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책이 있어 반짝이는
<토리지>
열세 살의 토리지는 이름을 부를 때 나는 소리에 걸맞게 푸딩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회색교복과 기숙사 넥타이는 언제나 정성스럽게 매듭지어져 있었으며 검정 구두도 언제나 윤이 났다. 반쯤 웃고 있는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한쪽으로 비딱하게 기울인 채 교실에 앉아있는, 좀 독톡한 면이 있는 아이였고, 따돌림을 당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이 짜증이 날 정도로 그 사실을 모르는 아이였다. 운동도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말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이상한 질문을 던져서 반응을 이끌어낸 것에 혼자 즐거워하는, 아무튼 여러모로 이상한 아이였다. 하지만 토리지는 정말로 순진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도 모두 인정하게 되었다.
윌트셔와 메이스 해밀턴, 그리고 애로스미스는 토리지와 나이만 같을 뿐 모든 면에서 달랐다. 세 명 모두 금발에 몸은 말랐고 이목구비는 또렷했다. 복장은 단정치 못하게 입었고 기숙사 넥타이도 되는대로, 구두의 끈도 마구잡이로 묶고 다녔다. 운동 경기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해력도 뛰어난, 어른들이 보면 호감을 나타내는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이 셋과 토리지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 지 생각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세 사람이 학창시절 저질렀던 행동으로 인해, 그리고 자신들의 모든 만행은 숨기면서... 토리지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능멸하고 경멸하면서 가족들끼리 모일 때마다 입방아를 찧어대고 모든 사람들이 만나보지도 못한 토리지를 싫은 사람으로 치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셋의 행동이 가족들과 자식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폭로되면서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토리지." 애로스미스가 말했다.
"가드 하비에 대한 네 생각은 옳았어, 애로스. 신부복을 입고 있었지만 가드 하비는 뼛속까지 게이였어. 올드 프로스티도 마찬가지였고."
"그만요!" 메이스해밀턴 부인이 소리쳤다. 그녀가 느끼던 당혹감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변하고 있었다. 메이스해밀턴 부인은 남편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은 당장 어떻게 좀 해 보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과 그의 두 친구는 가드 하비에 대한 토리지의 폭로에 잠깐 정신이 멍한 상태였다. 학창 시절의 기억이 단숨에 밀려와 그들을 덮쳤다. 기숙사, 식당, 흘끔거리던 눈과 편지, 경당 뒤에서 이루어지던 만남. 가드 하비가 동성애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터무니없는 농담으로 시작된 소문에 진실이 담겨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다닌 학교에 널리 퍼져 있던 위선과 통하는 면이 있었다.- P403
"사실 가드 하비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 거야. 나는 요즘사람들이 말하는 퀴어야." 토리지는 아이들을 보면서 설명했다. "나는 남자들하고 성행위를 한단다."
"그만해, 토리지!" 애로스미스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잘 익은 딸기색이 되어 있었고, 그의 번들거리는 눈은 분노로 흔들렸다.
"오늘 밤에 초대해 줘서 고마워, 애로스. 우리 모교는 나 같은 졸업생이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해야 돼."- P404
메이스해밀턴 부인과 윌트셔 부인 그리고 세 남자가 동시에 말하기 시작했다. 애로스미스 부인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떠들썩하게 취한 반면에 자기는 조용히 취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토리지가 한 이야기로 미루어 볼 때 어린 시절의 남편은 한때 그녀에게 보여 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성적 욕구를 지녔던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은 더 이상 그녀에게 성적 욕구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은 이제 자라서 어른이 되었을 남자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올드 프로스티는 <굿바이 미스터 칩스>의 주인공인미스터 칩스 같은 사람이었다고 남편은 여태껏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녀는 세인스버리 메이저나 가드 하비에 대해서는 들어 본적이 없었다.- P404
애로스미스의 큰아들 역시 당혹스러운 상황을 의식하고 있었다. 방금 들은 이야기와 같은 일이 흔하게 벌어지는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아이는 이제 막 밝혀진 사실을 쉽게 믿을 수 있었다. 아이는 일찍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을,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들이 학창 시절에 다•른 남자아이들과 열정적으로 사귀는 모습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이 같은 사실을 냉소적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대신 아이는 헉하고 숨을 내쉬고 싶었다. 이제 막 밝혀진 사실은 저녁 내내 아이의 얼굴에 번져 있던 미소를 단숨에 앗아갔다.- P406
"그래, 나는 그만 가는 게 좋겠어." 토리지가 말했다.
메이스해밀턴 부인이 조바심을 내면서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남편이 서둘러 토리지를 보내거나 적어도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메이스해밀턴은 잠자코 있었다. 메이스해밀턴부인은 직접 나서서 말할 작정으로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을 바꾸었다.- P407
"피셔는 목재 사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토리지가 말했다. "가엾은 피셔는 벌써 죽었거든요. 그래서 우리의 멍청한 교장이 그날 조회를 열었던 겁니다. 메이스해밀턴 부인."
"조회요?" 메이스해밀턴 부인은 사무적이면서도 분노가 어린 목소리로 말하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물었다.
"아무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조회가 열렸었죠. 
가엾은 피셔가 아버지농장의 헛간에서 목을 맸거든요." 토리지는 이렇게 말하더니 애로스미스를 돌아보았다. "사실 내가 이 소식을 들은 건 가드 하비한테서야. 가엾은 피셔는 편지를 남겼지만 부모님이 전해 주지 않으셨어. 그건 너한테 쓴 편지였어, 애로스미스."
애로스미스는 테이블에 기댄 채 여전히 서 
있었다. "편지라고? 나한테 쓴 편지?"
"또 편지를 썼던 거지. 피셔가 왜 자살한 것 같아, 애로스?"
토리지는 애로스미스에게 그리고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둘러앉은 모두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P407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