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관이 도끼에 맞아 죽을 뻔했디 - 대한민국 최초 법의학자 문국진이 들려주는 사건 현장과 진실 규명
문국진 지음, 강창래 인터뷰어 / 알마 / 2011년 10월
품절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이 임상의학이라면,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은 법의학이다." 이 말에 매료되어 나는 당시 불모지였던 법의학의 길로 들어섰고, 이제 법의학을 시작한 지 56년이 흘렀다. 이 인터뷰집은 그간 나의 학문과 감정 실무를 통한 삶에 관한 기록이다. -5쪽

법의학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범인들을 체포한 결과를 보면, 그동안 고문과 자백으로 만든 범인들 가운데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억울한 범인'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살인 사건을 저지른 범인들 가운데는 착하다는 평판을 받는 사람도 많았고, 험악한 인상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모습이거나 아주 잘 생긴 경우도 꽤 있었으며, 대개는 지능지수도 평균 이상이었다. 게다가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다. 또 아이들을 해코지하는 범인들에는 '낯선 사람'보다는 잘 아는 친지가 더 많았으며,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최고위층 집안에서도 끔찍한 살인자가 나왔다. -12쪽

'CSI 효과'라는 말이 있다. 미국 드라마 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시리즈의 시청률이 올라갈수록 수사 당국은 더 긴장할 수밖에 없다. 과학수사에 대한 지식으로 무장한 범죄자일수록 더 지능적인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반인들은 드라마에 나오는 멋진 과학수사 요원들처럼 실제 수사관이 범죄자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거를 확보해 범인을 체포하기를 기대한다. 또 법정에서도 과학적인 증거에 근거해 유무죄 판결이 날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 더 있다. 그 옛날 고문과 자백으로 범인을 '만들었던 시절'에는 실제 범인이라고 해도 고위층 인사를 잡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법의학적인 증거는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그들도' 옛날처럼 마음대로 범죄를 저지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8쪽

시인 고은이 그랬다죠. '감옥에 다녀오면 생각이 훌쩍 자란다. 감옥에 가면 다른 할 일도 없고, 당장 급한 걱정도 사라진다. 그러니 자연히 독서를 하고 명상에 잠기게 된다.' 역시 심심해야 독서도 하고, 생각도 하고 그러는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으니 독서하기가 쉽지 않아요. 책이 안 팔리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에요. 나부터도 바둑 두고, 당구 치고, 비디오 보고, 사람 만나고, 원고 쓰고, 강의 나가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그때 책을 읽게 돼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독서에 적당한 환경이 아니에요. -31쪽

이번에 대한법의학회 모임에 가면 그런 이야기를 좀 할 작정이오. 법의학문화상을 하나 만들어보자고. 그래서 <싸인>과 같은 드라마를 만든 사람들에게 상을 주자고. 그렇게 격려해줘야 더 좋은 법의학 드라마를 만들 거 아니오. 그러면 자연히 일반인들도 법의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게 될 거고. 그래야 제도도 만들어지는 거디요. 언제나 제도가 먼저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세상이, 세상 사람들 인식이 바뀌어야 제도가 만들어지는 거요. 내가 왜 『새튼이』나 『지상아』를 썼겠어요.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디요.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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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11-14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국진 교수는 국내 법의학의 대부지요.그분이 지은책 지상아등 몇권이 있는것이 생각나네요^^

이매지 2011-11-14 09:58   좋아요 0 | URL
이 책에도 잠시 언급되지만 곧 50번째 책을 출간한다고 하시더군요.
지상아, 새튼이 같은 책이 많이 언급되고 있어요^^
저는 명화로 죽음을 분석하신 책을 몇 권 읽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정말 대단하신 분이더라구요^^
 
내가 잠들기 전에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6-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6
S. J. 왓슨 지음, 김하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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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랜덤하우스에서 나온 표지에 손글씨 같은 게 들어간 책이 재미지다는 얘기를 듣고 고른 책. 하지만 읽다보니 뭔가 이상한데, 하면서 다시 찾아보니 원래 읽으려고 했던 책은 <라스트 차일드>였다. 누굴 탓하랴, 이왕 읽기 시작한 거. 평점도 나쁘지 않고, "충격적 데뷔작"이라니 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결말까지 읽으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몰라, 하면서 마지막 한 방을 기대하며 읽어갔다.

  매일 아침, 낯선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침대에서 눈을 뜨고, 거울을 보고 너무 늙은 자신의 모습에 놀라며 하루를 시작하는 크리스틴. 낯선 남자는 그녀에게 자신이 남편 벤이라고, 결혼한 지 20년이나 지났다고, 당신은 사고로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벤의 도움으로 잠들고 나면 기억을 잃는 그녀는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벤에 대한 기억도 없는 그녀는 이 모든 생활이 낯설기만 하다. 그런 혼란 속에서 집에 혼자 남은 그녀에게 내시라는 정신과의사의 전화가 걸려온다. 그동안 그녀를 비밀리에 상담해왔다는 내시는 그녀에게 일기장의 존재에 대해 알려준다. 치료의 일환으로 매일매일을 기록한 일기장. 거기에는 "벤을 믿지 마라"라는 문장이 써 있다. 자신의 과거를, 삶을 온전히 채우기 위해 일기장을 읽기 시작하는 크리스틴. 그녀는 일기장을 읽으며 자신을 둘러싼 비밀과 예기치 않았던 삶을 마주하게 된다.

  기억이 없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그리고 그렇게 기억을 잃으며 살아가는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벤의 설명으로 머리로는 어떻게든 납득할 수 있지만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살아갈 수 없는 크리스틴도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몰랐던 자신의 삶에 대해 알게 되면서 혼란스러워진다. <메멘토>를 비롯해 많은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에서 접한 소재이기 때문에 단기기억상실증이란 소재는 낯설지 않다. 어떻게 보면 식상할 수 있는 이 소재를 저자는 '일기'라는 기록을 토대로 어느 정도 긴장감 있게 이야기를 진행해간다. 하지만 데뷔작이기 때문에 아직 기교가 부족해서일까. 다소 늘어지는 서술과 엉성한 마무리가 발목을 잡았다. 설마설마 했던 결말을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이란.

  간질 수술을 받은 후 새 기억을 형성하지 못해 과거 속에서 살다가 세상을 뜬 한 환자의 실화에서 영감을 얻어 많은 고심 끝에 작품을 썼기 때문일까. 혼란스러움, 무기력함, 불안 등 주인공의 심리묘사는 괜찮았다. 하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러를 기대하고 본다면 너무나 맥 빠지는 결말. 내용을 쳐내고 속도감 있게 진행됐더라면, 마무리에 방점을 제대로 찍을 수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에 못내 아쉬웠던 책. 이 아쉬움을 채울 수 있다면 앞으로 좋은 작가가 되지 않을까 싶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옥석을 만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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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황홀 -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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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 라디오를 듣다가 사연 하나에 귀가 쫑긋했다. 실명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곳에 가봤다면 누구나 어딘지 알 법한 식당에 얽힌 사연이었다. 사연을 보낸 이는 첫 월급을 타고 어머니에게 맛있는 음식을 거하게 대접해드리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허름한 메밀국수집에 이끌고 가 맥이 빠졌다고 했다. 하지만 실망한 그에게 어머니는 그 식당이 아버지와 첫 데이트할 때 온 곳이라고, 아들과 한번 함께 오고 싶었노라고, 허름할지는 몰라도 우리 가족의 역사가 담긴 곳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사연을 들으며 문득 누구에게나 이렇게 사연이 담긴 식당이 한군데쯤은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문학동네 까페에서 오후 5시면 언제나 고픈 배를 더 꼬륵거리게 만드는 성석제의 <칼과 황홀>이 생각났다. 단순히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음식과 거기에 얽힌 사연. 내가 라디오에서 들은 것 같은 그런 이야기가 <칼과 황홀>에는 오미(五味)처럼 담겨 있었다. 

  "에미가 다섯시에 일어나서 해놓은 밥을 안 먹고 가는 아들놈이 공부는 해서 뭐할 것이며 학교는 뭐하러 다니느냐. 때려치워라, 그 망할 놈의 학교"라는 작가의 어머니의 말에 빵 터졌다가 달걀을 먹으며 밥값을 아껴 남동생 운동화를 사보냈노라는 여공의 이야기에 가슴이 짠해지기도 한다. 그것은 밥상, 술상, 찻상이라는 장의 구분을 넘어, 세대의 경계를 넘어 '공감'의 방식으로 독자의 마음을 파고든다. 일전에 <소풍>에서 작가는 "음식을 만들고 나누어 먹는 것이 바로 자비이며 삶의 일부를 교환하고 서로 느낌을 공유하는 행위"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그의 '음식 철학'은 <칼과 황홀>에서도 유효하다. 단순히 '맛집'을 나열하는 책도, 자신의 요리비법을 전수해주는 책도 아니지만 우리가 특별하게, 혹은 별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찾아먹은 끼니 속에서 작가는 독자와 교감을 시도한다. 

  음식은 단순히 '맛'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다. 물론 맛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먹었느냐도, 어떤 분위기 속에서 먹었느냐도 중요하다. 책 속에 소개된 음식 중에 유독 먹고 싶어진 음식이 있었다. 바로 '배추전'이다. 작가는 배추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배추전의 밀가루옷이 얇으면 얇을수록 좋은 것이라고 주장해왔는데, 그래야만 배추의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데 배추전의 맛이라는 게 무엇일까. 배추전이 그렇게 맛있다면 왜 전국적, 세계적으로 배추전을 먹지 않을까. (중략) 수분이 많은 배추전은 지진다고 해서 바삭해지거나 맛이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배추전의 맛은 밀가루의 맛, 기름과 간장의 맛이다." 그의 말마따나 배추전은 대단한 요리는 아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갓 상경했을 때 주인집에 갖다줬다가 핀잔("이것도 먹는 음식이냐?")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어우러져 우리 집에서 배추전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음식은 독자인 내게 배추전이 갖는 의미처럼 어떤 사연이 담겼느냐에 따라 재정의된다. 소시지, 해장국, 김밥, 동파육, 조기, 스파게티, 삶은 달걀 등등. 처음 접하는 음식이건, 평소 즐겨 먹던 음식이건, 심지어는 평소 질색을 하던 음식이건,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그의 구수한 입담에 놀아나다보면 어느샌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칼과 황홀 사이에 음식과 인간, 삶이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맛있는 음식이 있기에 우리 삶이 더 풍요롭게 채워지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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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아이들 2 (양장)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0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0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절판


아니지, 부잣집 꼬먀야, 제3의 요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세상에는 재산-가난, 부자-빈자, 우익-좌익이 있을 뿐이야. 온 세상이 나의 적이란 말이야! 세상은 관념이 아니란다, 부잣집 꼬마야. 세상은 몽상이나 몽상가들이 있을 곳이 아니라고. 세상이 뭐냐 하면, 이 코찔찔이 녀석아, 물질이야. 재물과 그 재물을 만드는 놈들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비를라와 타타처럼 막강한 가문들만 봐도 알잖아. 그런 놈들은 재물을 만들어내지. 나라를 꾸려가는 것도 재물을 얻기 위해서야.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재물 때문에 미국과 러시아가 원조물자를 보내오지만 여전히 5억 명이 굶주림에 시달리지. 재물을 갖고 나서야 꿈을 꿀 여유도 생기는 법이야. 재물이 없으면 그저 싸워야 할 뿐이라고. -43쪽

"그렇지만…… 자유의지는…… 희망은…… '마하트마'라고 부르기도 하는 인류의 위대한 영혼은…… 게다가 시도 있고 예술도 있고……" 그러자 시바가 승리를 움켜쥐면서: "봤지? 네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너무 오래 끓인 밥처럼 곤죽이 돼서 흐물흐물하지. 할망구처럼 감상적이라고. 그렇게 시시껄렁한 것들을 어디다 쓰겠냐? 다들 먹고 살기도 바쁜 판국에. 지랄 염병, 이 오이코 녀석아, 난 이제 너희 협회라면 신물이 난다. 재물과는 아무 상관도 없잖냐."-44쪽

아이들은 빈 그릇과 같아서 어른들이 그 속에 독을 주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파멸시킨 것은 어른들의 독이었다. -45쪽

모든 문학이 그렇듯이 자서전에서도 저자가 독자를 설득하여 무엇을 믿게 만들었느냐가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인데……-75쪽

자정은 수많은 아이들을 낳았다. 독립의 자식들 중에는 인간이 아닌 것들도 있다. 폭력, 부패, 빈곤, 장군들, 혼돈, 탐욕, 후추통…… 나는 유배된 다음에야 비로소 자정의 아이들이 내가-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18쪽

"아, 그 웃기는 전쟁이 좋은 사람들은 모조리 죽여버리고 허섭스레기만 남겨놨군요!"-225쪽

전쟁의 폐허 속에서 나는 정당성-부당성을 발견했다. 부당성은 양파 냄새와 비슷했다. 톡 쏘는 강렬한 냄새 때문에 눈물이 절로 났다. -276쪽

"대장, 선거라는 건 정말 한심한 짓이야. 선거철만 되면 꼭 나쁜 일이 생기거든. 그리고 국민들이 어릿광대 같은 행동을 한단 말이야."-336쪽

관광객 중 하나가 나에게 인도는 놀라운 전통이 많이 남아 있는 멋진 나라라고 말했다. 다만 끼니때마다 인도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된다면 더욱더 완벽할 거라고 했다. -366쪽

나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전혀 다른 결말을 보게 되지 않을까? 아무튼: 나는 쪼가리와 파편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내가 까마득한 옛날에 말했듯이 주어진 몇 개의 실마리를 가지고 빈틈을 메워가는 것이 요령이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은 대부분 우리가 없는 곳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내용을 암시하는 머리글자가 적힌 서류철을 한 번 본 기억을 바탕으로, 그리고 약탈당한 내 기억창고에 아직도-바닷가에 나뒹구는 병 조각처럼-남아 있는 과거의 파편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끌어가야겠는데…… 마술촌에서는 기억의 쪼가리 같은 신문지들이 한밤의 조용한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굴러다니곤 했다. -387~8쪽

정치라는 것은, 아이들아: 태평성대에도 언제나 더럽고 치사한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멀리했어야 옳았다. 나도 존재이유 따위는 꿈도 꾸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그렇게 거대하고 거시적인 활동보다 차라리 사생활이-즉 개개인의 보잘것없는 인생이-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젠 어쩔 수 없다. 고칠 수 없는 병이라면 참는 수밖에 없다. -404쪽

절제술(어원은 아마도 그리스어일 것이다): 의학은 이 말에 수많은 접두사를 붙였다. 맹장절제술 편도선절제술 유방절제술 난관절제술 정관절제술 고환절제술 자궁절제술. 살림은 이 수술 목록에 또 하나의 용어를 거저 무료 공짜로 기증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비록 의학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역사학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희망절제술: 희망을 적축하는 수술. -408쪽

"우리 결혼해요." 그녀가 그렇게 청혼을 했고, 그 말은 마치 카발라의 주문처럼, 아브라카다브라처럼 내 마음을 마구 설레게 하면서 운명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켰다. 하지만 현실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사랑이 모든 것을 극복한다는 말은 봄베이 영화에서나 가능하다. 한낱 예식 따위로 찌익 쫘악 우지끈을 물리칠 수는 없다. 그리고 낙관주의는 질병이다. -423쪽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 자네는 빈둥거리는 것 말고는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더군. 새로운 일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사람은 저승사자에게 문을 활짝 열어준 셈이라는 말을 명심하라고. -427쪽

언젠가는 세상이 이 '역사피클'을 맛보는 날이 올 것이다. 맛이 너무 강해서 어떤 사람들의 입맛에는 안 맞을지도 모른다. 냄새가 너무 독해서 눈물이 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것은 이 피클 속에 진실의 참맛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온갖 고난에도 불구하고 이 피클들은 결국 사랑의 산물이라고. -4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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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아이들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9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절판


그러나 이제 시간이(이제는 내가 쓸모없으므로)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곧 서른한 살이 된다. 재수가 좋으면. 즉 너무 혹사당해 부서져가는 이 몸뚱이가 그때까지 버텨주기만 한다면. 그러나 목숨을 건질 가망은 전혀 없다. 나에게 과연 천 일 밤하고도 일 일 밤 정도라도 남아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내 삶에 어떤 의미를-그렇다. 의미를-부여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셰에라자드보다 더 부지런히 서둘러야 한다. 솔직히 인정하겠다: 나는 그 무엇보다 허망한 죽음을 두려워한다.-26쪽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은 대부분 우리가 없는 곳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내게는 내가 알 리가 없는 일들을 알아내는 재간이 어디선가 생긴 모양이고, 그래서 아주 세부적인 내용까지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데, 이를테면 이른 아침의 대기 속에서 천천히 흘러내리는 듯한 그 안개도 그렇고…… 아무튼 나는 거미줄에 뒤덮인 채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좋았을 낡은 양철 트렁크를 열었을 때 발견하게 되는 몇몇 실마리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있다. -48~9쪽

내가 산산이 부서져간다는 사실을 믿어주기 바란다.
이 말은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감상적이고 알쏭달쏭하고 천박한 말재주로 동정을 얻으려는 수작도 아니다. 내 말은 다만 내 몸이 낡아빠진 항아리처럼 좍좍 갈라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하나밖에 없는, 그러가 별로 사랑스럽지 않은, 역사에 너무 많이 두들겨 맞고 아래위로 배수(排水) 작업에 시달리고 문짝에 찍혀 훼손되고 타구(唾具)에 맞아 머리통이 깨지는 등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이 가엾은 몸뚱이가 마침내 조각조각 쪼개지기 시작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문자 그대로 분해되는 중인데, 지금 당장은 천천히 진행되고 있지만 곧 가속화될 조짐도 보인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내가 언젠가는 (대략) 6억 3천만 개의 고만고만한 미립자로 분해되어 결국 이름도 없고 기억도 없는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내가 받아들였듯이) 여러분도 받아들여달라는 것뿐이다. 내가 다 잊어버리기 전에 이렇게 종이에 일일이 적어두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우리는 건망증이 심한 족속이니까).-86~7쪽

여러분은 경악했겠지만 나는 월급 이백 루피를 받는 하찮은 요리사 나부랭이가 아니라서 나만의 네온 여신상이 번갈아 비춰주는 노란색과 초록색 불빛 아래서 혼자 일하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만드는 각종 처트니와 카손디는 결국 야간의 글쓰기와도 관계가 있다. 낮에는 피클통 사이에서, 밤에는 이 종잇장 사이에서 나는 보존이라는 위대한 작업에 시간을 바친다. 그리하여 과일처럼 기억도 시간의 부패 작용을 이겨내게 된다. -88쪽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서로 스며들어야 하는 거야. 요리를 할 때 여러 가지 맛이 어우러지듯이. 예를 들자면 일제 루빈이 자살한 사건은 아담 할아버지의 가슴속에 스며들었고 할아버지가 하느님을 만날 때까지 그 속에 고스란히 고여 있었지." 나는 더욱더 진지하게 말을 잇는다. "마찬가지로 내 속에도 과거가 스며들었고…… 그래서 그 과거를 무시할 수 없으니까……"-89쪽

그녀는 날마다 아흐메드 시나이의 일부를 선택하고 완전히 익숙해질 때까지 그 부분만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마음속에 호감이 싹트고 그것은 곧 애정으로 발전했다가 마침내 사랑이 되었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지나치게 시끄러워 고막을 괴롭히고 걸핏하면 부르르 떨게 만드는 그의 목소리를 사랑하게 되었고, 아침마다 기분이 좋다가도 면도만 하고 나면 곧 엄격하고 퉁명스럽고 사무적이고 쌀쌀맞게 돌변해버리는 그의 습성을, 그리고 시선이 너무 싸늘하고 불분명하지만 그 속에 선량함이 깃들었다고 믿는 독수리눈을, 그리고 윗입술보다 아랫입술이 조금 앞으로 튀어나온 모습을, 그리고 그녀에게 굽 높은 신을 신지 말라고 할 만큼 작은 키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이런 생각을 하셨다. '놀랍구나, 한 남자에게 사랑할만한 부분이 백만 가지도 넘는 듯하니!'그러나 어머니는 낙담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 따지고 보면 그 누가 한 사람을 완벽하게 알 수 있으랴?'-151쪽

그러나 물론 우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상황이 또 달라진다. 만약 그렇다면 무사는-고령과 노예근성에도 불구하고-그야말로 정해진 시간이 될 때까지 조용히 째깍거리는 시한폭탄인 셈이다. 만약 그렇다면-낙관적으로 생각할 경우-모든 일이 미리 예정되었으니 우리는 저마다 의미 있는 존재인 셈이고, 따라서 우리가 한낱 우연의 산물에 불과하고 '존재이유' 따위는 없다는 끔찍한 생각은 안 해도 되니까 일제히 일어나 환호할 수도 있고, 반면에-비관적으로 생각할 경우-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든지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고 어차피 모든 일이 예정대로 펼쳐질 테니 일체의 사고 판단 행동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당장 포기해버릴 수도 있겠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낙관주의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운명 속에서, 아니면 혼돈 속에서? 어머니가 (이미 동네 사람들 모두가 들어버린) 그 소식을 전했을 때, "내가 그럴 거라고 했잖고, 다 시간 문제라고" 그렇게 대답했던 아버지는 그 순간 낙관론자였을까, 아니면 비관론자였을까? -173쪽

기껏해야 (처음에는) 마침표만 한 크기에 불과했던 것이 점점 커지면서 쉼표로, 낱말로, 문장으로, 문단으로, 장(章)으로 성장했고, 지금은 한층 더 복잡한 발달단계를 거치면서 급속히 팽창하여 한 권의 책으로-이를테면 백과사전으로-심지어 하나의 언어 전체라고 표현해도 될 만한 규모로 성장해가는 중이었는데……-219쪽

아무튼: 무릎과 코, 코와 무릎이 있었다. 사실 우리 모두의 꿈이었던 신생국 인도 전역에서 나처럼 부분적으로만 자기 부모의 자식인 아이들이 속속 태어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밤의 아이들은 시대의 아이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가 그들의 아버지였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특히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라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257~8쪽

"억지로 끌어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게 인생이야."-281쪽

모든 놀이에는 교훈이 따르는 법인데, 뱀과 사다리에는 다른 어떤 놀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교훈이 있다. 이 놀이는 사다리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로 그 너머에는 뱀이 기다리고 있으며 뱀 한 마리를 만날 때마다 곧 사다리가 보상해준다는 영원한 진리를 가르쳐준다. 그러나 이것은 당근과 채찍이라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다. 이 놀이는 모든 일에 수반되는 불변의 양면성, 즉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고 선이 있으면 악도 있는 이원성을 암시한다. 사다리의 든든한 합리성은 뱀의 신비로운 유원성과 균형을 이루고, 계단과 코브라의 대립 속에서 우리는 알파와 오메가,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대립관계의 은유를 발견한다. 자, 여기 메리와 무사의 전쟁이 있고, 무릎과 코의 대결이 있고…… 그러나 나는 아주 어렸을 때 벌써 이 놀이에 한 가지 중요한 요소, 즉 양면성이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앞으로 일어날 여러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때로는 사다리를 타고 미끄러질 수도 있고, 때로는 뱀의 독을 이겨내고 기어올라 승리를 거둘 수도 있고…… -305~6쪽

그러나 나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마음속에 작디작은 의혹의 씨앗이 싹텄다. 어머니에게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우리 엄마에게! 언제나 우리에게, "마음속에 비밀을 감춰두면 그게 점점 썩는단다. 그래서 말을 해버리지 않으면 배가 아프게 되는 거야!" 하고 말하던 엄마에게!-어렴풋한 생각이었다. 이 조그마한 불꽃은 내가 빨래통 속에서 겪게 되는 일 때문에 결국 산불로 번지고 만다(왜냐하면 이번에는 어머니가 나에게 증거를 제공했으니까).-342~3쪽

현실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과거로부터 멀어질수록 현실은 점점 더 구체화되고 그럴듯해지는 반면 현재에 접근할수록 오히려 점점 더 믿기 어려워지는 듯하다. -355쪽

아무튼 여자들이 나를 만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의 역할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여자들이 채워주었다면 좋았을 그곳을-일찍이 내가 외할아버지 아담 아지즈로부터 물려받은 가슴 한복판의 구멍을-너무 오랫동안 수많은 목소리들이 차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모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니까-내가 언제나 그들을 조금은 두려워했는지도 모르겠다.-409쪽

내 말을 잘 이해하기 바란다: 1947년 8월 15일 최초의 한 시간 동안-즉 열두시와 한시 사이에-갓 태어난 독립국 인도의 영토 안에서 정확히 천 명하고도 한 명의 아이가 탄생했다. 이 사실 자체는 (물론 그 숫자의 울림이 신기할 정도로 문학적이기는 하지만) 그리 특별하지도 않다. 그 시절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는 시간당 출생자 수가 사망자 수보다 평균 687명쯤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사건이 주목할 만한 이유는(주목할 만하다니! 이 얼마나 냉정한 표현인가!) 그 아이들의 특징 때문이었는데, 생물학적 돌연변이였는지 혹은 그 순간에 어떤 초자연적 존재가 개입했는지 혹은 쉽게 생각해서 순전히 우연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물론 '동시성'이라고 해도 이 정도 규모라면 C.G. 융 같은 사람도 깜짝 놀라겠지만) 그들 모두가 한 명도 빠짐없이 그야말로 기적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특색이나 재간이나 능력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416쪽

물론 현실이 비유적 내용을 내포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현실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천 명하고도 한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일찍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천 개하고도 한 개의 가능성이 나타났다가 천 개하고도 한 개의 막다른 길로 끝나버렸다. 한밤의 아이들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가령 그들은 신화가 지배하는 우리나라에서 시대에 역행하는 온갖 구태의연한 것들의 마지막 잔재였고, 따라서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는 20세기 경제의 맥락에서 그들의 실패는 오히려 아주 바람직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그들이야말로 자유의 희망이었는데 이제 영영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횡설수설하는 한낱 정신병자의 기상천외한 망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 처음부터 끝까지 병 따위는 없었다. -425~6쪽

나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기억 속의 진실이죠. 기억 속에는 기억만의 특별한 현실이 있으니까요. 기억은 선택하고 생략하고 변경하고 과장하고 축소하고 미화하고 헐뜯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현실을 창조하는데, 각각의 사건에 대해 나름대로 복합적이면서도 대체로 일관성이 있는 해석을 내리는 거죠. 하지만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기 의견보다 남의 의견을 더 신뢰하는 경우는 없어요. -4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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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1-10-30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가요?... ㅎㅎ 궁금하네요.

이매지 2011-10-30 12:34   좋아요 0 | URL
아직 100페이지 남짓 읽었을 뿐이지만 정신없이 빠져드네요^^
가넷님도 어여 읽어보세요!

2011-11-02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