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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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이던가? 전생(前生)이던가? 어제 일이던가? 바로 이 항구로 내려와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한 것은? (9쪽)

사랑하는 친구와 헤어지고, 주인공 (책 속에서 조르바가 내내 '두목'이라고 부르는)은 무겁고 울적한 기분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쉽게 헤어나올 수 있는 친구도 아니었고 이별도 아니었다. 

나는 검은 배와 그림자와 비와 형상을 갖춘 내 슬픔의 실체를 보았다. (9쪽)

친구와 헤어진 바로 그 항구에서 고향 크레타로 향하는 배를 기다리면서 그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단테의 문고판 책을 여행의 동반자로 삼아 지옥편을 읽을까, 연옥편을 읽을까, 시편을 읽을까,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띄었을까? 문득 누군가 그를 바라보는 강렬한 시선을 느낀다.

"여행하시오?"

"크레타로 가는 길입니다. 왜 묻습니까?"

"날 데려가시겠소?"

"왜요? 함께 무슨 일을 할 수 있어서요?"

"왜요! 왜요! ......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 하는 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 됩니까? 자, 날 데려가쇼. 요리사라고나 할까요. 당신이 들어 보지도 못한 수프, 생각해 보지도 못한 수프를 만들 줄 압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17쪽)

조르바와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조르바가 먼저 주인공에게 말을 걸어왔고 그런 조르바를 주인공은 외모에서부터 말투에 이르기까지 관찰하고 탐구하기 시작한다. 짧은 대화이지만 조르바가 어떤 인물인지 드러나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주인공의 나이 35세, 조르바의 나이 65세였다. 이 둘 사이를 한마디로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이가 훨씬 연배인 조르바가 주인공을 '두목'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라고만 볼 수는 없고, 그렇다고 친구라고 보기엔 서로 주고받는 감정과 영향력이 친구 사이의 그것과는 다르다.

단테를 여행의 친구로 삼는다는 것에서도 보이듯이, 쉼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거기서 삶의 문제, 생사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는 주인공에 비해 조르바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 왜 해야하나 왜 하지 말아야 하는 생각보다 중요한 건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거기서 행복을 느끼고 사는 맛을 느낀다. 그런 조르바가 볼때 두목은 알 수 없는 인간이며 그런 조르바를 보는 두목에게 있어 조르바는 신기함 자체, 새로운 연구 대상이고 그동안 자기가 생각해오던 방식, 걸어오던 길에 대한 딴지걸기이다.

그런 조르바이지만 마음의 갈등을 겪을 때 그는 '두 조르바'의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고 표현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대 악마의 싸움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곧 하느님과 악마는 따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람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스러지는, 마음의 두 상태임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조르바란 인물이 주인공에게는 어떤 책이나 생각보다 더 충격적이고 강력하게 다가오는 경험 자체임을 주인공은 이렇게 표현한다.

전에는 그토록 나를 매혹하던 시편들이 그날 아침에는 느닷없이 지적인 광대놀음, 세련된 사기극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196쪽)

지금 우리가 읽는 책, 우리의 사유, 고뇌도 어쩌면 어느 날 어느 시 맞닥뜨릴 경험으로 인해 지적인 광대놀음, 세련된 사기극으로 몰락할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단지 아직 겪어보지 못한 사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랜 주제이기도 했고 이 책의 주인공에게 역시 그러했던 궁극적인 인간형, 이상적인 인간형, 최후의 인간형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대목을 찾았다.

최후의 인간 (모든 믿음에서 모든 환상에서 해방된 그래서 기대할 것도 두려워 할 것도 없어진)은 자신의 원료가 되어 정신을 산출한 진흙이며, 이 정신이 뿌리내리고 수액을 빨아올릴 토양은 아무데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인간이다. 최후의 인간은 자신을 비운 인간이다. 그 몸에는 씨앗도 똥도 피도 없다. 모든 것은 언어가 되고, 언어의 집합은 음악이 되어도 최후의 인간은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절대의 고독 속에서 음악을 침묵으로, 수학적인 방정식으로 환원시킨다. (196쪽)

이 대목에서 그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 떠오르는 독자는 나 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가 생전에 준비해 두었다는 묘비명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리고 책 속 주인공이 추구하는 인간형은 믿음과 환상과 기대로 가득찬 인간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벗어난 인간인 것이다. 그것이 자유로운 인간이고 궁극적인 인간이라니, 살아서는 도달하지 못할 인간형이란 말인가.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조르바는 죽음을 두려워 한다. 아니, 그의 말을 빌자면 죽는 건 두렵지 않으나 나이드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조르바가 지켜보는 가운데 최후를 맞이하는 오르탕스 부인은 끝까지 절규했다.

"죽고 싶지 않아! 정말 죽고 싶지 않아..."

자신이 곧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절규하게 하는 그것이 곧 가장 인간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본성, 신과 구별되는 한계,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조르바는 끝까지 자신이 당장 원하는 것을 하며, 생각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진 채, '안전하게'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이 책의 말미에, 조르바와 주인공이 나누는 대화를 보면 그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조르바는 무아지경에 빠져든 듯, 입을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저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요? 두목, 어디 한번 들어 봅시다. 만물은 각기 무슨 의미를 지닌 건가요? 누가 이들을 창조했을까요? 왜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 왜 사람들은 죽는 것일까요?"

"모르겠어요, 조르바" 나는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부끄러웠다. 나는 가장 단순한 질문,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받은 셈이었지만 그에게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모르신다!" 조르바의 둥근 눈이 놀라움으로 열리면서 소리쳤다. 내가 춤출 줄 모른다고 고백했을 때와 표정이 똑같았다. 그는 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렇게 소리쳤다.

"...... 아니, 두목, 당신이 읽은 그 많은 책 말인데...... 그게 뭐 좋다고 읽고 있소? 왜 읽고 있는 거요? 그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 책에 없다면 대체 뭐가 쓰여 있는 거요?"

(중략)

".....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어디 그 이야기 좀 들읍시다. 요 몇년 동안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인 책을 읽었을 겁니다. 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50톤 씹어 삼켰을 테지요. 그래서 얻어 낸 게 무엇이오?" (385쪽)

조르바의 물음에 주인공은 그동안 50톤 종이를 씹어 삼키며 읽었을 거라는 책, 사유하며, 고뇌하며 알아가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이리 저리 비유하며 설명하려 하지만 조르바를 이해시키지 못한다. 아니, 그 자신 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 조차 희미해짐을 느끼며 새벽을 맞는다.

본연의 질문 앞에 맞닥뜨리는 순간은 책을 읽는 동안 오지 않는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나'하는 질문은 어떤 특별한 '죽음'을 목격하고서 비로서 제대로 시작된다. 조르바가 오르탕스 부인의 죽음을 경험하며 그랬듯이, 개인적인 얘기이지만 나 자신 아버지의 죽음을, 죽어가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비로소 열리는 질문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듯이.

그래서 이 책의 결론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417쪽)

이거?

조금 더 읽어내려 가다가 다음 구절을 만났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 놓고 그 인내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 (혹자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악마라고 부르는)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았다. 외부적으로는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외부적인 파멸은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417쪽)

인간의 추구해야할 최고의 지점은 하느님이나 악마의 말씀을 따라서, 또는 타협하면서 사는게 아니라, 비록 하느님이나 악마에 의해 자신의 영혼이 시험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끝까지 부서지지 않고 인내와 용기로 버텨내는 것!

이런 실마리를 던져 준 작가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해야겠다. 내 생각에서 나오는 것으로 못미더운 못난 인간 나는 그 누가 이렇게 확인시켜주기를 바라고 있었나보다.

책 전편에 흐르는 조르바의 마초적 행동과 말에서 느꼈던 거부감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넘어서 찾아내야할 것이 분명 이 작품에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내가 찾아낸, 이 책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구절은, 조르바가 어릴때 한 성인(聖人)이 들려주었다는 다음 구절이다.

 

알렉시스 (조르바의 이름), 내 너에게 비밀을 일러주마, 지금은 너무 어려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자라면 알게 될 것이야. 잘 들어 둬라, 얘야. 천당의 일곱 품계도 이 땅의 일곱 품계도 하느님을 품기엔 넉넉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의 가슴은 하느님을 품기에 넉넉하지. 그러니 알렉시스, 조심해라. 내 너를 축복해서 말하거니와,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내면 못쓰느니라. (3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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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9 09: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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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0 17: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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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내가 이 노래, 500 miles 를 알게 된지 31년이 되었다.

노래를 부른 세 사람, Peter, Paul, Mary. 이 중 Mary는 2009년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 노래를 처음 내게 알려준 친구는 아직까지 내게 둘도 없는, 41년째 친구.

며칠 전 이 친구가 블로그에 지금 가족과 자동차로 여행중인데 500 마일을 운전했다고 쓴걸 보고, 500 마일이라는 단어때문에 오랜만에 다시 이 노래를 떠올리고는 오늘까지 계속 흥얼흥얼 거리고 있다.

 

 

 

 

 

 

 

 

 

 

 

 

 

 

 

 

 

 

 

 

 

 

 

이 책 역시 다 읽은지 며칠 되었건만 아직도 그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말이야~"

남편은 아무 죄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나로부터 튀어나오는 그리스인 조르바로 시작하는 말을 들어주고 있는 중이다.

 

 

 

 

 

 

500 마일과 그리스인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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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과 4월은 또 얼마나 그 느낌이 다른가.

51. 이제 올해의 초반부가 아니라 중심부에 들어섰다는 것을 스스로 다짐시키지만 내 생활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계절로 보면 여전히 봄이지만 4월의 푸릇푸릇 봄이 아니라 5월은 완숙한 봄, 슬쩍 여름을 끌고 올 봄. 지금도 한낮은 기온이 꽤 높지만 아침이라서 자켓에, 긴 치마를 입고 집을 나섰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처음 가보는 길이다. 예전 기무사가 있던 곳이라는데 지난 달 갔던 대림미술관이 경복궁을 향해 서쪽 편에 있다면 (서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경복궁의 오른편에 있다 (북촌).

 

51일이라는 것을 경복궁 담을 따라 늘어서 있는 경찰차와 경찰들이 알려준다. 담을 따라 걸어가니 귀에 익은 건물들이 줄줄이 늘어서있다. 란 스튜디오, 금호미술관, 갤러리 현대, 이리자 한복, 법련사 (송광사 서울 분원), 내 이름과 똑 이름의 작은 식당, 바로 어제 김정은이 결혼식을 올렸다는 두가헌 갤러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물은 나즈막해서 위압적이지 않았다.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공간은 지하에서 윗층까지 터서 만든 일명 서울박스라는 전시공간이다. 원래는 전시공간이 아니었다는데 2013년 건축가 서도호의 전시 이후로 전시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방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상징적인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서울박스에는 국제적 작가의 규모가 큰, 실험적, 미래적 현장설치 작품이 전시되는데 대한항공에서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율리어스 포프 (Julius Popp) <bit.fall>

 

 

네개의 대형 컨테이너를 엇갈리게 쌓고 그 꼭대기에서부터 물이 폭포처럼 떨어지게 해놓았다. 떨어지는 동안 물방울들이 잠깐 동안 하나의 단어를 보여주고 사라진다. 1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

무슨 단어인지 집중해서 보다보니 단어가 한 개 국어가 아니다. 영어, 조금 있으니까 스페인어, 프랑스어, 한국어, 아랍어, 인도어 등등 바뀌어 가며 단어가 계속 나타났다 사라진다.

도슨트 설명을 들어보니, 데이터의 최소 단위 정보 조각 (bit)의 떨어짐 (fall), 즉 계속 쏟아져 내리지만 짧은 시간만 존재하고 사라지는 정보의 일시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여기 보여지는 단어들은 실제로 google에서 실시간으로 검색되는 단어로서 이 설치물 하단에는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다고. 자그마치 800리터의 물을 순환시켜야 하는 그야말로 대규모 설치물이다. 현대적 바벨탑을 형상화했다는 말이 더 설명없이도 바로 이해되었다. 옆방에서작가가 직접 작품을 설명하는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어서 그것도 보고 나왔다.

다음 방으로.

 

 

안규철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

 

 

 

 

 

마종기 시인의 시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 지성, 1980)>을 인용한 전시 제목이다. 안규철 작가는 1955년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교수.

 

 

 

 

국립현대미술관이 현대자동차와 함께 2014년부터 10년간 한국을 대표하는 중진 작가의 개인전을 지원하는 장기 프로젝트로서 비용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젝트라고 한다. 안규철작가는 2015년 두번째 선정 작가이고 2014년 첫번째 선정된 작가는 이불 작가, 2016년 세번째로 선정된 작가는 김수자 작가로 올 여름부터 전시될 예정이다.

 

아홉마리금붕어 (Nine goldfish, 2015)

 

 

아홉개의 동심원. 각 동심원에 금붕어 한마리씩.

서로 닿을 수 없는 삶의 표상을 투영. 현대인들의 소통 단절을 보여주고 있다.

보자마자 이심전심으로 통했는지 눈물이 핑 돌기부터 했던 작품.

 

 

 

 

아홉의 의미가 있나요?

도슨트에게 물어봤다.

10이 되지 못했다는, 완전에 이르지 못한 하나의 결핍을 상징한다고 설명해주었다.

 

 

피아니스트와 조율사 (The pianist and the tuner, 2015)

 

 

피아노가 한대 놓여있다. 정해진 시간에 피아니스트가 와서 같은 곡을 연주하는데, 이전에 조율사가 와서 피아노에서 해머를 하나씩 빼놓는다고 한다. 해머가 하나씩 빠질때마다 연주는 조금씩 변형되어 들려지게 된다.

음악과 침묵, 의미와 무의미,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이루는 아이러니를 의도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매일 오후 3시와 5시에 피아니스트가 와서 연주하는데 이곳을 통과해서 다른 곳 전시를 보고 있는 동안 피아노가 연주되고 있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연주곡은 슈베르트 즉흥곡 Op.90, 1번과 3, 그리고 야나첵의 <오솔길에서>.

 

1,000명의 책 (1000 Scribes, 2015)

 

 

이건 설치미술이 아니라 행위예술이다.

 

 

 

전시기간 동안 작은 방에서 미리 신청한 1000명의 관객이 한사람씩 1시간동안 국내외 문학작품을 연이어 필사하는 필경 작업이다.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만의 글씨체로, 자신만의 마음을 담아.

 

 

 

 

완성되면 이것을 인쇄하여 한권으로 묶어서 작업한 사람에게 발송하는데 이 발송 단계까지가 프로젝트의 완성이라고 한다.

 

 

 

 

 

 

 

 

의사였던 안규철 작가의 아버지는 퇴근하여 돌아오면 책상에 앉아 의학서적을 꼼꼼히 베껴쓰는 작업을 하곤했는데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오마쥬라니, 어릴 때 우리의 기억은 자라면서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비집고 들어와 형체화할지 모르는 일이다.

 

 

식물의 시간 (Time of plants, 2015)

 

 

 

열다섯 개의 화분이 공중에 모빌로 매달려 있다.

 

 

 

 

바닥에는 바닥대로 화분의 무리가 놓여있다. , 바닥에 놓여있을 수도 있지만 공간에 붕 띄어져 있을 수도 있다. 삶의 균형을 이루려는 발버둥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 균형은 불안정 구조속의 균형일 뿐이라는 의미를 상징한 작품이다.

 

64개의 방 (64 Rooms, 2015)

 

 

푸른 벨벳 커튼으로 구획되 64개의 방. 이 칸막이 구조물 자체 보다는 통과하는 동안의 느낌과 감정, 이것이 작품의 의의라고 한다.

 

 

 

 

 

기억의 벽 (Wall of memories, 2015)

 

 

이 역시 관객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작품. 벽 한면이 모두 한사람 한사람이 붙인 같은 규격의 쪽지로 채워져있다. 8,600개의 쪽지엔 지금 현재 당신이 가장 그리운 것은?”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적혀있다. 누구는 엄마라고, 누구는 꿈이라고, 누구는 관심, 나눔이라고 적었다. 안규철 작가는 아버지라고 적었다고. KBS벽에 붙여졌던 이산가족찾기 벽보를 보았을때의 기억을 되살려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전시기간 동안 계속 진행되는, 긴 호흡의 process 적인 작품이다.

 

 

침묵의 방 (Room of silence, 2015)

 

 

 

하얗고 흰, 큰 돔 형태의 방이 있고 들어가면 역시 온통 하얀 벽에 천장에 둥근 창이 하나 있을 뿐 침묵과 정적의 방이다.

허공의 세계, 무의 세계를 그리고자 했다. 자그마치 39톤의 무게 때문에 미술관에 설치할 때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했고 전체 예산의 절반이 이 설치물에 들어갔다는 설명.

안규철 작품에 대한 공감과 감동을 잔뜩 안고 다음 기획 전시 코너로.

 

 

질 바비에 (Gilles Babier), Echo System

 

 

 

들어가는 입구의 벽면에 빡빡머리 아저씨가 열심히 질문에 답하는 동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안규철 작가 전시 공간이 온통 하얗고 조용하고 정적이던 것에 비해 여기는 산뜻한 분홍색 타이틀부터 분위기를 확 바꿔놓는다.

한불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작년엔 우리 나라 작가 작품을 프랑스에서, 올해는 프랑스 작가 작품을 우리 나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중이라고.

 

 

 

 

 

 

 

 

<체스터 치즈의 악몽, 2005 (종이에 과슈)>

 

 

 

올해 51세된 바비에르는 원래 바투아누 태생이고 스무살 때 프랑스로 이주했다. 바투아누라는 곳은 세가지 언어를 사용하고 80여가지의 사투리가 쓰이는 곳인데 그런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다가 한가지 언어가 사용되는 프랑스로 오니 그게 너무 이상하더란다. 그래서일까. 바비에르는 언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다변증,  2009>

 

<꼬인 이야기로 된 세계-물방울, 2010>

 

 

 

<조용한 남자 (연구), 2013>

 

 

그가 하는 작업 중에는 라루스 백과사전을 그대로 베껴쓰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A부터 차례로 베껴쓰는 것. 1992년부터 시작하여 2올해로 25년째. Z까지 마치려면 자기가 200살까진 살아야할 것 같다고, 그 정도로 의술이 발달할지 모르겠다고 능청을 떤다. 사전의 글자는 만년필로, 삽화는 과슈라는 재료를 사용한다.

 

 

 

확대복사가 아닙니다! 글자는 글자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그대로 베꼈어요.

 

 

 

과학 기술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Cellular automation (세포 자동화)라는 개념을 또다른 작품의 도구로 삼는다.

 

 

 

 

 

사진 아니고 이것도 하나 하나 손으로 그린 작품.

 

 

 

 

 

 

 

 

 

 

 

 

 

 

 

 

 

<의사 시리즈 - 의사의 가족, 1998>

 

 

 

 

<리본 맨, 2012>

 

 

 

 

<그림에 거주하기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레몬, 오렌지와 장미가 있는 정물화, c.1633), 1992>

1633년의 오래된 다른 화가의 기존 정물화에 질 바비에르는 무슨 짓을 했는가 보라. 하얀 집을 하나씩 다 끼워넣었다. 나는 이 사진 밖에 찍어오지 않았지만 옆으로 계속 이런 식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금은보화의 방 (네 번째 위장), 2012>

 

바비에르의 작품 매뉴얼이라는 것이 또 재미있다. 체스의 규칙이라고 해서, 체스 칸 같은 작은 박스에 여러 가지 단어나 문장을 넣어놓고 어떤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각기 다른 단어나 문장이 담겨있는 박스를 무작위로 고른다. 고른 단어와 문증들을 조합하여 작품의 주제로 삼는다. 라루스 사전을 베끼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도 매주 일요일마다 지속적으로 해나갈 작품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런 식으로 결정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아마 그가 고른 박스에는 일요일, 사전, , 쓴다, 같은 단어들이 들어있었나보다.

 

 

그에게 작업과정에 대해 물었을때의 대답은 의외이기도 하고 듣고 나니 대가다운, 당연한 대답 같기도 하다.

"엄격하고 계획적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본 전시는 망상지구 (The Paranoid Zone)

 

  

 

 

 

 

 

 

 

 

 

 

 

시작된지 얼마 안된 전시라서 도슨트 설명을 들을 수 없어 아쉬웠지만 거대 설치 미술을 보고 (어떤 것은 위 사진 처럼 누워서), 느끼고, 체험해보며, 선입견없이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설치된 이 거대한 새가 천천히 돌아가면서 다른 색, 다른 형체, 다른 이미지로 바뀌고, 그걸 보는 동안 보는 사람의 느낌은 해체와 조합을 반복한다.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오는 기분으로 미술관을 나왔다.

오는 길에 고속버스 고장으로 기흥 휴게소에 40분을 정차해있었다.

그 말을 오랜 만에 다시 떠올렸다. 이 세상 사람의 수 만큼 다른 세계, 우주가 존재한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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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5-02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요즘엔 미술관 순례에 재미를 붙이셨나 봅니다. 덕분에 요즘 미술관에서 뭘하는지 곁다리로 알 수 있어서 좋습니다.ㅋ 안규철 작가 멋있군요!^^

hnine 2016-05-02 18:08   좋아요 0 | URL
거의 매일 집에 박혀 있다가 이런 날이 유일하게 외출하는 날이 되는 셈이지요. 그러니 한번 나갈 때 작정하고 좀 멀리 나갑니다 ^^
안규철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조형예술가인지 철학자인지 구분이 모호해지는 걸 느꼈어요.
다음엔 어디로 갈까 잘 찾아보고 있어야지요 ^^

몬스터 2016-05-02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홉마리 금붕어에서 마음이 찡 했다가 현재 가장 그리운 사람에서 눈물이.... 저는 부모님이요. 정성들인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hnine 2016-05-03 05:08   좋아요 0 | URL
마음이 찡하면서 전해오는 게 있지요. 뭐라 말로 표현 못할.
평소에 우리도 가지고 있었으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감정이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 드러나게 되고 그게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되고, 그런 기회를 주더군요.
다른 사람의 세계를 넘겨보는게 책 읽는 것만으로 모자랄 때 이렇게 미술관을 찾게 되어요. 리뷰 쓰듯 정리하느라 길어진 페이퍼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공부할 권리 -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인문학 선언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6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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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제목을 가진 책이 얼마나 많은가. 읽어보면 다 옳은 내용이고 공감하겠지만 그 책에만 있는 내용은 아니어서 실망하는 책.

전작 <그림자 여행>을  꽤 괜찮은 책이었다고 기억하면서도 저자의 이 책 소식을 처음 보았을 때만해도 굳이 구입해서 읽을 생각까진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어느 분의 리뷰를 통해 책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맛보게 된 후 바로 구입, 바로 읽어버렸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책이 아니라 다른 걸 좋아하는 경우에도 대개 그렇겠지만 이러이러해서 좋아한다고 이유를 앞세우지 않는다. 일단 좋아하는게 먼저. 내가 왜 책 읽기를 좋아할까 같은 문제는 누가 혹시 물어보는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렇게 책을 읽어왔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머리를 한방 맞은 것 같은 이유는 내가 읽어온 그 많은 책들이 그 후에 나에게서 어떻게 빠져나가 버렸나 하는 걸 떠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빠져나갔다는 것을 알고나 있었나?여기 알라딘 서재에 리뷰를 올린 책만 해도 이 책이 833권째인데, 적지 않은 권수의 책들을  그 책을 읽는 일주일이면 일주일 동안의 재미, 감동 말고 나는 그 책들을 어떻게 소화시켜 이후 내 삶을 다지고 일으켜세우는데 이용하였는가 이제서야 진지하게 자신에게 묻게 된 것이다.

'나는 그동안 책을 어떻게 읽어온 것일까?'

읽고 싶은 책을 손에 넣어 읽어'치웠다'는 만족감? 어디가서 그 책 나도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책의 권수가 늘어가는 뿌듯함? 가끔 어느 한 구절을 인용할 수 있는 자산? 그거였나? 가슴에 보이지 않는 손을 얹었다.

물론, 그동안 읽어온 책들은 일부러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무의식의 어느 한 켠에라도 내 삶에 반영되어 있을 거라는, 그 정도의 얼버무림 말고, 이 책의 저자처럼 그렇게 적극적이고 확실하게 책을 내편으로 만들고 내 양식으로 만들고 내 몸의 일부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지, 공부의 재료로 삼을 수 있었는지, 제대로 공부하였는지.

읽으면서 참으로 여러 군데 밑줄 긋고 포스트잇을 붙였지만 그보다 더 나를 일깨운 것은 그 물음이었다.

 

 

 

 

 

 

 

 

 

 

 

그녀가 물론 책을 읽을 때마다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읽어야겠다는 각오로 읽은 것은 아니다. 그녀에겐 그저 습관이 되어 있을 뿐이고 그녀의 책 읽는 스타일일 뿐이다.

313쪽에 나와있기를 그녀는 책을 통해 작가와 독자가 직접 만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의 온기를 담은 글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이 가진 미덕 중 또 하나는 결코 어려운 말로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 페이지 어느 구절을 읽어도 혹시 그녀의 의견에 공감 못할 대목은 있을 수 있을 망정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없다.

그동안 공부라고 믿었던 것들이 단지 문제풀이의 기술이었음을 자각했다는 대학 1년때가 출발이었을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기대 속에 묻혀버린 진짜 자기 모습을 찾고자 함이 시작이었을까. 최근에 이르러서 누구나 다 고개 끄덕일 직업이나 타이틀에 대한 아쉬움이 또한 공부의 동기를 더했을까. 살아서 해탈에 이르지 않은 이상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삶의 고민을 만들고 해결하고 때론 오랫동안 지니고 산다. 그건 좋고 나쁜 것을 떠나 그냥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것 자체가 살아가는 과정이고 해결하려는 몸부림을 거치며 성장하는 것이니까. 그러면서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져 가는 것이니까. 공부는 바로 그때 필요한 것이다. 내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한 특권이자 권리인 것이다.

책 한권 읽기 바쁘게 다음 책으로 손을 뻗는 대신 어줍잖더라도 이렇게 리뷰를 올리는 행위, 이것 역시 의무가 아니라 권리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말을 이 책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서 찾는다.

무엇이든 언어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것은 비로소 온전한 것이 되었다.

그 온전함이란 그것이 나를 다치게 할 힘을 잃었음을 말한다.

 

-버지니아 울프, <존재의 순간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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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9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6-04-29 20:15   좋아요 1 | URL
이 책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책이었어요. 말씀하신대로 금방 읽어지는 책이기도 하고요.
낮엔 기온이 꽤 높은데 밤이 되면 쌀쌀하네요.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저녁 되세요~
 

 

 

 

 

이 사람

 

 

 

 

 

 아니, 이 어린이

 

 

 

 

 

 

프랑스 패션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

 

 

 

 

어린 시절 할머니의 뷰티 살롱에서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했던 고티에.

매력적인 옛날 옷들 중 특히 관심을 끈 것이 왜 코르셋이었을까?

훗날 고티에 작품의 중심 주제가 되었으니.

 

 

 

곰인형 나나가 그의 창작 활동의 첫 대상이었다.

 

 

 

 

 

고티에는 곰인형 나나를 위해 신문지를 가지고 첫 콘브라를 만들었다.

이후 그는 20세기의 코르셋과 1940년대의 속옷인 웨이스트-신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고,

콘브라, 코르셋 드레스 등, 겉옷으로서의 속옷을 소개했다.

 

 

 

 

고티에는 이후 텔레비전에 나오는 공연을 보면서 댄서들의 의상에도 매혹되었다.

자크 베케르의 영화 <팔발라>를 통해 파리 오트쿠튀르 세계에 대해 알게 되고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한다.

 

 

 

 

 

어떤 사람들은 고티에의 코르셋이 1960년대와 1970년대 페미니스트의 투쟁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고티에는 현대 여성에게 있어서 코르셋은 억압과 순종의 의미가 아니라, 권력, 노출과 유혹의 연결고리를 상징한다고 믿는다.

고티에의 생각.

 

 

 

고티에가 디자인한 향수병 (향수가 아니라).

 

 

 

 

 

 

 

'오디세이'

전설 속의 선원과 사이렌을 모티브로 고티에가 디자인 한 작품들이다.

배경이 온통 파란색인 이유

선원 이미지는 지금도 그의 의상과 향수병에 파란색 줄무늬로 나타나고 있다.

 

 

 

 

 

 

 

 

 

위의 두 사진은 같은 마네킹이지만 잘 보면 눈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이 다르다.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 포스터로 사용된 사진.

 

 

 

 

이번 전시에서 제일 기억에 남을 작품은 이것이었다.

 

 

 

 

망사천에 심장과 혈관 모양의 자수가 놓인 바디스타킹. 스타킹!

 

 

 

 

 

 

 

 

 

그를 대중적으로 더 유명하게 해준 가수 마돈나의 의상.

 

 

 

 

이곳으로 들어가면 가운데 무빙 캣워크가 설치되어 있다.

실제 캣워크를 마네킹으로 재현해보고자 한 의도.


 

 

 

 

 

 

 

 

 


 

 

 

 

 

 

고티에는 청소년기에 런던에서도 큰 감명을 받는다. 런던에서 볼 수 있는 전통과 아방가르드의 조합은 파리의 우아함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훗날 고티에는 중절모를 쓴 댄디들과 트라팔가 광장의 문신을 한 펑크족들을 혼합해낸다. 라텍스와 깃털, 레이스, 격자무늬 체크, 안전핀, 스터드와 금속 징 등이 뒤섞여 관습과는 동떨어진 복장이 고티에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일명 '펑크 캉캉'. 전통적인 파리지앵의 스타일에 프랑스의 반항 정신과 런던 펑크족의 자유를 담았다. 고전과 비관습의 조합.

 

 

 

 

다양한 문화, 민족, 인종을 하나의 패션 작품에 담아 표현하다.

일명 '어반 정글 (Urban Jungle)'.

 

 

 

 

사람의 체형이 저렇게 한떨기 꽃으로 보일 수도 있구나.

얼굴은 꽃.

목부터 허리까지는 줄기.

 

 

 

 

영화 감독, 안무가, 팝스타들과 함께 한 다양한 콜라보레이션

 

 

 

 

 

 

웨딩드레스에 방패가?

전통적인 공주 이미지의 웨딩드레스에서 벗어나 어깨 부분에 전사의 방패를 넣어 만들었다.

 

먼저 전체를 찍고,

 

 

 

보고 싶은 곳만 크게 찍기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이동하는 복도 벽

 

 

 

고티에보다는  DDP (동대문 디자인 프라자) 라는 전시 공간에 더 관심이 있어 가본 곳인데, 전시도 좋았다.

나는 패션에 그리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단순히 유명한 디자이너의 패션을 본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만들어놓은, 흉내낼 수 없는 세계를, 그 세계를 만들어간 과정을 보는 데에서 의미를 찾았다.

 

 

내가 만들어가고 있는 세계는?

 

 

 

전시는 6월 30일까지.

(나는 4월 17일 일요일에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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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4-26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좋은 구경하셨군요.
저는 서울 살면서 동대문 프라자를 아직 안 가봤네요.
창작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고 하지만 정말 의상의 세계는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대단하네요.^^

hnine 2016-04-26 12:16   좋아요 0 | URL
대림미술관을 들러 동대문 프라자까지, 서울 간 김에 저 날 제가 아주 작정을 하고 돌아다녔답니다 ㅋㅋ 두군데 모두 처음 가보는 곳이었는데 서울은 지하철 덕분에 어디든지 못 갈데가 없어서 좋아요.
장 폴 고티에 기념품 샵에서 몇가지 물건을 들었다 놓았다 망설이다가 그냥 왔답니다. 눈이 호강하니 굳이 물건은 사지 않아도 마음 불렀어요.

jeje 2016-04-28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웨딩드레스. 우와, 정말 예뻐요!

hnine 2016-04-28 13:10   좋아요 0 | URL
jeje님은 아직 희망있습니다. 쟝 폴 고티에가 디자인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