만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 다. 얼마만큼 작가의 의도를 이해했느냐가 중요한 관건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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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
디제이 아오이 지음, 김윤경 옮김 / 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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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야기는 좋아하지만, 사랑이 떠나갈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는 약간 멀게 느껴졌다. 그저 과거의 이별을 생각할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별을 견디는 시간이 너무도 아픔에도 나한테는 어느 한 순간, 그랬던 적이 있었지, 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에게 사랑이 이토록 멀었던 것일까. 수많은 사랑이야기를 읽지만, 이별에 대한 건 언제나 안타깝다. 사랑의 상처를 안고 그 시간을 견뎌봤기에 그렇다. 하지만 아직도 사랑이 아픈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고 그에 몇 퍼센트는 이별을 한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너무 가까우면 이별에 대한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아 상처받는 나를 발견했기에 그렇다. 덜 상처받기 위해서는 덜 사랑을 줄 것.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 것. 이렇게 다짐함에도 늘 이별을 맞는 마음은 아프기 그지 없다. 내가 잘못을 했건 하지 않았건 이별 그 자체가 아프다는 소리다.

 

적당한 거리감은 인간관계에서 무척 중요합니다. 상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둘 때 가장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어요. (17페이지)

 

이별을 잘하는 법을 말한 글을 만났다. 꽤 직설적으로 말한다.

남남으로 돌아가는 게 이별이에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과거의 자신과 한 걸음 멀어질 수 있습니다. (57페이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 ' 이 점만 고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라는 실낱같은 희망, 남

이 보기엔 절대 아니라고 할 정도로 사소한 기대감이 바로 미련의 본모습이에요. (67페이지)라고 말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글에서처럼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언젠간 연락해주겠지 하는 기다림, 이런 게 미련이라고 말한다. 밤늦게 술마시고 그에게 전화하는 것도, 언젠가는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애타게 매달리는 것도 자기애가 아닌가. 사랑은 한 사람이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해야 비로 사랑인 것이다. 일방적인 감정은 깨지기 마련이다. 이미 식어버린 마음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다. 한번 헤어지고 나서 다시 만나고 헤어지고 마는 것처럼. 이별은 그런 것이다.

 

 

 

오늘을 살지 않으면 현재는 보이지 않아요. 과거에 살기를 멈춰야 드디어 현재에 눈뜰 수 있습니다. (111페이지)

 

헤어진다는 건 잔혹한 일이에요. 사귈 때는 서로 동의가 필요하지만 이별에는 필요 없거든요. 어느 한 쪽이 "더 이상 안되겠어" 라고 말하면 그냥 거기서 끝인 겁니다. (중략) 남아 있는 정을 싹둑 잘라 버리고 비정해질 것. 그게 서로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119페이지)

 

이별을 한지 얼마되지 않은 사람은 디제이 아오이의 말에 상처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것 만큼 현명한 방법이 없다.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고 미련을 갖고 있으면 자신만 아플 뿐이다. 하루쯤 어쩌면 사흘쯤 아픈 뒤에 털어내려고 해야 잊는 법이다. 어느 순간 문득문득 떠오르겠지만 과거 속에 묻혀 두어야 한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꺼내보는 게 현명하다.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혼자 있을 때에도 곧게 일어설 수 있어야 비로소 자신만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197페이지)

 

아주 진부한 말이지만,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처럼 정답도 없다. 이별을 했을 때는 무슨 그런 말이 있느냐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역시 시간이 약이었다. 하루하루를 견디고 한 달, 두 달을 견디면 서서히 추억이 될 수도 있다. 이따금 꺼내어 보는 것까지는 나무라지 않는다.

 

사랑을 할때는 이 세상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하고, 이별할 때는 오직 나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게 필요할 것 같다. 다른 누구도 필요치 않다. 오직 나만을 생각할 것. 그렇다보면 어느 새 이별이 덤덤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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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리커버 에디션)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시공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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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을 처음 들었던 게 타 인터넷 서점 서평단으로 활동했을 때이다. 문학 분야의 서평단에게 주었던 세계문학 엽서가 있었는데, 책갈피로 사용하던 중 아름다운 여성이 있는 책의 표지를 보고 언젠가는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이 작품이 에밀 졸라의 책이라는 것도 머릿속에 각인시켰고. 그러다 리커버 특별판을 알게 되었고, 이처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두 권을 합본해 두께가 상당하지만 흥미진진한 스토리 때문에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제목이 다른 것도 아닌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이지 않는가.

 

세일 할 때의 백화점을 가본 적이 있는가. 지하의 식당 매장에서부터 1층의 화장품이나 명품 매장 등 아주 넓은 공간인데도 발디딜 틈새가 없다. 모든 사람이 백화점으로 몰려왔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치이고, 커피라도 한 잔 마실라치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향수나 립스틱이라도 고르려면 판매직원이 나에게 오는 시간 또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여자들은 물건에 집착한다. 쇼핑이라는 병에 중독되면 가산을 탕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혼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쇼핑은 습관이다. 습관처럼 구매하다보면 그 욕망을 자제할 수가 없다. 백화점을 비롯해 쇼핑몰은 우리의 소비의 욕망을 부추기고 사람들은 욕망에 굴복하고 만다. 소설 속 여자들의 소비 행태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100여년 전의 소설임에도 현재와 같다는 것이다. 백화점에 가서 예쁜 물건을 보고 그 욕망을 이기지 못해 한두 개 사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핸드백에서 조용히 꺼내 들추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자기가 구매한 제품을 자랑하고 싶어 어쩔줄을 모르는 것이다. 다시는 사지 않겠다고 마음 먹어도 막상 물건이 있는 장소에 가면 그 유혹을 견디기 힘들다.

 

 

특히 마르티 부인의 행동이 안타까우면서도 마치 우리를 보는 듯 했다. 남편의 수입은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자꾸만 물건을 사들이는 그녀 때문에 남편은 가욋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다. 실크 스카프를 만지는 그녀의 탄식, 그 물건을 부러움에 쳐다보는 다른 여인들의 탄식어린 눈빛들. 백화점은 여성들의 마음을 훔치는 곳이었다. 여성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 화려한 쇼윈도로 여성을 현혹시키고, 바겐세일의 덫으로 유혹했다. 여성들이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새로운 욕망을 자꾸 주입시켜 거대한 유혹의 덫을 놓았다.

 

이 모든 이야기가 이 소설 속에 있었다.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거대한 백화점의 장소를 이용해 인간들의 소비 행태를 말하는 한편 거대한 자본 속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내용이었다. 에밀 졸라는 시골에서 올라온 드니즈라는 인물을 통해 이 모든 것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드니즈가 동생들과 함께 처음 파리에 도착후 큰아버지의 가게를 찾아 가던중 맞닥뜨린 백화점의 위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장면은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화려한 백화점 건물의 한쪽에 어둡게 자리한 큰아버지의 가게는 사람들의 소비와 욕망이 어디쪽으로 치우쳐 있는지 확연하게 보여준다. 거대한 자본앞에 소상인들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들을 따라잡지 못한다.

 

거대한 자본이 투자된 백화점은 저렴한 가격으로 사람들을 유혹한 후 더 많은 물건들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실크 스카프 하나만 사겠다던 여성들은 모자며 장갑들을 사기를 주저하지 않고 실크며 기성복을 사들인다. 여기에는 여성들의 소비를 부추기는 판매원들이 한 몫을 하게 된다. 기본급 외에 판매 수당을 주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이 팔려고 하기 때문이다. 출근 순서대로 판매 순서가 정해지지만 제대로 지키기가 힘들 정도다.

 

 

 

무레의 궁극적이고 유일한 야심은 여성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성이 자신이 이룩한 백화점의 왕국에서 여왕으로 군림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여성을 위한 신전을 지어 바친 다음, 그곳에서 그녀를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정중하고 세심한 배려로 여성을 취하게 한 다음, 그녀의 욕구를 부추겨 달아오른 욕망을 충족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393페이지)

 

소설이 그렇듯 에밀 졸라의 주인공 드니즈는 이곳,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서 성장해 나간다. 시골뜨기에서 백화점 사장 무레의 인정을 받고, 판매직원들의 신임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펼쳐진다. 더군다나 무레의 사랑을 받지만 현명한 여인답게 그의 식사 초대를 거절한다. 그를 사랑하되 하룻밤의 연인으로 머물지 않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물론 소설에서 드니즈와 무레의 사랑의 전개는 아주 미미하다. 여성들이 소비의 욕망에 어떻게 굴복하는지, 거대한 자본의 흐름이 어디로 흐르는지를 주로 보여준다.

 

드니즈는 백화점의 거대한 상권의 변화, 이것들에 관한 새로운 시대를 예감했다. 백화점 주변 소상인들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다는 이야기다. 여성들에게 물건을 파는 행위는 욕망의 본질을 파는 행위와도 같다. 그 사람의 욕망을 자극해 유혹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거울'로서의 소설이 요구되던 시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소설에 심취했던 에밀 졸라. 스무 권으로 이루어진 '루공-마카르' 총서의 열한 번째 작품이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이다. 놀라운 작품이다. 현재 우리가 느끼는 그 모든 것을 담아 100여 년전의 소설이라 믿지 못할 정도였다. 고전문학이 왜 오랫동안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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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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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에서 느껴지는 것은 대만 영화 「나의 소녀시대」같은 소설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소설의 자세한 내용을 알기까지는 조금쯤은 두근거리기도 했다. 소녀들의 첫사랑과는 거리가 먼 서른일곱 살 차이나는 남자에게 유린당한 이야기였다. 가슴이 아팠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학원 강사라는 이유로 아이들의 공부를 봐준답시고 아무렇지도 않게 유린하고 그들의 마음을 훔쳤다. 소설을 읽는내내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까, 부모는 뭐하고 있었나, 가장 가까이에서 소녀와 함께 했던 친구는 왜 몰랐을까. 물론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았기에 가까운 사람들이 몰랐을 수도 있었겠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었다.

 

선망했던 선생님과 좋아하는 사이라고 질투했던 친구 이팅, 자신의 아픔이 너무 커 쓰치의 마음을 살필 줄 몰랐던 이원이었. 쓰치의 친구인 이팅과 이원 언니 또한 자신의 감정이 더 컸던 이유다. 세상에 둘도 없다고 생각했던 친구에게 질투하느라 쓰치가 보내는 사인을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다. 자신의 마음에 치우쳐있기 때문이다.

 

열세 살의 한 소녀 팡쓰치, 작문을 가르쳐주겠다는 학원 강사에게 5년간 진행된 강간이었다. 아무도 몰랐다. 수준높은 고전문학을 읽어주던 이웃집의 이원 언니도 몰랐다. 자신에게 호감있는 여학생을 집으로 불러 작문을 봐준다는 핑계로 강간했으며 그 기간이 5 년이었다. 아무 것도 몰랐던 열세 살의 소녀는 그게 사랑의 방식인줄 알았다. 자신과 리궈화 선생님이 사랑하는 사이라 여겼다.

 

 

 

진실은 무엇이고, 거짓은 무엇일까? 진실과 거짓은 상대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세상에 절대적인 거짓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녀는 찢겼고 휘저어 뭉개졌으며 찔려 죽었다. (94페이지)

 

내가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을 때 사실 나는 이미 죽은 것이었다. 인생은 옷처럼 그렇게 쉽게 벗겨지는 것이다. (268페이지)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이 쓰여졌다고 했다. 2017년 이 소설이 발표되었고 작가는 소설이 발표된지 2달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작가의 부모는 작가가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했고, 지목된 학원 강사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로 풀려났다.

 

소설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 쓰치의 부모였다. 쓰치보다 서른일곱 살이 차이난다고 해도 딸아이를 단 둘이서 공부할 수 있게 했다는 거였다. '성교육은 성이 필요한 사람한테나 하는 거야.' (97페이지) 라고 말했던 엄마였다. 물론 쓰치의 친구 이팅이 있어 가능했다고 보지만 부모가 방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군다나 쓰치가 입원해 있는 상태에서도 창피하다며 다른 데로 이사를 가지 않았나. 아무 일 없는 듯 동네 사람들과 차를 마시는 리궈화와 이웃들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리궈화 가족들을 저버릴 수 없었던 것인가.

 

 

 

 

인내는 미덕이 아니야. 인내를 미덕으로 규정하는 건 위선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 비틀어진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이야.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미덕이야. (321페이지)

 

한동안 미투 운동으로 시끄럽더니 지금은 조금 주춤한 상태인 것 같다. 성폭행은 주로 가까운 사람에게 일어난다고 한다. 안다는 이유로, 호감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성폭행 할 권리는 없다. 이제 막 소녀에 접어들기 시작한 아이를 공부를 가르쳐준다며 꾀어 강간을 하고 성폭행 했던 파렴치한 인간들이 지금도 버젓이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  

 

수많은 가정(假定)으로 가득찼던 지난 날의 언어들. 자기의 마음을 조금씩 내비쳤지만 알지 못했던, 혹은 모른척했던 우리들의 무관심한 자세를 다시한번 일깨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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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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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를 본격적으로 알게 된 게 안대회 선생의 『세한도』였다. 물론 다른 동양미술 관련 책에서도 자주 봐왔지만, 그 책에서 이상적과 얽힌 이야기를 읽으며 그의 그림을 좀더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최근에 유홍준의 『안목』를 읽으며 다시금 추사에 대한 글과 그림이 궁금했던 터에 유홍준의 『추사 김정희』는 그런 나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듯 했다. 더군다나 그의 생애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한 책이다. 이 책은 저자가 오래전에 펴냈던 『완당평전』을 새롭게 펴낸 책이라고 봐도 옳다. 오류를 수정하고 독자들이 읽기 쉽게 전기 문학 형식으로 펴냈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알게 된 사실이 추사 김정희가 노론의 골수 집안이었으며 영조의 정순왕후가 추사의 12촌 대고모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영특함을 미리 알아보았던 박제가는 추사를 제자로 삼았고, 아버지와 함께 청나라 연경으로 가 그곳의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특히 완원을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뜻을 세워 아호를 완당이라고 했고, 당대의 금석학자이자 서예가, 경학의 대가로 자부하는 연경 학계의 원로인 옹방강과도 교류하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동양철학자인 후지쓰카 지카시는 조선 후기 북학파 학자들이 청나라와 교류한 실상과 추사가 연경에서 벌인 활약상을 치밀한 고증으로 밝혀낸 사람이다. 그는 고서점가를 뒤지며 자료를 찾았고 추사 사후 최초의 대규모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후지쓰카는 추사의 주변 인물들이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한 구체적인 내용을 소상히 규명한 논문을 계속 발표했고, 추사가 청조 고증학과 경학의 업적을 집대성해놓았고도 말했다. 

 

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는 추사 김정희이다. (45페이지) 라고 했다.

 

우리가 추사 김정희하면, 그의 글씨인 추사체만 기억하고 있기 쉽다. 하지만 그는 금석학, 역사지리학, 고증학, 언어학, 차와 불교학, 금강안, 미술사가에도 뛰어났다. 저자는 추사의 많은 작품을 추려내어 수록해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했다. 또한 한문으로 된 추사의 글을 한글로 풀이해 그 맛을 더한다.

 

 

추사에게는 많은 벗과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 이름들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재 권돈인, 자하 신위, 눌인 조광진, 우봉 조희룡, 황산 김유근, 초의 스님, 소치, 붓을 잘 만드는 박혜백, 전각을 잘하는 오귀일, 먹동이라고 불린 달준이, 장황장 유명훈 까지. 이들은 추사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그를 무척 아꼈다.

 

언젠가 TV 채널에서 <차이나는 클라스>라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평소 좋아하는 유홍준 교수가 출연해 추사 김정희에 대해 강의하고 있었다. 제주에서 유배 당시 부인과 아들에게 보냈던 편지를 읽어주는데 무척 애틋했다. 무릇 사소한 사이에서 편지로 쓰는 글씨가 그 사람의 평소 글씨체라고 한다. 이렇듯 추사 또한 지인들에게 편지를 쓰는데 종이나 먹, 붓에 대한 타박 아닌 타박, 먹을 것에 대한 이야기 들을 하는 과정에서 추사의 글씨와 그의 성격이 드러났다. 그만큼 가까운 사이이기에 무얼 보내달라고 했을 테고 푸념도 했을 터다.

 

한 서예가의 글씨가 변해가는 과정은 무엇보다도 편지 글씨와 해서 작품에 가장 잘 나타난다. 편지란 작품이라는 의식을 갖지 않고 쓴 것이기 때문에 그 서예가의 필법이 거짓 없이 드러나며, 해서 작품에는 그렇게 변화된 결과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214페이지)

 

 

추사는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했고, 성격도 대단히 까다로웠다고 한다. 추사의 철저한 완벽주의 때문에 김우명이나 윤상도에 의해 탄핵 상소를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된 연유로 제주로 9년 가까이 유배생활을 했던 터다.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며 에술적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고도 한다. 제주 귀양살이 이후 추사체가 태어났다는 것이 정설이라고도 한다.

 

죽는 순간까지 학문과 예술에 대한 추사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추사의 만년을 건강하게 지켜준 것은 공부하는 행복, 제자를 가르치는 즐거움, 예술에 전념하는 열정이었다. 그 중 공부하는 행복이 제일 컸다고 한다. (485페이지)

 

 

 

 

유홍준은 이 책을 추사 김정희에 대한 인간적 삶에 부쳐 문학적 형식으로 썼다고 했다. 독자들이 가깝게 여겨지는 추사 김정희. 우리는 이 책으로 추사의 삶과 그의 학문적, 예술적 경지를 엿보게 된다. 물론 인간적으로 보자면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주 나중에야 자신이 함부로 뱉었던 평가를 뒤집어 용서를 구했던 것을 봐도 그렇다.

 

유홍준의 책을 읽다보면 우리나라의 문화예술품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감탄하게 된다. 그가 바라본 문화 예술과 작품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모습과 역사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에서도 말했지만 안목이 있는 수장가들이 있어 세한도도 지켜냈지 않은가. 유홍준이 바라보는 시선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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