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의 비유가 마음에 와닿는다
기진맥진 2025/06/09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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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릿지
- 문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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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 - 202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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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문학을 할 수 없어서 신변잡기나 감상평 등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문학이란 뭐랄까, 남이 1을 느낄 때 10을 느끼는 사람이 쓰는 것이랄까. 해본 적이 없는 나의 짐작은 그렇다. 다른 작가님들도 다 그렇겠지만 문경민 작가님의 작품들을 읽을 때 이분은 참 남다르게 느끼시는구나, 이렇게 느껴서 좋으실까 힘드실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힘드실 것도 같다. 주인공들도 대체로 아프고 힘들다. 하지만 결말이 늘 풍파가 휩쓸고 간 뒤에 남아있는 것들을 붙들고 한발 내딛는 식이어서 위로받는다. 참혹한 결말을 싫어하는 나는 이래서 이 작가님의 작품들을 좋아하나보다. 살펴보니 작가님의 책들을 반은 넘게 읽었네. 어제도 도서관에 책 반납하러 잠깐 들렀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 집어나왔다.
주인공들이 고교생들이니 청소년 소설로 봐도 좋겠다. 특별한 점은 첼로를 하는 예고생들이라는 점. 음악적 내용에 귀가 솔깃해지는 나는 이 소재 때문에라도 단번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이런 소재를 잡으셨지? 혹시 자녀분이 예고생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맨 뒤에 작가의 말에 보니 제자와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제자의 경험을 토대로 열심히 알아보신 게 아닐까 싶다.
초등학교 때 첼로를 잡고 사랑하게 된 인혜는 늦은 출발에도 불구하고 집중적인 연습과 레슨으로 예중에 들어갔고 일반적인 코스대로 예고까지 왔다. 얼핏 보기엔 누구나 부러워할 스펙을 쌓고 있는 중이지만 어디나 들여다보면 고통과 애환이 있다. 특히 예술이라는 진로에 들어선 경우에 천재가 아님 다음에는 (혹은 천재일지라도) 엄청난 내적 고통을 겪는 것 같다. 사랑하는 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경우다. 나는 예술에 근접해보지도 못했지만 어렴풋이는 알 것 같다. 다른 진로를 가면서 취미로 예술을 한다면 예술이 때로 위안이나 즐거움이 될 수 있겠지만 오직 그길을 가기로 작정했다면 예술인이 되기 위한 담금질을 견뎌야 한다. 하는 만큼 된다면 그나마 낫겠지만 그 세계가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슬럼프도 찾아오고, 특히 천재의 벽을 느낄 때의 좌절감.... 내가 평범한 능력치로 살아와서 그런지 이런 마음에는 특히 공감을 할 것 같다.
게다가 인혜는 레슨비와 악기비 등의 걱정 없이 마음껏 꿈을 펼칠 형편도 아니다. 부모님은 걱정 말라고 하지만 빠듯한 집안 형편을 인혜가 느끼지 못할 리 없다. 첫장부터 실기시험장에서 나온 인혜의 모습을 비춘다. 연주는 형편없었고 자괴감은 어깨를 짓누른다. 인혜의 마음이 지금 복잡하고 괴로운 특별한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인혜를 이해하고 함께 해주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서 중학교 시절 내내 인혜의 레슨 동행을 해주신 분이다. 고마운 할머니께 인혜는 마음 표현을 잘 못했고 그래서 지금은 죄책감에 빠져있다. 둘째는 그당시 레슨 선생님이자 악연이라 생각하는 엄정현 선생님이 실기시험장에 오셨다. 과거 그분의 레슨은 혹독했고 인연은 안좋게 끝났다. 다시 등장한 그분의 존재는 그러잖아도 너덜너덜해진 인혜의 마음을 더욱 짓누른다.
이런 내용 뿐이면 밋밋할 수 있는 이야기에 작가는 눈을 떼기 어려운 여러 가지 요소들을 넣었다. 인혜와 악연인 엄정현 선생님의 심사 부정에 대한 소문, 같은 학교 첼로 동기들간의 이야기, 그중 대호와 연수가 인혜도 모르게 인혜 할머니와 알고 지낸 사연, 거기에 덧붙여 엄정현 선생님까지 관련이 있는 사연들이 흡인력 있게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작가님의 작품에 의미있게 나오곤 하는 장애인의 존재도 있다. 할머니는 말년에 그 장애인의 활동지원사로 일하셨다. 예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장애인 활동지원사라는 직업을 올해는 복도에서 자주 만나뵙게 된다.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직업이다. 이 직업을 아름답게 그려주셔서 감사하고, 그런 분들이 많아지길 빌게 된다.
많은 오해와 미스테리가 풀리고, 인혜는 인혜대로, 친구들(연수와 대호)은 친구들대로 자기 앞의 삶을 씩씩하게 걸어나가려 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그리고 작품의 첫머리와 마무리에 등장하는 소재,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브릿지’의 의미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네 줄의 현을 떠받치고 굳건히 서 있는 작은 브릿지가 어쩐지 자신의 모습 같다. 곧 시작될 연주를 기다리다 인혜는 깨닫는다. 슬픔은 건너가는 것이라는 걸.
고요가 흐르듯 허물어지며
인혜가 예감한 정확한 그 순간에
첫 음이 시작되었다.』
이 책이 나에게 준 소득이 하나 있다. 첼로곡들을 찾아서 들어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 책에 나오는 「재클린의 눈물」. 들어보니 익숙한 선율이고 제목도 처음 듣지는 않는데, 이곡의 사연은 검색해보다 알게 되었다. 오펜바흐의 미발표곡이었다가 오랜 시간 후에 이 제목이 붙어 연주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제목의 재클린은 당대를 휩쓴 첼로 연주자였으나 온몸이 굳는 불치병으로 사랑하는 사람도 첼로도 떠나보내야 했다. 그 고통과 슬픔이 어떠했을지 감히 짐작하기도 어렵다. 이 곡과 함께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냐”고 그녀가 물었다는 글을 읽자니 그동안 전혀 몰랐던 사람의 삶의 고통의 끝자락이라도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지휘자인 그녀의 남편과 제작했던 음반을 듣는 것으로 남은 인생을 보냈다고 한다. (남편은 다른 사랑을 찾아 그녀의 곁을 떠남) 인생사 남을 쉽게 비난할 수는 없고, 하여간 나는 뒤늦게 알게된 「재클린의 눈물」에 젖어서 이 저녁을 보낸다.ㅠㅠ
또 한가지는 ‘반도네온’이라는 악기를 찾아보게 된 점인데, 이 악기도 유튜브에서 본 적은 있으나 제대로 찾아서 곡을 들어보기는 처음이다. (이 책에서 연수가 반도네온으로 연주한 ‘리베르탱고’를 찾아서 들어봄) 이런 식으로 뭔가 더 찾아보게 되는 책이 나는 좋다.
이렇게 하여 이 책을 읽고 내 마음에 가장 남은 사람은 비운의 첼리스트 재클린?(이 책에서는 곡목만 나올 뿐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데^^) 그렇기도 하지만 인혜와 친구들, 할머니, 레슨 선생님들, 그리고 부모님까지 모든 등장인물들에 이렇게 저렇게 마음이 간다. 그냥, 사는 거 다들 어렵구나. 서로 응원합시다, 이런 마음이다. 휘어진 브릿지처럼 애써 지탱하고 버티는 모든 인생들에 대한 격려. 이 책이 주고자 하는 것이 그런 것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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