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오타쿠에 대해 생각해 봤던 책. 무언가에 빠져 집착하고 열광하는 사람으로 과거에는 부정적으로 쓰였는데 최근에는 열중하는 사람으로 순화되어 '덕후'라는 말이 되었다. 말, 단어는 고정되지 않고 변한다. 팬심도 움직이고, 한순간에 뒤돌아 서기도 한다.
이 책은 쑨디라는 트위터 닉네임을 쓰는 저자가 오타쿠 자아, 아이돌 팬 자아, 트위터리안 자아, 인간으로서 쓴 인터넷, SNS, 케이팝의 어느 단면을 들여다보는 하이퍼리얼리즘 오타쿠 보고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본인이 덕후가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그 영역과 개념은 정확하지 않다. 따지고 보니 나도 영화 오타쿠였고 좋아하다 보니 공부하게 되고 파고 들어서 일까지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쑨디는 '진짜 오타쿠'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분석하는 마음이라 정의한다. 좋아하는 대상을 더 깊게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되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대상과 적극적으로 연결한다고 말이다. 빠른 소비와 휘발성이 강한 SNS의 활동은 필수다. 더 많은 정보를 양산하고 공유하고 소비한다. 팬심은 강한 애착을 형성하고 삶 깊숙이 들어간다.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의 발달은 이런 상황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이제는 누군가의 실수나 잘못이 실시간으로 전 세게에 공유되고, 순식간에 엄청난 분석과 비판이 쏟아진다. 이 과정에서 사실과 루머의 경계는 흐려지고 맥락은 사라지며 사건은 점점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가속 페달만 있고 브레이크는 없는 온라인 세계에서, 논란은 통제 불가능한 속도로 확산된다.
덕질. 기분 전환도 되고 몰입감도 있지만 너무 깊숙이 빠지면 곤란하다. 좋아하는 대상의 올바르지 못한 일을 알게 되었을 때 똑같은 마음일지는 알 수 없다. 영화 <성덕>은 정준영이란 인물을 좋아했던 감독 오세연의 탈덕기이자 트라우마 극복기다. 사랑했던 대상의 범죄를 알았을 때 무너지는 팬의 마음과 영화감독으로서의 이성적 자아, 그리고 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어머니라는 제3자의 시선이 교차된다.
저자 쑨디가 경험했던 다양한 문화 중에 눈길 가고 솔깃했던 건 영화나 드라마 덕질이다. 영화 <더 폴>을 인생 영화라 칭하는 이유를 이해한다. 타셈 싱의 인터뷰 내용 인용문을 첨부한다. <더 폴>은 지구의 아름다운 미장센을 담은 영화인데 제작기간이 28년 걸렸다. CG와 AI로 쓱쓱하면 되는 시대에 발품을 팔아 만든 이 아날로그적인 영화를 보지 않는 건 유죄다.
CG가 아무리 대단하고 스펙터클하다고 한들 결국 낡고 시대에 뒤처져 보이게 된다. 더 시간이 지나서는 레트로하고 쿨해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 낡는다. 진짜로 만든 것들은 절대 낡거나 뒤처지지 않는다. 영원히 남을 이야기라면
나는 그 어떤 가짜도 사용하지 않겠다.
쑨디는 디지털 시대에 AI가 아무리 뛰어나고, 알고리즘이 가르쳐 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못한 것이라 전망한다. 즉,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구린 점(?)이(저자의 말 이다) 용기를 준다고 설명한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실수해도 된다는 것, 용서와 관용의 가치가 새로운 것을 시도할 용기를 준다고 말이다.
한 번이라도 AI 영화를 본 적 있나. 진짜 배우가 아닌 가공의 인물이 만든 영화는 너무 완벽해서 불쾌하고, 피로하다. 물론 경기가 어렵고 물가가 높아서 전성기를 그리워하는 레트로가 인기인 이유도 있겠지만. 앞서 말한 인간적인 것들, 서툴러서 인간미 생기는 손편지, 손맛, 손길은 대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알고리즘의 시대에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은 어쩌면 더 어려워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무한한 정보와 선택지 속에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내게 의미 있는 것을 찾ㅈ아가는 과정은 현대인의 필수 과제가 되었다.
인터넷의 바다를 유영하다 보니 진짜 관계, 진짜 원하는 것,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뭔지 하는 게 진짜임을 알게 되었다는 말에 동의한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것보다 내 취향에 맞는 맛, 멋, 영화, 책, 음악을 즐기는 게 AI가 따라오지 못할 미래의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과거와 지금의 내가 쌓여 미래의 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까마득한 미래를 계획하기 보다, 지금 당장 실천하기 좋은 미래를 하나씩 도장깨다보면 성취감을 따라온다. 오타쿠의 이야기에서 자아 정체성과 미래에 관한 폭넓은 이야기까지. 트위터(X)에서 제한된 글자수 140자에 허덕이다. 아예 하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풀어 낸 저자가 부럽기도 하고 자극이 되기도 했다.