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에 시린 발보다 뜨거운 여름날 냉증으로 차가워진 발이 더 견디기 힘들다는 우리 언니의 말에 나는 미지근하게 아, 그렇구나. 해버린다. 내 손과 발은 사계절 내내 정상적으로 작동해서 공감을 못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대단히 거창한 대꾸를 바란 것도 아닐 텐데 나는 이렇게 사소한 말 한마디 못 건네며 공감을 못 해준다. 이 화상.
가만있자니 마음이 쓰여 뒤늦게나마 도톰한 기능성 양말 얘기를 슬쩍 꺼냈더니,
“그런 걸로 될 게 아니야!! 발 속이 찬거라구!!”
이 독사가 나에게 침을 쏘고 휑 가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나는 어떤 계기 때문에 사소한 통증이나 고통쯤은 참을만한 것으로 간주하는 습관이 생겼다.
소중했던 이가 버텨냈을 삶과 맞바꾼 고통을 떠올리면, 산 사람이 견뎌내지 못할 고통이나 통증은 없다고 생각하게 돼버렸다. 이렇게 한 가지만 생각하다 보면 정작 잃어가는 것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랬다.
이렇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심함을 보이고 사는 내가 주로 손길이 가는 책들은 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라니.
7편의 단편으로 엮인 박솔뫼 작가님의 <그럼 무얼 부르지>는 사람들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는 당신과 내가 각자 겪고 있는 통증과 잊지 말아야 할 아픔을 ‘저자만의 방식’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서로의 통증을 나눠보는 느낌이었다.
현재를 살지 못하는 기분으로 사는 사람에게
너와 나 다르지 않다고.
봄이 오면 겨울 내내 움츠리고 있던 몸도 기지개 한번 크게 켜서 콧바람 쐬러 여행도 가고 보고 싶은 영화 보러 극장에 갔다가 친구들 만나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는 사람들.
그래.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겠지.
출근해서 바닥을 쓸고 서빙을 하고 재떨이를 비우고, 손님들에게 나갈 오렌지와 사과를 깎으며 그들이 남긴 것들을 어떤 건 먹고 어떤 건 버리면서 치우는 와중에, 출근하기 전에는 뭘 하냐는 사장에게 할 말이 하나도 없는 ‘나’는 추운 겨울이든 따뜻한 봄이든 같다. 결국엔 모든 것이 같다.
(P. 9) 봄의 따뜻함이 마음을 녹이기 시작할 때쯤 마음속으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그것은 변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책 맨 처음에 수록된 「차가운 혀」의 등장인물인 ‘바’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나’는 재떨이를 비우고 안주로 나갈 오렌지와 사과를 깎는 자신의 모습 그 이상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나 보다.
자신과 사람들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벽이 주는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면서 살고 있다.
무섭지 않다.
그들이 본 세계를 보질 못해서 그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도 모르니까.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 무기력함이 느껴진다.
의미를 잃은 사람들처럼.
궂은비에 몸이 추~욱 늘어진 풀 같다.
어느 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고 볼거리도 없는 ‘해만’이라는 섬을 찾은 한 남자. 존속살인을 한 범죄자가 해만에 몸을 숨겼는데 한참 후에야 그를 찾을 수 있었다는 기사를 보고 이곳을 알았다고 한다. 찾는 사람만 찾는 곳인가 보다.
앞으로 몇 달 간 묵게 될 숙소에 이미 지내고 있던 사람들과의 대화가 이어지고 그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수도가 싫어요. 수도로 돌아가기 싫어요. 돈을 마련해 다시 해만으로 올 거에요.”
집값이 너무 비싸 내려온 사람들부터 나와는 다른 저편에서 지내는 사람들한테서 멀어진 마음에 이곳을 찾게 된 사람까지.
내가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소란스럽게 떠드는 무리로부터 피해 그들은 해만을 찾고 또다시 떠난다.
뚜렷하지 않은 무언가가 주는 불안함에 허우룩한 마음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을 계속 지켜보며, 남은 건 텅 비어 버린 자신의 강렬해짐을 발견하는 것 뿐이라고 하는 「해만」편은 공허한 마음으로 가득했다.
(P. 77) 나는 남은 날들을 생각했는데 잠시 아주 기쁘다가 말았다. 그러고는 해가 낮은 건물을 적시는 것처럼 쓸쓸함이 천천히 마음을 적셨다.
「해만의 지도」편에는 해만에서 만났던 인연으로 시간이 지나 또다시 ‘부산’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정신없이 보통의 직장인처럼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해만에 갔을 때 묵었던 숙소에서 만나 알게 된 ‘우석’을 만나기 위해 약간의 설렘을 가친 채,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하는 ‘나’가 등장한다.
우석과 카페에서 만나 자신이 그린 해만의 지도를 서로 들여다보는데 우석도 자신의 노트를 꺼내 또 하나의 지도를 만들어본다. 해만이라는 공통된 장소를 가지고 나의 기억과 그의 기억이 겹쳐진 지도.
그리고 그때 존속 살인을 하고 해만으로 숨었다는 범죄자 이야기가 다시 나온다. 그저 일상을 보내다가 흘러가듯이 툭 하고 나온 이야기였을 뿐이다.
우석은 해만 숙소를 찾아왔던 존속 살인범의 여동생 ‘서나’라는 여성을 떠올리며 ‘나’에게 말을 하다가 지도를 달라고 하더니 그 여동생과 대화를 나눈 장소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나’는 그 사건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아 온 남자가 20대가 되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그 기사를 본 계기로 해만을 찾은 거였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기사를 떠올려보고 헤집어 보아도 그에게 여동생은 없었다. 혹시 그녀는 자신의 아픔과 닮은 그를 생각하며 해만을 찾아왔던 걸까. ‘나’가 아픔을 품은 채 구석진 곳 해만을 찾은 사람들을 떠올리듯이.
(P. 179) 우리는 하루 종일 피곤하게 일을 하거나 돈을 벌거나 그렇게 살다가 밤에 집으로 돌아와 넷이서 꼭 껴안고 자는거. 그러면 다음 날도 행복해지고 우리는 힘들지 않을거야 계속계속. 우리는 부족한 것이 없을 거야. 계속 계속 아주 오래 행복할 거야.
교복입은 학생들을 감금한 노래방 사장이 등장했던 「안 해」 와 「그때 내가 뭐라고 했냐면」편은 왜 그래야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모호한 상황 속에서 강요받는 이해하기 어려움들을, 왜인지 납득이 가지 않게 들려준다. 처음엔 내 머릿속에 떠올려졌던 범죄들이 나오려나 했는데, 누구는 가둬놓고 누구는 노래를 시키는 거다. 다른 것도 곧잘 하는데 노래까지 잘 부르던 친구는 어딘가에 가둬놓고, 정작 노래를 듣고만 있던 나는 가두지 않고 노래를 시킨다.
노래방 사장이 진지하게 자신의 확고한 생각들을 이도 저도 못하는 학생들을 향해 지겹도록 주입한다.
(P. 46) 너희는 도무지 열심히라는 것을 모르니까 30분간 내 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에 대해 생각해. 열심히.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열심히.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아이는 순순히 받아들이고 어떤 아이는 기세 좋게 도망가려 애도 써본다.
도대체 열심히.열심히.열심히 잘하면 뭐가 있길래, 어떤 세상이 펼쳐지길래 그토록 열심히를 말하는 것인지.
갑갑했다.
친구와 놀러 간 노래방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노래방 사장이 감금을 시키더니 노래를 강요하고, 열심히 하라고 하고, 자기 생각을 주입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말이다.
살면서 말로써 표현이 안 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도 겪어봤고, 잘하고 싶지만 잘해도 뻔히 보이는 결과에 노력조차도 하기 싫었었고, 뭐든 잘하는 사람들과 비교되며 티도 안 나는 노력이라도 하면 열심히 좀 하라는 말도 들어봤기에 분노가 치밀고 억울하면서도, 한 학생의 노래방 사장을 향한 외침은 어딘가 후련하기도 했다. 그렇게 강요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써 보여주시든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P. 53) 뭐 양보해서 열심히가 중요하다고 쳐도 정말로 열심히의 세계가 있겠어? 있다 해도 그게 튼튼해? (중략) 자기의 몸을 부수고 세상에 던져질 만큼 튼튼해?
(P. 62) 내가 몰라서 안 한 게 아니야.
이 책의 표제작인 「그럼 무얼 부르지」에서는 1980년 5월의 광주를 떠올릴 때의 저자의 심경을 등장인물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었다.
(P. 134) 광주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지? 제주도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죽었지?
버클리 대학 근처 카페와 교토의 시조역 근처 바.
이 의외의 장소에서 30여 년 전 자신이 태어난 곳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듣게 된 ‘나’는 자신이 사는 광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 그날의 광주를 듣게 된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이야기.
모든 것이 다 오래되었는데도 정리는 되지 않은 듯한, 그래서 그때의 사람들이 아직도 잘 보이는 곳.
아니다. 잘 보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 역시도 5.18을 겪은 세대도 아니고 주변에 물어보면 생생하게 들려줄 사람들도 마땅치가 않다.
내가 눈으로 보고 겪지 못해서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저 그때의 분위기를 더듬거려보듯 책과 영상을 볼 뿐이다.
(P. 146) 나는 거기 서 있는 사람은 아니고 거기 서 있는 건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손가락으로 광주가 어디 있는지 짚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단지 손바닥을 허공에 내미는 사람이었다.
이 책에 마지막으로 수록된 「안나의 테이블」은 그동안의 내가 바라봤던 세상과 사물, 인간을 향한 시선에서 탈피하여 완벽히 새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봐야 했다.
짐작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야기들의 이어짐이 기존의 상식들로 차 있는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의 입장이 된 기분이다.
글쎄, 어떤 의도나 생각인 것인지 다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거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다 보면, 그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아픔과 통증이 더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 부분들이 더 잘 보이기 시작한다. ‘모두 다 함께’ 이야기하고 더 많은 답을 찾고 싶어한다는 마음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P. 197)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묻는다. 한 10초쯤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리던 단장은 미소를 띠며 아름다운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것들. 환하고 반짝이는 것들.
박솔뫼 작가님 책은 장면 장면을 내가 이어붙여 보는 재미가 있다. 물론 그 재미를 느끼기까지의 과정은 썩 즐겁지 않을 수도.
저번 <미래 산책 연습>을 너무 잘 읽었고, 더 만나고 싶은 생각에 그녀의 첫 소설집을 선택했다. 독특한 문장을 다시 만나니 아주 반가웠다.
아, 물론 이제는 독특하다는 느낌보다는 익숙함으로 다가온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 같다.
<미래 산책 연습>과 지금 이 책까지 고작 두 편만 읽은 건데 왜 이리 친근하게 느껴지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친해지려고 무지 노력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 읽을 때는 물음표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나름 오기가 생겨서 난 절대 이 책을 덮어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마음으로 눈을 치켜뜨고 바라보기도 했었다.
끄트머리 먼지와도 같은 내가, 이제는 낯설게만 느꼈던 그녀만의 문장에 반가움부터 느껴지게 되어버렸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나 잊히고 있는,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이나 사람의 대해서 들여다봐 주고 끄집어내 주며 들려주는 그 마음. ‘진심’이 담긴 그 마음이 와 닿기 때문에 손길이 간다.
이렇게나 많은 책이 쏟아지고 있음에도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고른다는 것은 나에게 와 닿음이 확실히 있었다는 거다.
무더위 속에서도 냉증으로 차가워진 발 때문에 곤욕스러운 내 언니의 사소한 문제조차도 공감해주지 못한 화상 덩어리일지라도 이렇게 계속해서 세상을 향해 외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꾸준히 이어나가길 바라는 소박한 혼자만의 다짐을 또 해본다.
얼굴도 모르는 이의 통증을 들여다보는데도 왠지 그들이 모두 아는 얼굴일 것 같은 느낌을 줬던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대체로 대화의 중심이 아니라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처럼 말이다.
대화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내 하루를 전부 차지하고 있지 않듯이.
요구하지 않은 누군가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들춰낸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자신의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을 누군가가 없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은 듯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이 나에게는 더 와 닿았던 것 같다.
뚜렷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에는 닿길 바라는 그 마음을 느끼며 읽었다.
궁금하다.
왜 단번에 알아볼 수 있게 쉽게 들려주는 게 아닐까?
우리가 더 깊숙이 곰곰이 들여다 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감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그녀만의 보호방식 인게 아닐까 라는 혼자만의 생각도 조심스레 해본다.
나의 애정 섞인 마음이 지나치게 확대해석을 하고 이 책에 살을 입히는 모습으로 비치게 함으로 반감을 느끼게 하면 어쩌지?라는 염려스러운 마음도 한편에 들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내가 느낀 게 그러하니 말이다.
이 다음으로 <우리의 사람들>을 읽어 볼 생각이다.
지금처럼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궁금해하면서 들어주고, 들려주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담은 책으로 또 만나고 싶다.
그냥 같이 있어주는 느낌만으로 따뜻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으니까.
(P. 204) 나는 시간이 아주 빠르게 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뭔가 달라져 있겠지. 지금 같은 불안하고 슬프고 답답한 날이 아니라 방금 전 꿈처럼 한가하고 평화롭고 무얼 먹지 무얼 보지 생각하며 헐렁헐렁 걸어 다니는 날들이 먼 미래에는 있을 것이다. 얼른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간아 얼른 가 하고 바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