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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쥐님의 서재
  •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 조승리
  • 15,120원 (10%840)
  • 2024-03-29
  • : 37,320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이성이 아니라 다분히 감정에 의해 초래될 때가 많다. 이성적으로는 그들에 대한 편견을 갖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수백 번 생각할 수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그냥 싫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나는 그 시발점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분리라고 본다. 어렸을 때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섞임이 자연스러웠더라면 어른이 된 후에도 그런 습성이 지속될 확률은 상당히 높다.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의 노출이 극도로 제한되면 될수록 그들에 대한 차별이나 분리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낯선 사람에 대한 회피나 소외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성에 의해 해결될 문제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스물세 살, 나는 결국 꿈을 이루었는데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 엄마는 갑자기 쓰러져 열흘간 중환자실에 혼수상태로 누워 있다 돌아가셨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열흘간 중환자실 앞을 지키며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신께 기도했다. 부디 엄마를 살려달라고. 의사가 엄마의 머리맡에서 사망선고를 내릴 때 나는 더이상 내 인생에서 신을 믿는 일은 없을 거라 결심했다. 내 남은 시력은 겨우 엄마의 형상만을 감지했다. 나는 손을 뻗어 엄마를 만졌다. 손끝으로 영혼이 사라진 차가운 살결을 더듬어보았다. 단 하루라도 이 사람과 끌어안고 잠들고 싶었다."  (p.102~p.103)


조승리의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를 읽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화가 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시도 때도 없이 치솟는다. 그것은 다수의 비장애인 속에서 살아가는 장애인의 비애인 동시에 공평하지 못한 신의 손길 때문이기도 하다. 15세에 시력을 잃고 시각장애인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가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직업인 마사지사를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 그리고 어머니가 있는 고향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와 함께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써내려 간 이 책은 때로는 읽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고, 때로는 화를 돋우기도 한다.


"출산 당시 생활고에 시달렸던 엄마는 나를 보육원에 맡기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엄마는 하루만 더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싶었다. 다음날 또 하루만 더.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보육원에 보낼 생각이 점차 사그라졌다. 그렇게 60일이 지났다. 나는 엄마의 눈물을 먹고 자랐다. 내 어머니도 가슴이 내려앉을 것처럼 사랑에 빠져버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를 지켜냈다. 그리고 장애를 판정받은 날, 엄마는 너를 낳지 말았어야 했다고 가슴을 쥐어짜며 통곡했다."  (p.227)


나는 사실 작가의 이름만 들었을 때는 작가가 남자인 줄 알았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한 번 읽어볼 만한 괜찮은 책이라는 평을 종종 들었지만, 남성 시각장애인이 마사지사로 일하면서 경험하고 깨달았던 것들을 그저 그렇게 엮은 책이겠지, 하는 지레짐작으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었다. 계속되는 권유에 어쩔 수 없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나는 사실 다른 무엇보다도 작가가 여성이라는 데서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 책의 내용만 좋으면 됐지 작가의 성별이 뭐 그리 중요할까 싶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의 선입견이겠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시각장애가 있는 여성이 마사지사라는 자신의 직업을 당당히 드러내면서 자신의 애환을 글로 쓴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라고 믿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환히 웃으며 시술이 끝난 노인을 배웅했다. 뉴스에서는 늘어난 핼러윈 희생자들을 보도했다. 나는 어제의 그녀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내 기준으로 당신을 판단하고 한심하게 여겼습니다. 미안합니다. 진실로 반성합니다.' 나는 내가 겪은 고통을, 희생을, 인내를, 모두가 겪길 바라는 졸렬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간절히 바란다. 밤새워 놀다 지친 그녀가 늦잠을 실컷 자고 일어나는 일요일이 되었기를."  (p.193)


모든 게 평안할 듯 보이는 우리네 삶은 지랄맞아 보이는 순간들과 이따금 그렇지 않은 순간들이 겹치고 겹쳐 잘 꾸며진 한 편의 드라마가 되어 추억이라는 책장 속으로 사라진다. 그 지랄맞았던 순간들이 쌓여 누군가의 책장 속에서는 축제가 되고, 또 누군가의 책장 속에서는 아득한 절망이 되기도 한다. '10대 때는 최고의 유작을 한 편 남기고 서른 살 전에 요절하는 게 꿈'이었으나 지금은 '무병장수하면서 누가 봐도 호상이라고 할 때까지 글을 계속 쓰는 게 꿈이자 목표'라는 작가의 희망은 짭조름한 눈물로 간을 맞춘 듯 독자들의 입맛에 착착 감긴다. 2024년 12월 3일, 뜬금없는 계엄으로 전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고, 근 6개월여의 시간 동안 불면의 밤을 보내도록 했던 그 지랄맞은 시간이 저물어가고 있다.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기를 나는 누구보다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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