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과 4월은 또 얼마나 그 느낌이 다른가.
5월1일. 이제 올해의 초반부가 아니라 중심부에 들어섰다는 것을 스스로 다짐시키지만 내 생활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계절로 보면 여전히 봄이지만 4월의 푸릇푸릇 봄이 아니라 5월은 완숙한 봄, 슬쩍 여름을 끌고 올 봄. 지금도 한낮은 기온이 꽤 높지만 아침이라서 자켓에, 긴 치마를 입고 집을 나섰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처음 가보는 길이다. 예전 기무사가 있던 곳이라는데 지난 달 갔던 대림미술관이 경복궁을 향해 서쪽 편에 있다면 (서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경복궁의 오른편에 있다 (북촌).
5월1일이라는 것을 경복궁 담을 따라 늘어서 있는 경찰차와 경찰들이 알려준다. 담을 따라 걸어가니 귀에 익은 건물들이 줄줄이 늘어서있다. 란 스튜디오, 금호미술관, 갤러리 현대, 이리자 한복, 법련사 (송광사 서울 분원), 내 이름과 똑 이름의 작은 식당, 바로 어제 김정은이 결혼식을 올렸다는 두가헌 갤러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물은 나즈막해서 위압적이지 않았다.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공간은 지하에서 윗층까지 터서 만든 일명 ‘서울박스’라는 전시공간이다. 원래는 전시공간이 아니었다는데 2013년 건축가 서도호의 전시 이후로 전시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방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상징적인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서울박스에는 국제적 작가의 규모가 큰, 실험적, 미래적 현장설치 작품이 전시되는데 대한항공에서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율리어스 포프 (Julius Popp) <bit.fall>
네개의 대형 컨테이너를 엇갈리게 쌓고 그 꼭대기에서부터 물이
폭포처럼 떨어지게 해놓았다. 떨어지는 동안 물방울들이 잠깐 동안 하나의 단어를 보여주고 사라진다. 1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
무슨 단어인지 집중해서 보다보니 단어가 한 개 국어가 아니다. 영어, 조금 있으니까 스페인어, 프랑스어, 한국어, 아랍어, 인도어
등등 바뀌어 가며 단어가 계속 나타났다 사라진다.
도슨트 설명을 들어보니, 데이터의
최소 단위 정보 조각 (bit)의 떨어짐 (fall), 즉
계속 쏟아져 내리지만 짧은 시간만 존재하고 사라지는 정보의 일시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여기 보여지는
단어들은 실제로 google에서 실시간으로 검색되는 단어로서 이 설치물 하단에는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다고. 자그마치 800리터의
물을 순환시켜야 하는 그야말로 대규모 설치물이다. 현대적 바벨탑을 형상화했다는 말이 더 설명없이도 바로 이해되었다. 옆방에서작가가 직접 작품을 설명하는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어서
그것도 보고 나왔다.
다음 방으로.
안규철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

마종기 시인의 시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 지성, 1980)>을 인용한 전시
제목이다. 안규철 작가는 1955년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교수.

국립현대미술관이 현대자동차와 함께 2014년부터
10년간 한국을 대표하는 중진 작가의 개인전을 지원하는 장기 프로젝트로서 비용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젝트라고 한다. 안규철작가는 2015년 두번째 선정 작가이고 2014년 첫번째 선정된 작가는 이불
작가, 2016년 세번째로 선정된 작가는 김수자 작가로 올 여름부터 전시될 예정이다.
아홉마리금붕어 (Nine goldfish, 2015)

아홉개의 동심원. 각
동심원에 금붕어 한마리씩.
서로 닿을 수 없는 삶의 표상을 투영. 현대인들의 소통 단절을 보여주고 있다.
보자마자 이심전심으로 통했는지 눈물이 핑 돌기부터 했던 작품.

‘아홉’의 의미가 있나요?
도슨트에게 물어봤다.
10이
되지 못했다는, 완전에 이르지 못한 하나의 결핍을 상징한다고 설명해주었다.
피아니스트와 조율사 (The pianist and the tuner, 2015)

피아노가 한대 놓여있다. 정해진
시간에 피아니스트가 와서 같은 곡을 연주하는데, 이전에 조율사가 와서 피아노에서 해머를 하나씩 빼놓는다고
한다. 해머가 하나씩 빠질때마다 연주는 조금씩 변형되어 들려지게 된다.
음악과 침묵, 의미와
무의미,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이루는 아이러니를 의도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매일 오후 3시와 5시에 피아니스트가 와서 연주하는데 이곳을 통과해서 다른 곳 전시를 보고 있는 동안 피아노가 연주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연주곡은 슈베르트 즉흥곡 Op.90, 1번과
3번, 그리고 야나첵의 <오솔길에서>.
1,000명의 책 (1000 Scribes, 2015)
이건 설치미술이 아니라 행위예술이다.

전시기간 동안 작은 방에서 미리 신청한 1000명의 관객이 한사람씩 1시간동안 국내외 문학작품을 연이어 필사하는
필경 작업이다.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만의 글씨체로, 자신만의 마음을 담아.

완성되면 이것을 인쇄하여 한권으로 묶어서 작업한 사람에게 발송하는데
이 발송 단계까지가 프로젝트의 완성이라고 한다.


의사였던 안규철 작가의 아버지는 퇴근하여 돌아오면 책상에 앉아 의학서적을
꼼꼼히 베껴쓰는 작업을 하곤했는데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오마쥬라니, 어릴 때 우리의 기억은 자라면서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비집고 들어와 형체화할지 모르는 일이다.
식물의 시간 (Time of plants, 2015)

열다섯 개의 화분이 공중에 모빌로 매달려 있다.

바닥에는 바닥대로 화분의 무리가 놓여있다. 즉, 바닥에 놓여있을 수도 있지만 공간에 붕 띄어져 있을 수도 있다. 삶의
균형을 이루려는 발버둥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 균형은 불안정 구조속의 균형일 뿐이라는 의미를 상징한 작품이다.
64개의
방 (64 Rooms, 2015)
푸른 벨벳 커튼으로 구획되 64개의
방. 이 칸막이 구조물 자체 보다는 통과하는 동안의 느낌과 감정, 이것이
작품의 의의라고 한다.

기억의 벽 (Wall of memories, 2015)

이 역시 관객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작품. 벽 한면이 모두 한사람 한사람이 붙인 같은 규격의 쪽지로 채워져있다.
8,600개의 쪽지엔 “지금 현재 당신이 가장 그리운 것은?”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적혀있다. 누구는 엄마라고, 누구는 꿈이라고, 누구는 관심, 나눔이라고
적었다. 안규철 작가는 ‘아버지’라고 적었다고. KBS벽에 붙여졌던 이산가족찾기 벽보를 보았을때의
기억을 되살려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전시기간 동안 계속 진행되는, 긴 호흡의 process 적인 작품이다.
침묵의 방 (Room of silence, 2015)

하얗고 흰, 큰 돔 형태의
방이 있고 들어가면 역시 온통 하얀 벽에 천장에 둥근 창이 하나 있을 뿐 침묵과 정적의 방이다.
허공의 세계, 무의 세계를
그리고자 했다. 자그마치 39톤의 무게 때문에 미술관에 설치할
때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했고 전체 예산의 절반이 이 설치물에 들어갔다는 설명.
안규철 작품에 대한 공감과 감동을 잔뜩 안고 다음 기획 전시 코너로.
질 바비에 (Gilles
Babier), Echo System
들어가는 입구의 벽면에 빡빡머리 아저씨가 열심히 질문에 답하는 동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안규철 작가 전시 공간이 온통 하얗고 조용하고 정적이던 것에 비해 여기는 산뜻한 분홍색 타이틀부터
분위기를 확 바꿔놓는다.
한불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작년엔 우리 나라 작가 작품을 프랑스에서, 올해는 프랑스 작가 작품을 우리 나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중이라고.


<체스터 치즈의 악몽, 2005 (종이에 과슈)>
올해 51세된 바비에르는
원래 바투아누 태생이고 스무살 때 프랑스로 이주했다. 바투아누라는 곳은 세가지 언어를 사용하고 80여가지의 사투리가 쓰이는 곳인데 그런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다가
한가지 언어가 사용되는 프랑스로 오니 그게 너무 이상하더란다. 그래서일까. 바비에르는 언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다변증, 2009>

<꼬인 이야기로 된 세계-물방울, 2010>

<조용한 남자 (연구), 2013>
그가 하는 작업 중에는 라루스 백과사전을 그대로 베껴쓰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A부터 차례로 베껴쓰는 것. 1992년부터 시작하여 2올해로 25년째.
Z까지 마치려면 자기가 200살까진 살아야할 것 같다고,
그 정도로 의술이 발달할지 모르겠다고 능청을 떤다. 사전의 글자는 만년필로, 삽화는 과슈라는 재료를 사용한다.

확대복사가 아닙니다! 글자는 글자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그대로 베꼈어요.

과학 기술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Cellular automation (세포 자동화)라는 개념을 또다른 작품의 도구로 삼는다.

사진 아니고 이것도 하나 하나 손으로 그린 작품.





<의사 시리즈 - 의사의 가족, 1998>

<리본 맨, 2012>

<그림에 거주하기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레몬, 오렌지와 장미가 있는 정물화, c.1633), 1992>
1633년의 오래된 다른 화가의 기존 정물화에 질 바비에르는 무슨 짓을 했는가 보라. 하얀 집을 하나씩 다 끼워넣었다. 나는 이 사진 밖에 찍어오지 않았지만 옆으로 계속 이런 식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금은보화의 방 (네 번째 위장), 2012>
바비에르의 작품 매뉴얼이라는 것이 또 재미있다. 체스의 규칙이라고 해서, 체스 칸 같은 작은 박스에 여러 가지 단어나 문장을
넣어놓고 어떤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각기 다른 단어나 문장이 담겨있는 박스를 무작위로 고른다. 고른 단어와 문증들을 조합하여 작품의 주제로 삼는다. 라루스 사전을 베끼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도 매주
일요일마다 지속적으로 해나갈 작품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런 식으로 결정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아마
그가 고른 박스에는 일요일, 사전, 펜, 쓴다, 같은 단어들이 들어있었나보다.

그에게
작업과정에 대해 물었을때의 대답은 의외이기도 하고 듣고 나니 대가다운, 당연한 대답 같기도 하다.
"엄격하고
계획적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본 전시는 망상지구 (The
Paranoid Zone)



시작된지 얼마 안된 전시라서 도슨트 설명을 들을 수 없어 아쉬웠지만 거대
설치 미술을 보고 (어떤 것은 위 사진 처럼 누워서), 느끼고, 체험해보며, 선입견없이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설치된 이 거대한 새가 천천히 돌아가면서 다른 색, 다른 형체, 다른 이미지로 바뀌고, 그걸 보는 동안 보는 사람의 느낌은 해체와 조합을 반복한다.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오는 기분으로 미술관을 나왔다.
오는 길에 고속버스 고장으로 기흥 휴게소에 40분을 정차해있었다.
그 말을 오랜 만에 다시 떠올렸다. 이 세상 사람의 수 만큼 다른 세계, 우주가 존재한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